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6
검색어 입력폼
  • 정약용
    머리말☞ 다산이 살던 시기는 대내적으로는 내적으로는 당쟁으로 말미암아 국정이 문란해지고 국가의 재정이 탕진되었으며, 관료 지배층의 부패로 민중의 생활은 그야말로 도탄의 경지에 빠졌던 불안과 혼란의 시대였다. 또 외적으로도 중국 사신의 왕래에 의해 중국 연경을 거친 서구 문화가 국내에 침입하게 되었으며, 이에 의해 조선 사회의 고질적 병폐를 해결해야 하는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이에 실학자들이 조선 자체에 대해 큰 관심을 갖게 되어 역사, 지리 국어 등의 여러 학문 분야에서 종전과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먼저 역사학에서는 한반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이러한 실증적인 사조는 학자들에게 있어서 보다 실증적인 학문을 연구하도록 요구하였고, 당시의 피폐해진 서민과 흐트러진 국가를 위한 새롭고 혁신적일 만한 개혁안을 제안하도록 하였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몰락한 양반이거나 재야학자였다.다산은 이 시대에 실학파의 큰 봉우리를 이루는 사상가로서 개혁론을 주장하였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의 사상과 학문은 일찍이 성호학파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그의 나이 40에서 57세에 이르는 그의 유배생활 동안의 방대한 저작들을 통하여 커다란 결실을 보게 되었다.다산의 사상이 지닌 일반적 특성으로서는 개방성, 종합성, 현실성을 들어볼 수 있다. 곧 그는 조선시대의 정통 이념인 주자학 내지 도학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아니하고 주자학에 반대되는 양명학을 비롯하여 청조의 고증학은 물론이고 서양과학과 기독교사상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이를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며 진보적 입장에서 하나의 통일된 사상체계로서 종합시키는 주체적 창의성을 발휘하였다. 또한 기존의 권위나 관념체계에 구속되지 않고 언제나 현실 속에서 문제를 검토하며 현실을 통하여 그 적합성과 정당성을 확인하였다.이러한 다산의 살았던 시대 배경과 사상에 유념하면서 다산의 생애와 정치, 경제 사회 사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다,정약용의 생애☞ 정약용의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로서 시조작가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다. 1762년 임오회변으로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가 죽었을 당시 아버지 정재원은 시파로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왔다. 바로 이해에 정약용이 출생하였으므로 그의 아명을 귀농이라 하였다. 자는 미용 호는 사암, 여유당, 열초, 죽농, 탁농, 등 많았지만 다산이 가장 보편적으로 쓰인다. 그는 어릴 적부터 천재적인 소질이 있어 10세 때는 그의 시문들을 모아 삼미가집을 만들었다.다산 정약용이 살던 시대는 18세기 후반기로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친 시대로서 국내적으로 누적된 폐습이 고질화되었고, 국내적 정치는 사화나 당쟁의 악순환이 거듭되었고, 국가재정은 탕진되고 농토는 황폐하여 국가의 경제적 기초가 무너져 있었다. 또 대외적으로는 외래 사조가 물결쳐 들어오고 있었던 시대였다.그 생애의 전반기는 영조에서 정조로 이어지는 조선왕조 마지막 문예부흥기라 일컫던 18세기의 후반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생애 후반기는 조선조 봉건사회의 내부모순이 격화하여 홍경래란에서 진주민란을 거쳐 동학농민운동에 이르기까지 「민란의 세기」라 불릴만큼 뒤숭숭했던 19세기의 전반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1783년 21세에 회시에 급제한 다산은 이듬해(1784년) 경의진사가 되어 정조에게 중용을 진강하면서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된다. 이때부터 그에게는 암행어사, 참의, 좌우부승지 등의 훤한 벼슬길이 열린다. 그러나 정조의 극진한 총애가 정조의 죽음을 고비로 다산에겐 오히려 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1801년 신유사옥에 연좌된 다산은 경북 장기를 거쳐 전남 강진으로 유배된다. 1800년 정조의 죽음을 고비로 18년에 걸친 벼슬살이와 18년에 걸친 귀양살이로 그의 생애가 갈라졌다.활동 사항☞ 학문적으로 다산은 전통유학의 세계와 탈전통 유학이 두 세계에 걸쳐 사색하였다. 다산의 넓고 깊은 사상체계는 섣불리 문외한이 넘볼 수 없으리만큼 넓다. 주자학, 양명학, 북학, 서학 등등 여러 세계가 높은 언덕과 깊은 골짜기를 펼쳐 보여주고 있다. 실학사상의 집대성자요, 조선조의 「백과전서파」로 불린 다산의 5백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은 그러한 다산사상의 깊이와 넓이를 입증해주고 있다.다산은 그러나 한갓 현학 박식을 뽐내는 석학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실천실용의 학문」을 지향한 다산은 『진실로 치민 변속 이재의 일에 볼만한 것이 없다면 그러한 학문은 헛된 학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홍이섭은 다산의 학문 전체가 「조선의 현실」을 바로 잡는 데에 집중되었다고 하였다.다산은 대사상가요, 그것도 대단히 비판적인 사상가였다. 그가 본 조선의 현실은 「털끝 하나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는」사회였다. 그리고 그처럼 병든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관리들의 횡포와 부정, 그 속에서 살 길을 잃어가는 농민들의 굶주림이었다. 이러한 현실인식이 다산을 단순한 비판적인 사상가로서 머물게 하지 않고 개혁사상가로 만들었다. 그는 학문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제도의 개혁을 통해서만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그 구체적인 방법도 국가기구 전체를 송두리째 혁신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본 「혁명주의자」의 모습이 아닌, 당장 읍 단위의 지방정치부터라도 고쳐야겠다고 나선 「개혁주의자」로서의 면모를 통하여 보여주었다.사상적 특징☞ 다산은 뚜렷한 현실감과 새로운 것에 대한 개방성을 가지고 당시 온갖 폐습이 만연되어 국가 기강이 몹시 흔들리던 조선 사회를 새롭게 개혁시키기 위해 많은 개혁방안과 사상을 내어놓았고 그것은 그의 유배기간 동안에 방대한 저작으로 편찬되었다.그를 통해 볼 때, 정치사상면에 있어서 다산은 당시의 국가체제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을 주체로 하는 정치사상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이의 구체적 내용으로서 민권의식의 형성, 국민참정권과 민중저항권을 제시하였다.경제사상면에서는 신분적 차별과 경제적 차별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재화의 공평한 분배와 민중의 생존권을 위해 여전제와 정전제를 그 내용으로 하는 토지소유제도와 농업 및 산업의 개혁과 생산력 증대를 위해서 각각의 여러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사회사상면에서 다산은 본래는 민을 위해 마련된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민을 괴롭히는 주범이 된 환자제도와 진휼양곡 수급문제를 그것의 본래 목적에 맞게 그리고 새로운 이상에 의한 새로운 사회의 올바른 제도로 실시되도록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다산의 이러한 다방면의 여러 개혁방안은 당시의 여러 실학자들이 내놓은 사회개혁방안이 그랬던 것처럼 실제로 국가행정에 채택되어 시행되지는 못하였으나 그의 사상은 이후의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다산의 실학 사상의 핵심 개념들1. 민권의식정약용을 제외한 대부분의 실학자들은 민중을 본위로 한다는 민본사상 내지는 위민 의식에 그들 주장의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 내지 의식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요소가 강하게 잔재하여 있다. 그런데 다산은 민본의식 내지는 위민 의식에만 머무르지 않고 민중을 본위로 해야 할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부여해 주어야 하고, 또 민중들의 권리를 용인해 주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다산 자신이 비록 완전한 자유민권 사상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에게서는 근대적 민권 의식의 맹아가 힘차게 움터 나오고 있었다.그가 이러한 민권 의식을 갖게 된 배경은 첫째 유배생활을 통한 현실의 목도, 둘째 삼정의 문란으로 야기된 곤궁한 민중의 생활에 대한 통찰, 세째 실학사상의 발전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2. 국민참정권의 제시다산은 항구적인 민본정책이 종전의 하향적인 권력 구조에 의해서는 관철될 수 없으므로 이를 위해서는 일반 민중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당시의 하향적인 통치구조를 부인하는 혁명적인 견해로서 그는 상향적 통치 체제, 정치계약설, 그리고 입법 과정에의 민중 참여 등과 같은 세 가지의 주장을 통하여 전제적 정치 체제를 부인하고 민중에 의한 정치체제를 간접적으로나마 천명하였다.3. 민중저항권다산은 정치집단화하지 못한 일반 민중들의 요구를 대변하는 과정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민중들의 저항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중이 정치적 주체가 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여전제 등과 같은 새로운 사회질서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이는 단순히 공상적인 이상 사회를 그린 것이 아니라 혁명을 선도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상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는 이를 위해서 부의 재분배와 기존정치체제와 기존통치층의 타도를 목적으로 하는 경제적 평등과 사회적 및 정치적 평등까지를 주장하였다.4. 여전제여에는 여장을 둔다. 무릇 일여의 인민으로 하여금 공동으로 경작케 한다. 자기의 토지와 다른 사람의 토지의 구별을 없애고 오직 여장의 명령에 따른다. 여장은 매일 개인의 농동량을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가을이 되면 오곡의 수확물을 여장의 집에 가져온 다음 그 몫을 분배한다.여전제는 공동으로 경작하고 분배하는 농경 제도이다. 생산된 곡물은 세금과 여장의 녹봉을 제외하고는 모두 경작자의 소유가 된다. 역일수에 따라 곡물을 분배하므로 농민을 근검하게 만들 수 있다. 여전제를 실시함으로써 토지의 이용도를 높이고 백성들을 부유하게 마혀, 풍속을 순후하게 하여 효제를 확립시킬 수 있다고 하여 여전제만이 백성을 부유케하고 유학의 본래이념인 효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어 다산의 실학사상은 토지제도의 개혁을 필수적인 것으로 보았다.5. 산업경영론다산은 그 당시 국가에 있어서 경제 문제 중 농업이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산업 분야, 즉 상업·기술·광산·대외 무역 등도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각 산업이 나아갈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였다.6. 기예론다산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을 기예라는 측면에서 규명했다. 그는 기예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하늘은 금수에게 발톱을 주고 뿔을 주고 딱딱한 발굽과 날카로운 이빨을 주고 독을 주어 제각기 갖고자 하는 바를 얻게 하고 두려운 것을 막게 하였다(그러나 인간에게는 그러한 것을 주지 않았다).…인간은 지혜롭고 교묘한 사려를 가지고 있어서 이로써 기예를 습득하여 자신의 약점을 보완한다.
    사회과학| 2005.05.15| 5페이지| 1,000원| 조회(392)
    미리보기
  • [독후감]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평가D별로예요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최시한『하늘에는 구름 그림자가 있다. 하늘의 구름 그림자는 태양을 가려서 우리에게 그늘을 만들고 있다. 우리는 모두 그 구름 그림자 안에 살고 있다. 모두들 그 구름 그림자에 살고 있으면서 그들은 구름 그림자 속에서 살고 있는걸 모른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 책의 첫 부분은 나를 혼란에 빠지게 만들었다. '구름 그림자라 무슨 뜬금없는 소리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이 책의 주인공 선재는 고2의 남학생이다. 내성적인 주인공은 부모님을 여위고 누나와 함께 둘이서 살고 있다. 그는 고등학교 생활에 적응을 잘 못하고 책읽기와 시를 쓰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그에게 오후 점심 시간에 하늘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구름 그림자가 보인 것이다. 벤치를 뒤 덥을 듯한 어두운 그림자들 속에서 선재는 갑자기 우리들 모두가 구름 그림자 속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선재가 사람들에 구름 그림자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구름 그림자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나 남을 보는 일종의 편견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선재는 이 책의 대부분의 내용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남들의 시선에 거부감을 보였기 때문이다. 한 번은 선재가 체육 시간에 축구를 하다가 어쩌다가 슛을 넣은 적이 있었다. 이때 친구들이 네가 왠일이냐고 말하자 선재는 속으로 아니 내가 슛을 넣으면 이상한가? 모두들 자신들의 기준으로 나를 보고 있다. 라며 화를 낸다.사람들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확인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고 성공적으로 보이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남들에게 좋아 보이는 삶이 행복한 것일까? 그리고 다른 사람의 편견을 수용한 삶이 행복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삶의 행복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인 만족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리고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을 확인하는 것에는 또 다른 함정이 있다. 바로 자신의 재능이나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다. 타인이 내가 그것을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것이고 타인이 내가 그것을 할 수 없다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확인하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다. 왜냐하면 타인은 나를 나만큼 잘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능성은 자신의 판단에서 비롯되어야하지 남의 시선에서 비롯되면 안 된다.『선재가 누나의 가게를 보고 있을 때, 선재 나이 또래의 여학생이 가게에 들어온다. 선재는 그 여학생이 누구에게 선물을 줄까? 하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그 여학생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우습다고 생각을 한다. 자신이 그 여학생에게는 가게 점원으로밖에 안 보일텐데 자신은 그 여학생에게 너무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선재의 이런 깨달음은 어쩌면 우리가 타인을 인식하는 과정이랑 비슷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태어나서 처음에 부모님을 통해 자신을 인지한다. 우리는 부모님의 자식이고, 우리의 존재를 확인해줄 사람은 부모님뿐이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형제 친척 그리고 친구들에게서 우리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와져서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어른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독후감/창작| 2005.05.15| 2페이지| 1,000원| 조회(2,644)
    미리보기
  • [독후감]로마인 이야기4 <율리우스 카이사르(전)>
    로마인 이야기 4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권시오노 나나미 저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포에니 전쟁 이후에 외적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는 로마에 그에 알맞은 정치 체계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이다. 그에 의해 그 당시 700년의 찬란한 문명을 자랑했던 카르타고가 멸망한 것과 반대로 건국 후 700년이 지난 후 로마는 다시 부흥하게 된다. 카이사르는 자기가 보고 싶지 않았던 현실까지 볼 수 있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의 생애를 추적해 보면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지성인이자 애국자였던 그의 면모를 살펴보도록 하겠다.카이사르는 태어날 당시 로마는 민중파였던 마리우스파와 원로원파(귀족파)였던 술라가 서로 권력투쟁을 버리던 시절이었다. 당시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으로 인해 카이사르는 고모부를 비롯하여 많은 친척들을 잃는다. 그리고 내전의 승리자인 술라에 의해 카이사르는 아내와의 이혼을 명령받지만, 카이사르는 그의 명령을 불복하여 술라파 사람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국가 최고의 권력자인 술라의 명령에도 굴하지 않는 그의 생각은 젊었을 때부터 한결 같았다. 그는 아무리 국가의 최고 권력자라도 자기 사생활에 개입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또 카이사르의 행동에는 어머니 아우렐리아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법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는 카이사르의 출세 기반을 민중으로 삼도록 조언해 주었을 것이다. 학자 집안 출신답게 아우렐리아는 상당한 지성인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현실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집정관(로마의 최고 권력자)을 지냈던 사촌오빠도 있었다. 그러므로 민중파이던 킨나의 딸인 아내와 이혼하지 않았던 것은 카이사르의 신념과 어머니의 정치적 견해 때문이었을 것이다.이탈리아 내의 삼엄한 경비 속에서 카이사르는 천신만고 끝에 로도스 섬으로 탈출한다. 거기에서 카이사르는 대학에서 학문도 배우며 당시 찬란했던 그리스 문명지를 여행하면서 보낸다. 술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카이사르는 3년만에 이탈리아로 돌아오지만, 수도 로마의 상황은 카이사르가 떠나기 전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술라의 의해 많은 민중파가 숙청되었기 때문에 당신 로마는 술라파 사람, 즉 원로원파인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같은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었다.카이사르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유쾌한 점은 그가 내가 알고있던 위인들과는 다른 점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보통 위인들의 전기는 온통 굳은 신념과 도덕적 행동들로 가득차 있지만, 카이사르의 행동들은 보통의 위인들의 행동과는 다르다. 그는 악덕과도 무관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돈을 자기 돈처럼 쓰기도 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모든 그의 단점에도 불구하구 많은 역사가들이 카이사르는 어느 시대, 어떤 국가에 태어났었더라도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고 그리고 그 나라의 운명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을 것으로 평가한다는 것이다.카이사르에게 있어서 돈과 여자의 문제는 모든 역사가들에게 의문을 자아내게 한다. 카이사르가 비록 명문인 율리우스 씨족 출생이기 하자만, 카이사르의 집안은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카이사르의 씀씀이가 너무 커서 빚을 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최대 채권자는 그 당시 로마 최대 부호인 크라수스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카이사르와 크라수스의 관계는 보통의 채권자나 채무자의 관계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채무가 조금 있을 때는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얽매이게 되지만, 채무가 많은 때는 채권자는 채무자가 파산하지 않도록 계속 도와 줄 수밖에 없다. 카이사르는 이런 점을 이용해서 크라수스에게서 더욱더 많은 돈을 빌렸고, 그 돈을 여자에게 선물을 하거나 멋을 내는데 썼다. 그때의 빚이 거의 로마 시대 최고의 별장을 몇십 채는 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유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여자의 문제에서도 카이사르라는 인물은 흥미로워 보인다. 그는 마른 체격에 키가 컸다. 그리고 멋을 낼 줄 알고 그의 언행은 유쾌하면서도 고귀함이 풍겨있으므로 많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가 그렇게 많은 여자와 사귀었음에도(로마 시대에는 크리스트교적인 정조 관념이 없었으므로 이혼하는 경우도 많았고 공공연히 애인도 많았다)어떤 여인에게도 원망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저자도 여자이다)는 여자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와 사귀던 남자를 원망하거나 미워하게 되는 것은 그 남자가 자기를 무시할 때라고 한다. 만약 그가 이제는 특별하게 만나지 않더라도 그녀에게 잘해주고 계속 어느 정도의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 여자는 남자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고 한다.카이사르가 30년 초·중반을 수도에서 약간은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의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이룬 업적은 카이사르가 자성적 태도를 갖게 해 준다. 그 당시 폼페이우스는 소아시아에서 눈부신 전공을 세우고, 또 지중해 해적 소탕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 민중은 물론 원로원에서도 그를 마구누스(위대한)폼페이우스로 불렀다. 그리고 크라수스도 스파르타쿠스의 난을 진압하고 많은 재력을 바탕으로 경제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하었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카이사르는 로마 최고 제사장(로마 시대 신들에게 받지는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에 입후보하여 당선된다. 그리고 법무관을 지낸 후 먼 에스파냐 속주(로마가 다스리는 이민족의 땅) 총독으로 부임하여 전공을 세운다.카이사르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또 재미있는 점은 그가 대기만성형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가 먼 에스파냐에서 전공을 세웠다고 하지만 폼페이우스나 크라수스에 비교하면 민중의 지지는 아주 미미했다. 그런 상황에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3두 정치를 실현한다. 3두 정치는 갈리아(현재의 프랑스와 서독의 일부지방) 지방의 속주 총독이 되기를 희망하는 카이사르, 해적 소탕 작전을 마치고 개선식과 자신 휘하의 병사들의 퇴직금을 원하는 폼페이우스, 그리고 소아시아 지방의 경제 재편과 폼페이우스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있는 크라수스의 이해 관계에 의해 3명의 실력자가 손을 잡음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독후감/창작| 2005.05.15| 4페이지| 1,000원| 조회(945)
    미리보기
  • [독후감]로마인 이야기3 <승자의 혼미> 평가B괜찮아요
    로마인 이야기3 『승자의 혼미』시오노 나나미 저서양 속담 중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다라는 말이 있다. 즉 남부러울 것이 없는 상태로 태어난다는 말이다. 기원전 2세기 로마에서 티베리우스 샘플로니우스 그라쿠스 가이우스 샘플로니우스 그라쿠스만큼 이 말에 어울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역사상 그라쿠스 형제로 불리는 이 두 사람의 외조부가 그 유명한 아프리카누스 그리고 조부 또한 한니발을 상대로 노예 군단을 편성하여 굳세게 맞섰던 그라쿠스였다.포에니 전쟁 이후 고도 성장기에 접어 든 로마는 외적으로 광대한 영토를 확장하며 크게 성장하게 된다. 그렇지만 로마의 내장기관, 즉 정치 체계나 사회 제도 같은 것은 로마의 외적 성장에 따라가지 못하게 된다.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는 내장 질환을 겪게 된다. 그 당시 로마의 중산층은 몰락하고, 중무장 보병의 주축이었던 군단 병의 질 또한 떨어지게 된다. 이런 로마의 상태가 당시 그라쿠스 형제에게는 개혁해야할 대상으로 보였다. 그들은 로마의 중산층을 재건하고 싶어했다. 로마의 기둥인 중산층의 재건은 로마의 군단 병의 질의 상승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개혁은 특성상 그 개혁으로 인해 손해를 보는 사람이 생길 수 밖에 없으므로 그 개혁을 반대하는 자를 설득하든가 또는 힘으로 그를 억눌려야지만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라쿠스 형제는 그들을 설득하지도 또는 그들을 힘으로 억누를 권력도 가지지 못했다. 이것이 로마의 정국을 혼란에 빠뜨리게 된 원이이었다.그라쿠스 형제 중 형 티베리우스는 29세에 호미관에 선출된다. 호민관에 선출되자마자 티베리우스는 농지법을 민회에서 성립시켜서 법률로 상정한다. 이 법은 토지의 임차 상한선을 정하는 법이었기 때문에 로마의 지배층이자 재산가인 원로원이 반대했다. 그렇지만 민회가 강력하게 원했기 때문에 결국 법률로 성립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법률의 세부 시행 과정에서 결국 유혈 충돌이 일어났고 이 사고로 인해 티베리우스는 목숨을 잃게 된다.동생 가이우스도 27살에 호민관에 선출되게 된다. 그는 형보다 10살이나 어렸고 그동안 민중파적인 행동을 자제했기 때문에 원로원 의원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호민관에 선출되자마자 형보다 더 과격한 농지법을 민회에서 통과시켜 원로원 의원들을 긴장시킨다. 결국 가이우스는 위기의식을 느낀 원로원 의원들의 원로원 최종 권고에 의해 죽게 된다. 이후 원로원 최종 권고는 그 적법성에서 논란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원로원 최종 권고는 말 그대로 권고의 의미밖에 없는데 신체 불가침권을 가진 현직 호민관을 살해하는 것은 법에 어긋난다는 것이다.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고도 성장기의 로마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워준 행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어느 국가든지 나라의 기둥인 되는 중산층인 몰락한 상태로 번영할 수는 없다. 그 국가의 건정성은 바로 중산층의 건전성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그라쿠스 형제가 제시했던 로마의 중산층 재건 문제는 그라쿠스 형제 이후에도 로마에서 많은 논란이 되었다. 이 문제가 일단락 되기 위해서 우리는 1세기 가까이 지나서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들을 억누를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인물을 기다려야만 한다.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에서 아쉬운 점은 ‘그들은 체제 내 개혁을 단행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라쿠스 형제는 명문 귀족인 그라쿠스 집안 태생이다. 그리고 어머니도 그 유명한 아프리카누스의 딸인 코르넬리아였다. 그들은 호민관을 거치고 원로원 의석을 가진 후, 40이 넘으면 거의 집정관을 되었을 것이다. 집정관이 되면 호민관과는 다르게 원호원 회의장 안에서, 즉 체제 내에서 개혁을 추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사람들은 자신이 속하지 않는 체제나 다른 당파에서 반론을 제기하면 본능적으로 자신을 수비하거나 반대를 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당파나 체제의 사람들에게 이성이 아닌 감정으로 대응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체제 내에서 반론이 제기 되면 그것을 좀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자신과 동질 집단의 사람은 자신들의 체제를 타도하거나 기득권을 덜 침해할 것 같다는 안정감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라쿠스 형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라쿠스 형제는 원로원과 반대 체제인 민회의 의장인 호민관이 되어서 개혁을 추진했다. 그것도 원로원 의원들의 의사를 무시하면서(로마에서는 호프텐시우스 법에 의해서 민회에서 결정되면 원로원 의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법률로 상정할 수 있었다) 말이다. 그것은 로마의 지도층인 원로원 의원들의 위기 의식을 고조했고, 결국 유혈 충돌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독후감/창작| 2005.05.15| 3페이지| 1,000원| 조회(919)
    미리보기
  • [독후감]로마인 이야기2 -한니발 전쟁 평가A+최고예요
    로마인 이야기2 『한니발 전쟁』시오노 나나미 저고통은 사람을 성숙시킨다는 말이 있다. 아픔을 겪은 사람은 생애 대해 좀더 깊고 넓은 이해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고통과 시련은 그 당시에는 매우 힘들고 어렵지만 그것을 이겨내면 그 후의 그만한 보답이 따르는 법이다. 이것을 국가에도 적응시켜 본다면 2차 포에니 전쟁 즉, 한니발 전쟁을 겪고 난후 로마의 영토는 급속도로 확대되어 갈 수 있었던 것도 로마가 한니발 전쟁이라는 시련을 겪어서이다. 즉 로마가 한니발 전쟁에서 많은 패전을 통해 많은 전략과 전술 그리고 전투 경험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누구보다도 로마의 멸망을 원했던 한니발은 그의 목적과는 정반대로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벗어나 아프리카, 소아시아 지방으로 진출하는데 결과적으로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한니발의 행적을 추적해 보면서 왜 그와 로마와의 전투가 로마의 번영에 도움을 주었는지 알아보는 것은 꽤 흥미롭다.로마는 카르타과 총 3차례의 전쟁을 한다. 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반도 남부에 있는 시칠리아 섬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만 생활하던 로마인은 처음에는 카르타고의 해군을 두려워하지만, 의외로 쉽게 카르타고의 해군을 무찌르고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1차 포에니 전쟁의 카르타고군 총 사령관이 바로 2차 포에니 전쟁의 주인공인 한니발의 아버지인 하밀카르이다.포에니 전쟁에서 패한 후 카르타고는 비록 지중해 영해권과 시칠리아 섬, 사르데냐 섬, 코르시카 섬 등을 잃었지만 여전히 강대국이었다. 그 당시 카르타고가 위치했던 북 아프리카 지방은 지금과는 다르게 매우 비옥한 지방이었고 농업 생산만으로도 충분한 조세 수입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문제는 카르타고는 농업 중심의 국내파와 해외 통상 중심의 해외파가 서로 대등한 세력을 가지고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중해 영해권과 많은 섬을 잃은 것에 의해 약해진 해외 통상파는 에스파냐 지방 진출을 통해 해외 통상 영역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 에스퍄냐 지방 진출의 지도자가 바로 카르타고 해외파의 대표가문 한논가문의 영수 하밀카르였다.하밀카르의 사후 그의 후계자가 된 한니발은 우선 에스파냐 남부 지방과 동부 지방을 복속 시킨다. 그리고 에스파냐에서 은광의 광산 수입을 이용해서 11만 명의 용병을 고용한다. 그는 자신의 근거지인 에스파냐와 자신의 모국인 카르타고에 2만씩의 군대를 보내 수비하도록 남겨둔 후, 나머진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반도로 진군한다.그런데 놀라운 점은 로마에서도 아니 카르타고 내에서도 아무도 이 한니발의 전략을 몰랐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한니발은 로마에 쳐들어간다. 바로 수많은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로마에 쳐들어 온 것이다. 한니발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로마는 트레비아 회전, 트레시메노 회전에서 참패를 당한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로마는 8만 명의 대군을 편성하여 한니발의 뒤를 쫓는다. 이 당시 한니발의 휘하에는 그동안 갈리아지방(지금의 프랑스 지방)과 알프스 산맥을 넘는 것 때문에 많은 군사가 죽어서 4만 명 정도의 군사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한니발은 거의 2배 가까운 로마군에게 칸나에 평원에서 대승을 거두어 로마를 위기에 빠트린다.그가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전쟁터를 아탈리아 반도로 고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로마의 동맹시의 이반이었다. 이탈리아 반도 내에 로마는 로마인뿐만 아니라 많은 라틴 부족의 동맹으로 이우어져 있었다. 한니발이 이탈리아 반도를 전쟁터로 잡은 이유는 바로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전쟁을 함으로써 그리고 압도적으로 로마군을 패퇴시킴으로써 동맹시의 이반을 노리기 위함이었다. 그의 전략은 칸나에 회전에서 로마군이 대패를 당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성과를 얻게 된다. 바로 이탈리아 남부의 중요 도시인 타란토, 카푸아 등이 한니발과 쪽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리고 그해 한니발은 시칠리아, 마케도니아와 협정을 맺음으로써 로마를 최대의 위기에 빠트린다.한니발 전쟁에 관해 읽다 보면 어떻게 한니발이 로마군을 상대로 이렇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을까 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그 당시 로마군의 훈련 상태나 군율은 결코 허술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니발은 로마군의 반밖에 안되는 전력을 가지고 로마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이 물음의 대한 해답은 바로 한니발은 적의 주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기병의 기동력을 유기적으로 활용했다는데 있다. 즉 한니발은 그 당시 주력인 중무장 보병의 보조 부대 역할에 머물던 기병을 유기적으로 활용하여 로마군의 주력인 중무장 보병을 포위하여 공격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한니발은 로마군에 비해서 비록 보병은 적을지라도 더 많은 기병을 유지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승리의 요인이었다. 물론 아무리 뛰어난 전략도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능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 그렇지만 한니발은 전략에 있어서 천재였다.최대의 위기에 봉착한 로마에서는 위기에 빠진 국가에서 흔히 보이는 국론 분열이 없었다. 이것은 로마가 2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칸나에 패전을 겸허하게 받아들였고 민중과 원로원(귀족계급)이 서로 하나가 되어서 다시 군대를 편성하고 한니발에게 대항한다. 로마인이 이제 한니발과 전면전을 피하고 그가 소모되기를 기다리는 작전을 구사한다. 로마인들은 회전을 벌였을 때 한니발이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지 이미 여러 회전을 패전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라는 젊은이가 로마에 있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본명보다는 아프리카누스(아프리카를 제압한 자)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고 있다. 그는 한니발 보다 12살 연하이고 한니발 전쟁 첫해부터 사령관의 참모로 한니발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24살의 나이에 로마에서 사령관으로 한니발의 본거지인 에스파냐에 파견되었다. 그는 에스파냐 전선에서 카르타헤나성(에스파냐의 한니발 가문의 서)의 공략과 바이쿨라 회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에스파냐의 카르타고 세력을 몰아내었다. 그리고 아프리카로 건너가 카르타고 본국을 공격함으로써 한니발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카르타고 본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독후감/창작| 2005.05.15| 3페이지| 1,000원| 조회(1,144)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7
7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3
  • A좋아요
    1
  • B괜찮아요
    3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02일 토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7:44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