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즈벨트의 대소 외교정책:2차 대전을 중심으로Ⅰ. 서론Ⅱ. 루즈벨트의 대소관(1) 30년대초 대소관Ⅲ. 초기 대소 우호정책과 제2전선(1) 제2전선의 쟁점(2) 소련의 외교공세의 강화(3) 전쟁 초기의 무기대여1. 루즈벨트의 무기대여 구상Ⅳ. 결론Ⅰ. 서론많은 사람들이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를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1980년대에 들어서 비대해진 미국의 재정적자와 무역적자 문제가 부각 되면서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는 불문가지의 일처럼 간주되게 되었다. 그렇다면 쇠퇴 이전 과연 미국은 헤게모니적 국가인가라는 의구심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미국이 누린 예외적인 헤게모니를 기준으로 삼기보다는 그 이전 즉 2차 대전 이전까지에 미국이 세계에서 수행한 역할에 비추어 볼 필요가 있다. 디포리(A.W.Deprte)가 말한 것처럼 1900년대에 처음 반세기는 이미 세계정치에서 미국이 균형자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을 여실하게 보여준 시기였다. 독일이 20세기에 들어서 식민지 팽창사업과 유럽제패의 야망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이것을 저지시킨 것이 다름 아닌 미국의 개입이었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국제질서가 미국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데다 미국식의 정치 메카니즘과 조직 원리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합법성을 인정받고 상호간의 교호 작용에 의해 특징 지어진다는 의미에서 자유주의적 질서이다.19세기 미국은 이미 먼로주의) 미국의 제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는 의회에 보내는 교서를 통해,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어떠한 유럽 열강의 간섭도 비우호적인 것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먼로주의는 대서양 세계의 새로운 표준으로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시하고 있었다. 첫째, 미국은 유럽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 둘째, 미국은 유럽 열강의 기존 식민지를 존중한다. 셋째, 미국이 승인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 대한 유럽 열강의 식민화를 불허한다. 넷째, 라틴아메리카 공화국들을 예속시킬 목적으로 개입할 경우 이를 미국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한다. Zbigniew Brzezinski, 김명섭 띠게 되었다.루즈벨트는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부터 이미 소련승인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1932년 11월 대선에서 후버 대통령을 패배시킨 루즈벨트는 취임직후 농업진흥청 행정장(農業振興廳行政長: Farm Credit Administrator)으로 임명된 자신의 오랜 친구 헨리 모겐소2세(H.Morgenthau Jr.)를 불러 소련승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소련승인의 가능성에 관한 대책을 강구할 것을 지시했다. 루즈벨트가 초기 대소협상에서 국무부를 배제하고 자신의 오랜 친구인 모겐소를 선택한 것은 외교정책 결정에서 정부의 정식채널을 배제하고 비공식채널과 개인적 특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최초의 예에 속한다. 루즈벨트가 소련의 승인을 서둔 이유는 국제 정치적으로는 독일과 일본을 견제하여 국제정세를 안정화시키고 국내 경제적으로는 미국의 제조업과 농산물에서 국내 잉여품을 소련에 수출하여 무역을 증진시키자는 것이었다.) 1920년대의 미국은 경제분야에서는 직접적으로 정치분야에서는 간접적으로 유럽의 안정에 기여하였지만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외무역정책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힘에 의한 정치'면에서는 고립주의 정책으로 회귀하였다. 반면에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역할은 유럽에서처럼 현저하게 축소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의 군사적 팽창정책에 의해 동아시아의 지도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경제적 또는 군사적 대응을 하지 못하고 단순히 일본의 중국점령을 '불승인'하는 선에서 소극적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그 세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Andreas Hillgruber, 류제승 역,『국제정치와 전쟁전략』(서울: 한울아카데미, 1996). p.15.그 당시 대공황이라는 미증유의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는 미국인들 가운데서는 소련승인으로 미.소 무역이 증대되면 경제회복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루즈벨트. 헐, 그리고 모겐소 등이 승인을 고려한 것은 소련승인으로 독일과 일본을 동시에 견제하자는 안보적인 차원의 비중이 더 컸던 에 참전하게된 결정적 원인은 1941년 12월 7일 일본해군이 미태평양함대가 정박중인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그 반발로 미의회가 마침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1941년 12월 미국과 영국측의 수뇌부는 그들의 군사 보좌관들을 대동하고 워싱턴 근교에서 회담(암호명: ARCADIA)을 열어 앞으로의 군사전략을 협의하게 되었다. 미국의 마셜(George C, Marshall) 장군과 스타크(Harold Stark) 제독은 연합국의 독일 우선 타도 전략을 재확인했고, 그 결과 영국의 참모부가 제안한 原案 토대로 하여 영미 연합국의 大戰略을 마련했다.) 이 회담의 주된 내용은 ① 독일이 추축국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므로 대서양과 유럽지역을 결정적 戰域으로 간주하고 ② 일본에 맞서기 위해 參戰했지만 독일이 아직도 주요 적국이며 독일의 패배가 勝戰의 핵심사항임은 변함이 없다. 일단 독일이 敗亡하면 이태리의 붕괴와 일본의 패망이 그 뒤를 따를 것이고 ③ 다른 전역에서의 작전에 필요한 최소한의 병력만을 독일에 대항한 작전으로부터 차출한다.이러한 상황중에 소련인들은 독일군 2백개 사단과 싸우면서 수십만의 사상자를 내고 있었으므로, 가능한 빨리 해협-횡단공격(cross-channel attack)을 통해서 제2전선을 서유럽에 개설해 줄 것을 영.미 양국에 간곡히 촉구했다. 이 문제에 대해 미군부는 영국의 탐탁치 않은 반응에도 불구하고 " 우리는 유럽으로 가서 싸울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소련측의 요구에 대해 적극적으로 응답했다. 루즈벨트는 될 수 있는 한 빨리 소련군의 전쟁 부담을 덜어주며 스탈린의 연합군에 대한 불만을 누그러뜨려 대동맹체제가 균열되지 않기를 염원했다. 3월 25일 해리 홉킨스(Harry Hopkins)는 최종적으로 영.미 연합참모부와 처칠이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할 것을 제안했다. 일명 '마셜 메모'(Marshall Memo)라고 불리는 이 계획은 볼레로 작전(Operation BOLERO)으로 1943년 4월 1일에는 적어도, 횡단-해협)장군에게 보낸 서신에서, " 소련 군대는 25개국의 다른 모든 나라들이 함께 싸운 것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추축국 병력을 살상하고 있으며 수많은 추축국의 물자를 파괴했다."라고 강조하면서, " 미국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탄약을 소련에 제공하고 소련군에 가하고 있는 독일의 공군과 육군의 공세를 다른 곳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군사 작전을 계획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이라고 부연했다. 이제 루즈벨트는 소련군의 전투 역량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제2전선을 연기하자는 처칠의 견해에 마지못해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측의 비협조적 태도에 내심으로 불쾌감을 지니게 되었고, 그의 이런 태도의 변화는 소련에 대해 유화정책을 추진하는 구실이 되었으며, 향후 여러 차례의 3 회담에서 스탈린의 의견에 기울어지는 또 하나의 중요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한편 스탈린은 제2전선의 연기에 대 노골적인 불만을 터트리게 되었고, 연합국이 소련의 처절한 싸움을 지켜보면서 獨蘇 양국이 싸움에 지쳤을 때, 최후의 이득을 챙기려 한다고 의심했다. 그래서 그는 서방 연합국의 궁극적 의도에 의혹과 不信의 고삐를 늦추지 않게 되었다. 제2전선의 연기 문제는 결국 영국과 미국간에, 또 소련과 영.미간에 결성된 대동맹의 龜裂을 가져오는 중대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스탈린의 제2전선의 개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불만스러워했다. 이에 루즈벨트는 제2전선의 연기 때문에 소련에 많은 무기대여를 제공하여 스탈린의 불만을 달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였고) 루즈벨트가 스탈린의 신임을 획득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방법 중에 하나는 가식적으로나마 처칠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라고 그의 노동부 장관이었던 오랜 벗인 프랭스 퍼킨이 진술한 있었다. 또한 1945년 1월 20일 그의 4회 취임식 연설에서 루즈벨트는 미국의 철학자인 에머슨의 말을 인용하여 "친구가 되는 유일한 길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얄타회담 후에는 스탈린의 내각을 혁명적인 볼셰비키의 형태와 별개로 그에게는 어마찬가지로 전쟁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술적 해결책이야말로 본질적인 의미를 갖는다. 전쟁에 있어 미국인이 갖고 있는 긍정적 특질은 많다. 군인의 미덕, 국민의 인내력, 지휘관들의 지혜와 기량 등 이 모든 것들이 미국적이고 미국의 전쟁 경험을 일관하는 핵심도 기술적이 것이다. 미국인들에게 무기란, 용기보다 더욱 본질적인 것이다.조지프리드먼, 메르디스 프리드먼공저, 권재상 역 ,『전쟁의 미래』(서울:자작출판사, 2001), p. 45.의회내의 고립주의자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1941년 1월 29일에는 소련에 대한 적의감을 가진 조지 틴캄(G.Tinkham)의원이 에 관한 의회의 청문회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루즈벨트와 헐이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에 유화정책을 시도하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을 퍼부으면서, "그 증거는 소련에 대한 무기금수의 해제"라고 언급했다. 그는 또한 행정부가 독일의 침략을 비난하면서도 어째서 소련의 잘못된 팽창은 묵인하는지를 따졌다. 2월 3일에는 상원에서도 행정부를 공격하는 의원들의 질타가 있었다. 뉴햄프서 출신 토비(Charles W. Tobey)의원은 무기금수 해제에 '경악'을 표시하고 그런 행동이 '소련에 대한 미국의 유화정책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못박았다. 그와 홀먼(Holman)의원은 전략물자를 선적하여 소련과 일본으로 향하는 것을 거론하면서, 행정부의 대변인들에게 "침략국가들에 대해 전략물자를 공급하는 행정부의 정책을 미국인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를 말해 달라"고 요청했다. 여기에 민주당 대변인들은 침묵했다.은 의회에서 격렬한 논쟁 끝에 이라는 이름으로 통과되었고, 고립주의자 상원의원 아서 반데버그(A.Vandenburg)는 "우리는 150년의 전통적인 미국 외교정책을 날려버렸다."고 울부짖었다. 1941년 3월 11일, 루즈벨트는 이 법안에 서명했다. 이 조항에 의거하여 대통령은 "그 나라의 방어가 미국의 방어에 긴요하다고 판단되는 특정한 나라에 대해서 군수품목을 팔거나. 제품을 이양. 교환. 임대. 대
에도 말기(末期) 유통구조(流通構造) 와 막번체제(幕蕃體制)Ⅰ. 머리말Ⅱ. 막번제 유통구조의 특성Ⅲ. 막번제 유통구조의 해체1. 재향상인(在鄕商人)과 삼도의 토이야나카마(問屋仲間)2. 전매제도와 상품유통Ⅳ. 막번제 유통구조의 해체에 대한 막부의 대응Ⅴ. 맺음말Ⅰ.머리말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는 텐료오) 天領 : 직할 영지300萬石과 주요 도시·광산 등을 소유한 최대 영주인 삼도)三都(산토) : 에도(江戶)·오사카(大坂)·교토(京都)의 토이야나카마(問屋仲間)를 통해 막번체제의 상품유통을 통제하였다. 따라서 영지내시장이 작아 삼도에 의존하여야 했던 번(蕃)의 상품유통은 삼도의 토이야나카마를 중심으로 한 유통구조에 제약받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나 18세기 후기 농민적 상품생산이 활발해 짐에 따라 전국 각지에 특산물 생산지대가 형성되면서 재향상인(在鄕商人)이 대두하고 그들은 막번제의 유통구조에서 벗어나 직매(直賣)를 활발히 하였다. 그 결과 상품유통에 대한 삼도 토이야나카마의 독점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삼도의 토이야나카마를 중심으로 독점되고 있는 것을 반대하는 재향상인층의 성장에 대응하여 바쿠후와 번은 영주권력(領主權力)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들을 실시하였다. 바쿠후는 상대적으로 지위가 저하된 오사카(大坂) 대신 에도(江戶)를 중심으로 유통구조를 재편하려 하였다. 번은 전매정책(專賣政策)) 여러 번에서 지리적 조건에 적합한 산물을 생산하여 특산물로서 팔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국산품으로 지정하여 다른 영지에 판매할 때 부과세를 부과한다든지, 번내의 특권 상인과 결탁하여 판매를 독점하는 제도을 통해 번 지역경제의 자립을 꾀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바쿠후는 에도 중심의 유통구조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예산 삭감과 금융정책 등을 실시하여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던 번 영주권력에 개입하였으며, 번은 상품유통에 있어서 삼도 토이야나카마의 독점을 더욱 약화시켰다.토이야 및 가부나카마(株仲間)) 가부나카마는 株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결성한 집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여기에서 「株 1977년, 새출간); 재인용 『日本 近世 商人資本의 硏究』, 朴慶洙, 1997이는 막번체제의 변화와 함께 살펴보는 종합적인 시각이 필요하다.따라서 막번제의 유통구조가 해체되는 과정에 나타난 막부와 번의 관계에 대한 이해와 함께 재향상인층의 등장과 이에 대한 바쿠후와 번의 대응을 살펴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제2장에서는 삼도의 토이야나카마를 중심으로 한 유통구조가 성립되는 과정과 그 성격 제3장에서는 전국적 시장을 상대로 한 재향상인층의 직매와 전매제에 의한 특산물의 에도 직송으로 막번제의 유통구조가 해체되어 가는 과정을 살피고, 제4장에서는 이에 대응하여 바쿠후가 에도를 중심으로 유통구조를 재편하는 과정을 다루려고 한다.Ⅱ. 막번제 유통구조의 특성동북(토오호쿠-東北)의 막부령(幕領)에서 생산된 쌀을 에도로 수송하기 위해 1671·1672년 호상인 카와무라 즈이켄(1618-1700)이 각각 태평양 연안과 동해연안을 거쳐 에도에 이르는 동회항로와 서회항로를 개척하였다. 이에 따라서 다이묘가 장물(쿠라모노-臟物)을 판매할 목적으로 설치한 장물부(쿠라야시키-臟物敷)가 정비되고 오사카 시장은 상품유통의 중심지로 되었다. 그리고 번 영주는 번정개혁을 통해 죠오카마치(城下町)의 토이야를 중심으로 한 유통망을 확립하였다. 그 결과 중계상업 도시는 상대적으로 쇠퇴하게 되었다.한편 상품유통의 발달로 종래 행사와는 달리 본·지점망을 이용한 거래가 이루어져 거래처가 한정됨으로써 상인층 내부의 경쟁이 격화되었다. 이에 상인층은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나카마를 결성하고 토이야·나카가이(仲買)의 계통을 따라 상품을 유통시켰다.도시 토이야는 생산지의 토이야인 카이츠키(買次)·카이슈큐(賀宿)에게 상품 대금을 먼저 지불하고 매입을 주문하였다. 카이츠기 아래 두어진 나카가이와 코가이(小買)는 대부분 선금·판매 등을 통해 카이츠기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므로 나카가이의 화물은 카이츠기에 의해 매입되고 코가이의 화물은 나카가이에 의해 매입되며, 나카가이·코가이의 나카마내 거래는 할 수 없도록 정해한 상품이 만들어져 사치가 조장되고 물가가 등귀하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였다.의 상인 및 직인에게 나카마를 결성하고 새로운 상품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였다.이어 21종목) 쌀을 비롯해 간장·된장 등의 식료품, 목면·견·풀솜의 의류, 기름·종이·초·뗄감 등의 생활 필수품 그리고 술·담배·차 등의 기호품이었다. 1721년의 경우 바쿠후가 물가 안정을 위해 대부분 사치를 조장하고 물가를 등귀시키는 96종목을 통제 대상으로 하였던 것과 달리, 1724년의 21종목은 일상 생활에 밀접히 관련된 것들이었다. 오카자키 테쓰지(岡崎哲二), 「江戶の市場經濟」, 講談社, 1999의 토이야 상인 및 니우케토이야와 소매를 함께 하는 상인에게 조직을 만들고, 에도 이입물에 대한 매입량·매입처·판매처·운송 담당자를 보고 하도록 하였다.그리고 1726년 바쿠후는 특정 업종에 관련하여 생산지로부터 직접 화물을 인수하고 생산지의 가격을 지배하는 15종목) 등유·어유·소면·풀솜·술·숯·장작·목면·간장·소금·쌀·된장·초·종이같은 종류이다.을 취급하는 토이야 상인에게 나카마의 결성과 장부 제출을 요구하였다.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바쿠후는 가격이 형성되는데 있어서 토이야의 역할을 의식하고, 일상 생활에 밀접히 관련된 품목을 취급하는 토이야나카마를 전문 업종별로 만들면서 삼도의 토이야 나카마를 파악하려고 하였다. 삼도의 토이야 나카마는 상품유통에 대한 독점을 바쿠후로부터 보장받으면서 상품대금을 먼저 지불하는 것으로써특산물 생산지대를 장악하고 카이츠기를 정점으로 번의 집하기구를 확립하여 막번체제내 상품 유통을 장악하였다.Ⅲ. 막번제 유통구조의 해체1. 재향상인(在鄕商人)과 삼도의 토이야나카마(問屋仲間)18세기 초 농민적 상품 생산의 발달로 특산물 생산지대가 형성되자 삼토의 토이야 나카마는 특산물 생산지대에 집하기구를 확립하고 농민적 상품 생산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이래 농민적 상품 생산이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됨에 따라서 중앙시장의 기능은 저하되었다.중요한 것은 18세기 중엽이래 중앙시장의 기관련하여 재향상인층 중에는 특산물 생산지대에 확립된 삼도의 토이야나카마의 집하기구내 나카가이 혹은 코가이로 기능했던 이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다각적 경영으로 농민적 상품 생산을 흡수하고 소비지로 직매하면서 재향상인층으로 성장하였다. 재향상인층은 직매를 통해 가격을 인상시키고 생산자 농민에게 정상적인 생산가격을 보장하였다. 이는 재향상인층과 생산자 농민을 결합시키는 원인이 되었다.재향상인층은 다각적 경영에 의해 농민적 상품생산을 지배하고, 직매를 통해 정상적인 가격을 설정하며 생산자 농민과 결합함으로써, 카이츠기를 정점으로 한 삼도 토이야나카마의 집하기구에서 벗어났다. 이로인해 집하기구를 이용해 생산지를 선대적으로 지배하고 상품유통을 독점하던 삼도 토이야나카마와 재향상인층은 대립하게 되었다. 특히 재향상인층에 의한 직매는 각 특산물 생산지대의 성격에 따라 대립의 양상은 다르지만, 대부분 삼도 토이야나카마와의 대립을 격화시켰다. 따라서 재향상인층의 등장으로 이미 삼도의 토이야나카마의 독점) 한편 상품유통에 대한 삼도 토이야나카마의 독점이 무너지는 데 있어서 재향상인층에 의한 직매와 함께 중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토이야나카마 이외 상인들의 등장을 지적할 수 있다. 18세기 후기 도쿠미도이야의 組數가 증가된 반면 전체 인원은 감소된 사실은 다름아니라 토쿠미도이야이외 상인을 통한 상품유통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오카자키 테쓰지(岡崎哲二), 「江戶の市場經濟」,講談社, 1999은 해체되기 시작하였다.대부분 상품생산자이면서 비료상·곡물상·시치야(質屋) 등을 경영하고 선대를 이용해 농민적 상품생산을 지배한 재향농민층은, 분업관계가 도입된 새로운 기술체제하에 생산력을 향상시키고 원료 매입·상품 판매 등의 유통 과정에 관여하며 생산자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재향농민층은 토이야나카마 이외 상인들과 관계를 맺고 소비자로 직매함으로써, 특산물 생산 지대에 확립된 삼도 토이야나카마의 집하기구를 근본적으로 해체시키기 시작하였고, 산토의 토이야나카마와 대립하였다. 막번체제과 '구휼'을 표방한 번 영주가 시장을 정비·장악하고 비자급부문을 구입하는 경우 이외에 농민을 시장으로부터 차단함으로써, 자급 체제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중기 이후의 전매제는 한 여주가 농민적 상품생산의 발달에 따른 막번체제의 구조적 위기와 한 재정의 악화에 대응하여 '御國益'을 추구하려는 것이었다. 특히 칸세이기 이후 많은 번에서 전매제가 실시되었는데 지역적으로 토오호쿠에서는 칸세이기와 카에이·안에이기에, 사이고쿠에서는 칸세이·템포오기와 카에이·안에이기에 집중되었다. 오카자키 테쓰지(岡崎哲二), 「江戶の市場經濟」,講談社, 1999또는 식산흥업정책을 실시하였다.번 영주가 유통과정에서 개입한 전매제도의 목적은 바쿠후에 의해 발행된 정화를 획득하려는 데에 있었다. 번 영주는 산킨코오타이(參勤交代)) 다이묘(大名)이 에도에 가서 쇼군을 알현하고 막부에 출사하던 일을 말함.에 관련된 비용은 물론, 삼도의 상인들로부터 빌린 돈을 갚는 데 正貸를 필요로 하였다.우선 번 영주는 번에 전매기관을 설치하였다. 번의 관리가 전매기관에 포함되어 있기도 하였지만, 주로 어용상인이나 죠오카마치의 유력상인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특산물의 번 영외(領外) 이출을 위해 한 영주는 오사카 등에 전매기관을 설치, 어용상인을 책임자로 임명하였다.번의 영주는 전매기관을 이용해 특산물과 그 판로를 독점하였다. 특산물의 독점에 있어서 번 영주는 전매기관을 통해 특산물의 영외(領外) 이출을 독점하고 토이야에게로 집하된 특산물을 매입하는 등의 방법도 사용하였고, 직접 번 영주가 생산자를 상대로 하여 독점 가격으로 매입하고 선대와 원료 독점에 의해 생산자를 통제하며 특산물을 독점하였다.한 영주는 특산물의 영내 유통을 독점하고 독점 가격의 설정에 따른 이익을 얻는 한편 영외로부터 동일 상품이 이입되는 것을 막아 그 생산이 유지되도록 하였다. 하지만 번 영주는 正貸를 획득하기 위해 직접 판매에 관여하거나 특산물의 영외 이출에 주력하였다. 번 영주는 상인층의 신용과 재력을 이용해 전매 정책의 효과를
1918, the year when world's biggest star had been born, the star leading one nation to peace. Before I get into details about Nelson Mandela, I would like to draw your attention to the word 'philanthropy'. It is a way of showing concern for others by donating things or volunteering. Nelson Mandela was born in a village near Umtata in the Transkei on the 18 July 1918. He was the son of Thembu chief. He earned a law degree from the University of South Afr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