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지금까지 알아왔던 실크로드라는 것은 중국과 서역의 문물의 교역로인 비단길이라는 단순한 의미였다. 하지만 수업을 통해 들은 실크로드는 더욱 방대한 것이었으며, 하나의 루트가 아닌 여러 갈래의 루트로써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으며, 단순한 교통로가 아닌 동서 문화교류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을 알 수 있었다.그동안 고유문화라는 타이틀로써 우리의 문화를 미화하려했던 것에 대해 어느 정도 비판을 가하면서 한국문화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닌 다른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태도를 보이는 실크로드에서 한국문화의 연원을 찾으려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실크로드와 한국문화 간에 어떠한 연관이 있으며 연구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이 되었는지 살펴보고 앞으로 이러한 실크로드와 한국문화의 미래가 어떠할 것인지 생각해 볼 것이다.실크로드100여년전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F. von Richthofen)은 자신의 저서 「중국(China)」에서 실크로드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그 후 현재까지도 실크로드라는 말은 유행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일반적인 실크로드(Silk Road)는 단순히 경제 교역을 위한 이동의 루트로서 이해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실크로드가 지니는 실제적 의의가 경제 교역을 위한 상인들의 이동로의 개념에 한정된다면 실크로드가 가지고 있는 다른 많은 의미가 크게 퇴색된다. 그래서 실크로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실크로드를 인류문명의 교류가 이루어진 통로를 범칭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실크로드는 크게 3개의 지선으로 구성된다. 가장 오래된 지선으로 육로로서 초원길과 오아시스길과 바닷길이다. 초원길은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초원지대를 동서로 횡단하는 동서교류 통로를 지칭한다. 초원길은 북유럽 발트해 남안에서 시작하여, 카스피해와 카자흐스탄을 거쳐 중국 화북지방에 이른 후 중국 동북지방을 거쳐 한반도까지 이어진다. 다음으로 오아시스길은 중앙아시아의 사막지역을 중심으로앙아시아 유물들은 한국의 고분출토품과 오따니수집품을 합한 것으로, 1970년 유물 중 일부가 일반에 공개되었으나 누구의 눈길도 끌지 못하였다.1970년대에 들어서 중앙아시아 미술 강좌가 시작되면서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었으나 8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큰 전진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것이 90년 이후 현지 방문의 길이 열리고,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자료의 입수가 광범위하게 확대되어, 연구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간 문헌에만 의존했거나 또는 각종 도록을 참고했던 간접방식의 작품섭렵이란 제한에서 벗어나 작품해석의 폭을 넓힐 수 있게 되었다. 국제정세의 개선으로 인한 창의적 작업의 가능성, 직접적인 접근방식의 대두, 전문분야의 확대경향 등의 이유로 앞으로 실크로드에 대한 연구의 전망은 밝다고 볼 수 있다.그러면 우리나라에 나타나는 문명교류의 흔적들을 살펴보자.뽕나무와 실크로드실크로드의 대표적인 상징은 ‘비단(silk)’이다. 비단을 만들기 위해서는 누에치기인 양잠이 있어야 하고 비단실을 뽑아내는 누에가 먹어야 할 뽕나무가 원천적으로 있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은(殷)나라의 유신 기자(箕子)가 조선의 왕으로 봉해진 후 조선 백성들에게 실시한 것은 ‘양잠 육성과 농사를 짓는 방법’을 전파한 것이라고 「사기조선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이 때 기자가 조선왕으로 봉해져 조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 지역도 물론 반도가 아니며 대륙과 중원(中原)지역이었음을 밝혔다.뽕나무가 자생되거나 재배되었던 지역은 조선의 335개 고을 중 광주(廣州)를 비롯하여 202개 지방에서 뽕나무가 자생하거나 재배되었으며, 용인(龍仁)을 비롯한 133개 고을에는 뽕나무가 없었던 것으로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국 역사 강역의 고을 중에서 66%가 뽕나무가 자생되거나 재배되어 양잠을 할 수 있는 기초요소가 갖추어져 있었다. 따라서 역사서의 속무상잠(俗務桑蠶)이라고 쓰여져 있지 않았어도 비단을 생산할 수 있는 자연적 환경이 마련되어 있었던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이 시기 전후에 고유의 납-바륨 계통의 유리가 성해하였으므로 이러한 한국의 관옥은 중국에서 가져온 소재를 녹여서 만든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고 한다.한반도 여러 곳에서 출토된 유리 장식품을 비교하게 되면 여러 가지 계통의 유리가 복합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특징이 발견된다. 우리나라에서 출품되는 유리제품은 대부분 납-바륨계이지만 무령왕릉의 구슬과 같이 소다-석회 유리계도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같은 계통의 유리라도 색등이 다르게 나타난다. 또한 특이한 점이 있는데 같은 유적에서 출토되더라도 서로 다른 계통의 유리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들은 한곳만 교류를 한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와 교류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들이다.유리 제품은 장식용뿐만 아니라 도자기와 같은 용기류도 마니 발견된다. 이들의 소재나 제조 기법, 장식 문양과 색등을 분석해보면 지중해 연안 지방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유사하다. 대체로 이것들은 초원로의 여러 곳에서도 비슷한 유형품이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지중해에서 초원로를 따라 신라로 유입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게 하는 근거이다.보물620호 유리배(천마총출토)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주로 시원을 찾는 유리는 그 생산 기술의 발전을 거듭하며, 그 후 알렉산드리아와 로마가 그 생산의 중심지로 자리 매김하였다. 로마의 유리는 실크로드를 통하여 중앙아시아 및 동아시아 지역으로 전파되었고, 물론 신라도 그 전파의 대상이었다. 중국에서 발견된 로마 유리와 서투르키스탄 지역에서 발굴된 유리가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유리문명의 동진 사실을 보다 분명히 뒷받침 해준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전래된 신라의 유리는 주로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리배, 유리고배, 봉수형병, 유리구슬 등으로 존재한다. 출토되는 유리 중에서도 삼국시대의 신라 유리는 서방계 유리를 쓰고 있고, 그 후 통일신라기의 유리는 비서방적인 유리로 판명된다. 이 사실은 수입품으로서의 유리가 그 제작 기술이 토착화됨에 따라 국내에서도 생산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충분히 문명르칸트와 장안(長安)의 신라인 벽화실크로드의 중간 지점에 해당하며 장사의 귀재들인 소그디아인들의 거점지로 알려져 있는 사마르칸트에는 아프라샤프 언덕 지역에 고고학 박물관이 있다. 고고학 박물관의 벽화를 살펴보면 외국인 사신도가 그려진 부분에서 대륙의 섬서성 장안(長安), 건현(乾縣)의 장회태자묘와 영태공주묘의 사신도 및 예빈도에서 볼 수 있었던 똑같은 모자를 쓴 사신들의 그림을 발견할 수 있다.사마르칸트와 섬서성 건현에서의 똑같은 모자의 사신 벽화는 사신의 머리에 쓴 모자 양 옆으로 새의 깃털을 장식하고 서 있는 그림이다. 섬서성 건현의 묘에 그려져 있는 벽화속의 깃털장식 사신들은 역사시대의 고구려?신라의 사신들로 해석되고 있으며, 사마르칸트의 고고학 박물관 깃털 장식 사신들의 벽화도 고구려?신라의 사신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반도에서 서안은 물론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까지 조공사신의 자격으로 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바닷길과 한국음악한국음악과 인도음악은 서로 공통점이 많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진양조-중모리-자진모리 세틀형식)은 인도의 빌람빗-마디야-두룻따와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음악의 세틀형식은 인도-중국-한국의 육로로 전파된 것이 아니라 인도-인도네시아-태국-한국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서 전파된 것이다.우리나라 음악에서 세틀형식은 당악에는 없고 향악에만 사용하는 형식이다. 그래서 향악의 독특한 형식으로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세틀형식은 인도에서 발생한 것으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인도?자바?태국 등의 음악에서도 사용하는 형식이다. 이것은 여러 나라의 세틀형식이 서로 공통점이 있다는 데에서 뒷받침된다고 할 수 있다.장단을 표시하는 악기는 각 나라마다 다른데 여기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한국의 징, 자바의 공, 태국의 칭은 모두 우리나라의 징과 크기는 다르지만 모양이 비슷하고 태국의 칭은 발음도 비슷하다. 우리나라의 농악은 다른 어떤 음악보다도 먼 옛날의 음악이다. 이것 그 바깥으로 불꽃문양 같은 외선이 배치된 형식은 거용관 여래상의 광배뿐만 아니라 거용관의 입구에 부조된 문양과도 매우 흡사하다. 이 문양은 원대에 유행한 요소의 하나로 시원은 티벳에서 찾을 수 있다.석조석사여래좌상이라는 네팔의 상에서도 광배문양, 이마의 중간부분이 굽어진 머리형과 같은 익산상과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금동관음보살좌상강원도 금강산에서 출토된 금동관음보살좌상은 눈꼬리가 옆으로 올라간 모습이나 윤곽이 선명한 작고 도톰한 입술에서 이국적인 분위기가 농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후에 나타난 장신구의 표현은 라마교의 보살상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섬세하고 정교한 각법과 더불어 고려후기 라마교 주상 중에서도 가장 이국적인 상에 속한다. 관음상의 머리를 틀어 올린 모습도 특이한데 네팔 보살상의 머리나 원대의 보살상에서도 머리를 여러 갈래로 땋아서 올리고 그 위에 장식을 얹은 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려후기의 이국적인 라마계 불상 양식은 조선전기로 계승되면서 조각사적인 중요성을 한층 높여주고 있으며, 조각기법이나 대좌형식등에서 약간의 변형을 보이면서 조선전기 불상조각의 한 요소를 이루게 된다.역사속에서 보여지는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교류위의 논의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많은 유물들이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 교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개중에서는 그 원형 그대로 수입되어 나타난 것도 있고, 신라의 토착적 요소와 결합되어 변형된 형태로 남아있는 것들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신라인들이 실크로드를 매개로 한 문명교류에서 교류의 한 역할을 담당했던 당사자라고 볼 수 있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신라를 실크로드의 당사자로의 설정은 신라 문화를 다시 볼 수 있게 되는 계기를 만든다. 신라는 수도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동쪽에 치우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조류인 문명교류에서 소외되지 않고 그 자신의 문명 내로 충분히 받아들이고, 소화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통일 신라 시대 동안 빈번했던 견당사 파견과 위의 혜초의 예에서다.
1. 서론과거로부터 우리나라는 중앙에 권한이 집중된 형태의 정치가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지역 주민들은 자기가 사는 지역을 스스로 다스린다는 자치에 대한 생각이 많이 미흡했으며, 이는 자치 경험의 부족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자치역량의 약화와 주민참여의 저조성을 낳았으며, 이로 인해 분권화라는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서 행정의 지방분권화를 이루는데 우리는 아직도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국민 참여를 통한 지방의 활력증진, 국가경쟁력 강화 등 지방분권의 시대적 필요성에 비해 우리의 분권수준은 아직 미약한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지방자치에 관한 일반법으로 지방자치법이 있고 지방이양촉진법을 제정('99.1)하였으나 분권화를 이루기에는 매우 미흡했다.따라서 지방분권특별법은 참여민주주의를 확대하고, 모든 지역 주민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복지사회를 구현하며, 지역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실현함에 있어 지방자치의 본질에 따라 지방자치단체가 지역에 관한 정책을 자주적으로 결정 집행할 수 있도록 충분한 권한과 재원을 보장하기 위한 지방분권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함이다.지방분권은 주민참여를 바탕으로 한 지방자치의 본질이 실질적으로 구현될 수 있도록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국가의 지배감독관계를 해소하고, 상호 협력하는 대등한 정부간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며,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담당해야 할 정치적사회적경제적문화적 역할과 행정사무의 범위 및 재원배분을 명확하게 설정함으로써 지방자치단체의 자주성자립성다양성이 국가적 통일성과 조화를 이루는 민주적 지방자치를 확립하고 활력 있는 지역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기본이념으로 한다.이번 지방분권특별법에서는 자치경찰, 교육자치, 재정분권, 중앙과 지방간의 사무배분, 주민 참여 등에 대해서 다루어지는 데 이 중에서 최근 부안사태와도 가장 연관이 있는 주민참여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2. 주민참여의 필요성지방자치의 주체는 지방정부가 아니라 지역주민이다. 지역주민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행정에 참여하고 지방정부를 견제하느냐가 중요하다.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가 지난 7월 4일 발표한 ‘지방분권 로드맵’에는 현재의 제한된 주민참여에 따른 공급자 위주의 지방행정을 5년 후에는 공동생산자로서 주민들에 의한 협치형 지방행정으로 탈바꿈 시킨다는 구상이 포함돼 있다. 이를 위해 로드맵에서는 주민투표제 주민투표제 : 지방자치단체의 설치분합 또는 주민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지방자치단체의 주요 결정사항 등에 대하여 주민투표에 부칠 수 있는 제도이다., 주민소환제 주민소환제 : 주민들이 지방자치체제의 행정처분이나 결정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고 판단할 경우, 단체장을 통제할 수 있는 제도로 일정한 절차를 거쳐 해당 지역의 단체장을 불러 문제사안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투표를 통해 단체장을 제재할 수 있다.를 내년 하반기부터 시행하며 2005년까지 국민소송제 국민소송제 : 지방자치단체의 잘못된 행정에 대해 주민들이 소송을 통해 제동을 걸 수 있는 제도이다.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주민참여가 필요한 이유를 몇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1)신뢰행정 확보수단주민참여는 주민이 여러 가지 방법과 형태를 통해서 행정과정에 실질적으로 개입하는 활동으로 행정의 독선화를 방지하고 다원화된 이해의 대립을 조정하여 행정의 공정성을 확보한다. 여기서 말하는 주민이란 참여하는 사람들, 즉 참여의 주체로 서구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적 양식을 가진 특정 계층의 시민과는 구별되며, 미국 초기주민참여의 단계에서 강조되었던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경제적으로 약한 무권력적인 소수 집단의 사람들과도 구별된다. 주민참여는 행정과정에 주민들이 직접 참여함으로써 행정기관과 주민의 갈등을 해소하여 신뢰행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필요하다.2)관료에 의한 통제수단오늘날 대의제의 기능 상실 특히 선출된 대표자가 관료를 더 이상 통제 할 수 없게 된 것은 주민참여의 등장 논리를 구하려는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발견된다. 주민들은 선거를 통해 그들의 의견을 대변해 줄 수 있는 대표를 뽑아 주민의 편에서 활동하도록 의회 대표를 선출하지만 그들은 당선이 되고난 후에는 주민들의 의사보다는 어떤 특수계층이나 잘 조직된 이익 집단의 주장이나 압력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의회의 역할만으로는 고객의 요구에 대한 무관심한 관료제의 폐쇄성과 같은 역기능을 방지하지 못하므로 일반 주민들의 불만이 표출되고 주민참여라는 새로운 통제방법이 대두되게 된 것이다.3)행정책임의 확보수단오늘날 행정기능이 확대되고 전문화기술화되어 행정부의 주요한 정책수립 및 집행에 있어 내용과 방법이 복잡해짐에 따라 상대적으로 행정재량권의 범위가 확대되어 종래의 입법부사법부정당 등에 의한 행정통제만으로 충분치 못하게 되어 주민참여가 요청되었다. 이러한 요청에 의한 주민참여는 주민들의 정책에 대한 투입 기능과 아울러 주민들의 주체성과 자치능력을 강화함으로서 민주시민을 위한 교육의 기회가 되었다. 또한 주민참여는 정책 집행의 효과성과 능률성을 높여주고 반면에 행정기관에 책임을 분담시켜 주기 때문에 지방자치 시대의 도래에 행정기관의 효과적인 책임행정 확보 수단으로 필요하게 되었다.3. 지방분권특별법에서 주민참여법안의 문제점참여정부는 지방분권 로드맵에서 지방정부의 자율성과 주민참여 확대를 추진하여 금년 12월까지는 주민참여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겠다고 하였다. 그 대표적인 주민참여 제도가 바로 주민투표제, 주민소환제, 주민소송제 등이다. 그러나 이들 중 현재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은 주민투표법안이 유일한 상황이어서 참여정부의 의지와는 달리 주민참여의 제도적 장치마련이 늦어지고 있는 감을 떨칠 수 없다. 주민투표법안 역시 지난 7월 28일 행자부안으로 발표되었으나 행자부안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있다.첫째, 투표권자를 20세 이상의 주민으로서 당해 지역 거주자로 하고 있으나 21세기의 국경 없는 시민시대에 걸맞게 일정한 자격요건을 갖춘 외국인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이 옳다. 각 지방의 특성에 따라 자율적으로 당해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로 투표권자를 정하는 것도 가능하다.둘째, 주민투표의 대상이다. 행자부안에는 공공시설의 설치, 사무소 소재지 변경, 읍면동 폐치분합 등 예시적인 열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각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로 다양하게 그 대상을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셋째, 행자부안은 주민투표의 실시구역을 당해 지방자치단체의 관할 구역전체를 그 단위로 하고 있다. 그러나 과도한 행정재정적 비용부담을 초래할 수 있다. 투표지역의 결정은 사안별로 정하는 것이 옳다.넷째, 주민투표결과의 이행확보수단 문제다. 행자부안은 주민투표의 결과에 따라 적극적인 행정재정적 조치를 취하도록 함에 그치고 있다. 단체장이 투표결과에 따른 이행을 하지 않을 경우 지방의회의 의결을 거쳐 탄핵할 수 있는 제도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그 외 투표관리기구의 문제, 발의요건과 결과확정 요건의 지나친 엄격성 등은 국회의 논의과정에서 엄정한 검증을 거쳐 시정돼야 할 것이다.경실련과 참여연대 등 ‘분권과 참여를 위한 시민사회네트워크’ 역시 행자부의 주민투표제법안에 대해 ‘주민투표 대상과 청구주체, 청구요건, 운동방법 등에 대해 과도하게 제한하고 있다’고 지적했으며, 주민들이 지방자치체제의 행정처분이나 결정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고 판단할 경우 단체장을 제재할 수 있는 주민소환제는 현재 논의 자체가 답보상태다.현재 주민소환 적용 대상과 요건 등을 놓고 국회의원과 자치단체장 등의 의견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은 자치단체장을 주민소환 대상으로 하자는 입장이나 자치단체장은 선출직 전체를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며 소환요건 역시 팽팽한 의견 대립을 보이고 있다.4. 해외에서 주민참여의 사례-미국과 일본주민참여와 지방정부 통제를 위한 주민투표, 주민소환, 국민소송 등은 선진국에서도 정착과정까지 상당한 논란이 있었으며, 현재는 지방분권의 실질적인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1. 들어가는 말우리나라의 여성운동은 일본에 의한 식민지화 과정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여성운동은 여성문제뿐만이 아니라 민족문제 해결이라는 과제를 하나 더 안게 되었다. 일제 시기의 여성운동은 사회주의를 수용하면서 계급 문제에 대한 인식을 더했으며, 여성운동은 성차별과 관련된 현실 문제와 식민지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다루었다.일제의 한국통치에 있어서 여성정책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한국의 가정에서 가정경영권과 자녀 양육은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주어진 일이었기에 여성에게 황국신민관을 불어넣으면 자녀들은 저절로 일본의 황국신민이 될 수 있다는 생각 하에서 조선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여성들을 어떻게 무너뜨릴지는 일제의 주요 관심사였다.당시 일제가 여성정책의 목표로 삼은 여성상은 식민통치에 순응하고 가부장적 사회체제에 적합한 여성으로 일제는 이러한 여성을 양처현모주의 교육을 통해 양성하려고 하였다. 양처현모주의 교육은 일본에서 명치 후반기 내셔널리즘의 고양 속에서 중산계급을 대상으로 확립된 것인데 여성의 역할을 가족에서의 처와 모의 역할로 한정하고 그 역할을 통해 국가에 대한 공헌을 기대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부덕의 양성’을 강조한 수신과 함께 ‘가사, 재봉, 수예’등의 가정생활에 필요한 교육을 중시하고 있었다.이러한 일제의 정책 하에서 여성운동은 민족문제와 계급 문제를 다루는 거대 담론들 사이에서 대립흡수통일의 과정을 거쳐 가며 여러 과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나갔다.2. 여성해방의식의 출현여성들이 해방의식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계기는 개화파들로 구성된 독립신문에서 민력과 국력양성 차원에서 여성교육과 여성의 사회진출을 주장함에 의해서였다. 이러한 개화의 요구 속에서 여성들 스스로 개화의 의지를 나타내는 집단적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1898년 9월 여성단체를 조직하는 모임이 처음으로 열렸다. 첫 여성단체인 찬양회는 여학교설립을 위한 운동과 함께 회원들의 계몽을 위한 연설회 및 토론회를 2개월 동안 정기적으로 매주 한번씩 개최 줄이고 그 쌀을 바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여성들의 이러한 자발적 호응은 반지를 빼서 바치는 탈환회, 패물을 없애는 패물 폐지회, 부인급수 보상회를 조직하게 하였으며, 진주에서는 기생출신 여성들이 애국 부인회를 조직하였고, 각지의 기생들도 집단적으로 의연금을 모았다.처음으로 자주독립과 여권획득을 위한 조직적 여성운동이었던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측의 갖가지 탄압으로 인하여 성공하지 못했으나 이 운동을 통하여 여성들의 항일구국적 민족의식은 크게 성장하였다.3. 3.1운동에의 여성의 참여와 항일여성단체일제통치에 저항하여 절대독립을 이룩하려는 3.1운동에 대한 국내외의 준비는 다양하게 추진되었는데 여성계에서도 가 발표되어 국내외로 전달되었다. 3.1운동의 준비단계에서 일본 및 상해에서 활약했던 김마리아, 차경신 등 여성지도자들이 국내로 잠입해 들어와 민족독립운동에 여성계도 적극 참여하도록 지도 활약했다.3.1만세 시위 준비에서 독립선언서의 지방 전달, 태극기의 제작 및 시위 군중을 동원하는 연락 등은 거의 모두 여교사, 여학생, 전도부인들에 의하여 행해졌고, 지방 만세시위에서도 여성의 활약이 없는 곳이 없었다. 특히 지방 중소도시에서의 만세시위에는 여성들이 먼저 독자적으로 계획하여 추진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남자들이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오히려 여성들이 용감하게 준비 실행함으로써 군중들을 시위운동으로 이끌었다. 개성의 어윤희, 수원의 김향화, 안성과 해주읍내의 애국기생들의 시위, 천안 병천의 유관순, 천안 양대와 전주에서의 임영신, 양의 조화벽 등은 모두 그 지역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동한 대표적인 여성들이다.여성들은 31운동의 준비 단계에서부터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를 했으며, 31 운동의 전국적 확대 과정에서는 국내외에서 일어난 모든 시위운동에 참여해 만세를 불렀다. 또한 개성부산해주천안 등지에서는 여성이 주동적 역할을 함으로써 ‘역사 주역으로서의 여성’이라는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했고, 여성항일운동은 민족독립운동에 단순히 참여하는 것이 아금을 송달했다.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여성들의 조직적 활동은 일제의 삼엄한 경계와 취재 속에서도 1920년대 초까지 1~2년 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모두 여성동지를 규합하여 임시정부사업을 지원하기 위하여 군자금을 수합하여 보내는 일과 여성들에게 비밀리에 항일독립정신을 선양하는 일 등을 수행했다.여성들의 민주국민의식은 당시 여성항일운동계의 보편적 현상이었다. 평양의 감리교와 장로교 여신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애국부인회도 평등한 민주국민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의식을 가지고 활동했다. 장로교 측 부인대표인 한영신은 동지규합에서 “독립운동을 남자에게만 맡기는 것은 동포된 의무에 위반되는 것이며 남자에게 수치스러운 일이다. 우리부인도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조선독립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국민으로써 동등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여자도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4. 여성운동의 민족주의계사회주의계로의 분열과 근우회1920년대 여성운동은 31운동으로부터 1920년대 초에 걸쳐 구국을 위한 민족운동으로써의 항일여성운동이 활발했으며, 또한 일제가 식민통치를 원활히 하고자 질서를 확대함으로써 나타나는 여성 억압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순수여성운동이었다.1920년대 여성운동을 성격별로 검토하면 교육을 통한 여성지위 향상운동과 경제적 이권 획득을 위한 여성운동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1920년대 전반기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인한 여성운동의 이념적 차이 때문에 여성운동이 좌우 양파로 분열되었으나 민족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양파가 재통합하여 1927년 근우회를 조직 활동하여 여성운동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다.1919년 4월,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공화정 정부였다.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를 지원하기 위한 비밀 단체들이 국내외에 다수 조직되었는데 국내 여성계에서도 기독교 지식여성층을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많은 항일 여성단체가 극비리에 조직되어 활약했다.1천만 여성을 하나의 세력으로 조직화하려는 목적으위하여 야학을 개설하였고, 부인교육운동을 지방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하기순회강연을 실시하여 청중을 감동시켰으며, 그의 강연에 감동되어 여자야학을 설립한 지방도 있었다.또 다른 대표단체로는 YWCA를 들 수 있다. 당시의 여성운동은 기독교계 중심의 여성운동으로 추진되고 있었으며,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는 31운동 이후 기독교 여성 세력의 증대라는 종교적 배경과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필연적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이는 국제적인 최초의 여성단체였던 만큼 한국 여성운동이 국제사회로 진출하여 새로운 문화교류를 함으로써 여성운동을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끌어 올릴 수 있었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와 물산장려운동에의 참여였다. 전자는 문맹인 부녀대중을 위한 계몽적 여성교육운동이며 후자는 민족자본 육성을 통한 자립적인 민족경제 진흥을 위한 것이었다.그러나 당시 계몽을 통한 민족실력양상으로 민족자치를 얻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확실시되면서 젊은 인텔리 계층은 사회주의적 이념에 빠져들게 되었다. 여성운동에서도 기존의 여성운동 이념이 가지는 한계를 적극 비판하고 새로운 운동이념을 실천적으로 제시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 여성운동으로서 한국여성운동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중요한 단계를 이루었다. 계몽적 수준에 있던 민족주의 여성운동은 노동자농민 운동의 성장, 사회주의 유입, 일제의 민족 분열과 책동에 대한 대응으로 부르주아적 민족주의 여성운동과 사회주의 여성운동으로 분화발전하기 시작했다.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은 여성 문제는 역사상의 경제제도의 변화와 연관되고 계급에 따라 다른 성격을 가진다고 보고, 여성운동의 주체를 여성 노동자로 상정하고 무산 여성들의 완전한 해방을 요구하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대남성 투쟁이 아니라 무산계급운동에 합류해야한다고 보았다.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등장한 사회주의적 여성해방론을 주장한 단체는 조선여자동우회였다. 조선 여자 교육회나 YMCA에 비해 회원수는 적은 편이었지만 당시 최고의 엘리트라 할 수 있는 전문직 여성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 계몽활동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활동이 본궤도에 오르자 구체적인 여성의 요구를 제시해냄으로써 미조직 여성의 조직과 여성운동 방향을 선도하였다. 그리고 조직을 다지고 근우회의 이념을 선전하기 위해 본부 간부들은 지방 순회강연을 하였고, 를 발간하였으며 지회에서는 야학을 설치하고 운동가 양성을 위한 부인 강좌를 개설하였다.지회는 각 지역 여성을 조직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치 문제를 다루어 일제의 탄압을 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단순히 본부의 운동 방침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본부에 요구하여 노동부를 설치하게 하는 등 근우회를 발전시키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근우회는 경찰의 적극적 탄압과 코민테른 지령에 맹종하는 좌파운동의 파괴적 책동과 능력 있는 여성 지도력 부재와 미약한 조직력 등의 이유로 와해되었다.5. 1930년대 부분별 여성운동의 성장1929년 세계 대공황이 전 세계적으로 불어 닥치자 후발자본주의 국가였던 일제는 국내모순 완화를 위해 중국 대륙 침략전쟁을 일으켰고, 조선을 침략전쟁을 위한 병참기지로 이용하려 했다. 일본이 공황의 부담을 조선에 전가함으로써 조선의 민중 생활에 미친 공황의 영향은 더욱 심각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민족은 민족해방을 위해 국내외에서 다양한 형태로 일제와 격렬히 싸워나갔다.(1)여성 노동운동1930년대 전반 노동운동은 사회정세의 변화에 대응하여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운동 방침은 노동자에 기반을 둔 활동을 벌이는 것과 여성 대중을 계급조직인 노동조합에 수용하며, 여성의 특수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 여성부를 둔다는 것이었다. 조직은 산업별 지역 노동조합, 전국적 산업별 노동조합이라는 체계를 갖추었으며, 여성부는 산업별 지역 노동조합 단위부터 설치한다는 방침이었다.운동가들은 각 단위 사업장에서 비밀 소그룹을 만들어 노동자들을 의식화시키고, 이를 기반으로 기관지를 비롯한 출판물을 간행하고 유인물을 배포하였으며, 각종 비밀집회와 투쟁을 통해 노동자를 획득해갔다. 그런데 여성 노동자가 집중된 공장에서 여성 노동자
현재 우리나라의 언론에 가장 큰 주요 관심사로 떠오른 문제는 이라크 파병에 대한 논의이며, 이러한 파병논의는 대통령 재신임의 문제로까지 이어지는 상상도 못한 막대한 결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20세기를 어느덧 지나고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에서도 전쟁은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우리주변에 존재하고 있다. 어느 책에서는 말하기를 전 세계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고작해야 50년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는 세계 평화를 외치면서도 전쟁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과연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는 한 번 재고해 보아야할 문제인 것이다. 세계평화를 외치는 지금의 시대에 미국이라는 강대국은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숨겨져 있다는 근거도 없는 말로써 이라크를 침공했고, 수많은 사상자들을 낳는 전쟁을 치렀다. 몇 달에 걸친 전쟁이 끝났지만 이라크에서는 그 어떤 대량학살 무기도 찾을 수가 없었고, 이는 미국의 행동이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피해를 내놓고서도 미국은 이제는 이라크 재건이라는 명목하에 우리나라에 이라크 추가 파병을 촉구하고 있다. 아무리 우리나라의 경제가 발전했다고 하고, 나라가 이전에 비해서 국방의 측면에서 강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미군이 우리나라에 거주하면서 우리나라의 국방에 도움을 주는 것은 우리가 아직 미국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시사해주고 있으며, 우리나라가 독자적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에서 정말로 대등한 관계를 이루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문제임을 일깨워주고 있다.이러한 이라크 파병 문제를 Thompson and Tuden Model에 대입하여 생각해 볼 때 이 문제는 어느 영역에 속할 것인가?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의 이라크 추가 파병 요청과 관련해서 처음 미국의 요청 시에는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닌 만큼 각별히 신중하게 검토하라고 지시했으며,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일부 언론에 마치 파병을 하는 것처럼 보도되고 있는데, 그런 보도가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험부담이 큰 전투병 파병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비해 국익과 한미 동맹관계를 고려할 때 파병은 당연하다고 답한 네티즌은 26.7%인 1천989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유엔 안보리의 결의가 있을 경우 파병해야 한다고 조건부 찬성 입장을 밝힌 네티즌이 2천7명, 27.0%에 달해 이를 포함시킬 경우 찬성은 53.7%로 늘어난다.이러한 국민들의 반대가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불구하고, 정부는 2003년 10월 18일 이라크 추가 파병을 결정, 공식 발표했다. 정부는 18일 오전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열고 이라크 추가 파병과 이라크 재건 분담금 2억 달러를 향후 4년에 걸쳐 지원키로 결정했다.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오전 이 같은 내용의 3개항으로 된 결정사항을 발표했다.정부는 2003년 10월 18일 국가안전보장회의를 개최하여 이라크 추가파병 문제에 대한 그동안의 여론수렴을 바탕으로, 우리의 국익, 한미관계, 유엔안보리 결의 등 제반사정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첫째 정부는 이라크의 평화정착과 신속한 전후 재건을 지원하기 위하여 국군의 추가파병을 원칙적으로 결정하였다.둘째 파병부대의 성격, 형태, 규모, 시기 등은 미국의 요청을 고려하되, 국민 여론의 지속적 수렴, 제반 현지조사단의 조사결과, 국군의 특성 및 역량 등을 종합 검토하여 이라크의 평화정착과 재건지원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독자적으로 결정할 것이다. 정부는 추가조사단을 가급적 조속히 파견하고, 국회차원의 조사단 파견시 이를 적극 지원할 예정이다.셋째 이와 별도로, 이라크의 재건을 위하여 향후 4년에 걸쳐 2억 달러를 지원할 계획이다. 대이라크 지원액은 금년에 6천만 달러를 포함하여 총 2억6천만 달러이며, 이를 추가파병지역의 재건과 민생안정에 우선 배정되도록 할 것이다.그러나 국회의 이라크 추가 파병안이 통과된 이후 그 동안 반대의 목소리를 내던 많은 사람들조차 “국익을 위한 파병”이라는 명제에 동의하고 있다. 물론 나 역시 끝났다는 점에서 이 전쟁은 역사의 진보일 수 있는 측면으로 볼 수도 있다. 또 전쟁의 부당성을 지적하더라도 이미 끝난 전쟁이기 때문에 과거에 연연하기 보다는 앞으로의 이라크의 문제인 치안유지가 더욱 시급한 문제라는 것이다. 무장공비가 설치는 한 남한에서 경제발전이 잘 이루어질 수 없듯이 후세인 잔당들이 설치는 한 이라크의 경제발전도 어렵고 또 사회 정치적 삶도 고달픈 일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라크 전쟁이 부당한 전쟁이었다고 하더라도 현재 상태에서는 치안유지를 하는 것이 이라크 인들을 위해서, 중동의 평화를 위해서, 그리고 세계경제를 위해서 더 나은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치안유지군을 파병하는 것은 세계평화에 기여하고 이라크 인들의 삶을 향상시키고 우리 군의 세계적 위치를 올리는 매우 도덕적이고 정당한 일이다. 혹자는 이라크인들이 지금 미국의 지배에 맞서서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후세인 잔당과 테러리스트 세력은 이라크를 지배할 능력이 없고, 지금 미군이 빠져나온다면 이라크는 치안공백 정치공백 상태가 되어서 혼란에 빠지고 사람들이 죽어나갈 것이 뻔한 일이다. 파병을 반대는 사실은 이라크인들을 죽으라고 고사지내는 셈이 되는 것이다.또한 파병은 국제정세로 볼 때 국익에 커다란 도움이 된다. 흔히 파병반대파의 논리중의 하나가 파병하면 한국이 미국의 부하로 낙인찍혀서 아랍권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국제위상이 나빠질 것이라고 하는 데 전혀 그렇지 않다. 우선 후세인은 아랍권의 패권을 추구하다가 같은 이슬람국가인 이란과 전쟁을 벌이고, 이슬람교도인 쿠드르족과 동족들을 살인가스로 몰살시키고, 쿠웨이트를 침략하고, 사우디를 위협했던 인물로 전아랍권에서 후세인의 몰락을 환영하고 있다. 반미는 형식적인 요식행위이고 이슬람국가들의 정부와 민중들도 내심은 후세인이 제거된 것 자체는 환영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이라크 치안을 돕는 일은 중동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하는 일로 이라크인, 이란인, 쿠웨이트인, 사우디인, 이집트인들의 지지를 받게 하는 일이지 그 그리고 국익의 3가지로 요약되는데 이 중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실질적 위협을 줄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우선, 경제적 측면에서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가 현재 미국의 휘두른 경제적 영향 아래 너무 오래 지낸 나머지 막강한 미국과 경제적 마찰이 생기면 그 나라 경제는 끝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명제 자체에 대해서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더군다나 대미 무역에 국가 경제를 의존하다시피 하는 우리나라의 경우 두 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이 명제는 현재 두 가지 측면에서 멋지게 뒤집어진다.첫째, 전쟁으로 인한 관계 악화로 경제적 분쟁, 마찰 등이 발생할 경우 그 타격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미국 역시 입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만큼이나 포드, 맥도널드, 버거킹, 할리우드 영화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미국 상품들이 현재 한국 시장을 누비고 있다. 만일 국민들이 뭉쳐서 불매운동 등의 자발적 경제 제재를 한다면 다양한 인종과 실질적이고 개인적인 사고, 넓은 국토를 지닌 그들보다는 강력한 단일 민족의식과 결집력, 2위인 미국을 월등히 능가하는 인터넷 기반 시설을 구축한 우리나라가 불리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과 서로 경제적 타격을 감수한 무역전쟁을 치르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우리만큼이나 미국 역시 외교적 문제의 경제적 영역으로의 확산은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현재 상황이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는 '전쟁'중이고 또한 전쟁 시작이후 경제적으로 세계로부터 점차 고립되어 가는 건 이라크나 우리나라 보다는 미국이고, 현재의 이라크 전의 영향에 따른 경제적 타격을 우려하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나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은 우회적인 공갈과 협박으로 세계를 억누르고 있다. 이에 대해 프랑스, 독일, 캐나다가 미약하게나마 응수하고 있지만 아직 부족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에 러시아, 중국, 한국마저 가세할 경우는 문제가 달라진다. 그럴 경우 미국 역시 강경한 입장보다는 그들의 특기인 미끼나 조건 등을 내걸는 국가는 아이러니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우리와 대치 중인 북한뿐이다. 여기에 외세를 이용하려는 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 할 때 외세의 도움을 얻는 조건으로 고구려(북한)와 통일하는 대신 대동강 이북의 일부를 내주어야 했다.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와 대치하는 북한보다 우월한 입장을 차지하기 위해 외세를 이용했다가는 그들이 이에 대해 어떤 보상을 요구할 지 아무도 모른다.이제 마지막으로 '국익'을 논해보자. 이미 경제적, 군사적으로 어느 것이 국익에 따르는 것인지는 판단이 섰을 것으로 간주하고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겠다. 혹자는 우리가 파병하는 군인들은 전후 복구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공병과 의료진이므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동맹국과의 예우 차원에서 국가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전후 복구에는 미국의 발표대로 반전 국가들도 참여할 것이고, 만일 진정 전후 복구 참여가 목적이라면 '군인'의 이름을 가진 공병과 의료진이 아니라 해당 부문의 준 전문가들이나 자원 봉사자들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평화가 목적인 전후 복구 사업에 자원 봉사자들을 놔두고 군인을 보낸다는 건 세계 평화와 이라크 난민 해방을 위해 이라크를 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애써 구색 맞춘 명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동맹국과의 예우도 그들이 침공을 받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9.11 미 테러의 날에 미국과 함께 세계에서 유일하게 전 국가가 묵념을 하며 동맹국으로써의 예우를 '한 껏' 과시했다. 전후 복구 사업 사이에서 떨어지는 고물이라도 주워 먹으려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국가적 가치를 떨어뜨리고 국가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일 밖엔 되지 않는다.이라크 추가 파병문제에 대해서 논의 된지도 몇 달이 지나고, 파병결의안이 발표된 후로도 거의 한 달여가 지나고 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국민들과 정부는 서로의 입장을 고수하기 보다는 서로의 의견을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이라크 추가 파병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이 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