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대가 필요로 했던 데카르트사상적 배경 - 중세의 종말.지성의 역사는 패러다임의 역사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서양 철학의 흐름은 개인의 안심입명의 성격을 띈 헬레니즘 시대를 넘어 중세시대 '신(神;기독교적 의미의)' 카테고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이는 인간의 무력함에 대한 자각이 철학의 눈을 인간에서 절대자로 옮겨가게 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세는 철학 자유성에 있어 절대적으로 취약한 시대임에 틀림없다. 인간은 '신'이라는 절대자에 대해 무조건적 믿음을 가져야 했으며, 더 이상 어떤 관련된 의문도 제기될 수 없었다. 그 신은 인간을 전적으로 초월한 것이므로, 인간은 다만 교회의 권위에 의존하여 그 권위가 말하는 바에 따라 신이 어떠한 것인가를 믿어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적 판단과 일말의 불안정성이 내재된 채로 스콜라 철학은 교부 철학 이상으로 교의의 학문적 체계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신앙과 이성은 오히려 분리의 폭을 넓혀가게 되고, 결국 중세의 철학은 자기 합리화의 시도를 접기에 이르게 된다.시대적 배경 - 혼란과 전쟁.데카르트는 혼란의 시대에 살았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지동설 주장 등으로 인해 그동안 믿어왔던 지구 중심적 우주관이 흔들리게 되었고,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시작으로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로 발견, 마젤란의 세계일주 등에 의해 '절대적인 것'에 대한 믿음은 사라져갔다. 종교개혁 때문에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의 종교 세력이 복잡한 갈등 속에서 30년 전쟁(1618∼48)을 치르면서 사람들은 고통을 겪게 되었다.데카르트 학문의 목표영역.그는 전쟁과 혼란의 상황이 학문의 그릇된 발전과 결부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이를 제거함으로써 종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그의 일생의 학문적 방향을 네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삶의 배경이 그에게 미친 영향을 잘 드러낸다고 생각된다.첫째, 스콜라 철학과는 달리 명증적인 진리에 의거하는 철학을 발견할 수 있다면 철학에 대한 싸움은 방지될 수 있을 것이다.둘째, 쓸데없는 말싸움 대신에 자연의 운행과정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면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될 것이고, 농업과 의학을 발달시킬 수 있을 것이다.셋째, 이들 발전은 하나의 보편적 방법을 발견함으로써 이룩 가능하다.넷째, 지배자 스스로가 가장 좋은 방법의 탁월성을 확신하고, 그것을 피지배자들에게 동의하도록 요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그가 생각하고 있던 목표는 철학에 절대로 확실한 길과 건물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총체적 학문의 틀을 새로 세우려는 시도를 한 것은 젊은 시절 느껴왔던 불확실성에 기인하기 때문에, 그는 "홀로 어두움 속을 거닐고 있는 사람처럼, 천천히 걷고 모든 사물들에 매우 조심하여, 아주 조금밖에 앞으로 나아가지 모사는 한이 있더라도, 적어도 넘어지는 것만은 피하려" 했다.[2] 데카르트적 관념혼란해진 사회 가운데, 여전히 고리타분한 억지 믿음이라고 느껴질 수밖에 없는 스콜라 학문적인 교육을 받았던 데카르트는 자신이 믿고 또한 사람들이 믿고 있어 왔던 것들에 의심을 품었다. 그가 남긴 저술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그의 연구도 늦은 나이인 32세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그의 교육 과정과 사회의 혼란성 가운데 스콜라적 철학을 대체하는 무언가에 대한 끊임없는 사회적 열망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의 학문적 방향을 잡아나갈 수 있게 되었다.절대적인 회의."나는 나도 모르게 흡사 깊은 소용돌이 속에 빠진 것 같았다. 나는 바닥을 딛고 일어설 수도, 수영을 하여 표면으로 떠오를 수도 없었다"그가 붙든 새로운 학문의 출발점은 '절대적인 회의'이다. 도대체 우리들이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당시에는 전혀 생각할 수도 없는 철학(지동설)을 학교에서 접했던 그는 모든 진리라 여겨지던 것들 또한 하나의 관습에 불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감각적 인식, 2+3=5라는 수학적 명제 마저도 그는 회의의 대상으로 삼는다. 꿈 속에 나타나는 '표상'을 본 일이 누구나 있고, 그것이 현실과 구분될만한 명확한 근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감각하는 모든 것들은 회의의 여지를 갖는다. 2+3=5라는 수학 명제 또한 마찬가지다. 어떤 악령이 우리의 사고에 끊임없이 '2+3=5'라는 속임을 가하고 있다는 가정을 통해 2+3=5라는 명제는 회의될 수 있다. 이렇듯 그는 자신의 사고를 회의의 절벽 끝으로 쉴새없이 밀어냈다. 외부 세계의 어떤 것도 신뢰할 수 없는 극단적 회의주의의 상황이었다.방법적 회의.위에서 밝힌 바대로 데카르트는 학문과 도덕에서 확실한 것으로 간주되어온 이론들 중 안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행동 방향의 결정에 필요한 기초적인 도움의 수단을 상실하게 되는데, 신뢰할 수 있는 새로운 정보의 추구는 충분한 시간과 사고의 과정을 필요로 하며, 이때에도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딜레마 상태에 이른다. '잠정적 도덕'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제시된 일종의 과도적 격률이다.이 도덕 격률은 대략 다음과 같다.첫째, 나는 내 나라의 법률 및 관습과 어린 시절에 가졌던 종교에 복종하고, 어떤 극단적인 행동원리도 표방하지 않을 것이다.둘째, 내가 어떤 의견에 대해 결정을 내렸을 때, 그것이 비록 나중에 의심스러운 것으로 나타날지라도 그 의견을 계속 견지할 것이다.셋째, 나는 내 욕망을 현실에 맞출 것이고, 실현되기 힘든 혹은 전혀 실현될 수 없는 욕망을 포기할 것이다.도덕적 양식은 이런 이행적인 격률들로 이루어져 있고, 방랑자는 새로운 방법의 도움으로 학적인 도덕학을 발견할 때까지는 이런 양식에 따라 생활해야 한다.이 방법은 『방법서설』에서 4개의 짧은 규칙들로 언급된다.1. "우리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명석 판명하게 인식한 것만을 참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ㅡ 명석함(klar)이란 어떤 인식이 '전체'로서 확고하게 윤곽지어지고 다른 모든 것과 뚜렷이 대조를 이룸을 의미하며, 판명함(deutlich)이란 인식의 모든 '부분'들이 확고하게 윤곽지어지고 상호 뚜렷이 대조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명석, 판명하게 인식되는 사태는 주체에 '명증성'을 부여하여 비로소 '주장을 피력'할만한 근거를 갖게 해준다.2. "모든 사태를 적절하게 많은 작은 부분으로 나누어야 한다."3. "이런 작은 부분들의 연관관계를 인식하거나 재구성해야 하고, 그 다음으로 가장 단순한 것들에서 출발해서 각각의 복잡한 것을 설명해야 한다." ㅡ 보다 덜 명석한 인식을 보다 더 명석하고 판명한 인식으로 전환하는 2번, 3번 규칙의 '분해와 정돈(devide et impera)' 과정은 첫째 규칙이 적용될 수 있는 상황을 산출하게끔 해주는 역할을 한다.4. "완벽한 열거와 전반적인 것마는 어떤 문제도 간과되지 않았음을 확실히 해준다." ㅡ 4번 규칙은 완벽성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다. 완벽성은 절대적일 수 있다.영혼, 신, 자연에 대한 발견.위의 방법적 회의에 따라 데카르트는 그 유명한 명제, "나는 사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철학의 제1원리를 이끌어낸다. 절대적 회의에서 밝힌 바 대로 외부 세계의 어떤 것도 신뢰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의심한다. 의심은 사유의 한 방식이며, 사유는 현존의 한 방식이다. 따라서 "나는 사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것은 이 형이상학에서 파기될 수 없는 제 1의 확실성이고, 다른 모든 확실성이 의존하게 될 출발점이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회의론적 입장도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고 하여 자신이 회의론적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극단의 회의를 통해 '절대 회의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자아의 현존이 내가 사유한다는 사실로부터 직접 확실한 것(직관적 확실성)인 반면에, 다음 단계는 이런 사유의 내용적인 분석에 의존하고, 그래서 둘째 규칙에 의존한다. 이 분석에서 나(데카르트)는 내 안에서 다른 많은 관념들과 더불어 가장 완전한 존재자로서 신의 관념을 발견한다.첫째, 신의 관념은 필연적으로 '현존'의 성질을 내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완전한 존재'의 관념이 아닐것이기 때문이다(존재론적 증명). 둘째, 결과는 원인보다 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단적으로 무한한 존재자의 관념은 유한한 내 지성의 산물일 수 없다. 신 관념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무한하고 완전한 존재자의 현존을 전제하며, 이 존재자의 상(像, Abbild)이 신의 관념인 것이다.신의 완전성으로부터 신은 기만자가 아니라는 결과가 나온다. 왜냐하면 기만자는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는 어떤 것을 성취하려고 하겠지만, 신에게는 아무것도 결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만하지 않는 신은 우리 정신이 어떤 사태를 명석 판명하게 인식할 때에 그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동의하는 성향을 갖도록 우리 정신을 창조했다. 이런 성향이 우리를 기만한다면, 신은 진실된 자일 수 없고, 따라서 완전한 자일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완전하다. 우리가 명석 판명하게 인식하는 사태를 오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주장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보증이 신의 완전성 속에 있는것이다. 우리 의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물체에 대한 판명한 지각은 들어오고 나가고 하기 때문에, 즉 우리 의지대로 지각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지각들은 우리로부터 산출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지각들은 3차원을 가진 연장된 물질을 명석하고 판명하게 우리에게 나타내주는데, 이 물질은 우리나 신과는 다른 것이며, 그러므로 물질이 현존한다는 것은 확실하다.(매개적 논증의 확실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