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후의 미국과 캐나다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역사상 최대의 번영기를 맞이하였다.트루먼 시대(1945∼53)에 사회보장 혜택이 증대(최저임금 인상)캐네디 대통령(1961∼63)이 등장하여 New Frontier 정책,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던 소련의 시도를 좌절시키고 인종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곧 암살당함존슨(1963∼69)은 공직과 기타 직업에서 차별은 폐기하는 시민권법과 모든 흑인에게 투표권을 보장하는 투표권을 제정하여 인종문제 해결에 기여, 베트남전쟁에의 본격적인 개입으로 미국이 깊은 수렁 속으로 빠짐닉슨(1969∼74)은 중국의 UN가입승인, 베트남휴전을 성립시켜 배트남으로부터 미군철수, 닉슨은 재선에 성공하였으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74년 사임상식을 늘립시다....워터게이트 사건이란?1972년 6월 대통령 R.M.닉슨의 재선을 획책하는 비밀공작반이 워싱턴의 워터게이트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하여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체포된 미국의 정치적 사건. 이 사건으로 인하여 닉슨정권의 선거방해, 정치헌금의 부정·수뢰·탈세 등이 드러났으며 1974년 닉슨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당초 닉슨은 도청사건과 백악관과의 관계를 부인하였으나 진상이 규명됨에 따라 대통령보좌관 등이 관계하고 있었음이 밝혀졌고, 대통령 자신도 무마공작에 나섰던 사실이 폭로되어 국민 사이에 불신의 여론이 높아져 갔다. 1974년 8월 하원 사법위원회에서 대통령탄핵결의가 가결됨에 따라 닉슨은 대통령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임기 도중 대통령이 사임한 것은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으며, 미국 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사건이기는 하였으나, 의회와 최고재판소가 그 직책을 완수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전통은 수호되었다. 그리고 닉슨 사임 후에도 그의 형사책임을 추궁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남아 있었으나 대통령 G.포드가 9월 8일 닉슨의 재임기간 중의 모든 죄에 대하여 특사를 발표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레이건(1981∼88) 당시 유가파동등으로 미국은 1931년에 완전히 독립하여 영국연방의 일원이 됨☆ 라틴아메리카18세기 말로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라틴아메리카는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였으나 이에 성공하지 못함인종이 다양하고 복잡하여 대다수는 가난하고 문맹이었다. 산업상으로도 식료품과 원료를 생산하여 이를 미국과 유럽에 수출하고 그 대신 미국이나 유럽으로부터 공업제품을 수입하고 자본을 도입하였다. 공업이 발달하지 않고, 외국시장과 제품 그리고 외국자본에 의존하게 되고 이러한 경제구조하에서는 대지주가 가장 큰 이득을 얻고 그 사회적 정치적 세력이 증대하여 이에대한 사회불안이 조성되고 급진주의나 공산주의가 준동하는 한편, 독재정권이 들어서서는 부패하고 쿠데타가 일어나고 군부독재가 교체하는 악순환이 거듭되어 왔다1930년대 세계공황으로 라틴아메리카의 전통적 경제구조가 붕괴하면서 변화가 일어남즉 유럽과 미국의 구매량이 크게 감소하고 관세가 인상되어 라틴 아메리카의 생산품수출이 타격을 받고 공업제품의 구매가 어렵게 됨, 그 결과 라틴 아메리카의 일부 주요국가에서는 경제적 자립을 지향하는 경제적 민족주의가 일어나고 그것은 1950년에 멕시코와 브라질 등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칠레, 아르헨티나 등을 자극그리하여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는 국내소비자의 수요를 대체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경공업생산이 발달하고, 멕시코와 브라질은 중공업건설에 착수☆ 멕시코혁명(1910)디아즈의 상류계층 중심의 선량주의통치를 전복하고 1917년에 새로운 헌법을 재정하여 보통선거, 대규모 토지개혁, 노동우대, 외국자본의 엄격한 통제 등을 규정한 급진적이고 민족주의적인 헌법카르데나스는 점차 희미해지는 혁명정신을 되살려 수많은 대영지를 소농에게 분할해주거나 일괄해서 토착민 마을에 반환, 외국자본을 억제하면서 멕시코 기업가들의 소규모 공장설립과 이의 발전을 지원, 1938년 영국과 미국의 석유회사가 멕시코 노동자들과 분쟁을 일으키자 카르데나스는 석유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하였다.멕시코경제는 서서히 면서 자유시장경제를 채택☆ 아르헨티나10년간(45∼55)에 걸친 페론과 그 후의 군사 독재 하에 경제가 급속하게 쇠퇴하였으며 1989년 선출된 메넴대통령은 자유시장경제로 경제발전을 추진하고 있다.☆ 칠레1970년 마르크스주의자인 아옌데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그는 미국자본을 추방하여 부유층의 반감으로 아옌정부는 무너지고 그 후에 등장한 피노셰 대통령은 포악한 군사독재라로서 고문과 학살 자행하여 1990년에 보다 온건한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피노셰가 지배하고 있는 군부 좌파세력의 정권도전의 가능성이 남아있다☆ 쿠바1898년에 독립하였으나 실질적으로 미국의 보호령이었다.1959년 카스트로는 반바티스타 세력을 규합하여 게릴라전으로 승리하고 공산정권을 수립하였다. 카스트로는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미국재산을 비록한 사기업을 국유화하였으며 소련에 접근, 1961년 미국은 쿠바망명자들을 이용하여 카스트로 정권의 전복을 꽤하였으나 실해하였다.(Bay of pigs 사건) 1962년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기지를 건설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해군함정으로 쿠바를 봉쇄하고 소련에게 쿠바에 반입한 미사일을 반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긴장이 고조되었으나 소련의 후퇴로 전쟁은 회피됨. 그러나 카스트로가 공산혁명을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 수출하려 하고 공산주의 세력을 지원함에 따라 각국의 좌익세력은 보다 더 대담해져서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우익은 강경해짐, 그리하여 쿠바혁명 후 라틴 아메리카에는 좌익의 극단주의와 우익의 보수적 권위주의가 대립과 갈등의 양상을 보이고 민주주의발전의 길은 더욱 좁아짐.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공포로 쿠바를 고립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임미국은 먼로주의로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의 간섭을 배격하고 그 독립을 옹호한 이래 일종의 책무를 느끼고 1948년 회원국의 독립과 상호간의 평화유지를 목적으로 미주국가기구(OSA)가 설립되고, 1961년 케네디 대통령에 의하여 회원국에 차관과 경제원조를 제공하는 기구로서 진보연합이 설립되었다.☆ 소련과 동중공업중시를 강행, 문화와 교육면에서도 러시아어와 러시아문화의 습득이 중심이되고 시민적 자유가 박탈되고 종교가 탄압되었으며 강제적인 산업화와 농업의 집단화가 추진되었다. 또한 동유럽국가들은 서유럽과의 전통적인 경제적 유대가 차단되고 코메콘을 통한 소련과의 매우 불리한 조건의 교역이 강요됨다만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만이 소련의 적군이 주둔하지 않고 독자적 노선을 유지하였는데 이에 굴욕감을 느낀 스탈린이 동유럽의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고 특히 민족주의적인 성향의 당원을 대량으로 추방하고 처형하였다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자(앗싸^^) 개혁과 변혁의 필요성이 인정되어 스탈린의 정치적 테러리즘에 대한 공포와 증오로 비밀경찰 책임자인 베리아를 체포하여 사살, 강제노동수용소도 많이 폐쇄하였다최소한의 변화를 주장하는 몰토프의 보수파를 누르고 주요사항의 개혁을 주장하는 광부출신의 흐루시초프가 정권을 장악(1955)하여 개혁이 시작됨, 그는 일부 자원을 중공업과 군수산업으로부터 소비재생사과 농업으로 전환시키고 노동자에 대한 통제도 완화하였다. 그로인해 1960년대에 생활수준이 개선되고 향상되기 시작하였다.흐루시초프의 탈스탈린화 는 예술과와 지식인들을 크게 고무시켜 파르테르나크의 닥터지바고(러시아혁명을 비판적으로 다룸)나 솔제니친이 자신이 경험한 스탈린시대의 강제수용소 이야기도 집필탈스탈린화는 외교정책에도 변화를 가져왔는데 즉 흐루시초프는 자본주의와 평화공존을 내세움, 또한 동유럽 위성국가들이 반항을 자극하여 폴란드 헝가리 등에 서 운동이 일어남특히 1956년 소련은 헝가리에서 일어난 봉기를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여 부타페스트에서의 모든 저항을 분쇄하였다. 그리고 1961년 8월 동독정부는 서독으로의 탈출을 저지하기 위하여 동서 베를린 사이에 유럽의 양분을 상징하는 장벽을 구축하여 냉전의 완화에 한계가 있음을 명백히 하였다.1964년 흐루치초프가 실각하고 보수파인 브레즈네프가 등장하여 일종의 제한된 탈스탈린화 시대가 시작되어 공산당의 결속과 독재권을 강화하고 동사회와 문화과학과 기술17세기의 과학혁명과 18세기의 산업혁명 이래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1940년 이후 이영향력은 더욱 강해지고 그 범위가 넓어졌다. 잠수함, 우주인이 달표면을 걸었다과학과 기술의 영향력이 증대한 이유는 순수이론과학과 응용과학 또는 실용적 기술이 결합했기 때문에...그러나 1930년대 말까지는 과학과 기술의 분리가 일반적이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과학자와 기술자의 협동이 시작되었다. 실용적인 군사문제 해결에 공동으로 작업하고 1945년 이후 새로운 산업들을 창조하고 경제성장을 촉진하였으며 일반인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켰다.화학비료는 풍작과 더불어 하천을 오염시켰고, 이러한 부작용은 수없이 많으며 이에따라 1960년대 말부터 강렬한 환경운동이 대두하였다.2차 세계대전은 대부분의 주요 대학의 과학자들은 정부의 전쟁수행을 지원하기 위한 극비연구 계획에 참여하였으며 영국 과학자들의 레이더개발은 그 한 예이다.전쟁중에 전투기, 폭격기, 잠수함 색출용 등 상이한 많은 레이더가 개발되었다. 제트 항공기와 컴퓨터도 전쟁 중에 개발되었다.원자탄의 가능성은 1939년 8월 상대성이론의 제창인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지적되었으며, 핵물리학자들의 비밀연구계획에 의하여 원자탄제조 결정이 내려졌다. 미국정부는 이를 위하여 비용을 아끼지 않았으며 수개의 대학과 연구소에서 거대한 연구계획이 진행되었다.로스 알라모스연구소로서, 1942년 이루 핵물리학자인 오펜하이머가 미국과 유럽의 일류 과학자들의 효과적인 상호 협력을 유도하면서 3년여에 걸친 집중적 노력 끝에 1945년 7월에 최초의 원자탄실험에 성공하고 8월에 두 개의 원자탄이 일본에 투하되었다.대형과학을 주도한 것은 미국이었으며, 냉전과 더불어 군사적 목적의 연구가 성행하였다.1957년 소련이 처음으로 위성을 궤도에 올려놓은 것에 자극받은 미국은 1962년 최초로 우주비행사를 쏘아 올리고, 케네디 대통령의 소련추월계획으로 순수과학과 응용기술을 동원하고 연간 50억달러를 소비하면서 아폴로계획을 추었다.
" 빚을 권하는 사회?"저금리 상황속에서도 악덕 사채업자 등에 의한 고리대금(高利貸金)으로 인해 일반서민의 가계가 파산하는 등의 사회적 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하고 있다.금융감독원에 따르면 4월 2일부터 9일까지 8일 동안 고리대금업을 비롯한 사금융 피해신고 접수는 269건에 이른다. 매일 34건 가량이 접수된 셈이다. 하지만 고리대금업자들로부터 피해를 당하고도 보복이 두려워 숨기고 있는 피해자들을 감안한다면 전국적으로 1백만 명 이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현재 국세청에 등록된 고리대금업자는 1,412명이다. 그러나 등록되지 않은 업자를 감안하면 3,000여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리대금업자들이 이처럼 기승을 부리는 것은 암시장을 찾는 고객이 그만큼 많아졌음을 뜻한다. 즉 현재의 금융구조상의 문제와 금융기관으로부터 돈줄이 막혀 눈물을 머금고 고리대금을 써야 하는 신용불량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데 근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신용불량자는 금융기관 및 신용카드사와의 금융거래에서 원금 또는 이자를 제때 지불하지 못한 개인이다. 은행연합회 집계 결과 신용불량에 따른 신용불량자로 분류돼 금융제한을 받는 사람이 1997년말 149만명이던 신용불량자는 지난해말 258만6000명, 올 9월말 현재 273만6000명으로 급증했으며 11월말 현재 3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연령대별 분포를 살펴보면...연령10대20대30대40대50대60대비율0.04%10.53%30.29%34.13%14.59%10.41%우리나라 경제활동 인구는 대략 2천1백만 명. 따라서 경제활동을 하 는 사람 7명 중 1명은 대출을 받지 못하거나 신용카드를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이러한 대량의 신용불량사태의 중요한 원인은 무엇인가?금융기관 가계대출 급증이 신용불량자 양산의 원인으로 비난받고 있다. 경기부진과 실업으로 금융기관 거래자 중에서 신용불량자가 증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은행의 가계대출 연체율은 97년 말 5.2%에서 지난해 말 1.5%로 감소했고 올 들어 2%대를 유지하는 점을 감안하면 최근 단기간에 신용불량자가 급증한 원인을 은행 등 금융기관을 이용한 가계대출거래의 증가에서 찾는 것은 부적절하다. 다만 무더기 부도와 정리해고로 거리에 내몰린 일반 서민들이 제도금융권을 이용할 수 없어 사 금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금융구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는 있겠다. 현재의 금융제도에서는 대출조건이 매우 까다로워 일반서민들이 이용을 하기에는 많은 제약을 받는다. 이에 따라 제도권의 금융기관에 접근하는 것이 어려워 높은 이자를 감수하고도 사 금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위의 표에서 나타난 신용불량자의 연령별 원인을 살펴보면 주로 10대들은 대다수가 휴대폰 사용요금을 연체와 무분별한 카드사용 한 것이 신용불량의 주원인이며 20대와 30대의 경우에는 신용카드 대금을 연체해 신용불량자로 등재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에 비해 40대 이상 신용불량자는 주택담보대출이나 생활안정자금 등을 갚지 못해 그럴 경우 대부분이 카드발급으로 이어졌다. 신용불량자 양산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신용카드의 무분별한 사용 과 남발이다.18세 이상이면 소득여부에 관계없이 신용카드를 무분별하게 발급하고 저금리시대에도 이자 율 및 연체이자율이 20%를 넘는 현금서비스 등이 주원인이 신용불량자를 만드는 주원인 임을알 수 있다. 카드사들은 고객 확보를 위해 법적으로 카드를 발급받을 수 없는 미성년자를 상대로 판촉전을 벌이는가 하면 집안에 있는 주부들에게까지 전화공세를 펴 고객 늘리기에 급급한 나머지 무분별한 카드남발을 유인하고 있는 것이다.이렇게 신용불량자의 증가로 이들이 주로 거래하는 고리대금업자들은 급전이 필요한 영세서민들에게 살인적인 고금리를 강요하며 개인파산을 유발하고 폭력이나 인신매매 등을 통한 불법적인 채권회수로 사회적 불안을 조성하고 있다.이의 문제해결방안의 하나로서 장기신용불량자의 재기 기회를 앞당기고 신용불량정보의 소멸시효를 10년에서 7년으로 단축키로 하는 등 신용정보업 감독규정을 제정하여 시행키로 했다. 그러나 신용불량자를 양산하는 원인을 제거하지 않은 채 사면ㆍ구제조치만 반복한다면 실효를 거두기 어려울 뿐 아니라 신용 불량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