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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작가론] 90년대 작가 윤대녕 평가B괜찮아요
    *90년대 작가 윤대녕*Ⅰ. 머리말Ⅱ. 윤대녕이 말하는 90년대 소설의 특성Ⅲ. 윤대녕 소설에 나타나는 이야기1. 존재의 시원(始原)으로의 회귀(回歸)-단편집「은어 낚시 통신」을 중심으로2. 윤대녕 소설에 보이는 재생 신화 모티브 분석 -『옛날 영화를 보러갔다』를 중심으로Ⅳ. 맺음말참고 서적작가 연보Ⅰ. 머리말윤대녕은 8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를 거쳐 90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나왔다. 그가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한 것이 90년 이후이니 그를 일러 ‘90년대 작가’라 하는 것이 조금도 어색하지는 않을 터이다. 그러나 윤대녕의 이름 앞에 ‘90년대 작가’라는 관형어를 붙일 때, 그 관형어의 의미가 단지 90년대 들어와서 활동을 시작했다는 뜻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거기에는 무엇보다도 윤대녕의 소설들이 90년대적 특성을 뚜렷하게 담보하고 있다는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이다. 90년대적 특성이란 무엇이고 윤대녕의 소설들은 그것을 어떻게 담고 있는가를 알아보겠다.Ⅱ. 윤대녕이 말하는 90년대 소설의 특성우선 90년대적 특성을 말하면서 80년대에 대한 언급을 생략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90년대가 어쩔 수 없이 앞선 연대인 80년대에 대한 반동으로 형성되었으며, 따라서 90년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80년대의 본질과 한계를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80년대란 변혁을 위한 열기로 가득 찼던 연대였으며 80년대 문학은 변혁을 향한 열망을 표현하고 구체적인 행동을 촉발하는 것을 자신의 주요한 임무로 삼았었다. 80년대 문학의 성과는 문학이 현실과 동떨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역사와 현실에 굳건히 뿌리박고 있는 것임을 확인시킨 것이었다. 그러느라고 문학의 폭을, 나아가 그를 통한 인간이해의 폭을 지나치게 좁혀버린 것은 80년대 문학의 부인할 수 없는 한계였다.소련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세계사적 변천과 오랜 군부통치의 종식이라는 국내적 요인이 어우러지면서 열린 90년대는 80년대적 틀과의 결별을 가져왔다. 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수상 소식을 접하고서부터 그는, 겉치레가 아니고 진정으로, 곤혹스러워했다.“지금까지 해왔던 작업에 주어지는 상이 아니라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에 대해 미리 책임을 묻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 지금 세기말의 상황은 문학이 근본적으로 변화의 단계에 와 있는 것 같다. 가령, 구미의 경우와 같은 시의 몰락을 예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 쪽에서도 상업주의 바람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나로서는 문학이 원래 요구하는 바의 전통에 매달려 있고 싶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윤대녕은 이른바 ‘90년대 문학’을 대표해서 이상문학상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대표선수로서 그가 보는 90년대 문학은 완전무결한 것일까? “90년대 문학이 80년대가 놓쳤던 문학성을 회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느라고 현실의 일정 부분을 놓치고 지나치게 미학주의로 치달아간 느낌이 있다. 어쨌든 90년대는 80년대에서 온 것인데 너무 단절을 시도한 감이 있다. 그 결과 문학의 틀이 왜소해진 것 같다. 내 개인적으로는 70년대가 한국 소설의 융성기였다고 생각하는데, 그 70년대 소설이 포함하고 있던 전체의 일부만을 90년대 소설이 담보하고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70년대란 소설에 있어서 내용과 형식, 역사와 인간의 변증법적 결합을 보였던 데 반해, 80년대와 90년대는 각각 그 어느 한쪽만이 승한 시대라는 것이 윤대녕의 생각이다. “오해의 소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요즘 발표되는 소설에서 나는 창작욕이 자극되는 흥분까지는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창작자들 서로가 불행한 일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90년대 소설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는 것이 아닐까. 80년대와의 단절이라든가 여성 소설의 붐과 같은 90년대적 특성에는 상업주의의 음험한 음모가 개입해 있다고 파악한다. 그렇지만, 그는 동년배 몇몇 작가들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말한다.Ⅲ. 윤대녕 소설에 나타나는 이야기1. 존재의 시원(始原)으로의 회귀(回歸) 이 아니었으며, 무의미한 삶의 다름 아닌 것이다. 결국, '아득한 미지의 저쪽'에서 보내지는 '통신'은 무의미한 일상을 깨뜨려 주는 신호탄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신호탄에 따라 주인공은 '삶의 무의미에 저항하며' '의미로 충만한 세계'를 생성하고자 하는 도정을 나선다.'사라져 가는 종족' [호피인디언]은 정말 내 재떨이 속에서 순식간에 재로 변하고 말았다.그리고 나서 예기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 그것은 서서히 무서운 갈증으로 변해 나를 짓 눌러대더니 마침내는 나를 '텔레폰'으로 나가게 만들고야 말았다.내 다시금 그 말의 환영에 이렇듯 사로잡히게 될 줄이야!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내 앞 을 질러가고 있는 그 말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다음날 새벽 네시쯤에 나는 불현듯 물 속 같은 잠에서 깨어났다. (강조는 인용자, 이하동일)이러한 도정을 통해서만이 일상과 저항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무사한 일상을 담보 받기 위해 오랫동안 감춰'두었던 본래적인 인간 존재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윤대녕은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만으로 윤대녕의 작품이 새로운 징후로 혹은 90년대의 새로운 경향으로 이야기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유형의 세계는 김동리나 서정주의 작품을 통해서 이미 접할 수 있었던 것들이다.그런데도 윤대녕이 보여주는 이야기가 식상하지 않게 독자들에게 다가설 수 있고, 이전의 모습과 닮아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은 그가 구축하고 있는 세계가 다른 작가들과는 일정하게 구별되는 자신의 색깔로 채색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우리는 끊임없이 시간의 쓰레기를 게워내면서 어디론가 떠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 우리는 모든 걸 뒤에 두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덧 거슬러오르고 있다. 우리의 경과가 시작 된 곳으로, 부활하기 위해, 지금 수만의 은어떼들이 나와 함께 강을 거슬러 오르고 있다. 그래, 우 리는 다시 무언가가 되고 싶다.도로 구기자밭을 돌아나오면서 나는 차츰 내가 걸식하던 땅이 아닌, 보이지 않는,던 그녀가 어느 결에 문밖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그럼 굳이 어디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아니, 갈 곳이 있지. 그게 어딘지는 몰라. 하지만 가야만 하는 거지"모든 것이 포함된 하나의 장소……결국, 이런 결말을 통해 삶에 대한 해석은 필연적이고 논리적으로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임을, 그래서 더욱 새로운 세계를 갈망 할 수밖에 없음을 재차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무의미한 일상, 혹은 삶의 비의는 더 강하게 와 닿고 또한 그 비의를 벗어나고자 하는 환각은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그리하여 삶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회귀하는 과정이며 끊임없이 회귀해야만 하는 존재임을 암시적으로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더하여 이러한 삶에 대한 특이한 접근이 윤대녕의 '문체의 힘'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다는 점도 일정하게 그만이 가진 뚜렷한 색깔을 더욱 현란한 것으로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2. 윤대녕 소설에 보이는 재생 신화 모티브 분석-『옛날 영화를 보러갔다』를 중심으로윤대녕의 장편소설 『옛날 영화를 보러갔다』는 처음 보기에 난해하게 여겨지는 일면을 갖고 있다. 그것은 화자 자신을 잘 아는 어떤 타자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과 누에로 나타나는 죽었던 여자인 유진의 변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일상의 상식적 맥락으로는 해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난해성은 신화적 모티브의 맥락에서 바라보면 일관성 있게 설명될 수 있는 것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 어떤 타자는 바로 자기 자신의 이중 자아였고, 누에로 변하는 유진을 통해서 화자는 재생 즉 거듭남의 체험을 얻은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철저히 개인적 성격을 띠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내면 의식의 황폐함 무의미함을 극복해보려는 노력의 소산인 것이다.삶의 공허함과 무의미함의 원인은 사회와의 관계에 비롯하는 것일 수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노력은 일차적으로 철저히 개인적인 난해함과 모더니즘 기법의 자아탐구를 공유하게 되는 이유이다. 소설의 처음부터 등장하여 형섭 뿐 아니라 독자까지도 의혹에 빠지게 하는 E라는 인물은 결국 결말 부분에 가서야 자아의 하나의 분신에 지나지 않는 타자였음이 밝혀진다.그리고 최근에 와서야 나는 E라는 존재가 사실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숨어 나를 지배하고 있던 또 하나의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내 마음의 배후고등학교 때의 친구이기도 했던 E는 과거의 자신을 찾게하는 현재의 나의 타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 처음부터 역시 의혹의 존재였던 기시감 속에서 보았던 여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고등학교 때 죽은 유진의 현재의 모습일 터이고 동시에 현재 만나는 선주의 타자일 것이다.그러나 한동안 형섭은 E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는 베일에 싸인 인물로 등장하고 좀처럼 정체를 밝혀주지 않았다. 그것은 E가 이미 나와는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그렇다네 나는 지금 거기에 있지만 여기에 있는 거기 에 있네. 반대로 자네는 거기에 있는 여기 에 있는 거지. E라는 이름으로형섭은 현재에 속해 있으면서 거기인 과거를 찾고 있고, E는 과거에 있으면서 현재의 형섭을 찾아와 있다. 이 둘은 공간이 같으면 시간이 다르거나 시간이 같으면 공간이 다른 서로 다른 차원 의 존재들이기 때문에 알아보기 어렵다. E라는 과거를 아는 존재이기에 형섭을 보다 쉽게 알아보지만 E는 현실에 아무런 힘을 가질 수 없다. 형섭은 그를 알아보는 데 오래 걸렸지만 그를 알아보자 이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바로 안다.그는 이제 바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면 그는 이제까지는 현실에 있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는 여기 있었지만 실은 거기 있는 존재였기에 현실에서의 결혼에 실패하고 방황하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이 한번의 실패 뒤에 형섭은 자기 내면에 있는 벌레 구멍을 통해 과거의 친구의 모습을 한 현재의 자신의 타자를 만나게 된다. 이 이미 달라져버린 두 존재는 어떻게 해서 만남이 가능한가다.
    인문/어학| 2003.07.08| 9페이지| 1,000원| 조회(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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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소진연구] <작가론> 김소진
    김소진 연구Ⅰ. 서론개인사로 침잠했던 90년대 작가들의 야트막한 동산과도, 80년대를 주름잡았던 작가들의 거대한 준령과도 대별되는 능선으로서의 김소진을 황석영, 이문구, 조세희 등으로 대표되는 70년대 리얼리즘의 90년대 후계자라고 이야기한다. 리얼리즘적 작품경향이라고 한다면 문단에서 하나의 유파로 이야기될 수 있을 뿐, 독특하다고까지 말할 것은 없다지만, 80년대라는 터널을 통과한 후 급격한 단절을 경험하였던 90년대 문학이라는 무주공산에서 리얼리즘을 계승한다는 것은 또 다른 도전이었다. 우리가 사는 공동체의 현실에 철두철미하게 뿌리박고, 인간과 역사에 대한 신실함을 견결히 유지하려 했던, 그럼으로써 문학 본연의 소명에 충실하고자 했던 김소진 시도는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빛을 발한다. 그 능선을 장식했던 또 하나의 커다란 특징은 작가가 보여주었던 투박하면서, 친밀한 우리말의 향연을 들 수 있다. 문학수업을 하던 시절 우리말 사전을 통째로 외워버리겠다고 달려들었던 그는 실제로 사전을 한 장씩 씹어먹으며 우리말을 익혔다고 한다.김소진 소설의 시작을 ''아버지''라고 이야기한다.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아버지와 개발독재라는 시대적 배경, 여지없이 무너져가는 아버지의 권위를 바라보면서 느껴야 했던 혼란감은 그의 소설의 모태를 이룬다.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고 끌어안게 되는 그 시점에서 작가는 누추한 민초들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튼튼한 문학적 토대를 구축하게 된다.Ⅱ. 본론ⅰ 김소진의 역사의식 및 소설관(쥐잡기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중심으로)그의 소설의 하나의 특징은 르뽀 형식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가 기자였기 때문에 그가 목격한 오늘날의 우리 삶의 피곤한 현장을 곧이곧대로 재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보면 백병원 앞에서 열사의 시신을 지키며 농성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게 그 예이다. 둘째 한 많은 삶에 대한 남다른 역사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적 사실주의 한 원형을 이루기도 한다.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는 그만의 특이것은 역사에 대한 또 하나의 시각, 즉 단선적 인과적 역사를 거부하고 역사의 반복과 재생을 드러내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쥐잡이」에서 회상을 통한 서술 속에서 역사적 사건들을 공간적으로 중첩시켜 재현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그는 일회적인 역사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중첩되어 기능하는 역사들을 해석한다...질기디 질긴 잠꼬대를 푸닥지게 쏟아냈다."저놈 잡아라..적이다 적..난 시민이야..문 좀 열어 달라고..나 좀 ..헉헉..내게도 열어줘..아으..""제발 그만둬, 이 바보 멍충이야. 열리긴 뭐가 열렸다는 거야. 다 닫혔어, 다 닫혔다구."..........열린 사회와 그 적들, p82아는 자에게만 의미가 있는 '열려있는' 사회를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열린 사회라고 말하면서도 내부로부터 견고하게 닫혀있는 사회는 밥풀때기들에게는 또 하나의 억압으로 다가온다. 김소진은 비판적 시각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계급적 관계를 폭로하려 했지만, 피지배계층 내부에서도 발생하는 보다 견고한 권력적 계급 관계를 확인하고 말았다. 이데올로기가 은폐하려고 했던 것은 지배-피지배의 권력관계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다양한 관계, 사람들마다의 고유한 삶이었던 것이다.이러한 문제의식은 김소진의 또다른 역사의식을 환기하는데, 그것은 회상을 통해 과거를 현재화함으로써 회상을 수행하는 주체가 하나의 역사적 정체성을 획득하는 과정이 그것이다. 초기의 '단 한마디의 현재형도 용납하지 않는 철저한 과거형 일변도의 글쓰기'는 그의 주요한 서술 기법이며 이러한 문체적 특질은 기법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 현대사의 깊은 굴곡을 꼼꼼히 훑고 지나는 도구가 된다. 소설 속에 재현된 '6.25', '80년대의 민주화운동', '70년대의 유년' 또한 생경한 구호나 이념에 휩쓸리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소한 한 개인'의 기억을 통해서 전해지기 때문이다. 김소진 소설에서 기억하기는 곧 글쓰기이다. 그는 소설을 쓰면서 기억하고, 기억하면서 , 아버지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나'가 말을 하기 시작하고,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운명에 빠지고 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선존하는 역사를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렇듯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는 일이 이야기하기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라면 쥐는 현재 민홍의 삶을 위협하는 영악한 짐승으로 제시된다. 일 년 전 아버지의 가게에 나타나 아버지를 극도의 긴장 상태로 몰아가서는 급기야 아버지의 운명을 재촉한 그 쥐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사실 아버지와 쥐의 인연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쥐는 아버지의 삶에 여러 번 개입한다. 6.25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는 거제도 수용소에서 한 마리의 흰쥐를 길렀고, '남이야 북이냐' 하는 이데올로기의 선택 상황에서 '헛것'과도 같은 흰쥐를 쫓아 남한을 의미하는 복도로 내려서고 만다.내이가 왜 그랬겠니? 여기 한번 나와 있으니까니 못 가갔드란 말이야. 어딜 간들 하는 생각 때문에 도루 못 가갔드란 말이야. 기거이 바로 사람이야. 웬 쥐였냐고? 글쎄 모르지. 기러다 보니 맹탕 헷것이 눈에 끼었는지두. 언젠간 돌아가갔지 하며 살다보니.. 암만 생각해봐두 꿈 같기두 하구.. 기리고 이젠 모르갔어.. 정짜루다 돌아가구 싶은겐지 그럴 맘이 없는 겐지.. 늙으니까니 암만해두.쥐잡이, p28--모르지 맹탕 헷것이 눈에 보였는지두.아버지의 늘쩡한 목소리가 귓전에 와 달라붙었다. .. 불끈 쥐어본 주먹에는 연탄집게가 알맞춤하게 들어 있었다. 왠지 느꺼운 감정이 밀려오면서 저만치서 채 시작되지도 않은 겨울의 출구가 보이는 듯했다. 그쪽은 맨발이었다..............쥐잡이, p31아버지는 자신의 선택이 '헛것'과도 같은 흰쥐 때문이었다고 변명한다. 이때, 6.25에 대한 역사화는 이데올로기적 색깔론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의 '흰쥐'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실체가 없는 허상, 그것이 그를 몽환적인 상태에 빠지게 만든 것이며 그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선택을 가장한 정강요된 기억은 폭력을 유발하면서 사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내고 과거의 진실을 왜곡하고 말았다. 이때 과거는 개별적인 삶의 파편으로 제시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파편들이 암시적으로 남겨둔 보편적인 역사적 사실과 힘에 의존하고 있다. 역사라는 것이 철저하게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전개되었으며 '사소한 개인'의 삶은 그 역사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상식으로부터 김소진의 역사서술도 자유롭지 못했다. 게다가 기억 상실의 두려움과 잘못된 재현이라는 두 개의 억압에 사로잡히면서 '기억을 쫓아 글쓰기'는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ⅱ.작품 속의 배경과 인물들김소진의 소설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읽어보면 한눈에 김소진 소설의 배경은 미아리에서 시작하여 미아리에서 끝난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데뷔작은 1991년 발표된 「쥐잡기」이고 마지막 작품은 1997년 발표된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이다. 둘 모두, 미아리 산동네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며 동일하게 민홍이라는 화자가 등장하고 있다. 이둘 작품 외에도 같은 이름으로 겹쳐지는 주인공이 많이 있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부터 연작소설집 『장석조네 사람들』을 거쳐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에 이르기까지, 그의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핵심적인 줄거리가 바로 그 미아리 산동네이기 때문이다. 물론 반드시 미아리이거나 산동네일 필요는 없다. 고만고만한 소시민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신도시 외곽의 원주민촌일 수도 있다. 김소진은 집요하게도 그런 삶의 시시콜콜한 모습들을 소설로 담아냈다.김소진, 그는 90년대 작가이다. 이 사실이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90년대가 거대한 전환의 시대, 한국전쟁 이후 30여 년을 지속해온 냉전 이데올로기와 대항 이념이라는 틀이 사라지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70년대풍의 산동네 이야기를 그의 소설세계 전체의 밑그림으로 삼고 있다. 김소진은 또다시 저 70년대식의 산동네 이야기를, 그것도 매우 이다. 아버지가 한번도 독립적인 시점 인물로 등장하지 못하고 언제나 아들의 시선에 의해서만 포착되고 있다는 것, 이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작가의 그 어떤 독특한 태도와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언제나 아버지라는 자리, 아버지라는 그 어떤 이념형에 의해 규정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라는 일반명사로만 지칭되는 아버진, 김소진에 의해 그려진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자리를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살아 있는 아버지가 아니라, 죽어버린 아버지, 아버지가 남기고 간 빈자리에 대해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이야기 속의 아버지는 처참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무능력하고 나태하고 심약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지닌 채로 연명해가는 그런 인물이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심사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김소진은 아버지의 임종자리조차 지키지 않는다. 아버지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김소진이 방관하는 아버지라는 상징의 죽음은, 아버지라는 보편적인 상징이 의미하는 정신의 죽음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 죽음 뒤에 남는 것은 저 산동네 사람들로 표상되는 육체의 향연일 뿐이다. 그래서 90년대 작가 김소진의 소설에서 일어나는 아버지라는 역사화된 상징의 죽음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소설사에서 아버지라는 상징은 유린당한 나라이자, 동강난 국토, 이분된 이데올로기로 치환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부재하는 것으로, 그래서 더러는 뜨거운 동경과 그리움의 대상으로, 더러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비극적 영웅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소설 속 화자들이 요구하는 아버지의 자리란, 현재의 비참함 속에서나마 실패한 열정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인 것이다.김소진은 이 책의 서문에서 자신의 소설을 일컬어 아버지를 위한 제문(祭文)이라고 했다. 여기서 제문이란 죽은 아버지를 불러내는 동시에 아버지의 죽음을 글쓰기를 통해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Ⅲ.결론김소진의 소설은 어떤 문
    인문/어학| 2003.07.08| 9페이지| 1,000원| 조회(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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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가론>신경숙] <작가론>신경숙 평가A좋아요
    신경숙 그녀는??Ⅰ. 서론90년대는 여성 소설의 시대였다. 여성적 글쓰기, 문학의 여성화도 이때 본격화됐다.남성, 이성, 사실성이 지배해 온 지금까지의 세계와 결별하기 위해 새로운 시대는 여성, 감성, 허구로 가고 있다. 소설에서 보자면, 논리적 인과구성에 의존한 확실한 플롯은 희미해져 가고, 다양한 서사 기법들에 의한 주제 감싸기 가 더욱 활발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 동안 뛰어난 감수성과 감각적인 문체로 문단과 독자의 집중적 응시를 받아 온 신경숙은, 이런 점에서 보아도 앞으로 그 문학 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꾸며낼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신경숙은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신경숙은 80년대에 등단하였으나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시대 조류의 변화를 통하여 주목받게 된 작가이다. 신경숙은 80년대에 20대로서 살고 있었지만, 그의 문학적 경향은 시대 조류와는 이질적인 요소가 많았다. 90년대에 들어 문학의 관심이 전체에서 개인으로 옮겨짐에 따라 신경숙 문학이 갖는 가치가 부각된 것이다. 등단 시기로서도 그렇지만, 신경숙은 90년대적 특징을 나타내는 작가들 중 선두에 있으며, 대중성과 무관하지는 않으나 자신만의 개성적 작품 세계를 이끌어 가는 작가이다.지금까지 신경숙의 소설들은 지극히 여성적인 작품들로 읽혀져 왔다. 이는 우리 문학사에서 신선하고 감각적인 문체 혁명을 이뤄냈다 할 만한 1960년대의 김승옥과 견주어지는 독특한 문체, 망설임과 속삭임, 주저함, 머뭇거림이 빚어내는 反속도감이 형성한 작품의 분위기와 아득해진 고향과 유년기에 대한 섬세한 회상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녀의 작품들은 늘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하며 유년 시절의 낙원에 대한 회상을 담고 있다. 그의 소설들을 대하노라면 아득히 멀어져 간 옛 고향마을이 떠오르고 매연과 소음에 의해 가려졌던 작고 미세한 소리들이 들려온다.우리의 잊혀진 꿈 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작품들은 그 의미가 독자들 자신의 유연성과 탄력성을 지닌 채로 다양하게 되살아날 수 있게 하는 마력을이 아니라 이야기의 주인공에게만 특별히 적용되기 때문이다. 추억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말하는 시점은 현재이다. 따라서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신경숙은 추억을 과거의 사건 속에서 순차적으로 진행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도 접근한다. 그 과거가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풍금이 있던 자리」에서 찾을 수 있다.추억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경험-추억을 털어놓음에 있어서는 일방적 말하기가 편하고 자연스럽다. 시간적으로 간격이 꽤 있음에도 1인칭 화자가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점은 신경숙의 소설 창작이 어떤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증거이다.2) 개성적인 문체의 글쓰기문체를 언급할 때에는 역시 「풍금이 있던 자리」를 빼놓을 수가 없다. 여기서 보여준 신경숙의 문체의 독특함과 아름다움은 문체의 미덕 이라고 불려질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이 작품에서 그는 쉼표와 말줄임표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주인공의 간절함과 자신의 마음이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못하는 안타까움의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다.이처럼, 공인받는 문체의 특징은 무엇일까?신경숙의 문체는 불분명하다. 이것은 자기 정서에 대한 불 확신의 결과이다. 그는 자신 없는 표현을 많이 하는데, 심지어 자기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도 ……같다 , …… 듯하다 등의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마을로 들어오는 길은, 막 봄이 와서,여기저기 참 아름다웠습니다. 산은 푸르고…… 푸름 사이로 분홍 진달래가…… 그 사이…… 또…… 때때로 노랑 물감을 뭉개놓은 듯, 개나리가 막 섞여서는…… 환하디환했습니다. (……)저, 저만큼, 집이 보이는데, 저는, 집으로 바로 들어가질 못하고, 송두리째 텅 빈 것 같은 마을을 한 바퀴 돌고도…… 또 들어가질 못하고…… 서성대다가……{『풍금이 있던 자리』「풍금이 있던 자리」《문학과지성사》p12~13여기서 작가는 깊은 숨을 쉴 때마다 거침없이 쉼표를 찍고, 그것도 부족한 듯 고 작가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여성작가들이 나름대로 직시한 성적 정체성에서 비롯된 진실을 내면화시킬 수밖에 없었고, 작가 자신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간에 이는 작품 내에서 개별적인 문학적 장치들과 결합하게 되었던 것이다.그녀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깊은 절망과 상처를 체험하고 타자부터 밀폐된 공간 속에 스스로를 가둔 채 그 속에서 자신의 상처받은 삶의 의미를 반추하고 그 삶의 존재론적 심연을 들여다보는 고독한 응시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신경숙 소설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고독한 응시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신경숙 소설의 인물들에게 있어 화자들과의 관계 맺음이란 삶의 막막함과 허망함을 일깨우는 끊임없는 상처와 상실의 체험만을 의미할 뿐이다. (…중략…) 그녀의 작품의 여주인공들이 보여주는 가족에 대한 끈끈한 유대감, 그리고 그 가족이라는 사적인 소집단 밖의 낯선 타자들의 세계에서 겪는 고통스러운 결핍의 체험은 그녀들에게 해소될 수 없는 깊은 상실감을 부여한다. 그러나 신경숙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인물들이 타자들과의 세계에서 겪는 그 상실감은 계속해서 사회적 상실감의 영역으로부터 보다 심층적인 존재론적인 차원의 상실감으로 이동해 나가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녀의 작품에서 사회적 타자성의 영역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 상실 의식의 밑바탕에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본질적인 불완전함, 혹은 이 낯선 타인들의 세계에서 인간이 떠 안을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실존적 불안과 결핍에 대한 작가의 깊은 내면적 성찰의 시선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 박혜경,「타인화된 세계속에서 여성의 자기 전체성 찾기」《문학동네》5호 (199년 여름), p.355.신경숙의 경우 의도적으로 여성이 처한 부당하나 현실이나 억압을 형상화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여성 체험이 글쓰기에 반영되어 타자성 을 구현하되 결과적으로 이 같은 타자성 이 마주치게 되는 비극성을 동시에 주목하였다고 생각된다. 이 같은 본의 아닌 이중 전략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독자들에게 다중적으로워지는 한없이 애잔한 문체로 독자들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퍼지게 하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탁월한 작품이다. 이 외의 점을 살펴볼 때,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을 지금까지 가부장제 하에서 늘상 마녀 로 묘사되어 온 제 2의 여자 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은 점이다. 외모의 아름다움은 물론, 멋지고 윤기나게 살림을 매만지는 솜씨, 게다가 그 동안 관심밖에 놓여 별다른 주목을 맏지 못한 화자에 대한 관심까지 보이는 그녀는 마녀 가 아니라 천사 이다.여자는 마당의 늦봄볕을 거느린 듯 화사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그토록 뽀얀 여자를 본 적이 없었어요. 그 여자에게서는 그때껏 제가 맡아본 적이 없는 은은한 향내가 났습니다. 그 여자가 움직일 때마다 그 향내는 그 여자에게서 조금 빠져나와 제게 스미곤 했습니다.그 여자는 우리 집에 음식을 만들어 온 여자 같았어요. 맵쌀보다 뽀얀 찹쌀로 동근 경단을 만들어 내놓기도 했고, 곤로를 마당에 내놓고 진달래 화전을 부쳐주기도 했어요, 찹쌀로는 그저 시루에 찰떡만 쪄주셨던 어머니. 그 여자는 어느 날 대추 밤을 썰어넣어 찹쌀 약식을 해주었죠.그 여자는 오빠들 속에 섞여 있는 저를 알아봐 줬던 것입니다. 그 여자가 제 인상에 각인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여자가 저를 알아봐 줬기 때문이에요. { 『풍금이 있던 자리』「풍금이 있던 자리」《문학과지성사》p15.그 동안의 많은 작품들이 계모 와 제 2의 여자 에 대해서는 너무도 냉혹했다. 늘 상 그녀들은 간사하고 교활하며 전처의 자식들을 시기하거나 진실한 사랑보다는 돈과 권력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만 묘사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묘사는 가부장제의 사회적 통념을 반영한 것이면서 또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상식에 방향성을 부여하는 힘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풍금이 있던 자리」에서, 어느 봄날 찾아와 스무 날쯤 살았지만 눈이 퉁퉁 부어 칫솔질하다가 스스로 떠난 그 여자 는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여자로 우리에게 각인된다.하지만 작가의 눈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가부장제 사회의 한 쪽에는 나무랄 데 없이 치고 있는 여자 둘을 바라보고 있다. 무릎 위까지 올라간, 그리고 아주 타이트한, 짧은 진치마 아래로 두 여자의 다리는 미끈하다. 인부들은 머리결이나 얼굴이나 가슴은 보지 않고, 미끈한 다리들만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다 바라본다.바닥에 떨어진 공을 주울 때 짧은 진치마는 더욱 아슬히 올라간다. 어쩌면 엉덩이가 보일 듯 하다. { 『풍금이 있던 자리』「배드민턴을 지는 여자」《문학과지성사》p.168.작가는 먼저 얌전하고 평범하게 보이는 아가씨에게도 분명 성적 욕구가 존재하는데, 그 동안 남성 중심 사회에 의해 길들여진 대로 그녀 자신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그저 떨쳐 버리려고 고심한다는 것. 그래서 자신과 사회가 그녀들 의 욕망을 억압하며 그 욕망은 결국 건전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여성을 성적 대상물화하는 남성 인물에 의해 비극적으로 침몰하게 되고 마는 참담한 현실을 조명하고 있다. 물론 현실의 한쪽은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성이 폭발하고 욕망이 창궐하는 시대 로 진단된다. 구닥다리 관습과 구속과 위선에서 벗어나 감성과 욕망과 육체의 해방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환호 소리도 만만치 않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섹슈얼리티의 철학적 의미」《문학과 철학》(동녘, 1999), p190.4. 세계와의 단절'유년 체험'은 무엇보다도 신경숙의 경우, 거의 고정관념적이라 할 수 있을 고향, 특히 '집'이라는 공간과 가족공동체라는 인간관계를 핵으로 이루어진‘태생지’의 세계다. 그러나 체험은 그 자체로서보다는 그것이‘의식’으로 변할 때 그 중요성을 드러낸다. 그녀의 체험이 의식화하는 원초적 출발점은, 일종의 고향 떠나기, 집 떠나기라는 상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민감한 사춘기에 발생한 이 세상과의 단절은 강한 결핍을 가져오고 이 결핍과 거리는 신경숙 소설을 가동하는 주요한 욕망의 에너지로 작용한다. 작가 자신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그리움’은 바로 나와 대상 사이의 거리, 혹은 그 부재에 따른 결핍감과 그것이 촉발하는 욕망의 에너지를 의미한다.『외딴 방』에서 여주인공이 태생이다.
    인문/어학| 2003.07.08| 11페이지| 1,000원| 조회(1,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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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가론] <작가론>성석제 평가C아쉬워요
    우리시대 탁월한 이야기꾼 성석제'97 문학반 여름 작가 탐방- 소설가 겸 시인 성석제와의 만남 -성석제는 재담꾼이다. 아마도 우리는 술자리를 주도하고 있는 어느 입담 좋은 사람에게서 성석제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여러 사람들의 주목을 끌만큼 그의 언어는 재치 있고 또 일상의 자잘한 이야기를 건져내어 재미를 부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소설에서 보이는 그의 말솜씨도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그는 지극히 평범하여 그냥 지나쳐버리거나 무서워서라기 보다는 더러워서 빙 둘러 가는 사람들의 삶을 포착한다. 소설 내의 화자나 주인공, 혹은 주변 인물 등 그의 글쓰기 영역에 포함되는 대부분의 인간 군상들도 허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인지 무협지나 대중소설 식의 형식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 속에는 영웅이 없다.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성석제의 유년시절의 영웅, 마사오는 신화가 아니라 소문으로 탄생된다. 소설은 소문에 가려진 마사오의 진면목을 추적한다. 추적과정은 마사오를 있는 그대로의 하나의 인간으로 다시 보는 작업이고, 이러한 영웅들은 대부분의 사람처럼 허점에 의한 희극도 있고 슬픔도 있다. 그러나 비록 마사오가 영웅소설이나 고망에서 보이는 영웅에서는 멀어져 있지만, 사람들은 그를 신화처럼 기억하고 그런 신화는 마을 사람들의 의식 세계에 침투한다. 그것은 아마도 마사오의 신화 혹은 뜬소문이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재미를 부여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따라서 성석제의 작품을 읽을 때는 먼저 소설의 재미를 느끼면서 한바탕 웃어 제낀 다음에 숨을 고르면서 잠깐 과연 이 소설이 왜 재미있는지 그 숨겨진 뜻을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소설은 메시지가 없어 보이지만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그 속에서 하나의 포착물을 발견할 수 있다. 성석제는 우리를 웃기지만 실없는 웃음만으로 간과할 수 없게 한다. 그것은 그의 소설적 재미가 인생의 비극에서 출발하여 냉소를 거친 다음에야 획득된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이 점은 그가 문세히 보여준다.87년 문학잡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여 실질적인 작품활동이 10년도 채 못되는 작가에게서 우리는 하나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것은 아마도 성석제의 문학이 우리에게 쉽게 접근해 오고, 쉽게 접근한 사실과는 달리 만만치 않은 화두를 던져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성석제표 소설1) 성석제 소설 쓰기의 전략적 선택성석제의 소설집에 있는 8편의 소설 중 자전적 소설로 보이는 「홀림」을 제외하고는 다른 인간을 찾아나서서 쓴 소설들이다. 성석제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노름꾼, 술꾼, 춤꾼 등과 같은 사회에서 지탄받는 깡패와 건달로부터 시작해 50년 동안 남편을 기다리며 늙어가는 청상 과부의 이야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이것은 성석제가 고려 시대의 패관(稗官)처럼 저잣거리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은 성석제의 기질에서 근본적으로 기인하겠지만, 한편으로는 90년대 소설의 전반적 주류인 내성화와 개인화에 맞서는 성석제 소설쓰기의 전략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이 중 몇 편만 들여다 보자.「꽃 피우는 시간」은 세계 최고의 도박사라는 피스톨 송의 초청 강연을 녹취한 기록 형식으로 되어 있다. 피스톨 송은 강연을 통해 “인생은 노름이다”라는 전제 하에 노름에서 따는 열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그것은 “걸면 안되는 것을 걸지 말라”, “운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라”, “노름에는 왕도가 없다”, “언제든 튈 준비를 하라”, “노름은 자기 책임이다” 등이다. 과연 피스톨 송의 노름 철학은 심오하다. 만약 이 정도에서 소설이 끝났다면 한 편의 노름 안내서로 끝났을 공산이 크다. 성석제는 이 지점에서 일갈(一喝)을 마련한다. 그 강연이 열렸던 K시에서는 일상적으로 세계 최고의 전문가들이 강연을 하고, 또 그것을 구태여 애써 듣고 기억하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화자는 K시에 사는 친구에게 피스톨 송이 거물이 아니냐고 묻자, 화자의 친구는 “그게 무슨 거물이야. 내가 거물이다. 우린 다 거물이다. 인생은 거물이다”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한국적 풍토 혹은 정 새파란 꽃뱀에게 휘말려 창피를 당하고 만다는 이 소설은 나름대로의 제비족의 개똥 철학을 내세운다. 마음먹고 계획적으로 덤벼들면, 아무리 날고 기는 왕제비라도 초짜 꽃뱀에게 당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천하에 없는 열녀라도 제비가 마음먹고 달려들면 무너지게 되어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건 춤판에서의 이야기다. 또 다행인지 불행인지 춤판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이런 개똥 철학이 오묘한 진리를 말해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또한 비도덕적 삶을 사는 인물에게 박수를 쳐주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성석제는 이런 종류의 소설을 통해 산문 정신의 심각성 자체를 조롱하고 풍자한다. 성석제가 제기하는 질문은 이를테면 ‘소설은 심각해야 하나?’인 것이다. 그 질문의 밑바탕에는 ‘삶은 심각한가?’가 깔려 있다. 사실 삶은 심각하겠지만은 삶을 심각하다고 말하는 자들의 삶에는 얼마나 허위가 많았던가. 냉소적이긴 하지만 성석제의 방법론은 나름대로의 설득력이 있다.2) 성석제의 소설 -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가 있는...성석제의 소설이 이렇게 웃기는 인간만을 등장시켜 풍자적으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홀림」에서 가장 감동적인 소설 「협죽도 그늘 아래」는 그것을 웅변적으로 말해 준다. 이 소설은 칠십이 넘은 한 여자의 인생을 압축해서 서정적으로 보여 준다. 가시리(佳詩理)라는 가상적인 공간으로 시집온 여자는 ‘협죽도 그늘 아래’ 반평생을 앉아 있다. 그녀의 남편은 시아버지와 시숙들을 살리기 위해 자원 입대했고, 그리고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여자는 반가(班家)의 법도대로 수절한다. 세월이 흘러도 여자는 ‘협죽도 그늘 아래’ 앉아 있다. 이 소설에서 가부장제 사회의 폐해나 전쟁의 비극성을 떠올리는 것은 부수적일 뿐이다. 본질적인 것은 삶의 허망함이고, 그 허망함 속에서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모든 인간들의 운명이다.성석제는 소설 속에 인간 삶의 다양한 양상을 수집하려 한다. 그 속에는 깡패와 건달과 노름꾼과 춤꾼이, 수절 과부와 은혜를 잊지 않는 가엾은 일본 여인이 있다. 성석제는제의 작품들. 시집 『낮선 길에 묻다』, 『검은 암소의 천국』첫 시집 『낮선 길에 묻다』에서 가장 두드러진 그의 시적 특징은, 그가 소설가로 더욱 알려져 있다는 사실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서사성'에 관련된 부분이다. 이른바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이후의 엽편소설의 전신과도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그의 시는 시선을 집중하는 대상이 있고, 그 대상에 대한 본질, 속성을 탐구한다. 그의 '우화적 수법'의 글쓰기는 치열함과는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야기 안에 내재한 의미를 생각하면 역시 성석제는 뛰어난 이야기꾼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그가 천착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삶과 그 끝, 곧 죽음과 그리고 그 너머이다. 그에게 삶은 여행길로 비유되고 여행길은 다시 낮선 길로 대변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는 '묻는다.' 궁극적인 것에 대한 질문을 통해 성석제는 여행길 위의 낯선 것들로써 자신에게 부과된 절박한 일상의 본질을 탐구한다. 그리고 그는 미처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상황 속에 우리를 놓아둠으로써 새로운 해답의 가능성을 찾아내려는 시도를 한다. 이렇게 볼 때 성석제의 시는 삶에 대해 보다 근원적이며 존재의 근본을 이루는 문제들에 대한 한 여행자의 따뜻한 여행일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출간된 두 번째 시집 『검은 암소의 천국』에서는 그의 여타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작은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는 '그저 그런' 보통 사람들을, 그다지 따뜻하게 묘사한다거나 냉소적으로 본다거나 하는 한 방향으로 보지 않고, 그저 그들에 관해 이야기하며 단지 모습을 제시해 줄뿐이다. 그러한 대상과 형식이 맞물려 그의 시가 보여주는 것은 비극과 희극이다. 그는 인간의 삶을 양면적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 점은 이전의 시나 소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특성이다. 이전의 시집과의 변화 양상을 살펴본다면, '더해진 서정성, 감해진 서사성' 이라 할 수 있다. 지난 6년간 길고 짧은 소설들을 써 오며 그의 서사성은 줄어진 듯하며, 빛나는 서정성은 부각된 것으로 보인다.. 독자의 공감대에 쉽게 포착되는 방식이 이 소설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이야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러한 소재들을 평상적인 눈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내는 시야를 통해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데, 아마도 그것은 작가 특유의 풍자에 기반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는 조화롭지 못한 세상을 잘 단련된 칼과 같은 풍자와 그것에서 유발되는 농담과 웃음으로 해부해내는 것이다. 이런 점이 성석제 소설이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재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재미에 비하여 그러한 풍자가 현실과 연계되는 효과는 반감된다. 그것은 그의 풍자가 구체적인 현실의 구조와 체계의 세밀한 파악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의 한계 상황에 대한 새로운 대안의 모색이 전제되지 않는 풍자는 자칫 푸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소한 것에 대한 관심을 세밀한 관찰력을 통해 구현해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이념이 없는 시대를 돌파하기 위한 성석제의 조력을 읽어낼 수 있다.. 장편 소설 『왕을 찾아서』이 소설은 장원두가 마사오의 죽음을 전해 듣고 지역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기까지의 3일간의 경과를 그린 것이다. 그러나 3일은 장원두의 추억의 힘으로 30년의 세월로 확장된다. 그리고 이 세계의 중심에 군림하고 있는 자가 바로 영웅 마사오이다. 마사오는 지역을 대표하는 깡패이고 그는 소문에 의해 영웅화된다. 그러나 어린 장원두에게 있어서의 영웅은 어른 장원두의 추적과정에서 평범한 인물이 된다. 正史가 아닌 野史의 방식으로 마사오의 여러 면모가 드러나는데, 그에게도 보통 사람처럼 슬픔과 기쁨이 있다 성석제는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고 있는 인간의 삶의 양면성을 농담으로 보여준다. 입담에 의해 잘 단련된 문체는 마사오를 영웅과 범인의 사이에 지그재그로 배치한다. 그래서 결국 작가가 보여주는 것은 웃음과 슬픔이다. 대립되는 양자가 아이러니컬하게도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은 하나의 인간을 내밀하게 이해해가는 가운데 포착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 소설은 다양한 국면을 가지고 있는 인른다.
    인문/어학| 2003.07.08| 5페이지| 1,000원| 조회(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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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가론] 손창섭 연구 평가A+최고예요
    손창섭 연구목 차Ⅰ. 서론Ⅱ. 배경연구1. 1950년대 문학에 대한 견해2. 전기적 고찰Ⅲ. 전쟁과 허무(무의미)의 미학1. 배경2. 증상3. 증상의 예Ⅳ. 소설에 나타난 인물의 유형화1. 50년 초기소설의 유페된 인물유형2. 50년 후기소설의 자기의식 탈피와 인물의 사회화Ⅴ. 손창섭 소설에 나타난 형식주의적 특성1. 문체와 어휘사용2. 구조적 요소3. 구성적 요소Ⅵ. 그 밖의 장편소설Ⅶ. 손창섭 소설의 문학사적 의의Ⅷ. 결론※ 손창섭 연보※ 참고문헌Ⅰ. 서론문학이 인간의 체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할 때, 우리문학에 있어서의 한국전쟁의체험은 여러 측면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문학의 현실 수용이라는 입장에서 한국전쟁으로 인한 생활과 사고의 변화가 1950년대 소설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생각은 너무나 당연하다.한국전쟁 직후의 어두운 인간상과 생활을 가장 인상적으로 그린 작가를 찾는다면 단연 손창섭일 것이다. 손창섭은 일제시대를 거쳐 독립 후의 모습과 전쟁의 폭력을 겪은 작가이다. 손창섭 소설의 배경이라고 볼 수 있는 전쟁은 독립후에 오리라 믿었던 밝은 세상에 대한 동경을 일순에 무너트린 결과를 낳았고 그러한 궁핍과 절망은 손창섭의 소설에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물론 전후를 그린 작가는 많을 것이나 손창섭 소설처럼 전쟁에서 오는 인간성의 상실과 도덕의 붕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장애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으로 전후(戰後)사회의 현실을 냉소적으로 비판하고 잘 그려낸 작가는 드물 것이다. 우리는 이번 연구에서 손창섭 소설에서 나타나는 전후의 모습을 살펴봄을 시작으로 그의 개인적인 작가론에 초점을 맞추려 노력했다. 여기에는 그가 등단을 하게된 1950년대의 한국 소설의 흐름에서부터 전기적 고찰, 소설에 나타나는 형식주의적 특성, 인물 유형화, 전후에 따른 그의 소설의 경향, 그리고 60년대로 넘어가면서 쓴 장편소설을 통하여 그가 지닌 문학사적 의의를 탐구해보려 한다.Ⅱ. 배경연구1. 1950년대 문학에 대한 견해 - 60년대양상은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전장으로부터 사람들이 그들의 살림터로 돌아오고, 폐허로 변한 집터이나마 다시 살아갈 엄두를 추스리게 되었다. 1955년 이전에는 해방 전에 등단한 소수의 기성작가들과 비평가들에 의해 문단이 꾸려지고 있었는데, 50년대 후반기 들어 신인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인력에 허덕이던 문단에 급격한 수혈이 이루어진다.50년대의 소설에서 관심을 쏟아 살펴봐야 할 부분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다. 50년대는 익히 알다시피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이 독재권력을 휘두를 때이니, 만약 소설이 그에 저항한다면 당연히 자유나 민주주의의 문제가 주제로 다루어질 법한 일이겠지만, 50년대의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특히, 이러한 문제는 50년대에 거의 문단을 장악하다시피 한 월남작가들(50년대에 활동하는 전후 세대의 작가들 중에서 월남작가가 차지하는 비중은 숫자와 작품의 질 두 측면에서 거의 절대적이다.)에게서 심각한 문제로 나타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졸고, 「월남작가의 작품세계에 나타난 반공이데올로기와 1950년대 현실인식」,『역사비평』, 1993, 여름을 참조.남북한이 분단된 상황에서, 양쪽은 체제경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자유와 민주주의는 남한 체제의 비교우위를 입증할 수 있는 일종의 내적 동의에 해당하는 것이다. 더구나 월남민에게 있어 '자유'란 삶 자체와 맞바꾼 가치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이 훼손당했다고 곧바로 자유의 회복을 부르짖을 수 없는 것은 그래도 북쪽에 비해서는 낫지 않겠는가 하는 비교우위의 논리가 의식의 다른 한쪽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50년대의 '자유'에 관한 문제는 일종의 딜레마이며, 특히 월남작가에게 이 문제는 여러 모순이 중첩되고 착종된 문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50년대의 문학, 특히 55년을 시작으로 하는 50년대 후반의 문학은 경직된 반공이데올로기가 지배하고, 창작의 자유가 안팎으로 제한되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분단 현실에 대한 자각과 실종된 민주주의 이는... 허연 우윳가루로 죽을 쑤어 먹으면서도 미국유학의 꿈에 부풀어 사는... 어느새 장마는 아니련만 어제부터 내리는 비가 그칠 줄을 모른다.... 방에 있으면서도 전신이 비에 젖는 것처럼 눅룩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 것은 몸뿐아니라 마음이나 영혼까지도 꿀쩍하니 젖어 있는 것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미해결의 장」게다가 땀내와 변기에서 새어 나오는 구린내까지 더 심해지는 것같이 생각되는 것이다. 「인간동물원초」위에서 열거한 예문에서 보듯이 먼지가 풀석풀석 이는 헛간같은 토막집이나, 불 때 본 적이 언제인지 모르는 한겨울의 냉기 어린 방 그리고 언제 먹었는지도 모르는 끼니 등 처절한 생활 공간은 전후 우리 사회의 가난과 궁핍의 정도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특히 그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비오는 날의 우중충한 비내리는 모습, 맑은 날의 먼지와 곰팡이, 교통관계가 단절된 방 등 상황의 무거움은 50년대 전후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무게를 전혀 가질 수 없었던 존재의 가벼움과 역설적으로 대비된다. 이는 단절과 고독과 소외의 시대를 살아가는 황페한 전후 세대의 내면세계의 한 풍경이다.) 김윤정, 손창섭의 소설-나르시즘과 죽음의 문제, 한국언어문화학회, 한양어문, 19952. 증상전쟁의 폭력성과 전후의 모습에서 오는 이념의 허구성과 허무는 인물들로서 결국 시민적 인간성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적 인간상으로 나타나게된다. 허무주의적 인간상이란 의식과 목적을 상실하고 모든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있는 도덕적 가치에 대한 부정의 인간이다.1) 먹고, 배설하고, 자는 일 이외에는 고작 잡담(먹는 얘기와 여자 얘기)만이 공식처럼 날마다 되풀이 되는 이 감방 안에, 마침내는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고야 만 것이다. 오랫 동안을 두고 쌓여온 방장과 주사장 사이의 악화된 감정은 드디어 터지고 만 것이다. 「인간동물원초」2) 훈기에 섞어 배여든 지린내와 구린내를 어쩔 수 없듯이, 젖은 옷처럼 전신에 무겁게 감겨드는 우울을 동주는 참고 견 디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오늘면, 일본 천황을 죽이고 경찰서를 습격하겠다면서 폭탄 제조 계획까지 세운다. 그리하여 자신이 취하는 모든 행위, 이를테면 하숙집의 딸인 노리꼬를 겁탈하여 그가 자살하도록 만든 일마저 일본인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합리화시킨다. 이러한 박도현에게도 존경하는 인물 한상희가 있다. 그녀는 도현의 행동 방향을 교정해주며 도현의 삶의 교사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상적인 인물로서만 설정되어 있을 뿐 진정으로 박도현을 제어해주는 역할을 해주지는 못한다. 이 작품은 `눈물 겨운 넌센스'라고 표현된 박도현의 충동적이고 무모하기까지 한 행위나 독립투사의 아들로서의 그의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을 희화화시키며 나아가서는 신성한 것으로 판단되어 왔던 역사성 자체를 희화화시킴으로써, 흔히 손창섭의 소설세계로 언급되어 왔던 무의미의 강조를 넘어 가치부정의 차원에까지 다다르고 있다.손창섭의 작품들은 특히 전후 절망적 상황 속에서 황폐화되고 불구화된 개인의 삶의 무의미에 대한 가치부여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육체적·정신적 불구자이거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들이며 따라서 그들의 행위는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이성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탐구를 주제로 했던 기존의 소설과는 달리 지금까지는 은폐되었던 인간의 동물성이나 무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초기작에 해당하는 , , 등은 한국전쟁의 충격으로 왜곡된 한국 현실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신적 불구 상태를 상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한편 그의 작품에는 시간을 무의미의 반복으로 보는 상태에서 시작도 종말도 없는 구조와 해결 없는 결말 구조가 나타나기도 하는 데 이것은 결국 삶은 허무하며 행위는 무의미한 것이라는 의식과도 관련된다. 의 동식, 의 동주, 의 지상 등의 삶의 방식은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준다. 미학적으로 볼 때 손창섭의 소설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이외에도 이후의 작품들인 , 등에서 나타나 특징을 찾는다면 사건의 중요성이 약화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작품의 주제를 시현하는 중심적인 사건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전체 이야기를 지배하는 중심적인 사건의 부재는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는, 또는 문제는 있지만 그 해결은 없는 독특한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 낸다.이런 현상은 초기소설의 주인공들이 대체로 적극적인 행동의 의지 결여 양상을 보이는데 이를 두 가지 경우로 다시 알아보자.첫째는 보통 사람들에 비해 상황에 대응하는 태도가 현격히 소극적으로 비쳐지는 경우이다. 「사연기」의 동식과 「비오는 날」의 원구가 여기에 속한다. 동식은 남편의 학대와 옛 애인의 비극적 운명 앞에 속수무책이고 원구도 동욱, 동옥 남매사이에서 아무런 태도도 취하지 못하고 자책에 빠진다.그들의 소극적 행동방식은 그들의 성격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처한 상황의 성격과 그 상황에 대한 주체의 인식 태도가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이들이 나름대로 살아보려는 의지를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상황의 무게에 짓눌려 방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 다른 한편에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 의지 등을 모두 던져 버린, 상식과 동떨어진 인물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생활적」의 동주와 「미해결의 장」의 지상이다. 이들은 삶의 의지가 결여된 인물들이다.이렇게 볼 때 「생활적」의 동주로부터 「유실몽」의 철수에 이르기까지 초기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무기력하고 정태적인 모습 속에는 한결같이 비극적인 현실상황에 대한 대응의 방식과 관련이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삶의 무의미함, 자기 존재의 무가치함에 대한 인식은 초기소설의 주인공들의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허무의식의 주된 내용이다.2. 50년대 후기소설의 자기의식 탈피와 인물의 사회화협착한 상황 속에 폐쇄된 고독한 존재로서,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의지를 상실한 채, 자기 존재와 삶의 의미에 관한 소모적인 회의로 일관하던 초기 소설의 인물들의 모습은 1950년대 후반에 들어와 점차 사라지게 된다.후기소설들에서는 육체적,다.
    인문/어학| 2003.07.07| 28페이지| 1,500원| 조회(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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