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50년, 한국 은행 50년우리 나라가 지난 98년 국가 부도의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던 기업들이 갑자기 곤두박질 치고 주식이 폭락했던 사태는 1929년 미국에서 있었던 경제 대공황을 떠올리게 했다.왜 호황이던 경제가 갑자기 내리막길을 향해 갔을까? 우리는 한국경제 50년과 아울러 한국은행 50년의 역사를 돌아보며 이유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한국경제를 알아보는데 있어 한국은행의 중요성은 실로 컸다고 하겠다.통화량이 많아지면 경기가 과열되어 물가가 상승하고 인플레이션 현상이 일어나며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발생한다. 이때 중앙은행이 나서 은행으로 돈을 돌리면서 경제 조절을 하여 물가 안정을 시킨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중앙 은행인 한국은행의 중요한 역할인 것이다.한국 현대 경제 50년의 역사와 함께 움직이면서 ‘경제 안정’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 한국 은행의 역사를 알아보기로 하자.1945년 8월 우리나라는 일본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하였지만 그동안의 극심한 수탈로 인해 남은 것이 없는 극빈의 상태였다. 또 물가는 치솟아 1년동안의 물가는 200배 정도가 올라있었다. 당시 화폐는 조선은행권으로 이것은 일본에서 했던 은행으로 근대적 의미의 중앙은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중앙은행의 필요성은 절실하여 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과 함께 중앙은행설립이 논의되었다. 즉, 당시 조사부장이었던 장기영은 미국의 자문을 얻어 금융통화위원회를 소집하였고 통화신용정책과 한국은행법을 만들었다. 이것은 한국은행의 권한을 강력하게 만드는 것으로 국회의 반발은 거셀 수 밖에 없었다. 난항을 겪기는 하였지만, 표결을 거친 끝에 드디어 구용서 초대총재의 한국은행이 출범하였던 것이다.1950년 6월 25일 우리나라는 북한의 남침공격으로 한치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한국은행 또한 다급했지만 몰려드는 출납업무로 당황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전쟁의 상황에서 피난은 불가피하였다. 그리하여 대구 한국은행 지점으로 피신을 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금괴는 뉴욕연방은행(FRB)으로 옮겨졌다.당시 군수물자를 사는 등 전쟁 자금으로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한국은행권을 발행하였는데 처음에는 일본에서 만들던 것이 부산으로 옮겨져 업무를 하게 되었다.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에는 통화량이 늘어 물가는 18배나 폭등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1953년 긴급통화정책을 실시하였다.전쟁은 끝났지만 모든 것이 폐허가 된 상황에서 복구만이 살 길이었다. 전시 중 미국에 맡겼던 달러를 받으려고 했지만 1800:1이라는 환율 때문에 미국은 반대하였다. 그러나 악성 인플레를 수습하려면 필요한 것이었고, 환율 협상의 우여곡절 끝에 돌려받게 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수출액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이때 정부는 상당히 많은 달러를 돌려받았기에 차등환율을 적용하여 민간에 달러를 매각하였다. 이것은 전후 경제를 복구하는데 큰 힘이 되어 그 후 경제를 지탱하는데 커다란 힘이 되었다.한국은행은 경제를 떠받치는 커다란 주춧돌이기에 한국은행법에는 독립성을 갖도록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부터는 경제발전이 정부주도로 되어왔기 때문에 한국은행은 정부, 정치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당시 정부에서는 경제불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은행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만에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서에 나왔던 것이 그 예이다.정부는 1962년 긴급통화조치를 취해 산업 자금으로 쓰고자 하였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단지 방법은 한국은행에서 돈을 발행하는 것밖에 없었기에 그때까지는 독립성을 지니고 있던 한국은행법에 간섭하게 된 것이었다. 정부는 정부 예속하에 두도록 법을 개정한다.이른 바 ‘박정희형 경제 발전’은 국내 자본을 육성하기 위해 금융자본의 장악을 통해 그것을 자본가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또한 서독의 상업자본을 들여오는 대신 국내의 군?간호사를 파견하는 차관을 도입하였고 ‘잘 살아보세’라는 슬로건으로 그 후 10%의 성장을 하였다. 이 같은 성장에는 정부의 지원으로 인한 수출에의 전념이 깔려있었지만, 뼈대없이 몸통만 부풀렸던 것으로 불안한 성장이었다. 그리하여 오일쇼크 등의 경영난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1970년대까지는 정부주도의 경제 정책이 불가피하였다. 그러나 경제가 안정시된 80년대까지도 정부의 주도하에서 정책이 이루어졌던 것은 이후 딜레마 현상을 겪게 되었다.정부 주도하의 정책은 곧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80년대 후반 우리나라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정도로 선진국의 꿈을 품었지만, 곧 정부가 기업에 막대한 정책자금을 지원함에 따라 이러한 관치 경영의 폐해가 발생하게 되었다.
William Wordsworth는 1770년 영국 호반지방(Lake District)의 북쪽 변두리에 있는 West Cumberland의 Cockermouth에서 태어났다. 8살과 13살에 각각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윈 그는, 백부의 도움으로 1787년 Cambridge University, St.John's College에 진학할 수 있었고, 재학 중에는 프랑스와 알프스 일대를 도보로 여행하였다. 1791년 학교를 마치자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때마침 절정기에 이른 프랑스혁명의 이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곳에서 격정적이고 다정다감한 Annette Vallon과 열렬한 연애를 하게 된다.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딸 Caroline이 태어난 직후 수중에 돈이 떨어져 영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영불 전쟁이 일어나면서Anntte와의 재회가 불가능하게 되고, 이에 고통스러운 죄의식, 공화주의적인 정열과 조국애와의 갈등 때문에 깊은 고뇌에 빠지면서 거의 신경쇠약 상태가 된다. 하지만 이 위기의 순간은 1795년 친구 Raisley Calvert가 죽으면서 남긴 유산으로 Dorothy와 함께 Dorset의 Racedown에 정착하게 되면서, 동시에 Samuel Taylor Coleridge을 만나게 되면서 원기를 회복하게 된다. 이때부터 Dorothy는 Wordsworth의 극진한 친구 겸 격려자로서 시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 남매의 인간관계는 단순한 혈육관계를 넘어서 시적 영감을 교류하는 인간관계로 확대 승화되었다. 그의 많은 시 중 특히 ‘Lucy'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시편들은 이러한 경향을 충분히 알 수 있다. 1797년 여름, 올폭스덴으로 이사하면서 Coleridge와 친교를 맺게 되고, 그에게서 받은 영향과 자연에 대한 친밀한 영감에 자극을 받아 1798년 공동으로 Lyrical Ballads, With a Few Other Poets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영문학사상 낭만주의 부활의 한 시기를 결정짓는 시집이 되었고, 그의 초기 대표시인 Tintern Abbey가 포함되어 있다. 초판이 발간된 지 얼마 안되어 그는 Dorothy, Coleridge와 독일에서 겨울을 보내면서 Lucy poems를 비롯한 여러 시를 썼으며 Prelude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 귀국한 뒤에는 호수지역으로 유명한 Grasmere의 Dove Cottage로 이사하여 살았고, 1802년 어릴 때부터 벗이었던 Mary Huchinson과 결혼하였다. Lyrical Ballads의 성공 이후 10년간 Prelude가 완성되고 Michael, I Wandered Alone as a Cloud 등의 명시가 수록된 Poems in Two Volumes을 내놓는 등 가장 왕성한 시작 활동을 하였다. 중년기에 접어들면서 Wordsworth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차츰 보수주의로 기울어졌고, 1843년 계관시인(poet laureate)에 임명되었다. 그는 1850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사후에야 그의 마지막 생애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수정했던 걸작 자전시 The Prelude가 출판되었다.Wordsworth는 어린시절 부모님을 잃은 슬픔으로 자칫 쇠약해질 수 있었던 몸과 마음을 호숫가의 자연을 통해 자연적, 육체적 성장을 하였고 꾸준한 자연에 대한 사랑과 그에 따른 영감은 시작(時作)을 하는 데 있어서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Lyrical Ballads의 서문에서 밝히듯 poetic diction이 아닌 시골사람이나 서민들의 생활 언어를 시어로서 선택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들의 생활 속에는 본질적인 인간 감정이 자유로이 발휘, 성숙할 수 있는 토양이 존재하기 때문에 성숙된 인간 감정의 표현 매체로서의 시어는 당연히 서민들의 소박한 생활 언어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에게 자연은 인간을 보다 다정다감한 인간으로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속세의 삶의 중하를 덜어주는 도덕적인 기능도 갖고 있다고 믿었다.
Ⅰ. 들어가는 말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행정과 관련된 부분은 드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학교생활이나 직장생활을 들여다보면, 많은 부분들이 행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우리는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정부의 교육이라는 틀 속에서 교육을 받아 왔으며 회사생활에서도 정부의 통상정책, 조세정책 등에 대한 결정은 기업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이처럼 행정현상은 고대부터 존재해 왔고 행정이론 역시 행정의 역사만큼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Gladen, 1972). 행정의 발달은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문명, 인더스문명, 황하문명으로 대변되는 인류의 고대 4대 문명들이 이루어진 지역에서 관개시설 관리와 관련된 행정체계 등이 잘 발달되어졌음은 이를 입증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유럽과 미국의 행정학도 문명사적 발전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현대행정이론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 행정학이론과 그 모태가 되었던 독일 등에서 자생된 유럽행정학의 기원, 내용, 그리고 발전과정을 고찰하고, 아울러 인류의 역사와 행정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Ⅱ. 행정학의 성립배경행정학의 성립은 미국 정치학자인 Wilson이 1887년에 발표한 행정학의 연구 를 기점으로 독립적 학문으로 성립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행정학이 성립되기 이전에 행정현상에 관련된 이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 공동체를 형성하면서부터 이미 행정은 존재해 왔으며, 행정을 보다 잘하기 위한 이론들도 오래 전부터 만들어져 왔다. 이에 행정학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이루어진 연구들이 어떻게 발전하여 왔는지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여기에서는 서구사회의 행정학의 성립과정에 중점을 두어 서술하고자 한다.1. 고대행정원시사회에서는 오늘날 통치행위라고 부를 수 있는 업무를 지도자 단독으로 수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지도자 혼자서는 모든 통치업무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규모가 커진 부족국가 단계에서는 행정조직도 복잡하고 규모도 커지게 되었고 구성원격화하기 시작했다.봉건제도에 근거한 사회는 여러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을 계기로 점차 균열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12세기부터 3세기에 걸친 도시의 발달, 길드적 수공업 및 상공업의 발전, 시민계급의 성장 등 사회. 경제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 결과 봉건제도의 상징적 존재였던 기사는 그 의의를 상실하고 마침내 왕권에 의존하는 계급으로 그 위상이 변화하게 된다. 이에 군주는 시민과 결탁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조세제도의 전면적 실시와 상비군제도 확립 등을 통해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강화해 나간다.즉, 중세 관료제도의 특징은 군주의 권력유지를 위해 일차적인 기증을 했다는 점이며 관료는 피지배계급에 대해 지배자로서 그 위치를 공고히 하였다.3. 근대행정근대행정에서도 통치자와 관료의 전통적 관계는 지속되었지만, 복잡해진 정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문성을 지닌 관료의 역할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 동양사회는 능동적으로 근대화를 성취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이에 반해 전문성을 지닌 관료집단을 구축하여 사회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서구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이에 따라 중세까지는 과거제도에 의한 집권적 관료조직을 갖춘 동양사회가 행정체계의 발달수준에 있어서 서양에 비해 높았으나, 근대에 이르러 역전현상이 발생하게 되었다.(1)유럽근대시기의 유럽은 문예부흥, 지리상 발견 그리고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13세기 말부터 16세기 초에 봉건사회에서 시민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절대왕정이 출현하였다. 군주는 지금까지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귀족계급보다는 새로 부상하는 시민계급과의 제휴를 통해 세금을 얻고자 하는 경제적 동기를 갖고 있었다. 또한 시민계급에서는 귀족계급을 억압해 줄 군주의 정치력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경제적 실리와 정치적 계산의 합치에 따른 양자간의 결탁에 의해 절대주의라는 정치제도가 탄생하였던 것이다. 절대군주시대에는 신 왕정(New Monarchy)"의 행정이 나타났다. 이는 중앙집권적 군주전제정치를 공고esquieu는 입법, 행정 그리고 사법의 삼권이 분리·독립되어야 하며, 이들 권력간에 견제와 균형을 이루어 권력을 남용할 수 없는 제한된 정부 를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한편 19세기에 들어와서는 개인주의가 유럽의 지배적 정치원리가 되었다. 국가를 필요악으로 보고, 국가의 기능은 국민의 생명 및 재산의 보호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사회 전체의 행복은 국가의 통제나 보호에 의존하기보다는 개인의 창의와 책임에 맡겨질 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상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사상에 입각하여 정부는 국방·치안 그리고 방범 등의 의무만을 수행하고 그 외에 정부권력으로부터 개인생활의 간섭을 극소화하는 소극행정이 나타났다.(2)미국행정학을 태동시킨 미국에서의 행정 발전의 배경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1) 출신성분을 기준으로 한 공직 채용첫 단계는 1789년 Washington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약 40년간이다. 대부분의 초기 미국 정치가들은 인간을 부패지향적 존재로 보고, 이러한 인간의 약점을 구조적으로 보완하기 위해서 권력을 분산시키고, 분산된 권력들간에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이 시기의 행정은 교양을 갖춘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수행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공직 임용에 있어서 가문배경이나 교육수준과 같은 출신성분 이 중요한 기준이었다.2)정당을 기준으로 한 공직 채용: 엽관주의두 번째 단계는, 1829년 Jackson 대통령 이후부터이다. 이 시기부터 엽관주의가 이루어져 공직 임명의 기준으로 정당배경 을 중시하였다. 건국 초에는 상류계층이 공직을 독점함으로써 시민의 대표성이 낮았다. 따라서 Jackson은 대표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당정치를 발전시키고 나아가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국민의 지지를 받았고, 엽관제도의 확산은 민주주의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그러나 점차 건국 초기의 상류계급 출신에 의한 깨끗한 행정은 사라지고 무능과 부패로 인한 엄청난 사회적 병폐가 야기되었관련 학자들에 의해 연구하게 되었는데 이중 베르그(H.V.Berg)의 경찰이론은 관방학을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베르그의 경찰이론에 따르면 국가는 공공복리의 발전에 필요한 조건을 창설하는데 부족함이 없으며 국가의 임무는 개인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며 일반적 복지라는 명목하에 개인을 침해한다는 것은 질서 있는 국가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베르그 이후 행정법은 경찰법으로 분리되었으며 헌법과 행정법의 분리도 다른 학자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것도 그의 노력이 기반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관방학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주권신수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전기관방학)으로부터 점차로 자연법사상에 기초를 둔 것(후기관방학)으로 변천하였다. 후기관방학자인 유스티(Joann Heinrich Gottlob von Justi)는 경찰학원리(Grundsatze der Polizeiwissenschaft, 1756)에서 국가 활동을 경찰의 개념으로 파악하였다.2. 19세기(슈타인 행정학과 공법학)19세기에 들어와서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에 입헌주의가 대두되고 민족국가적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행정에 관한 학문은 슈타인 행정학과 공법학(행정법학)의 발달을 가져왔다.(1)슈타인 행정학 : 그동안 발전해 온 관방학적 행정학을 집대성하면서 새로운 행정법학의 길을 연 것이 Lorenz von Stein의 행정학이었다.Stein은 국가권력의 자의적 지배에 대항하여, Justi의 경찰개념을 헌정과 행정으로 분리하고, -이것은 정치와 행정의 구분을 의미한다- 한편으로는 시민사회적 질서로서의 헌정의 행정에 대한 우위를 설명하고, 다른 한편으로 시민 사회질서의 모순 해결하는 행정의 헌정에 대한 우위를 역설하였다. Stein의 행정학은 관방학의 기초개념을 극복함으로써 한 편으로는 공법학에의 길을 열어 놓음과 동시에 그대로의 독자적인 행정학체계를 이루었다.그러나 이러한 Stein의 행정학은 독일 더 나아가 유럽에서 독자적인 행정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결국 행정학의 정통적 위치를 미국에게 양인가에 대해서는 모호한 태도를 보인 것 같다. 그는 실제로 행정의 연구가 무엇을 함축하는지, 행정영역과 정치영역간에 고유한 관계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못하였다. 그러나 행정은(정치에서 분리해서)연구할 가치가 있다 라는 그의 분명한 명제는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음은 명확하다.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많은 연구를 했던 Weber의 지적 관심 중 한 분야는 사회 변동의 요인과 근대사회의 특성에 대한 것이었다. Weber는 Marx와 달리 사회 변동이 경제적 요인뿐만 아니라 이념적 요인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고 보았다.이러한 관점에서 Weber는 관료제를 합리화 과정의 사회적 표현으로 보아 관료제는 조직형태 중 가장 합리적 유형이며, 근대사회의 대규모 행정의 필요성으로 인해 관료제화는 근대사회에 있어 거역할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라고 인식하였다.그러나 관료제 내의 갈등이나 역기능 그리고 여기에서 산출되는 병리적 행태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2. 패러다임 1 - 정치행정이원론(1900∼1926)패러다임 1은 행정연구의 소재에 중점을 둔다. 즉 행정은 정부의 관료제에 관심을 집중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패러다임 1(정치행정이원론)의 기준이 되는 시기는 Frank J. Goodnow와 Lenonard D. White에 의해 각각 쓰여진 저서의 출판연대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Goodnow는 정치와 행정 에서 정부에는 두 개의 구별되는 기능이 있다 고 하면서, 그 중 하나는 정치로서 정책 또는 국가의지의 표현을 다루는 기능 이고 다른 하나는 행정으로서 정책의 집행을 다루는 기능 이라고 하였다.한편, White는 그의 저서 행정학입문 에서 정치는 행정에 간섭해서는 안 되며, 행정은 관리의 영역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행정학은 당연히 가치에 구애받지 않는 과학이 되며, 행정의 임무는 절약과 능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3. 패러다임 2 - 행정원리론과 이에 대한 도전·반응(1927∼1950)(1) 행정원리론(1927∼1937)행정원리론다.
§ 포스트 식민주의(Post Colonialism)란 무엇인가? §영어영문학과 20010404 장 유 미소위 근대성 이라 함은 16, 17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에서 배태된 합리주의와 과학주의 즉, 인류에게 진보, 발전, 번영을 가져다 준 이성에 토대를 둔 기획을 말한다. 이 기획은 과학기술의 발달, 생산과 분배의 시장경제 논리의 확장을 통한 자본주의의 확산, 절대왕정의 붕괴와 시민사회의 수립을 가져온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서구세계에 찬란한 빛과 풍요를 가져왔다.그러나 백인남성중심의 서구중심주의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로 전세계를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정복하여 착취하는 등 도덕적으로 부패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서구의 이익을 위해 지역경제는 서구경제체제에 편입하게 되었고, 민족적 정체성을 가진 토착문화는 서구중심주의에 강제로 동화되어 갔다. 세계대전과 인종청소를 이끌었던 것도 서구인들의 합리주의적 사고와 기독교적 윤리주의의 논리적 결과였다.과학기술의 발전이 후기산업사회를 이끌면서 자본주의는 더욱더 순수해지고 악랄해져 독점자본주의에서 소비 자본주의와 다국적 자본주의로 발전하였다. 서구인들의 빛나는 합리주의가 급기야 모더니티 기획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공산주의까지 와해시키자 그들이 행한 우행에 대한 반성과 대안제시로 이론 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에 등장한 다양한 이론들 중 포스트식민주의는 식민지 잔재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 즉, 정치, 경제, 문화적인 측면에서 제국주의 서구의 가치체계가 어떻게 식민지의 주체적 토착성에 영향을 끼치고 변형시켰는가를 밝히고 동시에 그러한 식민지 잔재를 어떻게 극복하고 새로운 주체적 토착이론을 수립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논의하였다. 일제의 식민지를 경험했던 우리에게 포스트 식민주의는 그리 낯설지 않다.Ashcreft, Griffths, Tiffin은 The Empire Writs Back' 에서 포스트 식민주의란 식민지 시점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적 과정으로 인해 영향을 받은 모든 문화 라고 정의하였다. 즉 이들이 제시하는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은 서구의 이론패권주의 또는 이론제국주의에 개입하고, 저항하고, 위반하여 대안을 낼 수 있는 전략이며 대항담론 이다. 특이한 것은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은 주로 과거 식민지 경험을 한 세라즈, 파농, 사이드, 스피박, 바바 등 비서구인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우리는 Post'의 의미를 앎으로써 포스트식민주의의 의미를 알 수 있다. 포스트라는 접두어의 의미는 우리에게 이중적인 문화정치적 의미와 과제를 부여한다. 사실 식민주의 잔재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후기 식민주의) 우리 삶의 일부가 된 그 잔재의 해체 또는 제거(탈식민주의)가 어렵다는 것은 딜레마이다. 하지만, 비판하면서 끌어안기’ 울타리에 걸터앉아 양쪽 모두 바라보기 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지속되고 있는 식민지 잔재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폭로하여 좋은 생산적인 식민지 전통은 받아들이고 버릴 것은 버림으로써 궁극적으로 나쁜 반동적인 식민지 잔재를 버리고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궁극적으로 포스트식민 이론은 구체적인 전복과 변혁을 위한 정치적 기획을 지닌 새로운 범세계적 문화정치 운동이었다. 억압과 착취를 일삼은 서구중심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올바른 관계정립을 위한 저항운동이었다. 모든 것을 보편화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헤게모니에 대항하는 전략인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중심의 저항과 해체이론으로 오히려 교묘하고 엄청나게 작용함으로써 보편적 모형이나 세계적인, 전지구적인 경향을 추구하려는 반면에 포스트식민주의는 비서구중심의 해체와 대항이론으로 지역성과 역사성을 강조하여 개입과 위반의 정치의식을 첨예화시킴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의 반동적 성격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