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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와 문학]사람의 아들로 본 종교와 문학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통해서 본 문학속의 종교- 소설의 시대를 사는 인간의 신 -들어가며지금의 문학은 더 이상 과거에서처럼 신과 종교에 무조건적인 찬미만을 바치지는 않는다. 많은 예술들이 신과 그들의 예찬에 몰두하고 또 그것만이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시대는 지난 것이다. 그것은 신의, 아니 정확히는 종교의 타락에도 그 원인이 있겠지만 그보다는 시대의 변화가 더 큰 원인일 것이다. 이제 예술은, 그리고 문학은 신 이외에 얼마든지 더 많은 것들을 이야기 할 수 있고 또 그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집중 조명되는 것은 바로 인간이거나 인간에 대한 것들이다. 주인공은 이제 바야흐로 신이 아닌 주체로써의 인간 그 스스로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제 ‘신의 인간’이 되어 인간이 신을 노래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인간의 신’에 대하여 인간으로써 신을 이야기한다.여기서는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의 상황 설정아래 이문열의 소설 『사람의 아들』을 이야기 해 볼 것이다. 우선 인간이 신을 주관이 아닌 객관에서 이야기 하게 된 배경을 알아보고 다음 현재의 종교, 그러니까 여기서는 작품에서 이야기 되고 있는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의 사회학적인 현재 상황에 대해서, 작품에서 바라보는 시선에 맞추어 바라보고 마지막으로 이상의 상황들과 맞추어 보며 객관적 시야에서 문학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본 신과 종교가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를 직접 작품에 대입하여 알아볼 것이다.1. 소설의 시대를 사는 인간에게 있어서 신의 위치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소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소설의 시대 이전에는, 가장 먼저 서사시의 시대가 있었으며 다음으로 비극의 시대와 철학의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바로 소설의 시대인데, 각 시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다고 할 것이다. 서사시의 시대에서 인간은 신과 하나였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로써 스스로의 길을 생각할 필요가 없이 신이 정해준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에서 소설의 숙제는 바로 인간의 원초적 질문들을 찾는 것이라고. 이른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며, 왜 있는가와 같은 존재 본연의 질문들에 대한 해답 찾기가 바로 소설이 갖는 숙제인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해답이 없으며 따라서 소설은 결국 끝을 볼 수 없는 혹은 이미 끝을 본 문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 질문이 해답보다는 해답을 찾기까지의 과정이 더 중요하며 소설 역시도 그 답을 찾기보다는 그 답을 찾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문학이기 때문이다.길을 찾는 문학인 소설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길 찾기에 더 이상 신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인간의 안에 들어온 신은 이제 안내자가 아닌 위로자이며 안식처이다. 그리고 소설의 시대에서 문학은 그러한 역할 수행자로써의 신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신의 역할이 그렇게 한정 되어진 상황에서 그 역할 수행을 제대로 하고 있는 가에 대한 통찰인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의 눈으로만 보아지는 상황에서 신을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그것은 신이 인간의 주인으로써 예찬론적으로 그려진 과거와는 초라할 정도로 그 양상이 확연히 다르다. 이제 신은, 그리고 종교는 하나의 사회적 생산물로써 이야기되어 진다. 소설 『사람의 아들』에서와 같이, 아니 더 앞서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처럼 신은 인간이 냉소적으로 바라본 하나의 비판의 대상에 다름 아니다. 이제 신은 소설의 시대인 지금 날개를 잃고 떨어져 우리 옆에 존재하며 인간의 이기에 응답을 해야만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3. 『사람의 아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종교의 사회학적 역할과 지금의 기독교의 모습현재의 사회에 있어서 신은 그리고 종교는 하나의 윤리규범으로써 존재한다. 지금을 사는 인간 누구도 말씀으로 인한, 천지와 인간의 창조자로써의 신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며 그 상징에서 윤리적 장치를 읽어내는 것이 바른 종교의 해석일 것이다. 그러한 윤리적 장치로써의 신은 애초에 인간의 이기로 인해 탄생하였다. 인간은 필요에 게 다양한 신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는 만큼 그에 적당한 신들이 생겨나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그러한 점을 전혀 용납하지 않는다. 가장 배타적인 이 종교는 전 세계 어디를 봐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강하게 유일신을 주장하고 있다. 물론 종교라는 것이 원래 배타성을 갖기는 하지만 이 종교는 특히 그 점에 민감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아이러니한 잡식성이 존재하고 있다. 아하스 페르츠는 인간의 신으로써 그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는 자신의 신에게서 떠나 여행을 하며 진정한 인간들을 위한 신을 찾는다. 하지만 오히려 그 여행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자신의 원래 종교(기독교)가 갖고 있는 잡식성이었다. 그는 여행지에서 자신의 기독교의 원료들을 볼 수 있었다.원래 야훼는 엘 사따이 산에 은거하던 목양자의 신에 불과했다. 거기에 모세에 광기가 접한 호렙산의 영이 더해져 야훼는 곧 가나안 쟁취를 위한 무자비한 군신으로 변질되었다. 그뒤 엘리야와 호세아는 그에게 농경신의 권능을 부여했고, 아모스와 이사야를 통해 민족의 신에서 우주의 절대유일자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바벨론에서 페르샤인들의 사탄과 종말론을 도입함으로써 우리의 야훼는 완성되었다. 결국 야훼가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야훼를 만들었을 뿐이다. (중략)메소포타미아 신들의 사생아. 일찍이 가나안에 버려졌다가 이집트로 흘러들어가 아톤과 야합한 뒤 다시 돌아와서는 바알과 내연 관계를 맺음. 훗날 바벨론에 끌려가 아후라 마즈다의 씨를 받은 적도 있어 앞으로 어떤 혼혈의 자식을 낳을지 예측하기 어려운 논다니.유일신이라는 닫힌 개념의 자신의 종교는 오히려 아이러니 하게도 가장 열린 포괄성으로 다른 종교들을 흡수해 갔던 폭식가였던 것이다. 그리고 거대해 질대로 거대해진 이 괴물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숨기기라도 하려는 듯 타 종교에의 배척을 시작한다. 이제 종교는 인간의 구원 따위에는 아랑곳 없이 자신을 살찌우기에만 급급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때부접 확인 할 수 있듯 철저하게 객관적이다. 그는 아하스 페르츠나 민요섭의 입장에 동조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는 그저 그들의 이력을 서술할 뿐인 소설적 장치로써의 등장인물 이외에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없다.다음으로 선행신)의 의지의 대변자로써의 예수, 그리고 그와는 대립되는 후천적 신의 구현을 갈망하는 자로써 아하스 페르츠가 있다. 단순한 신의 육화이며 신의 아들임을 자처하는 예수와 사람의 아들임을 주장하며 인간의 영역에서 자신의 신을 구하는 아하스 페르츠는 여러 가지에서 대립하고 있다. 아하스 페르츠는 신의 의지에 거절하여 자신의, 인간의 길을 걷기 시작한 오디세우스를 최초의 현대인으로 보는 시각처럼 소설의 시대 이전에 소설의 인간적 사고를 한, 어쩌면 최초의 현대인일 것이다.네 번째로는 아하스 페르츠의 화신으로 존재하는 민요섭과 그의 추종자로써 사고의 주체가 아닌 행동의 주체로써의 조동팔이 있다. 민요섭은 아하스 페르츠와 상당부분 닮아 있다. 그것은 민요섭 스스로 자신을 아하스 페르츠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아하스 페르츠는 민요섭의 노트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이라는 점이다. 아하스 페르츠는 그 이야기 안에서 자신의 신을 따로 찾아다니게 되지만 그것은 결국 민요섭이 만들어낸 신과 다름 아니다. 결국 민요섭과 아하스 페르츠는 신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만들어낸 신의 창조자 이며 그들의 피조물은 실패작이었다. 그들의 신은 선행신의 무능력함에 반항하기 위한 인간을 위한 신이 처음의 목적이었으나 결국에는 단순한 선행신에 대한 한순간의 반항 정도로 그쳐버리고 만다.ㄴ. 신의 인간인가 인간의 신인가『사람의 아들』은 제목에서부터 이미 인간의 영역으로 내려온 신에 대하여 이야기 하겠다는 암시를 하고 있다. 신의 아들이 아닌 사람의 아들로써의 인간이 이제는 스스로 너무 거대해져 버린 신에게 고하는 항변인 것이다. 신의 인간이었던 과거의 인간이 이제는 인간의 신으로써 신을 바라보며 피조물이 아닌 피조물에게 바치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는 세 가지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종교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단순한 믿음에 의한 마음의 위안정도로 그 구원의 폭을 좁혀서는 안 된다. 현대에 있어 정치적 종교로써의 종교는 좀 더 다른 역할을 부여 받은 것이다. 인간이 굶주리지 않을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억압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애초에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신이었으므로 그러한 인간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신은 더 이상 추앙받지 못한다. 단순한 맹목적 믿음의 강요만으로는 더 이상 존재를 긍정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ㄷ. 신은 인간을 구원 할 수 있는가예수와 아하스 페르츠의 첫만남에서 아하스 페르츠는 그가 어릴 적 만났던 거짓 메시아에게 들었던 바대로 빵과 기적과 권세를 보여줄 것을 예수에게 요구하지만 예수는 그동안 아하스 페르츠가 항상 들어왔던 그리고 예상했던 대답만을 할 뿐이다. 육신의 살찌움보다는 영혼의 살찌움이 더 크기에 당장의 빵이 필요 없다는 예수의 말은 인간의 존재 자체를, 육신의 욕망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육화된 신인 예수의 있어서 그 말이 나온 순간 이미 모순이 되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이다.기적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는 아하스 페르츠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주를 시험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예상되어진 그 대답은 애초에 준비된 변명으로 마련되어진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잘 만들어진 핑계일 뿐이다. 보여주길 원할 때는 보여주지 않다가 그(예수)가 가끔씩 보여주는 기적들은 그의 말과는 반대로 그 기적에 혹해 신을 믿게 되는, 예수가 아하스 페르츠에게 대꾸했던 말을 그대로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권능을 행하는 것이 아닌 전도를 위해 권능을 행사하는 행위는 신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보냈다는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직무 태만과도 같다. 이에 대해 사람의 아들이 아닌 신의 인간임을 자처하는 예수가 인간의 구원에는 관심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고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에게 비웃는다. 자기가 보여주고 싶을 때 보여주는 기적은 차 없다.
    인문/어학| 2006.06.27| 8페이지| 1,000원| 조회(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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