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말고전고대라고 하면 고대 희랍의 아테네 중심의 문명과 고대 로마의 문명을 말한다. 이 시기는 서양 문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 현대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어 현대 세계 문명의 연원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그 때의 모습 그대로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것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정신과 상호관계가 계승되고 있을 것이다. 그리스 사회가 노예제 사회라는데는 별다른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노예제사회를 살펴봄으로써 전반적인 그리스 사회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을것이다.그런데 그리스사회에서 노예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문헌에 노예에 대한 취급이 많지 않거나, 지극히 단편적인 내용만이 서술되고 있다. 이는 고대저술가들이 고의로 노비의 생활과 문제를 서술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노비라는 존재는 당연한 것으로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여기에서는 ,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전체의 노예에 대해서 살펴보고, 이들과 다른 특성을 지닌 스파르타의 헤일로타이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본문1)그리스 노예의 정의노예)(표준적인 그리스어로 doulos , 라틴어로 servus )란 무엇일까? 노예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개념적 특성을 포함하고 있다. 먼저 전쟁으로 인해 포로로 잡히거나, 기타의 방식으로 인해 출생 집단으로부터 뿌리 뽑히고 개별화되어, 주인에 대해 무력한자, 두 번째로 결코 주인의 공동체 성원이 될 수 없는 외부인 (outsider), 세 번째로 노예는 인간인 동시에 소유물로서의 재산으로서의 지위를 갖고, 아울러 소유의 주체가 될 수 없는 특징으로, 이는 다른 예속신분들과 노예를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당시 그리스인들이 가진 노예에 관한 생각을 살펴보면, Euripides는 “ 노예는 불의를 당하여도 참고 견디어 가도록 暴力에 의해 强要당하면서, 갖은 굴욕을 받고 그 굴욕을 참아 나가는 것을 意味한다” 라 하였고, 플라톤은 “ 奴隸는 개인으로서 생각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의 사정에 따라 변화하는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많은 가축초한 사회가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Zimmern은 Cairnes가 주장한 노예제의 전형적인 조건들이 희랍사회에서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희랍사회는 노예제 사회가 아니었다고 하였다. W. L. Westerman은『고대 희랍과 로마의 노예제』(slave system of Greece and Roman Antiquity. 1995)에서 고대에 있어서 노예제의 경제적·사회적 역할을 과소평가하여 노예인구수를 적게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예제에 대한 인도적인 취급을 강조하면서 자유민과 노예 사이에도 크게 차이점이 없다고 보는 등 보수적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또 Jones도 웨스터만설에 있어서의 결함을 비판하고 있으나 희랍문화에 있어서의 노예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있다.세 번째의 이론은 M. I. Finley의 이론이다. 그의 연구는 희랍의 구매노예제에 기초를 두어 민주정과 구매노예제의 상호조장이라는 이율배반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고, 자유민의 노동과 노예노동의 이원적 존재를 강조하여 유물사관과 실정사관을 절충하는 입장에 있다. 즉 그의 주장으로는 희랍사회는 자유민과 노예가 상호협력하여 이룩해 놓은 것이라는 것이다.2)그리스 노예의 전개과정그리스에서 노예관련 최초의 문헌기록은 기원전 13세기 이전 미케네 왕국의 궁정에서 사용된 문자인 선문자 B서판에서 나오는데, 미케네는 노예비중이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아 노예제 사회가 아니였다. 미케네의 노예제는 그리스에 의해 직접적으로 계승되지 못하였고, 그리스 노예제는 기원전 8세기 이후 새로운 사회경제구조 내에서 발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암흑기후기사회상을 많이 반영하고 있는 호메로스의 시의 세계가 하나의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호메로스 시의 세계는 국가가 발달하기이전에 유력한 가문 oikos의 우두머리들이 각 지역에서 할거하던 시기였는데, 노예들은 그러한 가문에 소속되어 가장의 보호와 권위 하에서 그 구성원의 일부로 간주 되었다. 이 같은 “가부장적 노예제” 는 기원전 7~6세기를 거치면서 노운데서 8만내지 10만명 이였다는 설이 흔히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전체인구에 대한 노예의 비율이 28~33%로 역사상 다른 노예제 사회와 비교해 볼 때 거의 동일한 범위 안에 든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노예인구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노예들에 대한 끊임없는 수요와 공급의 메커니즘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8~10만의 노예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년 3200~4000명의 노예가 추가적으로 공급되어야 하는데), 노예의 공급은 어떻게 이루어 진 것일까? 노예를 얻는 방법은 4종류가 있다. 즉, 戰爭에서 捕虜로 잡힌 자, 買入된 자들, 집에서 태어난 자들. 부채로 말미암아 노예로 된 자들(솔론에 의하여 아테네에서 폐지되었다))이 있다. 대부분의 노예공급은 주로 돈으로 사들인 노예들이었다. 그리스와 그 주변지역들에서는 전쟁, 약탈, 유괴, 강제매각 등을 통하여 이들 인간상품이 늘 존재하였다. 노예의 가격)은 노동자가 1년동안 공공 공사장에서 일하여 벌 수 있는 액수에 약간 못 미쳤던 것 같으며, 노새한마리값보다는 싸고 소의 경우는 두 마리 값에 해당했다. 집에서 태어난 자들, 즉 양육에 의한 공급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왜냐면, 양육을 하는 비용보다, 구입하는 것이 더 싸기 때문이다.3) 노예 노동■농업분야 : 아테네 시민의 대부분이 농민이었던 만큼, 농업부분에서의 노예노동이 수행한 역할과 비중은 아테네 경제적 기반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요인이라 할수있다. 그러나, 농업부분에 관해서는 직접적인 자료가 없어 농업노예의 비중에 대한 2가지의 상이한 견해가 제기된다). 하나는, 농업생산에 있어서 노예노동이 필수적인 것으로 보고, 소농들의 대다수는 한두명의 노예를 소유하였을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척박한 토지에서 생산을 늘리는 것은 노동단위를 더 투입하는 길 밖에 없고, 그 역할을 노예가 했다고 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농업생산에서 노예는 부수적인 것으로, 농민들은 스스로 농사짓는 농민으로서 자신과 가족의 노동만으로 삶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광산 : 아티카 당하면 그의 명예가 손상을 입을 뿐아니라, 개인적반목이나 원수관계를 일으키는 사회적 긴장의 위험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을 노예가 담당함으로써, 노예는 국가의 대리인으로서 간주되어, 이는 사회적 긴장을 예방하는 경제외적 기능이라 할 수 있다.■수준 높은(知的인) 노예 : 일부노예들은 상당히 지적인 기술과 책임을 요하는 일을 가지고 있었다. 가령 동전의 무게측량을 다루거나, 서고의 사무인, 서기, 위원회의 보조사무원들이 있다.전반적으로 살펴보면, 그리스의 노예는 농업보다 공업이나 광업에서 광범위하게 대규모로 고용되었다. 공업노예가 광범하게 사용된 이유는 그것이 부유한 사람들에게 투자 형태의 하나로서 인정을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노예에게만 적합하다고 규정된 저급 노동 분야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는 고대노예제의 2가지 특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첫째로는 노예가 어느 사회계층에서나 우발적으로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미국흑인노예제의 특성이 되었던 근본적인 인종적 차이라는 것은 고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노예노동은 이용형태에 따라, 소유주를 위해서 직접 노동을 제공하는 douloi, oiketai와, 다른 하나는 소유주의 거주지와는 별거(別居)하면서, 여러 가지 노동을 하여 수입의 전부 , 혹은 약간의 퍼센트를 주인에게 지급하고 나머지는 자신의 수입으로 삼는 andrapoda misthophorounta, duoloi misthophorountes,choris oikountes로 나뉘어 진다.4)노예제의 사회적 관계(1)노예에 대한 대우노예는 다른 소유물과 달리 인간이라는 특수한 재산인 동시에 잠재적으로 위험한 적대자였으므로, 노예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도적으로 보장할 국가 권력이 필요했다. 즉, 법률과, 제도적 장치로서 노예제를 유지 강화하고 안정시키려 했던것이다. 노예 관련 법률은 다음의 세가지 목적을 위해 만들어 졌는데, 첫째로 노예와 자유인간의 근본적인 구별을 유지, 강화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로는 주인들에게 노키는 것이 그 예이다. 노예들을 해방시켜 육군이나 해군으로 전선에 투입한 예로는 마라톤전투와 펠로폰네소스전쟁이 있는데, 이 두 경우는 어쩔 수 없는 최후의 비상수단으로서였다.(3)노예의 저항노예는 고의적 손상(사보타지), 도주, 반란 등의 방식으로 주인의 압제에 저항하였다. 꾀병, 도구부수기, 도둑질, 태업, 가축학대 등 소극적이고 은밀하게 하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방화, 자해, 주인이나 감독에 대한 폭력, 도망 등 보다 적극적인 방식을 취할 수도 있었다. 이같은 개별적인 저항의 방식들은 남아있는 증거도 거의 없을뿐더러 사실상 계량이 불가능하다. 이에 대해 주인은 굶기거나 가두고, 족쇄를 채우고, 매질로서 대응하였다. 특히 노예의 도망은 재산상의 손실인 동시에 치안상의 문제를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도망노예를 숨겨주는 것은 중죄에 해당하였으며, 붙잡히면 낙인을 찍고, 가혹한 형벌을 가했다. 보다 적극적인 저항은 반란인데, 그리스의 경우 순수한 노예반란은 키오스)에서 단 한차례 일어났을 뿐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는 노예들이 분산 고립되어 있고, 출신지역의 상이로 인해 서로간의 의사소통이 어려웠기 때문에 반란을 조직화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4)그리스 노예의 이완성(弛緩性)을 나타내는 특권노예상태가 부러움을 사는 위치는 아니었으나, 그리스 세계에서는 노예에 대한 인종적, 계급적 반감이 존재하지 않았고, 이 사실이 노예들이 누렸던 많은 특권을 설명해준다.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노예와 자유민의 결혼이 금지된 것이 아니었고, chorisoekountes는 재산의 소유도 허용되어 , 충분한 재산이 모여지면 자유를 살수 있었다. 또 공공장소에서의 의상이나 태도의 차이로 노예의 열악한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도록 하는 규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한때 노예였다는 사실이 그 사람의 경력에 오점이 되지 않았고, 해방노예가 주인의 유언에 따라 재산과 그 아내를 물려받는 경우마저 있었다. 가족의 성원으로서 노예들은 종교의식에도 참석을 허가받았다. 노예노동과 자유노다.
고고학하면 우리는 흔히 발굴을 떠올린다. 그러나 발굴이 시작이기는 하지만 , 결코 끝일수는 없다. 발굴된 유물을 가지고 우리가 보지못한 옛날을 다시 재구성해야하니 말이다. 그런데, 다시 재구성하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왜냐면 발굴되는 유물은 극히 한정되어 있고, 우리가 알아야할 그리고 알고싶어하는 옛사람들의 모습은 아직도 많은 미궁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발굴된 유물을 가지고 유물과 부단히 대화하고 , 대화의 결과로 어떤 가설을 제시하게 된다.그러나 이 가설을 제시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다양한 추론을 통해 무한한 상상의 영역까지 사고의 폭을 넓혀 유물의 실체를 밝혀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출토된 유물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과정은 복잡하고 전문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일반인들에게 고고학이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이책은 절대로 우리에게 전문가이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유물을 통해 추론 내지 상상이 가능한 부분들을 서술해 우리 독자로 하여금 의문을 갖게 하고 저자와 같이 생각하도록 이끌고 있다.이 책은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로 크게 시대구분을 한 뒤 ,시대별로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키워드 42가지를 뽑아 설명했는데 각 장 앞머리에 시대 개관을 붙여 이해를 돕고 있다.각각의 키워드 마다 저자는 한 가지 의문을 던지고 여러 증거와 가능성을 대입하는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다.사람은 두발로 걷는다. 이것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아마도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들은 사람이고 또 지금 두발로 걷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우리는 두발로 걸었을까? 물론 아니다. 처음의 인류는 네발로 걸었다. 그렇다면 왜? 무엇 때문에 두발로 걷게 된것일까? 여기에 대해 작가는 여러 가지 가능한 가설을 제시해주고 있다. 연모사용가설, 사냥가설, 음식분배가설, 먹거리유인 가설, 로드만과 매킨리의 가설이 있다. 그러나 이 가설들은 각자의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고는 있지만, 연모사용가설같은경우는 두발걷기써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지만 ,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없었던 것은 아닌것이다. 고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환경에서 살았을뿐이지 살아가기 위해서 주변환경을 이용했을것이다. 주변환경을 이용함에 있어서 자신들이 사용하기 편리한 것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것이다. 이처럼 그들의 생활을 이해함에 있어서 상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 같다.신이 선물한 불 에 대해서 보면, 불은 우리 인류가 발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것이다. 여기서 작가의 상상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다시한번 실감할수 이었다. 처음 인류가 불을 발견하게 되고 사용하게 되는것에 대한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사실 출토된 유물들은 당시 사회의 지극히 작은 부분만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 공백은 상상의 고고학 이 메워야 하는것이다. 이런 작가의 상상력은 구석기 시대 살았던 어느 한 남자의 이야기 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글을 읽다보면 마치 저자가 그 남자의 옆에서 지켜보고 쓴듯한, 그래서 읽는 독자로 하여금 한 남자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는듯한 착각을 일으킬정도 였다.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주거는 어떠했을까 를 읽으면서 , 내가 이제껏 가지고 있었던 선사시대사람들의 대한 착각을 깨닿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선사 시대사람이라하면. 너무도 오래전의 사람이기 때문에 상상으로만 만나기 때문에서인지 그들의 대한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듯하다.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이 보여도 우리와 다르니까 라는 한마디로 그냥 넘어가버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들도 인간이다. 단지 우리와 다른 것은 우리들은 그들로부터 시작해서 많은 세월동안 쌓여있는 문화라는 토대가 형성된 상태에서 살고 있다는것이고 , 그들은 그들 스스로 그 토대의 기초를 만들고 있는것이다. 그들도 기본적인 생각은 우리와 다를게 없다는 것이다. 좀더 편하게 따뜻하게살기 원했을 것이다. 그들의 주거지를 보면 오늘날 우리가 살기 좋은 곳이라고 여기는 곳이면 그들도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천을 짰던 구석신을 달래야한다. 그래서 죽은 사람을 특별하게 묻음으로 신에게 사죄한다 이럴수도 있지 않을까?식인풍습에 담긴 의미 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행했던 식인풍습을 보여준다. 식인풍습을 보고 야만적인 습속으로 인간이 본래 사악한 존재라고 평가하고는 했다고 한다.그러나 식인풍습을 대하면서 단순히 지금의 생각의 잣대로 그들을 평가하면 안될것이다. 식인풍습에는 족외식인과 족내식인이 있다. 이 식인풍속은 식사로서가 아닌 무슨 악의를 가지고서가 아닌 하나의 의례적인 행위였을 것이다. 즉, 식은습속은 당시 사회의 가장 절박한 문제들을 상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의미 있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짧은 내 생각이지만, 그들이 사람을 먹는 것이 의례적인 행위가 아닌 일상적인 행위였다고 했더라도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지 않을까생각이 된다. 우리들은 당연히 사람을 먹는 것은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교육에 의해서, 사회에 의해서 전해온 의식이기 때문이다.꽃을 사랑한 이 땅의 첫사람 에서는 산성토양에서 자라는 진달래 꽃이 알카리 토야에서 출토되었을때의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두루봉 2굴에서 발견한 꽃은 당시 사람들도 일상의 아름다운 모습이나 꽃을 통해 예쁘게 표현한것이다. 우리들이 꽃을 보며 아름답다고 느끼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옛사람들도 꽃을 보며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느낀것이다. 있을법한 곳에서 발견되는 유물은 기존에 있던 지식에 개연성을 높여주는 것이라면, 있어서는 안될자리의 유물은 새로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전달해줄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이 큰 것 같다.본디 없던 시간, 되찾게 된시간 에서는 일본의 역사왜곡과 우리들이 취해야할 자세를 말해주고 있다. 작가의 역사왜곡에 대한 글 중 마치 하인 주제에 상전을 몰아내고 , 본디부터 주인이었던양 하는 꼴이다. 그렇다고 하인의 본질이 변하겠는가 라는 말이 와닿는다. 일본은 본디 없던 시간을 만들어내서 그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우리의 역사는 의도적으로 감추려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작가는 단순히시간에 단순히 작은 동물을 잡기위해서 돌을 갈았다고 배웠지만, 그것이 아니라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나무가 물러져 더 이상 도구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무연모의 제작기법이 석기제작에 이용되었다는 것이다.염원과 미의식을 토기에담아 에서는토기가 왜 신석기부터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준다. 토기는 단순히 음식을 저장하는 기구로서의 의미가 아니다. 이토기라는 것 하나로 신석기인들의 삶을 알수가 있는것이다. 구석기인들이 단순히 토기를 만들줄 몰라서 안썼던 것일까? 이 책에서는 이런 의문에 대답을 해준다. 아니다! 물론 토기를 만들기위해서는 고도의 그당시인들로서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구석기인들이 토기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해도 이동생활을 하는 그들에게는잘깨어지는 토기는 별로 유용한 것이 아니었을것이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토기를 사용한 신석기인들에게는 토기가 필요하다는 말도 되는것이다. 즉, 토기를 사용하게 된 것은 단순히 기술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변화에 따른 산물인 것이다.과연 농경이 신석기 혁명일까 에서는 농경의 시작이 과연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가에 대해 저자는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보통 신석기인들의 농경 시작으로 인해 우리는 정착생활을 할수 있었고, 또 정착생활의 시작은 우리에게 문화를 형성하게끔 해주었으므, 농경의 시작이라는 것은 우리 인류사의 대단한 업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긍정적으로 말이다. 그러나 작가는 조금은 옆에서 농경이 가져다준 부작용을 보여주며, 일반인들의 가진 고정된 틀을 깨라고 말해주고 있다.저자의 의문의 시작은 농경이 좋기만 한것이라면 왜 1천년에 1미터 밖에 확산되지 않았을까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농경이 그 시대사람들에게는 별로 유용하지 않았기 때문일거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농경을 하지 않는 종족의 평균신장이 훨씬더 크고,농경은 우리로 하여금 다양한 음식의 섭취를 못하게 함으로써 영양의 불균형을 가지고왔고, 흉년때는 굶어야만했고, 인구밀두가 흔적들 에서는 인류가 어떻게 가축을 길렀는지에 대한 여러가정을 해보고있다. 출토되는 다량의 짐승뼈를 보고 당시 가축을 길렀다고 보고 어미를 죽이고 새끼를 기르거나, 한무리의 동물을 한곳에 몰아두고 때에 맞춰 먹이를 줌으로써 가축화시킨다는 상정을 하고 있다.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출토되는 다량의 짐승뼈를 보고 가축화가 아닌 , 하나의 신에 대한 의식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당시 동물들이 그들에게는 중요한 음식공급원이 었을것이므로 사냥이 계속잘되게 해달라는 의미에서 신께 다량의 동물을 받치고 빌었던게 아닐까?"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결혼풍속도" 에서는 신석기인들의 결혼에 대한 생각을 읽을수 있었다. 지금 우리들은 결혼은 인륜지대사라 하여 그 중요성이 크다고 볼수 있다. 그 시대사람들도 물론 결혼의 중요성은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석기인들이 생각하는 결혼과 우리의 결혼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 우리들도 물론 결혼이 단순히 한남자와 여자와의 만남이 아닌 집안과의 만남이라고도 보지만, 신석기인들에게는 한남자와 여자의 만남이라는 개념이 전혀아니다. 그들은 족외혼제였는데, 남자가 정해진상태에서가 아닌 우선 여자를 가축과 맞바꾼 뒤 데려온다음 생각하는경우도 있으니 말이다.결혼풍습에서 보이는 여자의 지위도 상당히 낮았다. 여자라는 존재는 단순히 출산과 노동력을 제공하는존재로서만이 인식되고 있으니 말이다. 즉, 당시 결혼이라는 것은 지역간 산물의 교환이나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한 목적으로 실시되었으니,만약 오늘날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사람이 있다면 사회에서 매장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최초의 직업병 환자는 누구일까" 에서는 전문잠수부들에게서나 발견되는 외이도골종이 두개골에서 발견되어, 그들이 아마도 최초의 직업병환자일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직업병환자라고 표현한 작가의 재치에 놀라웠다. 물론 그들은 직업병이라는 것은 오늘날 현대인들과는 의미가 달랐겠지만 말이다."예술품에 나타난 옛 사람들의 희망" 에서는 예술품이 지니고 있는 의미에 대한 .
목차서론본론(1)포스트모더니즘1. 등장배경2.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3.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4.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국사회의 적용에 대한논의(2)포스트모더니즘과 교육1. 포스트모더니즘의 교육방법2.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과 관련하여 교육적 상관성.3. 포스트모더니즘이 교육에 시사하는 바4. 포스트모더니즘의 학교경영에의 시사점5. 포스트모더니즘의 실생화에 활용6. 한국 교육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전개의 난점에 대한 주장결론서론급변함 없이 비교적 안정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서구 근대화이래 나타난 대중적 공교육체제는, 합리성, 체제성, 보편성, 객관성, 조직성, 효율성 등을 그 특징으로 하는 모더니즘을 근간으로 발전해 왔다. 그 시대에 교육은 통상적으로 세계와 인간에 대한 객관적 지식과 보편적인 가치체계를 가르침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이성적인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는 후기산업사회화 , 정보사회화, 소비사회화 영상사회화라고 규정 지워지는 사회문화의 급변화 다양화 사회속에서 과거식의 모더니즘적인 교육적 사유의 틀로는 교육현상을 이해하고 처방하는 데는 많은 문제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교육현장에서 교사들은 상대주의적 사고와 가치관으로 이미 무장된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던 문화에 물든 학생들이 교사의 지적 , 도덕적 권위를 예전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을뿐더러, 교사가 가르치고자 하는 지식과 신념의 보편적 의미나 가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교육적 문제의식은 결국 교사 또는 새로운 교육적 사고의 발상전황이 요구되어졌다. 즉 모더니즘적인 교육의 틀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교육이해의 지평으로 등장한 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교육의 시각인 것이다.교육은 시대의 산물이며 시대상을 반영하여 교육의 이념과 방향이 정립되고 목표가 설정되고 , 그에 따라 교육의 내용이 구성되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교육은 후현대주의적 청소년들에게 였다.③ 사회적 배경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조직이 복잡한 현대사회는 정보화 사회로서 , 정보통신망 없이는 사회자체가 존립 할 수 없게 되었다. 그속에서 인간과 사물이 기호화되고 기호적으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불가피 해졌다. 복잡하고 큰 규모의 사회를 정보통신망의 도움없이 효율적으로 관리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일이니 말이다 . 인간과 사물의 기호화와 기호적 의미화의 정당화 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등장했다.④문화적 배경20세기 후반 사회는 문자시대에서 영상시대로 전환되었는데, 이에 따라 이성중심에서 감성중심으로, 논리적 심사숙고에서 감각적 판단으로, 동질지향적 가치관에서 이질지향적 가치관으로, 자기절제에서 자기표현으로, 억제된 감성에서 해방된 감성으로 정적 문화의 축에서 동적 문화의 추구로, 소유욕구에서 소비욕구로 전환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가치관의 변화를 정당화할 근거로서 나타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⑤예술적 배경근대주의에 있어서 예술을 가장 예술답게 하는 것은 예술의 독창성이었다.이에 예술가들은 누구도 행하지 않았던 새로운 차원의 예술성을 추구하기 위해 실험적시도를 끊임없이 행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예술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추구되어진 실험적 시도로 인하여 예술의 각 장르는 더 이상 개척의 여지가 없어져 버렸다. 이에 실험적 시도를 그만두고 기존의 예술작품을 새롭게 다루는 예술적 기법을 시도하고자 하는 분위기 속에서 "파스티쉬" "패러디" 가 예술의 중요한 기법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창조라기 보다는 기존 예술작품의 재활용기법에 가까운 예술을 정당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⑥ 학문적 배경기존의 학문은 고전적 물리학과 같이 체계적이고 조직적이며 인과적이고 계량적이며 객관적인 기준을 충족시켜야 학문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어 고전물리학적 과학이라는 학문의 절대적 전형이 무너지고, 학문과 비학문의 경계도 무너짐으로써 학문적 다원주의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현대의 이러한 학문적 상 이상 진리인식의 근원이 될 수 없으며 , 주체적 자아의 해체야 말로 이성적 주체 , 도덕적 주체 , 과학적 주체라는 미명아래 억압받고 소외되던 인간본성의 해방이요 , 진정한 휴머니즘이라고 주장한다.② 탈정전화 (脫正典化)를 추구하는 다원주의 문화논리이다. 모더니즘 문화속에서는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 , 이론체계 규범체계는 목적적 가치 , 내재적 가치 견지아래 에서 정당화되었고 , 이 전형에 부합되도록 이루어진 생활양식은 고급문화로 간주되는 반면 , 그것에서 벗어난 가치관 태도 행동양식등은 천박하고 저급하다는 대중문화의 꼬리표가 붙게 되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속에서는 고급문화의 전형인 정전이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뿐더러 , 모든 사물 ,사건의 상품화 논리아래에서 평가되는 소비 사회 속에서 고전명작 , 도덕규범과 같이 그 자체로 가치 있다는 고급문화를 부정하고 ,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본질적 차이가 없음을 주장한다.포스트모더니즘아래에서는 보편성과 동일성을 거부하고 , 다양한 새로운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추구하고 또 그것이 인정받고 정당화되는 다원주의 문화논리이다. 이렇듯 포스트모더니즘아래에서는 저질문화 지방문화 반문화라는 이름아래 왜곡되고 배척되고 과소평가 되었던, 여성문화 지방문화 제 3세계 토착문화 청소년문화등이 성장할 수 있도록 자리매김을 해주었다는 점에서 문화적 정전에 대한 해체를 정당화하게 된다.③ 대중들이 유희적인 행복감을 향유하는 문화논리이다. 주체적 자아의 해체가 그들의 주장이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아래에서는 주체적 자아를 지각하고 지키고 실현하는데에서 오는 정신적 긴장감, 갈등 그리고 소외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문화적 정전을 거부하고 남과 다른 자신만의 생활양식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적 대중인 것이다. 이들에게는 자기주변에 일어나는 우연하고도 임의적인 사건에 대하여 순간 순간 감각적 유희적으로 느낄 따름이다. 이들 에게 있어서 역사성은 TV 나 영화속에서 묘사되는 것과 같은 역사다움의 즐김에 지나지 않는다. 켜주는 욕구를 부담없이 따르는 수동적 존재로 전락하고 말것이라고 지적한다.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속에서 사람들은 주체적 자아를 상실한채 "될데로 되라"라는 식의 자유방임과 무질서가 만연하는 풍조로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합리적인 근대화 사회조차 제대로 형성하고 있지 못한 현한국사회에서 근대주의를 넘어선 포스트모더니즘을 취하려고 하는 시도는 도무지 격에 맞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다.(2)포스트모더니즘과 교육1.포스트모더니즘의 교육방법① 열린교육방법학습자로 하여금 열린 지식을 습득하게 하여 열린 자아를 다원적으로 전개케 하는데는 열린교육방법이 적절하다. 열린 교육방법은 학습자의 학습선택의 자유를 가능한 많이 허용하고 , 교육적으로 풍부한 학습환경을 제공하며, 학습자의 적성과 흥미 능력에 맞는 개별화 학습을 추구하는 방법이다.② 해체적 글쓰기 교육방법기존의 해석적읽기 중심의 교육방법에서 해체적인쓰기 중심의 교육방법으로 바뀌어야한다. 해석적 읽기 중심의 교육에서는 교과서 내용의 저자나 교사의 의도대로 일관되고 명료하게 인지하도록 함으로써 권위에 복종하는 수동적이며 노예적인 인간상을 양성했다면, 해체적 쓰기는 해체적 읽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 해체적 읽기는 교과서에 담겨진 내용을 나름대로 회의해보고 , 의심해보고 부정해봄으로써 교과서의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지 않는다. 이런 교육은 학습자로 하여금 선택의 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창의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③ 대화적 협력 학습법포스트모더니즘은 차이를 인정해, 학생들을 생각 행동 가치관을 갖는 인간을 양성하고자 한다. 차이에 대한 이해와 인정의 지평을 넓히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대화이다. 대화는 차이를 없애고자 함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고 인정하기 위함이다. 성공적인 대화를 위해서는 대화의 덕의 습득이 중요한데, 대화의 덕이란 수용해 줄수 있는 아량 , 자신의 관심사를 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할 수 있는 능력 , 타인에게 발언의 기회를 부여할 수 있는 자제력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대화의여의 속성을 통해서 교육현장에서 많은 목소리와 주장들이 알려지거나 들려지며 , 사용되도록 허용함으로써 교육적 해방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다중의 다양한 목소리로 인해 한동안 시끄럽겠지만, 목소리의 다양성과 지역성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는 교육 현장에서 교사의 권위주의에 대한거부로 나타날 수 있으며 교육의 주체가 되는 교사 , 학부모 , 학생들의 목소리들이 귀담아 지고 활발하게 논의될 수 있는 장이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④포스트모더니즘의 전통적인 계급적 질서의 붕괴 그리고 새로운 계급의 출현과 관련하여 교육적 상관성.이제 까지 억압된 것의 복귀 , 주변적인 것의 희귀를 허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민주적이고 탈위계적인 성격이 지금까지 남성중심사회에서 억눌려 있었던 역성의 목소리를 회복시켜 줄 수 있을 것이라 볼 수 있다. 교육적인 측면에서 아직까지 교과내용에서 성사회화가 분명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 여성이 불평등하게 성 사회화되는 경향으로의 탈피를 짐작해 볼 수 있다.⑤ 포스트모더니즘의 자기반영성과 교육적 상관성모더니즘이 외부 현실의 반영에 주로 관심을 가졌다면 , 포스트모더니즘은 주로 자기 반영에 관심이 있다. 이는 기존의 지배적 교육과정이 안고 있었던 문제점들을 변혁시키려는 미시적 관심이라고 볼 수 있다.3. 포스트모더니즘이 교육에 시사하는 바① 교육은 학생들에게 특정의 가치나 순수 객관적인 진리를 가르치려 하지 말고 보다 개방적 , 허용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교육이 더이상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된다. 교육은 사회적 전통 속에서 형성된 지식과 신념체제를 가르치고 , 비판적 논의와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그를 재구성하고 창조해 나가는 사회적 협동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육을 통해 학생들은 그들이 배우는 지식과 신념체계가 절대적·고정적인 것이 아닌 우리 사회의 전통과 문화 속에서 형성된 역사적 산물임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고 , 그와 다른 관점과 견해에 대.
이 책은 겉으로 보기에는 예쁜 동화책 같아, 이 책을 읽고 내가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또 성경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은 대부분 애벌레 그림으로 이루어져있고 , 책을 읽는데는 30분 정도면 충분해 보였다 .그러나 이 책은 글자 하나하나. 장수 한장 한 장에서 내게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만약 내가 지금 초등학생이었다면 , 귀여운 그림에 또 내용에 기분 좋게 한 줄 한 줄을 읽어 나가겠지만은 지금 나는 대학생이고 , 내 삶의 주체가 바로 내가 된 지금에서 읽은 이 책은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지..진정한 삶의 가치가 뭔지를 깨닿게 해주는 책이었다.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이 책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줄무늬 애벌레이다. 우리 인간과는 아무런 상관조차 없을 것 같은 애벌레를 통해 작가는, 인간은 이렇듯 미약한 존재라는 것과 , 아무 것도 아닌것에 목숨을 걸고 경쟁하는 애벌레의 모습에서 현대인들의 헛된 발버둥을 일러주어, 우리 인간에게 진정한 가치를 일깨워주고 싶었나 보다.나는 "꽃들에게 희망을 " 을 내용에 대해서 말하고 , 거기에 대해 내가 느낀 점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이 책은 처음에 줄무늬 애벌레가 처음 세상에 나온 것부터 시작이 된다. 우리 인간이 그렇듯이 애벌레 또한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세상의 아름다움에 기뻐했고 , 자신이 현재 처해진 환경이 당연한 것으로 믿고 그저 먹고 쉬는데 만 열중했다. 우리가 아기일 때 먹고 , 놀고 쉬는 것이 다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 몸집이 커지면서 줄무늬 애벌레는 이 생활에 회의가 들었다. 먹고 자라는 일 이외의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 .현실에 대한 불만족 그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궁금증과 꿈에 대한 도전으로 나타나 애벌레는 이제까지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길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이때 애벌레에게는 용기는 있었지만 목적이 없었다. 어쩌면 길을 떠나 그 목적을 찾으려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 어쨌든 그렇게 시작된 그의 길은 처음부터 조금은 어긋나있었던 건 아닐까??길을 떠나 처음에 만난 애벌레는 예전의 자기 모습이었다. 그저 먹고 자라는 것에만 열중하는...줄무늬 애벌레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비웃는다. 하지만 자신의 훗날 아무 목적 없이 남을 밟는 일보다는 어쩌면 지금 먹고 자라는 데만 열중하는 그 애벌레들이 더 나은 삶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들은 분명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자라고는 있지만 적어도 헛된 욕망을 위해 남을 짓밟지는 않으니 말이다.그리고 좀더 간 곳에서 줄무늬 애벌레는 애벌레 기둥을 발견하게 된다. 애벌레로 이루어진 거대한 기둥에는 많은 애벌레들이 구름에 가려진 꼭대기를 향해 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애벌레는 옆에 있는 애벌레에게 묻는다 . 다들 왜 저렇게 올라가는지..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는지..그러나 그 애벌레는 그저 좋으니까 올라가겠지라는 말만을 남긴 채 서둘러 그 기둥에 합류한다. 구름에 가려져 뭔가가 있을것같은 꼭대기를 보며 줄무늬 애벌레는 흥분한다. " 할 일은 단 한가지뿐이로군 " 이라 생각하며 그 기둥에 뛰어든다. 줄무늬 애벌레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 그 기둥이 어떤 기둥인지도 모른 채 남들이 다 올라가고 있는 그 기둥에 매력을 느끼고 자신이 찾는 무언가가 거기에 있을 거라고 믿음으로 기둥을 올라간다.그 기둥은 치열했다. 그곳에서는 오직 내가 밟느냐와 내가 밟냐가 있을 뿐이었다. 그곳엔 친구도 없고 , 옆에 있는 애벌레는 오직 내가 꼭대기를 향해 올라가는데 있어서 도구일 뿐이었다.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지금껏 내가 걸어온 길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이었을까?? 남들이 공부하기에 공부했고 , 대학을 가야한다기에 대학을 왔다. 내가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에 대해서 한번이라도 깊이 생각한 적이 있었던가?? 남들이 좋다는 것이 나 또한 원하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서 살아왔던 지난 시간들...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모두는 어쩌면 세상이 만들어 놓은 편견 속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은 12년이라는 시간을 오직 대학이라는 한곳만을 향해 걸어왔다. 초등학교 , 중학교 고등학교...우리대부분은 그 길이 당연한 것으로 믿고 거기에 대한 의문조차 품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한 (?)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 학교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는가?? 사실 우리의 지난 12년은 거의 학교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학교는 겉으로는 우리에게 인성과 지식을 가르친다고 하지만 우리가 학교에서 인성 따위를 배운 적이 있던가??학교는 나에게 좋은 직업이라는 테두리를 만들어 주고 그것을 원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는 그 좋은 직업을 얻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인 양 믿게 만들고는 , 내가 그 기둥에 올라야만 한다고 가르쳤다 . 우리는 그곳에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애벌레 기둥의 꼭대기에 더 빨리 올라갈 수 있는지를 배웠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더 빨리 오르기 위해서 , 항상 친구와 경쟁해야 했고 , 마지막순간에는 내 자신을 위해 친구까지 밟고 올라서야 함을 가르쳤던 학교... 학교라는 거대한 테두리 안에 우리를 가둬놓고서는 인재를 양성하려는 것 같다. 내 안에 소중한 가치를 깨닿기 전에 경쟁이라는 것을 먼저 가르치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그렇게 열심히 애벌레 기둥을 올라가던 줄무늬 애벌레는 어느 정도 올라갔을 때 생각한다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나?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지?" 한참을 올라간 후에야 자신의 길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곧 " 나도 모르겠다. 그리고 생각해 볼 틈도 없고" 그렇다!! 우리는 앞으로 나가는데 바빠서 ,, 아무 생각 없이 꼭대기를 향해 올라갔고 , 그 길에 대한 의문이 들었을지라도 , 생각하기를 거부한다. 그 길이 틀렸다면 어떻게 할지를 몰라서 그런 것 같다. 만약 지금껏 걸어온 길이 잘못된 길이었다 하더라도 , 그 기둥을 다시 내려갈 용기가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그렇게 올라가다가 줄무늬 애벌레는 노랑 애벌레를 만나게 된다. 그제서야 줄무늬 애벌레는 이 기둥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노랑 애벌레를 밟고 올라갈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생각으로 줄무늬 애벌레는 노랑애벌레와 같이 땅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얼마간 그들은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그도 잠시...시간이 지날수록 올라가보지 못한 기둥꼭대기에 대한 미련과 헛된 욕망은 줄무늬 애벌레를 다시금 그 애벌레 기둥으로 불러들이게 된다.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동경과 열망이라고 할까??.. 그렇게 줄무늬 애벌레는 노랑애벌레를 버리고 다시금 기둥을 오르기 시작한다. 한번 내려왔던 길 인만큼 줄무늬 애벌레는 예전보다 훨씬 잔혹한 모습으로 바꿔져있었다.줄무늬 애벌레가 기둥을 올라가고 있는 동안 노랑 애벌레는 나비가 된다. 나비가 되기를 두려워하는 노랑 애벌레에게 늙은 애벌레는 "한 마리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절실히 날기를 원할 때 가능한 일이란다." 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비란 어떤 존재일까? 아마도 이것은 이 책의 제목과 연관 있는것같다. " 꽃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 로서 ,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완전하게 개발된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 나비는 아마도 애벌레가 꼭 되어야 하는 모습일 것이다. 애벌레라면 누구나 나비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는 있지만 ,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까지의 편안한 애벌레의 삶을 다 포기할 만큼의 용기와 죽을 만큼의 노력도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용기와 노력이 있다고 해서 다 나비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나비가 되는 과정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을 감수해야만 애벌레는 나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이 나에게 가장 생각을 많이 하게 한 부분이다 . 지금 나는 간호학과에 재학중이다. 만약 내가 이대로 학교를 계속 다닌다면 나는 분명 간호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진정으로 간호사가 되어서 이 학교에 왔던것일까?? 난 수능을 치기 전 까지 내가 간호사가 되리라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한적이 없다. 그저 수능을 치고 수능 점수에 맞춰서 직업이 보장된과를 온다는 것이 간호학과 였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이길이 애벌레 기둥이 아닐까??줄무늬 애벌레는 우여 곡절끝에 애벌레 기둥의 꼭대기에 올라간다. 그러나 줄무늬 애벌레는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랑까지 버리고 수많은 애벌레를 밟고 올라섰던 그 애벌레 기둥이라는 것은 애벌레들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기둥중에 하나 일뿐 그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좌절과 슬픔은 목적없이 행했던 결과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 세상에 견주어 볼 때 이 애벌레 기둥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세속적인 성공일것이다. 명예 와 부 말이다. 이러한 가치들은 멀리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매우 좋고 고귀해 보여 모두들 얻고 싶어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가치를 얻기 위해서 끊임없이 경쟁하지만 실상 그 꼭대기에 도달하여 보면 아무 것도 없다. 흔히들 성공한 삶으로 믿는 물질적인 부, 명예와 권력을 누리는 삶이 그 성공의 정점에서는 진짜 가치 있는 삶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그렇게 그 꼭대기가 얼마나 허무한지를 깨달은 줄무늬 애벌레는 땅으로 내려오게 된다. 내려오는 그제서야 줄무늬 애벌레는 그 동안 보지 못했던 다른 애벌레들의 모습을 보게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꼭대기의 현실을 가르쳐 주지만 다른 애벌레들은 믿지 않는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현실만 보려한다. 자신이 이제껏 걸어온 길을 다른 사람의 말로서 이해한다는 것은 ,,,또 포기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줄무늬 애벌레처럼 겪어 봐야만이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깨닿게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