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First, I am very satisfied myself that I have good opportunity to look back on my four years of my college life through this report, "Campus Life".I cannot give a good grade for my past from my college because I haven't thought about how a college student should spend one's life. But I like to talk about my precious memories from my college rather than my regrets.If someone asks me to tell my campus life, I have several things to say without any hesitation. I will write them in three part below.*First one is both my high expectation and my great disappointment.*Secondly, I took a one year break of my school. During that time, I could be more independent on money from my parents. There were a lot of good working experiences for me too.*Lastly, My After school activity organization member's helps that made me enjoying my college life.◎ I have admitted this university four years ago, in 1999. The reason to enter this school was my older brother's advise, who went to a school very far fwever, From the first day of my college life, I have been experienced great confusion. The mood of that day was very noisy and unorganized. That mood was like illusion to my freshmen life.Many seniors welcomed us and they were enthusiastic to advertise their clubs. They seemed their club was the best in this school and from their passion, I sensed some competition with others. They seemed to go too far with theirs.From that scene I felt uncontrollable freedom at the same time I felt fear from it. I haven't found any force or unity anywhere like high school. Anyway, My stormy freshmen year started with uncontrollable freedom and confusion.It's not each course but the faculty of literature. Therefore I realized my college life that I have always dreamed about, was just a fantasy. I couldn't adapt myself to my freshmen year and I wasn't ready for it. Especially It was very hard to be adapted to this college unless I attended in a certain department.◎ I was very disappointed my college lifnd I learned it needed responsibilities. I couldn't even tell my difficulties and stress from the work. However, everything was greatly helpful to me in both economically and mentally.After I returned to the school, I experienced the world and I was very important and exciting so I continued to adventure the world. I had several part time jobs such as a salesperson at the department store, teacher at a private academy, a tutoring and all kinds of other different jobs. The part times jobs didn't disturb my college life and study time, instead they supported my college life to be abundant in money.◎ If I pick most important and profitable event, that is my group activity. My group is called "an investigation of Traditional culture" and We have been to many historical places and research old vestiges and remains. Of course it is not only good to talk about traditional culture and other researches but also the warm relationship, which people always cares and help each other in our group. Iany people already at the festival. The festival was always exciting and fun with our group members. To make something together gives me satisfaction and I have never forgot our efforts, pains and cheering each other even though the time flows.I have talked my college life in three parts. As I am a senior who leaves a semester in order to graduate, I feel I cannot go to the right point of my reality. But I will not talk about my laziness and my grade because If I talk to about them, I will be able to finish this report.I think this last my vacation will be really precious and meaningful vacation. This class helped me a lot to prepare several special licenses and how to get a job.우선 “대학생활”이라는 주제로 리포트를 준비하게 되어, 나는 지난 4년간의 생활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된 것 같아서 흡족하다.그동안 대학생으로서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단 사실만으로도 그동안의 생활에 후한 점수를 주진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지난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를 말하기보다는 잊을 수 없는, 잊어서도 안 될 소중한 추억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누군가 나에게 캠퍼스 생활에 대해 말하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나는 그것을 아래에서 세 가지로 분류하여 이야기 하겠있는데 그의 고된 대학생활을 지켜본 가족들의 충고로 가까운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나름대로 판단되어진 결과이다. 집과의 거리는 30분 남짓이었으며, 나에게 있어 대학교입학식이라는 것은 행사라는 느낌이 전혀 없는 조용한 의식에 불과했다.하지만 당사자인 나는 입학식을 치루는 순간부터 큰 혼란을 경험했다. 그날의 분위기란 매우 시끄러웠고 산만했는데, 그것은 나의 1학년 생활을 암시해 주는 전주곡처럼 느껴졌다.우릴 반겨주던 선배들은 자신이 소속된 과와 동아리에 대해 열광적인 홍보를 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이 대학 최고의 그룹인 듯했고, 자신의 것에만 열중하는 그 모습은 마치 다른 것과의 경쟁을 단적으로 보여줬으며, 자기 것에 대한 지나친 옹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말이다.나는 그분위기에서 무언가 제어할 수 없는 자유로움과 동시에 근원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고등학교에서 봐왔던 통일성이나 강압적인 분위기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찌됐건 이런 혼란스럽고 주체 못할 자유로움에서 나의 1학년의 파란만장한 대학생활은 막을 열게 되었다.나는 그동안의 과 입학이 아닌, 학부제의 첫 시행이었다. 따라서 그동안 생각해왔던 대학생활은 환상이었음을 깨달았다. 학교에서도 1학년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부족했으며, 특별히 한 과에 소속되지 않은 이상, 적응하기란 매우 힘들었다.그 당시의 부적응과 환상이 깨져버린 대학생활에 회의를 느꼈고, 나는 휴학을 단행하게 된다. 나는 곧 사회생활에 뛰어들게 되었는데, 나의 첫 직장은 주택은행본점의 사무직이었다. 1년간의 사회경험은 대학생으로는 느낄 수 없는 많은 업무지식을 알도록 해주었고, 대인관계의 중요성과 함께 책임감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느낀 고충과 스트레스는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어찌됐건 그것은 나에게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큰 경험이 아닐 수 없다.사회경험의 흥미와 소중함을 안 나는 복학한 이후로도 백화점의 시간제 판매원, 학원 강사, 과외 등등 수많은
개인주의, 비순응주의, 묵시록적 기대18세기 대부분을 통해 인간은 대부분 엄격히 규제되고 근본적으로 불변하는 세계에 사는 하나의 제한된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이 세기에는 (급진적 혁신에 대한 불신, 여러 시대를 통해 인간의 상식에 의해 성립된 선례에 대한 존중 그리고 정치, 지식, 도덕, 예술에서든 달성할 수 있는 목표를 설정하고 극단을 회피하라는 충고에 부합하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다양한 체계들이 대두되었다. 이 시대에 많은 훌륭한 문학작품들은 인간 종족의 한계를 넘으려는 오만, 즉 인간의 열망을 공격하는데 합류했다. 포프는 “인간의 기쁨”에 대해 「인간론」에 서술하기를, “인간의 한계를 넘으려고 생각하지도 행동하지도 않는데 있다”고 했다.자유기업과 혁명적 희망이 싹트던 시대인 낭만주의 시대는 또한 근본적으로 개인주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철학자들, 시인들이건 간에 모두 인간의 잠재능력과 인간 고유의 목적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유럽 낭만주의의 많은 특징적 사상을 발생시킨 독일 칸트 이후의 철학에서는 인간의 정신을 “주관” 또는 “자아”라고 불리던 그때까지는 오직 신의 절대적 특권이던 다양한 기능을 맡게 되었다. 두드러지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이미 창조된 세계를 반영하는 거울에 불과한 것”으로 여겼던 18세기의 중심적인 개념이 거부되고, 그 대신 인간의 정신 자체를 “그것이 지각하는 세계의 창조자”라고 보는 새로운 개념이 대두되었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새로운 시의 창시자들도 “인간정신은 그 자신의 경험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블레이크에게 있어서 정신이란 그것이 물질세계를 거부하기만 하면 자신의 적절한 환경을 창조할 수 있게 된다고 했고, 코울리지와 워즈워스에게 있어서 정신이란 밖으로부터 주어진 것과 협력하여 창조한다고 했다. 코울리지는 1801년에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신의 이미지로 만들어진 가장 숭고한 이미지의 신, 곧 창조자의 이미지”로 만들어져 있다고 했다. 워즈워드는 「서곡」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한 위대한 정신의 대리인이기나 하듯창조자와 수용자 모두를그것이 보는 피조물들과 협력하면서창조한다.많은 낭만주의 작가들은 인간의 정신은 이성 또는 상상력이라고 불리는 특수한 기능을 통해 감각을 초월하여 무한의 세계로 접근해 간다는데 동의한다. 워즈워스는 그의 서곡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드러내준 상상력의 섬광에 대해 서술하면서 아래와 같이 단언한다.우리의 운명, 존재의 심장과 고향은무한과 함께하며 오직 거기에만 있다.결코 사라지지 않은 희망과 함께노력, 기대 그리고 욕망..앞으로 영원히 있을 것과 함께 있다.인간은 그의 한계를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그의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무한하고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세우려고 주장한다. 워즈워스는 독특하게 더 나아가서 “투쟁의 표제 하에서 영혼은 전리품이나 약탈품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한다. 그에게 있어서 투쟁적 싸움은 육체적 평온과 도덕적 강인함에서 끝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작가들, 특히 독일 작가들에게는 인간 고유의 운명은 “끊임없는 활동”이 된다. 이런 견해는 얻을 수 없는 것을 추구하는 괴테의 파우스트로 집약될 수 있다. 일상적인 도덕적 한계를 이탈하지만 이 유한한 세계에 의해 제공되는 그 어떤 가능성에도 비굴하게 만족하지 않는 그의 만족할 줄 모름으로 인해 구원을 얻게 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셸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의 무한한 동경은 “별을 향한 나방의 갈망”으로 당시 영국문학에서 되풀이 되는 주제였다. 블레이크는 “인간은 만사를 다 이룰 때까지 만족할 수 없다.”고 선언했고, 셸리의 「알래스터」와 키이츠의 「엔디이언」은 모두 정의내릴 수 없고 다다르기 힘든 목표의 탐구를 표현했다.당시의 예술론을 보면 비평가들은 제한된 의도를 완전히 성취하려는 신고전주의의 이상을 거절하고 예술가의 실패가 그의 목표의 원대함을 입증해 주는 “미완성의 영광”을 옹호한다. 낭만주의 작가들은 계획적으로 그들 자신을 그들의 위대한 선배작가들과 경쟁하는 입장에 두었으며 시어, 운율법, 구상에서 대담한 실험을 했다. 긴 시에서 새로운 방향들이 개척되었으며 불과 수십 년의 기간 동안에 새로운 조직과 스타일의 원리에 구성된 놀랄 만큼 다양한 형식들이 생산되었다. 블레이크는 상징적인 서정시와 환상적인 예언시들을, 코울리지는 뇌리를 떠나지 않는 죄의 서정적 이야기체와 보답인「노수부」를, 워즈워스는 서사시 같은 정신적 자전시를, 키이츠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속에 있는 양립할 수 없는 갈등을 다룬 일련의 위대한 「송시」를, 바이런은 유럽 문명을 풍자적으로 개관한 시 「돈주앙」을 썼다. 작품에 대해 말할 때 셸리가 돈주앙을 두고서 “전혀 새로운 것이면서 동시대와 관련이 있는 어떤 것”이라고 한말을 옮길 수 있다.신고전주의의 대가급 문인들은 전형적으로 인간을 하나의 조직된 사회, 대개는 도시사회의 구성원으로 다루었으며 작가는 스스로를 그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로 여겼다. 그 사회의 최고 규범은 곧 작가가 대변하는 규범이었으며 작가는 사회를 청중으로 삼아서 발언하였다. 이에 반하여 낭만주의 작가들은 그들의 개인적인 비전을 넓히기 위하여 일부러 사회로부터의 고립을 자초했다. 대작으로 구상을 하여 「은둔자」라는 제목을 붙였던 작품에서 워즈워스는 스스로를 묘사하기를 “신성한 은거지를 지키고 있는 개인의 정신”이라는 주제를 놓고 “고독하게 사색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긴 것과 짧은 것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워즈워스의 시에는 “단 하나의, 고독한, 혼자서, 외로이”등의 단어가 하나의 일관된 중심사상이 되어있다. 그의 상상력은 흐릿한 배경 속에서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단 하나의 인물이나 물체가 갑자기 출현함으로써 발동되는 것이 보통이다. 코울리지 그리고 바이런과 셸리는 한층 더 두드러지게 그들의 작품에서 스스로 사회를 등졌거나 혹은 사회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고립된 외로운 주인공들은 묘사하였다. 빅토리아 조와 현대의 많은 작가들에게 단골처럼 된 유형이라는 주제, 그리고 고향땅에서고 일반사회에서고 혹은 현대세계의 어느 곳에서고 영혼의 안식처를 찾지 못하는 폐적된 정신이라는 주제를 문학에 도입한 시인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그런데 외로운 낭만적 비순응주의자는 흔히 큰 죄를 지은 죄인이기도 했다. 당시의 작가들은 신화나 전설이나 역사에 나오는 무법자들인 카인, 사탄, 파우스트, 방랑의 유대인, 혹은 위대하지만 흠이 있는 나폴레옹에게 매혹되어 그들에 관한 글들을 썼으며 그들의 작품에 나오는 수많은 악한들 내지는 주인골들은 모델로 삼았다.코울리지의 노수부에서는 죄를 짓고 버림받은 자가 공동생활체에 대해서 그가 지은 죄를 깨닫고 뉘우쳐 다시 사회질서 속으로 복귀하게 되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바이런을 비롯한 많은 작가들의 작품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그리고 셸리의 위대한 시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층 더 명성이 자자한 낭만적 영운은 아마 희랍신화에서 나운 프로메테우스일 것이다. 그는 스스로 신 자체를 거역하는 입장에 섬으로써 사탄과 더불어 비순응주의의 최고봉의 지위를 나누어 갖지만, 그러나 인류의 적이 아니라 옹호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사탄과는 다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끝없는 야망과 개인의 정신력에 대한 신뢰 사이의 낭만주의적 결합이 인간의 궁극적 희망을 문학적으로 다루는 데보다도 더 잘 나타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프랑스 혁명이 그에 동조한 많은 사람들에게 유대교와 기독교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천년에의 기대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이”하고 1824년 로버트 사우디가 말했다. “프랑스 혁명의 기억이 어떠한 것인지를 또 그 문턱을 막 넘어서고 있는 사람들 앞에 펼쳐지고 있는 듯이 보였던 환상의 세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상상하거나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노릇이다. 낡은 것은 모두 사라지는 듯이 보였고 사람들은 인류의 재생만 꿈꾸었다.” 사우디의 이 말은 워즈워스, 코울리지, 해즐리트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이 혁명에 대한 그들의 초기 열정을 묘사할 때 사용하던 말처럼 다분히 성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이 영국에서 특히 급진적인 신교도들에 의해 어느 정도 지지를 받았는지를 반영한다. 그들은 마음속에서 성서의 예언을 모델로 하여 프랑스 혁명을 그려보고 있던 것이다.성경은 인류가 처음에는 천년의 지상왕국 형태로, 그리고 다음에는 영원히 존재하게 될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의 형태로, 잃어버린 에덴 동산의 행복을 되찾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묵시록이 그 최후의 장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역사의 완성은 새로운 예루살렘과 하느님의 어린양 그리스도의 결혼으로 상징된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조세프 프리스틀리를 비롯한 유니테어리언 파 지도자들은 그것이 묵시록에 예언되어 있는 지복천년 왕국에 선행하는 단계라고 생각하여 그 사건을 환영했다. 코울리지와 워즈워즈 또한 그들의 초기 시에서 프랑스 혁명을 묵시록이 예언한 새로운 하늘과 땅에 선행하는 격렬한 예비단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블레이크는 프랑스 혁명과 아메리카 예언시에서 이 두 혁명을 타락한 세상의 마지막 날들에 나타난 묵시록적 징조라고 묘사했다.
18세기 -인간은 엄격히 규제되고 근본적으로 불변하는 세계에 사는 하나의 제한된 존재, 마치 자동차의 부속품과 같은 존재로 인간을 보았다.이 시대에 많은 훌륭한 문학작품들은 인간 종족의 한계를 넘으려는 오만, 즉 인간의 열망을 공격하는데 합류했다. 포프는 “인간의 기쁨”에 대해 「인간론」에 서술하기를, “인간의 한계를 넘으려고 생각하지도 행동하지도 않는데 있다”고 했다.19세기 - 인간 개개인을 완벽한 존재로 보고 인간을 칭송하는 인본주의.혁명적 희망이 싹트던 시대인 낭만주의 시대는 또한 개인주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철학자들, 시인들이건 간에 모두 인간의 잠재능력과 인간 고유의 목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유럽 낭만주의의 많은 특징적 사상을 발생시킨 독일 칸트 이후의 철학에서는 인간의 정신을 “주관” 또는 “자아”라고 불리던 그때까지는 오직 신의 절대적 특권이던 다양한 기능을 인간이 떠맡게 되었다. 두드러지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이미 창조된 세계를 반영하는 거울에 불과한 것”으로 여겼던 18세기의 중심적인 개념이 거부되고, 그 대신 인간의 정신 자체를 “그것이 지각하는 세계의 창조자”라고 보는 새로운 개념이 대두되었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새로운 시의 창시자들도 “인간정신은 그 자신의 경험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묘사했다.많은 낭만주의 작가들은 인간의 정신은 이성 또는 상상력이라고 불리는 특수한 기능을 통해 감각을 초월하여 무한의 세계로 접근해 간다는데 동의한다.인간은 그의 한계를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그의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무한하고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세우려고 주장한다.워즈워스는 독특하게 더 나아가서 “투쟁의 표제 하에서 영혼은 전리품이나 약탈품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한다. 그에게 있어서 투쟁적 싸움은 육체적 평온과 도덕적 강인함에서 끝나는 것이기 때문이다.다른 작가들, 특히 독일 작가들에게는 인간 고유의 운명은 “끊임없는 활동”이 된다. 이런 견해는 얻을 수 없는 것을 추구하는 괴테의 파우스트로 집약될 수 있다. 일상적인 도덕적 한계를 이탈하지만 이 유한한 세계에 의해 제공되는 그 어떤 가능성에도 비굴하게 만족하지 않는 그의 만족할 줄 모름으로 인해 구원을 얻게 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셸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의 무한한 동경은 “별을 향한 나방의 갈망”으로 당시 영국문학에서 되풀이 되는 주제였다. 블레이크는 “인간은 만사를 다 이룰 때까지 만족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18세기는 선배나 선례를 그대로 모방, 19세기에는 그것에 대항.당시의 예술론을 보면 비평가들은 제한된 의도를 완전히 성취하려는 신고전주의의 이상을 거절하고 예술가의 실패가 그의 목표의 원대함을 입증해 주는 “미완성의 영광”을 옹호한다. 낭만주의 작가들은 계획적으로 그들 자신을 그들의 위대한 선배작가들과 경쟁하는 입장에 두었으며 시어, 운율법, 구상에서 대담한 실험을 했다. 긴 시에서 새로운 방향들이 개척되었으며 불과 수십 년의 기간 동안에 새로운 조직과 스타일의 원리에 구성된 놀랄 만큼 다양한 형식들이 생산되었다.비순응주의자신고전주의의 대가급 문인들은 전형적으로 인간을 하나의 조직된 사회, 대개는 도시사회의 구성원으로 다루었으며 작가는 스스로를 그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로 여겼다. 그 사회의 최고 규범은 곧 작가가 대변하는 규범이었으며 작가는 사회를 청중으로 삼아서 발언하였다. 이에 반하여 낭만주의 작가들은 그들의 개인적인 비전을 넓히기 위하여 일부러 사회로부터의 고립을 자초했다.코울리지 그리고 바이런과 셸리는 한층 더 두드러지게 그들의 작품에서 스스로 사회를 등졌거나 혹은 사회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고립된 외로운 주인공들을 묘사하였다. 빅토리아 조와 현대의 많은 작가들에게 단골처럼 된 유형이라는 주제, 그리고 고향땅에서고 일반사회에서고 혹은 현대세계의 어느 곳에서고 영혼의 안식처를 찾지 못하는 폐적된 정신이라는 주제를 문학에 도입한 시인들이 바로 이들이었다.그런데 외로운 낭만적 비순응주의자는 흔히 큰 죄를 지은 죄인이기도 했다. 당시의 작가들은 신화나 전설이나 역사에 나오는 무법자들인 카인, 사탄, 파우스트, 방랑의 유대인, 혹은 위대하지만 흠이 있는 나폴레옹에게 매혹되어 그들에 관한 글들을 썼으며 그들의 작품에 나오는 수많은 악한들 내지는 주인공들을 모델로 삼았다.바이런을 비롯한 많은 작가들의 작품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그리고 셸리의 위대한 시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층 더 명성이 자자한 낭만적 영웅은 아마 희랍신화에서 나온 프로메테우스일 것이다. 그는 스스로 신 자체를 거역하는 입장에 섬으로써 사탄과 더불어 비순응주의의 최고봉의 지위를 나누어 갖지만, 그러나 인류의 적이 아니라 옹호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사탄과는 다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인간의 미래지향적인 희망이 문학으로 나타남.끝없는 야망과 개인의 정신력에 대한 신뢰 사이의 낭만주의적 결합이 인간의 궁극적 희망을 문학적으로 다루는 데보다도 더 잘 나타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프랑스 혁명이 그에 동조한 많은 사람들에게 유대교와 기독교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천년에의 기대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이”하고 1824년 로버트 사우디가 말했다. “프랑스 혁명의 기억이 어떠한 것인지를 또 그 문턱을 막 넘어서고 있는 사람들 앞에 펼쳐지고 있는 듯이 보였던 환상의 세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상상하거나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노릇이다. 낡은 것은 모두 사라지는 듯이 보였고 사람들은 인류의 재생만 꿈꾸었다.” (프랑스 혁명을 경험한 사람만이 다가올 미래를 상상해 볼 수 있다.)요한계시록- 에덴동산의 지복의 세계로 인간은 회귀한다. “새땅과 새하늘”성경은 인류가 처음에는 천년의 지상왕국 형태로, 그리고 다음에는 영원히 존재하게 될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의 형태로, 잃어버린 에덴 동산의 행복을 되찾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묵시록이 그 최후의 장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역사의 완성은 새로운 예루살렘과 하느님의 어린양 그리스도의 결혼으로 상징된다.
공자의 언행을 기록으로 남긴 논어만큼 오랜 세월에 걸쳐 광범위한 독자층을 가진 서적도 드물 것이다. 몇 세대 전만 해도 논어는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은 반드시 읽어야 하는 유일한 공인된 교과서였다고 까지 일컬어졌다. 공자의 지극히 넓고 큰 인간성이 그대로 자연스레 배어 나온 작품이 논어인 것이다. 공자의 생애와 사상을 비교적 간단 명료하게 나타낸 이 책은 일본의 고대사학자인 카이즈카 시게키에 의해 1951년에 쓰여졌다. 그는 경도 학파라는 학파의 지도적 인물로써, 춘추 시대를 고대 그리스 로마의 도시국가와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이점이 첫째로 주류에서 벗어난 관점인 것이다. 만약에 춘추 시대가 고대 도시 국가였던 폴리스와 비슷한 것이었다면, 어째서 그 주장의 설득력을 뒷받침 할 만한 증거를, 예를 제시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는 책을 서론, 공자의 시대, 공자의 성장 과정, 공자와 그의 선구자, 공자의 입장, 정치가로서의 공자, 철인의 죽음 등 7장으로 나누어서 각 장마다 독특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사마천의 공자세가를 공자에 관한 전기 중 최고의 걸작으로 뽑는데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그는 그 책에 대해 비판적인 검토가 불충분한 역사적인 관점에서 수정을 요구하는 부분이 많다고 지적하는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대 도시 국가로 춘추 시대를 보자는 관점은 그 자체가 학계에서 주류로 보기에는 동떨어진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는 시각인 것이다. 지은이가 역설한 도시 국가 안에는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제후, 대부, 선비에 이르는 계급적인 서열이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고, 따라서 그것은 시민으로 구성되는 그리스, 로마의 도시 국가와는 달리 신분적 계급적인 사회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도시 국가를 의미하는 잡다한 용어를 불분명하게 개념정리 없이 사용함으로써 도시 국가의 실체가 불분명해지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도시 국가라는 것이 그리스, 로마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하면 그 점을 명시할 필요가 있겠고, 혹 그것이 중국적인 도시 국가라고 한다면 일반적인 통념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적절한 표현을 써야했다고 생각한다. 또 저자는 공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함에 있어 다소 넘겨짚는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애매하게 결론을 지을 때가 있다. 이런 점이 독자로 하여금 정확한 지식에 대한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날의 공자에 대해 현실 정치에 몹시 강렬한 관심을 품고 있다고 하면서도 정치가로서의 그의 진면목에 대해서는 별로 새롭지 못한 설명으로 일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