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틀니 -두산동아-1.작가론:박완서(1931 )1.경기도 개풍 출생.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된 어머니의 교육열에 힘입어 숙명 여고를 거쳐 서울대 문리대 국문학과에 재학 중 6 25로 중퇴. 1970년 여성 동아 장편 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늦은 나이로 문단에 데뷔한 이후 정력적인 창작 활동을 하면서 그 특유의 신랄한 시선으로 인간의 내밀한 갈등의 기미를 포착하여 삶의 진상을 드러내는 작품의 세계를 구축해 오고 있다.대표작으로는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배반의 여름', '살아 있는 날의 시작',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미망' 등이 있다.경기도 개풍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조부모와 숙부모 밑에서 보내고, 1944년 숙명여고에 입학하였다. 여중 5학년 때의 담임이었던 소설가 박노갑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한말숙과 교분이 두터운 친구가 되었다. 1950년 서울대학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전쟁으로 중퇴하였다. 1953년 결혼하고 살림에 묻혀 지내다가 1970년 마흔이 되던 해에 《여성동아》 여류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이후 우리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6 25전쟁과 분단문제, 물질중심주의 풍조와 여성 억압에 대한 현실비판을 사회현상과 연관해서 작품화하고 있다.처녀작 《나목》을 비롯하여 《세모》(1971) 《부처님 근처》(1973) 《카메라와 워커》(1975) 《엄마의 말뚝》(1980)을 통하여 6 25전쟁으로 초래된 작가 개인의 혹독한 시련을 냉철한 리얼리즘에 입각한 산문정신으로 작품화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살아있는 날의 시작》(1980) 《서 있는 여자》(1985)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989) 등의 장편소설을 발표하면서 여성의 억압문제에 눈길을 주게 되고, 1980년대 중반 이후 여성문학의 대표적 작가로 주목받았다. 1988년 남편과 아들을 연이어 사별하고 가톨릭에 귀의하였으며,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1994)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5회 동인문학상(1994),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로 제5회 대산문학상(1997)을 수상했으며, 1998년 문화관광부에서 수여하는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저서에 창작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1976) 《창 밖은 봄》(1977) 《배반의 여름》(1978) 《도둑맞은 가난》(1981) 《엄마의 말뚝》(1982) 《서울 사람들》(1984) 《꽃을 찾아서》(1986) 《저문 날의 삽화》(1991) 《나의 아름다운 이웃》(1991) 《한 말씀만 하소서》(1994) 《너무도 쓸쓸한 당신》(1998) 등이 있고, 수필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1977) 《혼자 부르는 합창》(1977) 《살아있는 날의 소망》(1982)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1990) 《어른노릇 사람노릇》(1998) 등이 있다.2.*도시의 흉년1975년 12월부터 1979년 7월까지 에 연재한 박완서의 장편소설. 일제 말기부터 1960년대까지 한 가족을 중심으로 3대에 걸친 가족 구성원들의 삶의 방식을 추적하면서, 사회상과 세태의 변화를 비판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이 소설의 서사적 골격은 일제 말기부터 1960년대까지 주인공 지대풍의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일어나는 역할의 변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 시어머니는 한 집안의 어른이 되지 못한 채 구식 노인으로 밀려난다. 지대풍도 징병과 피난살이, 그리고 병영생활로 이어지는 고통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가장의 역할을 상실한 무능력한 인물이 된다. 시어머니의 권위의 몰락과 남편 지대풍의 역할 축소는 필연적으로 아내인 김복실 여사의 새로운 삶의 방식에 무게를 두게 한다. 평범한 아낙에 불과했던 김복실 여사는 닥치는 대로 돈을 모으며, 포목상을 차려놓고 위세 좋은 여사장님으로 변모한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돈 앞에 힘을 쓰지 못한다. 남편은 빈둥대며 아내의 눈치만 살피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김복실 여사는 자신이 스스로 개척하고 일으켜 세운 물질 제일주의의 가치관에 따라 두 딸과 아들을 키워나간다. 자신이 일구어놓은 물질적 토대를 바탕으로 조그만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남편과 그의 아내, 그리고 세 딸들이 핵심적인 등장인물이다. 전체적인 이야기가 세 딸의 결혼 과정에 얽혀 있기 때문에, 세태 묘사의 면에서 통속적인 흥미까지도 자아내고 있다. 이 소설 내용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가족들은 모두 타락한 시대풍조에 물들어 있는 병든 인간들이다. 순박한 소시민으로서 자기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남편은 그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비리로 가득한 현실을 뚫고 나가지 못하고 자멸한다. 아내의 이기주의와 물질적 욕구와 맹목적인 자기과시를 끝내 억1누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육자로 살아온 그가 자신의 몫으로 지키고자 했던 소박성이라든지 청빈함이라든지 하는 덕목과 가치관은 극성스런 아내의 충동에 의해 여지없이 짓밟힌다. 그리고 세 딸마저 그러한 어머니로 인하여 모두 자신들의 삶에 실패한다. 결국 이 작품은 물질적 욕망과 허영심으로 인해 훼손되고 파괴되는 인간 삶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족 구성원의 윤리가 무너지고 소중한 인간적 가치가 모두 물질적인 것의 의해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고 그 속에 묻혀 있는 인간을 조소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부박한 현실의 물질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은 풍자적인 요건을 통해 잘 형상화되어 있다.*엄마의 말뚝1979년 11월 에 발표된 박완서의 중편소설. 어머니와 딸이 나누는 인간적인 교감과 중년 여성의 섬세한 심리를 매개로 하여, 한 가족이 겪어야 했던 비극적 상황을 탁월하게 형상화해 낸 작품이다. 서술자인 는 오 남매를 거느린 평범한 중년의 주부이다. 외출했다 돌아온 어느 날 친정 어머니의 사고 소식을 듣는다. 아흔이 다 된 어머니가 눈길에서 낙상하여 다리를 다쳤다는 것이다. 부상은 의외로 심각하여 수술을 해야 할 지경이다. 수술은 생각보다 성공적이어서, 는 식구들을 보내고 홀로 어머니의 병상을 지킨다. 그러나 한밤중 어머니는 환각을 보는 듯 헛손질을 하고, 마침내 극도의 공포에 싸여 발광할 지경에 이른다. 어머속으로 절규하고 있다. 이 소설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은 오빠의 죽음으로 표상되는 민족사의 비극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라는 그 어떤 관념적 요소도 배제된 채, 한 가족이 맛보아야 했으며 또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고통의 형태로서 구체적이고 절실한 비극으로 형상화된다. 또한 그것은 중년 여성의 조금은 이기적이고 변덕스럽기까지 한 내면과 병치됨으로써 더욱 생생하게 부각된다. 그 비극을 회상하고 지켜보는 중년의 시각이란 지극히 절제된 것이어서 일체의 감상과 감정의 과장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는 그 고통과 아픔을 오직 어머니와 공유할 뿐 누구에게도 하소연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자신의 밖으로 드러내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것, 어머니의 경우와 같이 죽음 직전에 이르러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라야 겨우 터져 나올 수 있는 깊은 뿌리를 가진 것, 궁극적으로는 죽음으로밖에 치유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실함이 중년 여성의 내면에 대한 섬세하고 절제된 묘사력으로 형상화될 때 그것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저문 날의 삽화 31987년 6월 에 발표된 박완서의 단편 소설.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정년 퇴직한 공무원과 그의 늙은 아내가 있다.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교외에 집을 마편한 노년의 양주(兩主)는 호젓한 은퇴 생활을 한다. 남편은 낡은 시골집을 수리하는 것으로 소일을 삼아 부엌을 입식으로 개조하고 안 뜰 볕 드는 곳에 장독대를 앉힌다. 아내는 채마밭과 꽃밭을 돌보고 마을 사람들을 따라 산나물로 캐러간다. 매달 연금이 나오는 터라 넉넉치는 않으나 생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출가한 자식들 역시 큰 근심 없이 잘 살아간다. 이처럼 소설 전체는 이 두 내외의 아기자기한 삶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진다. 남편은 사랑방에 않아 창호지 문에 달린 유리를 통해 아내의 모습을 보는 일이 즐겁다. 더러는 아내 대신 설거지도 하도 콩나물도 다듬는다. 더 이상 욕심 낼 것도 부러워할 것도 없는 잔잔한 삶이다.아내가 자신만의 방을 가지고 싶어하자 남편은 아내를는 전형적인 공무원 출신의 남편, 여교사 출신으로 자존심이 강하지만 절약하는 생활이 몸에 밴 평범한 주부 출신의 아내, 이 둘이 엮어 내는 생활의 자잘한 이아기만으로도 단편 소설이 요구하는 내적 긴장을 확보하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작가가 지닌 탁월한 묘사력, 그리고 여러 일상사를 통해 인물의 생동하는 성격을 창조해 내는 눈 깊은 관찰력에 의한 것이다.3.활동 포인트: 작가이 현실에 대한 인식이해, 핵심 갈등요소 파악, 소재의 상징적 의미 파악4.학습과정: 시대 변화에 대한 감수성과 창조5.주요학습내용: 개인이 삶에 투영된 시대의 모습 이해하기6.지도상 유의점: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삶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는 주인공의 일생을 전체적으로 재구성해보고 그것을 삶의 변화에 따라 부분적으로 검토해 보는 것이 효과적이다. 작품에 드러난 사건의 진행을 시간순서에 따라 한문장씩 정리해 보면 그 속에서 사건의 원인이 되는 부분과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해결책이 무엇인지 찾아 낼수 있을 것이다. 소설의 사건진행이 갈등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을 이해할수 있도록 하며, 그러한 갈등의 원인과 진행 그리고 결말은 무엇인지 파악할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갈등해결과정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생2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일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각자 이 작품의 결말을 새롭게 써보는 활동을 해 볼수 있다.7.핵심정리갈래 : 단편 소설작가 : 박완서(1931 )구성 : 시간의 역전적 구성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배경 : 1970년대 서울제재 : 어느 소시민의 일상적인 삶주제 : 폐쇄된 사회에서 느끼는 고통과 중압감출전 : 『현대문학』(1972)8.이해와 감상박완서의 작품들은 대부분 사람답게 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병든 사회에서 개인이 겪게 되는 좌절과 패배, 이러한 현실에 대한 깨달음과 반항, 반항의 좌절 등에 관한 것이다.이 작품에는 몇 가지 의미 있는 사건들이 서로 긴밀한 관련이 없는 듯 제시되고 있다.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의 문제, 예술을 포기하고 일상의 삶 속으로 빠져드는 절망감다.
체 게바라(Che Guevara)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는 1928년 아르헨티나 로사리노(Rosarino)의 중류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2살 때 발병한 천식은 그를 평생 괴롭혀 왔는데, 공기 좋은 곳에 이사를 다녀봐도 증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초등학교 과정은 결국 어머니 곁에서 자택학습(Home Schooling)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일찍이 카를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프로이드의 저서에 심취했으며 1941년 그가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문학과 체육과목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스페인 내전에 휘말린 정치적 망명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인 게바라는 좌익 파시스트가 득세한 독재국가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상황에 환멸을 느껴 한때 '反 페론'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군사정권에 강하게 반발했으며 자본가들의 '富의 독점' 특히 미국식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통렬히 비판했고 그들을 풍자하는 무언극을 쓰기도 했다. 기록에는 그의 어머니 역시 '反 페론'성향이 강했던 것으로 나와있다. 1947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에 진학한 게바라는 의학을 전공했으며 급진적 학생운동에는 가입하지 않고 관망하는 태도만 보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의학을 공부하면서 우선 자신을 괴롭혀온 천식에 관해 관심을 보였으나 차츰 나병에 더욱 몰두하기 시작했다.그가 난생 처음 긴 여행길에 오른 것은 1951년 북 아르헨티나를 자전거로 일주한 것. 그때 그는 병들고 가난에 찌든 인디오 원주민들을 접하게 되었고 그들과 교분을 나누기도 했다. 1951년 의사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더 길고 긴 여행을 떠났는데, 칠레에서는 한때 좌파정부를 세워 대통령에 올랐다가 반혁명 혐의로 사형 당한 아옌데(Salvador Allende)를 만나기도 했다. 페루의 나환자촌에서 한동안 봉사활동을 했고 콜롬비아를 여행할 때에는 폭동이 일어났는데 시위대로 몰려 잠시 구금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베네주엘라, 마이에미 까지의 긴 여행을 마친 후 잠시 집에 돌아와 평소에 관심을 보였속되어 있던 쿠바의 설탕산업은 시장의 다변화를 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혁명적 논리는 모택동의 전술에 매료되어 있었다. "혁명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 고 수정주의라고도 비난했다. 그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게릴라 원조 및 반란혁명의 완수를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그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그가 어딘가 에서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으나 그때 그는 아프리카에 있었다. 콩고에서 쿠바식 게릴라전에 의한 혁명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원조병력을 보내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볼리비아에서 게바라는 마지막 혁명의 모험을 시도했다. 게릴라의 구성원은 쿠바,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페루 출신들이었는데 볼리비아는 사실상 남미 5개국과 맞닿는 곳이어서 혁명을 위한 최적지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는 볼리비아 공산당은 소련의 영향력아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들은 당연히 게바라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그러자 조직이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전투 때마다 이탈자가 속출하고 기밀이 새나가 많은 조직원들이 체포되거나 피살되었다. 反게릴라전에 고도의 전략을 갖춘 미국CIA의 비밀첩보원들의 지원으로 게바라 부대는 숱한 기습을 받아 지리멸렬했고 그 역시 부상당한 채 포로가 되었다.1967년10월9일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을 꿈꾸던 한 젊은이의 파란 많은 일생은 볼리비아의 이름 없는 작은 촌락 라이게라(La Higuera)에서 수발의 총성으로 막을 내렸다. (비밀리에 매장된 체 게바라의 시신은 1997년에야 발견되었다)출처 : 체 게바라 평전(장코르미에, 실천문학사)차티스트(Chartist) 운동중산계급의 지위상승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한 것은 프롤레타리아였다. 공장에서의 노동시간은 여전히 길었으며 급속한 산업의 팽창에도 아랑곳없이 그들의 고통은 그칠 줄 몰랐다. 더욱이 의회는 하층계급의 선거권 요구에는 귀를 막고 있었다. 위대한 자유주의 정치가인 존 러셀경도 1832년의 개혁들이 마지막이었다고 선언하였많이 줄어들었으나 선거권을 가진 사람들은 20만 명에 불과하였다. 2월 혁명(the February Revolution, 1848)의 원인들로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들 수 있다.첫째로는 민주주의에 대한 다수국민의 열망을 외면했다는 사실이며, 둘째로는 루이 필립과 그의 집단의 타락이 프랑스인들의 비위를 건드렸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1847-1848년의 흉작은 수많은 실업자를 속출케 하여 프랑스정국을 불안하게 하였다. 셋째로는 시민왕으로 자처한 루이 필립의 반승려주의 정책이 가톨릭의 불만을 크게 샀다는 사실이다. 루이는 프로테스탄트인 기조를 1840년 주무장관으로 임명하여 가톨릭학교를 학대하였다. 그리고 기조의 보수주의적 정책은 자본가와 관료 이외의 사람들을 억눌렀다. 넷째로는 산업프롤레타리아에 사회주의의 이념이 널리 침투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1847년의 공황기에 루이 블랑(Louis Blanc: 1811-1882)은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주고 모든 사람들을 번영하게 한다는 사회주의사상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2월 혁명은 어디까지나 7월 혁명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의 산물이었다. 루이 필립은 사업을 모든 것 위에 올려놓았다. 그의 지지자들은 무역과 투자가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전쟁에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러시아에 대항하여 폴란드를 위하여 전쟁에 나가지도 않았으며 오스트리아에 대항하여 이탈리아를 위하여 전쟁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바로 애국적인 프랑스인들을 건드린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국제적으로 세력이 커져 프랑스의 명성과 영광을 다시 한번 날리기를 바랐던 것이다.7월 혁명의 근본적인 병폐가 의회기구와 선거법의 모순에 있었던 것처럼 2월 혁명의 병폐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의회는 소수의 자본가에 독점되고 관료들이 의원을 겸하여 정부가 의회를 달리 조절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1847년경 루이 필립은 부유한 소수계층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반대운동은 애아는 정치적으로는 강력해졌지만 사회적으로는 매우 곤궁한 상태에 있었으며, 여전히 번영과 위엄을 획득한 사람들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부르주아지의 생활방식은 어디에서나 모범으로 여겨졌다. 그들의 문화, 그들의 도덕, 그들의 활력, 그리고 장식, 건축, 의복, 여가 등에 관한 그들의 취향은 유럽의 거의 전역에서 인정되었으며 앞 다투어 모방되었다. 1890-1914년간의 시기에 대한 프랑스 인의 “좋은 시절(Belle Epoque)"이라고 하는 관념은 마침내 유럽 전체의 관념이 되었던 것이다.질서가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이 부르주아적인 유럽의 이면에 숨어 있는 것을 볼 줄 알았던 사람은 실로 거의 없었다. 단지 몇몇 시인과 철학자, 예술가, 그리고 이들 주변의 한정된 집단만이 임박한 격동을 예감하고 있었을 뿐이다.출처 : 새유럽의역사(프레데리크 들루슈 편, 윤승준 역)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세계 각국은 1929년의 대공황을 전후하여 자국산업의 활로를 찾기 위해 다른 나라들의 수출기회 봉쇄로 국제경제질서는 붕괴되어 전 세계적인 무역전쟁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1930년대 미국의 보호무역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관세법의 개정과 더불어 1933년 금본위제로부터의 이탈조치는 각국에 환율의 불안정화와 다각적 결제의 곤란을 초래함으로써 환율의 경쟁적인 평가절하를 유발시켰다.2차 대전 전에도 무역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국제적인 노력은 있었으나, 그것은 무역자유화에 대한 원칙만 주장되었을 뿐, 그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협력방안은 마련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1944년 7월 연합국측 44개국은 미국의 Bretton Woods에서 회의를 갖고 국제경제질서에 관한 협의를 거듭한 결과, 각국간의 상호 협조정신에 입각하여 적극적으로 상호 의존관계를 창출해 감으로써 자유로운 경제교류를 도모하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사회의 복지와 번영을 실현하기로 합의했다. 이와 같은 광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구상의 모든 국민의 생활수준의 향상과 완전고용의 달성, 그리고 세계경제의 확대이해 4월, 미국의 새 대통령 케네디가 CIA에 지원받는 망명 쿠바인 부대를 쿠바에 침공시켰으나 실패했다. 쿠바는 그 직후 스스로 '사회주의 공화국'이라 선언함으로써 서반구에 있으면서도 동방의 사회주의권에 들어간 것을 내외에 명확히 했다.쿠바 혁명은 라틴 아메리카 전체에 큰 충격을 주어 좌파 무장 게릴라 투쟁이 각지에서 불타올랐다. 케네디는 이것을 억누르기 위해 '진보를 위한 동맹' 계획을 제기해 향후 10년간에 200억 달러의 원조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사회변혁을 회피하고 '진보'를 추구하는 계획으로 성과가 있을 리 없었다. 1962~1963년 라틴 아메리카에서 국민 1인당 GNP 증가는 이 계획이 목표로 했던 2.5%의 절반 이하인 1%에 머물렀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케네디가 목표로 했던 '자유와 민주주의'와는 정반대로 이 두해 동안에 각지에서 미국의 군사원조로 강화된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빈발했다. 중미에서는 코스타리카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우익정권이 지배했고 또 1964년 브라질에서도 쿠데타에 의해 군정이 시작되었다.한편 60년대 말부터 안데스 나라들에서는 좌파 민족주의의 대두가 두드러졌는데, 그것은 '진보를 위한 동맹'하에서 미국의 다국적 기업이 중남미로 눈부시게 진출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1968년 우선 페루에서 성립한 좌파 군사정권은 미국의 경제 지배의 상징 '국제석유회사(IPC)를 접수하고 민족주의적 공업화를 추진했다. 이어서 1969년에 볼리비아, 1972년 에콰도르에서도 제각기 군사정권이 미국계 석유회사의 접수와 농지개혁을 강행했다. 이에 반해 칠레에서는 1970년 선거에서 사회당과 공산당을 중심축으로 한 인민연합의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구리 등 중요 자원의 국유화, 미국계 기업의 보상접수 등 사회주의화를 평화적 수단으로 달성하려고 했다. 그러나 구리 가격의 하락과 국내에서의 인플레 진행 등 경제 곤란이 심화됨에 따라 대립이 격화되어 인민연합 내부의 균열도 깊어졌다. 1973년, 아옌데 정권은 미국에 지지받은 군부의 쿠다.
≪현상윤 단편소설의 문학사적 의의≫Ⅰ. 서론현상윤은 1910년대에 최남선, 이광수와 함께 작품활동을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소설에서 근대소설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안국선(1910년대 작품), 이광수(초기단편소설)와 함께 과도기적 역할을 한 작가이다. 그는 주로 「학지광」과 「창조」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시대적 고민과 자기 인식을 드러내었다. 이에 수반된 여러 가지 문학적 기법과 새로운 시도는 이후 나타날 본격적인 근대소설을 준비하는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그의 문학활동에 대해서는 많이 논의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현상윤이 1910년대에만 문학활동을 하고 3?1운동 전후에는 교직에 몸을 담으면서 창작활동에서 손을 떼었기 때문이다.본 발표문에서는 현상윤의 작품 중 6개의 단편소설을 형식적 특성과 아울러 살펴봄으로써 그 속에 내재한 근대적 요소 및 문학사적 의의를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Ⅱ. 시대적 상황과 근대 소설의 태동1910년대는 일제 암흑기로서, 우리 민족의 문학 활동이 극히 제한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관의 붕괴로 말미암아 그 형식이나 주제에 있어서도 안정성을 잃어가고 있었다.기존의 신소설은 대중적 인기만을 생각하는 통속적 길을 걷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통속적 신소설이 신지식인 계층의 문화적 욕구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이 시대 신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은 대부분 일본 유학 중이거나 유학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신소설의 통속화를 비판하면서 신소설의 문체를 새롭게 하고 언문일치와 시제를 확실히 하는 새로운 서사양식의 창조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신소설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단계의 서사문학 수준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이들은 한문학에 근본을 두고 변혁을 시도하던 선각자도 아니고 작품을 출판해서 수입을 얻고자 하는 직업적인 작가도 아닌, 방황하는 세대의 젊은이들로써 자기 표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관념적으로 들뜬 문장이나 설득력이 부족한 영탄을 늘어놓는 것이 다반사였다.하지만 처음에 신소설의 축약형에 불과 했던 단편소설의 하인으로 들어가지만 그에게 이미 어릴 때부터 약혼한 영애가 있어 삶의 희망이 되었다. 하지만 영 애가 춘원의 상전인 상호의 금전적인 유혹에 넘어가 춘원에게서 돌아서고, 상호도 몰염치한 행동으 로 일관하다 결국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줄 모르고 춘원을 쫓아 버리기에 이른다. 춘원은 때때로 만나는 영애의 얼굴에서 어느 샌가 조금씩 자신을 잊어버리고자 하는 것을 깨닫고 화를 참지 못해 상호와 영애 두 사람을 죽이고 자기도 자살한다.2) 특징당시의 작품들은 주로 작가의 경험이나 의식에 근거하여 쓰여지고 신 문물의 도입이나 조혼제도 의 타파 등을 내세우며 주제의식을 드러낸 것이 다반사였으나 이 작품은 작가 개인과 무관한 세계 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 주제의식의 개입도 찾아보기 어렵다. 즉, 소설적 상황을 영애가 단순히 춘원 을 배신하는 것으로 그리지 않고 그녀가 타락할 수밖에 없었던 부조리한 사회의 결과로 처리함으로 써 사회의 모순을 사실적으로 파악하였다.그리고 영애의 운명은 「감자」의 ‘복녀’나「물레방아」의 ‘신치규의 처’와 같이 물상숭배 사상에 희생당하는 운명적 여인의 출현을 예고한 것이며 김춘원의 자살은 영애가 그를 배신했다는 점 때문 만이 아니라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돈 없고 힘없는 자의 거부의 몸짓’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에익- 그래 너나 내나 죽지 안코 산대야 무슨 시원한 世上을 보겟니… 돈만 잇고 勢力만 잇는 이 世上에… 너와 내가 언약이니 무엇이니 하야가지고 오늘날까지 내려온것이 처움부터 잘못이 다. 아아 世上이 우리로 하야곰 滋味잇게 살아감을 許諾지 아는다.- 돈업고 힘업는 우리로”)3) 한계① 비극의 성격이 모호하다 - 부모가 괴질에 걸려 돌아가신 후 춘원은 외가에서 지내게 되나 거 기서도 천대받는 신세가 되어 결국 남의 집 하인으로 들어가는 데, 이러한 비극의 연속선상에 서 어떤 역사적?사회적 의미를 찾을 수 없다.② 인습적 사고가 엿보인다 - 단지 부모가 맺어준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춘원은 마땅히 영애과 결 혼할 권리를 가진 것으로 믿고 있으며 혼약적 묘사 없이 서술적 설명으 로 일관하고 있다③ 영옥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지니지 못한 채, 소극적 여인상 패배적 인간상의 반복일 뿐이다.3. 재봉춘 (1915년, 청춘 4호)1) 내용이재춘은 순안(順安) 사람으로 집안은 어려웠으나 어려서부터 비상한 천재의 면모를 보이며 자랐 다. 그는 열 네살 때에 관비 유학생에 뽑혀 일본에 유학하여 8년 동안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 고 학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칠게 치는 세상 물결이 그에게 충동을 주어 그는 학업을 중 단하고 귀국한다. 귀국 후 그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암흑의 경지를 광명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 던 중, 어느 여름 안주(安州) 읍내 모 소학교에서 개최하는 소학교 교원 하기 강습회에 강사로 초빙 되어간다. 이재춘은 숙소를 김좌수집으로 정하는데, 김좌수의 딸 김숙경과 서로 좋아하게 되고 아무 도 모르게 하룻밤 인연을 맺는다. 그런데 이재춘은 다음날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오라는 노모의 편 지를 받고 귀향한다. 두어 달 뒤 이재춘은 당시 유명한 아무 사건에 애매하게 얽혀져서 이름도 모 르는 죄명 하에 분하고 애닮은 5년의 세월을 제주도에서 외롭게 보내게 된다. 제주도에서 풀려난 이재춘은 고향을 돌아왔지만 홀로 남은 노모마저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는 세상을 등지고 동서 사 방 명산 대천을 찾아 떠돌며 노래를 읊기도 하고 큰소리로 통곡하기도 한다. 어느 날 그는 안주 땅 을 지나며 벌써 10년 전의 일이 되어버린 김좌수집 건넌방에서의 언약을 떠올린다. 이재춘이 떠난 후 김숙경은 기독교의 전도사가 되었는데, 어느 날 영변의 땅에 가서 전도를 하고 돌아오던 길에 이재춘과 닮은 사내를 길에서 만난다. 그 사내를 미행한 김숙경은 그가 이재춘임을 확인하게 되고 두 사람은 뜨거운 눈물로 재상봉한다.2) 특징이 작품에서 주인공 재춘의 삶은 당시대적 현실과 직접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작가가 재춘의 옥고를 ‘애매한’것으로 처리한 것은 105인사건일 가능성이 크다 이 사건은 애국자들을 검거하기 위 해 일제가 조작해낸 나, 겨우 1백원 만을 구해 영은에게 우편으로 보낸다. 영은은 강선관 주인에게 간청하여 1백원만 받고 놓아줄 것을 원하나 주인은 허락하지 않는다. 하루는 영은이 한밤중에 탈출을 시도하나 순사에게 발각되어 그 역시 수포로 돌아간 후, 지니고 있던 1백원마저 주인에게 빼앗기고 심한 학대를 받는다. 결국 영은 은 자신의 팔자와 신세를 한탄한 후 대동강으로 가 물에 뛰어들어 자살한다.2) 특징이 작품은 그 구성의 측면에서 「한의 일생」이 보인 미숙성을 극복하고, 전혀 새로운 모습을 보 여준다. 이 작품 역시 외형적으로는 모두 네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한의 일생」에서는 첫 단락에서 현실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두 번째 단락 이하가 과거로 채워진다. 이는 작품이 짜 임새 있는 구성을 갖춘 것이기보다는 설명적 이야기 전달이라는 성격을 지닌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나 「청류벽」은 첫째와 넷째 단락이 현재 일어나는 사건 또는 장면의 묘사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간에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삽입되었다는 점에서 거의 독립된 근대「단편소설」의 구성을 보 여준다.3) 한계이 작품에도 성숙한 근대소설로 보기에는 아직 미흡한 부분들이 있다. 특히 두 번째 단락에서는 과 거 사건의 제시가 주로 설명적 문장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분명 장편적 이야기의 설명적 축약이며 ‘단 편 소설’에 적합한 글쓰기라고 보기 어렵다. 또한 소설의 마지막까지 작가는 곳곳에서 자신의 감정을 직접 드러내며 작품에 개입하는 데, 이러한 작가의 직접 개입은 논설의 변화된 표출 형태 가운데 하 나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단락에는 주인공이 자살하고 난 이후, 근대소설로는 전혀 불필요한 이른바 사족이라 할 만한 작가의 해설이 제시되어 있다. 이는 일종의 편집자적 해설에 가까운 것으로 1910년 대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전근대적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청류벽」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두 가지 문제점, 즉 ‘단편소설’의 일부분에 ‘장편소설’적 소재를 축약 하여 설명적으로 제시하는 일과, 작가의 감정 섞인 목소리를 핍박! 사방에서 비웃고 꾸짖고 욕하고 미워하고 비방하는 것이 병의 이유이다.2) 특징암울한 시대의 우울한 그늘을 벗어날 수 없는 지식인의 고뇌와 자책감에 바탕을 두고 그 내면 세 계를 깊이 있게 형상화한 이 작품은 몇 가지 점에서 특이함이 나타난다. 오로지 내면성만이 존재하 는 듯한 형국을 드러내고 있어 현상윤 소설 중 매우 이질적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첫 장면 부 터 기존의 소설과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이전까지의 소설에서는 대개 자연의 묘사라든지 상황묘 사로 작품이 시작되나 여기서는 "이즘은 병(病)인가 보다"라고 현재형 시제를 사용하여 표현함으로 써 초두부터 주인공 '나'의 고민을 깊이 있게 드러낸다. 이러한 구성법은 신소설으로부터 훨씬 벗어 났으며 여타 1910년대 소설에서도 보기 힘든 구성법이다.작품에서는 주인공이 갈등을 느껴야 하는 구체적 사건이나 불안한 삶에 대한 직접적 설명은 전혀 없지만, 주인공이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일상사 속에서 삶에 대한 갈등과 불안감이 자연스럽게 드러 난다. 이렇듯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 자신이 병이라 느끼는 모습들과 그가 핍박받고 있다는 생각이 일관되게 드러난다. 그런데 결핍감의 구체적 원인이 없다고는 하지만, 주인공의 갈등의 원인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에 대한 설명적 제시가 없을 뿐 작가는 주인공의 갈등의 원인을 동네 존위와의 대화를 통해 암시한다.즉, 그를 괴롭혔던 진짜 이유는 그가 일제의 주구노릇을 할 수 없었던데 있었다. 주인공이 이렇게 억압을 느끼는 것은 그가 정직한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는 일제 식민사회에서는 아무것 도 할 것이 없다. 동네 존위가 요구하는 것처럼 일제의 주구노릇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직접 실 천적인 운동을 할 수 있는 출구도 마련되어 있지 못하다. 지식인이기에 권리니 의무니 윤리를 외치 고 다녔지만 실상 자기 자신은 허위임이 분명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화를 통한 주제의 암시는 직접적이 아니라 우회적이다. 이렇게 주제를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일겠다.
이태준의 생애와 문학Ⅰ.序論1930년대를 전후한 소설문학사에서 대표적인 작가장영우, 『이태준 소설연구』, 태학사, 1996, 3쪽 : 흔히 30년대 문단을 가리켜 '시는 지용(芝溶), 소설은 상허(尙虛)'라는 말을 하곤 한다.尙虛 李泰俊은 일찍이 남한에서는 '근대적인 단편소설의 한 완성자'이재선, 『한국현대소설사』,홍성사, 1979, 364쪽로 평가될 뿐만 아니라 한때는 북한에서도 '조선의 모파상'상허문학회, 『이태준 문학연구』, 깊은샘, 1993, 24쪽참고로, 월북 당시 김일성 대학의 교수인 정율로부터 받은 칭호이다.로 불린 적이 있는 작가이다. 또한 글쓰기 교본의 고전 『문장 강화』1939년 본인이 주관하던 지 창간호(1939)부터 연재하다가 9회로 그치고 이듬해 문장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한 책이다. 이태준의 뛰어난 글쓰기 실력을 잘 말해주는 名書이다. 당시 소설가로서의 이태준의 명성과 대비되어 시인으로서 쌍벽을 이루던 정지용은 그의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남들이 시인 시인 하는 말이 너는 못난이 못난이 하는 소리 같이 좋지 않았다. 나도 산문을 쓰면 쓴다 ㅡ 태준(泰俊)만치 쓰면 쓴다고 변명처럼 산문 쓰기 연습으로 시험한 것이 책으로 한 권은 된다…〉(1940)를 집필한 당대의 문장가이기도 하다. 월북작가인 그에 대한 평가는 1988년 납·월북 문인에 대한 해금조치 이전까지는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부정적인 시각이 우세하였고 연구도 미비하였다.공미영, 「李泰俊 短篇에 나타난 女性像 硏究」, 인하대 석사학위논문, 1994.참고- 이태준에 대한 비판적 평가해방 이전: 순수문학가라는 선입견에 입각. 인상비평 위주. 작품 현실인식 부족을 비판.해방 이후 1988년 납·월북 문인에 대한 해금조치 이전까지: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부정적인 시각 우세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해금조치 이후 수정되어 다양한 관점에서 그의 문학세계를 살펴보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본 발표에서는 『思想의 月夜』(1941)를 중심으로 그의 작품 속에 반영된 자전적 면모를 살펴보고, 월북직전산에서 사환생활을 하다 자신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외조모를 만나고, 외조모는 빈대떡을 부쳐 팔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그를 보살핀다. 덕분에 그는 틈틈이 독서를 하였는데 이때 톨스토이의『부활』을 抄譯한 『해당화』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이 무렵, 외국유학을 함께 떠나자는 한 인척 아저씨의 권유를 받고 중국 안동현으로 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2년여에 걸쳐 평안도 지방을 배회하다가 드디어 서울에 오게 된다.李泰俊, 「徒步三千里」, 學生, 1929, 52쪽 : 民忠煥, 위의 책, 28쪽에서 재인용1920년(17세) 서울로 올라와 배재학당에 응시, 합격했으나 학비가 없어 등록조차 못하고 배회하던 중, 원산 물산객주집에서 알게 된 한 상인의 도움으로 낮에는 상회의 일을 보고, 밤에는 청년회관의 야학고등과에 입학하여 주경야독의 생활을 시작한다. 이듬해 1921년(18세) 4월, 그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보결생으로 입학한다. 당시 스승으로는 가람 이병기, 같은 학예부원으로 상급반에 정지용, 김영랑, 박종화 등이, 하급반에 박노갑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사정은 어려워 월사금 체납자의 명단에서 빠지는 일이 드물었고 등록 마감일 전후에는 결석하기가 다반사였으나 그의 성적은 중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尙虛의 어려운 사정을 알게된 교장의 후의로 교장실 청소를 전담하는 대신 학비를 면제받게 된다.그러자 시간의 여유가 생겨 尙虛는 틈나는 대로 도서관에서 위고·투르게니에프·괴테·톨스토이주요 탐독 작품-빅토르 위고(19C 프랑스문학의 대문호)『레미제라블』, 투르게니에프 『前夜』,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톨스토이 『부활』의 작품을 탐독한다. 이 같은 尙虛의 독서활동과 고등학교 학적부의 기록내용(1학년 때 '嗜好 및 志望'이 '文學'으로 명시), 그리고 재학 당시 휘문고보의 교지인 《徽文》의 학예부장으로 활약하였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소년시절 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그는 제2호《徽文》(1933)에는「부여행(夫餘行)」이란 기행문을 비롯, 33년 문단작가 김기림·이효석·이종명·김유영·유치진·조용만·이태준·정지용·이무영 등 9면이 결성하였다. 이 후 이종명·김유영·이효석이 탈퇴학, 박태원·이상·박팔양이 가입하였으며, 다시 유치진·조용만 대신에 김유정·김환태로 교체되어, 항상 9명의 회원을 유지하였다. 1930년대 경향문학이 쇠퇴하고 문단의 주류가 된 이들은 계급주의 및 공리주의 문학을 배격하고 순수문학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여 당시 순수문학의 가장 유력한 단체로 활동하였으나 34년 만에 해체하였다. 동인지로는 《시와 소설》이 있다.를 결성하며 자신의 문학적 색채를 뚜렷이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보건전문학교·경성보건전문학교 등에 출강한다. 이때부터 1937∼8년 사이가 그에게는 가장 행복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시기로 생각된다. 그는 이 시기에 매년 한편 꼴로 신문에 장편소설을 연재하였으며 1933년에는 무려 2편의 장편을 포함하여 총 10편의 소설을 발표한다.6. 생활의 안정기와 상고주의 형성 〔30세-34세〕그는 1933년(30세) 성북동으로 이사한다.이 연대는 「달밤」(1933. 11., 《中央》, 短篇)의 무대가 성북동으로 되어 있는 것을 참조하여 추정한 것이다. 또한 1934년 그의 주소지가 '경성시외 성북리 248번지(《조선문학》, 1934. 1)'로 되어 있는 것도 좋은 참고가 된다. : 장영우, 위의책, 41쪽그의 집은 현재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간송(澗松)미술관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1961)이 설립한 사립미술관. 서울 성북구 성북동 위치.한국 전통미술품을 주로 소장하고 있는 한국 최초의 민간박물관이다. 현재 10여 점의 국보급 문화재를 보관하고 있다. 전형필은 25살의 젊은 나이로 고서화에 관심을 기울여, 위대한 미술사학자 오세창(吳世昌)의 지도 아래 처음엔 고서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점차 그림과 도자기로 폭을 넓혀 나갔다. 29살 때인 1934년, 성북동에 일만 평의 땅을 사서 그 자리 건물에 북단장(北壇莊)이란 이름으로 수함께 비판당한다. 1956년(53세) 소련파의 몰락과 함께 2월 '평양시당 관할 문학예술부 열성자대회'에서 한설야에 의해 비판받아 숙청 당한다. 이후 함흥노동신문사 교정원(54세), 함흥 콘크리트 블록공장의 파고철 수집 노동자(55세)로 배치되는 등 험난한 여생을 보내다 사망한다. (정확한 사망일시는 알 수 없으며 1960년대 초 산간 협동농장에서 병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2) 작품 속에 반영된 그의 자전적 면모1) 고아 혹은 고학생 체험앞에서 언급했듯이 이태준은 아버지 이창하의 서자로 태어났다. 게다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생계를 꾸렸으며 그 어머니마저 세상을 뜬 후에는 외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오촌들의 집을 전전했다. 양반인 장기 이씨의 가문에서 이태준의 오촌 혹은 육촌들이 서자인 그에게 보내는 시선이 곱지 않았을 것은 추측이 가능한 사실이고, 더구나 고아였던 그의 고충은 그만큼 컸을 것이다.보통학교를 마치고 고향을 떠난 이태준은 그 후 줄곧 타향살이를 한다. 서자라는 굴레를 쓰고 태어난 데다 고아로 여러 곳을 떠돌아야 했던 현실은 어린 이태준에게 충격이었을 것이고, 자신의 삶을 헤쳐나가는 과정 속에 심적인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 역시 추측이 가능하다.이러한 서자 콤플렉스 혹은 고아 콤플렉스가 그의 소설에 나타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콤플렉스가 장편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 혹은 사건 전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이다. 이태준의 장편소설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이 대부분 고아 출신이거나 고학생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의 손영조, 의 윤필재, 의 박두영, 의 김상철, 의 박인철, 의 남필조, 의 이송빈 등은 작품의 주인공 혹은 중심인물들로 모두 고아이거나 고학생이다.장편의 중심인물 중 여성이 고아이거나 고학생인 경우도 있다. 의 이인애, 의 최득주, 가 대표적인 예이다. 더구나 역사소설인 의 황진이는 황 진사의 서녀이며, 의 호동왕자도 후궁의 아들로 서자이다.이들은 공통적으로 모두 사랑에 실패한다. 그 이 망명하셨던 거다! 거기서 돌아가신 설흔 다섯 살인 아직도 청년이시던 내 아버지! 그 애닯은 심정은 어떻하셨을가!오! 아버지? 이 미거한 것이나마 아버지의 뜻을 이으오리다! 선각자들의 수난에 보답하오리다!'송빈은 고난을 겪으며 새롭게 태어난다. 민족을 생각하고, 김옥균과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선각자를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도 그러한 인물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한다.이태준에게 있어 아버지는 계승의 대상, 나아가서 이념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 이념은 '개화(근대)'와 '민족'으로 집약될 수 있다. 개화당이었던 아버지, 또한 큰 뜻을 도모하고자 러시아로 망명하셨던 아버지의 삶은 고아로서 고난의 삶을 살았던 이태준이 자신의 삶을 사회적인 맥락에서 위치 짓고자 할 때 하나의 이념적 상징으로 자리잡게 된다.이러한 송빈의 모습 혹은 사회적 자각 과정이 여러 형태의 고아 혹은 고학생의 모습으로 장편에 나타나고 있다.의 손영조, 의 윤필재는 의 송빈처럼 고아이자 고학생이며, 의 박두영, 의 김상철과 그의 친구 박정현, 의 박인철, 의 남필조, 의 어하영과 주익형, 의 김정업은 고학생이다. 이들의 고아 혹은 고학생으로서의 모습 그리고 유학을 통한 변신은 에서 보여 준 송빈의 또다른 모습으로, 이는 이태준의 유년기 고아체험과 청년기의 고학생 체험이 형상화되어 성격화된 인물이라 할 수 있다.이태준의 소설에 나타나는 고아 혹은 고학생의 모습 말고, 또 특이할 만한 점은 서자 혹은 사생아의 모습이다. 이태준의 소설 속에 서자로 확정되어 등장하는 인물은 없으나 특이하게도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여성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부잣집 딸인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고아이건 고학생이건 출생관계가 명확하다.이태준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성들의 출생이 명확하지 않다. 대화나 서술자의 설명에도 나타나지 않는 이러한 남성들의 출신에 대한 의문은 곧 이태준이 서자였다는 사실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사실 이러한 결론은 논리의 비약 혹은 성급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태준의 한다.
현진건의 생애와 문학Ⅰ. 서론빙허 현진건은 「희생화」이후 「무영탑」에 이르기까지 20여년 동안 단편 20편과 장편 6편 그리고 약간의 수필 및 비평문장을 남겼다. 작품의 수는 그다지 많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근대문학 초기에 김동인, 염상섭과 더불어 단편소설 양식을 개척하여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근대문학의 선구자였으며 문학의 내용과 기교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인식한 작가였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는 동시대와 그 현실에 대응하며 살아가는 삶의 문제를 추구하였다는 데서 더한 의미를 부여 할 수가 있다.현진건 소설은 그 변모과정을 살펴볼 때 크게 3단계로 구분된다. 그중에서 이 글에서는 자아와 세계와의 불화양식을 드러낸 초기 체험소설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와 문학을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본론1. 현진건의 생애현진건은 1900년 음력 8월 9일 아버지 현경운(玄擎運)과 어머니 이정효(李貞孝)의 막내 아들로 대구에서 태어났다. 원래 서울의 중인집안 출신인 그가 대구에서 태어난 연유는 그의 아버지의 직장관계였다. 흔히 그의 아버지는 대구 우체국장을 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이를 증빙할 근거는 찾기 어렵다.현진건의 가계는 구한말 정치적 상승을 이룩한 중인출신 이었으며, 중인 가운데서도 역관집안이었다. 그의 작은 아버지 현영운(玄暎運)은 구한말의 대표적 친일파의 하나로 고종 때 역관 중에서도 높은 고관의 위치까지 오른다. 양부(養父) 현보운(玄普運)은 관립일어학교 출신으로 현영운과 마찬가지로 역관이었고, 재종(再從) 현상건(玄尙建)도 집안 사람들처럼 외국어 계통으로 관직에 나가지만 친일파인 현영운과는 대조적으로 친로반일파였으며 후에 예식원 외무과장이 되어 대한제국의 몰락을 외교적 차원에서 막으려 애쓴다.그는 어머니를 11살 때 잃었다(1910). 그는 모성의 보호를 일찍이 상실하고, 어머니라고 할 수 없는 젊은 계모 밑에서 성장했고, 그 후 보운에게 입양되었을 때도 그의 양모는 역시 젊은 어머니였다. 그의 양모는, 제적부에 의하면, 그보다 13살밖에 더 먹지 않았다고 한례와 역사소설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 육당(六堂)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동명』이 『시대일보』(1923~1925)로 전환 후 『동아일보』로 옮기게 된다. 그가 입사했을 때 동아일보는 경제적 안정 위에서 당시 조선민중의 최대 표현기관으로 성장했다. 1925년 사회부 기자로 입사하여 1928년 사회부장이 되어 1936년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사직할 때까지 동아일보의 핵심인물로 활동한다. 이 시기에 그는 당시 사회와 가장 치열하고 긴장된 관계를 맺으며 이 역작용으로 술주정이 점점 심해지고,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며, 결국 1933년 말 패혈성 단독에 걸리어 죽고 사는 고비에서 몇 주일을 방황한다.한편 그와 가장 친한 친구인 나도향(羅稻香)이 “민족과 가장 인연이 깊은 빈궁” 때문에 1926년 8월에 “타계의 객”이 되며, 상하이에서 사회주의계열의 운동가로 활동하던 숙형 정건이 체포되어 3년형을 받고 1932년 평양형무소에서 형독으로 병사하며, 정건의 아내 윤덕경이 1933년 “모든 것을 시숙(현진건)에게 부탁”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남편을 따라 순사한다. 식민지의 빈궁에 희생되는 친구의 죽음과 식민지라는 상황에 직접적으로 대결하는 저항적 지식인, 숙형의 죽음을 통해 그는 온건한 문화주의자의 불가피한 타협을 정직하게 고민한다. 1936년 8월 일장기 말살사건에 연루되어 반년의 옥고를 치르고 신문사를 사직함으로써 그의 신문기자 시기를 마감한다.이 시기에 그는 식민지라는 질곡을 명석하게 인식하여 초기의 관찰자적 태도의 불가함을 깨닫고, “짧으나마 굵게 살고 옥쇄(玉碎)할지언정 와전(瓦全)치 않은”정신의 가열성을 획득하게 하는데, 이를 바탕으로 그의 민족주의적 후기 문학이 개화하는 것이다. 민족의 ‘위대한’과거를 발견함으로써 자학과 고통 속에 신음하는 민중에게 3·1운동의 집단적 이상주의의 회복을 은밀히 전파한 「고도순례경주」(1922)와 「단군성적순례」(1932)는 그의 후기문학의 모태로 된다. 이 순례기들이 당시에 횡횡했던 복고주의로 전락하지 않았던 의문학과 민중과의 공감적 흐름을 외면한 체, 미래의 행복을 성급하게 선동하는 프로문학을 비판하고, 현실 속에 고통받는 민중을 정직하게 응시하고 그 비참과 고통을 나누어 가지려는 ‘오늘’의 문학관을 펼치는데, 그의 실제비평은 피상적으로는 작품의 기교적인 문제에만 집중되어 있어, 그의 문학관과 상반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의 기교에 관한 관심은 “독자에게 작용하는 힘”을 획득하기 위한 방법론의 모색이지, 결코 기교 그 자체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의 실제비평은 그의 문학관을 작품을 통해 실천하려는 구체적인 방법론의 탐구이다.동아일보에 입사한 이후, 그의 문학활동은 거의 중지된다. 1926년 『조선의 얼골』을 간행한 이후, 그가 발표한 작품다운 작품은 「신문지와 철창」(1929), 「정조와 약가」(1929), 「서툴은 도적」(1931), 「웃는 포사」(1930~31)에 불과하다. 이러한 이유는 그가 식민지의 민중에 대한 공감만으로는 글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난을 극복할 힘과 구체적인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침중했다.이러한 한계에서 그는 전통에 눈을 돌린다. 그는 「고도순례경주」(1929), 「사상(史上)의 로만쓰」91929), 「단군성적순례」(1932)를 발표한다. 그는 이 작품들에서 전통과 만남으로써 식민지라는 현실에 의해 파괴되는 조선혼을 인식하고, 점차 마멸되는 혼을 극명하게 드러냄으로써 민중의 집단무의식을 의식의 수준으로 점화시키려고 하였다.1937년 이후 현진건은 『무영탑』(1938~39), 『흑치상지』(1939~40), 『선화공주』(1949)를 통해 역사소설을 지향하여 20년대 소설과 뚜렷이 구별되는 후기적 방향을 보인다. 그의 역사소설은 현실에서 탈피려는 낭만주의가 아니라, 현재의 역사적 바탕인 과거를 탐구함으로써 현재를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하려는 성실한 노력으로, 그는 과거를 관념적으로 도식화하여 교훈소설로 빠져들지는 않는다. 그가 마지막고 표현이 집을 떠났다. 광풍에 나부끼는 버들잎 모양으로 오늘은 XX 내일은 일본으로 굴러다니다가 금전의 탓으로 지식의 바닷물도 흠씬 마셔 보지도 못하고 반거들충이가 되어서 집에 돌아오고야 말았다.라고 서술하고 있다.1919년 고국에 돌아온 그는 육군 영관을 지낸 당숙 현보운의 양자로 입양하여 종로구로 이사후 처와 함께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양부의 재산과 처가의 힘을 입어 "보수 없는 독서와 가치 없는 창작" 으로 해가 지고 날이 새며 쌀이 있는지 나무가 있는지 모르면서 살아간다.이러한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현진건의 모습은 「빈처」의 주인공인 "나"에게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이 소설에서의 "나"는 외국 유학을 다녀왔으며, 무명의 소설가이다. 당시에 신문명을 받아들이던 개화된 지식인들이 대개 그랬듯이 이 나라를 위해서 무엇인가 보람된 일을 하겠다고 사명감과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당시의 지식인들 ,특히 예술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몸을 던지고 있던 청년들에게 나타난 또 하나의 공통점은 물질적 빈곤이다. 여기서 "나"는 그 같은 시대적 인물로서 고통을 겪고 있다. 소설의 첫머리에서 나타나는 은행원 T의 등장은 이러한 양상을 비교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친척인 T는 아주 성실한 은행원으로서 출세의 길을 밟아 올라가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인품이 늘 "나"와 비교되고 있다. 그래서 친척 간에 칭찬이 자자하며 앞으로 돈푼이나 모으게 될 인물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와는 반대로 "그 잘난 언문 섞어서 무어라고 끄적거려 놓고 제 주제에" 조선에서 무엇인가가 되겠다고 하는 "나"는 한 마디로 "시러베 아들놈"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고통은 아내와의 갈등으로 이어지게 된다.주인공인 나는 작가 현진건과 비슷한 지식인이다. 작가 자신이 상해의 호경대학에서 공부하다가 돌아왔듯이 이 작품 속의 나도 외국 유학을 갔다가 돌아왔으며 다같이 무명의 소설가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또한, 소설 속에서 나타나는 "나"의 문인, 지식인으로서의 현실적 고통과 그에 따르는 가장, 경제적으로 몹시 무능한 인텔리라든가 주정뱅이로서 동료들과 술집과 기생집을 편답(遍踏)한 이야기를 작품에 반영시켰던 셈이다.이 사회란 것이 대개 술을 권한다오. 이 조선사회란 것이 술을 권한다오. 알았소? (중략) 저 우리 조선사람으로 성립된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아니못 먹게 한단 말이오....인용문에서 보듯, 남편은 지식인이 가지고 있는 갈등, 고통을 사회탓으로 돌리며 그것을 술로서 해결하고자 한다. "사회를 위해서" 일을 하려고 그 나름대로 애를 무척 썼으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못하는데 대한 심한 갈등과 좌절을 술로 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당시 작가의 갈등, 고통이 「빈처」를 쓸 당시와는 다르게 점차 심화되어 있고, 술을 통해 욕구 좌절을 보상 받으려는 내면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술 권하는 사회」에서의 "남편"의 술로 갈등을 벗어나려는 처사는 일시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갈등이 극복되기는커녕 더 극심해질 뿐이다. 그러한 점은 「타락자」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타락자」에서 주인공인 "나"는 20대요, 동경유학생 출신이다. 예의 「빈처」와 「술 권하는사회」의 주인공과 일치하며 이 또한 현진건의 모습이다. 주인공인 "나"는 요리집에서 "춘심"이라는 기녀를 사귀고, 애틋한 연정을 러브레터로 교환하기도 하고, "춘심"의 집을 느닷없이 찾아가고, 결국엔 성병을 선물로 받게 된다. 그런데, 지독한 홍역을 치루면서까지도 "춘심"에 대한 연정은 좀처럼 식을 줄 몰랐고, 결국 "춘심"에 대한 부고가 그들 사랑의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것이 「타락자」의 주요 줄거리이다.「타락자」에서는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가지 못하는 지식인의 황폐한 삶이 보다 극명하게 드러난다. 「술 권하는 사회」와는 달리, 술 대신 여자를 통해 욕구좌절을 보상받으려는 "나'의 행동은, 결국은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갈등과 박탈감에 대한 대응이었다.그런데, 실제로 작가 현진건은 아내 이외의 여자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술울 먹다가도 다른 사람이 기녀에게 치근덕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