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onio Gaudi* 안토니오 가우디의 역사1852년 6월 25일 카탈로니아의 레우스에서 출생.1883-1885 에르 카프릿쵸1883-1926 사그라다 파밀리아 속죄 성당(성 가족교회) 건축중1884-1887 핑카 구엘1886-1889 파라시오 구엘1887-1893 아스토르가 사교관1888-1890 테레사 학원1891-1892 카사 데 로스 보티네스1895 보데에가스 구엘1898-1900 카사 칼벳트1898-1916 콜로니아 구엘의 클립터1900-1909 베레스구아르드1900-1914 파르게 구엘1902-1914 마룔카 대성당의 수복1904-1906 카사 바트료1905-1910 카사 밀라1926 6월 1일 교통사고로 별세(정년 74세)바르셀로나에서 작고.*안토니오 가우디의 생애구리 세공업을 가업으로 하는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7세때 바르셀로나에 있는 건축 연구소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여 1878년에 졸업했다. 학창시절의 그는 정규적인 교육 과정에 대해 거의 매력을 느끼기 못했으며 L.아리 바르바의 철학 강의와 P.빌라 아이 폰타날의 미학 강의를 열심히 듣는 학생이었다. 밀라 아이 폰타날은 낭만적 시기동안 로마에서 젊은 시적을 보냈으며, 유럽의 여느 곳처럼 카탈로니아 역시 일종의 낭만적 운동이 있었다. 이러한 운동은 카탈란이란 지방의 언어의 시는 물론 이 지역의 중세 역사와 건축에 관계된 것이었다. 19세기 말을 향해 나아가던 이 운동으로부터 발전된 스페인식 근대주의는 가우디의 상상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로 하여금 수공예 기술에 대한 존경심과 중세 예술의 정직성을 깨우치게 해 주었고, 비올레 르 뒤크 중세 건축 개념으로부터 기계론적 논리를 얻게 해 주었고, 구조는 물론 세부 장식을 위한 영감의 한 근원으로서 자연을 생각하도록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러한 과정속에 수공예 운동에 관해 스스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구엘이란 직물 제조업자와 만나게 되어 그와 후원자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1878년 졸업 직후 바르셀로나에 있는 카사 비센트를 디자인하였다. 색 모자이크로 덮여져 있고, 비늘같은 지붕은 일종의 아르마딜로(동물)의 등처럼 보인다. 이런한 효과의 형태는 가우디 자신의 초기 작품 성향인 조각적 조형성과 이후의 독자적인 구조적 형태 사이에서 일어난 편형물이다. 이런 구조적 조형성은 바르셀로나 근교의 산타 콜로마드 세르벨로에 있는 '콜로니아 구엘 교회(1898~1914)' 디자인 시스템 중 가장 주된 것이다. 건물의 구조적 리브를 재현하는 근을 모델로 하여 계획된 작품으로. 각 부재가 전달해야 할 하중에 비례하여 리브들이 매달려 있다. 이러한 리브들에 의해 나타나는 선들로부터 생긴 현수선은 건물의 기둥 형상이 반전되어 마치 메달린 것처럼 보인다. 모든 트러스트들이 적당히 기울어진 대각(pillar)과 결합되어 있게 때문에, 어떠한 방법은 후에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회중석을 디자인할 때 다시 이용되었다.바르셀로나에 있는 '구엘공원(1900~14)'을 디자인할 때, 벽과 다리를 함께 지지할 수 있는 기울어진 형태의 지지물을 체계적으로 이용했다. 이 공원의 특이점은 추상적인 구성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데 좋은 앙상블을 이루는 세라믹과 유리 모자이크를 풍부하게 사용했다는 것이다.'카사 밀라(1905~10)'는 아마 그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작품일 것이다. 조형적으로 볼 때, 눈썹과 입술에 비교될 수 있는 물결치는 듯한 수평 외곽선의 리듬을 가진 유기적 형상으로, 하나의 커다란 돌 구조물처럼 구성되어있다. 그의 작품과 초현실주의와의 유사점은 바로 여기서 잘 나타나고 있다. 구조적인 면에서 그의 걸작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학교(1909)'이다. 이 건물은 피막형태의 얇은 벽돌 막으로 지붕과 벽체가 이루어져 있다.후기에 접어들면서, 직선은 인간에게 귀속되는 선이며, 곡선은 신에 귀속되는 선이라고 단언하고 나섰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 비록 그의 디자인이 결코 순수한 기하학적 성격을 띄지는 않았지만 - 쌍곡선과 포물선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우주적인 뜻이 함축된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들 형태들은 우리가 주변에 ~ )*가우디의 작품들@성가족교회'각'자유로운 곡선시대에 각을 강조그의 최대 걸작은 역시 「성가족 교회」다. 1883년 건축이 시작된 「성가족 교회」는 지금도 돌을 쌓아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채석장의 돌이 바닥난 56년 이후 인조돌과 콘크리트로 쌓고 있다(다행히 가우디가 재료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이 성당의 3개의 정면 중 「나시미엔토」(탄생)는 가우디의 생전에 거의 완성이 됐고 「글로리아」(영광)는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으며 「파시온」(수난)이 완성돼가는 단계에 있다.아랫부분은 땅으로 가라앉는 듯하고 윗부분은 하늘로 솟구치는 불꽃을 연상시키는 이 거대한 건 물은 성서에 나오는 상징들로 물결치듯 이어져있으며 각각의 면은 보는 사람에게 하나의 이야기 를 완벽하게 전달한다. 그리고 종탑의 끝부분은 가우디가 즐겨 사용했던 도자기 모자이크로 마감 됐다.기능주의적인 건축물에 익숙한 우리에게 「성가족 교회」는 참으로 놀라운 인상을 준다. 사실 스페 인 안에서도 적잖은 이 비현실적인 건축물에 조소를 퍼부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가우디는 이 건 물을 돌과 종교와 예술로 지탱해나갔는데 스스로 「속죄사원」이라 칭함으로써 건축을 자기희생의 과정으로 여겼다.가우디의 작품들을 보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건축물 하나하나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큰 저택이나 교회건물들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공원의 벤치와 가로등, 의자 하나하나가 완전히 독 창적인 아이디어를 반영하고 있다. 그가 만든 구엘공원의 벤치는 도시 위를 물결치듯 자유롭게 흐르는 바람에서 영감을 받은 듯하며, 레알 광장의 가로등은 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몽환적인 조각으로 만들어져 바르셀로나라는 도시의 얼굴을 만들어냈다.가우디 사상의 씨줄이 종교였다면 날줄은 자연이었다. 그가 만들어낸 모든 형태는 자연물에서 얻어 온 것이다. 그는 꽃과 나무를 관 찰한 뒤 건축적 형태와 완벽하게 결합시켜 가장 새로우면서도 스페인의 자연과 어울리는 예술품 을 만들어냈다.안토니오 가우디는 1852년 태어나 일평생을 바르셀로나에있었다. 수년간 가우디와 같이 일한 화가인 후안 무네르네에 의하면 가우디는 '확실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일생 동안 실용적이고 매우 간단하며 기능적인 해결책을 추구하였으며 놀랄 만한 결과를 이룩하였다.가우디 건축 형태를 관찰해 볼 때,그의 정신 상태가 복잡하거나 좀 뒤틀려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의 건물의 들쭉날쭉한 정면은 바로크식의 건축 개념으로 보일 수도 있으며 한편 불합리한 면도 다소 있다.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사실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의 자연에 대한 영감에 의한 건축 구성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서 평면에서 나타나는 선으로서 추상적인 형태에 기초를 둔 간단한 기하학을 처음부터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일반적으로 건축가들은 논리적인 단순화와 추상화 과정을 거쳐 설계를 하고 건물을 지어왔는데 그들이 대부분 사용하는 보조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콤파스와 자에 불과하다. 평면에 제도를 그릴 때나 돌이나 나무를 절단할 때에도 항상 콤파스와 자를 사용해 왔다.2차원의 형태인 평면이나 직선으로부터 정다면체,정육면체,4면체,8면체,20면체, 5각형의 12면체와 같은 3차원의 형태로 바뀐다.흙,불,물,공기 이외에 플라톤이 그의 저서 Timeo에서 주창한바 있고 그의 제자들이 계속 이론을 전시킨 제오원같은 형태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형태가 자로 잴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콤파스는 원을 그릴 때 필요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건축에서는 일반화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가우디는 자연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이러한 등각의 다면체가 자연에 존재하지 않거나 매우 드문 것이라는 사실을 지각할 수 있었다.황철광으로 된 정육면체나 수정으로 된 피라미드 형태의 프리즘 혹은 미사로 된 5각형의 12면체와 같은 것이 발견되면 자연 박물관에 희귀한 물건으로 간주되어 보관될 것이다.리우돔 마을의 조그마한 시골집에서 여름이면 관찰할 수 있었던 자연 형태의 아름다움과 타라고나의 시골 풍경의 광명스러운 점에 감명을 받아서 자연이라는 형태를 이해할 수 있었다.그의 고향과 가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관계로 평생동안 레우스 지역의 억양으로 말을 하였고 카탈류나의 그 지역이 예술 창조를 위해서 매우 이상적인 장소라고 생각하였다. 가우디의 연구가인 네델란드 건축가 장 모레마에 의하면 가우디는 레우스에서 보다 가까이 태어난 사람이 보다 총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사실 가우디는 지중해 연안이 예술 작품을 만드는 데에는 이상적인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태양의 빛이 45도 각도로 비추게 되며 모든 물체를 어떠한 굴절없이 완벽하게 밝힐 수 있다. 가우디에 의하면 지중해 사람들은 종합적인 면이 있는 반면에 북쪽 사람들은 분석적이라고 한다. 이 세상의 비밀을 이해하기 위해서 분석력은 필요하지만 예술적인 창조는 종합적인 능력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의 지중해의 풍경과 그 지역 국가들의 땅이 지니고 있었던 크나큰 열정은 가우디의 종교적인 정신에 의해서 더욱 커져만 갔다. 그는 자연을 산프란시스코 데 아시시 식으로 사랑하였다. 자연이 신의 작품이라고 간주하고 그곳으로부터 건축 양식을 얻게 된다면 조물주의 작업은 계속진행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가우디는 신은 인간을 통해서 창조 작업을 계속 하고 있다고 믿고, 품위가 있는 예술 창조활동을 계속하였다.그의 신앙심은 대단하였고 신부들의 충고를 따르는데 그치지 않았다. 여러번 그들과 논쟁을 벌인적도 있지만 대체로 빅, 마요르까, 아스토르가의 주교 등 교회의 지도자들과 친분이 있었다. 그는 기도나 예배 의식과 같은 주제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 것을 즐겼으나 신학에 관한 논쟁은 원하지 않았다. 그는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인 것을 선호하였다. 그의 건축양식은 매우 시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시는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그는 시는 고치만 아프다고 하였지만 히신또 베르다게르 칭이나 Francesch Matheu와 같은 시인과도 친분을 맺었다.그의 사상은 항상 건축을 통해서 표현되었다. 대만의 건축가인 호테치엔(Hoh Teh-Chien)은 가우디에 관한 그의 박사 학위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