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의 유형중 전래동화의 특성과 문학적 가치에 대해 설명하시오목 차1. 동화의 개념과 의미2. "전래동화"와 "창작동화"3. 전래동화의 정의4. 전래동화를 보는 시각5. 전래동화의 특성6. 전래동화의 교육적 의의7. 전래동화의 문학적 가치▣ 참고문헌동화의 유형중 전래동화의 특성과 문학적 가치에 대해 설명하시오동화의 유형 중 전래동화의 특성과 문학적 가치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우선 전래동화의 큰 범주인 동화의 개념과 의미에 대해 우선 알아보고 유사한 범주인 창작동화에 대해 개념을 살펴본 후 이를 바탕으로 전래동화의 정의와 시각 및 특성, 그리고 문학적 가치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다.1. 동화의 개념과 의미"동화"의 개념에 관해 어느 동화연구가에 의한 한마디로 "동화"는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함으로써 아무런 이의 없이 수긍되어 통용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를 잘 뒷받침하고 있는 것으로 "동화" 분야에서 잘 알려진 동화연구자의 한 사람인 뤼뛰 Max Lathi 조차도 "동화"의 개념이라고 할지, 아니면 "동화"의 의미라고 할 수 있는 범주에서 "광의"로 "동화"는 "민담들 Volkserzhlungen의 테두리에서 주어지고 있는 동화적인 이야기들이다." 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 예들로서 그는 "단편소설적인 동화 novellenartige Mrchen", "전설적인 동화들 legendenartige Mr- chen", "거짓말의 동화 Lgenmrchen", 뿐만 아니고 "신화, 설화와 우화에 가까운 아니면 구속력 없이 풍부한 상상력으로 지어낸 이야기로부터 생성된 많은 이야기들"이다 이 뤼뛰의 "동화"에 대한 진술은 어떻게 보면 애매모호하기도 하나, 그러나 상당히 포괄적이다 라고 하겠다.뤼뛰가 진술하고 있는 광의의 "동화" 개념 내지 의미는 "동화"를 보다 넓은 카테고리에서 이해하도록 하고 있다고 하겠다.그러나 "동화"의 개념이, 앞서 언급되었듯이, 비록 한 두어 마디로 꼭 꼬집어 규격 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봐져야 하겠다.여기 뤼뛰의 학술서진 이야기, 특히 마술적인 세계로부터의 이야기, 현실생활의 제약들에 동여매 있지 않는 기적의 이야기, 이들 이야기들이 비록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지위나 신분의 상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만족스럽게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야기로 이해한다"는 볼테 폴리브카아 Bolte-Polivka의 진술이다.뿐만 아니고 톰슨 Stith Tompson에 의하면 "동화"의 개념의 정의는 현실과 참의 이면, 즉 비현실적인 세계 속에서 거짓말 같은 사건으로 가득 채우고 있는 이야기로 규정되고 있다. 그리고 베쉘스키 Wesselski에 따르면 기적과 마술을 수반하는 이야기의 예술형태를 "동화", 즉 "전래동화"의 주된 개념으로 서술하고 있다.이 외에 "동화"의 개념정의와 의미에 대한 수많은 동화연구가들의 시도적인 진술들이 주어지고 있는데, 몇몇 견해들을 더 기술해 본다면, 그 하나로 베렌트죤 Walter A. Berendsohn은 사랑의 역사, 즉 처음에는 장애물들이 이들 사랑의 쌍 앞에 전개되나 나중에는 이들 둘을 하나로 묶어놓게 하는 것을 "동화"의 기본 되는 개념규정의 요소로 보고 있다. 슈피스 K. v. Spiess와 무드라크 E. Mudrak에 의하면, "규칙적으로 나누어진 두 세계-이야기로, 내면세계와 외부세계에 오가며" 진행되는 것이 "동화"의 개념과 의미로, 막켄젠 Lutz Mackensen은 "동화"의 개념 "성애적인 내용의 핵심을 지닌 몇 마디로 된 기적이야기로서의 동화는 원시적인 소설"로 규정하고 있다.이처럼 뤼뛰의 "동화" 책자에서 개진되고 있는 몇몇들의 "동화" 개념 규정 시도들에서 두서넛을 제외하고는 공통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점은 "동화"에는 "마술, 기적 Zauber, Wunder"가 수반되고 있음을 뚜렷이 하고 있다. "기적"은 독일 낭만주의 시대의 "동화"에서 보여주는 특징이기도 하다. "동화"에는 "마술"과 "기적"외에 또한 "초자연적인 것 bernatrliches"도 "동화"의 개념을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중요요소이다.그러면 위에 서술된 "마술, 기hknig} 혹은 {철의 하인리히 Der eiserne Heinrich}이라고 불려지는 "전래동화"를 구체적인 예로 살펴보겠다. 이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 보면, 마귀의 요술에 의해 보기 흉측한 개구리로 변해 있었던 왕자는 샘물에 빠뜨려진 공주의 금구슬을 구해주고, 이에 대한 대가로 공주와 같은 위치에서 그녀와 동등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약속 받은 개구리 왕자는 이와는 다르게 괄시를 받고 멸시 당한다. 그녀와 같이 그녀의 침대에 잠을 자고 싶어 하는 개구리를 그녀는 저주와 함께 벽에 힘껏 내동이쳐진다. 그러나 개구리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기적적으로 마술로부터 풀려나고 "한 아름답고 정다운 눈을 지닌 왕자 ein Knigssohn mit schnen freundlichen Augen"로서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 후 개구리 왕자는 그녀의 아버지 뜻에 따라 사랑스런 부부가 된다.위에 약술된 그림형제의 한 "전래동화" {개구리왕자}처럼 마술에 걸려 개구리가 된 왕자는 "일상생활에로의 초자연적인 힘의 개입"으로 "말하는 그리고 인간자태를 하고 있는 동물들 또는 짐승의 모습이나 식물형태로의 마술에 걸린 인간들 등등. 자연법칙에 모순되는, 그리고 그 자체적으로 믿을 수 없는 현상들은 동화의 정신으로부터는 믿을 수 있게 되는, 즉 한 사고적인 불가사의 한 것이 다른 불가사의한 것을 있을 법하게 만듦으로써" 『개구리왕자』류의 "전래동화" 이야기는 여러 다른 지역의 "전래동화"들에서도 주어지고 있다고 하겠다.2. "전래동화"와 "창작동화"위에서 "동화", 즉 유럽 "전래동화"의 개념 내지 의미, 그리고 "동화"의 주요요소인 "마술, 기적"과 "초자연적인 것"들, 이들 요소들이 잘 찾아봐지는 {개구리왕자}에 대해 간략히 기술했다."전래동화"의 줄거리 진행에서 가장 보편적인 틀로 "곤경들 그리고 이의 극복 Schwierigkeiten und ihre Bewltigung, 싸움/승리 Kampf/Sieg, 과제/해결 Aufgabe/Lsung은 동화이야기의 핵심적 과정이다. 이 틀의리하는 "창작동화"에 대해 살펴보겠다."창작동화"는 "개인 문학"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구전적 전통 속에서 이어오면서 이 구전 적인 전통을 통하여 더불어 형성된" "전래동화"와는 달리한다. "창작동화는 개별적인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져서 정확히 정착되어져 오늘날 대부분 문어文語적으로 옛적 문화 속에서 암기되어 전해져 내려왔다.창작동화란 높은 예술적 성과물이고, 또한 한 단순한 상상의 창작물이라 하겠는데, 꽃들 짐승들 그리고 가구들로 하여금 이야기를 하게하고, 날아가게 하고 그리고 행동하게 하는 상상의 창작물"이다.그러나 "창작동화"의 저자는 "전래동화로부터 친숙해진 틀에 밀착할 수도 있겠고", 이와는 달리 "완전히 자유분방한 환상적인 기적의 이야기를 꾸며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창작동화"에서의 초자연적인 기이함의 상상이라든가 아니면 적어도 비현실적인 상상은 동화와 연결되어 있다"고 하겠다.뿐만 아니고 "창작동화"의 작가는, 폰 빌페르트 Gero von Wilpert에 따르면, 또한 그의 "창작동화"를 "개성의 창작물로서 전래동화의 서술방식과 모티브를 넘겨받아 의식적으로 예술의 이해로 동화를 구성하는데, 이때에 부분적으로나마 사고, 의도와 생각들의 우의적인 위장을 통해 무의식적인 환상유희를 깨뜨리기도 한다"는 것이다.3. 전래동화의 정의전래동화는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동화’의 한 갈래로서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신화·전설에서 발전하여 이루어진 동심이 기조가 된 이야기.전래동화는 특히 민담 가운데 많으며, 공상·서정·교양적인 요소가 이야기의 주축을 이룬다. 이러한 동화는 그 겨레의 생활·풍속·종교 등과도 깊은 관계가 있으며, 이야기를 좋아하는 어린이의 심정에 호소하여 전래동요와 같은 구비의 방법으로 전하여 내려왔다.인간과 비인간의 대화 및 비인간의 인간적 심리 등은 곧 전래동화의 세계로서, 인간적인 정서가 신이나 나무나 동물을 가리지 않고 작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동화는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구비동화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면서 창작동화가 발생하게 사 등이 포함되며 인간의 기본적 정서욕구를 충족시킨다.2) 심리학적 관점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정서적 갈등을 상징적으로 표현, 부모에 대한 오이디푸스적 사랑, 형제 자매간의 의식적 무의식적 사랑과 질투등 보편적인 감정을 상징화한다.5. 전래동화의 특성오늘날 갈등을 긍정적으로 해결하는 기본적인 능력의 부재로 인해 청소년 범죄나 비행의 증가로 유아기부터 자신의 감정의 통제는 물론 대인관계 기술을 익히는 유아 감성교육에 관심이 대두되고 있다. 전래동화는 가족 간의 갈등, 사람과 사람과의 생활이야기를 통해서, 사회적응 기술을 깨우쳐주며 전래동화에 포함된 가족 간의 사랑, 형제간의 우애, 대인관계 기술은 우리 민족 고유의 미풍양속으로 정체 성 확립뿐만 아니라 감성교육 매체로 매우 훌륭하다.또한 전래동화는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한국인의 정서와 감성을 내포한다. 가족 간의 사랑, 효도, 형제애 등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유아들이 이타적 행동을 간접 경험하게 한다. 민족 정서를 반영하고 유아의 발달에 맞게 적용되어, 유아의 미적정서와 올바른 인성 형성에 도움을 준다. 전래동화의 통합적 접근은 감성지능계발 교육의 한 부분으로 생활 속 이야기를 통해 교육적 효과를 높이고자 한다.이를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1) 줄거리 중심의 표현전래동화는 풍경?인물묘사가 희박하고, 상반적 성격의 인물이 등장하며, 권선징악의 결말로 교훈성 강하다.2) 환상적 요소전래동화에는 시공을 초월한 마법, 동물의 의인화, 소망의 현실화, 유아의 물활론적 사고와 일치, 절대자의 존재 등의 환상적 요소가 등장한다.3) 사건 중심의 구성전래동화는 산문적?시사적 문장, 글머리는 인물과 배경의 서술, 전래동화의 구전성 반영 등의 구성적 특징을 보인다.4) 적중성과 유머의 문학전래동화는 비현실적인 질서와 조화가 표현되며, 적중성으로 유아의 관심에 부합되고, 서민의 애환을 유머와 위트로 해소한다.6. 전래동화의 교육적 의의다음으로 전래동화의 교육적 의의에 대해 살펴보면 크게 문학적 가치, 오락적 가치,한다.
목 차서 론나치즘의 집권배경히틀러의 성장과정히틀러의 정치활동독재와 제 2차 세계대전나침즘의 사상유태인 학살결 론Ⅰ. 서 론쉰들러 리스트는 2차대전 당시 독일의 수용소에서 단지 유태인이라는 이유하나로 죽어가야만 했던 사람들을 구한 쉰들러에 과한 이야기이다. 히틀러로 대변되는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경제 상황이 극도로 나빠졌고, 국민들은 점차 정부와 현실에 대해서 불만을 가졌고, 이러한 현실에 대한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독일은 정부 내의 사회주의자와 유대인들에 의해 "등 뒤에서 칼에 찔렸다"는 악선전이 빠르게 확산되었고, 이러한 비난은 사실 무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애국자들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치유하는데 유용했다.1933년 당시 독일 전체 인구의 3%가 유태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 비율에 있어서는 40%가 넘는 비율을 유태인이 차지함으로써 당시 경제적 빈곤 처지에 있었던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반유태인에 대한 사상은 더욱더 고취되어 갔다. 이것을 교묘히 이용한 것이 히틀러였다.히틀러는 북방백인종, 즉 게르만족등 "아리아족"의 우수함을 강조하고 다른 민족은 저질 민족이기 때문에 억누르는 것은 당연하고 세계에서 최고의 민족은 게르만족이며,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우수한 민족이라 주장하는 유태인은 있을수 없다며, 다른 민족 특히 유태인에 대한 탄압을 하였다. 이러한 유태인의 탄압은 오랜기간 다른 나라에게 무시당해 온 독일민족의 열등감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하겠다. 이러한 배경으로 2차대전 당시 홀로코스트(대량 학살)을 당하게 된 유태인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는 이 영화 한편으로 표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음에서는 2차대전 당시 독일을 나치즘의 분위기로 이끌고 간 장본인인 히틀러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면서 나치즘이 무엇이고, 독일민족이 어떻게 그러한 대량 학살까지 저지르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다.Ⅱ. 나치즘의 집권배경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세르비아의 한 테러분자에 의해 저격을 당한 한 러 하숙집을 옮겨다녔다. 그러나 1911년 부모의 유산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숙모의 유산 대부분을 상속받게 되자 고아연금은 여동생에게 양보했다. 그는 술·담배·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고 생활은 검소했다.히틀러가 태어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절대주의 국가로서 당시 민족문제로 고심했다. 독일인 대귀족인합스부르크 왕가의 치하에서 권력을 독점했고, 관료·군인·대지주·자본가·교원·지식인의 대부분은 독일인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세력을 확장한 마자르인·체코슬로바키아인·폴란드인·남슬라브인은 민족자치와 생활향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에 거주하고 있던 독일인들 사이에서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특히 20세기초에는 독일인과 체코슬로바키아인 간에 격렬한 민족투쟁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회에서 히틀러는 열렬한 독일민족주의자·반유대주의자가 되었다. 아리아인의 민족적 우월감을 기초로 한 그의 반유대주의는 중소상공업자와 중소농민으로 구성된 독일인 중산계급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불만과 원한이 왜곡된 형태로 표출된 것이기도 했다. 독일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의 입장에서 히틀러는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이론에 반대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선전활동과 직장조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독신자 합숙소에서는 하층시민의 생활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는 독일민족지상주의자이며 반가톨릭 교회주의자인 쇠네르(1843~ 1921)파에 동조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와 이 제국 내에 있는 독일인 거주지역의 독일합병을 지지했다. 다시 말하면 이 시기에 이미 히틀러는 자신의 성격적 특성, 즉 원만한 대인관계의 실패, 기존 부르주아 사회와 비게르만인(특히 유대인)에 대한 혐오와 증오감, 성급하며 위협적인 격정, 가난과 실패에서 벗어나려는 열망 등을 보였다.Ⅳ. 히틀러의 정치활동1913년 5월 26일 히틀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에 입대하지 않기 위해 독일의 뮌헨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1914년 2월에 오스트리아로 소환되어 징집을 위한 신체검사를 받 첫 대상은 유대인 토지투기회사이다"라고 수정되었다. 이후 당명도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당(National 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 일명 나치당)으로 변경되었다. 독일노동당의 집회가 대규모화함에 따라 당에 대한 반대도 격렬해졌으므로 히틀러는 '집회장소방위반'(나중에 이것은 나치 돌격대로 강화되었음)을 설치하여 회장에서 방해행위를 하는 반대파를 폭력으로 축출했다. 히틀러는 초기의 집회에서 항상 유대인 배척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패전 후 독일공화국의 나약함과 내부분열 및 부패를 공격했다. 또한 독일의 강력한 국민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베르사유 조약의 불합리성과 잔혹성을 강조했다.당집회에서 히틀러는 기본주제별로 문제점을 정리하여 청중에게 호소함으로써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고 청중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히틀러가 연단 위에서 증오와 복수만을 외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대중이 지닌 고귀한 감정에 호소하여 전독일인의 결집, 국내외 압력으로부터 독일 국민의 해방,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통일 및 조화, 중산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생활안정 및 향상, 용병제도의 폐지와 국민군의 창설, 독일 국민의 강인함과 능력에 대한 신뢰, 자유라는 대이상에 대한 빛나는 희망 등을 역설했다. 1920년 3월 군에서 제대한 히틀러는 나치 운동에 전념했으며, 같은 해 여름에는 갈고리십자가 모양의 당기를 만들었다. 갈고리십자가의 적색은 사회주의적 이상을, 백색은 민족주의의 정신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아리아인의 승리를 의미했다.히틀러가 당의 독재자로 부상한 것은 1921년 7월 29일 나치당의 임시당대회에서였다. 그는 드렉슬러 등 옛 당간부들의 운동방침에 대한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여 드렉슬러를 명예회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이 당의 총서기가 됨으로써 당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당위원회를 무력화하고 당내 독재체제를 확립했다. 당시 히틀러는 정계와 재계의 유력자들과 교류하면서 자금을 조달했고 학생과 군부관계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드렉슬러파가 합법주의와 사회주의를 제창한 ·바덴 등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나치당은 점차 세력을 확장했고, 1926년 2월 당간부회의에서 히틀러는 북부 독일에서 경쟁조직을 이끌고 있던 G. 슈트라서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1926년 1월 히틀러는 친위대(Schutzstaffel)를 설립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돌격대의 재건을 완료했다. 이무렵 도시와 농촌에서 중산계급의 지지를 확보한 나치당은 의회를 통한 합법적인 활동에 의해 대중정당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으면 민주공화제를 전복할 생각이었다.1929년 7월에 시작되는 배상에 관한 영 안(Young Plan)에 반대하여 히틀러는 국가주의자인 알브레히트 후겐베르크와 협력했다. 후겐베르크의 국가당 조직과 그 기관지의 도움을 받은 히틀러는 최초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천부적인 선동가의 기질을 발휘하여 정치자금을 통제하고 있는 중공업계의 대자본가들에게 접근했으며, 그들을 이용하여 정부에 대항하는 강력한 우파노동조직을 설립하고자 했다. 또한 이들에게서 나온 정치자금으로 히틀러는 나치당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했고, 중하층과 실업자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도시와 농촌의 중산계층(특히 대정당이나 압력단체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없는 계층)·청년·부인들이 무리를 지어 나치당에 입당했는데 이것은 관료와 군부, 그리고 자본가에게 접근하려던 히틀러의 방침과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1930년 5월 사회주의적 요구를 정면에 내세우며 히틀러에 대항하던 슈트라서는 당에서 추방되었다.나치당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공격과 대중선동으로 1930년 9월 14일의 총선에서 600만 표 이상을 득표하면서 독일의 제2당으로 부상했다. 그런데 선거직전 라이프치히 최고법정에서는 군대에서 나치 세포를 조직하려다가 체포된 장교들의 군사재판이 있었다. 9월 13일 법정에 출두한 히틀러는 "나치는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을 계획이므로 폭력이 필요없다. 나치는 군부를 붕괴시킨다든가, 군부를 대신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다. 1936년 3월에는 로카르노 조약을 파기하고 라인란트 지역의 재무장을 강행했다. 이에 따라 독일에서 반히틀러 운동은 지지자를 잃었다. 1938년 3월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같은 해 9월 체코슬로바키아에 관한 뮌헨 협정으로 그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고, 그는 '불세출의 영웅', '일찍이 없었던 위인'으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히틀러의 외교적 성공의 배후에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영국·프랑스 등의 지지 또는 묵인이 작용하고 있었다.1937년 11월 5일 히틀러는 군부와 정부의 수뇌들을 모아 은밀히 전쟁의지를 표명했다. 1938년 2월 4일 이들 가운데 전쟁개시를 주저하는 자를 파면한 히틀러는 자신이 국방장관을 겸임하여 군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1939년 9월 그는 불시에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부의 작전에 깊숙이 개입했으며, 1940년 5월 대프랑스전에서 작전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1941년 히틀러가 보수파와 군수뇌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한 소련과의 전쟁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히틀러는 특히 1942년말 독일 제6군단이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에서 포위당했을 때 독일군의 후퇴를 금지시킴으로써 22만여 명의 독일군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게 했다.히틀러의 점령정책은 매우 가혹했으며, 포로와 점령지 주민, 그리고 유대인을 강제노동에 동원하거나 강제수용소로 이송·살해했다. 또한 독일군은 점령지에서 물자를 무자비하게 탈취했고, 슬라브 민족에게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반(反)나치 저항운동이 전유럽에 걸쳐 전개되었다. 그러나 독일 내에서 히틀러의 이민족 억압 및 착취 정책에 대한 비난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독일의 주요지배계급은 전쟁 말기까지 히틀러의 전쟁수행에 적극 협력했다. 더욱이 1944년 7월 20일 히틀러의 암살을 기도한 반란조직에 가담했던 많은 사람들은 극소수의 사회주의자와 종교인을 제외하고는 히틀러보다 더 반동적이어서 구체제로의 복귀를 희망했다. 즉 독일에서 히있었다.
대원군이 실권을 잡고 정체에 참여했던 시기는 내부적으로는 세도정치로 인한 삼정의 문란으로 국민생활이 도탄에 빠져있었고, 대외적으로는 서양세력들의 통상요구가 거세지고, 북학파에 이은 개화론자들에 의해 개화의 기운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는 시기이다.이러한 시기에 대원군의 대내적 정책은 충분히 시대적 상황에 역행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대원군의 정책 형성의 배경과 기본정책은 다음과 같다대원군은, 안으로는 외척세도에 의한 국정의 혼란과 삼정의 문란에 의한 민생의 파탄으로 민란이 빈발하였고, 밖으로는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쳐 근대 국가 체제를 갖춘 구미 세력이 중국과 일본의 문호를 개방시키고 조선으로 몰려오는 상황에서 그 정책을 입안하였다.따라서, 대원군의 기본 정책은 대내적으로는 외척세도를 제거하고 국가 기강을 바로잡으려는 왕권강화정책과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문호를 폐쇄하고,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려는 통상 수교의 거부로 집약된다.대원군의 대내적인 왕권강화정책은 다음과 같다.대원군은 외척 안동 김씨 세력을 제거하고, 당파를 초월하여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였다. 이 같은 인사 정책은 붕당 정치 또는 세도정치의 폐지책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지금까지 득세하고 있던 안동김씨 세력의 견제라는 측면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결국에는 양반 관료층의 세력을 약화시켜 전제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책이었다.대원군은 왕권의 강화를 위하여 정치 기구를 재정비하였다. 그는 그동안 문무고관의 합의체로서 주요 정무를 총괄하고 집권양반의 정치권력을 뒷받침하였던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의 기능을 부활시키고, 삼군부를 다시 설치하여 정치와 군사의 업무를 분리시켜 통치체제를 바로잡았다. 법치질서 확립의 일환으로서 대전회통 등 각종의 법전도 편찬하였다. 이또한 집권층 특히 왕권의 강화를 나타내는 구시대적인 것이었다.대원군은 문란해진 삼정을 바로잡는 데 힘썼다. 특히, 호포법의 실시로 종래 상민에게만 징수하던 군포를 양반에게도 균등하게 징수하였다. 이것은 양반층의 기를 꺾고, 왕권을 강화시키는 조치였다.한편, 가장 폐단이 심하였던 환곡제에 대신하여 실시한 사창제는 각 면의 큰 동리 중 인가가 밀집한 곳에 창고를 지어, 주민 스스로 환곡을 운영하게 한 제도였다.대원군은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전국 600여개의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이러한 시책은 정치적인 면에서 지배체제의 장애요인을 제거하고, 경제적으로 면세의 특권을 폐지함으로써 국가 수세를 늘리면서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것이었다.대원군은 임진왜란 때 불탄 뒤, 300여 년 방치된 경복궁을 재건하였다. 그것은 추락된 왕실의 존엄성을 과시하고, 국가 중흥의 기세를 올리려는 왕권의 상징으로 재건된 것이다. 그러나 원납전이라는 새로운 세금이 부과되고, 당백전이라는 고액의 화폐를 주조하여 강제로 통용시켜 물가의 급등을 초래하였다.이상에서 대원군의 대내정책에 대하여 알아보았다.대원군의 정책은 삼정의 물란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을 생각하고, 그 동안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아 왕권의 강화와 국가 지배질서의 확립이라는 측면으로 생각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왕조의 통치체제. 곧 봉건적 사회체제를 재정비, 강화하려 한 것에 불과하였다. 밖으로는 근대화된 서구열강의 계속되는 문호개방 요구에는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면서 그러한 분위기에 역행하는 정책 즉 왕권의 강화라는 정책으로 일관하여 당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는 평가를 받을수 있다.또한 경복궁의 중건에서 볼수 있듯이 너무 명분을 중시한 나머지 세도정치로 힘들어있던 백성들에게 다시 부담을 강요함으로서 국가 경제의 파탄을 다시 초래하게 되었다.이같은 일련의 사실들은 후에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한 대응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일본과의 최초의 근대적 조약의 불평등성이나, 그 후에도 계속되는 서양열강들의 경제적 침탈이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평가) ㉥ 대원군의 왕권 강화정책은 국가 기강을 바로잡아, 양반 지배층의 민중에 대한 부당한 억압과 수탈을 약화시켜 민중에게 일정한 이익을 준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왕권 강화 정책은 조선 왕조의 통치체제, 곧 봉건적 사회체제를 재정비, 강화하려 한 점에 그 한계성이 있다.
..PAGE:1우리의 친일파 청산과 그 문제점..PAGE:2정 일 권 (軍)일본 육사에서도 수석을 하여 만주 편입, 수석생에게주는 일본 군부대신의 군도(軍刀)를 상으로 받았다.일신의 출세와 장래를 보장받기 위해 일제에 투항하기를 종용1947 조선경비대 참모총장, 조선경비사관학교장1950 3군 총사령관 겸 육군 참모총장1960,61 주미대사1963 제 3공화국 외무부 장관1964 국무총리1973 제 9대 국회의장1976 국회의장 재선..PAGE:3박 정 희 (정 치)"대동아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1942 만주 신경군관학교 수석졸업 (오카모토 미노루)1944 일본 육사 졸업 (다가키 마사오)1946 조선 경비사관학교 졸업1961 5.16 군부 쿠데타 주도1963 제5대 대통령 당선..PAGE:4민 복 기 (법 조 계)일제 시대의 경성제국대학에서의 수학, 일제 고등문관시험 합격, 그리고 경성지방법원에서의 판사 생활일제하의 재판소가 일제의 '치안 유지'와 '질서 확립'의기능을 수행하는 보조 기관1950 대통령 비서관1951 법무부 차관1955 검찰총장1961 대법원 판사1980 국토통일원 고문 및 국정자문위원..PAGE:5유 광 렬 (언 론)언론보국회('본토결전과 국민의용대의 사명'등 강연)조선임전보국단의 활동1938 「매일신보」논설부장1945 조선언론보국회 이사해방 후 「조선일보」「자유신문」「동아일보」「한국일보」에서 정력적인 언론 활동1960 5대 국회의원1971 국사편찬위원회, 이후 문화훈장 대한민국장,방송문화상, 신문문화상 수상..PAGE:6이 병 도 (교 육)조선총독부 중추원 산하에 조직된 '조선사편수회'에서식민사가 이마니시의 수사관보1934 진단학회 창설, 대표1945 62 서울대 문리대 교수1955 82 국사편찬위원1960 문교부 장관충무공훈장, 문화훈장대한민국장, 학술원상, 국민훈장무궁화장, 인촌(仁村) 문화상, 5.16민족상 수상..PAGE:7노 기 남 (종교)적극적으로 신사 참배 강요매월 1일마다 소속 단원을 이끌고 남산의 조선신궁에 참배1930 사제 서품 받고 종현성당 보좌신부됨1942 경성교구장, 춘천교구장 서리1942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주교로 승품됨1962 대주교로 승품됨1967 은퇴 선언 후 나자로 마을로 이주..PAGE:8일본 정부와 통모하여 한국 병합에 적극 협력한 자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밀정 행위로 독립 운동을 방해한 자관리가 되었던 자로서 그 직위를 악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적 죄적이 현저한 자종교, 사회, 문화, 경제 기타 각 부문에 있어서 민족적인 정심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 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 데 협력하기 위하여 악질적인 반민족적 언론 저작 및 기타 방법으로서 지도한 자친 일 파 란 ?개인적으로 악질적인 행위로 일제에 아부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자..PAGE:9이완용 후손의 재산청구소송한일합방의 주역인 친일파 이완용의증손자가 땅찾기소송에서 또다시승 소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됐지만3년만에 폐지 그후 관련법 입법된적은 없음이 이유 - 대법원 -윤형씨가 땅찾기를 위해 제기한 소송은 88년부터모두 16건으로 현재 승소율과 패소율은 동률대한사격연맹사무국장등을 역임91년 영구귀국해 땅찾기에 골몰이완용 후손의 재판청구 소송..PAGE:10독립운동가 집안의 현재대한 민국 임시 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은 누구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독립 운동을 벌이기 위해 서간도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독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7대를 이어 내려온 안동의 종갓집을 팔았고, 이는 자신을 포함한 10명의 집안 사람들이 독립 유공자가 되는 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친일파 자손은 떵떵거리며 살아도 독립 운동가의 후손들은 가난을 면치 못한다. 라는 말처럼 그의 후손들 역시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자라야 하였다.
目 次Ⅰ. 서 론Ⅱ. 본 론1. 혁명의 원인에 대한 고찰2. 혁명 이전의 영국 의회의 발전3. 청교도 혁명4. 명예혁명5. 혁명의 의의Ⅲ. 결 론1. 서 론흔히 시민혁명이라고 하면, 영국의 시민혁명 즉,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 그리고 미국독립혁명, 프랑스 혁명을 들 수 있다. 그 중 서양의 역사에서 전형적이지는 않지만, 이전의 전제왕권을 제약하고, 민중에 의해 또는 의회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은 바로 영국의 시민혁명이 시초라고 할 수 있다.그래서 더욱더 서양의 역사에 있어 영국이라는 나라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다. 십자군 전쟁 이후 12,13세기에 들어오면서 상업의 발달과 더불어 중세적인 신중심의 사상으로부터 세속적인 물질에 대한 욕망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현세 지향적인 현실긍전의 사고 방식이 출현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인간의 의식구조를 변형시켰고, 지리상의 발견으로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면서 지금까지 종교적 사고 방식에 의존해 중세적 관념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비판정신을 낳게 되었고, 과학에 대한 믿음이 싹터 종교에 의존한 종래의 생활태도에 동요가 일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연정신을 갖게 되고, 군주의 절대권에 대한 도전과 특권계층에 대한 불만으로 사회개조를 요망하게 되었다. 이것에 선두에 선 나라가 영국이다. 영국은 다른 나라에 비하여 의회를 바탕으로 근대적 민주주의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발전하였다. 의회의 발전을 바탕으로 영국은 17세기 중엽 이후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런 영국은 정대주의 하에 정치적 권리를 주장한 독립 자영농민층과 상업자본가들에 의해 잔존하고 있던 봉건적 사회질서의 변혁을 이룬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영국의 시민혁명이다. 이 글에서는 영국의 시민혁명에 있어 혁명의 원인에 대한 이존 이론들을 통해 그 원인에 대하여 살펴보고, 다음으로 혁명 이전의 영국의 의회에 대해 살펴보고, 청교도 혁명의 발발 과정과 전개, 명예혁명과편으로 가게 되기도 하였다.세 번째로는 사회적, 경제적 분류방법이 있다. 어디까지나 전쟁은 지방과 도시의 다툼이라는 것이다. 즉 런던과 대규모 시장, 의류 제조업이 있는 곳들 그리고 거의 모든 항구 도시들(북부와 서부의 왕당파 지역에서도)은 의회에 속해있던 반면, 동앵그리아를 제외한 농촌 지역, 동부 미들랜드 등은 왕에 속해 있었다. 이미 이야기한바와 같이 이러한 논리는 어디까지나 계급분류에 의한 것이다. 어느 사회집단이나 전적으로 어느 한편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몇가 지 부분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귀족의 대부분과 상층 젠트리는 왕당파에 속해있었으며 반면에 중간 계급 중에서 우월한 입장에 있던 상인과 요맨등은 의회파에 기울어져 있었다.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분류하기 어려운 젠트리 계층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이 등장하여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다. 그것은 젠트리 계급 내에 양편의 경제적 차이가 존재했다는 것이다.이것은 이미 토의된 지역의 분류와는 다른 해석으로 아직까지 논의가 분분한 실정이다. 또 다른 이해하기 어려운 예외적인 주장은 보다 많은 왕당파들이 비교적 많은 빚에 의해서 곤경으로 내몰렸으며 재정상태가 나빴다는 것이다.네 번째로는 안(ins)"과 바깥(outs)", 궁정과 지방 사이의 대립에 의한 방법이 있다.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청교도 혁명은 관직 보유자들, 즉 왕실과 어떤 관련을 가지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이전의 왕조에서 은혜를 입은 사람들과 이러한 혜택에서 제외된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혁명의 공모이론과 긴밀히 연결된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주장에는 물론 수긍이 가는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특히 하층의 사람들이 어떻게 하여 그들이 원했던 대로 편을 갈라 기울어졌는지 석연치 않다. 의회파 사람들 중에도 위로는 왕실과 관련된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영국 북부와 서부의 소젠트리 중에도 왕당파에 속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다섯 번째로는 전쟁이 지방적이며 개인적 차원의 싸움으로 번져 정부나 제도가 부패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과 그 징후는 일반대중으로부터의 위신과 존경의 상실, 나아가 지도자들의 통치능력에 대한 신뢰감의 상실이다.1590년대에 국왕은 영국-스페인 전쟁의 자금이 부족했다. 그 결과 인플레이션으로 모든 공무원들의 고정 보수와 봉급이 실질 가치면에서 깎여졌고 관리들은 부패하고 갈수록 공공봉사는 형편없어지고 대중은 분노하게 되었다.다음은 자각적 정치세력으로서의 반대파가 등장한 것이다. 영국에 있어서 1500~1640년의 기간은 사회적으로 유동성이 심하였던 시기였다. 그러나 아무리 사회적 지위의 변동이 있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기존의 특권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재산과 지위의 차이는 여전하였으며 특권의 행사는 변함이 없었다. 청교도혁명 이전의 수 백년 동안 계급제도에 영향을 준 파괴적인 요소들은 두 가지였는데, 그 한 가지는 악성 인플레이션이었으며 다른 한 가지는 인구의 급증이었다. 결국 젠트리 계급은 스스로의 권리와 정치적 정책의 결정 과정에서 더 큰 몫을 요구하기 시작하였고 치안한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사람들은 지방 행정부에서 경험을 쌓고, 사회적 통제와 사회복지에 관한 법을 시행하라는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들이 자기들이 승인하지 않는 정부의 기능을 마비시킬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2. 혁명 이전의 영국 의회의 발전가. 영국의 의회의 기원영국은 1215년 존 왕의 대헌장을 통해 의회가 상당히 발전하였다. 그럼 오늘날과 같은 영국의 의회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Parliament 라 불리는 영국의 의회가 성립된 것은 13세기 후반 Edward 1세 때부터라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회 형태의 기원은 훨씬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는데 앵글로색슨 시대에서 ‘현인의회(Witenagomot)’라는 것이 있었으며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게르만 서민족의 민회의 전통도 고려된다. 하지만, ‘동의에 의한 통치(govermente by consent)’라는 영국 통치구조의 정통은 앵글로색슨 시대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이 는 국왕이 위임한 업무를 처리하는 것을 그 본연의 임무로 하였고 아무도 의회의목적이 국왕에 반대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왕권의우위에도 불구하고 왕과 산민들 사이의 알력이 의회내에서 나타났는데 그러한 대립관계들은 주로 국왕의 권한과 신민들의 자유의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초기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논쟁은 국제에 관한 논쟁이었다. 즉, 입법권이 의회와 국왕 양자중 누구에게 있느냐하는 문제였는데, 이 시기의 정부는 법률제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존 법률을 적용 또는 회피함으로써 이 논쟁에 대처하였다. 또 하나의 논쟁점은 ‘칙령(Edict)’을 만드는 국왕의 권한이었는데, stuart 왕조의 왕들 역시 Tudor 왕조의 왕들과 마찬가지로 칙령 만드는 권한을 주장하지 않았으나 절대주의 반대론자들은 국왕이 이 권한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도 Tudor 시대와 마찬가지로 국왕의 가장 큰 의회 소집동기는 재정적인 문제의 해결이었다. 그러나 스페인과의 전쟁이라는 상황하에서 Tudor 시기에는 비교적 국왕의 과세 승인 요구가 의히에 의해서 잘 받아들여졌으나 stuart 시기에는 전쟁이 끝나고 의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과세를 승인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띰에 따라 국왕의 승인 요구는 자주 거부당한다. 또한 Tudor 시기에 추밀원을 통해 의회의 의사 진행에 국왕이 개입하던 것과는 달리 stuart 시기에는 추밀원 의원의 활동이 상당히 저하된다. 이것은 유능하고 경험이 많은 추밀원 의원이 사라짐에 따라 큰 결점이 되었으므로 stuart 시대의 국왕들은 Tudor 시기처럼 의회를 조직적으로 우너용하려 하기보다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면서 억압적인 방법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의회 입장의 위기와 국왕의 정책에 대한 불만이 저항의식으로 증대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charles 시대인 1620년대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이루게 되고, 1629년부터 의회 없는 국민일인통치(Persona회(단기의회)를 다시 소집했으나 의회는 왕의 전비 경출에 불응하고 왕의 실정을 공격하자 3주만에 해산되었다가, 스코틀랜드군의 영국 침입 이후, 11월에 다시 의회(장기의회? long parliament,1640-1653)를 소집하였다. 그런데 의회의 다수가 청교도였기 때문에 오히려 왕의 측근을 탄핵, 투옥하고 절대주의 권력기관을 폐지하도록 왕에게 요구하면서, 1641년 ‘악정진정서(The grand Remonstrances)를 제출하여 찰스 1세의 개인통치를 거부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로드 대주교는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또한 이 기간에 strafford 의 수탈에 반대하여 시작된 봉기로, 국민군 지휘권이 문제가 되어 1642년 8월에 의회가 왕당파에 대항한 8년간의 내란이 발생했다. 이것이 청교도 혁명이다. 청교도 혁명의 직접원인은 결국 국왕의 절대권 행사에 대한 의회의 저항이라 할 수 있는데 재정 궁핍 해결을 위한 과세 문제와 청교도 탄압이 갈드의 원인이었다. 관습법을 무시한 불법적 과세 남용은 중산층 시민까지 자극하여 청교도와의 합동전선을 유발시켰던 것이다.다. 혁명의 전개혁명 초기에는 Prince Rupert 가 인솔하는 왕정군의 전력이 우세했지만 전쟁을 지속할 만한 재정이 조달되지 못했고 무기와 탄약의 보급이 어려워 그에 따라 군인급료가 중지되는 등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에 반해 의회군은 하원의원 Oliver Cromwell(1599-1658)이 이끄는 기병대인 철기군이 전세를 뒤집기 시작했고 무력한 의회군은 철기군을 중심으로 개편하여 2만에 이르는 신형군(new Model Army)으로 조직하여 왕당군과의 전투를 승리하여 내란을 끝마치게 되었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한 의회파는 분열되기 시작했다. 군대는 독립파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의회 세력은 장로파가 우세했고 그런 극한 대립의 중간에 수평파도 있었다. 장로파는 온건파로서 왕과 타협하기를 주장하였다. 여기에는 지주귀족과 대상인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생활 필수품에 소비세를 부과하고 스스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