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映畵社의 탄생과정■ 초기 주요영화사닛카츠(日活)- 1912년 10월 요코다상회, 요시자와상점, M빠데, 후쿠호토의 4개 회사가 일본활동사진주식회사 닛카츠(日活)로 합병함으로서 최초의 영화기업이 창설된다. 닛카츠는 수입, 제작, 배급 면에서 경합해 오던 4사를 통합하여 시장경쟁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러나 1914년의 불경기와 흥행 부진으로 위기를 맞았다가 카츄사 물로 재생한다. 영화관을 보유한 닛카츠는 신파비극과 오노우에의 舊劇영화로 지탱하였다. 이들은 당시 변장술에 뛰어난 프랑스의 대도적 이야기인 지고마 의 인기에 편승하기도 하였다. 이 회사는 제작 편수가 1년에 3,4편으로 줄긴 했어도 수많은 역경을 딛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928년 닛카츠는 30여 곳의 영화관을 직접 관장하였고, 1천여 곳의 영화관과 배급 계약을 체결하였다.쇼치쿠(松竹)- 1920년에는 교토 극장에서 과자를 팔면서 교토에 가부키와 심파단을 소유하고 있던 오타니 형제가 그들의 영화사인 쇼치쿠를 설립하고는 가마타에 스튜디오를 여러 개 세웠는데, 그들의 회사는 곧 일본 대형 영화사의 하나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이마무라 쇼헤이의 (1997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수상)와 같은 우수한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쇼치쿠는 일본 영화 근대화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1921) 등을 제작하고, 세실 데밀 감독의 (1912)에 출연한 하야카와 셋슈와 같이 할리우드로 간 배우들과 고타니 헨리 같은 연출가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쇼치쿠는 또한 하나야기 하루미나 대스타 구리시마 스미코와 같은 여배우들을 처음으로 기용한 회사이기도 하다. 그 당시까지 여성의 역할은 전부 가부키에서처럼 온나가타 라 불리는 남자배우들이 연기하였다.도호(東 )- 1932년 도쿄의 다카라스카 극장을 설립한 고바야시 이치조도 전철회사 경영의 경험을 살려 제작, 배급, 흥행의 각 계열을 정비, 도호(東 ) 블록(다카라즈카 극장, PCL, JO 스튜디오 등)을 거쳐 1937년에는 트러스트화에 의한 도호 영화(주)를를 받는다. 일본의 토키는 그 이전에도 실헙적 작품이 등장한 바 있는데, 디스크 방식을 사용한 마키노 제작의 , 닛카츠가 만든 , 소화 키네마의 (오사나이 가오루 감독)과 , 미조구치의 등이 있었지만 이들은 무성영화의 후시녹음판에다 무대극의 실사물이거나, 미국처럼 뮤지컬 영화의 파트 토키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는 최초의 본격적인 전체발성영화로 이후 일본 영화의 토키화에 큰 계기가 되었다.쇼치쿠(松竹)- 1930년에 죠셉폰 스턴버그의 가 일본 자막판의 토키로 개봉되어 대성공을 거두자 쇼치쿠는 자체 자본으로 츠치바시 다케오의 츠치바시 식 토키 개발을 시도하여 소시민희극을 토키화한 것이다. 이어 , 등의 시대극과 등이 문예영화로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토키 시설의 확대를 위해 쇼치쿠는 새로운 촬영소 오후네(大般)를 선설하여 토키시대에 대비하였다. 영화산업이 과점에 의해 대기업을 지향하는 것은 할리우드의 특성이지만, 쇼치쿠는 일본식 대기업의 형태를 발전시켜 갔다. 제작, 배급, 흥행의 부문별 확대를 추진함으로서 1941년에는 쇼치쿠 영화주식회사를 쇼치쿠(주)로 통합, 트러스트를 완성한다. 아울러 무성영화시대에 시도했던 오후네 칼라를 강력히 추진, 여성 취향의 멜로 드라마와 소시민 영화 장르를 적극 전개해 갔다.도호(東 )- 도호는 금융자본을 배경으로 기업의 근대적 합리화를 지향, 제작 면은 프로듀서 시스템에 의한 예산제도와 계약제, 배급 면에서는 쿼터제에 의한 단매배급, 흥행 면에서는 채산주의를 확립코자 했다. 또 토키화와 병행하여 대극장 흥행을 실현해서 각 지역의 중심지에 대영화관을 개설하였는데 1938년에는 관객 4,000여 명 수용의 일본 극장을 세워 성공하였다.특히 쇼치쿠와의 경쟁을 의식한 도호는 유럽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귀국한 모리이와오를 제작책임자로 초빙하여 음악영화, 에노켄, 롭빠등의 보드빌리언에 의한 코미디 영화의 토키화로 오락 노선을 추구한다. 또한 전시체제라는 시대적 동향을 의식, 여성 취향의 오후네 칼라에 주력하던 쇼치쿠와 달리 군부와500편 가까운 작품을 제작하는 영화대국이었으나 1945년에는 겨우 26편에 머물렀다. 이것은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국측과 교전 상태에 들어가 전 국토가 철저히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영화검열은 전쟁 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1934년에 설정된 영화법은 영화 제작을 완전히 국가의 관리 아래 두는 것을 목적으로 제작과 배급을 허가제로 한 점에서 예전의 검열과는 전혀 달랐다. 감독과 배우는 모두 면허 등록제가 되고 작품은 시나리오 단계에서 검열을 받았다. 영화인중에는 이와사키 아키라처럼 이것에 반대해 투옥된 이도 있으나 대다수는 자신들의 기득권 확보와 새로운 경쟁자 제거를 위하여 찬성했다. 1941년에 연합국측이 일본에 경제 재제를 가하자 미국에서 지금까지 수입하던 이스트먼 필름이 바닥났다. 필름 확보는 영화 회사로서는 사활을 건 문제였으며 기업 통합이 급선무가 되었다.신흥 세력인 도호는 항공 촬영 등의 기술 혁신에 눈을 뜨고 군부의 기록 영화 요청에도 적극적으로 응함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에 비해 구 시대적인 닛카츠, 쇼치쿠는 군부와 결탁할 수 없었다. 그 결과 1942년에 신흥 키네마의 아이디어맨인 나가타 마사히치가 기업 합병으로 다이에이를 세웠을 때 닛카츠는 다이에이에 흡수되었다. 이제 영화회사는 도호, 쇼치쿠, 다이에이 3사만이 남아 급속히 규모를 축소해야 했다. 전쟁영화가 이 시기 영화의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미죠구치 겐지의 겐로쿠 주신구라처럼 숭고한 분위기의 서사시적 작품 또한 제작되었다.■ 미군점령하의 日本映畵社40년대 말 정치는 영화제작사 스튜디오에도 깊숙이 파고들었다. 영화기업은 일본 영화의 전반적 민주화 추세에 민감한 반응을 보임으로서 기업들의 전통적 특성을 상업주의 속에서 재현해 내며 민주화를 흡수했다. 도호는 에노껜, 시미킨이나 롭빠, 엔타쯔의 희극과 이념영화에 주력하였고, 쇼치쿠는 여성영화와 소시민영화를 대다수의 여성관객을 위해 부활시켰다. 다이에이는 검술시대극에서 탈피하여 활극이나 탐정영화들을 주로 생산해 냈고, 닛카츠의 사양화었다.구로사와 아키라에게 1950년대는 누구도 상대할 수 없는 자신만의 시대였다. 그는 새벽녘의 탈주(1959)을 비롯한 몇몇 각본을 집필하였으며 살아가다(1952) 7인의 사무라이(1954)등의 작품을 숨돌릴 새도 없이 감독했다. 7인의 사무라이는 후에 많은 액션 영화의 원형이 되었는데 기이한 인물설정과 흥미진진한 전투장면이 뛰어나다. 7인의 사무라이가 소개된 1954년은 구로사와 아키라와 같은 세대로 일찌기 PCL에 입사한 혼다 이시로가 고지라를 흥행시킨 해이기도 하다.고지라는 후에 도호의 달러박스로 전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괴수 영화 장르의 효시가 되었지만 본래는 생태학적 관점의 반핵 영화였다. 도호는 고지라의 히트에 이어 마탄고, 라돈, 모슬라, 긴기도라 등과 같은 괴수들이 일본을 파괴하는 내용을 다룬 영화를 반세기에 걸쳐 제작하였으며, 고지라의 역할은 이렇듯 시리즈화 해 가는 과정 속에서 점차 변모하게 되었다. 킹콩 대 고지라(1962)에서 그는, 일본의 국수주의 입장에 서서, 미국에서 온 거대한 원숭이와 격전을 벌인다.다이에이(大映)- 다이에이는 나가타 마사이치의 지휘 아래 소박한 멜로 드라마 제작으로 전쟁 후 첫걸음을 내딛었다. 다이에이는 이나가키 히로시나 이토 다이스케 등 전쟁 전 교토에서 활약하던 베테랑에게 손을 잡는 아이들(1948)등의 뛰어는 현대물을 제작하게 하는 한편, 1950년대에 들어와서는 시대극에 힘을 쏟기 시작하였다.쇼치쿠(松竹)- 쇼치쿠는 전쟁 후 오바히데오의 그대 이름은(1953~1954)처럼 서민적인 인정이 담긴 내용과 여성 취향의 멜로 드라마 제작을 기본 제작 방침으로 삼았다.도에이(東映)- 도에이는 종전 이후 간신히 명맥을 이어오던 도호 영화사를 모체로 하여, 만영에서 활동하던 네기시 간이치가 합류하여 1951년에 새로 설립한 회사이다. 도에이는 설립 당시 활동 무대를 찾지 못하던 전쟁 전의 시대극 스타들을 기용해 다라오 반나이 시리즈 같은 시대극을 많이 제작하였다. 닛카츠(日活)- 1950년대의 영화계 최대의 사건은 시대 다이에이를 대표하는 감독이라면 마스무라 야스조를 들 수있다. 로마의 영화실험센터에서 공부한 그는 귀국하여, 그 때까지의 일본 영화는 정서적이고 순응적이며 체념적이라고 가차없이 비판했다. 그는 미조구치 겐지의 조감독이 되었지만. 이 위대한 스승에게도 예외 없이 비평의 화살을 퍼부었다. 1957년 로 감독 데뷔한 그는 일본 여성을 이탈리아 영화의 여성과 같이, 자립하려는 욕망을 지닌 주체성 있는 여성으로 묘사하려 했다.쇼치쿠(松竹)- 1950년대 후반, 쇼치쿠는 극심한 침체에 빠졌다. 1930년대에 소시민 영화를 유행시킨 기도 시로는 도에이와 닛카츠등에 대항하기 위해 재능 있는 신세대를 물색하고 있었다. 오시마 나기사가 로 등장해 화제를 불러일으켰을 때, 언론은 쇼치쿠 누벨 바그 라 부르며 그를 필두로 하는 몇 명의 감독에게 기대를 걸었다. 쇼치쿠 누벨바그는 결과적으로 불과 몇 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시마 나기사외에도 요시다 요시시게, 시노다 마사히로등의 뛰어난 감독을 배출했다. 그들은 얼마간 쇼치쿠에 머무르다, 그곳에서 나오기만 하면 한결같이 ATG(아트 시어터 길드)의 제작비 1,000만엔 지원 시스템의 후원을 받아 실험적인 작품을 발표했다. 이런 감독들이 모두 떠나 버리자, 쇼치쿠는 다시 따분한 멜로 드라마와 우상을 주인공으로 하는 서민 희극의 세계로 돌아갔다. 이 흐름과 맞물려 유명한 야마다 요지 감독의 시리즈가 탄생한다. 이런 경향의 영화는 오후나(大般)에 있는 촬영장의 이름을 따서 오후나조(大般調) 라고 불렀다.도에이(東映)- 도에이 교토는 1950년대에도 계속해서 시대극을 활발히 만들었는데, 1960년대 전반에 와서 새로운 경향이 생겨났다. 이른바 전쟁전후를 배경으로 한 의협 영화, 즉 야쿠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의협심을 그린 영화가 등장한 것이다. 이 시기 도에이의 의협영화에는 전근대적인 향수도 엿볼수가 있는데. 이는 일본이 급속히 고도 성장을 이룬 1960년대에 이르러, 일종의 감정적 도착으로 일어난 영화 세계였다. 의협 영화를 열광적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