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英哲傳Ⅰ. 김영철전에 대한 개괄적 정리ⅰ> 작가홍세태(洪世泰) : 조선후기의 문인으로 호는 창랑(滄浪), 유하(柳下). 역관(譯官). 제술관(製述官). 홍세태는 17세기 초기 중인문학의 선구적 인물과 다음 세대 인물들을 이끌어주는 교량적 위치에서 중인문학의 본격적인 전개를 열어간 인물이다. 특히 홍세태는 당대 여항시의 일인자로서 그의 탁월한 시재는 당시 일류 사대부 문인들조차 감탄하였다. 저서로는 위항시집(委巷詩集)인 와 시문집인 이 있고, 그와 교유한 양반 사대부로는 농암 김창협과 삼연 김창흡 형제로 그의 친기론적 문학관을 수용하여 여항문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ⅱ> 이본비교한문본인 「김영철전」의 이본으로 국문본 「김철전」이 전하고 있다. 이것은 완본이 아니고 절반정도인 앞부분이 떨어져 나간 낙장본인 것이 특징이다. 「김철전」은 전체적인 구조면에서는 「김영철전」과 유사하나 상이한 점도 발견되는데 다음과 같다.첫째, 「김철전」이 「김영철전」의 단순 번역으로 보기에는 곤란할 만큼 독자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점이다. 분량도 대폭 늘어났고, 내용에서도 적지 않은 변화가 이루어 졌다. 특히 「김영철전」에서는 거의 성격화되지 않았던 등주 및 간주의 처가 「김철전」에서는 그들의 삶을 고달파하며, 떠나간 남편 김철을 한편으로는 연모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원망하는 애절한 아내상으로 그려지고, 김철도 이에 호응하여 매우 정감 있는 남편상으로 그려져 새로운 느낌을 준다. 또한 「김영철전」에서는 볼 수 없는 역사적 정황 및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과 개연성 있는 서사도 새롭게 느껴진다.둘째, 「김철전」의 변모된 성격 중 특히 강화된 것으로 보이는 '여성의 삶에 대한 관심과 감성적 요소'의 면은 단순히 「김영철전」의 이본간 전승 관계뿐 아니라 조선 후기 소설사 전개 및 독자들의 요구와 상관하여 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셋째,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보면에서 「김철전」은 「김영철전」에 비해 대체로 정확하거나 상세한 부분이 많이 있고 그 정황도 구체족으로 서룰하고 있다. 이 점은 가도(假島) 공략사건 및 개주(蓋州)와 금주(錦州) 전투장면 등에서 잘 드러난다.넷째, 「김영철전」에서는 남성 중심적인 효행의 실천을 중시하였다면, 「김철전」에 와서는 이를 근간으로 하면서도 여성적인 시각에서 수평적인 부부관계, 남녀의 애정문제를 놓치지 않고 외국에 남겨진 두 처자의 시선을 돌려 새롭게 많은 부분을 서술하였다. 즉, 연민의 시각으로 작품을 확대 개작한 것이다.Ⅱ. 작품감상조선의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3차례 도움을 주었는데 당시 명은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재정적으로 빈곤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조선에 원조를 단행하여 경제적 부담이 막심했고 국력이 쇠퇴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에 반해 새롭게 떠오르는 신흥세력 후금은 나날이 거대해져 급기야 조선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국난을 겪게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으로 전쟁에 참전한 김영철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 「김영철전」이다.작가는 「김영철전」에서 당시 조선의 미약함과 그로 인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짓밟힌 한 사내의 비참한 인생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려내고 있다.「김영철전」을 읽고 나는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하나는 남성적 시각과 여성적 시각에서 본 김영철, 다른 하나는 오늘날과 당시의 정치적·국가적인 상황이다.전자를 말하자면, 먼저 여성적인 입장에서 김영철은 무능한 가장 혹은 남편이라고 생각된다. 작품에서 포로가 된 영철은 노장 아라나에게서 그의 죽은 동생을 닮았다는 이유로 죽임을 면하고 도망을 시도하지만 걸려서 양쪽 발꿈치를 잘리게 되고, 아라나는 영철의 도망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그의 여동생을 처로 삼게 한다. 그 처에게서 두 아들을 얻게되지만, 유년과 그의 동료들과 함께 처자식을 버리고 탈출에 성공하여 연원땅에 도착하게 되는데, 탈출하기 전, 유년이 누이와의 결혼을 주선하겠다는 약조에 따라 다시금 유년의 누이와 결혼하게되고 그 처로부터 두 아들을 얻게 된다. 한편, 등주에서 같은 현의 뱃사람을 통해 가족들의 소식을 듣게 되고, 결국 영철은 처자를 버리고 고향에 도착하여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고 마을의 처녀와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벌써 세 번의 결혼이다. 당시에 있어서 남자에게는 결혼이라는 것이 큰 허물이 되지 않는 사회였지만 오늘날에 있어서 특히 여성들의 남성을 바라보는 입장에 있어서는 세 번의 결혼을 한 남자라는 사실은 치명적인 결함으로 인식되고 처자식을 돌보지 않고 도망친 점은 무책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성적 입장에서도 오늘날에 있어서는 위와 동일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大를 위해 小를 버린다'는 관점에서 보면 김영철이라는 인물은 굳은 의지의 소유자이며 지극한 효자임에 틀림없다. 작품에서 영철은 할아버지 구가의 돌아오지 않으면 집안의 대가 끊긴다는 말에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게되고, 포로로 지내던 때도 늘 고향과 부모에 대한 간절한 생각에 괴로워한다. 이런 점에서 결국 고향으로 돌아온 김영철은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할아버지와의 약속과 자신의 소망을 이룬 의지와 효심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사회적 통념으로 보았을 때 처자를 버린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문제시될 수 없는 것이다. 즉, 小는 처자를 버린 것이고 大는 고향에 돌아가 부모를 만나겠다는 영철의 의지라고 본다.
목 차1.시조의 기원과 명칭2.형성배경3.형태(1)형태상의 분류4.시조의 내용적유형5.주요 시조집6.주요 작품7. 결론1. 시조의 기원과 명칭시조는 초·중·종장의 3장 형식으로 된 시조시(時調時)에 3음·4음·5음 음계의 가락을 일정한 장단에 얹어서 느리게 노래하는 음악으로 시조창(時調唱) 또는 시절가(時節歌)라고도 부른다.고려 중엽에 발생하여 고려 말엽에 발달, 그 형이 완성된 우리 나라 고유의 정형시이며 14세기 이전에도 시조가 있었다라는 견해가 있는데 최초 발생시기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많다.시조란 말은 조선 영정조 때의 기록에 나오는데 '시절가(時節歌)'라고도 부르며 대개 항간의 속된 말로 긴 소리로 부르는 노래, '유행가'로서, 엄격히 말하면 시조는 문학 부류의 명칭이라기보다는 음악 곡조의 명칭이다.현재로는 문학적으로는 '시조시형(時調詩型)'이라는 개념으로, 음악적으로는 '시조창(時調唱)' 이라는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최남선(崔南善)은 시조를 '국풍(國風)'이라 불렀다.향가와 경기체가가 귀족 문학이고, 고려의 속요가 평민문학이었다면 시조는 이 둘을 융화 통합시켜 비로소 시형(詩形)을 완성시킨 국민문학이라 할 수 있다.최초의 시조가 실려 있는 문헌은 영조 때의 학자인 신광수(申光洙)의 석북집(石北集) 관서악부(關西樂府)에 이에 관련된 한시(漢詩)가 있고 악보는 서유구(徐有구:1764∼1845)의『유예지』(遊藝志)(1776∼1800)와 이규경(李圭景:1788∼?)의『구라철사금보』(歐邏鐵絲琴譜)(1800∼1834)이며 이들 악보에는 황종·중려·임종의 3음 음계로 이루어진 계면조로 현재의 경제(京制)의 평시조가 전한다. 따라서 대략 18세기 중엽부터는 이미 시조가 불려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시조의 원형은 평시조인데, 『유예지』시절에는 시조(현행 평시조) 한 곡뿐이었고, 그 뒤에 『삼죽금보』에 이르면 시조(현행 평시조)와 소이시조(騷耳時調:현행 지름시조) 두 곡으로 늘어난다. 그 후 시조에서는 평시조(平擧時調)·중허리시조(中擧時調)·지름시조(頭擧時調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거의 인정하지 않고 있다. 시조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문헌으로 《樂學軌範》을 얘기할 수 있는데 여기에 보면 「樂時調」라는 명칭이 나오고 《東國通鑑》에는 「제시조(製時調)」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그 후의 《청구영언(靑丘永言)》,《해동가요(海東歌謠)》,《가곡원류(歌曲源流)》등의 歌集에서도 보이는 명칭으로써 「낙시조(落時調)」라고 적힌 데도 있고, 「우악시조(羽樂時調)」, 「계악시조(界樂時調)」, 「편악시조(編樂時調)」, 「언악시조(言樂時調)」 등의 곡조 이름에도 사용되고 있다. 이에 대해 서원섭은 "이 때의 "악시조(樂時調)"는 속악(俗樂)의 사지율(四指律) 三十二調를 통칭한 것으로 《석북집(石北集)》의 시조(時調)와 동일 개념이 아니다"라고 했다.그 후 조선 영조(英祖) 시대 사람인 신광수(申光洙, 1712∼1775)의 《석북집(石北集)》 관서악부(關西樂府) 15에 「一般時調排長短 來自長安李世春」이라고 시조(時調)라는 명칭이 나온다. 그 후부터는 시조라는 명칭이 종종 사용되었는데, 이학규(李學逵, 정조 때 사람)의 《낙하생고 고불고시집(洛下生稿 不 詩集》의 「感事 三十四章」에는 「誰憐花月夜 時調正悽懷」라 하여 시조란 명칭을 썼고, 다시 시조에 대한 주해(註解)에서 「時調 亦名時節歌 皆閭巷俚語 曼聲歌之」라고 하면서 "時調"를 "時節歌"로도 지칭했다. 또 유만공(柳晩恭, 철종 때 사람)의 《세시풍요(歲時風謠)》에는 「…時節短歌音調蕩 風冷月白唱三章」라 하고 그 주해에는 "俗歌曰 時節歌"라 되어서 시조를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로 미루어 "시조(時調)"라는 명칭은 조선왕조 영조 때에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시조(時調)"라는 명칭의 원의(原義)는 "시절가조(時節歌調)"즉, "당대의 유행가조"라는 말이 줄어서 된 말이므로 엄격히 말해서 "시조"라는 명칭은 문학 장르의 명칭이라기보다 음곡(音曲)에 비중을 둔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시조(時調)를 지칭하는 시조 이외의 명칭을 살펴보면, 우선《석북집(石北集)》이전의 기록으로는 名)인 시조(時調)와는 달리 작품 내용을 지칭하는 명칭인데, 이후 문학작품으로서의 사설(辭說)의 명칭인 단가(短歌)와 그 사설에 맞추어 부르던 곡조(曲調)로서의 명칭인 시조(時調)가 합쳐진 것이다.그런데, 시조를 한자로 표기할 경우 時調와 詩調 사이에서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이병기(李秉岐)는 「國文學槪論」에서 "시조(時調)의 본명은 시절가(時節歌)로서 시절가조(時節歌調)의 줄어진 말이 즉 시조(時調)다."라 하여 "時"를 주장했다. 손진태(孫晋泰)는 「詩調와 詩調에 표기된 朝鮮사람」에서 "詩調는 詩인 동시에 歌이며, 曲이 있으며, 調가 있는 것이다."라 하여 "詩"를 주장했고, 權相老는 「朝鮮文學史」의 목차에 詩調로 표기했다. 그리고, 안자산(安自山)은 「時調詩와 西洋詩」에서 시조시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병기의 견해에 동의하여 "時調"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것이 일반적인 통칭이 되었다.2. 형성배경시조는 그 형성시기에 대해서도 고려 중기부터 조선 말기까지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다양하다.趙潤濟는 "고려 말기에는 이미 완성된 시조를 가지고 있으므로…아마 중기로부터 시작되었으리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라고 하여 시조 형성기를 고려 중기로 보았다.安廓은 "短歌體는 抒情을 중심삼아 가장 발달하다가 고려 중엽에 來及하여는 各體가 쇠(衰)하여지고 신체, 즉, 시조체로 집중…이태종(李太宗)의 하여가(何如歌)와 정포은(鄭圃隱)의 단심가(丹心歌) 二首가 가장 顯祖品으로 인식"이라 하여 고려 중기를 형성기로 보면서도 고려 말기를 형성기로 보는 모호한 주장을 했다. 李泰極은 "시조는…그 형태가 별곡과 넘나들고 있다가 여말에 와서 완성되었다고 보겠다"라고 하여 고려 중기로 보았고 우리어문학회에서는 "시조는 고려 말엽에 성립되었고…"라 하면서 형성기를 고려 말기로 보았다. 또 李態雨는 시조 형성기를 조선 중기로 보았다.全圭泰와 秦東赫은 고려 중기에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추어 나가다 고려 말기에 완성된 것으로 의견을 다.이 기본적인 형태를 자세히 살펴보면 初·中·終章의 3行으로 1聯을 이루고, 각 행은 4음보이고, 이 4음보는 다시 두 개의 숨 묶음으로 나뉘어져 그 중간에 사이 쉼을 넣는다. 그리고, 각 音步는 3·4音節로 형성되는 것인데, 기본형을 도시(圖示)하면 다음과 같다.초장(初章) 3·4 / 3(4)·4 /중장(中章) 3·4 / 3(4)·4 /종장(終章) 3·5 / 4·3 /(1) 형태상의 분류시조(時調)의 명칭이 곡명(曲名)을 지칭하는 "시조"에서 유래된 것이므로 창법(唱法)상의 개념을 인식할 때, 크게 음악적인 면과 문학적인 면으로 형식을 분류할 수 있다. 음악적인 면에서 평시조(平時調), 엇시조( 時調, 또는 중어리시조), 사설시조(辭說時調)로 나눌 수 있고, 문학적인 면에서 단형시조(短型時調), 중형시조(中型時調), 장형시조(長型時調)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는 창법상의 개념을 제외한 일반적인 형식상의 분류만을 다루겠다.·平時調(短型時調)앞에서 살펴본 시조의 기본형인 3장 6구 45자 내외의 형식을 지닌 모든 시조를 평시조(단형시조)라고 부른다. 현재하는 고시조 가운데 평시조 형식의 작품이 대략 80%로 가장 많고,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지어진 시조는 거의 평시조이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靑山은 내 힝이오 綠水다 님의 情이綠水 흘러간들 靑山이야 변힝손가綠水도 靑山을 못니져 우러예어 가다고· 時調(中型時調)기본형에서 종장 제1구를 제외한 어느 구절이나 하나만 길어졌을 때 엇시조(중형시조)라고 부른다. 현재 전해지는 작품 가운데 7% 정도를 차지하고, 대체로 肅宗代 이전에 지어진 작품이 많고, 평민·무명씨의 작품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까을 다 거두어 드린 션하라비 눈비오다 내 골흘랴지다 닙 거두쓰러 지다구돌 덥게 씻고그 밧긔 녀남은 일아야 구힝줄이 이시랴·辭說時調(長型時調)기본형에서 종장 제1구를 제외한 두 구절 이상이 길어진 것을 사설시조(장형시조)라고 부른다. 대개 중장이 길어지는 경우가 많다. 사설시조는 律調의 제한을 벗어나 사설체로 되어 있樂時調, 만횡蔓橫)《고금가곡(古今歌曲)》에서는 短時調 294首를 다음과 같이 내용을 19항목으로 분류에서 기록하였다.인륜(人倫), 권계(勸戒), 송축(頌祝), 정조(貞操), 연군(戀君), 개세(慨世), 우풍(寓風), 회고(懷古), 탄로(歎老), 절서(節序), 심방(尋訪), 한적(閑適), 연음( 飮), 취흥(醉興), 감물(感物), 염정(艶情), 규원(閨怨), 이별(離別), 별한(別恨)이것을 통해 애정류(愛情類)가 가장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의 내용별 분류에서 육당 최남선은 고시조 1400首를 21종으로 분류하였는데 남녀, 상사, 이별류를 합친 애정류가 325首가 되고, 한정류가 281首, 취락류가 132首, 화목, 금충, 시절류를 합친 자연류가 130首, 인륜류가 107首의순서로되어있다.時節類 46首禽蟲類 45首男女類 154首相思類 124首懷古類 19首君臣類37首孝道類 12首哀傷類 51首閑情類 280首寺觀類 9首花木類 39首老少類 54首離別類 47首遊覽類 26首豪氣類 28首頌祝類 42首修養類 58首寄託類 72首醉樂類 132首人物類 36首雜類 62首전규태는 시조의 내용별 분류에 대해 얼마든지 세분할 수 있으나 대체적으로 10가지로 나누어 보았다.愛情, 無常, 自然, 修德, 忠孝, 憂國, 豪放, 諦念, 安貧, 勸農진동혁은 비교적 내용 분류가 분명한 시조를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愛情類 443首醉樂類 223首閑情類 216首自然類 203首道德類 185首懷古類 160首遊興類 151首忠君類 124首嘆老類 124首漁父類 122首脫俗類 117首安貧類 90首修養類 74首勸農類 51首頌祝類 33首이러한 시조의 내용별 분류를 통해 선인들의 삶과 사상 등을 엿볼 수 있다. 고려 말기의 시조에서는 세태 개탄, 회고(懷古), 탄로(嘆老), 고려 遺臣들의 비애 등이 그 주조를 이류고 있고, 조선조 초기에는 건국을 송축하는 노래를 비롯하여 충의수절(忠義守節), 강호의 閑情 등을 노래하고 있다. 그 후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시조에는 인생무상, 강호은둔, 허무, 풍자, 체념, 취흥(醉류
1. 생애1> 출생과 유년 시절1907. 2. 23.,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남안리에서 출생. 이시후(李始厚)의 장남. 남안동은 봉평면의 본 마을 창동리 서남쪽에 있는 성황당을 지나 봉평마을 건너 쭉 빠진 협곡의 마을인데 선생의 생가는 이 마을의 중간쯤 되는 지점 오른쪽 산밑이다. 뒷산은 둥그스름하게 치달린 산으로서 산세가 우악(優握)하게 생겨 주변 경관을 맑게 한다. 이 산 왼편으로 너비 약 80m, 길이 약 900m로 흘러내린 경사진 밭이 완만하게 놓여 있다. 그 앞으로는 작은 들이라 할 수 있는 기름진 논밭이 펼쳐져 있다. 생가 뒷편 언덕에는 밤나무 몇 그루, 돌배나무 한 그루 등이 큰 나무로 서 있고, 앞마당에는 물푸레나무와 단풍나무가 각 한 그루씩 서 있다. 생가 중심으로 오른편에 사립문이 있어 마을로 나아가는 길이 있고, 앞마당을 지나 왼쪽 옆으로 돌아가면 우물이 하나 있다. 말하자면 이 생가는 전형적인 산촌의 양반 집이라 할 수 있어서 운치가 잘 어울린 집이다. 이 집에서 이효석은 산촌의 자연을 뼈마디에 새기며 8세에 이르렀다.1914년, 8세 때 봉평에서 100리 떨어진 군소재지인 평창공립보통학교(현재의 평창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평창에서 하숙을 하면서 한 달에 한 두 번 봉평의 본가에 다니곤 했다. 이때의 교통 수단은 우마차 아니면 걷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절 이효석은 봉평과 평창 사이 100리를 거의 걸어서 다녔다. 그 길은 자연 집에서 나와 남안리 마을을 거쳐 봉평천(흥정천)에 다다르고, 여기에서는 왼쪽 강변에 있는 물레방아를 만나게 된다. 그 다음은 봉평천 징검다리를 건너 봉평의 성황당을 지나면서 봉평의 본 마을 창동리에 들어와 상가(商家)와 술집, 즉 봉평장터 거리를 뚫고 시내를 빠져나오게 되는데, 이 중 충주집(훗날 「메밀꽃 필 무렵」 속의 술집)이란 술집도 지나왔을 것이었다. 봉평 시내를 빠져나와서는 장평까지 20리, 노루목 고개(「메밀꽃 필 무렵」 속에 나오는 고개)를 넘게 되면 장평의 개울 (「메밀꽃 필 무렵」 속의 31년(25세)에 함경도 경성(鏡城)의 여인과 결혼을 함으로써 경제난은 더욱 가중되는 실정이었다. 이에 도리 없이 중학교 은사의 소개로 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취직을 하였으나, 이웃의 면시(眄視 - 눈흘김)를 받게 되고 본인 스스로도 못마땅하여 곧 그만두고 처가가 있는 함북 경성군(鏡城郡)으로 내려가 경성농업학교 영어 교사로 부임하였다.3> 직업 생활과 작품 활동가난한 가운데 직업을 구하였지만 이웃의 눈총과 스스로의 못마땅함 등으로 경성농업학교로 직장을 옮겨 시골로 내려간 그였지만, 작품에 대한 집념은 대단하여 중앙의 신문, 문예지, 월간 잡지 등을 통하여 왕성한 발표를 해 나갔다. 빈한한 와중에서도 이와 같이 문학에 있어서 만은 정열을 다 바쳤다. 이런 시기에 1932년 현민(유진오)이 경성을 찾아왔다. 그의 끊임없는 작품 활동에 대하여 찬사를 주고 싶었던 것이었으며, 또 그의 생활을 직접 보고 싶기도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민이 찾아오기 이전 장녀 나미(奈美)가 태어났기에 이런 소식을 듣고 축하를 겸한 나들이기도 하였다.아무튼 이효석은 여기 경성농업학교에서 3년간(1931∼1934초까지)을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 경제적 궁핍을 무던히 겪으면서도 오로지 창작 활동에는 열심이었다. 이때에 쏟아져 나온 작품의 양이 평생 동안의 것에 3분의 1에 해당하는 분량이었고, 작품의 질도 순수했다고 한다. 이 당시 문학의 분류는 정리가 미비하였는데, 소설 그것도 단편 소설의 작법과 범주를 열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이런 가운데 다시 직장을 옮기게 되었으니, 평양전문학교였다. 그때가 1934년, 그가 28세 되던 해이다. 그는 이곳에 가서도 창작 의욕을 잃지 않았다. 창작, 수필, 서간, 평론, 번역 등 여러 방향에서 작품을 다루었고, 그 작품이 실린 잡지나 신문 등도 다양하였다. 등단의 위세로서가 아니라 중견 작가로서의 발돋움을 해 가는 그의 이름은 경향을 막론하고 명성을 날려 갔고, 文名을 드날리는 이름만큼이나 작품은 깔끔하게 그리고 다량으로 각 紙上에 얼굴을 내게 된 듯하다.그는 세계 문학의 경향까지 바라보면서 국내 문학의 줄기를 짚어 보기도 하며, 문학계에 메시지에 해당하는 주장을 토하기도 했지만, 文友들과의 교류는 이에 반하여 작은 편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의 성격이 사교적이 아니며 단조로웠던 점에 기인된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향수에 젖었으면서도 고향 나들이는 자주 하지 못한 편이었는데, 이것도 그의 생활이 그만큼 바빴다기보다는 극히 小心했던 탓으로 전해진다.이제 간추려 말한다면 그는 현대적 지성을 갖춘 선비로써, 순진하면서도 예리한 모습으로 비활동적인 端雅한 작품 속에 놓여 있는 사람이었다고 보여진다.2. 문학적 특성1> 자연주의이효석의 최초의 작가적 면모에는 동반자 작가적 성격이 뚜렷했다. 그의 "도시와 幽靈", "行進曲", "奇遇"등의 초기의 작품들은 도시의 빈민층과 상류사회와의 격화된 갈등과 대비를 통한 사회적 모순의 고발 또는 노동자, 기생 등 하층민들의 전락과 빈궁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30년대로 들어서며 그는 외적 환경의 변화와 자신의 體質的 요구에 따라 종전의 문학적 경향에서 전향, 반사회적인 자연주의적인 작품세계로 침잠한다.그의 자연주의는 반문명적, 반사회적, 반도회적인, 축어적인 의미의 자연주의로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문명이나 사회를 떠나 자연으로 돌아감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루소의 자연주의 사상과 공통점이 있다.이효석의 자연주의에는 그가 벗어나려는 사회와 문명 속의 인간적 삶의 조건에 대한 근본적인 윤리적 통찰이 결여되어 있고, 다만 사회와 문명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일시적 위안을 구하려는 태도가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을 뿐이다."메밀꽃 필 무렵"에서 이효석의 자연주의는 그 서정적 美學과 결합에 의해 감동적인 삶의 진실의 일면을 계시하고 있지만 동양의 전통적인 현실 도피적 은둔주의와 脈이 닿아있는 그의 사상은 그 시대 현실과 사회 윤리적 문맥과의 絶緣으로 인해 스스로 그 폭이 한정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그 반사회적, 반문명적 태도에서 유사무를 팔러 마을 장에 내려와 나무 판 돈으로 감자, 좁쌀, 소금, 냄비를 샀다. 그리고 김 영감의 첩이 면 서기 최씨와 줄행랑을 쳤다는 소식도 들었다. 지금쯤 머슴을 내쫓고 뉘우치고 있을 김 영감을 위로하고 싶었으나, 그는 다시 산이 그리워져 물건들을 지개에 지고 산으로 올라갔다.그는 이웃집 용녀를 생각한다. 그녀와 더불어 오두막집을 짓고 감자밭을 일구며 염소, 돼지, 닭을 칠 것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낙엽을 잠자리로 삼아 별을 헤면서 잠을 청한다. 하늘의 별이 와르르 얼굴 위에 쏟아질 듯싶게 가까웠다 멀어졌다 한다. 별을 세는 동안에 '중실'은 제 몸이 스스로 별이 됨을 느낀다.▶ 핵심 정리갈래 : 단편 소설배경 : 시간(어느 해 가을). 공간(어느 산)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성격 : 낭만적. 묘사적. 서정적구성 :발단 - 머슴살이에서 쫓겨난 '중실'은 온갖 잡목에 묻혀 자신이 나무가 된 느낌전개① - '중실'은 꿀을 따 요기하고 불에 타 죽은 노루를 먹음전개② - '중실'은 나뭇짐을 팔아 생활을 꾸림. 김영감네 첩이 면 서기와 줄행랑을 침절정·결말 - 용녀를 생각하며 잠을 청함. 별을 세며 자신이 별이 됨을 느낌제재 : 자연에 동화된 삶주제 : 자연에 젖어 사는 물아일체의 열락(悅樂). 한 인간의 소박한 삶과 자연애▶ 등장 인물중실 : 주인공으로 머슴. 산 속으로 들어가 자연과 동화되는 인물. 주인인 김 영감의 오해로 집에서 쫓겨 나와 자연과의 교감을 가지며 행복해 함김영감 : 주인이지만 실제 등장하지는 않음용 녀 : 중실이가 그리워하는 여인이지만 실제 등장하지는 않음둥글개 : 김 영감의 첩이지만 실제 등장하지는 않음▶ 이해와 감상이 작품은 이효석의 여러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형, 즉 자연과의 교감으로 행복을 느끼고 그 생활에 자족하는 인간형을 서정적인 문체로 묘사하고 있다.어떤 면에서 이 소설의 진정한 등장 인물은 '나무'인지도 모른다. 산오리나무, 물오리나무, 가락나무, 참나무, 줄참나무, 박달나무, 사수레나무, 떡갈나무 등 이루 헤아릴 수 빠진 식이는 건널목에서 돼지를 기차에 치어 날려 보낸다.주제 : 원시적인 욕정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 생활의 애환. 자본주의 횡포에서 오는 좌절감과 인간의 순수한 애욕. 인간의 의식 속에 잠재한 성적 본능출전 : (1933)▶ 등장 인물식이 : 주인공. 가난하고 소극적이며 고지식한 농촌 청년. 돼지를 교미시켜 새끼를 받아 분이와 결혼해 살아가고자 하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한 정적 인물분이 : 식이의 연인. 그러나 본문에는 직접 등장하지 않음▶ 이해와 감상이 작품의 주인공 식이는 한 시대의 사회 현실로부터 똑바로 걸어나온 인물이다. 종묘장의 묘사도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면서 생생하고, 식이가 분이를 생각하는 대목도 무리 없이 자연스럽다. 특히, 분이와 돼지에 대한 공상 장면이 짤막한 서술자로서 상황을 집약해 준다."장에 가서 돼지를 팔면 노자가 되겠지. 차 타고 노자가 자라는 곳까지 달아나면 그곳에 곧 분이가 있지 않을까… 농사같이 초라한 업이 세상에 또 있을까. 아무리 부지런히 일해도 못살기는 일반이니… 분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돈과 사랑에 굶주린 그에게 있어 돼지의 상실은 곧 분이의 상실임을 암시한다. 더욱 그 당시 우리 농촌 현실의 여려운 단면이 제시된 점도 흥미로운 일이다. 또한, 이 소설은 돼지의 교접 행위를 통하여 잠재의식 속에 내재해 있는 인간의 성적본질이 되살아난다고 하는 독특한 섹스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즉 동물의 성행위와 등장인물의 성적 욕구를 별치시킨다거나, 암퇘지의 상실과 분이의 상실을 대응시킨 것과 같은 반복된 기법을 구사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의 성용이 갖는 동물적 본능을 드러내는 데 주안점이 나타나 있다. 이를테면, "돈"에서 식이가 암퇘지를 성욕의 대상으로 분이와 동일시한 것으로 파악되며, 그 외에 "메밀꽃 필 무렵"에서 허생원과 당나귀, "수닭"에서 을손과 수탉에서도 진한 관계가 엿보인다.이와 같이 이효석의 동물 세계는 유독한 인물과 일대일 대응의 관계로 동거동식하여 주인공의 분신이나 애정의 투사 대상으로 동물들이 나타난다.감상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1. 이본사항『창선감의록』('창선'의 한자 표기는 彰善, 創善, 倡善 등 여러 가지로 되어 있다)은 목판본은 없고, 활자본으로 국문본과 한문본의 양종(兩種)이 있는데, 국문본은 1914년 발행인 조선서관판(朝鮮書館版)과 1917년 발행인 신구서림판(新舊書林版)이 있고, 한문본은 1916년 발행 한남서목판(翰南書木版)이 있다. 또, '창효록(彰孝錄)'이라는 한문필사본과 '화씨충효록(花氏忠孝錄)이란 국문필사본도 있다.2. 창선감이록에 대한 요약정리▷ 연대 : 숙종 때(17세기)▷ 갈래 : 고전소설, 가문소설, 도덕소설▷ 성격 : 유교적, 교훈적▷ 주제 : 충효 사상의 고취▷ 출전 : 한글본-구활자본(신구서림판) ▷ 작가 : 조성기(趙聖期, 1638-1689)3. 작품의 연구성과『창선감의록』에 대한 논의의 상당수가 작자와 창작 과정의 문제에 집중됨으로 해서 정작 주제라든가 소설사적 위상과 같은 작품 해석의 기본적이면서도 궁극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기존 논의들은 작자의 문제, 한문본과 국문본 중 선행본의 창작과 전승에 관한 문제, 작품의 핵심적 갈등, 주제, 그리고 소설사적 위상에 관한 문제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작자 문제는 앞서 다음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한문본과 국문본 중 선행본의 창작과 전승에 관한 문제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국문본과 한문본의 선행의 문제는 『원감록』과 관련하여 『창선감의록』의 창작 동기와 과정을 해명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이러한 논의들은 작품의 서두의 진술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논자들의 견해는 서두의 진술을 작자인 조성기 자신의 것으로 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① 조성기가 아닌 다른 사람 즉 한문으로 번역한 번역자의 진술로 볼 것인가로 구분된다. 그리고 조성기 자신의 진술이라고 보는 견해는 ② 조성기가 단순히 기존의 국문소설인 『원감록』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이원주의 『창선감의록소고』주장과 ③ 를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창선감의록』의 이본들을 망라하여 서두 부분의 진술들을 비교하고 나아가 선행본을 확정하는 작업이 검토되어야 한다.작품의 핵심적 갈등을 처첩간의 갈등으로 파악하는 견해로는 이원수의 가 있고, 형제 사이의 계후갈등(繼後葛藤)으로 파악하는 견해로는 진경환이 있다. 『창선감의록』에는 그 제목이 말하듯 선악에 대한 작자의 깊은 관심이 내재되어 있지만 고전소설이 뚜렷한 선악의 대립을 통해 권선징악이라는 보편적 진리를 형상화하고 있다고 할 때 『창선감의록』은 『사씨남정기』와 더불어 이러한 경향의 시발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권선징악이나 창선감의가 곧 주제일 수는 없다.『창선감의록』은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갈등이 제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가문외적인 정치적 갈등 또한 적지 않은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기존의 연구는 연구자의 선입관에 의해 핵심적 갈등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거나 또는 그것이 타당하게 추출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를 작품의 실상과 달리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작품을 정확히 일어낼 필요가 있다.『창선감의록』의 소설사적 위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장편 가문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다. 영웅소설의 출현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으며 『사씨남정기』를 거쳐 가정구성원 간의 갈등을 주축으로 하는 세태적 가정소설의 출현을 야기하였다는 진경환의 견해가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박영희는 에서 장편 가문소설인 『소현성록』연작이 『창선감의록』과 마찬가지로 17세기 후반에 창작된 작품으로 확인됨으로 해서 『창선감의록』으로 영향으로 장편가문소설이 성립되었다는 논의는 재고를 요한다는 것이다. 물론 『창선감의록』이 정편적 구성방식과 사건 전개, 인물 설정, 그리고 작품의 의미 지향 등은 『창선감의록』이 확실히 가문소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창선감의록』이 장편가문소설의 직접적인 모태가 되었다하기는 곤란할지라도 『창선감의록』이 장편가문소설의 전개 과정에 끼친 영향이 부정될 았다. 이 작품의 작풍과 고전소설의 시대적인 작풍으로 보아 정준동이나 김도수가 생존했던 영정시대의 소작이라기보다는, 숙종기의 작품으로 보고 조성기의 소작으로 보는 것이 옳을까 한다.) 김기동, 『한국 고전소설 연구』, 교학연구사, 1983. 550쪽작자에 대하여 김태준(金台俊)은 그의 ≪ 조선소설사 ≫ 에서 정준동(鄭浚東) · 김도수(金道洙) 등을 기록한 바 있다. 뒤에 나온 증보판에서는 조재삼(趙在三)의 ≪ 송남잡지 松南雜識 ≫ 에 선조 졸수공(拙修公)이 어머니를 위하여 〈 창선감의록 〉 과 〈 장승상전 張丞相傳 〉 을 저작하였다는 기록을 들어 조성기(趙聖期)가 지었다는 설을 첨가하였다.김태준이 김도수 저작설을 제시하게 된 것은 전언인지, 문헌에 의거한 것인지 밝힌 바 없고, 또 저작과 관련되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믿기 어렵다. 정준동 저작설의 근거는 한남서림본(翰南書林本)의 서언에서 나온 듯하나, 그 서언이 저작 당시의 것이 아니고 활자본으로 출판될 때 쓴 것이므로 확인할 만큼 믿을 것이 못 된다.이와같이 김도수, 정준동의 저작설은 믿기 어렵기 때문에 조성기의 저작으로 보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조성기(字는 성경(成卿) 호는 졸수재(拙修齋)) 김만중과 전후한 사람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농을 좋아하지 않고 엄숙하기가 성인과 같았다 한다. 노장의 말을 경신(敬信)하고 스스로 독서에 노력하였다. 아버지의 명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는 하였으나 벼슬은 하지 않았다. 그는 질병 때문에 심실에 거처하며 성리학에 몰두하기 30여년, 천지만물과 우주의 이치에 통관하였다고 한다. 어렸을 때 이미 〈이기설 理氣說〉을 지어 이와 기에 대한 고차원적인 정의를 내려 이기는 서로 혼합되어 분리할 수 없음을 주장하였으며, 20세에는 〈퇴율양선생사단칠정인도이기설후변(退栗兩先生四端七情人道理氣說後辨)〉을 지어 이황(李滉)·이이(李珥)의 학설을 논변한 바 있다. 이 글에서 사단칠정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기 위하여 본연명물(本然命物), 승기유행(乘氣流行), 혼융합일(渾融合一 저자의 졸년이 숙종 15년(1689)이므로 그 하한선이 잡혀진다. 따라서 17세기 후반 숙종 연간의 작품으로 보면 틀림이 없는 것이다.17세기 후반의 작품인 『구운몽』『사씨남정기』『창선감의록』에서 가문의식이 밑받침되고 잇는 것은 일정한 사회, 역사적 배경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17세기 이래 사대부사회에 강화되어온 가문의식에 근거한다. 국왕을 정점으로 하여 사대부계급이 지배권을 행사해온 조선사회는 17세기 전반에 임병 양란을 겪고 난 이후, 사대부 계급은 현저한 균열을 보이게 된 지배체제를 되돌려 지키기 위해 이념적 측면에서 혹은 정치, 사회적 측면에서 국면전환을 시도한다. 이른바 예학의 발달이 그것인데, 이는 번문욕례(繁文縟禮)로서 봉건적 질서를 잡기 위한 사대부계급의 방어적 태도에 기인한 것이다. 17세기 이후 강화되는 가문의식은 사회적 변화의 여러가지 형태로서 나타났다. 조선 중기 이후 격화된 정치집단간의 갈등에 대처하기 위해, 또 임병 양란 이후의 경제적 궁핍을 극복하기 위해 또 신분제의 동요나 붕괴에 직면하여 사대부계급의 신분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부계 중심·남자중심으로 친족집단을 배타적으로 조직화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종통 문제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현상은 가문의 테두리에서뿐만 아니라 조가(朝家)로서의 국가적인 문제에서도 나타났다.이처럼 사대부계급 전체에 걸쳐 가문의식은 17세기 후반 이래로 강화되어갔으며, 가문의식에 밑받침한 장편소설 또한 사대부계급의 세계관에 수응하여 현저한 발전을 보였다.6. 줄거리명나라 때 화욱(化郁)이란 병부판서는 심부인(沈夫人), 요부인(姚夫人), 정부인(鄭夫人)의 3부인을 데리고 살았다. 심부인은 아들 춘(椿)을 낳고, 요부인은 딸 빙선(聘仙)을 낳았는데 아름답고 영리했다. 요부인은 빨리 죽게되어 딸을 정부인에게 부탁했다. 곧 정부인도 진(珍)이라는 훌륭한 아들을 낳았다. 화공은 심부인이 낳은 아들 춘이 미련하므로 빙선과 진만 귀히 여기니, 심부인은 시기를 하여 아들 춘과 모의를 하고 빙선과 진을 모해하려 한다. 이방탕하여 범한(?漢), 장평(張平) 등과 어울리면서 부인 임소저를 못생겼다고 박대하다가 드디어 내보내고 조씨를 부인으로 삼으니 집안은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이 때 진은 과거에 급제하고 성부인의 아들 성진과, 빙선의 남편 유생도 급제하여 같이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었다. 조씨는 시모 심부인과 호응하여 윤, 남 양 소저를 학대하여, 먼저 남소저에 독약을 먹여 죽였다. 그러나, 남소저는 여승의 구원을 입어 남복으로 갈아 입고 산사에 피신하였다. 진이 황성에서 벼슬하다가 집안 사정을 듣고 집에 내여 왔으나, 효성이 많은 그는 심부인의 처사를 탓할 수는 없었다. 이 때 진의 출세를 시기하던 춘은 범한, 장평 등의 불량배를 시켜 간신 엄숭에게 진을 참소하여 하옥시켰다. 조씨는 범한과 간통하여 윤부인을 축출하고 남편 춘을 모해하려 한다. 장평은 조씨가 조씨가 범한과 간통함을 질투하여 춘에게 고발했다. 춘은 장평과 모의하고는 윤부인을 간신 엄승상의 아들 세번(世蕃)의 후처로 들이고 그의 도움으로 범한과 조씨를 없애고자 했다. 이 때 윤부인의 동생 윤공자가 윤부인을 보러 왔다가 이 음모를 알고 윤부인을 권하여 남복을 하고 피신케 하고는, 윤공자가 윤부인의 옷을 입고 엄승상 댁으로 들어갔다. 윤공자는 몸이 불편하다고 하면서 엄공자의 동침을 거부하니, 엄공자는 누이 월화로 하여금 같이 자게 했다. 윤공자는 정체를 밝히고 월화를 달래 동침하고 짐짓 후일을 기약했다. 월화는 윤공자를 새벽에 도망가게 주선해 주었다. 엄승상은 윤부인이 아들의 부인이 되어 들어 오자 진을 유배시켰다. 윤공자는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어사가 되어 소흥부로 내려 가서 화문(化門)의 가화(家禍)를 다스려 악당들을 처벌했다. 진이 유배소에 가 있다가 남어사의 소식을 듣고 찾아가서 만나 보고 남부인의 소식을 전했다. 진은 남어사의 집에서 신인(神人) 곽선공을 만나 무술을 습득했다. 진이 다시 유배소로 가니 해적 서산해(徐山海)를 토벌하기 위하여 유장군이 내려 와서 진을 찾고 있었다. 진은 유장군을 따라 가서 해적을 토제이다.
1. 나례의식.나례(儺禮)는 음력 섣달 그믐밤에 민가와 궁중에서 악귀와 역신을 쫓는 의식이다. 원래 나례는 섣달 그믐을 세제(歲除), 세진(歲盡), 제일(除日)이라 하여 중국에서 일찍이 악귀를 그 징치자(徵治者)인 신다(神茶) 울첩형제(鬱疊兄弟)에게로 쫓아내기 위하여 조정이나 공청에서 구나(驅儺)의 의식을 행하였고, 각 가정에서는 수세(守歲)니 사세(辭歲)니 조세(照歲)니 하여 여러 가지 주술이 행해지던 것이 고려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전해져 고려조에서는 궁중의식으로 나례가 행해졌고, 이 나례는 다시 처용희(處容戱), 처용무와 연결되어 그 무용과 노래는 역신을 몰아내는 극적 형식으로 되어 조선에까지 그대로 내려왔다. 특히 조선에서는 12월 제석(除夕) 전날 밤에 구나의 의식을 행한 뒤 소위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로 , , , 등의 순서로 연주 가창되어 나례와 대응하는 의식으로 변하여 조선조 초기의 무용, 음악, 가요의 종합적 표상으로 나타났다.나례 출연자로는 나례청에 소속된 배우, 광대, 수척(水尺), 중, 재인, 현수재인(絃首才人), 백정(白丁)등이 있는데 이들은 사회적으로 천대 받는 계층이었다. 니례의 공연장소는 야외인 경우는 무대창치를 하였고, 궁중에서는 인정전(仁政殿), 사정전(思政殿), 명정전(明政殿) 등에서 행하였다. 그리고 윤거(윤거)라는 수레를 몇 개씩 이동해서 나례를 하였다. 나례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나례청이 있었고, 후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관장하였다.2. 작품해석.이 는 고려조에 만들어져 일찍부터 민간에 구전된 노래라 볼 수 있다. 그 원형이 다소 조선에 와서 개작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대체로 고려 이전의 율조를 간직하고 있어 고려가요로 보고자 한다. 다만, 「시용향악보」에 실린 가사가 전반적으로 그렇듯이 첫머리 주(註)에 '가사는 다만 제 1장만 기록하고 나머지는 가사책에 보인다. 다른 음악도 이를 따른다.'라 하여 그대로 제 1연만 수록한 노래이며 제 2연 이하의 가사가 궁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1) 원문과 해석[원본]羅令公宅(나영공택) 儺禮日(나례일)이廣大(광대)도 金線(금선)이샤싶이다궁에가ㅏ 山(산)가굿 겻더신딪鬼衣(귀의)도 金線(금선)이리라리라리러 나리라 리라리[현대어 풀이]나(羅)영감님 댁에서 나례(儺禮)를 하는 날이면광대의 몸치장도 금선(金線)을 두른 옷입니다그려.그 곳에서 산굿만 겪으면귀의(鬼衣)까지도 금선(金線)을 두른 옷이리라.리라리러 나리라 리라리.(2) 작품정리작가 : 미상갈래 : 고려가요구성 : 비연시(非聯詩)성격 : 무가(巫歌)주제 : 나(羅)영감 댁의 나례(儺禮)를 봄출전 : (3) 어구풀이▶ 羅令公宅 > 나령감댁(羅令公宅): 영공(令公)은 영감(令監)과 같은 말이며 이는 본래 조선의 종 2품, 정 3품의 관원의 존칭이나 그 유래는 상위존칭인 대감과 더불어 신라시대부터 일찍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즉, '令監' 또는 '大監' 등의 관직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令公, 令監'이 관청이나 노인의 존칭으로 사용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