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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컴퓨터 지리학]국가지리정보시스템(NGIS)
    국가지리정보시스템국가지리정보시스템이란?NGIS (National Geographic Information System), 즉, 국가지리정보시스템은 정보화 시대의 사회간접자본 중에서도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시스템이다. NGIS는 초고속통신망과 컴퓨터기술, 각종 지리정보를 종합적으로 연결하여 언제 어디서든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신속하게 제공해준다. 가령 행정업무를 일례로 들면, 지금까지 일일이 손으로 했던 주택 건축물 도로 상하수도 토지 등의 각종 대장과 도면관리 업무를 컴퓨터를 통해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된다.도로굴착공사를 할 때 지금까지는 구청 경찰청 가스회사 등 여러 기관을 거쳐 승인을 받고, 도면을 확인해야 했으나 NGIS가 구축되면 컴퓨터를 통해 손쉽게 공사지역의 상황을 파악하고 업무지시를 내릴 수 있게 된다. 이처럼 NGIS가 구축되면 사회의 거의 전 부문에 걸쳐 인력 자원 예산 시간 등의 면에서 획기적인 능률개선효과가 나타나게 된다.현황정부에서는 자치단체나 민간기업이 GIS를 구축하고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지난 95년 5월 국가GIS구축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본격적인 국가GIS구축사업에 착수하였다.{체계분과별 추진사업1. NGIS 구축 기본계획은 2단계로 구분2. 1995 2000년에 걸쳐 추진하고 있는 1단계사업은 주로 GIS 기반 구축에 역점3. 2001년 이후부터 추진된 2단계사업은 1단계사업에서 완성된 부분을 개선시키는데 역점. 총괄분과(건설교통부) - 지하시설물관리체계 시범사업, 공공부문의 GIS활용체계 개발, GIS 구축사업 지원연구. 지리정보분과(국토지리정보원) - 지형도, 주제도, 지하시설물도(상 하수도는 2001년까지) 수치지도화 및「데이터베이스」구축. 기술개발분과(과학기술부) - GIS관련 핵심기술의 도입 및 개발 / GIS 전문인력 교육 및 양성 지원. 표준화분과(한국전산원) - 공간정보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위한 표준화사업 수행. 토지정보분과(행정자치부) - 기존 지적도 전산화 시범사업 결과를 토대로 지적도 전산화 사업의 단 계적 추진(2003년까지). 지리정보분과(국토지리정보원) - 이미 구축된 기본 지형공간정보 데이터 베이스의 수정 갱신 등 유 지관리에 주력하여 기본 지형 공간정보의 품질과 정확도를 향상. 기술개발분과(과학기술부) - 1단계로 추진하고 있는 GIS 핵심기술 개발을 지속적으로 지원. 토지정보분과(행정자치부) - 1단계 사업에서 성공적으로 제작된 수치지형도 및 지적도의 합성화 작 업이 기존 지적도면 전산화사업, 지적 재조사사업 및 한국형 토지정보 시스템 개발사업과 함께 추진2차로 추진된 국가GIS사업은 국가공간정보기반을 확고히 마련하고 범국민적 유통 활용을 정착 국가공간정보기반(National Spatial Data Infrastructure)을 확충하여 2001년~ 2005년까지 디지털 국토를 실현■기본지리정보구축■GIS활용체계구축■지리정보유통체계구축■GIS기술개발■GIS산업육성■GIS표준화■GIS전문인력 양성 및 홍보■지원연구 및 제도개선수치지도화사업국토지리정보원은 '80년대 중반부터 지도 자동제작을 추진하였으며 이러한 경험을 축적하여 「국가기본지리정보 계획(NGIS기본계획)」에 의거, 수치지도 제작사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2000년까지 1/1,000, 1/5,000, 1/25,000 축척의 지형도 수치지도를 제작 완료하였으며, 2001년부터는 수정 및 갱신작업을 추진하고 있다.현재(2004년 기준) 1/1,000 수치지도는 전국81개 지자체중 68개시가 참여하여 16,522도엽, 1/5,000 수치지도는 전국을 대상으로 하여 16,237도엽, 1/25,000 수치지도는 786도엽이 제작되어 있다.또한 가스, 통신, 전력, 상 하수도, 송유관, 지역난방 등 지하시설물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지하시설물관리체계 개발 시범사업을 통하여 지하시설물도 작성작업 규칙을 완성했으며 '97년 말부터 지방자치단체 및 시설물 관리기관이 주체가 되어 이미 제작된 1/1,000수치지도에 지하시설물들을 입력한 지하시설물도등을 제작하고 있다. 이외에도 국토이용계획도, 지형 지번도, 토지이용현황도, 도시계획도, 행정구역도, 도로망도 등 6개 주제도 제작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사회과학| 2005.10.13| 2페이지| 무료| 조회(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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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타자의 영향 평가A+최고예요
    {REPORT{{{{{{{{{{{{{{{{제목 : 타자의 영향{과{목: 성과 문학{교수명: 강희원{제출일: 12월 13일{학 과: 지리학과{학 번: 200105645이 름: 구종호타자(他者)의 영향타자의 백과 사전적 개념은 이렇게 정의 내려진다. 자기동일성을 나타내는 ‘동(同:tauton)’, 또는 성질적 통일로서의 일자(一者:to hen)에 대립되는 개념. 타자는 일반적으로 일자에 대한 타자이며, 철학은 옛날부터 이러한 일자와 타자와의 논리적 관계나 형이상학적 관계를 문제삼아 왔다. 그러나 타자를 한정시켜서 자기에 대한 타인(他人)으로 본다면 그런 경우는 자기와 타자의 인간관계가 문제시된다. 예를 들면 J.사르트르는 자타(自他)의 인간관계는 서로 타인을 부정하는 상극관계(相剋關係 :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하지만 M.부버나 G.마르셀은 자타의 인격적 관계와 비인격적 관계를 구별하여, 전자의 관계에서 타자는 ‘나’에 대한 2인칭인 ‘너’이며, 후자의 관계에서는 타자가 3인칭으로서의 ‘그’나 ‘그것’이며 거기서는 타자의 인격이 ‘나’에 의하여 대상화(對象化)되고 물화(物化)된다고 생각한다.크리스트교에서의 신은 인간의 타자와는 다른 절대(絶對)의 타자이지만 인간이 2인칭으로 부를 때는 자타의 인격적 관계와 같은 관계로 볼 수 있다.타자에 대한 논의를 하게 되면서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근대적 의미의 주체(subject) 개념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식 사유체계에서 주체는 완벽한 에고(ego)이며 그의 언어는 이성이다. 합리적 이성에 바탕을 둔 데카르트의 주체 개념은 통합된 이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이후 철학자들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되는데, 20세기 후반부의 문화적 흐름은 인간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데카르트의 주체개념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키워낸다.사실 인간 이성과 그에 기초한 통합적 주체 개념은 이미 19세기 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등장으로 의문시되기 시작하였다.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은 인간의 욕망과 사회적 억압, 그로하는 임상적인 수준을 넘어 정치, 사회, 문화예술 분야로 확대 도입될 수 있는 가능성은, 통합된 의식이나 비과학적 무의식이라는 한계를 넘어 '말하는 주체' (speaking subject)라는 새로운 주체 개념 아래 그 주체의 형성과정과 사회화 단계를 설명한 라캉의 과학적 주체 분석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주체분석과정에서 라캉은 대화 속에서 자신을 '나'라고 지칭하는 나와 나의 말속에서 '나'로 지칭되는 나 사이의 차이에 주목한다. "나는 무엇을 한다"라는 말을 할 때 말하고 있는 에고와 말속의 '나'는 같지 않다. 라캉은 바로 이 두 주체 사이의 틈을 중시한다.「주체기능 형성요소로서의 거울단계』라는 글에서 라캉은 유아단계에 있는 주체가 자신의 거울 이미지를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고 사회적 관계 속에 놓인 자신의 지위를 인식하는 과정을 분석한다. 라캉에 따르면 유아는 생후 18개월경에 거치는 전언어적인(prelinguistic) '거울단계'를 통해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 사이의 분리를 경험하고 주체와 대상, 주체와 타자간의 관계를 인식하기 시작한다."우리는 거울단계를 동일화(identification)로 이해하면 된다. 분석에서 이 용어는 주체가 이미지를 취할 때 일어나는 변화를 뜻한다. 정신분석이론에서 그 효과는 이마고(imago)라는 오래된 용어로 충분히 설명된다." (Lacan, 1977)라캉은 상상계(the Imaginary)와 상징계(the Symbolic)라는 단계를 구분하여 인간주체가 언어 질서로 진입하기 이전과 이후를 설명한다.1) 그에 따르면 상상계는 언어이전의 단계로서 주체(subject)와 대상(object)간에 명확한 구분이 없는 때이며, 따라서 이 단계에서는 대상을 주체로부터 구분할 수 있는 중심적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는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이미지를 통해 비로소 존재의 상상적 수준을 넘어 어떤 통합된 전체로서의 주체/대상 개념을 따로 분리시켜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 상태가 바로 거울단계이다. 거울단계에과 공인된 시각, 묘사, 교육,정착, 지배를 통해 동양을 조정한다. 즉,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고 우위를 선점하는 서양의 시각인 것이다." (사이드, 1978 : 249)사이드에 의하면 이러한 서구의 시각은 동양인, 특히 중동인들이 게으르고 거짓말을 잘하며 비이성적인 사람들이라는 왜곡된 이미지를 만들어 내었고 아랍과 이슬람 세계에 대한 최근의 부정적 시각도 이러한 이미지에 바탕을 둔 결과이다. 결국 서구와 비서구 간의 문화적 구별은 자연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상상 속의 지형도에 의한 것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이다. 늘 외부에 머물러 '내부인'들의 시각으로 재조정된 채 받아들여졌던 '타자'의 문화적 경험을 강조하고, 서로간의 우위를 구별하는 태도보다는 다름 자체를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사이드의 이론은, 타자를 인정하는 주체 개념이 결코 개인의 주체형성 과정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라캉 이론의 외연을 상기시킨다.한편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가장 적극적이고 전면적으로 받아들인 프랑스의 여성주의 이론은 거울단계를 거쳐 진입하는 언어체계가 갖는 가부장적 억압을 중시한다. 그들은 주체형성과정으로서의 거울단계를 벗어난 주체가 '성별화된' 주체라는 라캉의 이론을 받아들이면서 '아버지의 이름' (Name-of-the-Father)으로 대변되는 언어체계의 규범적 특성에 주목한다.그 이론에 따르면, 신사와 숙녀가 구별되는 언어체계로 들어가면서 여자 어린이들은 이미 중심적 권력에 대한 주변부에 위치하게 된다. 언어 자체가 갖는 이러한 가부장적 권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여성주의 예술가들은 기존 언어의 규칙에 따르지 않는 그들만의 언어를 추구하기도 하며 이것은 한편으로 전위예술과 같이 중심적 예술 흐름에서 벗어난 예술들을 '여성적' 예술로 부르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프랑스의 여성주의 이론가 중에서 특히 엘렌느 시수 (H l no Cixous)는 '여성적글쓰기' (ecriture feminine)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여성성의 적극적인 재현이급 갈등 문제로 희석하고 있다고 비난한다.성욕, 후계자 계승 필요성, 노동력 확보 등을 위해 필요한 여성의 몸, 여성의 출산 능력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역사 속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것에 대해 보부아르는 자연성과 초월성, 그리고 주체와 타자라는 실존주의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즉, 임신, 출산, 수유 등은 행동이 아니라 자연적 역할 기능이며 우연적이거나 무용한 생물학적 운명을 수용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다.여성이 고정된 자연, 육체를 통한 종의 반복 등을 실현하고 있다면 남성은 새로운 가치와 군주적 의지를 자연에 투사하여 이를 변형하고 창조하여 주체로서 지배적 힘을 확인해 나간다는 것이다. 여성은 결코 스스로를 주체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길들여지고 사회나 존재 상황 속에서 '타자'로만 취급됨으로써 부동의 자연성 (즉자적상태, 무의지적 상태) 위에 행사되는 남성의 지배권에 대항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가사 노동은 물론 출산마저도 존재에 있어 본질적 가치가 되지 못하는 반복적이고 소모적인 단순 재생산으로 보며, 여성의 열등성이 이러한 노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보부아르의 인식은 많은 논쟁을 일으킨다. 특히 실존주의 이념에서 보이는 자연에 대한 경시, 그로부터 배태된 인간 중심주의와 생명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폄하, 철저한 이성중심주의, 자본주의 신화에 위험하게 맞닿아 있을 수도 있는 책임과 생산에 대한 열광, 공존과 화합을 통해 타자와 만나지 않고 "타자, 그것은 지옥"이라는 대립 의식에 바탕을 둔 인간 관계 설정 등을 그대로 여성학 이론에 수용하고 있는 것은 여성주의를 통해 실존주의가 진정한 인본주의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으로 보인다.보부아르는 실존사상이 안고 있는 반여성적 여러 인식들을 걸러내지 않은 채 실존주의와 여성주의를 그대로 접목했다. 여기서 지극히 남성주의적, 서구적 이성 중심주의로 점철된 사르트르의 실존사상을 여성 문제 해석의 잣대로 갖고 있는 보부아르의 여성주의는 많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놓는다. 억울한 죽임을 당한 귀신들은 오히려 어린 콜 시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들고, 이들과 콜 시어의 관계는 적대적인 피학 가학의 관계를 넘어 서로의 존재를 알아보는 공존의 단계로 넘어간다. 콜 시어 곁의 귀신들은 누군가를 죽이려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을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귀신들은 누군가에게 두려운 존재 즉 타자가 되는 것을 거부한 채 이승에 남아 끈질기게 콜에게 이야기를 건다.그런데 에서 이 타자의 개념 즉 ‘내가 아닌 다른 존재는 두려운 것’이라는 개념은 ‘괴물’이라는 단어로 상징된다. 귀신뿐 아니라 콜 역시 정상인의 타자, 즉 정신병자라는 비정상성을 지닌 타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콜은 반복해서 자신의 엄마(토니 콜레트)나 말콤 박사에게 자신이 ‘괴물’로 보이냐고 묻는다. 그 말은 바로 말콤 박사의 집에 침입했던 빈센트도 똑같이 말콤에게 되물었던 질문이다. 사실 콜이나 빈센트를 지켜보자면 이들이 귀신을 보는 것이 더 무서운지 건지 누군에겐가 정신병자라는 타자가 되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지 분간이 안 갈 정도이다.이러한 점에서 는 마치 무덤 속에서 나와 원한을 풀어주자 흰 소복에 곱게 절을 하고 이승을 떠나는 우리네 귀신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무엇이 있다. 는 무엇보다도 삶과 죽음의 이원론적인 사고로 구분짓는 서구인의 마음에 죽음이 이지러져 다시 삶과 얼굴을 맞대게 되는 순환과 재생의 등식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다. 기실 자신이 죽었으되 이승을 떠도는 줄 모르는 주인공 말콤 크로는 삶과 죽음을 단절화하여 자아과 타자를 만들어낸 서양의 이성을 대표하는 그림자 인간이다. 그는 자신이 죽은 것을 깨닫기 전까지 끊임없이 어떤 프레임(틀)에 갇혀 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이미 그는 자신의 업적을 새긴 또다른 프레임(액자틀)에 갇혀서 반사된 존재로 비친다. 그는 이 액자틀이 매우 비싸다고 한다. 그리고 감독은 이러한 프레임에 갇혀 주변을 보지 못하는 말콤 박사의 상태를, 빈센트의 입을 빌어, “귀신들은 자신이 죽은 걸 몰라요. 그들은 말한다.
    인문/어학| 2002.04.10| 17페이지| 무료| 조회(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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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독일 세계문화유산 평가A좋아요
    Welterbe -Schlosser und Parks von Potsdam-Sanssouci und BerlinBundesland Brandenburg- Potsdam , Bundesland Berlin- Berlin{포츠담{17-19세기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와 프러시아 왕의 도성지로서 역사적 건조물이 많은 곳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 갈 무렵 연합군 수뇌가 회동하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는 "포츠담 선언" 을 한 도시로 더 유명하다. 포츠담은 하벨강을 따라 매혹적인 전원에 잘 조화된다.그 도시와 주변지역에는 건축물과자연의 조화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아름다운 전망의 호수와 숲이 있다. 베를린에서 열차로 1시간 거리밖에 안 되는 조용한 도시이다. 교통이 편리하므로 베를린에 가는 사람은 둘러볼만한 곳이다.18세기와 19세기의 성, 궁전, 교회와 공원은 세계문화유산의 중요한 건축학적 기념물이며 방문객들에게 프러시안과 독일의 역사를 경험할 기회를 제공해준다.< 문화유산 정보 >1730-1916년 사이에 건축된 150여개의 건물과 500헥타르의 정원으로이루어진, 포츠담의 궁전과 정원의 복합지대이다.그곳은 엘베강의 지류인 Haverl강과 Glienicke호수의 둑경계선에 위치한궁전들과 정원을 포함하고 Berlin-Zehlendorf지역으로 확장되었다.베를린과 포츠담의 Sanssousi궁전과 공원들은 1990년에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었다.{역사적 발전 단계18-19세기동안 프러시아 왕이자 호헨졸렌 가의 마지막 독일 황제는 소나무 숲과 강과 호수로 이루어진 하벨강 부근 모레 언덕 위의 자연지대를 다양한 형식의 궁전과 여러 종류의 공원으로 개발시켰다. 포츠담의 중심부에는 궁전과 여름 별궁이 있었고, 이 개발은 겨울 별궁이 있는 베를린 방향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 두 궁전은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파괴되었다.많은 대표적인 건물들로 그 도시를 아름답게 꾸민 사람은 프리드리히 2세(1740-1786)였다. 1745년에 그의 가장 유명한 창조 고 '대리석 방'과 '알현의 방' 중앙에 위치한 '타원의 방' 등을 견학할 수 있다. 북쪽 입구는 반원형의 (지붕을 받치는 )열주에 의해 접해 있고 그 남쪽 입구는 36개의 돌 조각상이 있다. 포츠담의 로코코라고 불리 우는 조개 껍질 모양의 실내장식이 볼 만하다. 실내와 벽과 천장과 모든 방의 문은 화려하고 복잡하게 꾸며졌고 로코코양식을 갖추었다. 그것들 중에는 삼 목재 판넬로 된 개인도서관과 웅장한 콘서트 룸과 예술적인 A. Menzel의 스케치화가 잘 보존되어 있다.{{프리드리히 대왕은 35세 때부터 74세로 사망하게 될 때까지 그의 인생의 대부분을 이 궁전에서 보냈다. 계단 모양의 포도원 위에 건축된 이 궁전은 아래에서 올려다본 모습이 특히 아름답다.포도원 울타리를 올라가면 오른편에 대왕과 그가 사랑했던 개들이 잠든 무덤이 있다. 생전에 사람을 싫어하고 개만 신용했다고 하는 대왕은 궁전 옆에 만든 11마리 개의 무덤에 자신도 함께 묻히기를 원했다. 그러나 대왕의 희망과는 반대로 유해는 포츠담의 가르니손 교회에 묻히게 되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베를린 함락이 가까워지자 유해는 튀링겐의 암반 광산에 숨겨졌다. 전쟁 후 소련 지배 지역에 있던 유해를 미국 군이 다시 찾았고 이후 46년 동안 호엔촐레른 성에 안치되어 있었다. 긴 방랑 끝에 동서 통일을 이룬 1991년 8월에야 간신히 대왕의 희망은 이루어지게 되어 지금 프리드리히 대왕은 사랑하는 개들과 함께 조용히 잠자고 있다.왕이 경애하던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도 이 궁전에서 체재하였다. 상수시 궁전은 여름철 관광 시즌 중에는 대단히 혼잡하므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290헥타르에 이르는 넓은 정원 안에는 중국 찾집(Chinesisches Teehaus)과샤를로텐호프성(Schloss Charlottenhof),오랑제리(Oringerie)등 몇 개의 별궁이 곳곳에 있다.정원의 중심 통로는 2.5km이고 그 가장안쪽에 위치해 있는 것이 당당한 위용의 신궁전 Neues Palais이다. 공심장부에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로만티크 가도의 시발점이며, 8세기 이후 종교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으로 성장해왔다. 따라서 그들의 부와 영광을 나타내는 건조물이 꽤 많다.또, 프랑켄 와인의 명산지로서도 알려져 있다.기원전 1000년무렵, 마인 강은 지금보다 훨씬 작은 강이어서 걸어서도 건널 수 있을 정도의 얕은 개울이었다. 그 얕은 개울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켈트인이 요새같은 집을 짓고 살았던 것이 이 도시의 시초이다.그후 8세기 무렵에는 대사교의 본거지로서 번영을 누렸고, 1402년에 창립된 대학이 지금도 남아 있는 역사가 오래된 도시이다.또한 르네상스 시대에는 문화와 예술이 꽃피웠던 도시여서 볼 만한 것들이 수없이 많다.제 2차 세계대전으로 도시의 8할 이상이 파괴되었지만, 그 후 복구 작업으로 도시는 훌륭하게 되살아나서 옛날의 좋은시대를 엿볼 수 있는 안정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문화유산 정보 >남부 독일 바로크의 대표적인 건축물 레지덴츠(Residenz)는 장엄한 정원으로 둘러쌓여 있는 호화로운 바로크양식의 건축물로 독일에서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운 레지덴츠중 하나로,18세기에 두명의 대주교로부터 계속된 후원하에 건축가,화가(Tiepolo를 포함한),조각가,Balthasar Neumann이 이끄는 벽토 치장공등의 국제적인 단체에 의해 만들어졌고 장식되어졌다. 1981년 UNESCO에의해 세계문유산으로 등록되었다.레지덴츠(Residenz){레지덴츠는 도심 한 가운데 성당으로 둘러싸여있다.1719년부터 1795년까지 70여년동안에 걸쳐 평지에 건설한 것으로 마리엔베르크 요새에 만족하지 못한 왕족 출신의 쇤보른 주교가 절대적인 권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당시의 유명한 건축가 발타자르 노이만(Balthasar Neumann)에게 명령하여 만들게 한 궁전이다. 주민들의 부역과 막대한 세금이 들어갔다는 레지덴츠의 위용은 지금도 대단하다.중세풍의 고압적이고 투박한 여느 건축물과는 달리 레지덴츠는 우아한 바로크풍을 자랑한다. 프랑스의 나폴레옹황제조차 혀를 내두룰았으며, 천장 자체가 아치형으로 되어 있다. 아치의 높이는 5.5미터이고, 천장화가 그려져 있다. 넓이는 600제곱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큰 프레스코 천장화 이다. 사각의 천장화는 한 면마다 당시의 유럽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던 세계의 4대 대륙 (오스트렐리아 대륙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을 나타내고 있다. 계단을 올라가서 무도장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정면에 올려다 보이는 것이 유럽 대륙이고, 그 오른쪽이 아시아 대륙, 뒤쪽이 당시에 갓 발견된 아메리카 대륙이며,왼쪽이 아프리카 대륙이다. 18세기 최고의 프레스코 화가인 베네치아의 조바니 바티스티 티에폴로의 작품으로13개월에 걸쳐 그린 작품이다. 천정화의 중앙에는 아폴로가 마차를 몰고 그의 신전에서 내려오고 있다. 아주 웅장한 그림이다. 사방에는 호주를 제외한 세계 4개 대륙이 여성으로 표현 됐다. 아시아는 코끼리,유럽은 황소, 미주대륙은 거대한 악어, 아프리카는 낙타를 탄 여인의 모습으로 그렸다. 티에폴로는 당대의 미켈란젤로와 쌍벽을 이루는 화가였다. 미켈란젤로가 로마 중심의 화가였다면, 티에폴로는 독일을 주무대로 활약했던 거장이었다.티에폴로가 천정화를 만드는데 사용된 비용은 요즘 독일화폐로 따져 150만마르크(한화 약 7억5천만원)로 추산되어진다.{{{{{{(하얀 방 Weisser Saal)계단을 다 올라간 곳에 있는 두 번째 방이다. 이곳은 앞뒤의 방이 색채가 화려하기 때문에 눈을 쉬게 하기 위하여 무채색으로 칠해져 있다. 다양한 모티브를 사용한 부조는 조각가 안토니오 보슈가 1년에 걸쳐서 혼자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이후에 정신병을 앓다가 시내 병원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궁전 전체는 바로크 양식이지만 이 방만은 로코코 양식이어서 `뷔르츠부르크의 로코코'라고 불리우고 있다.(황제의 방 Kaisersaal)가장 호화로운 방이다. 벽에는 여덟가지 색깔의 인공 대리석(당시에는 천연 대리석보다 훨씬 값이 비쌌다)기둥과 그 위쪽에는 금세공의 장식이 붙어져 있다. 천장화는 계단의 방과 마찬가지로 티에폴로가 그린 것이다.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은 광산촌 만스펠트에서 보냈다. 14세 때에는 막데부르크로 가, 그곳의 공동생활형제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1년간 생활했으며 아예나하의 성 조지학교에서 고교생활을 보냈다.그후 독일에서 가장 이름있던 에르푸르트 대학으로 진학, 법학을 전공했다.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성 아우구스틴 수사회로 들어가 수도사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새로 창설된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어 그의 인생에, 아니 서양사에 큰 획을 긋는 종교개혁이라는 과업을 벌이게 된다.{{젊은 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이곳 성교회 정문에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을 지적한 95개 논제를 내걸어일약 종교개혁의 고향이 되어 버린 곳이 다.그리하여 정식 지명도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이다. 시내에 들어서면 넓고 푸른 풀밭 뒤로 높은 고딕 양식의 탑, 즉 성교회가 보인다.그 역사적인 정문으로 가까이 다가가면 문은 양쪽으로 열게 되어 있고 그 위의 아치형 공간에는 채색 성회가 그려져 있다.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그 왼쪽에는 성경을 든 루터가 있고 오른쪽에는 루터의 지지자였던 멜란히톤이 앉아 있다. (왼쪽 그림 참고)그 뒤로는 비텐베르크 시가지의 모습이 보인다. 지금의 교회 건물은 루터 당시의 것은 아니다.그당시 교회의 문은 목재였기 때문에 7년전쟁으로 소실되어 버렸고, 즉 1760년 불타버려 1857년 원래의 모습에 따라 재건되었으며 원래의 목재 문은 구리 문으로 바뀌었고 이 그림도 그때 그려졌다.성교회 안 제단 아래, 대리석 바닥에는 루터의 묘가 있다. 루터는 육신의 고향, 아이스레벤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묻히기는 종교개혁의 고향인 이곳 교회에 묻혔다. 비텐베르크 시는 루터가 세상을 떠난 지 꼭 4백 50년이 되는 1996년을 루터의 해로 정하고 전시회, 강연회 등 많은 행사를 벌였다. 행사의 주제는 루터와 백조인데 독일 출신의 성화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가 루터와 함께 항상 백조를 그린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참고 - 역사적
    인문/어학| 2002.04.10| 11페이지| 무료| 조회(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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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학] 지리학사 평가A좋아요
    서양 지리학사고대지리학(그리스∼로마시대)지리학은 어떤 학문보다 오랜 역사를 갖고 있음.지리학의 시작은 그리스시대로서, 지리학이라는 용어는 그리스어인 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음고대 지리학은 전문적인 지리학 연구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삼라만상을 연구하는 박물학적인 성격이 두드러짐지리학적 고찰은 다름아닌 철학적 사유세계의 한 영역으로서, 넓은 의미의 자연의 기원에 관한 논술이라고 생각함.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地理學』(Geographica)을 저술하였는데 지리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최초의 저서.체계적이고 정확한 계측(시에네와 알렉산드리아사이의 거리 측정)Anaximander(B.C 611∼547)자오선을 바탕으로 한 최초의 세계지도 작성Strabo (B.C 64∼A.D 20)최초의 地理書로 평가되는 『地理學』(Geographika) 17권을 저술함.그 당시 풍부했던 (로마제국의 영토확장에 의한)지리지식을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정리하여 세계지리로 발전시킴.Ptolemy(A.D 90∼168)지리학집성(Geographika Syntxis)을 저술.지리학을 일반적으로 부분들이 결합된 전체로서, 당시의 보편적인 사유를 통하여 이해된 지구에 관해 묘사적 구획화 내지 지도화하는 것으로 정의.중세 지리학(지리학의 암흑시대)그리스의 모든 학문과 철학이 로마 세계에 전승되었던 기원전 1~2세기를 거쳐 서기 500년~1000년사이에 가장 침체(로마 제국의 분열과 쇠퇴, 기독교의 국교로서의 확립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크게 작용한 결과)지리학의 학문적인식이 떨어짐 -> T in O Map(신학이 모든 학문에 종속됨)이슬람 및 중국의 지리학발전 - 유럽의 지리학이 쇠퇴하자 종교적교류와 활발한 상업활동을 통하여 지리적 지식이 확장되고 있던 이슬람 지리학이 발전, 완전히 격리된채 전혀 다른 과학문명을 발전시키던 중국에서도 지리학이 일찍이 발전.르네상스(중세 후기, 14C∼16C)새로운 항로의 개척, 신대륙의 발견, 지구의 세계일주, 지구의 곳곳에 대한 탐험이 전개동·서 교통로 풍속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혜초의 이 왕오천축국전 은 우리나라 사람이 쓴 현존하는 최고의 여행기로서 그 가치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733년 당나라 장안의 천복사 도량에서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금강성해만주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 이라는 밀교경전을 연구하였다. 740년부터 이 경전의 한역에 착수하였으나, 이듬해 금강지가 죽음으로써 중단되었다. 금강지의 법통을 이은 불공삼장의 6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서 당나라에서도 이름을 떨쳤으며, 오대산 건보리사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도 선(827 - 898)신라말의 중으로 영암출신이다. 15세에 중이 되어 화엄사에서 대경을 공부하여 바로 대의에 통하니 수많은 불학도들이 신으로 추앙하였다. 그 후 수도행각에 나서서 동리산의 혜철대사를 찾아 소위 , 을 배워 크게 깨닫고, 23세에 구계를 얻었다.도선은 운봉산에다 굴을 파서 불도를 닦고, 태백산 앞에 움막을 치며 수도생활을 하였다.헌강왕이 그의 명성을 듣고 궁중으로 모셔가니 도선은 여러가지 정신적 영향을 주었으나 얼마후 다시 산으로 돌아 왔다. 그의 음양지리설과 풍수상지법은 고려, 조선 왕조를 통하여 크게 영향을 주었다.풍수지리설은 산천, 수류의 모양을 인간의 길흉화복에 연결시켜 설명하는 설이다. 이 설은 중국의 전국시대말에 시작하여 이 후 도교의 성립에 의해 체계화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를 크게 선양한 것은 도선이었다. 그는 불교의 선근공덕사상이나 도교의 음양오행설 등을 결합해서 이를 폈다. 그에 의하면 지형이나 지세는 국가나 개인의 길흉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지리에는 솨왕이 있고 순역이 있는데, 왕처 순처 즉 명당을 택하여 주택이나 분묘를 지으면 국가나 개인이 행을 누릴 수 있다. 그 반면에 쇠처 역처는 인체에 쑥을 놓아 뜸을 뜨듯이 불사를 세워 재액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반도를 백두산을 뿌리로 하고 가지가 뻗어 나간 나무로 비기기도 하고 혹은 배모양에 견주기도 하였다. 각지의 호족들은 이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자기들의 근거지를 명다으로 생각천문, 역법, 아악 등에 관한 많은 책을 편찬했고, 김 종서 등과 를 찬수, 한편 세종을 도와 성삼문, 신숙주등과 창제에 공이 컸으며, 권제, 안지의 등과 를 지었다. 시호는 문성.세종실록지리지는 세종실록이 성서된 단종 2년에 정인지등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조선시대에 편찬된 과학적인 조선지지서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세종실록 권제 148에서부터 권제 155에 이르는 8권 8책으로 된 것이며 경기 외에 7도로 분책되었다. 실록지리지는 지리역사의 연혁과 정치, 사회, 재정, 경제, 산업, 군비, 교통 등 조직과 기구를 알려 주는 소위 인문지리학서의 선구자가 되는 저술이다. 그 당시에 이와 같은 훌륭한 지리서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자랑이며 세계지리학가상에서도 특필할 만한 것이었다. 책은 세종실록이 성서된 단종2년에 정인지등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이에 앞서 편찬된 팔도지리서를 정비한 것이라고 하겠다. 하여간 실록지리지는 그 후 관선지리서로서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영조시대의 동국문헌비고가 국가의 역사성을 지리학적으로 부여하려는 데서 이루어진 지도상에 이용할 지리서인데 비하여 실록지리서는 순수히 과학적인 입장에서 인문지리학적 체계화를 꾀했다는 데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우기 세종실록지리지는 그 후 조선시대의 미신적, 정체적 지리학을 과학적, 실증적으로 발전시켜 나아가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양 성 지(1415 - 1482)조선 전기의 문신. 역사학, 지리학에 밝았다. 자는 순부, 호는 눌재, 송파. 시호는 문양. 세종23년에 과거에 급제, 훈구파의 중진으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개찬에 참여하였으며, 단종 1년에는 , 를 작성, 다음해 를 편찬, 1445년에는 를 편찬, 1463년에는 를 찬진하였다. 그는 서적의 보존, 간행에 힘써 10조의 상소를 한 적도 있고, , 편찬에도 참여하였고, 1481년에는 편찬에 참여하였다.그는 1482년 서적의 인간, 수장에 대해 12조의 건의문을 올리기도하였다.사에 관련되어 옥사하였으며, 모친 의주 이씨는 뒤에 유형원의 학통을 이은 이익의 당숙모가 된다.그의 주저 반계수록은 농촌생활의 체험을 토대로 전제, 교선제, 임관제, 직관제, 녹제, 병제, 군현제, 등 국가제도 전반에 걸친 근본적 개혁안을 제시하고 또 그 주장의 근거로서 각 문제별로 관련문헌을 초기한 고설을 붙인 것인데, 부안 은퇴 전해인 31세부터 사망 수년전인 49세까지에 걸쳐 집필되었다. 반계수록의 주장은 우선 농지개혁 그리고 농민 국가의 중간에 개재하는 불합리한 요소와 부정을 제거함으로써 자영농민을 최대한으로 길러 그 생활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국가의 재정과 국방이 요구하는 물적, 인적 자원을 확보하려는 부민, 부국, 강병의 방안이 중심으로 되어있다.유형원은 비록 당시의 현실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했으나 결국은 동양의 전통적인 왕도, 농본주의, 균산주의, 등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중국 고래의 이상 국가의 표현인 를 근본으로 하여 고성왕의 도의 재현을 하려 함으로써 그 시대적인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익, 정약용을 비롯한 이른바 실학파의 많은 학자들이 유형원을 흠모 사숙하였고 그들의 근대 지향적인 사상은 유형원의 사상을 근원으로하여 변모 발전한 것이 많아, 그러한 의미에서 유형원은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유형원의 주장은 한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였으나 영조대에 이르러 그의 경륜이 탁월했던 것을 조정에서 알게 되자, 여조 46년에는 호조참의 겸 세자시강원찬선을 추증하고 반계수록을 인간케하여 각 사고와 홍문관에 분잔케했다. 유형원은 또한 성리학, 역사 지리, 병법, 음운, 한문학, 선술 기타에 걸쳐 많은 저술을 하여, 그 서목은 20종에 가까우나 반계수록을 제외하고는 모두 현재는 전하지 아니한다. 다만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자료로 보아, 그의 성리학은 이황계의 주리론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며, 또 그 역사, 지리, 병법 등의 어느 것은 당시 지식층 사이에 성행했던 북벌론에 근거를 둔 경향이 있었던 듯건을 들어 설명하였다. 팔도총론은 지방지에 해당하고, 복거총론은 인문지리적 총설에 해당된다.사람이 살 만한 곳의 입지조건으로서 지리 생리 인심 산수의 4가지를 들었으며, 여기에도 여러가지로 구별하여 가거지류 피병지 복지 은둔지 일시유람지 등으로 분류하였다. 택리지는 종래의 지리서와는 달리, 정치 경제 사상과 풍속 습관 등 일상생활의 현실적인 제문제를 서술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지리학으로 하여금 인문지리학에의 일보 전진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택리지는 한국 사람이 저술한 현대적 의미의 지리서이고, 실생활에 참고와 이익을 주도록 저술되었으며, 근대 한국 지리학과 사회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데에 그 가치가 있다.신 광 수(1712-1775)조선의 문인으로 자는 성연이고, 호는 석화이다. 서화에 뛰어나 문명을 떨쳤다. 음보로 참봉이 되고, 1764년 의금부도사로 제주도에 가서 그 곳의 풍토 산천 조수 항해상황 등을 적어 부해록 을 지었다. 연천현감을 거쳐 1772년 기로정시에 장원을 하고 돈령부도정이 되었다. 그러나, 노모를 모실 집 한 칸도 없는 사실이 알려져 왕으로부터 집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서화, 특히 과시에 능했고 그 중 관산융마는 대표적으로 널리 애송되고 있으며, 저서로는 석화집 이 있다.신 경 준(1721 - 1781)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실학자로, 자는 순민이고, 호는 여암이다. 1750년에 훈민정음운해 를 지어 그 작용 기원 조직을 논하여 한글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첫 업적을 남겼다. 1754년 중광문과에 율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동봉되었다가, 휘릉별검 전적 병조와 예조의 낭관 정언 장령을 지내고, 1762년 서산군수가 되었다. 이어 장현현감 헌납 사간 종부시정을 역임하였다. 1770년 영조의 명으로 문헌비고 를 편찬할 때 여지고 를 담당하여 그 공으로 동부승지에 올랐다가 병조참지가 되어 를 완성 하였다. 1771년 북천부사, 1773년 좌승지 강계부사 순천부사, 1774년 제주목사가 되었다가 정조 3년 고향 순창에 돌아갔다.학문이 뛰어나고 지식이 해다.
    사회과학| 2002.04.10| 19페이지| 1,000원| 조회(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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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재일동포에 관한 리포트
    울타리 안으로200105645 구종호울타리! 같은 민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살고 있는 우리. 우리는 한민족이 한나라를 형성하며 살고 있다. 미국과 같이 여러 민족이 섞여 사는 곳은 민족의식이라는 것이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 동포들은 세계 어디에 있어도 한국인이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한국에서 넘어간 동포가 자식을 낳고 또 낳아 2세대, 3세대로 갈수록 그 민족의식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아무리 민족의식을 높이려 애를 쓴들 그 나라 문화와 생각을 가지고 살아온 세대들에게 민족의식은 한낱 다른 나라 사람의 입장도 이해 못하는 편협한 민족주의 로 인식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특히 일본에서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 즉, 在日동포들은 다르다. 과거 자신의 나라의 식민지였던 한국에 대한 민족차별이 일본에선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었다. 한국인에 대한 민족차별이 특별히 강한 이 땅에서 일본인과 대등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윗세대들이 자식들을 생각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다.박중호의 단편 울타리 밖으로 는 일본인과의 결혼 의사를 알렸을 때부터 결혼에 이르기까지 민족의식이 강한 아버지와 딸이 겪어야 했던 심리적인 갈등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한다. 주인공인 영식의 딸의 결혼문제를 둘러싼 갈등문제이다. 다시 말해, 일본인과 결혼하려는 딸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 문제로 재일 동포 1세대인 부모와 2,3세대인 자녀들간의 갈등이 자주 벌어지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미 일본인과의 결혼이 보편화되는 추세이다.식민지 시대와 해방 직후의 시기동안 재일 동포 사회는 상당히 동질성을 유지해 왔다. 이는 대부분이 빈곤층이라는 계급적 특성 외에도 조선인끼리의 혼인이 대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인과의 통혼이 늘어났고 최근 들어서는 전체 혼인 중 80% 이상이 일본인과의 통혼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재일 동포 사회에서 3세 이상의 비율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데 대한 반영이다. 1세, 2세의 결혼관에 있어 가장 중요한 면은 일본인과의 통혼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당대에 있어서는 이 문제는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지만 점차 일본인과의 결혼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자식의 결혼에 있어서는 매우 큰 문제인 것이다.1, 2세에게는 오히려 동성동본끼리의 결혼은 안 된다든지, 본국에서의 출신을 따지는 등의 지역주의라든지, 부모의 의견이 중요하다든지 하는 한국의 관습적 결혼관이 나타난다. 결혼에 대한 이들의 편견은 매우 강했기 때문에 이제까지 동포간의 결혼에 큰 장벽이 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오히려 1, 2세에게도 자식의 결혼에 있어 중요한 것은 관습적인 결혼관이 아니라 일본인과의 결혼문제이다. 그간에 터부시되어 왔던 민 단계와 조총련계 동포간의 결혼도 늘어나고 있고 동포끼리의 결혼을 바라는 부모 세대들의 결혼관을 반영한 현상으로, 재일 동포가 집중되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결혼상담소가 수십 개씩 생기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재일 동포의 결혼에서 중매결혼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재일 동포의 결혼 (후생성 인구 동태 통계){연도남:재일동포여:일본인(A)여:재일동포남:일본인(B)일본인과 혼인 합계(A+B=C)동포간혼인(D)총수(C+D+그외)건수%건수%건수%건수%건수*************975*************983*************987*************99119928621,,1281,3861,5541,6511,6381,8091,9012,0212,5252,5252,3302,3652,5352,5892,7212,66624.519.820.121.422.822.623.623.525.929.329.328.126.025.320.419.522.83108431,5361,9942,4582,5852,9033,3913,2093,6223,6223,5154,4055,0637,6858,9406,9698.814.822.327.533.935.737.942.041.142.042.342.348.550.660.664.259.71,1721,9712,9223,5484,1094,2234,7125,2925,2306,1476,1475,8456,7707,59810,27411,6619,63533.334.642.448.956.658.261.665.567.071.371.370.474.575.981.183.782.52,3153,6813,8793,6183,0612,9492,8632,7142,5022,4042,4042,3892,2702,3622,3372,1951,96165.764.756.349.942.240.737.433.632.027.927.928.825.023.618.415.816.83,5245,6936,8927, 2497,2557,2507,6558,0817,8068,6278,6278,3039,08810,01512,67613,93411,677{{현재 결혼의 당사자들인 3세들은 부모 세대와는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지역주의나 동성동본과 같은 문제는 이미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인과의 결혼에 대해서도 보다 완화된 생각을 갖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결혼관은 전통적 또는 관습적 성격으로부터 차츰 개방적인 것으로 바뀌어 가며 양자가 공존하는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앞 표에서 재일 동포와 일본인과의 결혼시 일본인 중에는 귀화자나 일본인과의 결혼으로 태어난 2세 등 일본국적의 재일 동포가 포함되어 있다. 재일 동포 중에는 본국의 한국인도 포함되어 있다. '부부 모두 재일 동포'의 결혼에서도 재일 동포와 '본국의 한국인'과의 결혼이 포함되어 있다. 국적별로 분류한 데이터이기 때문에 이 중에서 본국의 한국인, 귀화자, 일본인과의 혼혈 등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1955년 이후 동포간의 혼인의 비율이 가장 높았던 해는 1958년으로 74.2%를 보였다. 그러나 이후로 동포간의 혼인비율은 계속 낮아져 가장 낮았던 1991년에는 15.8%를 보였다. 나머지 84.2% 중 일본인을 배우자로 선택한 비율은 83.7%이다.일본인과의 결혼 대 재일 동포끼리의 결혼의 비율은 거의 7대2로 일본인과 결혼하는 쪽이 다수를 점한다. 개인을 단위로 할 경우에도 재일 동포 11명이 결혼할 경우 그 중 7명은 일본인과 결혼하고 4명이 재일 동포끼리 결혼하는 것이 된다.일본인과의 결혼이 경우 재일 동포 여성과 일본인 남성의 결혼이 재일 동포 남성과 일본인 여성과의 결혼에 비해 많은 수를 차지한다. 민족학교에 다니거나 재일 동포가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에 사는 젊은이들은 그렇지 않지만, 일본인들만 있는 속에서 고립되어 생활하는 재일 동포 젊은이들은 친척을 제외하고는 동포를 만난 적도 없다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중매가 아닌 당사자가 배우자를 고르는 경우 상대가 같은 동포일 것을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무리일 것이다.일본인과의 결혼 10건당 일본인 여성과 재일 동포 남성의 결혼이 3건인데 비해 일본인 남성과 재일 동포 여성의 결혼은 7명으로 나타난다. 남자 쪽이 여자 쪽보다 일본인과의 혼인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는 무엇인가? 재일 동포 쪽에 원인이 있다고 보면, 딸은 남의 집에 며느리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인과의 결혼이 용납되지만 아들의 경우는 며느리가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조상 제사 등의 관계로 인해 부모들이 일본인과의 결혼을 잘 용납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며느리는 어떻든 자신의 가풍에 따르도록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상관없다는 의식들도 마찬가지로 있다. 따라서 이런 비율의 차이는 재일 동포 쪽보다는 일본인 여성 쪽에 주로 원인이 있다고 보인다. 이런 점은 부라꾸민의 경우에도 유사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일본인들은 남성보다 여성 쪽이 상대적으로 부라꾸민 출신자와의 결혼을 피하고자 하는 경향이 높다. 이는 일본 사회가 아직 남성우월 사회이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결혼 상대의 사회적 지위에 의해 규정된다는 풍조가 남아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일본인과의 통혼의 증가는 거주지역의 분산이라는 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재일 동포들은 도시 외곽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면서 빈민가를 형성해 왔다. 그러나 재일 동포들의 도시 거주 경향은 여전하지만 이런 밀집지역은 대체로 해소되는 방향으로 진전되어서 지금은 오사카시 이쿠노구가 거의 유일한 밀집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쿠노구에 비해서는 훨씬 넓은 지역에 분산되어 있지만 비교적 많은 재일동포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으로는 카나가와현 정도를 들 수 있다.한국 또는 조선 국적 보유의 재일 동포는 일본 전체 인구의 0.5%에 불과하지만 일본 전역의 거의 모든 도시에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분산화는 동포끼리의 대면 빈도를 낮춘다. 상대적으로 동포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은 지역에서는 동포끼리의 혼인이 높다는 것을 말한다. 일례로 1985년 재일 동포 전체의 통혼율이 71.3%인데 비해 카나가와 현에서는 23.6%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이런 경향을 잘 말해 준다.
    인문/어학| 2002.04.10| 4페이지| 무료| 조회(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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