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In a Station of the Metro', 'A Drinking Song'을 읽고먼저 Ezra Pound 가 쓴 In a Station of the Metro' 를 처음으로 접했을 때 일본에 우리 나라가 지배당했던 일제시대의 독립시로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민족 해방시가 다반사로 교과서에 실려 공부했던 이유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대충 읽어보고 연관시켜 보면 얼추 맞는다는 느낌도 든다. 군중은 민족을 나타내고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 은 독립을 위해 싸운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꽃잎들은 해방을 외치다가 순직해가는 독립열사들의 혼을 나타내는 것으로 비슷하게 해석된다. 원래 시란 보는 사람마다 그 당시 상황 또는 기분에 따라 다르게 느끼기 마련이다. 난 처음엔 독립시로 생각했다. 그리고 나중에 해석서를 보니 작가가 지하철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쓴 시라고 한다. 그전에는 사랑을 노래하는 시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는데 역시 시란 같은 내용이라도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된다는 사실에 절감했다.한편으로 작가가 서양사람이니깐 In a Station of the Metro'를 하느님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았다. 군중 속에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 에서는 군중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 즉 타인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자를 가르치고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 은 하느님을 의미한다. 얼굴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한 것은 사람마다 각자의 이상형의 하느님이 다를 것이라는 점에서 복수형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젖은, 검은 가지 위의 꽃잎들 은 젖은, 검은 가지 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못하고 사랑을 베풀지 못한자들의 처량한 모습을 표현한 것이고 그 가지 위의 꽃잎들은 타인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자들 중 나중에 후회하고 다시 하느님의 존재를 믿고 절실한 신교자가 되어 만인에게 사랑을 베풀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 즉 천당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집으로 오는 길 전철을 탔다. 타. 마음에 눈 그것으로 사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늙어서 죽기 전에 진리로 알게 될 건 그것뿐이지 라는 문구는 사랑에 목이 마른 작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늙어서 죽기 전에도 사랑 하나만을 간절히 원하고 사랑에 인생을 바치는 작가의 모습이 보여지는 듯 하다. 나는 술잔을 입에 들어 올리고, 당신을 바라 보고, 한숨을 짓네. 얼마나 아름다운 문구인가! 나는 이 부분이 A Drinking Song' 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사랑은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그런 모습이 떠 오른다. 술만이 그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또 술로 인해 당신을 떠 올리는 이 아이니컬한 모습은 내 마음을 울린다. 사랑은 역시 이루어지는 것보다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더 아름다운 듯 하다.앞에서 간단한 시를 택해 본 것은 일종의 영시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 있어서였다. 그 두려움을 없애기위해 좀 간단한 시를 택했고 이를 바탕으로 다음 시들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할 것이다.2.Annabel Lee를 읽고...그 전에 내가 감상문을 썼던 그 어떤 시인보다 더 낭만주의 시인이라는 것이 어울리는 시인인 것 같다. 이 시는 결핵에 걸려 비참한 생활을 한 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아내 버지니아에 대한 사랑과 그 그리움으로 쓴 시이다. 포우는 어렸을 때 배우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고 비참한 생활을 살아왔다. 부유한 상인인 양아버지와 양어머니 밑에서 살아온 유년시절의 몇 년을 제외하고는 한번도 행복하다 할 생활을 한 적이 없었다. 지금은 명시라고 칭송받는 그의 시가 그 시대에는 끼니를 때우기 위해 푼 돈에 팔리기도 했고, 그 시대의 그의 시는 언제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그의 배경을 알고 그의 시를 읽고 난 후에 느끼는 감정은 현실 도피라는 느낌이었다. 아니면 그가 그의 불행한 현실을 극복하고 그의 시속에 아름다움을 창조함으로써 그의 현실 자체를 승화시킨 인물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어쨌든 포우에게 있어서 시란 것은 그의 비참한 현실을 극복하고 삶의 의지를 불어넣어 주고 지 her and me.) 그러나 그 시기로 인해 끝나버린 그들의 사랑은 어린 사랑이기는 했지만 나이먹은 어른들의 사랑보다도 훨씬 강했다. 또한 하늘위 천사들이나 바다밑 물귀신도 그와 그녀의 사랑을 떼 놓을 수 없고 비록 그녀는 죽고 없지만 영원히 지신의 옆에 존재한다는 내용이다(all the night tide, I lie down by the side Of my darling---my darling---my life and bride) 포우에게 있어서 바닷가에서의 어린 사랑은 자신과 그의 아내 버지니아의 사랑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그들의 사랑을 질투하여 Annabel Lee를 죽게한 바람은 그의 병들고 고달펐던 생활상과 그러한 가난으로 인하여 부인이 얻게된 결핵을 의미하는 것 같다. 버지니아는 이미 죽고 없지만 그녀를 사랑한 그의 마음은 진실되었고 그는 버지니아를 위해 해준 것은 없지만 그래도 그의 사랑이 세속에 찌든 남들 사랑보다 훨씬 더 강했다고 주장한다(But our love it was stronger by far than the love Of those who were older than we- Of many far wiser than we--)그리고 또한 시인은 이 시를 통해서 영원히 그가 자신의 부인인 버지니아와 함께 할 것이고 사랑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현실 속에서 자신의 아내에게 못했던 점을 용서를 구하고 속죄받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느낌도 들었다..3.― Dianne Wakoski ― 「Men's Eyes」를 읽고처음 이 시를 보았을 땐 Rich나 Plath의 시처럼 심각한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선 우리가 좋아하는 연예인들이 등장했기 때문에 좀 가볍게 느껴졌고 내용으로 볼 때는 페미니즘적 시각보다 오히려 미디어와 시청자의 관계 또는 스타와 팬과의 관계 등 이런 시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왠지 모르게 석연치 않는 기분이 들었다. 시 전체를 읽고 나서 이 시 페미니즘적이지 않나? 라는 시들이 그리는 가죽 재킷을 입고 오토바이를 타는 터프함과 시를 읊는 낭만적이면서도 지적인 모습을 겸비한 그런 남성상을 보여주기 위한 이미지라고 생각했다. 3연과 4연에서는 남자 스타들을 등장시키면서 눈의 이미지를 통하여 점점 남성의 응시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구속되는 여성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보았다. that make you want to be held and cuddled by him, / as if you were an animal and he a loving animal owner" 부분은 더욱 대중문화가 은근히 그 내면에 여성에게 가부장적 시각을 강요하고 있는 것을 작가가 비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카메라를 통해 남성들의 눈빛에 의해서 끌려가는 그런 여성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았는데, 즉 그런 눈을 바라보도록 하여 여성들이 대중문화를 통해 이데올로기를 강요당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켜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2연은 나 라는 1인칭 화자를 써서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다면 3연부터는 그 시각을 확대시켜 여성을 당신 으로 지칭하여 남성배우에 대하여 여성시청자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나를 보여주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페트릭스웨이지의 눈은 아무것도 나누려고 하지 않다는 점은 여성은 남성이 만든 세계를 공유할 수 없음을 뜻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여기 나오는 배우들의 눈은 아주 그윽하고 여성들의 시선을 끌긴 하지만 정작 실제로는 여성시청자들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즉 여성이 배우들의 눈빛에 끌린다는 것은 이성이 아닌 감성에 의해 좌우되는 것인, 우리가 그림의 떡을 바라볼 때 느끼게 되는 그런 감정을 통해 결코 여성이 소유할 수도 없고 여성을 그들의 세계에 포함하지도 않는 그런 눈빛을 말하고 있다고 보았다. 즉 와코스키의 다른 시인「Moneylight」에 나와 있는 여성들이 바라는 Shadow man같은 것으로 스타들을 등장시켜 그것은 결국 허상일 뿐이라는 것을 시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이런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한국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 민요시 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 실제로 그렇게 발병이 났다 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알려주는 문장이 아니라, 떠나는 님에 대한 야속 함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문장인 것이다. 그 야속함 속에는 님에 대 한 사랑과 이별의 슬픔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이와같이 야속함, 사랑, 슬픔 등으로 구체화된 감정을 정서라고 한다. 그래서 감정과 정서라는 말은 까다롭게 구분하지 않고 동의어로 쓰이는 게 통례로 되어 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이 시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T.S. 엘리어트의 장시 의 서두 부분이다. 엘리어트는 주지주의라 해서 지성을 존중하고 감정 은 되도록 억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던 시인이다. 그러한 엘리어트 의 이 시도 그러나 그 첫줄부터 뚜렷하게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4월 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말은 4월에 대한 객관적 진술이 아니라 시안 에서 말하는 화자의 주관적 감정반응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흔히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감정은 인간의 의식의 한 양상이다. 인간의 의식 속에는 사물에 대해 감정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 즉 감정이 있다. 이 감정과 함께 사물 을 논리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이성을 아울러 갖추고 있는 것이 인간의 의식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감성을 통해 느끼고 이성을 통해 생각한다 고 말할 수 있다. 그 느낌이나 생각의 결과로써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이 대상에 대한 어떤 종류의 이해이다. 그러나 그 이해의 방법과 내용은 감성과 이성이 서로 큰 차이를 보인다. 먼저 이성의 경우를 보면 그것 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곳은 대상에 대한 분석적 객관적 이해의 세계이 다. 객관적인만큼 그것은 또 다른 사람들도 전적으로 그에 동의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게 된다. 예를 들면 그것은 물이라는 대상을 [두 개의 수소와..
18 세기 소설의 특징1996310144 영문학과 김 형 남영국역사(문학사)에서 18세기는 시기적으로 대략 1700년부터 1789년의 불란서혁명까지로 구분되지만, 역사적, 문화적 연결성을 고려할 때 왕정복고(1660) 전후의 기간도 18세기의 울타리로 보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이 시기는 중세와 현대(근대)의 출발점으로서 한 시대를 보내고 새 시대를 시작한 역동성이 있는 시기이다. 그러한 연유로 그 이전의 산문문학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이러한 18세기의 새로운 문학형태로 등장한 산문문학인 소설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첫째, 종교적이다.명예혁명 (Glorious Revolution) " 또는 무혈혁명 (Bloodless Revolution) " 이라고 불리는 1688년의 정치혁명은 현대로의 출발의 분기점이 되었다. 이로 인해 왕권이 제한되고, 의회정치가 시작되었으며, 평민의 법적 권리가 보장되었다. 영국은 이 혁명을 계기로 봉건, 왕족정치체제에서 벗어나 의회민주주의를 시작하게 되었고, 귀족 중심이던 사회가 평민, 중상계급사회로 전환되게 된 것이다. 여기에 종교관용법(Toleration Act)은 비국교도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한 바, 이로써 17세기를 통해 영국을 어지럽혔던 종교분쟁이 일단락을 맺게 된 것이다. 또한 1789년에 봉기된 블란서 혁명의 시민정신은 다른 많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18세기를 현대의 출발점으로 만드는데 일익을 당담하였고 이러한 사상이 소설에서도 많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둘째, 교훈적이다.18세기의 영국사회는 중간계층의 어중간함이 위로 향하는 역동성에 기인하여 유동적인 위치에 있었다. 근대화 과정이 가져온 가치체계의 변화는 집단적 또는 개인적 갈등과 긴장을 야기하게 마련이었고, 제각기 나름대로 상대방을 교화, 교정하려는 시도가 있게 마련이었다.그리하여, 교훈적 성격을 많이 담게 되었고 이는 18세기 초에 풍자문학이 자라나기에 알맞은 조건들, 즉 사회변화, 언론자유, 풍자문학의 유효성에 대한 믿음 등이 갖추어져있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셋째, 작가개입이 두드러진다.. 18세기 영국에서 등장했다고 얘기되는 소설은 정확히 말해 사실주의 소설이다. 이러한 사실주의 소설은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사실적인 재현을 통해 전달하는 방식 으로 정의할 수 있는데, 그 이전의 긴 산문들-즉 신화, 역사, 전설, 로맨스, 등- 과의 차별성을 볼 수 있다. 이완 와트의 분류를 인용하자면, 디포우가 전통적인 플롯을 거부하고, 우리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인물들의 자서전적 회고록의 이야기 구성을 취하고, 주인공이 다음에는 어떤 행동을 취했을 것이다라는 개연성의 원칙에 따라 이야기의 순서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했다 는 것인데, 여기서 18세기에 그전의 스토리텔링식으로 전해져오던 산문 문학이 문학으로서의 보다 정형화된 틀을 갖추게 되고, 새로운 시대상에 부합하는 시도로서 이러한 시도가 이뤄졌단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기존의 문학형식에서 새로운 형식의 문학이 탄생하는 과도기로 볼 수 있다넷째, 여담(Digression)이 쓰이고 있다.18세기 소설에는 여담이 많이 삽입되어 주제가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 모습이 많이 발견되는데, Swift는 이러한 점을 작품 속에서 풍자하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예는 그의 작품 Tale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는 당대의 많은 출판물들에 담겨있는 정교한 서문을 풍자한다. hack writer는 자기자신이 서문의 이용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서문으로 그의 책의 미덕을 더해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가 그러한 결과를 갖게 된 것은 책의 부피를 더해 준 점이다. 여러 곳에서 Swift는 문학작품의 빈칸 매꾸기를 공격하고 있는데 hack 이 Digression'을 찬양하는 것은 그의 작품의 길이를 더해 주는 것과 어느 정도는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Digression' 과 Preface'는 작품을 길게 해주는 멋진 고안물이라고 생각한다. Tale의 논쟁부분에서 hack로 하여금 지적노력에 대한 언급과 더불어 너무 적게 가지는 것은 너무 많이 가지는 것보다 더 나쁘다는 자신의 신념을 주장을 한으로써 작품의 필요없는 빈칸 매우기를 두둔하고 있다. 여기서 hack의 우둔함을 멋있게 묘사하면서 Swift는 이러한 고안품에 대한 공격을 하고 있는 것 이다.다섯째, 등장인물이 실재 인물과 유사하다.소설은 실제로 일어날 법한 일들을 다룬다. 우리 주위에서 어제도 일어났고, 지금 현재에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과 행위들로 이루어져 있고, 등장인물은 대부분 평범한 우리 주위의 일반 사람이다. 이러한 점들이 이전의 산문문학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테스는 한마디로 말해서 운명의 장난에 휘말려든 한 순진한 아가씨의 불행한 이야기이다. 웨섹스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테스가 무책임한 남자에게 처녀성을 유린당하는 데서부터 이 소설의 비극이 시작되고 있다. 테스는 단 한번도 잘못된 일을 할려고 하지 않았다. 그럴 생각도 없었으며 그녀의 영혼은 그것을 맹세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영혼은 가혹한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녀가 어떤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녀 자신이 원해서 범한 죄가 아니라 잘못해서 저지른 것이다. 하디에 의하면 인간들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 에 의하여 움직여지며, 항상 실의와 고뇌를 되씹어야 하는 가련한 존재에 불과하다. 또 그는 말하기를, 인간은 나면서부터 마치 어떤 거미줄에 매달려 있는 것과 같으며 그 거미줄 꼭대기에는 운명의 힘 이 있어서 인간을 움직인다는 것이다. 사실 테스가 스스로 감수하고 있는 죄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화살을 받을 성격의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책임을 지려고 하는데서 부터 이 세상에 태어난 사실에 대한 회의를 일으키게 된다.명문 더버빌의 후손이라는 자의식에 도취되어 술로 세월을 보내는 게으른 아버지와 무능한 어머니, 그리고 많은 동생들을 둔 테스는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하여 먼 친척인 스토크 더버빌의 집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양계일을 하던 중 테스는 바람둥이 청년 알렉에게 처녀성을 잃는다. 그후 집으로 돌아와 사생아를 낳는데, 그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세례조차 받지 못하고 죽는다.테스는 인생 최초의 비극을 경험하지만, 아직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 젖짜는 일을 시작한다. 그녀가 새생활을 시작한 낙농장에는 농장 경영을 지망하는 에인젤이라는 건실한 청년이 있었다. 목사의 아들인 에인젤은 성직에 회의를 품고 농사를 짓기 위해 이곳으로 일을 배우러 와 있었던 것이다.테스는 에인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자신이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번민하게 된다. 그러나 에인젤의 고매한 인품에 이끌려 그를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게 된 테스는, 그가 과거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해 줄 것으로 믿고 마침내 결혼한다. 그러나 첫날밤 그녀가 과거를 고백하자 처녀성을 중시하는 에인젤은 신부를 남겨둔 채 혼자 외국으로 떠나버린다.이리하여 테스는 다시 버림 받은 몸이 되었으나, 언젠가는 남편이 다시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모진 고생을 참아낸다. 그 무렵 우연히 테스를 만난 알렉은 열정에 사로잡혀 또다시 그녀를 유혹한다.한편 테스의 집에서는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죽고 식구들은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가족의 생계를 떠맡게 된 테스는 결국 지난날 자기의 인생을 짓밟았던 알렉의 원조의 손길을 물리치지 못하고 그의 정부가 된다. 그때 뜻하지 않게 테스를 버리고 갔던 남편이 정신적으로 훨씬 성장한 모습으로 그녀를 찾아온다. 그토록 기다리던 남편이 돌아왔건만 기쁜 마음으로 재회할 수 없게 된 테스는 이성을 잃고 자신을 정부의 위치로 전락시킨 알렉을 과도로 찔러죽인다.그런 다음 테스는 에인젤을 따라 처음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1주일 뒤, 그들의 짧지만 황홀했던 행복은 막을 내리고, 테스는 뒤따라온 경찰에게 체포되어 처형된다.테스는 연애 소설이다. 인간을 불행으로 몰아넣는 운명이라는 상징은 비극적인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사랑만으로 테스에게 비극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사회인습, 도덕, 종교, 사회제도가 합세하여 그녀에게 비극을 초래하도록 한 것이다.인습은 테스의 순결한 심성과 아름다운 성격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테스의 빈곤은 사회제도의 빈곤으로도 볼 수 있다. 특히 하디는 비관적인 결혼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상적인을 추구하는 그의 여성들은 모두 사랑에 실패하고 만다.순결의 여인 이란 부제가 내포하고 있듯이 , 테스는 피해자이지 죄인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막다른 길로 몰아가는 운명의 힘에 쫓겨 마침내 무서운 살인죄를 저지르고 사형당하게 되는 것이다. 교수형이 집행되던 날 감옥의 탑 위에서 나부끼는 검은 깃발은 하디 문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테스의 비극은 과거와 현재에 걸친 부정한 타인들이 저지른 산물이다.-테스를 유혹한 자와 테스를 아내로 맞이했으면서도 지나친 인습에 사로잡혀서 테스의 진실한 순정을 분별할 줄 모르는, 선의 이기는 하지만 제멋대로인 이상주의자- 이 두 사나이의 비열함이 빚어낸 산물이다. 그리고 테스에게 다가오는 불행 하나하나를 하디는 운명의 엇갈림으로 보고, 개인에게는 결코 호의를 보여주지 않는 우연의 집합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경제적으로 괴로운 환경의 연속 이였다.테스의 성격에서는 가난에 몰린 여자가 빠져들기 쉬운 창녀와 같은 교태도, 음탕성도 찾아볼 수 없다. 사람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환희에의 열망 이 거듭되는 불운과 가난을 거스르며 그녀의 생을 유지시키고 있을 뿐이다. 테스의 성격은 열정적이고 자존심이 강하며 헌신적 사랑의 소유자이면서 순박하고 순종적인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녀의 id와 superego 사이의 갈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메리 잉글랜드라는 영국 남부의 농촌인 라벨로에서 조금 떨어진 채석장 자리의 오두막에 산지 15년이 되지만, 사일러스 마너가 상대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천을 맡기는 가정 주부들뿐이다.그는 매일 베틀에만 매달려 40살인데도 노인처럼 말라있다. 그는 고향에서 친구에게 애인을 빼앗기고 절도죄로 감옥살이까지 했다. 그는 베틀만을 유일한 벗으로 삼아 열심히 일해 황금을 모은다. 그러나 그가 애써 모은 황금은 어느 비오는 날 밤에 도둑을 맞는다. 도둑은 그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가문인 카스씨의 둘째 아들 던스턴이었는데, 그 후 채석장 옆에 있는 물 웅덩이에 빠져 죽는다.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진 것은 16년이 지나서이다. 카스씨의 장남 고드프리의 숨겨둔 아편중독자인 처가 사일러스의 집 가까이에서 눈 속에 쓰러져 얼어 죽는다.그녀의 아이는 사일러스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난로가에 와서 잠들어 있다. 그는 아이의 금발을 보고 자기의 황금이 돌아온 줄 착각한다. 아이는 사일러스의 보살핌 속에 에피라는 이름으로 자란다.16년 후에 고드프리는 모든 사실을 고백하고 에피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에피는 이미 젊은 정원사와 약혼을 한 몸이고, 일생을 양아버지인 사일러스와 함께 보낼 결심을 한다. 결국 유아에의 사랑에서 따뜻한 마음을 되찾았다.이상이 사일러스 마너의 줄거리이다. 엘리엇은 자신의 작품세계를 통해서 인간의 현실세게를 소재로 많이 다루었고 또한 개개 인간의 자아실현 과정의 모습을 묘사하려는 시도가 작품 속에 많이 나타난다. 이는 작품을 통해서 사일러스 마너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가는 것을 통해서 나타내 지고 있는데, 사이러스가 고립적인 삶에서 유일한 낙으로 삼았던 금화는 하나의 물질이기 때문에 그의 생과 의식을 더욱 굳어지게 하면서 다른 인간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장애물이었다. 사일러스는 자기 자신을 금화로 채워 두고 이 금화를 도난당하지 않도록 외부와 어떤 관계도 맺지 않고, 자기 집과 자기의 마음을 닫아 두었던 것이다. 이제 금화가 없어지자 그의 가슴과 경직된 의식 세계에 공백이 생기게 되고 타인에게 마음을 열어놓게 됨으로써 인간적인 접촉에 의한 감정과 열망이 소생할 가능성을 갖게 된다. 금화를 찾잃음과 동시에 에피를 얻게된 사일러스는 새로운 생을 맞이하게 된다. 마치 사랑의 따뜻함을 전하는 천사처럼, 에피의 즐거움과 사랑은 사일러스로 하여금 베짜는 일 하나만의 관심으로부터 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주위의 세계와 접촉을 확대시키는 유기적인 성장을 이룩하는 계기가 된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자아 실현과 문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이 작품에서 엘리엇은 사회와 개인, 이성과 감성, 그리고 도덕적 경직성과 유연성이라는 두 개의 대립되는 도덕관 사이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하고 있다. 우연과 필연이 함께 존재하는 변화 무쌍한 세계에서 인간의 삶의 지침이 될 절대적인 도덕률을 찾기 위하여 상반되는 도덕관을 대비시킨다. 사일러스와 카스 형제의 대비를 통한 도덕성을 추구하는 것인데, 사일러스는 신을 공명정대한 정의의 신이라 믿는 맹목적인 신앙심을 통하여 도덕적 경직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Lantern Yard의 지역적 특성처럼 신을 공명정대하다는 종교적인 경직성에 매몰된 채 그 자신은 절대적으로 청렴결백하고 성실하다고 믿음으로써 도덕적 경직성을 완고하게 지니고 있다. 심지어 어머니에게 비법으로 배운 민간의술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을까 두려워 할 정도이다. 특히 지독한 근시안과 강경증에 의한 발작은 경직성과 완고함이며 동시에 엄격한 종교적, 도덕적 경직성의 상징이 된다. 이러한 경직성은 Lantern Yard의 종교적인 편협성처럼,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편으로는 부적절하다. 그러므로 사일러스는 이 세상에는 오직 양심과 정의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편협한 안목을 지님으로써 개인과 우주사이의 질서가 괴리되어 있다는 사실과 인생의 복잡 다양함을 모르는 순진하고 비이성적인 인간이 된 것이다.반면에 카스 형제의 종교는 "the worship of blessed chance"이다. chance라는 신은 상징적으로 카스 형제들이 이기심을 위하여 신과 도덕규범을 따르지 않는 부도덕한 양심과 태도를 반영한다. 관대한 라벨로라는 지역적 특성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탐욕과 필요에 따라 그들의 태도를 달리하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들은 이기심에 의하여 도덕원칙에 대한 태도를 수시로 바꾸면서 운명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의 도덕성은 부도덕하며 무원칙한 유연성을 지닌다. 철두철미하게 chance만을 믿는 던스턴 보다는 자기변명과 자기만의 합리화를 위해 노력함으로써 공감, 사랑, 질서를 조금이나마 지닐 수 있어서 던스턴 보다 미묘하고 더 복잡하고 부도덕한 우유뷰단함을 보여주고 있다.사일러스와 카스 형제들은 도덕적 경직성과 유연성의 극단들을 지니고 있어 각기 편향적이라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 사일러스의 경우는 도덕적으로 경직되어 이 세계의 우연과 악의 존재를 외면하고 있고, 카스 형제는 이 사회에서의 필연적 선의 존재를 외면하고 있다. 사일러스와 고드프리는 상이한 경험과 세계관이 객관화되어 도덕적인 대비 효과를 내고 있는데, 사일러스가 잃은 것은 고드프리가 얻고 그 반대로 고드프리가 잃는 것은 사일러스가 얻었으며, 종교, 나이, 성품, 사회적 계급 등에서 완전히 대조가 되는 입장에 처해 있다. 그러나 극단적인 도덕관을 두 인물을 통해 형상화 시키고, 이들을 라벨로라는 사회의 삶을 통해 극단의 세계를 포용하도록 하므로써 정신적인 성장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이 작품은 인생이란 절대적 원칙이 적용되는 필연의 셰게도 아니요, 우연과 요행의 세계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한 때 요행의 신을 믿었던 고드프리는 어떤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의 작용이 결코 우연의 아니라 정확하게 인과율을 가져오는 정의의 신의 작용임을 깨닫게 되고, 사일러스는 chance의 장난으로 뜻하지 않은 시련을 겪고난 후 원리원칙에 경직된 신의 개념에서 벗어나 라벨로의 특유의 공감의 신을 믿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