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용(실명)은 북한을 탈출한 전 인민군 군관(장교)이다.나이는 서른 살, 고향은 평양시 모란봉 구역. 제도와 주의주장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독재를 숭배하는 제1선의 총알받이로 젊은 혈기를 키웠던 나다 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수기를 시작한다. 군대를 제대한지 얼마되지 않은 나로써는 눈길을 끄는 소제목들이 많았으며, 비록 그보다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군생활을 한 나지만 글을 읽으면서 일종의 유대감이라고나 할까 많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 느끼는 점도 남달랐으며, 진솔한 마음으로 필자가 피력한 이 글이 내가 북한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 것 같아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그리고 나는 군 생활 중 들은 적 있는 탈북한 병사의 강연을 잊지 못한다. 이 글을 읽어가며 그가 한 말들이 다시금 마음에 새겨짐을 느꼈다.군에서 실시하는 부대 집중 정신교육시간에 최전방에서 근무하는 병사에게 북한을 탈북한 병사의 강연시간이 있었다. 그는 사병으로서 군에서 느끼고 경험한 것들에 대해 강연을 했는데, 하루 20시간의 노동과 배고픔에서 오는 인간의 육체적 극한, 앞으로의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정신적 고통을 들었다. 현대적 건설 장비가 아니라 트럭 한 대도 지원되지 않는 대규모 건설 노동현장에 실오라기 하나의 무게도 줄이려 알몸으로 짐을 나른다며 그 고통들을 이야기 하던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북한 사병들 사이에서는 여기서 굶어 죽느니 차라리 죽을 힘으로 전쟁이나 해 보고 죽는게 낳다며 죽을 각오로 전쟁이나 해봤으면 하는 말들이 많다고 한다. 그에 반에 남한의 병사들은 어떠한가? 요즈음 남한에서는 신세대 장병 하면서 허약하고 나태하며 아직도 부모님의 울타리 안에서 용돈이나 바라는 군인들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국군과 북한군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그의 다음은 이러했다. 나태하고 허약한 국군은 죽을 힘을 다해 싸울 북한군과 상대도 되지 않는 다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그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했다.세상에서 가장 강한 군인은 죽을 각오를 하던 그에게는 뜻밖의 암초였지만 피할 길이 없었다. 학교 당국은 김정일의 감사문 을 받았지만, 졸업생들 1백 50명은 울며 겨자먹기로 군에 강제 징집당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북한 헌법에 군복무는 의무적 이라지만 이건 강제 의무병력제 였던 것이다.그의 아버지는 공군 부대에서 영향력 있는 중학시절의 동창생인 공군저격 제11여단장에게 찾아가 배치를 도와달라고 청하고, 그는 후에 제3비행사단장의 타자수로 배치 받게 된다. 당시 제11저격여단장은 1969년께에 한국에서 소란을 일으킨 북한 게릴라들의 청와대 습격사건 당시, 게릴라로 참가하였다가 배에 총상을 입고 터져나온 배를 움켜쥔 채 간신히 빠져나온 김도연이었다. 부대안의 소문은 그가 서울 버스 주차장에서 경찰 30명과 격투를 벌였는데도 지지 않아 김일성으로부터 일당백 상과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 받았다 한다.신병 훈련은 70명 정도가 교육을 받았는데, 습관되지 않은 규율 상태에 적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의 경험으로도 신병 훈련때가 육체적,정신적으로 제일 힘들었을 시기라 생각한다. 당시 17세였던 그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그 고초를 이해하고도 남을 듯 하다.기상 나팔소리와 함께 열리지 않는 눈을 비벼 열고 달리기와 격술을 하고나면 온 몸이 나른했으며 북한군에서는 태권도 훈련을 격술훈련 이라고 호칭하는데, 격술은 태권도 종목과는 좀 달리 눈알 빼기, 목울대 치기 등 반칙에 속하는 야만적인 동작이라 한다. 신병 훈련은 거의 고정 격식화되어 있는데 오전 정치상학(학습) 2시간, 대열훈련 2시간, 체육훈련 1시간이며 오후에는 또 대열훈련 1시간, 태권도훈련 2시간을 한다한다. 정치상학 시간에는 김일성과, 그 후계자 김정일 이가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분이시며, 그때 어린 그 당시에도 듣기 거북할 정도로 과장된 혁명 업적 들었다고 한다. 여기서 필자는 신병 훈련 중 잊혀지지 않는 일화를 하나 소개하는데 내가 군대에서 강연 때 들은 내용과 너무 흡사했다.북한 부대에서는 한달에 한번씩, 명절을 계기로 삼거나 아니면 다본성임을 체험했다. 반대로 후에 군복무 생활이 헐해지고 익숙하게 되어 편안해지니 편지도 하지 않게 됨을 느껴보았다. 라는 필자의 말에 너무도 공감이 갔다.식사는 주로 절인 무와 배추를 비롯한 절인 남새(채소)류들을 볶은 것에 옥수수나 통밀을 절반쯤 섞은 밥이 주식이었는데 항상 모자라는 남새로 인해 매끼 두세 가지 반찬을 한 젓가락씩 놓아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다. 식량은 하루 8백g 공급한다 하지만, 위의 군관들로부터 내려오며 층층이 떼어먹어 늄(알미늄) 밥식기가 항상 곯곤 하였다. 그래서 병사들에게 차려지는 밥이름도 각이하다.「폭탄 구덩이밥」 「골짜기 밥」 「수평치기 밥」 「묘지밥」 등이다. 「묘지밥」이 차려지면 군인들은 제일 좋아한다했다.부족되는 밥량으로, 군인들 속에서 별 해괴망칙한 일이 다 벌어졌다. 넓은 식당으로 들어갈 때 먼저 열을 서서 들어가는 군인들은 벗어든 모자 안에 차려놓은 밥그릇을 연속 엎어가지고 들어가 「곱배기」를 만들곤 했다.이 「탐오 현상」 때문에 식당 안은 없어진 밥그릇 찾기로 항상 소란하고 식당 직일관들은 두 눈을 부릅떴지만 「소란」은 그칠 사이 없었다. 배가 고프니 어린 신대원들은 「취침」 시간이 돌아오면 슬그머니 일어나 식당 주변을 맴돌곤 하였다. 남은 밥이 아니면 누룽지라도 얻어먹을까 해서였다. 군복무를 시작하면서 끝마칠 때까지 배고픔에 대한 고통은 없어지지 않는다라는 군에서의 강연자 생각이 나게했다.그리고 북한 군인들의 한국 군에 대한 인식이 재미있다. 모든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먼저 『미제 침략자들을 소탕하라』는 구호를 합창하고 훈련을 해야 하는데, 한국군에 대해서는 좀 아량적이고 관대하다 한다. 미국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허수아비」 군대라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 군인들은 미국에 대해서는 모두 반사적으로 악랄한 마음을 품고 끝까지 싸움해야 된다지만 한국군은 얼마든지 쉽게 「제낄 수」 있는 군으로 인식되어 있다했다. 이러한 획일적 교육이 군인들이 진행하는 학습 토론에 자주 나타난다. 수백명 군인들이 모인 토론회 마바닥을 보이게 되어 있다.그러면 근무 생활에서 빠져 그날은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있게 되어 있다. 남자 군인들은 아침 검사 때면 흘끗흘끗 곁눈질해보고 그런 여자들을 발견하는 것을 흥미로 여긴다.『저 계집애 또 고장났구나?』『나도 아래에서 뭘 좀 나왔으면 좋겠는데, 땅땅 마르기만 하니 야단 아니야!』말썽 많은 군인들은 여군인들의 월경날짜를 완전히 「통달」하고 있다고했다.필자의 타자수들은 부대 안의 각종 명령, 지시를 타자로 새기다 보니 남보다 부대 안의 비밀을 많이 알고 있는 덕에 항상 입을 다물도록 부대 보위 지도원들의 엄한 통제를 받게 되었다. 보위 지도원들의 요구에 의해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에 군복무간 몇 년이나 지장을 찍었다고 한다.비행사들의 비행 훈련이 있기 전에는 공군사령부 작전부에서 명령을 떨구었는데 별 세부사항이 다 있느데, 비행 훈련 전날에는 가족이 있는 비행사들이 집에 들어가 여편네와 성관계를 발생 못하게 대책하라는 내용까지 들어 있다한다. 이러때면 비행사 담당 간호사들은 비행사들의 집에 찾아가 마누라들에게 금지사항을 꼭꼭 알려주곤 하였다.필자가 근무한 황주 비행장은 50명 정도가 모두 월남 전쟁 당시 참가하여 공중전에서 실전경험을 풍부히 가지고 있는 비행사들에 북한의 다른 비행연대들에 없는 「공화국 영웅 12명」을 가지고 있는데. 김일성은 이 비행사들을 모두 황주비행장에 배치함으로써 평양 하늘은 끄떡없다고 호언장담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황주비행장은 북한 비행장의 모든 시범 훈련을 도맡아 놓고 진행하여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의 대표단이 오면 으레 시범을 진행하곤 하였는데 재밌는 것은 또 황주비행장 안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냥터이기도 하단다. 비행장 안에는 1천 마리 정도 되는 꿩과 50마리 가량의 사슴과 노루를 기르고 있는데, 부대 군인들도 모르게 김일성과 김정일은 비행장에 와서 하루 사냥을 즐기고 가곤 하여 비행장 안에는 그들의 별장까지 따로 지어놓고 있다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그의 군복무는 이 드넓은 비행장 안의 풀 다듬기와 리는 소문에 김정일은 소련을 비롯한 동구라파 사회주의 공산권 국가들이 허물어지는 경험을 교훈삼아 무력을 재편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하의 호위부대 역량이 일반 육군 병력보다 약하면 정권의 안보에 위태롭다는 것을 간파했다는 것이다.군사 쿠데타 발생을 전적으로 염두에 둔 것이다. 그래서 전의 호위 사령부를 군단무력 정도 되게 끌어올려 호위총국 사령부로 승격시키고, 무력부가 전에 가지고 있던 신형 탱크들을 빼앗아 평양시 주변 호위총국 부대들을 무장시켰다한다. 호위총국 사령부는 김정일 호위부대 명칭을 갖고, 군관들의 군복을 병사들이 모두 입고 다니며 으스댄다고 했는데 이런 다른 병종에 대한 열등의식이 북한 사회에 만연한 것 같다. 어떤 사회에서나 마찬가지로 자신의 우월을 과시하기는 인간의 본성인 듯 하다. 또 쿠데타 발생시 각 군종들의 협동작전을 막기 위해 국가안전 보위부 안에 전에 없던 보위사령부라는 뚱딴지 같은 기구와 8·15훈련소, 6·25훈련소, 4·25훈련소라는 기구를 새로 편성하여 한 개 군단 무력씩 만들어 놓았다한다(훈련소는 기계화 군단들이다). 그리고는 새로 편성한 이 모든 군 무력들이 인민무력부의 지시를 받지 않고 직접 자기의 지시를 받도록 별도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니 전에처럼 북한 인민무력부장이 군의 총책임자가 아니라 한 개 부서의 책임자처럼 되어버렸으며, 물론 모든 작전 지휘는 인민무력부 작전부에서 설계하지만 부대 출동시에는 최고사령부의 최고사령관 김정일의 지시가 있어야만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군력이 김정일에게로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필자 박태용은 1994년도 스물다섯 살 되던 해에 공군사령부 군관 단기 강습반에 가게 되어 1년후 소위 군사칭호를 받고 군관복을 입게된다. 부대에 온 그는 통신결속소 4중대 2소대장으로 배치받고, 3비행사단 관할 각 연대들과의 유선통신선 관리를 맡은 25명의 군인들을 지휘하는 임무를 받는다. 남한 군인 보다도 훨씬 오래 군생활을 하는 북한군은 간부로의 진급이 당연하다.1995년도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