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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왜 정열의나라 스페인인가...
    ◆ 왜 스페인을 정열의 나라라고 하는지 그 근거와 이유를 논리적으로 전개하시오.태양과 정열의 나라 Spain"Being European is being different" 란 말이 있다. 고만고만한 크기의 나라들이 바글바글 모여 살면서도 저마다의 고유한 개성과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는 유럽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는 말이라 하겠다. 이러한 유럽의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도 매우 튀는 나라중의 하나가 바로 스페인이다.스페인, 우리는 ‘정열’이라는 단어를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세계 문화사에 바람둥이 돈 후안과 이상주의자 돈키호테, 그리고 정열의 여인 카르멘이 태어나고 투우, 플라멩고, 수많은 축제 등 많은 흥미 있는 문화활동이 연중 끊임없이 이어지는 나라인 스페인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세계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나라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만큼이나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고 신비스럽기까지 한 문화 유산들과 자연환경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스페인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막연한 이국적인 느낌만을 갖는다. 2002년 월드컵 때 우승 후보 중 하나였던 스페인과 극적인 경기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면 현재 스페인이란 나라가 훨씬 멀게만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이런 스페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은 지리적으로 많이 떨어지고 역사와 문화 배경이 상이하게 다른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국민성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 나라를 알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문화를 알아야 하고 그 문화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그 나라의 국민성을 알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라 특유의 전통과 분위기, 역사 등이 국민의 생활에 스며들어 독특함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민족이나 문화면에서 에스파냐가 다른 국가들에 비하여 동양적, 아프리카적 색채를 강하게 띠는 것은 800년간에 걸친 이슬람지배의 영향 때문이다. 국민의 일상생활은 종교의 규제를 크게 받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가정교육이 엄격하다. 에스파냐는 옛날의 대제국에 대한 긍지가 대단하며, 문화의 모든 면에서 민족적 전통의 보존, 발전이 중요시되고 있다. 북서쪽의 대서양과 동남쪽의 지중해에 둘러싸여 있어 해양성기후, 지중해성 기후, 내륙 깊숙한 곳이나 고원지대에서는 사막기후현상 등 기후가 다양하다. 언어, 풍습, 문화 역시 지방적인 특색을 보인다. 주요 도시 및 취락 지역이 해안선을 따라 발달하였고, 내륙지방에는 수도인 마드리드와 몇 개의 주요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메마른 목초지나 황무지로 이루어져 있어 그 지역 인구가 희박하다. 눈부신 태양과 지치지 않는 정열의 나라 에스파냐의 정서를 대표하는 투우는 플라맹고와 함께 에스파냐인들의 인생철학이 깊게 베어있는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다. 투우의 격렬함을 기억하는 사람은 곧바로 플라멩코 무희의 검붉은 의상으로 이미지가 클로즈업된다. 정열과 아름다움이 빛나는 나라, 스페인은 화려한 건축물이 그 위용을 자랑하는 도시에서 소박한 아름다움이 전해지는 안달루시아 지방까지 아름답기로 유명한 유럽에서도 가장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는 특별히 아름다운 나라다. 많은 사람들을 열광케 하는 신성한 의식, 투우와 정열적인 플라멩코 춤은 그대로 스페인 문화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시대 때부터 있어 온 투우는 원래 귀족들의 오락이었으나 후에 서민들의 경기가 되었는데, 안달루시아 출신의 투우사들이 유명하다. 투우는 투우사인 마타도르(Matador) 한 명이 두 마리의 소와 대결하며, 1회 진행하는데 세 명의 마타도르가 등장하게 된다. 따라서 한 번에 전부 여섯 번의 투우가 진행되며 투우 한 번 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20분이다. 마지막 순간, 마타도르가 새빨간 무레타를 흔들며 소가 돌진하도록 하는데 몸이 소와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비켜 가느냐에 따라 기량의 우열을 점친다. 투우가 얼마나 위험하고 열정적인 의식인지 깨달을 수 있다. 멋진 투우을 보여 준 마타도르에게 관중들은 환호를 보내며 명예를 주도록 하는데 명예란 다름 아닌 넘어진 소의 귀를 잘라 마타도르에게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명예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랜 훈련 기간을 거쳐 마에스트로의 경지에 다다른 마타도르에게만 돌아가는 것이어서 상대적으로 고수입이 보장된다. 잔인한 격투기가 아닌 스페인의 한 문화로 그들의 의식인 투우를 이해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투우가 너무나 위험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스페인 사람들의 정열은 종종 투우와 함께 신들린 듯이 추는 몸놀림에 빠져드는 플라멩코에서 찾아진다. 스페인식 레스토랑인 타블라오에 가면 어떤 형태로든 플라멩코를 보게 되는데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들과 함께 느낌을 공유하기엔 너무나 훌륭한 예술이다. 원래 플라멩코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전통예술 중 하나로 노래, 기타, 플라멩코 춤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표현된 것이다. 이 세 가지가 독립적으로 잘 어우러져 예술을 창조해내 플라멩고와 멋진 마타도르가 연출해 내는 투우를 보는 것만으로도 스페인을 충분히 느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선혈이 낭자 하는 투우를 보며 열광하는 사람들, 화려한 의상과 춤 플라멩고, 우리가 스페인 하면 연상하는 것들이다. 강건하고 씩씩한 기상이 느껴지며 정확한 이성보다는 마음이 먼저 앞서는 나라 스페인이라는 나라 앞에 가장 많이 붙는 수식어는 아마도
    인문/어학| 2006.07.20| 2페이지| 1,000원| 조회(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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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르바쵸프
    고르바초프의 집권당시 개성, 시대적 상황소련 공산당 서기장(1985~1991), 대통령(1990~1991), 1990년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러시아 연방 남서부 스타브로폴 지구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46년 콤소몰(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입했으며, 이후 4년 동안 국영농장의 콤바인 기술자로 일했다. 콤소몰에서의 활동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1952년 모스크바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고 그 해 공산당원이 되었다. 1955년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콤소몰과 정규 당조직의 여러 직책을 거치면서 지역 당위원회의 제1서기에 올랐다. 그는 1971년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지명되었으며 농업담당서기(1978)와 정치국원(1980)을 역임했다. 그가 꾸준한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이데올로기 담당 서기였던 미하일 수슬로프의 후견이 큰 역할을 했다. 유리 안드로포프의 통치기간 동안 눈부신 활동을 보였던 고르바초프는 1984년 2월 취임 15개월 만에 안드로포프가 사망하고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권력을 승계했을 때 이미 차세대의 지도자로서 부각되고 있었다. 1985년 3월 10일 체르넨코마저 급사하자 정치국은 최연소 위원인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했다.고르바초프는 노쇠하고 무능력한 당간부들을 패기에 찬 신진관료들로 교체하는 등 집권 초기부터 자신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주력했다. 첫번째 국내목표는 브레즈네프 시대이래 정체되어온 소련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위하여 기술현대화를 표방했으며 노동생산성 증대와 부패한 관료기구의 혁신에 힘을 기울였다. 피상적인 변화들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87~88년 경제 및 정치체제에 관한 보다 근본적인 개혁이 착수되었다.'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은 소련사회 전반에 해빙 무드를 조성했다.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가 크게 확장되었고, 언론은 보도와 현실비판에 있어서 전에 없는 자유를 구가했으며, 정부당국은 스탈린주의 독재체제와의 영원한 결별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은 소련 최초의 민주화 시도였다. 복수후보자의 경합하에 부분적으로 비밀투표가 행해졌고, 시장경제의 요소들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국가의 보조금과 모스크바의 지령에 의존해왔던 산업체들이 스스로 생산 자금 이윤을 관리하게 된 것은 실로 획기적인 일이었으며, 소규모의 가내생산과 개인영업도 용인되었다. 그러나 국가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잃지 않으려는 관료들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다.외교부문에서 고르바초프는 동 서 유럽 선진국들과의 우호증진을 통하여 통상무역관계를 발전시켰다. 1987년 12월에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대통령과 회동하여 '중거리핵전력전폐조약'(INF Treaty)에 서명했으며 이듬해에는 9년 동안 점령하고 있던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을 철수시켰다. 1988년 10월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의 의장에 선출된 그는 경제개혁에 대한 공산당 내 반발 등으로 해서 입법 및 행정기구를 당으로부터 독립시킬 구상을 갖게 되었다. 1988년 12월 마침내 헌법개정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양원제 의회인 인민대표대회가 창설되었다. 1989년 3월 복수후보 직접선거의 원칙에 따라 인민대표회의 선거가 실시되어 5월에는 제1차 인민대표회의에서 진정한 대의기구인 최고 소비에트를 구성했다. 고르바초프는 최고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었다.고르바초프는 1989년 말부터 1990년 사이에 냉전에 종지부를 찍고 유럽의 정치구도를 변화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는 동유럽의 개혁주의자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이들 정권의 잇단 붕괴를 묵묵히 받아들였다. 동독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에 민주정부가 들어섬에 따라 소련군의 단계적인 철수가 이루어졌다. 1990년 여름에는 동 서독의 통일을 수락했으며 통일 독일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잔류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 해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국제정치상의 지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민주화와 지방분권화로 자유의 기운이 무르익어감에 따라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우즈베크 등 연방 내 공화국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리투아니아 등지의 반소 소요사태는 명백히 분리독립운동의 성격이 짙었다. 중앙아시아의 인종분규를 유혈진압한 고르바초프는 1990년 3월 리투아니아 공화국이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포하자 경제봉쇄를 통하여 이탈을 잠정 유보시키는 동시에 연방탈퇴의 법적 요건을 마련하기 위한 헌법개정작업에 착수했다. 민주화조치는 소련 공산당의 권위를 실추시켰고 그는 이 여세를 몰아 국가권력을 행정기구로 대폭 이관시켰다. 1990년 3월 인민대표회의에서 소련 대통령으로 추대된 고르바초프는 광범위한 행정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인민대표회의는 헌법에 보장된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폐지함으로써 복수정당제의 법제화를 준비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전체주의 정치를 불식하고 소련에 대의제 민주주의를 이식하는 데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계획경제의 요소를 일소하여 사기업과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는 데는 비교적 소극적이었다. 그는 자유경제와 통제경제라는 전혀 상반된 두 체제 사이에서 절충을 모색했고, 그 결과 소련경제는 별다른 대안도 마련하지 못한 채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행정부가 취한 모순되고 자멸적인 개혁조치들은 경제혼란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허물어져가는 공산당 지도자로서 새로운 법령과 개각을 통하여 사태의 수습에 안간힘을 썼지만 행정부는 이미 권위와 효율성에 있어서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대통령은 경제파탄, 민중의 욕구불만, 소수민족국가의 세력확장 등으로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보안기구와 당내 보수세력에 가까워졌다.1991년 8월 19일 오랫동안 예견되어왔던 쿠데타가 일어났다. 크림 반도의 여름별장에 머물고 있던 고르바초프는 부통령인 야나예프, 국방장관 야조프, KGB 의장 크류츠코프 등으로부터 사임 압력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 가족들과 함께 연금상태에 놓였다. 그러나 KGB의 사전검거를 면한 보리스 옐친 러시아 연방공화국 대통령과 소프차크 레닌그라드(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됨) 시장 등 개혁파 인사들은 러시아 공화국 의사당에 집결,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쿠데타 세력을 궁지로 몰아넣었고 80만의 시민이 소련 전역에서 반쿠데타 시위를 벌였다. 21일 새벽 의사당에 대한 공격이 5명의 사망자를 낸 채 실패한 뒤 강경보수파의 쿠데타는 3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로 돌아온 즉시 대통령직에 복귀하여 옐친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했다. 8월 24일 겸직하고 있던 공산당 서기장직에서 사퇴했으며 8월 29일 최고 소비에트는 지도부의 쿠데타 관여를 이유로 공산당의 활동을 정지시켰다. 1,500만 명의 당원과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최고집권자가 당수로 있었던 소련 공산당이 마침내 불법화되고 만 것이다. 쿠데타의 실패로 보수세력이 일소됨에 따라 보수파와 개혁파간의 세력균형을 바탕으로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했던 고르바초프의 입지가 대폭 축소되고 반쿠데타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한 옐친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미국은 군비축소나 경화부채(硬貨負債) 문제의 성격상 공화국보다는 연방 대통령과 관계를 가졌으면 했지만 독일의 경우 이미 개별 공화국 특히 러시아로 협상창구를 바꾸어놓고 있었다.
    인문/어학| 2003.03.26| 3페이지| 1,000원| 조회(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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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니체 평가A좋아요
    내가 수많은 철학자 가운데서 니체를 선택한 이유는 「신은 죽었다」라는 그의 유명한 말 한마디 때문이다. 나는 그 말을 예전에 어록을 통해서 읽어본 적도 있고 누군가가 거창하게 써놓은 듯한 화장실의 낙서에서도 본적이 있다.뭔지 모르게 큰 뜻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보통 사람으로는 이해가 어려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철학자들의 어록에 비해 간단 명료하다. 나는 그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신은 죽었다...니체, 니체는 죽었다...신!!」그런데 나는 더 알아보면서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기 이전에 헤겔이 1802년 '철학비평'지에 기고한 논문 '신앙과 지식'의 종결부에서 「신 자체는 죽었다」말을 썼다는 사실을 여러 자료를 조사하면서 알게 되었다. 하지만 비슷한 내용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두 철학자가 담은 의미는 매우 다른 것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헤겔의 경우 '신'은 죽었지만 '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서양철학 전체는 앞으로도 계속 발전될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니체의 경우에는 '신'에 대한 신앙이 약해지면서 서양 세계가 가지는 가치들마저도 함께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둘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그리고 여기서 나는 니체의 이 말이 인간애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간 중심적이란 말이다. 르네상스 이전의 유럽 중세 봉건 사회는 모든 것이 신 중심이었다. '암흑기'라고까지 불리던 그 중세가 변혁의 물결에 올라서게 된 계기가 바로 르네상스였다. 그런 르네상스가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의 인감중심으로 변화한 온건한 혁명이었다면, 니체의 말 「신은 죽었다」는 철학적 측면에서의 격렬한 혁명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철학 입문 보고서 주제를 무엇으로 정할까 하는 고민으로부터 시작한 관심이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체 이만큼이나 생각을 계속해 낼 수 있었다는 것이 의아했고, 또 새로운 발견을 했다는 것이 뿌듯했다. 또한 이렇게 까지 생각이 진행되고 나니 정말 맞는지 궁금해지기도 했다.)그렇다면 이런 격렬한 혁명을 일으킨 그 그의 통증이 많은 구토의 발작을 동반함으로써 책읽기와 글쓰기를 중단하라는 권고를 받는다. 그리하여 1879년 그의 나이 35세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자 그는 10년 간 강의해 왔던 바젤 대학 교수직을 사임했고, 이 해부터 니체는 다시는 활동적이고 제도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된다. 그 이후 그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키기 전까지의 약 10년 간을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그리고 니스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지속적으로 병든 시간을 보내고, 아픔과 고통이 그에게 허락하는 휴식이 순간들은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이 시기의 초기에 쇼펜하우어의 영향과 바그너로부터 벗어나면서, 그는 단편적인 형태로 자신의 성찰을 종이에 옮긴다. 이것들이 1878년과 1882년 사이에, 그의 대작인 으로 귀결된다.이 3부작은 (제1부는 1878년에, 제2부 '여행자와 그의 그림자'는 1879년에 나옴),, 그리고 이다. 엄청난 철학적 중요성을 지닌 이 책들에서, 니체는 후에 사람들이 '형 이상적의 파괴'라고 규정짓게 되는 사상의 모험을 시작한다. 은 이와 같은 파괴에 답하는 것이다. 이 저서는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 , '운명적 사랑' , '초인' 그리고 '권력에의 의지'라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데, 형이상학적 사상에 대한 일련의 재평가를 잠언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 재평가는 3부작에서 구상되어 나타난 근대 문화에 대한 진단을, 이 진단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권고로 변모시키고 있다. 이 텍스트의 1권을 집필하던 바로 그 당시에 (우리는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러시아 여인인 루 안그레아스 살로메에게 청혼한다.이 여인은 후에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연인이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크문트 프로이드의 친구가 된다. 이 청혼은 거부되는데, 이 거부가 니체의 철학적 삶이 나아가는 점점 더 '고독하고 비현실적인' 방향을 확고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이런 측면이 설명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어떤 의미에서, 매우 풍요롭고 복잡한는 니체의 인생에서 두 번째 위기를 나타두 번째 논문 '역사의 이해에 관해서'에서는 헤겔과 에두아르 폰 하르트만으로 대변되는 지배적인 역사주의를 삶을 속박하는 '역사라는 질병'이라고 비난한다. 같은 해 출판된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에서는 쇼펜하우어를 세상과 인간 자체의 비참함과 허무를 알면서도 태연하고 자족한 철학자의 전형으로서 찬양한다. 네 번째 은 '바이로이트의 르하르트 바그너'(1876)인데 표면상으로 바그너와 그의 작품인 '니벨룽겐의 반지'에 대하여 굉장한 찬사를 보내지만 이면에는 니체 자신이 바그너의 단순한 숭배자의 자리에서 탈피하였으며, 바그너와 그의 작품에 대하여 냉정한 비판가로 자리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1874년의 바그너와의 결연은 필연적이라 할 것이다.여명의 시기 이 시기에 일어나 중요한 사건들은 악화된 병으로 1879년 교수직을 사임한 것과 요양을 위한 고독하고 불안정한 방랑생활이다. 그러나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니체는 어떠한 기존의 권위에도 구애받지 않고 독자적인 사상의 기초를 확립한다. 이 시기는 실증주의적이고 비판적인 경향을 띤다. (1878), (1881), (1882)이 이시기의 대표적인 저서들이다. 은 '자유로운 정신을 위한 책'이란 부제를 지닌다. 자서전적인 이 책은 전승된 사고와 가치들 가령 낭만주의의 이상,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비현실성, 그리스도 교의 도덕, 쇼펜하우어의 허무주의, 바그너에 대한 미학적 해석 등을 거부하는 니체 자신의 새롭고 자유로운 사색의 가능성을 대변한다. 니체는 여기에서 회의적인 합리주의의 경향을 견지하는데, 한편 병과 잦은 여행으로 말미암아 잠언이라는 효율적인 저술방식을 발견한다. 이 시기 니체의 사유방식은 기존의 형이상학과 그리스도 교에 대하여 심리학적이며 해석주의 적 접근을 도모한다. 이원론를 포함한 모든 형이상학적 가정은 꿈 등과 같은 심리적인 원인에 의거한 "정열과 오류와 자기 기만"이라고 폭로한다. 또한 니체는 절대적 진리를 가장하는 목적론의 경우는, 생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성을 상실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는가에 관심을 둔다. 삶이란 비합리적이고 충동과 본능의 지배를 받으며 의지에 관심아래 놓인다고 했다. 부단한 생장과 소멸의 과정 속에서 존재한다고 했다. 생이라는 개념과 같은 의미로 힘에의 의지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세계를 설명하는 형이상학적인 모든 것들의 원천이며 존재의 생성과 소멸에 관여하는 것이라고 했다."세계의 본질은 의지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힘에의 의지이다."라고 그는 언급한다. 앞에서 창조자로서의 초인을 언급한 바 있다. 초인은 항상 자신을 극복하려 하고 세상을 극복하려고 한다. 니체가 언급했던 바가 바로 여기서 증명된다. 힘에의 의지를 함축적이고 정확하게 표현한 문구를 제시한다."나는 항상 자기 자신을 초극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바의 것이다."보다 강한 것, 보다 고결한 것, 보다 초월적인 것을 추구함이 여기서 나타난다. 생의 실체는 쉬지 아니함. 즉, 운동이다 생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더 높이 쌓아져 올라가는 탑과 같다. 보다 강한 것을 추구하여 성장, 강화하려는 힘에의 의지(권력에의 의지)를 언급하다.(3). 영원회귀(불사조)인간은 수 백 만년동안 지구상에 존재하면서 언제나 변함이 없는 자연의 법칙을 발견한다. 바로 순환이라는 것. 밤과 낮의 순환. 계절의 순환. 그리고 일정한 주기를 두고 변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인간은 순환이라는 커다란 규칙을 적용한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자 축소판이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것이다. 인간도 자연의 법칙에 위배될 수 없다.신에 의한 회귀가 아닌 자연 법칙으로서의 회귀가 된다. 목적이 없는 굳이 목적이라면 다시 돌아오기 위해 사라진다는 것이다. 신에 의한 순환이라면 우리는 이미 어떠한 목적에 이미 도달했어야 한다는 것이 니체의 견해이다. 이미 어떠한 목적에 도달한 우리는 더 이상 순환하지 않는 즉, 영생을 누리는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보듯이 인간에게 아니 인간이 아닌 모든 생명체에게 영생이란 있을 수 없다. 시공을 초월한 절대자는 없다는 것영혼으로서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3). 실존주의와 허무주의(니힐리즘)(1). 실존주의19세기의 합리주의적 관념론 또는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과 도전으로부터 시작된 사상으로, 주체적 존재로서의 실존의 본질과 구조를 밝히려는 철학적 입장이다. 최초의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인간은 합리적 체계 속에서는 해소될 수 없는 구체적 개별적 단독자로서의 존재이다. 실존이란 그러한 현실 존재 또는 참된 진실 존재로서의 참된 본래적 자기를 가리킨다. 이 참된 본래적 자기를 어떠한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각기 입장이 달라지는 것이지만, 대체로 신을 인정하는 유신론적 입장과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적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에는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 마르셀, 베르자예프 등이 있고, 후자에는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 카뮈 등이 있다.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대지에 충실을 기하고 현실적 생에 대한 긍정적 사랑을 역설하는 무신론적 실존을 주장하며, 그 목표는 운명애와 '권력에의 의지'를 원리로 삼는 초인의 이념이다. 야스퍼스는 실존을 밝혀 주는 독특한 방법을 실존 해명에서 찾는다. 실존 해명은 오직 사람으로 하여금 자아 존재에 눈뜨게 하고 자기 자신이 되게 한다. 특히 죽음. 고뇌. 투쟁. 책임 같은 한계 상황에서 실존은 가장 잘 해명된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이 속으로 뛰어 들어감으로써 오히려 우리 자신이 깊이 해명된다. 이 '한계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 필연적으로 놓여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로서의 인간을 세계 내 존재로 본다. 인간이 세계 내 존재인 한, 인간은 사물과 인간에 대한 염려. 관심과 불안을 갖고 살기 마련이다. 즉, 현존재의 존재 방식은 염려이며, 이 염려는 현존재의 유한성과 시간성을 드러내 준다. 죽음 앞에 나서게 되면 우리는 현존재가 시간이라는 사실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의 이해는 시간성의 시계에 서 있다고 할
    인문/어학| 2002.12.02| 16페이지| 2,000원| 조회(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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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선거 방송의 역사 평가A+최고예요
    목 차1. 한국 선거 방송의 역사1)선거 방송의 문제점2)불공정 편파보도3)선정적 보도, 단편적 보도4)중앙 중심적 보도2.방송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1)선거에서의 방송의 영향력2)방송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3)선거 보도 방송의 개선에 관한 논의3. 각국의 선거법과 언론법제1) 우리나라 선거법2) 미국의 선거법3) 미국의 언론법제4) 한국의 언론법제5) 미국과 한국과의 차이점4. 각국의 선거방송과 여론조사1)영국선거방송의 역사2)영국의 선거방송과 여론조사1선거방송2여론조사3)일본의 선거와 선거예측보도의 논란5. 사례분석1) 우리나라 선거사범과 정치권에 대한 보도형태 및 판례1 16대 총선 선거사범의 현황과 실태2 최근 우리나라 선거보도의 문제점2) 한나라당과 MBC의 정치공방1 사건의 발단2 사건의 전개3 사건의 발전6. 정치커뮤니케이션과 언론법제와의 바람직한 방향한국 선거 방송의 역사(사례와 보도성격을 중심으로..)현대 시민사회에서는 선거뿐만 아니라 정치과정의 대부분이 언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유권자들이 정치현안을 직접 파헤치고, 정치인들과 개별적으로 접촉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언론이 유권자들과 정치인들 사이를 오가며 의사소통을 매개한다. 유권자들은 언론이 제공하는 뉴스보도, TV 토론, 여론조사, 사설-칼럼 등을 통해 정치관련 정보를 입수하고, 정치적 현안이나 정치인들에 대한 판단을 한다. 대부분의 언론이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이면서도 정부의 규제나 간섭을 받지 않으며 언론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는 주된 이유도 언론의 정치적 기능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정치 권력의 압력이나 보복으로부터 자유로운 언론보도가 전제되어야 시민들이 정부를 선택하는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론의 자유라는 특권을 누리는 언론에게는 유권자의 뜻을 정치인들에게 전달하고, 정치인들의 활동 상을 유권자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역할이자 책임이다. 그러나 한국 언론은 민주사회의 혈관으로서 언론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과거 군선 '경선과열', '경선혼탁' 등으로 선거판을 부정적으로 몰아부쳐 모든 책임을 후보들에게 떠넘겼다"고 지적했다. 1998년 지방선거에 대한 텔레비전 방송보도 역시 선거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도하여 유권자들의 선거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주의, 그리고 투표 거부를 부추겼다는 비난을 받았다. 방송3사의 보도 내용 중 불법 부정선거, 후보간 갈등, 흑색선전이나 인신공격, 선거 무관심 등 선거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기사가 전체의 3분의 1이었다. 그나마 광역단체장선거에 대한 보도는 부정적인 내용이 19.7%에 불과하였으나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 선거에 대한 보도에서는 부정적인 내용이 무려 58.3%에 달했다.물론 선거자체가 혼탁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불법과 부정이 판치는 선거현장을 지적하는 것은 당연히 언론이 해야할 일이다. 문제는 언론이 타락-혼탁 선거 현상을 보도하긴 하지만, 그 현황과 원인과 주범을 분명히 밝히지 않고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렇다는 식으로 뭉뚱그려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혼탁한 선거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언론이 선거가 민주적 원칙과 법에 따라 행해지고 있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모든 후보가 부정행위를 하는 상황에서 특정후보의 비리를 들춰내느니 차라리 모두 덮어버리자는 식으로 보도하는 것이다. 그 결과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선거부정행위가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법에 따라 깨끗하고 민주적으로 선거운동을 하는 후보자들이 결코 당선될 수 없는 것이 한국 선거운동의 현실인 것이다. 자연 유권자들이 선거를 혐오하게 되고 투표를 거부하게 된다. 선거판이 혼탁하다고 비난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누가 혼탁하게 만드는지 정확히 지적해, 유권자들이 그들을 퇴출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는 가장 중요한 정치행위로서 그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미래를 결정하는 일이다. 따라서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지만 한국 언론은 선거의책이나 공약을 다룬 보도는 크게 줄어들어, 전체의 0.5%에 불과했다. 선거기사의 86.0%가 정보가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스트레이트 뉴스와 스케치기사로 분류되었다. 이에 반해 비교적 심층적인 정보를 담을 수 있는 해설, 기획기사는 14.0%에 지나지 않아 텔레비전 뉴스는 매우 피상적인 선거정보만을 전달해 주었다. 이는 흥미위주의 선거보도관행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방을 외면하고 중앙에 치우칠 수밖에 없는 언론의 구조적 한계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다.4) 중앙중심적 보도대통령 선거를 제외하고는 모두 지역별 대표자를 뽑는 선거이다. 국회의원 선거와 자치단체 선거는 해당 지역사회의 현안을 해결하거나 지역주민의 의사를 대변할 사람을 선출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유권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지역내의 정치적 현안이나 자신이 뽑을 후보자들에 대한 정보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선거보도의 대부분은 지역적 차별성과 개별성을 무시한 채, 전국적 문제나 중앙정치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표 3. 제16대 국회의원선거기간 중 선거보도 내용의 대상지역 (출처: 황근, "방송의 선거 이슈보도의 특성과 문제점: 제16대 국회의원선거보도를 중심으로")대 상 내 용방 송 사전 체KBSMBCSBSiTV전 국 적 (중앙정치)57 (70.4%)76 (83.5%)55 (85.9%)51 (54.8%)239 (72.6%)서울 및 수도권1 (1.2%)1 (1.1%)1 (1.6%)2 (2.2%)5 (1.5%)지역권역별(경기·중부권, 충청권, 영남권, 호남권)1 (1.2%)0 ( .0%)2 (3.1%)2 (2.2%)5 (1.5%)특수지역 (시·군단위)0 ( .0%)1 (1.1%)1 (1.6%)2 (2.2%)4 (1.2%)개별 지역구 단위21 (25.9%)13 (14.3%)5 (7.8%)36 (38.7%)75 (22.8%)기 타(애매한 경우)1 (1.2%)0 ( .0%)0 ( .0%)0 ( .0%)1 ( .3%)전 체81 (24.6%)91 (27.7%)64 (19.5%)93 (28.3%)329 (100.0%)전락해 그들만의 잔치로 끝나는 것을 막고, 명실공히 후보자와 유권자들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중지를 모아 문제점을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 각 네트워크 방송사와 지방사 그리고 종합유선방송 모두 각자의 지역에서 공정하고 효율적인 TV토론을 실시하도록 정책적으로 유도할 필요가 있다. TV토론이 방송사의 입장에서는 방송의 공공성과 공익성을 발휘하는 기회가 되고, 방송위원회의 입장에서는 방송사의 공공성과 공익성을 검증하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2.방송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1) 선거에서의 방송의 영향력정치 사회 환경의 변화 속에서 오늘날 선거가 가지는 특징 중의 하나는 바로 방송, 특히 텔레비젼이 본격적인 선거 매체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듯 텔레비젼이 선거와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 이후의 정치형태를 일컬어 학자들은 흔히 새로운 정치 (new politics) 라고표현하는데 이는 텔레비젼을 비롯한 방송의 이용이 선거와 정치과정에서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만큼 큰 영향력이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방송은 불 특정한 대중을 상대로 정치 메시지를 대량 전파한다. 따라서 선거와 같은 민주주의적 제도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최근 텔레비전이 선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정당을 능가하는 경향이 있다. 방송의 효율적 이용 여하에 따라 선거의 승패가 좌우되기도 한다. 최근의 조사 결과에서는 사람들이 그들의 뉴스원으로 텔레비전에 과다하게 의존한다는 것이 제시되었다. 사람들은 방송 매체와 인쇄 매체에 서로 다른 정도로 주의를 기울이는데 텔레비젼 시청 또는 라디오 청취는 가장 수동적인 집중의 형태이다. 방송은 그 접촉이 용의하고, 정치의식이 높고 낮은 것에 별다른 영향을 받음이 없이 강한 침투력과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선거라는 정치적 사건에 많이 이용된다.방송을 선거에 이용하는 것이 용이한 또다른 이유는 선거 계획과 프로그램 편성은 다 같이 타임 스케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므로 방송국의 프로그램 편성에 편리하다는 점과 그 결과가 바로 득표수라고 하는 구체적 수량람직한 평가적 보도일지라도 언론 종사자들의 객관적 자세, 뉴스 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에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실존적 자세와 이의 유지가 선행되어야 한다.3. 각국의 선거법과 언론법제1) 우리나라 선거법예전의 선거법과 달리 언론의 자율기능 확대 보장 및 규제조항이 없는 것이 특징,총칙 규정에 언론기관의 공정보도의무를 선언명시 (제8조)- 예외 제96조 특정후보를 당선시킬 목적의 허위보도나 논평제외개정선거법은 후보자, 배우자 직계손. 비속이나 형제자매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나 비방금지(제250조,251조)선거결과 예측보도에 관한 법규-투표마감시각까지는 결과를 공표하거나 인용해보도할 수 없다고 규정(108조)투표마감시각까지의 결과의 인용 및 공표금지(제108조)선거기간중의 특정후보지지 금지2) 미국의 선거법미국 방송프로그램의 규제1.후보접근원칙(Candidate Access Rule)방송사는 공직선거의 후보자를 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방송시간을 매입하는 행위를완전히 저지할 수 없다. 연방통신법 제312조 (a)(7), 제315조 기회균등조항의 원칙2.동등기회원칙(Equal Opportunity Rule)연방통신법 제315조- 동등기회 또는 동등시간원칙을 명시하여 동등시간, 동등시설 그리고 비교될 수 있는 같은 비용을 의미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도 후보자의 일방에유리하게 작용되는 점을 방지하고 있다.예외) 선의로 뉴스방송/ 인터뷰 쇼/ 뉴스취재에 출연하는 경우,3.법적인 유자격자(Legally Qualified Candidates)제315조와 관련된 미국연방통신위원회의 정의면, 군 , 주 혹은 국립기관 등의 공직에 후보로 출마하겠다고 공표한 자공직에 출마한 자로서 법률상 결격사유가 없는 자유권자로서의 자격이 갗추어져 있거나 기명의 방법으로도 투표할 권리가 주어진자널리 알려진 정당에 의해 공천을 받거나 그와 같이 간주되고 실직적으로 선의의후보라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입증되는 자4.공공방송편성방송뉴스 프로그램의 심의시에는 상당한 신중과 함께 왜곡의 소지나 토론에 대한사안에 대해았다.
    사회과학| 2002.10.31| 25페이지| 1,000원| 조회(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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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언론사] 한국 신문사 정리 평가A좋아요
    신문 매체의 등장을 중심으로 한국언론사를 요약 정리하시오.→ 1. 한성순보■창간 배경1882년 일본에 수신사로 갔던 박영효가 일본의 개화사상가이자 를 창간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을 받고 돌아와서 유길준과 함께 신문의 창간을 추진했다. 박영효는 이때, 유키치의 제자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비롯하여 신문발행에 필요한 인쇄공 및 제작기술자들을 데리고 들어와 신문 창간을 준비했다. 유길준은 1881년 신사유람단 파견시 유키치가 설립한 '경응의숙'에 입학하여 유키치가 를 창간하는 과정을 배워 1882년 말에 귀국하였다. 이렇게 하여 1883년 1월 박영효는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고, 유길준은 외아문의 주사로 발령이 나서 의 창간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1883년 4월 박영효가 수구파들의 미움을 받아 광주유수로 좌천당하자 이노우에를 제외한 모든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돌아가 신문의 창간이 몇 개월 지체되었다.한성순보의 창간는 1883년 10월 31일에 창간되어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으로 발행이 중단되기까지 총 41호가 발간된 순간(旬刊) 신문이다. 이 신문은 순한문, 책자형(16.4×22.3cm) 체제(24면)로 만들어졌다. 이 신문은 정부기관인 박문국(통리아문의 동문학 부속기관)에서 발간되는 '관보'였기 때문에 기자가 없이 박문국의 관리가 기사를 썼으며,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관청에서 의무적으로 구독한 신문이었다. 처음에는 국한문 혼용으로 하려다가 수구파의 반대로 인해 순한문으로 발간되었다는 주장도 있다.한성순보의 보도내용과 세계관는 기존의 관보와는 달리 시사보도와 서양문화의 소개에 치중했고, 따라서 국내의 정치문제에 대한 비판은 희박할 수밖에 없었다. 의 외국 보도내용은 중국(453회), 월남(165회), 프랑스(71회), 영국(56회), 일본(53회), 미국(47회) 등의 순으로 되어 있으며, 중국에 관한 보도가 많았던 이유는 조선과 중국과의 밀접한 관계(사대주의)와 주 뉴스원이 대부분 중국에서 발행된 신문이었던 점, 박문국의 실 하나 조선의 전체적 경향이 개화에 동조하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개화파로서는 개화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일종의 기관지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가 바고 그 기능을 맡게 된 것이다. 그러나 를 완전히 개화파가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자체가 여러 정치세력들의 '투쟁의 장(場)'이었으나, 신문을 발간하는 것 자체가 개화의 물결이라고 볼 때, 아무래도 개화파를 대변하지 않았겠느냐는 주장도 있다.의 창간과 관련하여 학계에는 이른바 '이식설(移植說) 논쟁'이 있었다. 임근수는 "우리나라 근대 신문은 단순하게 그 전반적 근대화과정에서 외세에 의해 타율적으로 이식되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차배근은 "우리가 서양의 근대 언론문물을 수용, 를 창간하게 된 것은 단순히 일본인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권고에 의한 타율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개화의 한 수단으로서 신문도 발간할 마음의 자세가 이미 마련되어 있던 중에 마침 후쿠자와 유키치의 권고도 있게 되자 이를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라고 하여 임근수의 주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그러나, '타율적으로 이식되었다'라는 주장에 분명히 문제가 있기는 하더라도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식설'을 부인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신문 발간에 있어서 마음의 자세나, 기술과 시설의 도입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사람들의 의식수준 등의 조건과 환경이라고 볼 때, 정부의 정책에 의해서 신문이 '위에서 아래로'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의 창간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고 모델링이 되었던 일본 의 창간자 후쿠자와 유키치가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흥아론", "탈아론" 등을 주장하여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이론적으로 정당화시켰던 점을 주목할 수 있다. 박영효와 유길준이 유키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나 이러한 그의 사상까지도 영향을 받았는지의 여부가 임근수의 '이식설'에 설득력을 더할 수도 있다고 본다.2. 한성주보창간 배경갑신정변 실패 후 청을 등에 업고 민씨 일파가 집권하자,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온건로써 이른바 '정론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본다.그러나, 창간 당시 국한문 혼용을 택하여 대중적인 언론으로 시작한 는 위정척사파의 압력으로 인해 1887년 12월 23일 순한문으로 체제를 변화하여 더 이상 정론지로서의 성격을 가지지 못하고 그 발전에 쐬기를 박았다.의 또 다른 의의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광고가 게재되었다는 점이다. 1886년 2월 22일자(제4호) 15∼16페이지에 걸쳐 한국 최초의 근대광고가 게재되었는데, 광고주는 "세창양행(世昌洋行)"이었다. 이는 이 무렵 한국에서 무역을 하던 독일회사로서 본명은 "Edward Meyer & Co."였다. '덕상세창양행고백(德商世昌洋行告白)'라는 24줄 짜리 광고를 게재했는데, '고백'이라는 용어로 보아 아직 '광고(廣告)'란 말이 널리 쓰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에는 이 밖에도 일본인의 광고도 있었으며, 광고가 정기적으로 게재된 것은 1896년 서재필(徐載弼)이 을 창간한 뒤부터였다.3. 독립신문독립신문의 역사적 의의우리나라 근대적 민간신문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는 이 현대 한국언론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지대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이 신문이 창간된 이후 한국 신문의 전형으로서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에서 독립이란 황제폐하의 주권을 절대 신성시하는,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말하는 것이었다. 또한 지금까지 종주국 행세를 해오던 淸國의 예속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정치적 자주성을 위해 주체성을 주입하는 것이 의 역할이었다.의 창간 정신, 즉 언문일치의 실천, 염가신문의 지향, 국민권익의 최우선 등은 보도, 논평의 기본 강령으로서 이 세워놓은 한국언론의 모본과 전통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 신문은 영문판을 발행하여 조선과 외부세계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해냈다. 이렇게 2개 언어로 발행되었다는 것은 극동 아시아의 신문사상 처음 있는 일일뿐만 아니라 세계 신문사를 통틀어서도 흔치 않은 일이다.독립신문의 창간 경위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을 일명(식자, 교정일을 하던 自助奬學生 포함)1897(한글판과 영문판이 분리되던 때)∼1898년 사이에 Archer B. Hulbert가 영문판 조수로 일했다.1898년 5월부터는 미국 선교사 H. G. Appenzeller가 명의상의 사장이 되고, 제작 실무는 주필이 된 윤치호가 주도했다. 그러다가 1899년 6월부터 영국 선교사 H. Emberly가 사장 겸 주필을 맡고 아펜젤러는 동업자로 후퇴했다.사는 국내외에 분국을 두었다. 창간호 광고기사는 제물포, 원산, 부산, 파주, 송도, 평양, 수원, 강화 등지에 분국이 있다고 알리고 있다. 또한 영문판 제호 밑의 판권란에 상해분국이 있음을 명기했다. 그리고 국내에도 외국인 경영의 분국이 있었다. 영문판 1897년 1월 14일자부터 J. Giacinti. Agent for Chemulpo라는 기록이 나온다.신문의 판매는 정기구독 방식이 주류였다. 배달원도 있었지만 주로 우송에 의존했다. 가판도 한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다. 신문의 보급에는 조선 정부의 지원이 컸다. 정부는 창간일자로 발행허가를 내주었는데, 이는 우송상의 편의를 주기 위함이었다. 우송상의 편이란 우송비를 타 인쇄물의 우송료보다 월등한 저율로 취급하여 특혜를 주는 것이었다. 우송료의 경우 국내는 신문사가 부담했고, 국외는 독자가 부담했다.독자는 개화에 적극적인 자세를 가진 젊은 층을 중심으로 진보적인 관료, 평민들이 그 대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독자투고에 나타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영문판은 美, 英, 中, 日 등에 상당한 부수가 발송되었다. 발행 부수는 창간호가 2천부였다. 이 창간호 2천부가 불티같이 팔려서 금방 3천부로 늘리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었다. 그 당시의 구독방식은 오늘날과 같이 한 사람이 한 부를 읽고 접어두는 것이 아니라, 돌려가며 읽고, 때로는 시장에서 낭독도 하였으므로 실제로 을 읽거나 듣는 사람의 수는 발행 부수의 수십 배, 수백 배가되었다. 제이슨은 한 부가 최소한 2백여 명에게 읽혔다고 회상했다. 이 점을 고려하면 당시 정부와 지배계층을 옹호한 것으로 보인다.독립신문의 폐간1897년 2월 아관파천을 끝내고 고종이 경운궁으로 돌아온 뒤부터 본격화된 개화파와 수구파 사이의 대결이 가열해지면서 과 친로 내각의 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한편, 러시아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이권 쟁탈을 앞세운 내정간섭이 점차 노골화되자 의 러시아와 일본, 특히 러시아에 대한 비난의 강도가 계속 거세어졌다. 결국에 1898년 5월 서재필이 미국으로 추방되고, 윤치호에 의해 인계되었다. 1898년 5월12일 부터 1898년 12월 30일 까지 은 명실공히 독립협회의 기관지가 되어, 자주 민권 자강운동을 지원하고, 독립협회의 주장을 대변하면서 민중을 지도 계몽하는 역할을 하게된다. 그러나 그 이후 1899년 독립협회가 친로파에 의해 해산되고, 윤치호가 서울을 떠나면서 신문사는 아펜젤러를 주필로 추대하여 신문을 속간하였다. 이후 신문의 논조는 비판적이지 못하였고, 정부가 이를 인수하여, 은 1899년 12월 4일자로 종간호를 내었고, 정부는 이를 속간하지 않고 영구히 폐간시켰다. 이로써 풍운이 급박했던 한반도에서 백성들의 완고함 그리고 수구세력과 열강들에 맞서 개화와 진보를 바탕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간추린 독립신문의 4시기1896년 4월 7일 창간되어 1899년 12월 4일 폐간될 때까지 3년 8개월의 을 4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제 1기(창간∼1896.7.2)는 이 창간된 다음 독립협회가 창립될 때까지의 시기이다. 이 기간의 의 논조는 국민의 계몽을 위주로 했으며 정부에 대해 매우 협조적이었다. 이 시기에 은 독립협회를 지원하고, 독립회원과 국민 계몽에 주력했다. 제 2기(1896.7.4∼1898.5.11)는 독립협회 창립 이후부터 1895년 5월 제이슨이 출국할 때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은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수구파의 정부와 침략간섭 정책을 노골화한 러시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 때문에 당연히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게 된다. 결국 제이슨이 추방되는 사태까지 벌어진하였다.
    사회과학| 2002.07.03| 10페이지| 1,000원| 조회(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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