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컷]우리의 자리가 넉넉하게 남아있는 영화문예창작학과19990094 유경아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을 읽고 숏컷을 보았다. 처음엔 내가 읽은 부분이 어떻게 연관되어지는지에 대해서만 초점을 보면서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면서 나름대로의 어수선함을 5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보았다.1. 결혼과 이혼, 불륜과 유혹 등등에서, 어느날 길에서 차를 몰던 나이 많은 웨이트리스 도린은 꼬마소년 케이시를 실수로 들어 받는다. 케이시가 입원한 병원의 담당의사 랠프는 병원에 공연을 하러 온 여자 피에로 앤을 알아본다. 며칠 전 음악회에서 랠프와 앤 커플은 우연히 알게 되고 저녁약속을 한 적이 있다. 앤의 남편인 실업자 스튜어트는 친구 들과 낚시를 떠나 계곡에서 여자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가 낚시하러 가기 전 들르는 식당은 다름아닌 도린이 일하는 곳이다. 의사와 텔레비전 앵커, 풀장 청소부, 화가, 누드모델, 제빵 기술자, 웨이트리스, 폰 섹스 담당자, 재즈 가수…수없이 많은 인물들은 이런 식으로 얽히고 설킨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결혼과 이혼, 불륜과 유혹, 근친상간과 자살, 거짓말과 변명 이 쉴 새 없이 끼어들며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든다.2. 우연이 가져온 삶의 아리러니스튜어트와 친구들, 아이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전화에 대고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재택근무 폰섹스 담당자 루이스, 케이시 가족이 생일케이크를 주문한 날 케이시가 사고를 당해 케이크를 버리게 되자, 그들의 집에 전화를 걸어 '꼬마 야구부 케이시는 이젠 없네......'라고 무시무시한 협박을 늘어놓는 제빵 기술자.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모르는 채로 무심결에 하는 이들의 행동은 영화 속에서 이상한 우연과 합쳐져 기묘한 긴장과 공포감을 불어넣는다.짐이 순찰 중 우연히 클라우디아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에는 아홉 가족이 등장하지만, 평화로워 보이는 가족은 하나도 없다. 꼬마 케이시의 할아버지 폴은 처제와 단 한 번의 외도로 아내와 아들을 떠나 살다가 케이시의 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찾아오며, 바람둥이 경찰관 진과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헬기 조종사 스토미는 아내의 집에 있는 가구들 을 톱과 가위로 조각조각 자르고 토막내 버린다. 의사 랠프는 화가 난 아내 메리앤이 3년 전에 저질렀을지 모르는 외도로 신경쇠약에 시달리고 있으며, 리무진 운전기사 얼은 다른 남자에게서 태어난 아내의 딸을 건드린 전과가 있다. 딸 클 라우디아를 성적으로 학대했던 지미는 암을 선고받은 후 그녀에게 용서를 빌러 찾아가지만 모질게 문전박대를 당한다. 얼의 돈을 보고 결혼했던 린다는 죽어가는 얼을 보고 비로소 자신 이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음을 깨달으며 고통스러워한다.3. 숨겨진 삶의 진실교외로 나들이를 나간 허니와 루이스의 가족. 지나가던 여자 하이킹객들에게 눈독을 들인 빌과 제리가 그들을 따라가 수작을 걸고, 둘씩 짝을 짓던 중 갑자기 이유없는 살의를 느낀 제리가 파트너를 돌로 때려죽인다. 때맞춰 일어나는 지진. 지진에 의한 낙석에 맞아죽은 것으로 처리되는 그녀의 죽음 뒤로 펼쳐지는 평화로워 보이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또다른 불안을 가져오면서, 이들의 일상 뒤에 숨겨진 위태로움이 결코 단순하게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장미의 이름]영화「장미의 이름」에는 에코가 없다.문예창작학과19990094 유경아1. 영화 「장미의 이름」장 자크 아노 감독은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미스터리의 줄거리만 뽑아 영화로 소화 해내었다. 작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복잡한 신학 논쟁을 과감히 생략하고 한 수도원에서 일어난 괴이한 연쇄살인 사건만을 추적하여 역사 미스터리 영화로 꾸며냈다.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면 지나친 단순화에 실망할 수도 있지만 소설이 다소 어려웠던 독자에게는 영화를 보는 것이 작품의 기본 줄거리를 잡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작품의 무대는 중세가 끝나갈 무렵인 14세기 북이탈리아의 한 베네딕트수도원이다. 예수가 한번도 웃은 적이 없다는 기발한 착상에서 출발하여 이야기를 풀어간다.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희극에 대해 논한 "시학" 제2권의 유일한 필사본이 이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다는 가상의 상황과 "인간의 웃음은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굳게 믿는 늙은 수도사의 음모가 작품의 핵심을 이룬다.2. 아쉬운 점수도원으로 제한된 공간은 그야말로 황폐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많은 역사물들이 그것의 세트나 시대적 분위기 앞에 함몰되는 경우가 많은데 불행하게도 이 영화 역시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영화는 원작의 연대기적인 기본 뼈대를 얼추 따라가지만 팽팽한 긴장감을 포착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종반부에 이단 심판관 베르나르와 윌리엄의 대결 구도를 마련해 놓고 극적 흥분을 되살리려 하지만, 이런 설정은 오히려 그렇지 않아도 철학적 통찰력이 증발된 마당에 선과 악의 진부한 이분법만을 주입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화형 직전에까지 갔다가 살아난 여인과 아조의 눈물어린 이별은 애상적이기는커녕 작위적이라는 느낌만을 안겨준다.3. 영화와 소설.영화는 소설이 아니다. 문학은 더욱 아니다. 영화 [장미의 이름]은 절대로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대신 되지 못한다. 숀 코너리가 주연한 영화 [장미의 이름]을 보고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장미의 이름]을 읽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영화와 문학은 표현의 문법이 서로 다르다.영화 [장미의 이름]에는 에코가 없다. 에코가 짠 이야기의 뼈대가 있을 따름이다.4. 제목 「장미의 이름」에코는 「장미의 이름」의 의미에 대한 해답을 독자 각자가 나름대로 찾도록 보류해 두었다 말한 바 있다. 장미 에는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 다시 말해 다의적인 개념이 있다고 에코는 말한다. 그래서 더욱 신비스러운 제목으로 여겨지게끔 하고 있다.내가 보는 견지에서 그 의미는 장미 곧 고귀한 것, 그 종교의 이름,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중세 사회 교회의 모순되고 불합리한 모습,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장미는 그 의미면에서 샤론의 장미 라고 불리는 예수 그리스도와도 연관을 가지고 있다. 거기로부터 파생하여 장미는 보통 귀한 것, 아름다운 것인 만큼, 당시 중세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의 영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동시에 장미는 감추고 있는 가시 를 그 의미 속에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중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장미의 이름 으로 뒤에는 이러한 맥락이 생략된 반전, 곧 역설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소설에서 묘사하고 있는 바 성스러운 종교에서 기인한 모든 불합리성과 맹목성, 그 잔인함을 일컫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것의 종착지는 결국 정상이 아닌 미친 지경에까지 이르는 것이고 마지막의 수도원 대화재 가운데 맹렬한 불꽃으로 다 사러버릴 것이라고 에코는 웅변하고 있는 듯 하다. 이것이 내가 본 장미의 이름 이다.
-우리가 그 남자들과 상관 좀 해야겠다.-문예창작학과19990094 유경아Ⅰ. 동성애 의 옛날 이야기최근 들어 동성애 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동성애는 비단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오랜 옛날부터 그것은 존재했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동안 그것이 사회에서 금기시 되고, 음지로 가려져 왔을 뿐이다.성경 창세기 에 보면, 동성애에 대해 묘사되고 있는 부분이 있다.「저녁 때에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다. 롯이 소돔 성 어귀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서 맞으며,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하였다. "두 분께서는 가시는 길을 멈추시고, 이 종의 집으로 오셔서, 발을 씻고, 하룻밤 머무르시기 바랍니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셔서,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길에서 하룻밤을 묵을 생각입니다." 그러나 롯이 간절히 권하므로 마침내 그들이 롯을 따라서 집으로 들어갔다. 롯이 그들에게 누룩 안 든 빵을 구워서 상을 차려 주니, 그들은 롯이 차려 준 것을 먹었다.그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소돔 성 각 마을에서,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든 남자가 몰려와서 그 집을 둘러쌌다. 그들은 롯에게 소리쳤다. "오늘 밤에 너의 집에 온 그 남자들이 어디에 있느냐? 그들을 우리에게 데리고 나오너라. 우리가 그 남자들과 상관 좀 해야 하겠다." 롯은 그 남자들을 만나려고 바깥으로 나가서는 뒤로 문을 걸어 잠그고 그들을 타일렀다. "여보게, 제발 이러지들 말게. 이건 악한 짓일세. 이것 보게, 나에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두 딸이 있네. 그 아이들을 자네들에게 줄 터이니, 그 아이들을 자네들 좋을 대로 하게. 그러나 이 남자들은 나의 집에 보호 받으러 온 손님들이니까,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게." 그러자 소돔의 남자들이 롯에게 비켜서라고 소리를 지르고 지르고 나서 "이 놈이, 저도 나그네살이를 하는 주제에 우리에게 재판관 행세를 하려고 하는구나. 어디, 그들보다 네가 먼저 혼 좀 나 보아라" 하러한 상황하에서 번식의 씨를 가지고 있는 남자들이 종속 번식 목적 이외의 성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거역이다. 따라서 기독교에서는 동성애를 일종의 죄로 여겼다.Ⅱ. 소설의 반응이러한 맥락을 지금까지도 어김없이 전해지고 있는 동성애 에 관한 문제를 문학의 반응은 어떻게 나타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문학은 재미나 지적, 쾌락을 중심으로 삶을 풍성하게도 해 주지만, 감동, 갈증, 감화 등 삶에 있어서 독자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역동적인 기능도 수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의 종류 중, 거미여인의 키스 라는 소설을 통해 그 의미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1. 동성애를 이끌게 한 장본인, 감옥이 소설의 두 주인공은 동성애자인 몰리나 와 반 체제 운동가인 발렌틴 이다. 그들은 사회 체제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감옥이라는 곳에 갇히게 된다. 어쩜 감옥이라는 곳은 그들이 동성애로 이끌게 한 장본인일 수도 있다. 몰리나 는 원래부터 동성애였지만, 감옥이라는 특수한 환경으로 인해 발렌틴 은 이타적인 몰리나 의 사랑을 통해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서의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따라서 감옥이라는 곳은 그들의 자유를 억누르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을 동성애로 이끈 곳일 수도 있다.작가의 은근한 피력소설에서는 기독교의 입장과 달리 동성애에 대한 시각이 지극히 정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작가 자신이 그것을 소설 밖으로 내어놓고 피력하지는 않지만 몰리나 와 발렌틴 의 관계를 묘사하는 부분과 그들의 성격과 심리상태들을 묘사하는 부분은 마치 몰리나 가 여성인 것처럼 그려내어 그에 대한 동정까지도 독자들의 반응을 이끌어 내고 있다. 자신도 어쩌할 수가 없는 몰리나 의 심정들을 처음엔 발렌틴 의 행동은 냉담하지만 소설속의 소설이야기를 몰리나 가 꺼낼 때마다 그리고 병을 간호해 줄 때마다 그의 반응들은 몰리나 를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으로 이끈다.또한 소설속의 각주는 형식적인 면에서만 작가가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 아니라, 내용적으로 동성애 에 관한 논지를 암식적으로 피력하기 위해서 나타낸 도구이다. 여러 아니라고......Ⅲ.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성의 억압은 거미여인의 키스 곳곳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우리는 성이 억압된 부분을 그렇게 쉽게 찾을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우리는 이미 성의 억압된 사회 체제 속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성의 억압을 미화시키는 곳은 의외로 많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문학작품에서, 또한 영화나 연극에서 나타나는 사회적인 규칙들이 성에 대해 규격화시킨다.여성은 약해야 하고, 남성의 보호를 필요로 하며, 남성은 강해야 하고, 여성을 보살펴야 한다는 논리들이 몰리나 와 발렌틴 의 관계에서 잘 나타나 있다.☞ 작가가 성의 억압 을 고발하다.소설 속에서 몰리나 와 발렌틴 은 수사 기관의 음모로 같이 수감된다. 그리고 반체제 집단에 대한 정보를 발렌틴 으로부터 빼내라고 수사기관은 몰리나 를 향해 재촉한다.그러나 몰리나 는 점차 발렌틴을 사랑하게 되고, 몰리나 를 조롱하던 발렌틴 역시 몰리나 를 통해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만 해석하는 자신의 경직된 태도가 변화하는 것을 겪는다. 발렌틴 의 변화를 불러온 것은 몰리나 가 지닌 부드럽고 자기 희생적인 여성적 특성이다. 그러나 완전한 남자를 동경하는 몰리나 의 여성적 태도는 “어떤 남자가 내 남편이라면 그는 명령을 해야만 돼”라는 그 자신의 말처럼, 남성이 지닌 힘에 대한 동경과 복종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남자들 사이의 동성애에도 남녀 사이의 성적 불균형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제와 반체제 집단 간의 치열한 첩보전의 와중에서 몰리나 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그 특유의 여성적 사랑의 순수성이다. 체제 쪽이든 반체제 쪽이든 남성적 편견과 폭력으로 가득 찬 이 세계에서 몰리나 는 여성의 이름으로 죽어가는 것이다. 결국 여자가 되려는 환상을 품은 것 말고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 어떠한 위해도 가한 적이 없는 이 무해한 몰리나 를 받아 줄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마누엘 푸익은 거미여인의 키스 를 통해 성에 대한 폭력을 고발했다고 표현할 수가 있다. 나팔소리가 끈적이게 흘러나오고 한쪽 테이블엔 세상사는 얘기에 여기저기서 침을 튀긴다. 다른 한쪽에선 봉이 되어줄 아줌마를 찾아 연신 눈을 흘기는 제비가 서성이고......」 - 어느 삼류 에로물의 한 장면위의 서로 다른 문화 중 어느 곳이 더 고급스러워 보일까?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건만 후자는 왠지 천박해 보인다. 왜 후자는 천박해 보일까? 서민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서민의 문화는 기득권 층의 문화에 비해 훨씬 직설적이고, 표현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직설적이고 표현이 자유로울까? 그 이유는 표현에 있어 고급문화처럼 치장하고 가꿀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경제적인 이유로… 이러한 이유로 기득권 층은 자신과 대립되는 서민의 문화와는 다른 감정표현의 길을 모색한다. 그 이유는 경제적 여력이 있음은 물론이고...... 솔직한 감정의 표현을 천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솔직한 감정의 표현은 서민의 문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러한 생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은 것 같다.영국신사는 드러내놓고 sex와 여왕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드러내놓고...... 뒤에선 다 한다는 얘기다. 우리 나라 표현으로 호박씨를 까나보다. 해서 우리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고급문화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자들의 몫, 대중문화란 주머니가 가벼운 자들의 몫이라고 인정해 버린다.여기 두 쌍의 부부가 있다. 한 쌍은 삼류 여관을 향하고 나머지 한 쌍은 일급호텔을 향한다. 어떤 상상을 할 수 있을까? 실상 방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둘 다 대동 소이 할텐데. 삼류여관은 온갖 변태적인 상황이 벌어질 것 같고, 호텔은 로맨스가 이루어질 것 같다. 같은 일이 벌어지는데도......고급 문화와 대중 문화는 이런 식으로 인식되어지고 구분되어진다.이토록 대중은 천박하다. 그러나 누구도 대중을 욕할 수는 없다. 나에게 있어 그랬듯이 대중문화가 고급문화로 올라오는 사다리의 구실을 하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실은 이 땅 문화의 양분(兩分)을 만든 이들은 대중이 아니라 소위 '고 말했다."저 조각상 말일세, 코가 너무 높지 않은가?"미켈란젤로는 기가막혀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고 말했다."아, 그렇습니까? 그러고보니 그런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 지금 깎죠. 금방입니다."그러고는 손에 약간의 석고가루를 쥐고 사다리를 올라 가서는 조각상의 코부분에서 그 석고가루를 떨어뜨렸다."자 이제 되었습니까? 시장님? 좀 봐 주시죠? 괜찮나요?""오, 그래. 아주아주 잘 되었구먼..."」오늘날 이 땅의 고급문화 수용자들은 이런 시장과 같은 모습이 아닐까?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간극을 메우는 일은 결국 지식인들이 할 수밖에 없다. 알다시피 대중은 우매하다. 그게 당연하다. 그렇다면 대중을 외면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대중은 역사를 만드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다음 시도 그런 측면에서 탁월하다.어떤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Fragen eines Iesenden Arbeiters(김광규 옮김)성문이 일곱 개나 되는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책 속에는 왕의 이름들만 나와 있다.왕들이 손수 돌덩이를 운반해 왔을까?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되었던 바빌론―그때마다 그 도시를 누가 재건했던가? 황금빛 찬란한리마에서 건축노동자들은 어떤 집에 살았던가?만리장성이 준공된 날 밤에 벽돌공들은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 제국에는개선문들이 참으로 많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던가? 로마의 황제들은누구를 정복하고 승리를 거두었던가? 끊임없이 노래되는 비잔틴에는시민들을 위한 궁전들만 있었던가? 전설의 나라 아틀란티스에서조차바다가 그 땅을 삼켜 버리던 밤에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이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그가 혼자서 해냈을까?시이저는 갈리아를 토벌했다.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그가 데리고 있지 않았을까?스페인의 필립왕은 그의 함대가 침몰당하자울었다. 그 이외에는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프리드리히 Ⅱ세는 7년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이외에도누군가 승리하지 않았을까?역사의 페이지마다 승리가 나온다.승리의 향연은 누가.
미래의 문학19990094 유경아Ⅰ. 서론 : 위기극장에서만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시대에 비디오가 등장했을 때, 아마도 사람들은 극장의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또한 편지로만 수신이 가능했을 시대에 전화기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편지의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캠코더의 등장으로 사진기의 위기, 핸드폰의 등장으로 집 전화기의 위기 등, 지금 우리는 여러 가지 위기에 직면하며 살아가고 있다.이와 같이 각종 문학계에서는도 컴퓨터의 등장으로 책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다. 활자로 된 종이책의 위기가 컴퓨터의 등장으로, 좀더 세부적으로 말하자면, 사이버문학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러한 위기를 대처하기 위해서인지, 기성작가들은 사이버문학의 특징들을 폄하하면서 비방하기까지 한다.비디오가 등장하였어도 극장이 없어진 것처럼, 사이버문학이 등장하였어도 책이 계속 현존해 있을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따라서 사이버문학의 특징들을 김영하의 소설을 토대로 알아 보고자 한다.Ⅱ. 본론1. 통신적상상력* 문학적 상상력 한계문학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인 동시에 허구의 문학이기도 하다.허구(fiction) 라는 것은 사실이 없는 일을 사실처럼 얽어 조작한다 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현실속에서 있을 법한 일 을 소설속에 나타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성작가들은 작품이 사실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드는 데 노력한다. 하지만 허구를 만드는 일, 즉 문학적 상상력이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가상현실컴퓨터의 멀티미디어 기능이 끊임없는 환상과 이미지를 생산해 냄에 따라 소설의 새로운 문학적 상상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즉,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의 등장이다. 가상 이란 가정적으로 생각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가상현실 이라고 하면 가정적으로 생각해 낸 현실 을 말한다.허구와 가상현실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면, 허구는 현실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맥락인 반면에 가상현실은 현실 공간과 전혀 다른 층위에 위치해 있다. 이 가상현실이 실제 우리의 상상력을 전환시킨다. 그리하여 맨눈으로 볼 수 있었던 현실의 범위를 점차 확대시킨다. 하지만, 기성작가들은 가상현실 이 전통적 리얼리즘에서 조금만 벗어났다고 하여 사이버 문학 을 문학의 하위범주로 치부해 버린다.사이버문학과 기존문학의 가장 큰 차이는 문학적 원형을 이루는 상상력의 층위에 있다. 기존문학과 변별되는 사이버문학의 고유한 상상력을 통신적 상상력 이라고 해보자. 그리고 나서 김영하의 소설을 읽어 보자.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상상력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깨지게 될 것이다.「도마뱀이 천천히 구불거리며 벽을 내려오고 있다. 나는 묶여버리기라도 한 것 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다. 소리를 지를 수도 없다. 음악이 들려온다. 느리고 장 중한 타악기의 리듬이 작은 방안을 다소 울리는 것 같다.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그러나 곡명은 기억나지 않는 음률이다. 중간중간 쉬익쉬익 소리도 난다. 도마뱀 의 혀가 들락날락하면서 내는 소리가 아닌가 싶다. 나는 계속해서 도마뱀의 움직 임을 응시한다.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벽에서 내려온 도마 뱀은 천천히 침대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는 내 시야의 사각에 있다. 그가 보이 지 않자 두려움은 더 커진다. 두려움과 함께 흥분이 스며든다. 쉬익쉬익 소리가 타악기 소리보다 더 커진다. 갑자기 침대 발치에 도마뱀의 머리가 나타난다. 갑자 기 내 방은 침대만을 남기고 열대의 숲으로 변해버린다. 강한 햇볕과 새소리, 그 리고 아련하게 타악기의 음률이 내 주위를 가득 채운다. 도마뱀이 내 발등에 올 라선다. 차가운 이물감이 전류처럼 전해져오는 것을 느낀다. 그때 아득하게 아빠 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그는 무엇인가를 빠르게 말하고 있다. 무서워요. 잘못했어요. 나는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채 아빠에게 빈다. 열대의 숲에서 온통 벌거벗은 아빠는 화난 얼굴로 내 침대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도마뱀)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을 우리가 생산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어 놓는 일, 그리하여 그 격차를 좁히는간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이 때, 보여주고자 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이 존재해야 한다.「그러나 그 무엇보다 나를 매료시킨 것은, 바로 그녀의 자세였다. 그녀는 벽에 등을 대고 두 다리 중 한 다리는 곧게 펴고 나머지 다리는 약간 구부린 채 두 손 은 청바지 주머니에 꽂고 있었다. 이것만으로 그녀의 모습을 모두 표현할 수는 없다. 그 순간의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서 있어야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지 명확 히 하는 사람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방에는 전신거울이 놓여 있을 것이었다. 수없이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 사람만이 저런 자세를 구현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호출)인용문에 나오는 여자는 자신을 과시하고 있고, 나 는 자신을 내적으로 몰입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경우가 어쩜 다른 방향의 심리적 흐름인 것 같지만 실은 같은 선상에 존재한다. 특히 대중매체의 범람으로 혼란스러운 이미지들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자아 란 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이미지의 다양성과 동일시된다.현대 사회의 특징은 전통의 단절과 권위의 붕괴, 영역화 된 사회 제도의 해체, 스펙트클의 사회 에서 시청각 이미지 로의 확산 등으로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일종의 성격장애인 나르시시즘 이 발생하게 된다 이윽고 나르시시즘 은 현대사회의 가장 커다란 특징으로 자리매김하며,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나르시스트 들이 된다.3. 나르시르트의 비애「오로지 저 삐삐는 나로부터 오는 신호만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내 성기가 발기한 것도 아마 그때쯤일 것이다. 흥분을 느꼈다. 내 일생 동안 한번도 그런 존 재를 소유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로부터 발산되는 신호만을 수신하도록 운 명지어진 존재를 말한다.」이처럼 서로 무관한 타인에 불과했던 두 사람은 삐삐에 의해 교류의 통로를 확보하게 된다. 삐삐를 건네주고 떠맡게 된 그 순간부터 두 사람은 삐삐의 지배를 받게 되며 삐삐의 호출신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삐삐를 준 사람은 준 사람대로 호출사람은 받은 사람대로 이것이 자신에게 가져다줄지도 모를 새로운 운명의 가능성에 매달리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삐삐에게 부여된 두 가지 상반된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하나가 삐삐라는 기기가 지닌 상호소통에 대한 갈구라면 다른 하나는 신호의 일방향성이다.삐삐는 그 기능상 발신자가 수신자를 향해 일방적으로 신호를 보낼 수 있을 뿐 그 역은 가능하지 않다. 발신자와 수신자간의 이러한 불평등은 참다운 의사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호출기의 불구성을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엔 호출기만 있을 뿐 호출하는 자도 호출되는 자도 실제로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서로는 서로에 대해 부재하며 그들은 구체적인 현존감을 상실한 채 추상적인 신호음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이처럼 삐삐는 연속성인 동시에 불연속성이다. 상호적이어야 할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주인공의 독백과 상상으로 시종되며 호출은 한없이 지연되다 결국 폐기되고 만다. 주인공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호를 보내자 자신의 점퍼 속주머니에서 요란한 수신음이 들려온다. 그는 결국 지하철에서 그녀에게 삐삐를 건네주지 못한 채 상상 속에서만 이를 감행한 것이다. 타자를 향해 보냈다고 믿었던 신호는 다시 돌아와 그의 귓전에서 메아리 칠 뿐이다.「삐삐를 통해 호출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결국 나 자신일 뿐이다.」(호출)나르시스트가 시도하는 경쾌한 탈일상의 모험은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이 삐삐는 바로 타자를 바라볼 수는 있어도 타자에게 진정으로 다가가는 것이 불가능해진 나르시스트의 비애를 말하고 있다.4. 나르시시즘 극복문학은 사회를 반영한다.현대사회는 나르시시즘의 문화 이다. 따라서 그것을 반영하는 문학, 즉 나르시시즘의 문학 이 통신문학{) 통신문학 : 작가와 독자 사이의 소통의 문제에만 국한.편리한 글쓰기 환경의 제공과 수정, 삽입, 삭제가 용이한 전자언어가 언어적 기반.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문학이 단순히 지금의 현실을 반영되었다고 해서 참다운 문학성 으로 모두 인정해 주지는 않는다. 문 검증해 주어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따라서 통신문학은 문학으로서의 한계{) 통신문학의 한계 : 조회수에 의해서 문학의 질이 결정된다는 비판.즉각적인 만족을 요구하는 욕망은 조회수 를 통해 충족되며, 안주하지 못 하는 뿌리없음 은 통신 공간을 부유하는 네티즌들의 삶의 방식이 통신문학 에 반영.에 부딪치게 된다.이러한 통신문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사이버문학{) 사이버문학 : 쓰는자와 읽는자의 소통 의 차원을 극복하고 미적 특수성을 보장하는 문학적 장치 의 문제로 현현.이 가장 먼저 시작해야 할 과제는 나르시시즘 적인 성격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특징인 나르시시즘 속에서 기성작가나 통신작가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지만 사이버 문학이 나르시시즘 적인 성격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다면 새로운 시대의 당당한 문학패러다임이 될 것이다.5. 불확정성「호출」에서는 제목과도 같은 가벼움보다는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불확정적 요소로 가득하다. 먼저 이 작품은 1.호출하는 자 2. 호출되는 자 3. 호출은 없다 라는 서로 모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로 이 작품의 호출은 없다. 그녀를 만난 적도 없고 삐삐를 준 적도 없으며 오직 작가의 상상 속에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작품의 대단원에서야 밝혀진다. 이는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기에 충분하다. 독자는 배반당하면서도 불쾨하기는커녕 오히려 극적인 작품구조에 감탄을 자아낸다. 작품의 마지막까지 호출이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를 학수고대하던 독자의 긴장감은 작가의 한마디 말로 해소되고 만다. 독자가 배반당하는 순간 작품의 막은 내리고 의미는 확정된다.이처럼 사이버소설의 불확정적 공간은 독자의 참여를 유도하여 문학적 효과를 높인다. 대체적으로 작가는 의도적으로 또는 불가피하게 생략된 부분을 만들게 된다. 그러한 부분이 불확정적 공간이 되며 또한 독자가 참여할 수 있는 장이 된다. 아울러 공백은 독자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작품이 극적으로 반전하는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독자를 배반한다. 독자는 배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