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해방이후 지금까지 그 어느나라보다도 교육열이 높은 결과 지금과 같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한 만큼 교육제도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과 함께 많은 부작용이 뒤따랐다. 그와 함께 교육제도 또한 여러번 바뀌었다.그중에서 제일 심각한 것은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서 초,중,고 12년동안의 교육이 너무 입시지향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지금 교육제도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제 7차 교육과정에서 채택한 것이 수준별 교육과정이 그 골격을 이루고 있다. 그럼 왜 이것을 채택했고 그에 따른 장·단점과 해결방안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1.평등한 교육과 차별적인 교육우리가 받은 교육은 평등한 교육의 범주에서 받아왔다고 볼수 있다. 즉 이평등한 교육이라는 것은 60·70년대를 거쳐 입시지옥과 이로 인한 학교교육의 파행을 잡기 위한 방편으로 중·고등학교의 평준화 정책으로 인한 교육이라 보면 될 것이다. 이것은 각 개인의 능력에 따른 교육이 아니라 모든 학생이 똑같은 능력이라 간주하고 가르치는 것이라 할수 있겠다.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하듯이 교육과정 또한 변화되어 가고 있다. 제7차 교육과정에서 말하는 수준별 교육과정이 그것이다. 수준별 교육과정을 수준별 수업이라 말하는데 이것은 개별화 수업, 수준별 수업, 수준별 교육과정의 세 부분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개별화 수업은 모든 학생들의 수준에 받는 비계를 설정해 주는 수업이다. 또 수준별 수업은 학생들의 수준을 고려하여 교사가 학생 개개인에게 적합한 교육적 처치를 하는 수업을 의미한다. 그리고 수준별 교육과정은 수준별 수업을 지원하기 위해서 교육 목표, 내용, 방법, 평가 등을 학생의 수준에 따라 달리 설정할 수 잇도록 편성, 운영하는 교육과정을 말한다.그러면 이중에 지금 우리의 교육실정에 맞는 것은 차별적인 교육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위에서 평등한 교육과 차별적인 교육에 대해서 설명했는데 지금까지의 우리의 교육은 너무 획일적이고 입시위주의다. 서당의 훈장은 학생 개개인에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교육 내용과 방법을 활용했으며, 학생의 학습 정도에 따라 학습의 진도나 깊이를 달리했다. 이런 서당씩 교육에서는 늦게 공부를 시작했어도 앞서가는 학생이 있는 반면에 일찍 공부를 시작했어도 뒤쳐지는 학생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너무도 당연한 교육 현상으로 여겨졌었다. 우리 서당에서는 교육의 이상으로 간주되는 개별화 교육이 이처럼 비교적 충실하게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서당 교육은 비공식적인 사설교육일 뿐만 아니라 교육이 보편화되기 이전에 소수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학교 교육과 그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볼 수있다. 두 번째로 근대 학교의 개별화 수업을 들 수 있다. 19세기 말에 도입된 서양 근대 교육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교육의 효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근대 학교는 수준별 수업을 실시했다는 여러 흔적들을 발견할 수있다. 당시 학사 운영은 요즘처럼 학년제가 아니라 승급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정기간 학습 후에는 승급이나 졸업을 위한 실험이 치러졌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우리는 근대 학교에서도 학생들의 수준에 따라 서로 다른 교육적 처방을 제시하고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로 해방 직후의 학교 교육을 들 수있다. 1954년부터 초등학교 6년 무상의무교육제도가 실시되면서 중·고등학교 진학 희망자들이 대폭 늘어나게 되었고, 이러한 진학 희망자의 증가로 인하여 중등학교 진학을 위한 입시경쟁이 가열되었다. 그 결과 학생들의 입시 성적에 따라 학교는 일,이,삼류 학교로 구분되었고 이러한 학교간 서열은 다시 입시 경쟁을 과열시키는 악순환의 교리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파행적인 교육정책은 60,70년대를 거쳐 평준화 정책이 실시되었다. 평준화 정책을 도입한 기본 의도는 여러 측면에서 학교의 평준화를 단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공사립 구분 없이 학생을 추첨 배정함으로써 학생을 비롯한 교원, 시설, 재정등의 투입 요인을 평준화하여 교육의 과정이나 성과 면에내용과 방법을 제공하여 그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현시키도록 하고 부진 학생에게도 역시 그들의 수준에 적절한 교육 내용과 방법을 제공하여 그들 자신에게 의미있는 학습이 이루어지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우수학생과 부진 학생 모두가 자기들의 능력에 적합한 교육을 받음으로써 학교의 교실 수업이 모든 학생에게 진정한 의미의 배움의 장 또는 인간 성장의 장이 되도록 할 필요가 잇다. 즉 수준별 수업의 도입이 요청된다.학생들을 학업 성취 수준에 따라 다른 학습 집단으로 편성하여 수업을 진행함으로써 현재의 수업 운영 방식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따라서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지금 우리 학교교육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동일 학년의 모든 학생에게 동일한 교육 내용과 방법을 통한 교육인 평등한 교육이 아닌 학생의 학업 성취 수준과 같은 특성을 고려하여 각자에게 적합한 교육 내용과 방법을 통한 교육인 차별적인 교육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 앞으로는 국제 사회는 무한 경제시대에 접어들고 있는 이 마당에서 각자의 능력에 맞는 차별적 교육은 시대의 흐름에도 부응하기 때문인 것이다. 옛날 서당선생님에게서 나이와는 상관없고 오로지 능력위주의 교육을 되짚어 보는 것 또한 좋은 교육적인 효과를 볼 수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것은 얼마전부터 불고 있는 열린 교육과도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앞으로는 차별적인 교육이 아니고서는 21세기에 새로운 지식사회를 열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2.학교간 수준별 집단 편성과 학급간 수준별 집단 편성 방법우리 나라는 지금까지 학급간 수준별 집단 편성은 아주 조금정도만 해왔고 대체적으로 60,70년대에 걸쳐서 학교간 수준별 집단편성의 교육제도를 했었다. 그러나 그것의 많은 문제점으로 인하여 평준화 정책을 지금까지 써왔다. 그래서 나는 그때의 시행착오와 나의 생각으로 학급간 수준별 집단 편성 방법이 옳다고 본다.그럼 먼저 외국의 수준별 집단 편성 사례를 보겠다. 미국과 영국같은 경우 수준별 반 평을 선호하고 있으며 일본과 독일의 경우 학교우프트술레로 삼원화되어있다. 따라서 독일의 고등학생들은 자신이 진학할 학교를 결정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학습 능력이나 진로에 따른 차별화된 교육과정을 자연스럽게 대면하게 된다. 이는 결국 독일 고등학교의 각 교실 수준에서 학생들의 학습 능력차를 상대적으로 줄이는데 기여한다.위의 네 나라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각 나라의 교육환경에 맞게 적용시켜 교육하고 있고 어느것이 더 낫다 아니다라고는 판단하기는 힘들고 그것들을 참고로해서 우리가 어떤 것이 더 적합한지를 찾아야 한다. 그럼 왜 내가 학교간 수준별 집단 편성보다는 학급간 수준별 집단 편성 교육을 고집하는지 위의 네 나라경우를 살펴보았고 여기서 덧붙여 얘기 하겠다.먼저 비평준화 교육과 평준화 교육의 장단점을 잠깐 비교해 보겠다. 비평준화 교육은 1960,70년대에 걸쳐 비평준화 정책을 추구해왔다. 이런 교육의 장점은 교육의 효율성을 추구할수 있다는 것이다. 학교별 시험을 통해 학생을 선발한 경우, 학생간의 능력 차이가 줄어들게 되어 단일 수준에 의한 수업 지도가 가능해진다. 학생간의 능력 차이가 적기 때문에 이동수업을 실시할 필요도 없으며, 수업 준비에 있어서 교사의 부담도 크게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이런 비평준화 교육의 단점은 입시경쟁, 사교육비 증가, 불평등 재생산이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학교의 위계화는 서열화를 고착시킨다는 것이다. 입학하기 어려운 학교에서부터 원하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학교에 이르기까지 전국구의 모든 학교가 일렬로 세워지게 된다. 이러한 학교의 위계화, 서열화는 다시 입시 경쟁 부추기면서 교육의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입시 위주의 교육은 하급 학교 교육의 파행이라는 문제와 사교육비의 증가라는 두 가지 문제를 가져온다. 일류 고등학교에 보다 많은 학생을 진학시키기 위해서 중학교 교육은 입시 위주 교육으로 운영될 것이고 중학생들은 일류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하여 방과 후에 학원 수강이나 개인과외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 비평준화 교육의 또 다른 문 평준화 정책을 통해 우리가 얻은 가장 중요한 소득은 하급 학교 교육을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이제 중학교는 해당 학교급의 본래 교육목적에 충실한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교육과정 운영의 효율성을 통한 교육의 수월성을 추구하더라도 평준화 정책의 가장 큰 소득이라고 볼 수 있는 하급 학교의 교육 정상화를 해치지 않도록 유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고등하교 평준화 정책의 기본 골격을 유지하면서 교육의 효율성을 추구할수 있는 학교내 수준별 집단 편성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셋째, 학교 교육은 학생들의 학업 성취 능력만으로 모든 것이 평가될 수 있는 그러한 영역이 아니다. 요즘 우리 교육 개혁 논의에서 강조되고 있듯이, 인성과 창의성 신장도 매우 중요한 학교 교육의 목적이다. 따라서 인성이나 창의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희생해가면서까지 학업에 있어서 수월성을 추구해야 한다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인성 교육이나 창의성 교육과 밀접히 연계될 수 있는 평준화 교육 체제는 계속 유지해 가되, 교과 영역에서 교육의 수월성을 추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방안은 학교내 수준별 집단 편성 방안으로 구체화 될 수 있을 것이다.지금까지 학급간 수준별 집단 편성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지금까지 설명했다. 그것은 바로 짧은 학교교육의 역사를 가졌지만 그간의 장단점을 분석해 본 결과 내린 결정이고 또한 다른 나라의 교육과정도 참고로 했었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볼 때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3.수준별 수업을 진행하고자 할 때 예상되는 평가 관련 문제수준별 수업을 진행하고자 할 때 예상되는 평가 관련 문제에는 여러 가지 있다.속진 및 재이수문제, 수준별 반/분단 편성문제, 수준별 교수-학습 자료 개발문제, 수준별 교수-학습 방법 문제, 교사의 전문성 신장 문제, 수준별 교육자체내에서의 평가문제등이 있겠다.그럼 이런 문제들과 그와 함께 해결 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있다.
샤넬샤넬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기업이다. 또한 화장품의 대표적인 기업이다. 또한 화장품의ㅏ 대명사다. 샤넬은 또한 비밀주의를 고수하면서도 널리 알려지고 비약적으로 성장한 비결을 마케팅이나 기술력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패션상품은 대량 생산제품과 달리 각 개인의 취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또 전문가들은 샤넬의 가장 큰 성공비결로 eokd대 패션기업 가운데 드물게 현대기업의 경영방식을 일찌감치 받아들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사실 샤넬 같은 천재 디자이너가 사업적 감각까지 갖추기는 불가능하다. 이를 깨달은 샤넬은 경영까지 고집했던 경쟁자들과 달리 전문경영인인 유태인사업가 베르트하이머를 동업자로 받아들여 회사경영을 일임했다. 가족 경영에 의존하던 당시 패션업의 통념을 깬 것인데ㅣ, 이는 적중했다. 베르트하이머는 취임후 오트쿠튀르에서 벗어나 보다 대중억인 제품, 이를테면 향수 같은 사업을 적극 추잊ㄴ했다. 이런 기조는 수십년ㄴ 동안 유지돼 샤넬은 60, 70년대를 지나면서 색조 및 기초화장품 등을 모두 포함한 종합화장품회사로 계속 변신해 대기업의 터전을 닦을수 잇엇다. 샤넬의 후배격인 크리스티앙디오르, 이브 생 로랑, 아르마니 등 걸출한 디자이너도 자신들의 오트쿠틔르 사업을 보다 키우기 위해 향수와 화장품 사업으로까지 영역을 넓히는 등 샤넬의 성장모델을 따르게 된다.또한 샤넬의 도 다른 성곡비결로 영석성을 최우선시하는 경영전통이 꼽힌다. 흔히 현대기업은 매출성장에 집착한다. 그러나 샤넬은 지긁까지 규모위주의 경영을 외면해 왔다. 회사 rbahqhekms 희소성과 고유이미지 유지가 중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탓인지 샤넬의 순이익은 인기만큼 많지 않다. 그룹전체읫 순이익률은 9%정도로 추정된다 샤넬 브랜드으이 경웅 37억 프랑의 매출 중 순익이 4억 4100만프랑, 부르주아 화장품은 16억 프랑 매출에 순이익이 1900만 프랑 가량 된다.여성을 위한 패션혁명{{고급스러움, 여성스러움의 상징인 샤넬은 그 명성만큼이나 수많은 이야기거리를 가지고 있다. [샤넬족]이라는 충성도 높은 소비자들이 사회적 집단으로 주목 받을 정도로 브랜드가 주는 의미는 기능 이상의 것으로 상징화 되었다. 수많은 여성들은 샤넬을 걸침으로써 스스로 당당해지고, 그 귀족문화 체험은 투자한 가치 이상으로 그들을 만족시켜 샤넬의 유혹에 빠지게 한다. 그렇다면 샤넬은 귀족문화 상징과 파격적인 고가로 여성의 사치와 허영, 자존심을 부추기려는 브랜드인가? 단순히 그렇다고 말하기엔 샤넬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너무 크다.샤넬의 모태인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은 1883년 프랑스 소뮈르에서 가난한 행상인의 딸로 태어나, 12살부터는 고아원에서 자라는 등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녀의 인생은 에띠엔느 발산(Etienne Balsan)이라는 부유한 남자를 만나고부터 상류계급과 인연을 맺게 되어, 자신이 가진 남다른 감각을 표출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부유한 연인들의 도움으로 시작한 모자상이 사교계에서 꽤 인기를 얻게되자, [샤넬 스타일]은 의상으로까지 확대되었다.앙드레 말로가 “샤넬은 드골, 피카소와 더불어 우리 시대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라고 극찬했을 정도로 샤넬의 옷은 한 시대의 의복역사에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부르주아 시대였던 벨 에포크(Belle poque)시대의 하늘하늘한 프릴장식, 부자연스럽게 몸을 조인 코르셋으로부터 파격적인 해방을 추구하였다. 남성속옷으로 쓰이던 져지천을 이용해 편안한 여성복을 만들었고, 귀족풍의 긴 치마를 무릎길이로 잘랐다. 부르주아 시대의 재력의 지표였던 보석을 색유리로 모조해 대중화시켰으며, 어깨에 둘러매는 백으로 여성들의 손을 자유롭게 했다. 또한 1921년 세계최초 디자이너 향수, [CHANEL No5]를 발표하면서 옷, 액세사리, 향수까지 포괄하는 토탈룩(Total Look)을 완성하였다. 20세기 모던패션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한 샤넬의 시도는 가히 패션혁명이라 칭할 수 있을만큼 의미있는 도약이었다.골드 버튼과 체인, 다이아몬드 모양의 누빔가방, 가장자리에 테두른 자켓 등 새로움의 선두에 서있던 샤넬 스타일은 시대를 이끄는 유행을 넘어서서 샤넬의 상징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이제, 두개의 C가 등을 겹치고 있는 샤넬 로고만으로도 그 가치는 압축되어 전달되고 있으며, 여성복뿐 아니라 액세서리, 화장품, 보석류, 남성용넥타이에 이르기까지, 로고가 새겨진 모든 제품들은 전통있는 명품로 존중받고 있다.
대우1. 대우의 세계경영과 대우자동차과거 대우그룹은 김 우중 회장의 지휘 아래 단순히 국내에서 상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체계에서 벗어나 자사의 해외투자를 늘리면서 현지화된 법인을 통해 세계시장으로의 거점확대를 꾀하는 이른바 세계경영을 기업의 전략으로 내걸었다.대우 이외의 다른 국내 기업들도 1980년대 이후 국내 노동시장의 임금상승과 노사분규 등을 피해 해외투자로 눈을 돌리고 있었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그 당시 대우가 여타의 기업들과 차별된다고 볼 수 있는 특징은 해외에 직접 자기자본, 혹은 합작자본으로 신규 진출하는 투자가 아니라 현지에 있는 기존 우수 기업들에 대한 적극적인 M&A를 통해 진출하는 공격적인 경영에 있다.국내 자동차업계의 빅 3라 불리는 현대, 기아, 대우의 3파전에서 대우자동차는 항상 가장 낮은 국내 시장점유율을 기록해왔다. 유통조직 및 판매에서 강세를 보이는 현대, 기술적으로 차별화되는 품질을 내건 기아에 비해 대우자동차는 세계 최대 자동차 업체인 GM과의 협력 아래 생산하는 대부분의 차종을 GM으로부터 제공받기는 했으나 신차개발에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시장점유율은 호전될 줄 몰랐다. 1992년 말 GM과의 전략적 파트너관계를 청산한 이후 대우자동차는 적극적으로 해외투자에 관심을 보이며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등의 동유럽과 인도, 중국,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지역의 10개국에 2000년까지 단계적으로 약 95만 대의 생산기지 건설계약을 체결하면서 3사 중 가장 적극적인 해외진출을 보였다. 그 당시 유럽 최전선에 선 한국업체 중 가장 돋보이는 업체는 단연 대우자동차였고, 대우의 대유럽 수출차량은 1995년 당시 전년대비 무려 20배를 넘어섰다. 그러나 대우의 유럽공략 진수는 역시 기업사냥이었고, 쓰러져가는 동유럽의 자동차업체 한두 개를 인수하기 시작 하더니 서유럽과 러시아까지 손길을 뻗쳤다. 그 당시 대우 관계자 들과 경제 전문가들은 대우가 2000년까지 계획횃던 해외생산 1백만 대 중 80%가 유럽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그P승용차중소형트럭20,000*20,000110,000*60,000FSO승용차25,000*100,000250,000*150,000{루마니아승용차100,000200,000체중**{25,00025,000형트럭코{우즈벡승용차/경상용200,000200,000승61{60대15{,000 ,000 형버스,000 0,000 용차{동남아필리핀승용차대형버스-50010,000500{베트남승용차대형버스20,0002,00020,0002,000인승33{,000,000용차도네시아{중동이란승용차-50,000이집트승용차-20,000*1,500중국*25,000*10,000중형트럭인도4. 폴란드 FSO사 인수의 의미대우자동차는 FSO사를 최종 인수함에 따라 불과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해외생산능력 1백만 대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또한 2000년대 세계 최대의 자동차시장으로 부상하는 유럽지역을 공략하기 위한 전초기지를 동유럽에 구축했다. 또한 대우는 특히 동유럽국가에만 58만 대에 이르는 생산체제를 갖춰 이 지역의 강력한 자동차업체로 부상하였던 것이다. 폴란드 최대의 자동차그룸으로 올라섰으FSO사는 승용차 22만 대 등 모두 31만 대 생산체제를 구축하게 돼, 생산규모면에서 이탈리아 피아트사의 합작회사인 FSM사를 앞서게 된 것이다.이처럼 대우가 폴란드지역에 집중적으로 투자한 이유는 무엇인가? 1994년으로 거슬러올라가면 2월 1일자로 EU 준회원국에 관한 협정이 발효되면서 동서유럽을 잇는 지리적 요충지인 폴란드가 일약 유럽지역 생산기지의 최대 후보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런 지리적 요건과 아울러 기술수준의 낙후, 설비대체의 미흡 등 산적한 문제를 외국기업의 투자로 해결하려는 폴란드 정부의 노력도 한몫을 차지했다. 또 한 가지는 동유럽 국가 중 가장 많은 3천8백만 명의 인구가 시장잠재력으로 평가받기 시작한 것이다. 폴란드는 GNP 성장률이 1993년 3.8%, 1994년 4.7% 등 침체에서 벗어나고 있는 경제와 맞물려 600만 대에 이르는 자동차 교체시기가 도래하여 연간 승용차 30만대를 상, 정보력과 금융력, 해외 영업력을 갖춘 종합상사 본연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미래 전략사업으로 부상하고 있는 해외 자원개발사업에 뛰어든 주식회사 대우는 현재 에너지,비철금속, 물자 등 3개 분야의 자원개발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으며, 일부 석유가스 개발 사업에서도 투자의 결실을 거두고 있다.◎ 철강금속 : 국내 최대 제철소인 포항종합제철㈜를 비롯한 37개 국내철강제조업체의 수출창구이며 수입 및 삼국간 무역도 활발히 추진하고 있는 국내 최대의 Global steel & metal trader이다.이미 1999년 수입, 수출, 삼국간무역에서 총 9억 4천만불의 실적을 기록하였으며, 현재 중국,베트남, 태국 등 아시아지역에 6개의 투자법인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또한 철강금속본부는 새로운 paradigm의 철강금속제품 무역시장을 선도하기 위해 전자상거래무역시스템의 구축을 적극 추진중이다.◎ 비철화학* 비철 : 비철 1,2팀은 알루미늄, 구리, 동, 아연, 주석, 니켈, 납 등의 주요 비철금속의 원자재 수입과 이를 활용한 제품 및 금, 은, 기타 귀금속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또한 전세계 해외지사 네트워크를 이용한 삼국간 거래를 추진하고 있으며,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해외 공급선 확보를 위해 전문적인 금융기법과 평가방법 등을 이용한 투자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화학 : 지난 20여년간 우리나라의 화학제품 수출을 주도해 왔으며, 끊임없는 시장확대 전략 및 신규 품목 개발에 힘을 쏟고 전문생산업체와 해외동반 진출을 통한 시장확대 협 력에도 앞장서고 있다.◎ 자동차부품1999년에 전년대비 17%신장한 7억 2천만불을 수출하여 국내 자동차부품 전문 소식으로서 족보적위시를 확고히 한 자동차부품본부는 20억불 수출 체제 기반을 구축하기 위하여 국내외 전문 자동차부품 생산업체와의 협력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고수익 핵심 사업 및 신제품 개발에 영업 자원을집중하여 북미, 유럽, 일본항 조립용 부품 및 개도국향 보수용 부품의 수출 확대를 계획하고 있다.- 대우의 경영방향인 수출지향과년 11월제12회 수출의 날 최다액 수출유공 대통령기 수상1976년 11월제13회 수출의 날 3억불 수출탑 수상1977년 11월제14회 수출의 날 4억불 수출탑 수상1978년최초의 플랜트 수출 수주International Tyre Manufacturing &Distribution Co., Ltd. (수단 타이어공장)1978년 11월제15회 수출의 날 6억불 수출탑 수상 (수출실적 1위)1979년 11월제16회 수출의 날 10억불 수출탑 수상1981년 11월제18회 수출의 날 15억불 수출탑 수상(4년 연속 최다액 수출)1982년 1월주식회사 대우 출범(대우개발(주)와 합병)1982년 11월제19회 수출의 날 20억불 수출탑 수상1983년 6월국내 최초, 월수출 5억불 달성1983년 11월제20회 수출의 날 25억불 수출탑 수상1984년 9월인도네시아 무수프탈산(P.A.) 플랜트 합작 투자 계약1985년 1월나이지리아에서 질소 비료 플랜트 수주1987년 8월미얀마 철도차량 공장 준공1988년 1월동베를린 지사 설치공산국가와 본격적인 교역 추진1989년 6월인도네시아 종합섬유합작공장 설립 계약1989년 7월잠비아, 에티오피아, 미얀마 봉제공장 설립 계약1990년 1월모스크바 지사 설치1990년 12월미얀마 합판 제조공장 합작 설립 계약1991년 10월북경지사 설치1992년 6월중국 대련 가방·텐트공장 본격 가동1993년 2월국내 최초 페놀 플랜트 중국 수출 계약1993년 5월베트남 농약원제 생산 합작공장 설립 계약1993년 7월'93 대전세계박람회 참가, '인간과 과학관' 개관1995년 5월국내기업 최초, 대북 협력사업 정부 승인 획득1995년 10월국내 종합상사 최초, 중국 지주회사'난생대우유한공사' 설립1995년 10월중국 남경 판유리 합작생산 공장 준공1995년 11월베트남 최초 타포린 합작생산 공장 준공1996년 5월앙골라 대규모 유전 발견(지분 18.75%)1996년 6월페루 육상 유전 인수 입찰 수주(지분 11.67%)1996년 11월제33회 무역의.2>김우중 회장의 경영철학과 대우의 경영기법: 대우는 창립이래로 특색있는 경영방식으로 손꼽히는 것은 바로 인수합병이었다. 이를 통해 대우가 대기업으로까지 성장을 하였다. 그런데 이 경영방식은 김우중회장의 고집있는 경영철학에서 나온 것이었다.세계경영: 국내에서 기반을 갖춘 대우가 세계시장을 상대로 나선 것은 93년 세계경영을 선언했다. 그리고 4년, 세계경영은 절정으로 진입하였다. 세계경영의 가시적 성과는 김회장에게 자신감을 주었고, 해외거점은 세계경영 출발 당시 175개에서 95년 257개, 96년 430개, 97년 600개 등으로 급속히 늘어났다. 세계경영을 통해 해외산업기지 1000개 이상, 총매출액 1780억 달러(해외 매출 890억 달러), 총 고용인력 35만 명(해외 현지인력 25만명)이상을 달성하겠다 는 야심찬 목표도 나왔다.특히 해외공장의 고용인력이 국내 인력(10만명)을 넘어서면서 대우와 김회장은 세계적인 뉴스메이커로 등장했다. 김회장은 5000년 역사에서 우리 민족인 수만명의 외국인, 특히 백인들을 고용한 적이 있느냐 며 그 의미를 강조했다. 당시 대우의 매출액은 우리나라 국민총생산의 12%에 육박하는 56조원으로 늘어났으며,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빠르게 성장한 기업이 되었다.또한 저렇게 늘리다 어떻게 수습하겠다는 것인가라는 의혹의 눈길을 보내던 경쟁기업들조차 대우가 2005년 국내 최대의 그룹이 될 것이라는 유력 종합지의 기사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 정도다. IMF한파 속에서도 감량이나 구조조정과는 거리가 먼 대우는 주요 그룹 회장들에게 경이를 넘은 경악의 대상이었다.그러나 이런 대우가 99년 퇴출대상의 기업으로 선정이되고 여러사업과 꿈을 정리해야 했다. 하지만 김회장과 대우의 위기는 다른 재벌그룹이나 총수들의 그것과는 좀 다르다. 우선 김회장은 창업자나 30대 재벌그룹 가운데 창업자가 활동하는 곳은 한손에 꼽을 정도다. 김회장은 30대 그룹 가운데 가장 뒤늦게 창업해 가장 고속으로 성장한 기업인이다. 벤처기업들의 성공스토리가 늘
윤리학의 분류우리는 살아가면서 언제나 딜레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또한 도덕적인 딜레마에 빠질때면 많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처럼 도덕,윤리는 일상생활 속에 항상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윤리학이란 도덕의 본질과 근거에 대한 철학적 탐구라고 정의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도덕이란 행위에 대한 판단, 표준, 규칙을 의미하며 이를 탐구하는 윤리학은 일반적으로 기술 윤리학, 규범 윤리학, 분석 윤리학으로 구분된다. 기술 윤리학은 도덕 현상에 대한 과학적 기술을 의미하고 규범 윤리학은 도덕적 표준과 규칙을 구축하고 정당화하는 것을 뜻하며, 분석 윤리학은 도덕적인 논의의 의미를 따지는 활동이라고 간략하게 정의 내릴 수 있다.먼저 기술 윤리학은 기술(記述)이라는 낱말의 사전적 의미를 통해서 의미를 대략적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기술이라는 말은 그 자체에 경험적이고 객관적이며 그래서 과학적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기술 윤리학이란 일상 생활에서 개인에게 구체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현실의 도덕은 과학적인 절차를 통해서 기술되고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기술 윤리학자들에 의하면, 개인의 행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도덕률은 그가 살아오면서 겪은 여러 가지 사회 문화적, 역사적, 심리적인 경험을 통해서 구성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경험적이고 귀납적인 방법을 통해서 연구될 수 있으며 그가 가진 도덕판단은 정확히 기술될 수 있고 동시에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한 과학적 탐구 또한 가능하다. 따라서 기술 윤리학은 한 개인의 생활, 사회의 구조와 기능 속에 존재하는 도덕 현상을 경험적이고 과학적으로 탐구하여 이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험적 지식은 현실 도덕에 대한 과학적 기술이며 설명이라 할 수 있다.도덕현상을 사실로서 연구하는 기술윤리학은 도덕규범은 역사적으로 크게 변천해 왔으며, 문화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사회체계가 다름에 따라서 도덕도 다르며, 도덕에는 유일, 절대적, 보편적인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일종의 상대주의를 인정하게 한다. 기술윤리학은 도덕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여 주기는 하지만, 두 개의 도덕체계가 주어져 있을 때 우리가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지시해 주지 못한다. 여기에 기술윤리학의 한계가 있다.다음으로 규범윤리학은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윤리학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은 도덕 현상의 실증적 연구가 아니라, 도덕의 본질과 규범 등에 대한 철학적 연구를 그 대상으로 한다.규범윤리학자들은 모든 도덕행위자들에게 타당한 도덕규범의 일관된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탐구한다. 여기서 도덕행위자란 도덕적 표준과 규칙에 따라 사고할 수 있고 결정할 수 있으며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도덕행위자라고 해서 항상 도덕적 표준 또는 규칙에 따라 살아갈 수는 없다. 즉 그는 도덕적으로 완벽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기준을 근거로 해서 스스로 판단하고 또 그것을 자기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지침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 하나의 도덕적 표준이나 규칙이 모든 도덕행위자들에게 타당하다는 말은 어떤 도덕행위자들의 성질과 행동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것에 호소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표준과 규칙들이 정연한 체계를 이룬 것을 규범윤리적 체계 라고 부르며 그러한 체계를 구축하고 정당화하는 활동을 규범윤리학이라고 한다.요컨대 규범윤리학은 철학적인 사고에 의해 삶의 지침으로서 정당하게 채택할 수 있는 표준과 규칙이 있는가의 물음에 답하려는 체계적인 시도라 하겠다. 규범윤리학은 목적론적 윤리설이나 의무론적 윤리설과 같은 순수 규범윤리학과 환경 윤리, 성 윤리 등과 같은 응용 규범윤리학으로 나누어진다.과학의 발달, 특히 20세기이래 과학의 눈부신 발전에 따라 사람들은 규범 윤리학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분석윤리학은 대체로 말해서 이와 같은 시대사조에 발맞추어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분석윤리학은 윤리에 대한 분석철학자들의 이론이다.분석철학의 기본적인 특징은 형이상학적 전제를 내세우는 것을 배제하며 분석을 통해서 문제의 명확화와 그 해결을 꾀하는 데 있다. 이 때 우리의 사상이나 사고는 주로 언어에 의해서 표현되고 전개되므로 언어분석을 주요 임무로 삼는다.
고대 그리스 교육1.그리스 도시국가의 특징그리스의 도시국가는 수천명 혹은 그 이하의 인구로 구성된 소규모 공동체 국가이다. 그런데 그런 인구를 가지고도 과연 독립된 국가를 이룰수 있느냐 하는것인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폴리스는 엄연한 독립국가였다. 오늘날에도 국가의 성격을 평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기준은 정치적 독입과 경제적 자립일 것이다. 오늘날 일부 독립국가 가운데는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는 나라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의 폴리스는 정치적으로 독립적이었고 경제적으로도 자립적이었다. .고대 그리스인이 정착한 그리스 반도는 대체로 오늘날의 스위스보다 약간 큰 지역이다(57,000㎢). 이 일대에는 산악이 많고 해안선은 매우 변화가 심해서, 포르투갈보다 작은 이나라가 스페인만큼의 해안선을 갖고 있으므로 자연적으로 좋은 항구를 많이 개발할 수 있었다. 그리스 본토 중앙에는 핀도스산맥이 있으며, 서남의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평균 해발600미터의 높은 지대이다. 그리스의 지형은 대체로 일반 곡물의 재배에 적당하지 않으며, 그대신 올리브나 그 밖의 과일재배에는 적절하였다. 기후는 매우 온화한 편이며, 아테네에는20년만에 한번 얼음이 어는 정도이다. 여름에는 바닷바람이 더위를 어느 정도 완화시켜주므로 아테네인은 소박한 의·주 생활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지리적 배경을 전제로 폴리스가발달했던 것이다.그리스인은 대체로 기원전 1000년경까지 씨족공동체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집단적 단위는 공동의 종교적·사법적·생산적 기증을 하였다. 생산은 공동으로 하고 토지경작에서 나온 생산물은 균등 분배하였다. 그러나 이윽고 이러한 자급자족의 경제형태에 변화가 와 토지는 추첨에 의해 분배되고, 세습적인 사유지로 되었다. 토지가 사유화되면서 종래의 혈연사회가 지연 사회로 바뀌어 기원전 9∼8세기에는 폴리스가 성립하였다. 왕은 동방적 전제군주와 다르며 비록 사법·군사·종교를 관장하고 있었으나, 왕 아래에는 선거에 의한 각 촌락조직마다 있는 장로회의의 결정이 큰 영향을 갖고 있었같은 과정을 거쳐서 정치적으로 성장했다. 초기 도시국가의 정체는 군주제였다. 토지를 많이 소유한 귀족이 경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기원전 8세기에 군주제는 소수 독재정치로 변모되었다. 약 100년 뒤에 무역과 상업 그리고 산업이 주요활동이 되었고, 도시에 중류계급이 출현했다. 무산농민들은 토지를 소유한 독재자를 전복시키려고 했던 중산계급과 힘을 합쳤다. 그 결과로 생긴 갈등의 과정에서 야심에 찬 선동가들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대중의 불안을 이용했다. 독재자들은 도시국가에서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기원전 6세기와 5세기에 독재자의 통치에 대한 불만이 고조된 결과로 공화제 민주정체가 수립되었다. 일부 도시국가에서 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이 정치를 했다.스파르타는 예외적인 도시국가였다. 스파르타를 수도로 삼았던 라케다이모니아 사람들은 과두정치체제를 뛰어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스파르타인은 호메로스적인 풍조를 지니고 있었다. 스파르타인은 특히 그것을 군사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이웃지역에서 문화적, 지적 그리고 정치적으로 발전하고 있던 시기에도 스파르타인은 편협한 생활방식을 고수했다. 그들은 호메로스의 탁월성을 전쟁기술의 개발로 간주했다. 스파르타는 폐쇄사회의 원형이었다. 스파르타는 군사적 측면을 강조했으며, 가장 보수적인 형태를 취했던 도시국가였다.대부분의 폴리스들은 대체로 인구방출이라는 대안을 택했고, 그리하여 8세기 중반부터 한세기 이상에 걸쳐 조직적으로 해외식민지 건설이 추진되었다. 또한, 폴리스의 영토확장은 분명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식민지화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기원전 8∼7세기에그리스의 식민운동이 활발해지고 아울러 교역도 발달되었는데, 이 양자 사이에는 상호관계가 있었다. 그리스의 식민운동의 이유는 여러 가지로 생각될 수 있다.첫째로, 귀족층에 의해서 토지가 집중적으로 독점되어 영세농이 증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지적될 수 있다. 그 결과 농민들은 새로운 경작지를 찾기 위해서 밖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둘째로, 폴리스 자체의 성장·발전을 들 새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적 공동체였다면 그 중심지는 점차 상인, 수공업자 등의 비농업적 주민들의 거주지요 시장으로서 그 기능을 확대시켜 갔던 것이다.2.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교육그리스는 국가의 형식을 완전히 갖춘 사회로서 성격이 서로 다른 스파르타와 아테네로 대표됩니다. 그리스 반도에는 그리스 민족이 침입하여 살기 전에 에게문명을 만들어 낸 선주민족이 있었습니다. 찬란한 청동기문명을 지닌 에게인들은 왕을 받들어 모시며 교육을 하여 번영하였으며 견고한 성벽을 쌓아 시민과 시의 재산을 보호하였습니다. 그리스 민족은 이미 고도의 문화를 가지고 있던 선주민족의 거주지에 북쪽으로부터 침입해서 그들을 추방하고 때로는 노예화하여 그 땅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그리스 사회가 노예제 사회였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를 공부할 때 단순히 그들의 찬란한 문화와 문명만을 기억할 것이 아니라, 그 찬란한 문화와 문명 이면에는 수많은 노예들의 고통스럽고 비참한 희생이 존재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그렇다면,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교육적으로 어떤 특징을 갖고 있었을까요?먼저, 스파르타의 교육부터 살펴봅시다.스파르타는 사회는 극소수의 귀족과 그에 30배에 달하는 평민과 노예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노예들의 잦은 반란이 있었겠죠. 더욱이 험준한 산악지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농토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다른 국가들과 끊임없는 전쟁을 치러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즉, 스파르타는 지배자로서 자신들의 수십 배에 달하는 피지배자들을 억누르고, 외적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고 농토 확보를 위한 전쟁을 끊임없이 수행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국가체제는 어떤 형태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강력한 군국주의 국가체제로서 일종의 군대국가였을 것입니다.교육이라는 것은 현실 사회와 동떨어진 저 추상적인 관념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육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 사회 속에서, 그리고 그 사회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존재합니다. 따라육이 아니라 훨씬 가족주의적이며, 자유롭고 문화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스파르타 아이들이 그 출생과 동시에 국가의 관리하에 놓인 것과 달리 아테네에서는 얼마간 가정에서 키워졌습니다. 아테네에서도 연약하거나 불구인 아이들을 죽였는데, 이는 스파르타가 국가 입장에서의 처벌이었다면 아테네에서는 가정 입장에서의 처벌이었습니다.아테네의 교육제도는 스파르타에 비해 국가의 통제력이 꽤 제한되어 있었으며, 가정의 책임에 좌우되는 측면이 많았으며, 군무기간도 훨씬 짧았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대내외적인 위협에 대해 지배집단으로서 집단원 모두가 결속하여 동일한 신을 모시고 자기 집단의 존속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군국주의적 체제였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합니다. 단지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비해 비교적 관대하고 자유주의적이고 문화적이었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마 이러한 차이는 아테네인들의 민족적인 기질 그 자체에서 기인한다기보다는 그들의 삶의 조건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스파르타가 험악한 산악지대에서 그만큼 치열하고 척박한 삶을 살아야 했다면, 아테네는 비옥한 평야지대와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농업과 상업을 겸할 수 있었고 그만큼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스파르타에 비해 아테네는 민주적인 정치체제가 발달했습니다. 그리하여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비해 상당히 자유롭고 인간적인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이러한 차이가 결국 교육적 특징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을텐데, 그렇다면 아테네의 교육 목적, 교육 내용, 교육 방법 등을 어떠했을까요? 교육의 목적은 심신의 균형, 도덕적 교양, 사회적 책임, 자유로운 시민의 양성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목적에 따라 교육 내용 역시 체육, 음악, 독서 등을 폭넓게 포괄하고 있습니다. 교육의 단계를 보면, 출생 직후에는 부모의 손에서 양육되다가 7세가 되면 가정에서 '파이다고고스'(Paidagogos; 교복)라는 노예에게 맡겨져 교육을 받았고, 체조학교(palaestra)와 음악학교(dai히피아스, 케오스의 프로디쿠스 등이 유명하다. 소피스트란 원래 ‘현인(賢人)’ 또는 ‘지자(知者)’를 의미하였다. 그들은 거의가 지방출신 학자들로, 각기 자부하는 지식과 기술을 갖고 있어 개인이나 국가에서 돈을 받고 그것을 제공하였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대적 요청에 따라 가장 중요한 과목은 변론술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신(一身)을 위해서나 국가를 위해서 선(善)을 도모하고, 언론이나 행위에서도 유능한 사람이 되는 길’을 청년들에게 가르친다고 자부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가르친 것은, 개인이나 국가에 대해 선이란 이런 것이라는 지혜가 아니라, 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선한 자인 체하는 기술만을 가진 데 불과하였다. 이 같은 사실을 밝힌 것이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다. 이후 ‘소피스트’란 말은 ‘궤변을 일삼는 무리’를 의미하게 되었고, 궤변학파라고도 불리었다.소피스트들은 덕과 지혜를 중시하였다. 그들의 학설은 다양하고 또 서로 상반되기 때문에 하나의 철학 학파로 불리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들은 공통적인 태도 혹은 기능을 통하여 독특한 모습은 보이는 하나의 정신사조하고 할 수 있다.소피스트들이 이전의 철학자들과 구분되는 것은 그들의 철학방식에 있었다. 대부분의 철학사에서는 탈레스로부터 데모크리토스에 이르는 철학자들이 그들의 문제를 자연에 집중시킨 자연철학자로 서술되고 있는 반면 소피스트들은 철학의 문제를 자연으로부터 인간의 사회생활 및 정신생활로 전환시킨 정신철학의 창시자로서 서술되고 있다. 소피스트들은 주관에 우선을 부여한 데 차이가 있을 뿐이다. 통찰은 최고의 덕이며 지혜란 자연에 귀를 기울이면서 진리를 말하고 자연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다. 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과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있는 것에 대하여는 그것이 있다는, 없는 것에 대하여는 그것이 없다는 척도다. 라는 프로타고라스의 말은 바로 이러한 차이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소피스트들의 철학사적 특이성은 이들이 처음으로 주관성 자체를 성찰대상으로 삼은 데 있 었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