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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정사의 구조
    【동양의 역사인식】-정사의 구조-「들어가며」스물 넷의 정사(正史) 가운데 뒷부분의 9사는 당(唐)조부터 명(明)조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9사는 몇 가지의 뚜렸한 특징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먼저 각 정사는 다음 왕조나 그 뒤의 왕조시기에 씌어졌고, 경우에 따라 쓰여졌다기보다 편찬되었다는 표현이 알맞은 것도 있다. 또한 정사의 편찬은 보통 공식적으로 편찬임무가 부여된 한 무리의 역사가들로 구성된 위원회나 관청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마지막으로 이 아홉 저작은 모두 기전체로 쓰여졌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정사의 사료: 기본적으로 공식기록이란 그 왕조의 각 왕대의 단기간의 역사들로 이루어진 한 계열의 사서이며 한 계열의 사서는 때로 다른 계열의 사서에서 자료의 일부로 사용되었다.원칙정사 안에 구체화되어 나타나 원칙들 가운데 왜 와 어떻게 라는 물음을 포함하는 원칙들이 중요하다. 왜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는 기록의 지속성과 유용한 참고(useful reference)라는 두 가지 주요한 원칙이 있다.지속성의 원칙은 관찬 사서를 편찬하는 왕조가 멸망한 왕조와 민족적으로 다른 집단에 속할 때 특히 강조된다. 원대의 학자 왕악은 예로부터 나라는 망해도 역사가 없어져서는 안 된다고 한다. 대체로 전 왕조의 역사는 뒤를 이은 왕조의 손으로 편찬되어 왔는데 옳고 그름에 대한 평가는 뒷날 사람들에 의해서 비로소 공정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명백한 지속성의 원칙을 지키는 것은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왕조를 위해 많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멸망한 왕조의 역사를 공식적으로 준비하는 것은 새로운 통치자의 측에서 관용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앞선 왕조와 뒤이은 왕조의 관계를 정립시키고 새로운 왕조에게 정통을 부여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지난 왕조의 역사를 편찬하는 것은 그 왕조에 아직도 충성하고 있던 사대부들에 대한 흡입력에 있다. 훌륭한 역사의 편찬은 그러한 충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마치 효성스러운 아들이 돌아가신 부친의 정기를 쓰면서 느끼듯이 그가 그 왕조에 대해 할 수 있는 마지막 봉사라고 할 수 있었다.왜 라는 물음에 관련된 또 다른 원칙은 유용한 참고의 원칙이다. 역사를 거울로서 그리고 교훈의 자료로 이용한다는 개념은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황제 지배하의 중국에서는 이들 후기의 관찬사서들은 통상적인 읽을거리였다기보다 참고로써 이용되었다. 교육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물론 고전이 단연 중요한 과목으로 여겨졌고 역사를 읽게 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마광의 『자치통감』과 주희의 『통감강목』 또는 사마광과 주희의 저술들의 요약을 묶어만든 뒷날의 갖가지 편찬물들을 읽었다.어떻게 라는 물음에 관련해서는 두 쌍의 서로 모순되는 원칙이 가장 중요하다. 사실대로 충실히 기록한다는 원칙에 대한 윤리적 편향 또는 특정 목적을 위한 숨김의 원칙(諱), 추켜올림과 깍아내림(褒貶)의 원칙에 대한 전체적 평가의 원칙이 그것이다. 충실한 기록의 원칙은 고대까지 올라갈 수 있다. 『좌전(左傳)』에서는 정직한 기록에 대한 임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하는 몇 명의 춘추시대의 역사가들의 삽화를 읽을 수 있다. 또한 사마천의 유명한 『사기(史記)』가 충실한 기록 으로 한 대의 다른 학자들에게 칭찬을 받았을 때 그것은 한 사람의 사가(史家)가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역사가의 독립성은 매우 영광스러운 전통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현대 중국의 역사가도 자랑스럽게 사권(史權)이라 불렀다.충실한 기록의 원칙에 직접적으로 모순되는 특정목적을 위한 숨김의 원칙도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춘추의 『공양전』과 『곡량전』에 의하면 공자는 이 노(魯)나라의 연대기를 저술 또는 편집하면서 세 범주의 사람들의 수치스러운 일과 잘못을 일부러 숨겨주었다. 곧 존자(尊者), 친자(親者), 현자(賢者)가 그들인데, 돌려서 말하거나 단순히 빼버림으로서 그러한 숨김의 효과를 냈다. 이 세범주의 사람들은 또한 다른 다섯 가지 범주의 사람들과 더불어 법정에서 특별한 고려를 받도록 되어있는 여덟 종류의 사람들로 형률에는 팔의(八議)의 대상으로 언급되고 있다.충실한 기록의 원칙과 특정목적을 위한 숨김의 원칙이 양립할 수 없음을 분명히 깨달은 사관들은 후자보다 훨씬 빈번히 전자를 언급한다. 그럼에도 숨김의 예는 셀 수 없이 많다. 이론적으로는 존자·친자·현자는 세대가 달라지면서 꼭 동일한 인물을 포함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어느 한 차원에서 숨기는 것이 다른 차원에서 교정 될 수 있다. 그러나 의도적이던 아니던간에 예전의 숨김의 원칙은 영속되고 새로운 숨김이 또 끼어 들었다.평가의 면에서 추켜올림과 깍아내림의 원칙도 역시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전통에 따르면 그것은 역사가의 개인적인 비평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기록하는 방식과 강조의 여부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가장 이름난 방법은 『춘추』의례(義禮)에 칭찬하는 한마디는 우아한 겹옷을 주는 것에 비교할 만하고, 꾸짖는 한마디는 참형만큼 혹독하다. 고 했듯이 단어의 선택을 통한 극히 암시적인 비평이다. 암시적인 비평은 몰론 체례(體例)가 천명될 때 분명해진다. 주석가들의 해석이 서로 다를지라도 드러난 논평은 『춘추』와 『좌전』에서 쉽게 발견되는바 군자가 가로되(君子曰) 라는 말로 시작되는데 그것은 역사가의 개인적 견해를 나타낼 수도 있고 군자계급의 관점을 의미할 수도 있다. 정사의 권말에 있는 논평은 보통 사신이 가로되(使臣曰) , 찬양하여 가로되(贊曰) , 비판해 가로되(論贊) 와 같은 말로 시작하는데 이러한 논평은 대체로 논찬(論贊) 이라 불려진다.이러한 역사에 대한 태도의 영향은 꽤 커서 가드너의 『중국의 전통적 역사학』에서 적절하게 논평하였는데 모든 중국인의 역사저술에 대한 개념은 완전한 객관성이라는 과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근세의 왕조들 치하에서 전체적 평가의 원칙이 소개되면서 객관성 의 해석이 더욱 엄격해 졌다는 말을 여기에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방법이러한 객관성의 원칙에 대한 논의로 인하여 오늘날 중국의 관찬사서에 대한 흥미가 반감된다면 그 방법, 즉 사관에 의해 편찬된 방법과 기전체에 관련된 방법을 검토함으로서 다시 흥미를 유발할 수 있을 것이다.사관에 의한 대규모의 편찬은 당(唐)대 초기에 시작되었는데, 이와 동시에 편찬의 방법에 있어 결점이 발견되었다. 유지기는 『사통(史通)』에서 이를 비판하였는데 첫째, 너무 많은 인원이 참여하기 때문에 소신 있는 기술이 어렵다고 하였고, 둘째, 또 전 후한시대에는 사관에 정부기록을 일임하였으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고 하였다. 셋째로는 당대의 사관이 비록 외부와의 접촉을 피해 금중(禁中)에 설치되어 있으나 실제로 이러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있으며, 넷째로 고대 역사가들에 비해 독립적인 권위가 약화되어, 감수자의 간섭이 심화되었다고 하였고, 마지막으로 총감수자는 편찬에 관해 일반적인 원칙을 수립하고 임무의 할당과 분배를 책임져, 낭비를 막아야 한다고 하였다.실제로 관찬사서가 편찬된 뒤에는 종종 기사의 상호모순, 중복, 착오, 빠뜨림 등이 지적되었는데, 이는 저자의 학문수준과의 연관성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서두르고, 상호협조의 결핍에서 나온 결과일 수도 있다. 따라서 위에서 말했듯 편찬계획을 위한 계획수립과 수행여부의 확인이 매우 필요한 절차임이 확실해졌다.『요사』·『금사』·『송사』·『원사』의 경우에는 그 목표를 빨리 끝내는 데 있었다. 때론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방법으로 편찬을 주관하였기 때문에 그 내용 면에서 간결하고 명확하였고, 신속히 완결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그러나 『명사』의 편찬 이후부터는 속도보다 그 질적인 면에서 축적된 경험을 쏟아냈다.여러 학자들 중 반뢰(潘 )는,1 사료는 널리 수립해야 한다.2 문서의 검색은 비판적이어야 한다.3 임무는 나누어야 한다.4 기록의 지침은 표준화되어야 한다.5 정직하게 기록해야 한다.6 논의는 공평해야 한다.7 기간은 충분해야 한다.8 역사는 분량이 너무 많아져도 안 된다.라는 원칙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매우 유용한 제안으로서, 이후 민국(民國) 초기의 청사관(靑史 )중 한 위원이 이를 모아 여덟 권으로 출판하였다.기전체를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의 진보는 부분적으로 복합체 역사의 상이한 구성요소들의 상호보완적인 성질을 인식함으로서 이루어졌다. 복합체의 전형은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에 의해 세워졌는데, 이들은 본기(本紀)·표(表)·지(志)·열전(列傳)의 네 가지 부분으로 나뉘어 졌다. 그러나 즉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후한(後漢)에서 수(隨)에 걸친 13사 동안은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다가, 이후의 9사부터는 네 부분으로 이루어진 복합체가 성립된다.
    인문/어학| 2003.01.16| 3페이지| 1,000원| 조회(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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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유사] 삼국유사
    三國遺事우리의 유구한 역사적 전통에서 삼국시대와 그 이전의 수 천년 동안의 역사적 사료 중에서 오직 남은 것이라면 고려 중기 때 편찬된 삼국사기와 고려후기 편찬된 삼국유사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료적 가치가 높은 삼국유사를 여기서 살펴보기로 하겠다.삼국유사를 살펴보기에 앞서 삼국유사의 체재와 의례를 고찰하여 보자.삼국유사는 史官이 아닌 승려의 손으로 쓴 傳記體의 기록으로써 체재가 미비하고 문장이 소박한 野史이다. 그 편차는 王曆, 紀異, 興法, 塔像, 義解, 神呪, 感通, 避隱, 孝善의 9편으로 나누어져 있다.왕력편은 신라, 고구려, 백제, 가락국 등 역대 여러 왕들의 세계와 그 연대에 관한 기록이고 기이편은 고조선 이후의 남북의 여러 부족국가와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에 관한 기록이며, 흥법편 이하 효선에 이르는 7편은 모두 불교신앙의 사실이 중요한 바탕이 되어있으며 불교의 홍포와 승려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다.삼국유사의 체제는 삼국사기와 다르고, 다소 고승전의 체제와 비슷한 측면이 있기는 하나, 고승전은 불교와 승려에 관한 기록임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불교와 승려에 관계된 기록이외에도 민족 역사의 기록인 기이편이 권두에 나와있는데 이는 삼국유사가 쓰인 서술된 목적과 고승전과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는 고승전과는 달리 고승의 경우에서도 한 편에서만 다루지 않고 제목에 따라 여러 편에 싣고 있고 승려의 결점까지도 서술하고 있다.삼국유사의 편찬 내용을 검토하여 보면 기이편은 분량이 다른 편에 비해 많을 뿐만 아니라 그 의의 면에서도 다른 편과는 달리 그 첫머리에 서언을 써서 자신의 서술 방법의 타당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서언의 내용을 토대로 본다면 삼국사기에서 유가의 합리주의의 역사 서술방식에 의하여 신화전설이 주관적으로 깎아 고쳐 쓴 것에 대하여, 일연 자신은 어디까지나 신정시대의 신화를 원형 그대로 보존 기술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가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내용에 설화를 넣은 이유는 문헌중심주의의 삼국사기에 대한 반발이었다는 시각이 있다. 삼국유사의 서술 시작의 내용은 삼국사기와는 달리 단군 설화를 서술하면서 단군이 중국의 요임금과 거의 같은 시기에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시작한다. 이것의 의미는 우리 나라도 중국과 같이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국가임을 내세운 것이다. 이는 민족의 자주의식을 내세우면서 몽고족에 의한 압제 속에 있던 당시의 현실에서 민족의 자주성을 통해 현실극복이라는 문제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민족의 자주성에 대한 예는 삼국유사에서 '천자'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에서도 알 수가 있는데, 단군을 환웅천왕의 아들이라는 것, 동명왕은 천제의 아들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것, 혁거세왕과 수로왕에서도 하늘의 아들이라고 천자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천자는 곧 하늘의 아들인 군주의 칭호이고 이는 우리나라는 하늘과 직접 연결되는 自主國의 역사이고, 결단코 중국의 부용국의 역사는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왕의 죽음에서도 천자의 죽음에 대해 사용한 붕자도 이런 이유로 쓴 것이다.삼국유사는 서술의 차례에서 국가와 왕권의 비중을 크게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서민적 생활의식으로써 그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설화적 측면에서도 소박한 서민의 설화를 실으면서 반 계급적 의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儀飾이 아닌 인간 그 자체의 가치를 자국의 역사전통 속의 서민생활에서 도출하여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비록 귀족의 일이라 해도 기본적으로 일체의 서민적 情調 위에서 전개되고 있다. 삼국유사는 국가와 정치권력에 대한 사회, 민중, 인간의 옹호라는 입장과 양자간의 조화, 고려중기 이래 문무 귀족정권의 반발의 의식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인문/어학| 2003.01.16| 2페이지| 1,000원| 조회(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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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도세자와 영조. 평가A좋아요
    英祖는 思悼世子의 죽음뒤에는 무엇이 있는가?사학과 1학년 991812 김재동Ⅰ.서론Ⅱ.본론1.英祖의 卽位 3.英祖의 家鷄2.英祖의 蕩平策 4.思悼世子와 그 事件Ⅲ.결론1.英祖와 思悼世子▶영조 때의 주요일지◀{) 이덕일.「경종 독사설 속에 즉위한 영조」『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석필출판사.1997. p376(인용)영조 즉위년(1724) 소론 김일경, 목호룡 사형1년(1725) 영조, 붕당의 폐해 하교하며 탕평책 제시4년(1728) 소론 이인좌, 경종 복수 다짐하며 반란5년(1729) 노론 4대신 중 이건명, 조태채 신원9년(1733) 화해 거부하는 노, 소론 영수 모두 면직12년(1736) 왕세자 책봉(사도세자)16년(1740) 노론 4대신 중 김창집, 이인명 신원17년(1741) 경종 1년의 임인옥안 불사름26년(1750) 영조, 직접 홍화문에 나가 백성들의 고역 듣고 눈물 흘림, 균역법 시행31년(1755) 나주 괘서 사건 발생, 이미 죽은 김일경, 유봉휘, 조태구, 이광좌 등 소론 영수들에게 역률(力率)가죄(加罪)38년(1758) 나경언의 고변, 영조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둬 죽임41년(1761) 혼인에 당색 띠지 말도록 지시51년(1771) 세손의 외숙 홍인한 세손제거 지도, 세손 대리청정.52년(1772) 영조사망Ⅰ.서론우리는 지금까지 思悼世子하면 단지 史劇에서나 볼 수 있는 하나의 흥밋거리의 사건의 인물이라고만 생각해오고 있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朝鮮時代 儒敎的理念을 崇尙하는 나라에서는 도저히 볼 수 있을 수 없는 잔인한 사건이었다. 이 사도세자의 사건을 사도세자의 부인이었던 惠慶宮 洪氏가 지은 閑中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한중록을 참고로 조선시대 英祖 在位기간 어떤 일련의 사건이 일어났기에 그런 끔직한 사건의 결말이 났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이 사도세자의 사건은 영조가 사도세자의 둘만을 감정이 아닌 여러 여건이 얽혀진 사건이기에 그 사건의 내막을 알려고 한다. 그러기에 먼저 사도세자 사건의 被疑者인 영조에 대해 알아보고, 그리고 영조가 행하였던 론의 횡포를 공격하여 그 해 12월 환국에 성공하여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듬해(1722) 3월에는 연잉군의 문객이었던 睦虎龍이 老論 명문가 자제들의 역모를 古變하여 대대적인 殺戮이 동반된 옥사가 일어났다. 이로 말미암아 경종의 지위를 위태롭게 했다고 지목을 받은 노론 4대신을 포함하여 60여 명의 노론 인사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이로써 노론은 소론에 대하여 극도의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辛壬獄事이다. 신임옥사로 노론은 큰 타격을 받았으나 1724년 결국 영조가 즉위함으로써 회생할 수 있었다.{) 李迎春.「景宗代의 世弟冊封과 辛壬獄事」.『朝鮮後期王位繼承硏究』.集文堂.1998.p300영조가 즉위한 것은 정치권의 안정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권을 혼란 속으로 빠지게 했다. 그것은 바로 영조가 朋黨에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영조는 세제책봉에서부터 노론 세력에 의해 추대된 것이기 때문이다. 노론의 정치권의 장악에 영조라는 인물이 필요하였기에 그가 세제로 추대된 것이다. 노론에 의해 세제로 추대된 전력이 있던 그가 소론 임금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것이기에 소론 强硬派들은 영조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영조4년 선왕 경종을 毒殺한 역적들에 대한 복수를 외치며 일어난 이인좌{) 李麟佐의 亂은 黨論에 의한 國王의 선택을 정치적 계기로 하여 일어났으며, 직접적 발단은 景宗의 사인에 대한 유언비어에 있었다. 南人과 少論의 과격파들이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昭顯世子의 증손자이었던 密豊君 坦을 추대하려는反正의 형태를 띤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의 난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경종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의 所産이었다.{) 이덕일.「사도세자 비극의 시작」『누가 왕을 죽였는가?』푸른역사.1998. p212(재구성)경종의 독사설에서 영조가 경종이 죽기 전날 올린 감과 게장이 문제가 되어 경종을 영조가 독살했다는 독사설이 나돌았고, 영조의 자신이 숙종의 아들이 아닌 金春澤{)왜 延 君이 金春澤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게된 것은 연잉군의 어머니 者이기도 하다. 때문에 왕위에 오른 뒤 당연히 王權을 강화시켜야 할 當爲性과 함께 당쟁을 終熄시키려 했던 모습을 그의 정치적 형태에서 볼 수가 있다. 영조는 등극하자마자 붕당의 폐해를 열거하며 蕩平 政局을 열어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는 노력을 한다. 영조의 정치 중 思悼世子의 사건과 관련 지울 수 있는 정치적 형태는 탕평책이다.탕평이란 「書經」'洪範九疇' 편의 다섯 번째인 皇極에 '편이 없고 당이 없이 왕도는 탕탕하며, 당이 없고 편이 없이 왕도는 평평하다(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라는 구절에서 각각 '탕'자와 '평'자를 따서 배합한 용어로 공평무사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덕일.「탕평책의 등장」『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석필출판사.1997. p388(인용)영조 자신이 노론의 지지 속에서 죽음도 면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기에 탕평의 본체에는 접근할 수 없는 구조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영조의 탕평책은 친위세력인 노론에 극히 유리한 것이었다. 그리고 숙종이 추구했던 당파간 경쟁을 왕권안정전략은 영조를 중심으로 한 노론 일당 독재 단계에 들면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했고, 일당독재화에 의해 발생된 야당과 민중의 불만을 호도하고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 왕권강화를 위한 영조의 욕구가 결합되면서 왕권의 절대적 상승을 동반한 탕평정책이 구체적으로 전개된 것이다. 영조의 탕평책이 공정한 인사와 정책경쟁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노론 일당독재의 선전문구라는 사실은 영조 재위 동안 줄곧 노론 세력이 소론이나 남인 인사들을 제거하고 죽였던 사실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김인호,박훤.「영조 출생의 비밀」『우리가 정말 몰랐던 조선이야기 2』자작나무. 1999,(인용)이에 반발하여 이인좌, 김일경의 아들 김영혜, 정희량 등이 주동이 되어 난을 일으킨다. 이것이 이인좌의 난{)이인좌의 난으로 통해 나타난 위기의 성격을 말할 수 있다. 지배층내에서 분열 기미가 보이게 된다. 지금까지 잘 진행되어오던 붕당정치의 질서가 붕괴가 되고 이제는 예전의 서로 각자의 당을것이다. 왕은 할 수 없어 노론의 홍치중을 영의정, 소론의 조문명을 우의정으로 제수하여 서로 타협해서 정사를 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단호히 거절했다.{) 이현희.「영조의 탕평책과 이인좌의 난」『이야기 한국사』청아출판사. 1994. p471 (인용)이처럼 힘이 뒷받침이 되지 않는 왕의 중재로서는 실제적인 탕평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영조가 추구한 탕평책은 붕당정치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이 아니었다. 영조가 아무리 초연하고 공평하려 하여도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보장받고 집정을 합리화 하기 위하여는 어쩔 수 없이 노론에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이은순.「조선후기 당쟁사의 성격과 의의」.『조선후기 당쟁사 연구』.일조각.1988.p136영조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면서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했던 그 붕당을 청산하기 위해 탕평이라는 정책까지 내놓으면서 종사를 하였지만 끝내 그의 탕평책은 퇴색되어버렸다.{3.英祖의 家鷄숙종{차남{{제21대 영조{숙빈최씨{{정성왕후 서씨(자식없음) 숙위문씨(폐) 화령옹주{{화길옹주정순왕후 김씨(자식없음){정빈 이씨 진종(효장세자){{1남 1녀 화순옹주{{영빈 이씨 장조(장헌){{화협옹주{{1남 3녀 화평옹주{{화완옹주{귀인조씨 화유옹주{{)박영규.「영조실록」.『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들녁.1996.p366영조는 재위 기간이 51년 7개월이 되는 임금으로 6명의 부인과 2남 7녀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정성왕후와 정순왕후는 자녀를 없었고, 정빈 이씨와 영빈 이씨 그리고 귀인 조씨, 숙의 문씨가 자녀를 낳았다. 그중 정빈 이씨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그 자녀중 효장세자가 있었으며, 영빈 이씨의 자녀에는 장헌세자가 있었다. 영조의 가계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보아야 할 사람은 정순왕후와 사도세자일것이다. 정순왕후 김씨는 66세의 영조와 15세에 가례를 올려서 왕비가 된 그녀는 왕비로 장헌세자의 사건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중 한 명이다.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인 김한구의 사주를 받아 사도세자를 모함했으며, 나영조로부터 사도라는 시호를 받았다. 사도라는 의미라는 것의 시호를 내린 것으로 보아서 영조는 뒤에 이 사건에 대해 후회를 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 사건은 사도세자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파 벽파의 당쟁에 희생된 것즉 붕당의 피해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후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그는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다.4. 思悼世子와 그 事件1762년(영조38)5월 사도세자를 뒤주속에 가두어 굶겨 죽인 일로서 영조는 貞聖王后 徐氏 와 繼妃 貞純王后 金氏 사이에는 소생이 없었고 瑛嬪 李氏의 소생으로 思悼世子가 있었다. 영조는 1749년(영조25)에 사도세자로 하여금 代理聽政케 하였다. 대리청정을 하는동안 사도세자는 정치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궁녀나 內侍를 함부로 죽이고 妓女, 女僧을 희롱하는 등 행실을 하였다고 한다. 세자의 이러한 비행에 대하여 계비를 비롯하여 신하들의 귀띔과 모함이 그칠새가 없었는데 1761(영조 37) 세자는 임금도 모르게 關西지방을 유람순행하고 돌아왔다. 尹在謙, 徐明膺 등은 각각 상소하여 이러한 세자의 행동이 왕세자의 체통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영조는 세자의 관서지방 순행에 관여한 심발 兪漢蕭, 유언민 이수득 정존겸 이심원 김상중 이영휘 등을 파면하였다. 이듬해인 1762년 5월 나경언이 올린 고변이 이 사건에 지대한 역할을 한다. 나경언은 김한구 홍계희 윤급 등의 선동을 받아 세자의 비행 10여 조목을 들어 상소하니 영조는 세자를 불러서 왕세손의 어머니를 죽인일 여중과 사귀어 궁중을 출입케 한일 서로의 순행 북성에 나가 논 일등 세자의 비행을 꾸짖은 다음 5월 13일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하고 세자와 그의 어머니 영빈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영조 자신이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굶겨죽였다. 한편 영조가 뒤에 이를 후회하고 사도이란 시호를 내리었다. 영조의 어떤 것에 정말이지 분개하여 그토록 잔인한 명령을 하여는지 정말이지 궁금할 뿐이다. 그저 세자를 폐하고 어디 먼 곳으로 보내지도 않고 바로 자결을 )
    인문/어학| 2000.11.28| 6페이지| 1,000원| 조회(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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