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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문학] 중국 당대 시인 비교
    『Report』{唐代 詩人 比較(韋應物 - 柳宗元)序論중국 역사 속의 한 시대를 풍미한 당(唐)이라는 한 왕조는 그 왕조의 찬란했던 흥망성쇠와 더불어 중국문학, 특히 시(詩)문학에 있어 뚜렷한 업적을 이루었다. 현재의 후세에 이르러 당대(唐代)에 지어진 당시(唐詩)는 비단 시의 시대적 구분을 떠나 중국문학의 정화(精華)로써 추앙받고 있는 만큼 당시라는 용어는 그 시대적 구분의 의미 이상을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대는 시의 수량, 유파(類派) 등에 있어 절정을 이루며 시의 다양한 이상향을 보여주었는데 본인은 이러한 당대 수많은 시인들과 유파들 중, 특히 자연시파(自然詩派)에 주목해 당대 중당(中唐) 때에 활약했던 위응물(韋應物)과 유종원(柳宗元), 이들 두 시인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우선 당대의 자연시파는 당대 이전 진(晋)의 도연명(陶淵明)이 꽃피운 전원시(田園詩) 그리고 송(宋)의 사령운(謝靈運)이 꽃피운 산수시(山水詩)로부터 그 문학적인 흐름과 성향을 되짚어볼 수 있다. 도연명과 사령운 이후 전원시와 산수시는 이후 궁체의 성행으로 인해 그 명맥이 끊어졌으나 당 제국의 흥성과 풍요로운 삶을 통해 우러난 낭만적인 문학풍조를 보인 당대 성당(盛唐) 때에 접어들면서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등에 의해 전원시와 산수시의 특징을 합친 자연시로 그 문학적인 발전을 이끌어냈다. 이후 자연시는 중당 때에 접어들면서 위응물, 유종원, 유장경(劉長卿), 유우석(劉禹錫) 등 중당 때 일어난 시의 개혁운동을 이끈 시인들에 의해 새로운 발전을 이루어낸다.本論Ⅰ. 위응물(韋應物)의 시위응물(737년 전후~?)은 당 경조부(京兆府) 만년현(萬年懸)의 두릉(杜陵) 사람으로 중당 때 대종(代宗) 대력(大曆) 연간(766~779)과 덕종(德宗) 정원(貞元) 연간(785~804)의 저명한 시인이었으며 강주자사(江州刺史), 소주자사(蘇州刺史) 등의 관직을 지낸 관리출신이었다. 위응물의 뚜렷한 관직과 시명에도 불구하고 역사서에는 그의 생애에 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현재 사부총간본(四部叢刊本) 과 사고전서본(四庫全書本) 등의 판본을 통해 그의 시 559수가 전해지고 있다.위응물은 명문집안의 자제로 태어난 탓에 일찍이 현종(玄宗) 때 삼위랑(三衛郞)을 지내면서 황제의 시위라는 직위를 믿고 방자하고 무례한 행동을 일삼았으나 안사의 난 이후 현종이 죽자 이전의 철없던 행동을 반성하며 독서와 시작(詩作)에 전념하였다.위응물이 문단에서 활동하던 대력(大曆), 정원(貞元) 시대는 당 왕조가 안사의 난으로 인해 쇠락의 길로 접어든 때이었으며 이러한 당의 쇠락과 맞물려 시인들 또한 더 이상 성당 때의 격정과 기상을 뿜어내지 못한 채 개인의 협소한 생활 반경 속의 소극적인 감상이나 운치만을 시로 표현했던 때이었다. 대력 연간에는 권력자에 의지해 시를 이록(利祿)의 수단으로 삼았던 이른바 대력십재자라 불리는 무리의 등장으로 시단에는 가송(歌頌)과 응수(應酬)가 성행했는데 이들은 음운의 조화나 대우의 정교함 그리고 사조의 화려함 등과 같은 시의 형식적인 기교만을 추구하다보니 개성적인 시를 짓지 못했다. 정원 연간에 접어들어 조정의 혼란과 환관의 전횡이 더욱 심해지자 일부 문인들이 위기의식 속에 우국의식과 국가기강의 확립을 염원하는 뜻을 담은 시를 지었으나 그들의 시풍 또한 대력 연간의 시풍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위응물은 바로 그러한 문학사조 속에서 자성일가(自成一家)의 독자적인 시적 성취를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그의 시사상적인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위응물은 전대의 시인들 중에서 도연명을 가장 흠모했다. 몇 차례나 벼슬에서 물러나 도연명처럼 전원생활을 했는데 그의 성품이 시류와 영합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연유도 있다. 이러한 영향 탓에 위응물의 시는 역대로 평담자연(平淡自然)한 풍격을 지녔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는 위응물의 시적 감정 및 시상의 전개 그리고 시어 방면에서 모두 확인되는 현상인데 위응물은 이백처럼 시에서 격정을 쏟아내지 않았으며 시상의 전개를 복잡다단하게 꾸미지도 않았으며 시어 또한 소박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언어를 주로 사용했다.위응물의 작품 중에는 등 도연명의 사상과 정조를 모방해 도연명의 시에 근사한 풍격을 이룬 작품이 적지 않아 명(明)의 이동양(李東陽)은 도연명의 시를 배우려면 먼저 위응물의 시를 배워라 라는 말을 할 정도이었다.이처럼 위응물은 전원산수를 노래하며 도연명의 전원시풍을 구현하고 바로 이전 세대인 왕유, 맹호연으로 대표되는 자연시파의 명맥을 이었다는 평을 받고 있지만 위응물의 시들이 모두 전원산수 속의 한적한 삶만 읊은 것은 아니다. 그의 시는 후대 사회시의 주창자인 백거이(白居易)가 위응물의 가행시는 풍유를 일으킴에 매우 접근했다 라고 평했듯이 백성의 질고를 고발하고 위정자의 잘못을 견책하는 작품들도 적지 않다. 위응물은 시를 통해 전란의 참상을 고발하고 귀족들의 호사로운 생활을 비판했으며 관리된 자의 소임을 강조하고 백성들이 과중한 징세에 시달림을 고발했다. 그러한 탓에 위응물의 시는 중당 때의 백거이, 원진(元 ) 등이 이끈 사회시의 선도 역할을 했다는 평을 받고는 한다.與友生野飮郊陶體 (벗들과 들판에서 술을 마시며 도연명의 시체를 모방해 짓다){ 註解 : [中國詩人總書] 唐代篇 韋應物 詩選 권호종 編著 민미디어 참조酒花林下 술병 들고 꽃나무 숲 아래 이르니前有千載墳 천년된 무덤이 앞에 있다於時不共酌 지금 함께 술잔 기울이지 못하니柰比泉下人 땅 속의 이 사람을 어찌 해야 하는가始自翫芳物 향기로운 사물 이제 겨우 즐기는가 했는데行當念 春 벌써 봄 가는 것 염려한다聊舒遠世踪 잠시 진세(塵世)를 벗어나는 발자취 펼치다가坐望還山雲 조용히 앉아 돌아가는 저녁 구름 바라본다且逐一歡笑 그러다가 마침내 한바탕 즐거운 웃음 터뜨리니焉知賤與貧 벼슬 낮고 돈 없음이 무슨 상관인가위응물은 확실히 도연명을 공부했다. 위응물의 시들 중 위 시를 비롯해, , 등의 시들을 보면 시상이나 시어 등에 있어 도연명의 시를 활용한 흔적이 뚜렷이 보이는데 확실히 도연명식의 생활태도를 표현했으며 도연명시의 특유의 평담한 풍격을 구현했다. 도연명은 라는 시에서 感彼柏下人, 安得不爲歡(무덤 아래 있는 죽은 저들은 왜 이를 즐기지 못하지?) 하고 그들을 살짝 비꼬면서 살아 있어 전원 속에 노닐 수 있음을 자랑한 적이 있는데 위응물은 바로 도연명의 그러한 시의(詩意)를 흉내 냈다.山耕 (산에서 농사짓는 노인)蕭蕭垂白髮 드문드문 성긴 백발 늘어트리고默默Ⅱ. 유종원(柳宗元)의 시유종원(773~819)은 당시 수도였던 장안(長安)에서 태어났으며 비교적 어린 나이인 21세에 진사과에 급제해 24세에 벼슬을 시작했다. 이후 진보적인 정치집단에 참여했는데 33세 되던 해에 이른바 영정혁신(永貞革新)을 꾀했던 소속 집단이 정치투쟁에서 실패해 몰락함에 따라 장안에서 멀리 떨어진 지금의 호남성의 영주(永州)로 유배되었다. 이때부터 유종원은 독서와 창작에 몰두해 수많은 시와 문장을 지었다. 그곳에서 10년 남짓한 유배생활 끝에 장안으로 다시 소환되었으나 곧바로 지금의 광서자치구의 유주(柳州)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4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유종원의 생애를 돌아오면 창작 생애의 대부분이 유배되던 때에 해당하는데 반대로 말하면 유종원의 지우이었던 한유(韓愈)의 지적대로 유종원이 정치적 좌절이 없이 유배되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러한 사상적 문학적 성취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유종원은 이백이나 두보 등의 시인보다 두 세대 이후 사람이었으므로 시의 예술성이 이미 극도로 발전했던 때에 살았는데 이는 완전한 예술미를 지닌 율시 등 전대 시인들의 유산을 수용할 수 있어 시작에 유리한 시대에서 창작활동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유종원이 유배되었던 곳은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어서 자연히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 산수를 유람하며 보낸 생활은 특히 빼어난 산수시를 창작하는데 매우 유리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문학의 창작에서 감정의 움직임이 중요하다고 할 때 오랜 유배생활에서 오는 비분, 절망, 고독 등의 정서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유종원의 창작활동에 있어 크나큰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유종원의 시는 모두 164수가 전해지는데 내용별로는 산수시와 생활시가 대부분이다. 유종원은 도연명, 사령운 그리고 당대의 왕유, 맹호연처럼 전원시 및 산수시의 시인들과 곧잘 비교되는데 아름답고 고요한 자연의 묘사 속에 귀양살이로 말미암은 시름과 불행에 대한 분개 등의 스스로의 감정을 이입한 것이 전대 시인들과 구별되는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농민들의 고통과 불만을 표출한 유종원의 시는 사회문제에 대해 초연하던 이전 자연시와 차별성을 지닌 중당 때의 자연시의 특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雨後曉行獨至愚溪北池 (비 내린 후 새벽에 혼자 우계(愚溪) 북지(北池)에 이르다){ 註解 : [中國詩人總書] 唐代篇 柳宗元 詩選 오수형 編著 민미디어 참조
    인문/어학| 2002.11.29| 6페이지| 1,000원| 조회(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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