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Bronze개인인증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37
검색어 입력폼
  • 『엄마를 부탁해』 - ‘엄마’의 신화 재생산 문제 평가A좋아요
    페미니즘 문학비평『엄마를 부탁해』 - ‘엄마’의 신화 재생산 문제1. 들어가며우리는 일반적으로 ‘엄마’는 무엇이든 다 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음식을 만들어주는 사람이고 돌보아주는 사람이며 끊임없이 보살피고 무슨 일이든 책임져주는 사람으로 여겨지기 쉽다. 우리에게 ‘엄마’란 ‘처음부터 엄마로 태어난 인간’)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결국 알게 되듯이 ‘엄마’란 ‘엄마’로 태어난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 그렇게 살게 될 것이라 예측하며 준비했던 사람도 아니다.『엄마를 부탁해』는 갑자기 ‘엄마’가 실종된 상황을 통해 이 점을 남은 가족들이 깨닫게 만드는 소설이다. 소설 속에서는 여러 종류의 화자를 통해 이러한 ‘진실’을 드러낸다. 딸과 아들, 남편, 그리고 심지어 ‘죽은 엄마’ 본인까지 ‘엄마’의 인생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재구성 과정 속에서 ‘엄마’의 인생은 때로 쓰라리게, 때로 아릿하게 나타난다. 이는 궁극적으로 ‘엄마’의 모성이 가족을 이룬 근본적인 힘이었음을 알려준다.문제는 이러한 ‘모성’의 발현이 가부장제 하의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엄마’의 고통을 알려주는 동시에 이를 정당화하는 요소로도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엄마’의 고통은 분명히 가부장제 하에서 가정을 돌보고 아이를 기르며 아내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역할 강요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엄마’의 모성이 문제를 해결해온 과정을 충실히 살피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러한 ‘모성적 역할’이 이른바 가정이라는 것에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이렇게 볼 때 이 작품은 가부장제 하에 강요되어 온 ‘모성’을 일견 비판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정당화하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작품 내용 속에서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2. 『엄마를 부탁해』에서 나타나는 모성의 ‘신화’, 그리고 우리 사회의 문제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평범하지만 ‘위대한’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이다. 이 소설은 큰 딸, 큰 아들, 남편, ‘죽은 엄마’라는 네 명의 각기 다른 화자를 통해 ‘엄마’의 인생살이를 풀어내고 있다. 해설에서 드러나듯이 이 소설은 신경숙이 지금까지 써 온 글의 총집합체이기도 하며 우리 현대사에서 흔히 관찰될 수 있는 한 지방 출신 가정의 서울 진출사와 얽혀있기도 하다. 특히 잃어버린 ‘엄마’에 대한 기억을 통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지워진 ‘엄마’의 짐이 실은 당연한 것이 아님을 밝히고 그 짐을 훌훌 털어버리며 ‘신’, 혹은 ‘엄마의 엄마’에게 ‘엄마’를 부탁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이렇게 볼 때 이 책은 ‘엄마’라는 이름으로 부당한 압력과 고난을 견뎌야 했던 현대사의 여성 문제를 드러내는 책처럼 보인다. 책 속에서 ‘엄마’는 원치 않는 결혼을 통해 한 가정의 아내가 되었고 자식들 때문에 ‘엄마’가 되었다. 남편이 아내로 여기지 않거나 때로 다른 여자를 집에 들여와도 ‘엄마’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했으며 집을 건사해 가정을 꾸려나갔다. 못 배운 한을 자식에게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갖은 고난을 견뎌내며 교육을 시켰고 대학에 들어간 작은 딸의 모습을 보며 대견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도 ‘엄마’의 고독은 이해해주지 않았다. 이것이 이 책 속에서 드러나는 ‘엄마’의 문제처럼 보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의 부당한 억압만을 드러내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에서 ‘엄마’의 억압이나 고통은 모호하거나 흐릿하게 나타날 뿐이다. 오히려 분노의 대상이 되어야 할 ‘고모’나 ‘형철 아빠’, 즉 남편조차도 ‘엄마’는 그다지 다그치지 않는다. 반면 그녀를 그렇게 살 수 밖에 없게 만든 자식들에게는 질긴 모성을 드러내며 안타까움과 그리운 회한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물론 책은 ‘엄마’가 지녔던 욕망이나 고통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야기는 하고 있다. 예컨대 ‘곰소 사내 이은규’에 얽힌 이야기가 그 중 하나이다. 하지만 마음에 품었던 다른 남자의 이야기는 단지 거기에서 그칠 뿐 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엄마’는 자기 자리를 떠나 ‘여자’가 되지 않고 계속 자기 자리를 지켰을 뿐이다. 오히려 ‘곰소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엄마’가 얼마나 모성적 신화를 드러내는지 보여줄 뿐이다.요컨대 ‘엄마’는 힘든 삶의 여정을 말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엄마’ 없이는 가정이 한 순간도 유지될 수 없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가정에 무책임한 ‘아버지’나 일찍 서울로 더난 ‘형철’, 가족에게 무관심한 채 살아온 ‘너’에 대한 이야기는 ‘엄마’가 가정을 하나로 잇는 단 하나의 끈이었음을 시사한다. ‘전쟁이 지나간 뒤에도, 밥을 먹고 살 만해진 후에도 엄마의 지위는 달라지지’) 않았다. 가정은 어디까지나 ‘인생에 단 한 번도 좋은 상황에 놓인 적이 없던 엄마’가 ‘언제나 최상의 것’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외로울 때 등을 토닥여’줄 때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무엇보다도 책은 ‘엄마’의 모든 문제를 궁극적으로 ‘모성’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새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며 딸과 남편, 고모, 집을 살펴보던 ‘엄마’는 마침내 오랫동안 묶여 있던 ‘집’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그녀가 향하는 곳은 저 먼 어딘가나 그녀가 딸에 기탁해 가고 싶어 했던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가까이 붙어 있었고 그녀의 유년기를 보내왔던 장소인 그녀의 옛날 집이다. 그 옛날 집은 다름 아닌 ‘엄마’의 ‘엄마’가 살던 장소다. 그녀가 태어난 ‘어두운 집’에서 그녀는 ‘엄마의 엄마’를 만난다. 그리고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고 고백한다.결국 ‘엄마’의 고단한 생을 보여주며 우리가 잊고 살았던 ‘엄마’의 현실에 대해 깨닫게 하는 듯한 이 책은 문제의 해결을 또 다른 ‘엄마’에게 돌린다. 이것은 ‘너’가 바티칸 시국에서 보게 된 성모상에 말하는 장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너’는 더 이상 엄마를 찾으려 들거나 엄마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대신 성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 성당에서 아들의 시신을 품에 안은 성모를 만난다. 성모에게 엄마를 잊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러 온 것에서부터 우리는 모성적 해결의 단초를 볼 수 있다. 또한 성모에게 끝내 남기지 못한 말은 ‘엄마를 부탁해’)라는 말이다. 현실의 ‘엄마’의 문제를 이제 ‘천상의 엄마’에게 넘겨 해결하고자 하는 태도라고 볼 수도 있는 대목이다.이러한 모호하면서도 모순적인 해결책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는 무수한 가정적인, 사회적인 문제와 직면해 있다. 현대사 속에서 겪어야 했던 여성들의 억압은 민주주의 사회 속에서 일견 완화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정이 파괴되고 아이들이 내몰리며 사회 속에서 상처받은 군상이 갈 곳을 잃고 헤멜 때마다 우리가 먼저 떠올리는 존재는 ‘엄마’다. 가정이 바로서야 사회가 바로선다거나 아이들에게 대화가 필요하다거나 사회 속에서 상처받은 가장들을 위로해달라거나 하는 모든 말 속의 주체는 ‘엄마’다. 요컨대 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할 사람은 ‘엄마’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문제는 남성 중심으로 짜여져 있는 사회 구조 자체이다. 가부장제 아래서 여성은 아무리 권리를 얻고 자유롭게 살고자 노력하며 주체성을 획득하고자 하더라도 누군가의 딸이자 누군가의 아내이자 누군가의 ‘엄마’로 살 수 밖에 없다. 가정의 틀을 벗어난 여성은 그저 괴팍한 독신녀로 취급받고 사회 속에서 터부시될 뿐이다. 반대로 가정 속에 들어간 ‘정상적인 여성’은 시공을 초월하여 본원적으로 동일한 인간의 욕망을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박제화된 ‘엄마’로서의 의무만을 강요받는다.
    인문/어학| 2011.12.18| 4페이지| 1,000원| 조회(475)
    미리보기
  • 자연법의 역사와 현대성 - ‘악법’의 기준은 무엇인가
    서양의 법전통자연법의 역사와 현대성 - ‘악법’의 기준은 무엇인가1. 들어가며2. 자연법의 역사(1) 자연법의 맹아 - 고대와 중세(2) 17세기 이후의 근대 자연법3. 자연법과 실정법의 대립과 우선순위(1) 자연법의 존재 여부(2) 자연법사상이 한국 헌법의 현대 기본권에 미친 영향과 그 의미(3) 자연법과 실정법의 우선순위 문제 - 한국을 중심으로4. 나가며 - 현대사회와 자연법의 필요성1. 들어가며최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하 집시법) 위헌 논쟁을 통해 이른바 ‘악법’을 지켜야 하느냐는 논쟁이 일어난 바 있다. 집시법 제10조 옥외집회와 시위의 금지 시간은 허가되지 않은 야간 집회를 금지시킨다. 집시법 제11조는 관할경찰관서장이 허가를 통해 야간 집회 허용 여부를 결정할 수 있게 한다. 이는 헌법상 ‘집회의 자유’를 통해 자유롭게 얻을 수 있는 시민의 집회권을 사실상 정부의 허가로 제한하는 헌법상 권리 제한이 될 수 있는 문제가 되어 위헌 시비가 있어왔다. 이때 한 발 더 나아가 과연 위헌 여지가 큰 이른바 ‘악법’을 우리가 지킬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집시법을 지켜야 한다고 판단한 쪽에서는 위헌 판결이 나오지 않는 이상 일단 정해진 ‘실정법’은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집시법을 지키지 않고 야간 시위의 자유 혹은 이른바 ‘촛불 시위’의 자유를 주장한 측에서는 헌법상 권리, 더 나아가 ‘자연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권리’로서 ‘자연법적 권리’를 근거로 내세웠다.이는 결국 우리가 어떤 법을 지키고 법 규범으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기도 하다. 헌법은 나라의 기본적인 법인 동시에 국민 전체의 동의를 얻어 만들어졌기에 이른바 ‘자연법’에 보다 가까운 법으로 알려져 있다. 반대로 일반적인 법은 국회에서 필요할 때마다 정해진 ‘실정법’, 혹은 인간이 만든 ‘인정법’에 더 가까울 것이다.우리는 여기에서 ‘자연법’이 과연 진정으로 존재하는지, 더 나아가 자연법적인 논리에 따라 현재 존재하는 실정법이나 인정법을 무시해도 되는지 논의할주어진 법을 관습적으로 받아들이던 사람들은 페리클레스 시대 이후 민주질서의 타락, 펠로폰네소스전쟁에 따른 공동체의 분열, 개인주의적 충동과 같은 위기를 경험함으로써 법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겪는다.이로 인해 그리스 철학자들은 신적 권위와 힘의 후광 없이 인간 스스로의 실존을 이해하려는 하였다. 그들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윤리적, 구도자적 태도였으며 여기서 정의를 의미하는 고대 희랍어의 단어인 ‘디카이오시네’ 가 생겨났다.) 법이라는 인간행동을 규제하던 질서원리는 존재의 섭리로서가 아니라 윤리적 요청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만물의 척도가 인간이 됨에 따라, 그리스인들은 소피스트들의 출현과 함께 전승되어 온 신들의 세계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는 계몽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 철학은 실정법 비판의 거점을 마련함으로써 법과 자연이 대립으로 가는 길을 열어놓았다. 반역자로서 장례의식을 금지 당했지만, 장례가 천부의 권리임을 주장하며 크레온에게 저항하는 이야기의 소포클레스의 비극, 의 예는 노모스가 더 이상 근원이나 참됨과는 구분되어 그 절대적인 효력을 상실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노모스를 단순한 국가권위에 의한 형식적인 법률로서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행위의 표준을 퓌시스에서 찾게 되었다.노모스와 퓌시스의 분리와 이에 따른 대립은 소피스트들의 중요한 테제가 되었다. 의사들이 인간의 신체적 특징으로부터 알맞은 처방전을 도출하듯이, 건강한 사회를 위한 규범 또한 인간이 지니는 자연적 본성의 관찰에서 비롯된다고 본 소피스트들은 인간의 본성에서 법의 본성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하였다.다만 자연 개념이 가진 복잡성과 다양성 때문에 소피스트들 사이에서도 합당한 규범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리코프론, 알키다마스 등은 노예제를 부정하여 인간 평등 이념의 발전에 기여한 반면 칼리클레스 등은 능력에 따른 자연적인 불평등을 강조함으로써 법의 구속력이 약자가 강자를 옮아 매기 위한 속박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단, 인간의 경험적 본성에서 법을 이끌어냈다는 필요에 따라 권위로써 그때마다 제정하는 것으로서 이해하게 하는 사고를 낳았으며, 이는 실정법이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법실증주의로서의 기반을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15,6세기에 스페인의 소토(D.내새)와 수아레즈(F.Suarez)가 자연법의 궁극적인 근원이 신의 의지와 지성안에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아퀴나스식의 이성주의로 다시 복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존재론적 근거에서 자연법을 설명하는 스콜라 철학은 곧 시대적인 한계에 봉착한다.유럽에서 종교분쟁과 영토분쟁, 그리고 시민전쟁 등이 터지자 스콜라 철학의 이성만으로는 전쟁을 조율하고 질서를 구축할 수 없다는 한계가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다. 질서의 정당성을 논했던 자연법은 시대적인 필요에 의해 분쟁해결 능력을 요구받았으며,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의 국제법을 기점으로 신학과 결별하기에 이른다. 근대에 이르러 세속화된 자연법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닌 정치와 평화를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2) 17세기 이후의 자연법 자연법의 성립과 발전, 쇠퇴1) 근대 자연법의 태두중세에 들어와 자연법은 기독교의 교의와 결합되면서 신법과 동일시되었다. 신이 정한 인간사회의 질서인 자연법을 인간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은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중세 교회의 권위와 구속이 무너지면서 새롭게 변한다. 17세기 이래 대두한 개인주의ㆍ합리주의ㆍ공리주의 사상은 신학적 유대를 단절하고 이성을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자연법을 만들어낸다.이것을 전통적 자연법론과 구분하여 근대자연법론 또는 합리주의적 자연법론이라 부른다. 자연법은 신과 결부된 이론이 아니라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에 관한 이론으로서, 그것은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내는 것이며 이성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므로, 인간의 사회생활을 이성적으로 분석하면 민족이나 사회ㆍ시대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법체계의 기반을 세울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자연법은 근대에 들어와 '자연권' 관념으로 바뀌었고, 이 자연권이 법을 창조하는 인간의 주권적 권리로 여겨졌다법 개념이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4) 자연법 사상의 부활 - 신자연법론의 등장20세기 들어와서는 법 철학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논의가 시작된다. 실증주의의 법철학은 법의 내용의 정당성보다도 법의 제정 절차의 합법성을 중요시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절차에 잘못이 없는 한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성과 정의를 부정하고 실정법의 권위를 옹호할수록 법의 횡포에 대한 반발이 커지면서 실정법의 미비한 점을 보충하는 규범으로서 이념ㆍ형평 등과 같은 자연법상의 규범에 의존하게 된다.법의 내용의 정당성을 다시 한 번 찾아보려는 움직임이 생겨나면서, 법실증주의에 대한 반성과 함께 인간의 역사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다원적이고 가변적인 자연법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의 경험은 자연법의 부각을 더욱 가속화하여서, 정치적ㆍ법적 정의가 나오는 도덕적 명령이 있음을 재발견하기 시작한다.롬멘(H.A.Rommen), 마리탱(K.Maritain), 메쓰너(J.Messner), 카우프만(A.Kaufmann) 등 신 스콜라학파의 존재론적 자연법론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법 사상을 기반으로 하되 현대 철학과 새로운 과학과의 관계에서 현대화를 시도하였다. 신칸트학파의 슈탐러(R.Stammler)는 실증법이 정법이며 그것은 내용이 변할 수 있는 자연법이라고 설파하였다.이탈리아 델 베키오(G.Del Vecchio)와 코헨(M.Coken)은 인간이 실재 세계에 속해 있는 한 세계 존재 법칙의 제약을 받지만 한편으로는 주체적 존재이기 때문에 실재 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자유 의지를 지닌 사람들의 모임인 공동체의 모든 가능한 목표들이 자연법을 통해서 조화를 이룬다고 말한다. 상이한 세계관에 대한 관용, 상대주의를 주장하였던 라드브루흐(G.RADbruch)는 절대적인 초실정법을 주장하면서 자연법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하였다.시대가 변하면서 자연법의 기능이나 그 위상은 계속해서 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되는 내용이 있다고 있고 1957년 프랑스 제 5공화국 헌법 또한 1789년의 인권선언을 헌법의 일부로 하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이처럼 공식적인 헌법 제도상에서 자연법의 근거를 직접적으로 인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연법사상은 다수 국가들의 헌법 체계 속에서 사상적 기반으로서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한국에서는 19세기 말 개혁 이후 개화기의 사상가들에 의해 서구의 자연법사상이 일반적으로 수용되었고, 제도적으로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당시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되었던 제 1회 한인대표자 대회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헌법에 처음으로 수용되었다. 자유권적 기본권을 중심으로 자연권 사상이 제헌헌법에 수용되었던 때는 해방 이후 미군정 시기였다.미군정의 영향은 근본적으로 많은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지만, 제 1공화국 제헌헌법에 기본적 인권제도를 도입할 수 있게 되었던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이처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서구의 기본적 인권제도를 수용한 대한헌법은 제헌 이래 아홉 차례의 개헌을 거치며 전반적으로는 자연법사상의 수용이 점증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고, 현행현법에 이르러서는 기본적 인권의 천부인권성, 즉 자연권성을 어느 때보다도 더 강조하게 되었다.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현행헌법상의 기본적 인권 규정에 자연법사상이 어떻게 수용되고 있을까? 이에 대한 분석은 주로 근대 자연법사상을 중심으로 역사적·사상적 배경을 조망하고 자연권적 인권 선언으로서의 헌법전문,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과 같은 포괄적 기본권, 평등권?자유권적 기본권과 같은 개별적 기본권이라는 세 가지 항목으로 분류해서 살펴볼 수가 있겠다.2) 자연권적 인권선언으로서의 헌법전문)헌법전문(preamble)은 헌법의 본문 앞에 위치한 헌법서문을 말한다. 헌법전문에는 헌법 제정의 역사적 의미와 제정과정 외에도 헌법이 채택하고 있는 기본원리 내지는 근본사상이 명시되어 있다. 통설에 따라 헌법 전문을 실질적으로 헌법 규범의 구조 중에서 최상위의 가치규범이라고 볼 때, 그 기본적 인권에 관계하였다.
    인문/어학| 2011.12.18| 16페이지| 1,500원| 조회(273)
    미리보기
  • 근대 국가의 성립
    르네상스와 종교혁명각국의 성립1. 들어가며 - 근대 국가의 형성2. 근대 초기의 국가 형성 - 절대주의 국가3. 에스파냐4. 프랑스5. 영국6. 나가며 - 절대주의 국가의 양면성1. 들어가며 - 근대 국가의 형성오늘날의 근대 국가는 근대에 이루어진 서구 유럽 국가를 기본 모델로 삼고 있다. 이러한 근대 국가는 ‘16세기로부터 비롯되는 비교적 최근의 현상’)으로 ‘일정한 영토와 주민들을 기초로 하여 성립되고 특정한 사회 체제의 구성원들에 대해 포괄적인 통제력을 행사하면서 그 사회 체제의 유지와 재생산을 총괄하는 지속력을 지닌 강권적 권력체’)라 할 수 있다.이러한 근대국가의 특성은 근대 초, 절대주의 국가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중세 유럽의 봉건 사회는 물리적 강제력과 ‘최고 통치권’이 봉건 영주에게 분산되어 있었으며 국경선은 불분명해 영토가 불확실했고 국가 내의 주민 국적도 확정된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근대 초의 절대주의 국가가 성립되면서 군사력을 중심으로 하는 강제력은 중앙 궁정으로 이전되었고 영토 내 최고 통치권인 ‘주권’ 개념이 생겨나 군주에게 집중되었다. 국경선과 주민을 둘러싼 전쟁도 연이어 발생하면서 오늘날의 국가 형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따라서 근대 국가의 성립을 살피기 위해서는 절대주의 국가의 형성에 대해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때 절대주의 국가는 단순히 초기 근대적 국가가 아니라 오히려 봉건제적 특성이 강하게 나타난 국가였다. 이 점은 특히 ‘합스부르크의 결혼 상속’과 ‘에스파냐 계승 전쟁’과 같은 중요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하지만 동시에 절대주의 국가는 근대 국가의 특징이 형성되기 시작한 국가이기도 하다. 이러한 양면성은 절대주의 국가의 독특한 면모이다.이하에서는 절대주의 국가의 기본적인 형태를 살핀 후 절대주의 국가군 중 가장 대표적인 형태인 서유럽의 에스파냐, 프랑스, 영국의 순서로 각각의 국가 성립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그 결과 각각의 절대주의 국가가 봉건제에서 절대주의로 바뀌는 기본 과정은 비슷하지만, 서로 속해 있는 상황다.(3) 절대주의 국가의 특징베버는 국가를 정당한 강제력의 사용을 위해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권리를 갖는 제도화된 권력으로 보았다. 이러한 국가의 정의는 봉건제 국가의 다원적인 권력 형태와는 상이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봉건제 국가에서 근대 국가)로의 이행은 권력의 원천과 소재가 다원적인 사회로부터 단일한 사회로 이행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지방 영주들의 재정, 군사, 사법, 입법, 행정권력이 국가의 중앙 정부로 이전되는 방식으로 실행되었다.이행기 국가로서 절대주의 국가는 화기 및 군사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격화되는 전쟁에 의해 탄생하게 되었다. 결혼 상속으로 인한 영태의 거대화나(에스파냐) 왕령지의 확대를 위한 잦은 전쟁(프랑스)은 상비군의 필요성을 불러 일으켰다.결과적으로 용병을 중심으로 하는 상비군과 전쟁은 막대한 전비를 소모시켰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각종 재정 정책과 조세 정책이 요구되었다. 병력 동원과 자원 추출을 위해서는 관료층과 행정조직이 필요했다. 요컨대 전쟁을 수행하고 자원을 추출하는 과정에서 절대주의 국가는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그러나 절대주의 국가가 중세 봉건 사회를 파괴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지배계급은 여전히 중세와 동일한 봉건 귀족이었으며 농민의 예속 상태도 형태가 달라졌을 뿐 여전히 계속되었다. 따라서 절대주의는 사회, 경제적 발전에 따라 농노제가 해체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여전히 계서제에 묶으려는 ‘재정비되고 재충전된 봉건적 지배기구(redeployed and recharged apparatus of feudal domination)’)였다.14, 15세기의 ‘중세의 혼란’이 지나간 후 농노제는 빠르게 해체되기 시작했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 봉건영주의 권력은 중앙으로 집중되거나 이전되었다. 그 결과 왕과 궁정으로 대표되는 중앙 권력이 강화되었고 강화된 궁정은 농민과 하층 민중을 효과적으로 억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봉건영주는 궁정 귀족으로 변모하면서 사회 변동에 대처할 수 있게 되었복 운동이 완성되었으며 나폴리가 병합되고 나바라를 흡수했으며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정복하였다.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결혼을 통한 결합은 초기에는 밀라노, 프랑슈 콩테, 네덜란드를 스페인에 더해주었다. 이런 우연한 결과는 스페인을 16세기의 유럽 제일의 강국으로 만들었지만 국가 자체가 궁극적으로 군주 개인에 의해서만 결합되는 느슨한 결합체였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내적 발전에서는 그리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하지만 스페인이 가한 국제적 압력은 스페인이 지배하였던 막대한 부와 권력으로 말미암아 대륙 다른 지역에서의 국가 발전 형태에 개한 특수한 중첩적 결정요인으로 작용하였다.)(2) 절대주의의 융성 및 몰락스페인의 우월성은 두 가지 자원에 결합에 기인한다. 하나는 왕조간의 결혼계약으로 스페인은 이것을 통해 많은 이익을 얻었다. 다른 하나는 광대한 영토와 영향력인데 이것은 정치적 확대의 봉건적 매커니즘이 창출한 최고의 가공물이다. 신대륙의 식민지 정복은 막대한 귀금속을 취하게 해여 경제적 이윤을 낳았다. 스페인의 우세는 합스부르크 왕정에게 서유럽 절대주의 전체에 대한 체제설정 역할을 부여하였다.스페인의 절대주의는 궁극적으로 귀족적이며 부르주아적 발전에 적대적인 특징을 지녔다. 국내적으로는 봉건적 결속의 유산으로부터 대외적으로는 착취가능한 모든 자본을 노획함으로써 그 권력을 성장시켰다. 카를로스 1세의 통치 중 가장 뛰어난 업적은 물론 합스부르크왕가의 세력권을 대외적으로 광범위하게 넓힌 데 있다.카를로스 1세는 대륙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지역들에 막대한 압력을 가함으로써 그 기세를 꺾었고 한편으로는 여타 모든 토지귀족들을 위협하여 150여 년 동안 계속되는 귀족간의, 유럽적인 규모의 일련의 전쟁들을 운명적으로 유발하였다.하지만 합스부르크 제국의 과도한 확대는 제국의 통합 능력을 넘어선 것이었으며, 스페인 자체 내에서 행정적 중앙집권화 과정을 가로막았다. 이는 대륙에서 스페인이 누린 권력의 대가였다. 스페인의 힘은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의 생명력을 질식시켰다. 그리고 17세기의 프롱드의 난 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이는 중세적 군주정에서 절대군주정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국내의 위기였다.발루아왕조(1328~1589)는 초기에 백년전쟁(1337~1453)이라는 긴 전쟁을 치른다. 프랑스 군주정은 영국과 부르고뉴의 침입으로 전통적인 왕령지의 대부분이 외세의 통치하에 들어가는 위기를 겪지만 결국 외세를 몰아낸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절대주의의 측면에서 중요한 전환은 중세적 정치체의 한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정규적 조세인 타이유 세(직접재산세, 1439)와 유급정규군인 칙령군(상비군)의 도입이다. 귀족을 제외한 나머지 인구를 대상으로 하는 타이유 세를 국왕이 직접 걷음으로써 군대 양성의 기반을 마련한다.이후 프랑스는 부르고뉴 가문을 몰락시키고(1477, 낭시전투) 브르타뉴 지방의 상속녀와 왕의 혼인을 통해 영토를 넓히고, 국가의 권력과 재정을 크게 확대하여 단일 주권자 밑에 봉신들의 지방을 포괄하게 되는 성과를 거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12개의 총독관구로 분할된 각 지방을 왕족과 일부 귀족이 다스리고 지역마다 최고 사법기구인 지방 고등법원(parlement)이 생겨나 지방분권적 성격이 유지된 점, 전국적 의회인 삼부회가 제대로 실시되지 않은 점 등은 프랑스가 아직 중앙집권화된 국가로 나아가지 못했음을 증명한다.이는 통일적인 시장이나 근대적 수송체계가 결여된 경제에서 전국적으로 효과적인 통치기구를 만들기 힘들다는 조직적 문제) 때문으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단기적으로는 국왕의 권위를 떨어뜨렸지만 장기적으로는 절대주의에 기여한다. 왕족 및 귀족계층이 굳건해지면서 이후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절대왕정에 기여하게 되기 때문이다.한편 소귀족들(gentry)의 호전성을 배출하는 좋은 방출구)였던 1494~1599년의 이탈리아 전쟁 이후 프랑스는 국내문제에 집중하게 되고 그 결과로 16세기 말의 종교전쟁이 발생한다. 내란은 르네상스 시기 프랑스 사회구성체의 긴장과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었는데, 기즈(Guise그리고 제복이 도입된다. 이러한 군사기구의 성장은 지방귀족의 최종적인 무장해제와 신속하고 능률적인 민중반란 진압 능력을 의미한다.) 절대주의 체제가 공고히 됨으로써 내부의 위협적 요소를 미리 차단할 수 있게 되자, 루이 14세는 최종 목적인 군사적 팽창을 위해 육각형의 갈리아 밖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특별히 태양-왕 루이 14세는 더 이상 재상을 두지 않고 자신이 직접 통치할 것을 선언하고(1661), 고등법원의 오랜 특권이며 국왕의 입법권에 대한 유일한 견제장치이던 간주권(droit de remontrance)을 폐기하여 통치의 권한을 한 곳에 집중한다. 또한 베르사유 궁전을 완성(1682)함으로써 절대주의의 가장 큰 상징을 만들어내고, 공직자를 이곳에 거주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지역에 직접적으로 영주권 행사를 할 수 없게끔 직위를 일종의 명예화한다. 또한 유능한 행정가들(르 털리에, 콜베르, 리온, 세기에)을 둠으로써 관료제의 정점을 이루고, 32개의 징세구로 나뉜 전국을 대상으로 걷는 타이유 세의 감독권한을 재정관으로부터 지사에게 이양함으로써 절대주의를 확립할 수 있었다.그의 치세 말기, 프랑스는 대외전쟁을 남발하고 이렇다 할 성과도 거두지 못하는데 이러한 전쟁의 남발과 베르사유 궁전 건축 등은 재정상의 위기를 초래하며, 물가상승과 식량폭동, 인구감소 등의 위기가 겹치면서 치세 초기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루이 14세의 프랑스는 국내에서의 성공이 국제적 차원에서의 성공과 일치하지 못했고, 대외 전쟁에서의 거듭된 실패와 국내문제로 인하여 서서히 옛 영광을 잃어,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끝으로 절대왕정은 막을 내리게 된다.5. 영국(1) 강한 중세왕정과 절대주의의 시작영국의 경우, 중세에는 강력한 봉건 왕정이 정착되어 있었다. 따라서 대륙의 제후들과는 달리 규모가 작으며 지역적으로 통합된 귀족계급이 발생하였다. 이들 귀족계급은 정치적 자율성을 갖지 못한 채 상업적인 특권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같은 시기 대륙의 국가들과는 달리이다.
    인문/어학| 2011.12.18| 13페이지| 1,500원| 조회(307)
    미리보기
  • 1893년 시카고 콜럼비아 박람회 -식민지에서 제국으로, 박람회를 통해 본 미국 식민 제국주의의 이중적 면모 평가A+최고예요
    문화와 제국주의1893년 시카고 콜럼비아 박람회 -식민지에서 제국으로, 박람회를 통해 본 미국 식민 제국주의의 이중적 면모1. 들어가며2. 미국 식민 제국주의의 기원 및 성립1) 미국 식민 제국주의의 기원 - 먼로주의와 관련하여2) 19세기-20세기 초 미국 식민 제국주의3. 시카고 박람회와 제국주의1) 박람회의 기원2) 박람회의 사회적 의미3) 시카고 박람회(1)시카고만국박람회(World columbian Exposition, Chicago, 1893)(2) 전시품으로 알아본 박람회의 제국주의 성격① 백색도시(White City)②미드웨이 플레잔스(Midway Plaisance)4. 시카고 박람회와 ‘미국’ 제국주의1) 미국 제국주의의 이중성 - 파리 박람회와의 비교2) 시카고 박람회의 이중적 영향(1) 미국 내부에 미친 영향(2) 미국에 대한 외부의 인식 변화5. 나가며 - 현대에 19세기 미국 식민 제국주의와 시카고 박람회가 지니는 의의1. 들어가며제국주의 시대에 있어 가장 흥미로운 국가 중 하나는 미국이다. 미국은 본래 영국의 이주 식민지로 시작해 독립 투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며 영토를 확장했고 하와이, 필리핀, 괌 등을 식민 지배하는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미국은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세계 패권 국가로 변모했다. 요컨대 미국은 식민지 출신인 동시에 패권 종주국이라는 이중적 면모를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따라서 미국이 식민 제국주의 시대에 이중적 면모를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록 먼로 대통령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유럽 열강의 간섭은 거부했으나 미국 스스로는 아메리카의 다른 국가에 여러 경로를 통해 간섭하며 개입했다. 캐나다와의 국경 분쟁이나 멕시코 전쟁, 중앙 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 각 국가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간섭에서 그 예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하와이나 필리핀 등지에서 일종의 식민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다만 미국의 식민 간섭은 유럽 열강의 직접적 침략과 달리 주로 간접적인 권력정치’가 가장 완벽하게 결합되어 미국의 외적 팽창을 합리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많은 국가들의 부분적인 정치 이념이 되었으며 북미 합중국의 외교 정책에 하나의 항구적인 이념으로 인식되었다.2) 19세기-20세기 초 미국 식민 제국주의미국은 1840년대부터 1890년대에 이르는 약 40년 동안 노예문제로 일어난 50년대의 위기와 남북전쟁, 전후의 남부의 재건과 대서부의 개척, 그리고 혁신주의적 사회개혁의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미대륙의 경계를 넘어 해외로 국력을 진출시키는 문제에는 별로 관심을 나타내지는 않았다.이 기간 유럽의 강대국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태평양 등의 후진지역에 대한 세력범위를 확대해 나가는 제국주의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미국도 1890년대에 들어서 자국의 산업자본이 고도로 성장하여 독점자본의 형태를 취하게 되자 늦게나마 제국주의적 조류에 참가하여 해외영토의 팽창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그렇다고 미국이 1890년대 이전에 해외진출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미국의 팽창주의자들 가운데는 유럽 국가들의 남아메리카 침투를 막아야 한다는 전략적인 이유에서 팽창을 주장하였고, 또 어떤 팽창주의자들은 우월한 국민으로서 미국인이 보다 넓은 영토를 차지할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을 지니고 있다는 인종주의적 측면에서 팽창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기업가 가운데는 미국경제와 사회의 안정상 해외시장이 필요하다는 경제적인 논리로 팽창을 주장하였다.이러한 주장들이 남북전쟁 후 1880년대 말까지 소극적이나마 미국의 해외진출을 가져왔다. 1867년에 링컨-앤드류 존슨시대에 국무장관을 지낸 시워드(William H. Seward)는 태평양에서 미드웨이군도를 획득하고,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이커당 2센트)의 싼값으로 사들였고, 그란트 대통령은 1870년에 카리브해역에 있는 산토도밍고(Santo Domingo)를 합병하려다가 상원의 반대로 실패한바 있었다.미국인이 대거 진출하고 있는 하와가 기업, 상인 등의 후원으로 500만달러 보조금을 준비하며 개최한 이 박람회는 각 주와 세계 46개국이 참여하고 2천 7백만 관람객이 모여든 박람회였다. 시카고 박람회는 미국 도시 계획의 시발점으로 일컬어지는데, 박람회 행사장을 기존의 구조물에 유치한 것이 아니라, 오직 만국 박람회를 위해 무려 633에이커(약 77만평) 부지에 일종의 계획도시형태로 새로 건설했다. 시카고 중심지에서 미시건 호수를 따라 남쪽으로 10분거리에 위치한 잭슨파크에 조성된 박람회장은 남북으로 56가에서 67가까지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고, 크고 작은 200여채의 박람회용 건물은 아름다움과 질서정연함을 보여주었다. 박람회를 통해 유럽의 문명이 미국으로 건너와 새로운 진보와 번영의 단계에 도달했음을 증명하고자 한 국가적인 사업이기도 하였다.(2) 전시품으로 알아본 박람회의 제국주의적 성격시카고 박람회의 국가적인 목적은, 박람회가 일개 도시차원의 행사가 아닌 미국을 대표하는 것으로 세계 최고임을 과시하는 것과 두 번째는 변화하는 국가적 위상과 외교 정책의 목표를 표현하고 인식시키는 작업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미국의 의도는 다음 두 전시공간을 통해 드러나게 되는데 하나는 ‘제국으로서 탄생한 미국’과 ‘이국적인 문화들을 교육하기 위한 공간’ 이었다.① 백색도시(White City)백색도시(White City)란 명칭은 박람회의 건설 책임자 다니엘 번함( Daniel H. Burnham)이 시카고의 주요 건축가들에게 위촉한 본 전시장의 모든 건축물을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풍의 신고전주의 양식과 흰색으로 통일시킴으로써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신고전주의 양식은 그 당시 시카고 시내에 들어서고 있던 ‘모던’ 양식의 고층건물과는 대조되는 것으로, 번함은 백색도시에서 완벽한 유토피아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었다. ‘검은도시’로 불려질 정도로 열악한 환경으로 악명 높던 시카고 시내와 대조되는 공간은 매연도, 소음도, 과밀하고 비위생적인 빈민 공동주택도, 무질서도, 부패도 없도시를 보고 그 다음에 미드웨이 플레잔스를 보아야 명백한 차이를 느낄 수 있고,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충고하고 있다.) 그리고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교훈이란 문명 개화를 앞세운 거구 제국주의의 정당화였다. 문화 이론가 토니 베넷(Tony Bennett)이 지적한 대로, 주최 국가는 이러한 전시를 통해 관람자가 자신의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우월감을 느끼도록 함으로써 그들을 제국주의의 공모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4. 시카고 박람회와 ‘미국’ 제국주의1) 미국 제국주의의 이중성 - 파리 박람회와의 비교미국 제국주의의 이중성은 동 시대의 유럽 식민 제국주의와 비교할 경우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파리 만국박람회는 시카고 박람회와 비교되는 19세기의 대표적인 박람회로서 유럽 제국주의의 노골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는 미국 제국주의의 이중적인 면모와 대조되는 것이다.파리 만국박람회는 1889년과 1900년의 박람회가 가장 유명하다. 1889년의 박람회는 19세기의 과학 문명의 집대성을 에펠탑 건축을 통해 보여주었으며, 1900년의 박람회는 19세기의 마지막 해이자 20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당시 서구 유럽과 미국 등은 인류의 진보와 빛나는 문명의 미래를 확신하고 있었다. 박람회는 이를 보여주고 스스로 확신하기 위한 행사였으며 1900년의 박람회의 경우 약 ‘5천만 명에 달하는 관람객이 방문’)하기도 했다. 이는 시카고의 2천 7백만 명의 거의 두 배에 다르는 숫자이다.파리 만국박람회의 유산은 21세기인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바로 에펠탑이 그것이다. 에펠탑은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19세기의 문명을 대표하는 것은 강철과 전기였고 에펠탑은 전기의 기중기를 이용해 건설된 거대한 강철탑으로 문명의 두 요소가 합일된 모습을 나타냈다. 또한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는 여러 발명품이 등장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최초의 영화 제작자들 중 하나인 뤼미에르 형제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최초의 3D 입체영화’)를 1분간 선지 원주민을 미개하게 바라보는 백인의 모습박람회를 개최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는데, 모든 박람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의도는 바로 다양성의 표출이다. 이는 30여 개 이상의 전시관을 열었던 시카고 박람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와 같은 다양성은 박람회를 찾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표면적인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주체국가와 도시의 지도이념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결국 주체국가와 도시의 인종관, 국가관, 세계관 등이 하나로 섞여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시카고 박람회의 경우 미국이 국내외에서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려고 할 때 나타내려고 구성하는 주요 성분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에 기반하여 1893년 시카고 콜롬비아 박람회가 전시관들을 통해서 표면적으로 보여주려고 한 것 외에 이 안에 내포된 의미 또는 메시지가 미국인들과 외부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간략하게 알아보고자 한다.(1) 미국 내부에 미친 영향1893 시카고 콜롬비아 박람회는 두 가지의 국가적 목표를 갖고 있었는데, 그 것은 도시계획과 더불어서 국가적 위상과 외교 정책의 목표를 표현하고 인식시키는 작업이었다. 시카고 박람회는 앞서 나왔듯이 "백색 도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백색도시의 "백색"은 물론 하얀 대리석 건물들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그것은 "회색도시" 혹은 "검은도시"로 불려질 정도로 열악한 환경으로 악명 높던 시카고 시내와는 대조되는 공간의 창조를 뜻했다.) 백색도시에는 시카고의 매연도, 소음도, 과밀하고 비위생적인 빈민 공동주택도, 무질서도, 부패도 없었다. 그 대신 가장 최신의 기술로 완성된 가장 깨끗하고 위생적이고 조화로운 거리와 건물들이 있을 뿐이었다.백색도시는 '이런 도시가 가능하다'라는 하나의 영감을 심어주었다. 매연과 쓰레기를 연상시키는 도시도 철저한 계획 하에서는 백색도시가 가능하다면 이런 백색도시가 다른 도시들에서 실현되는 것 또한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이후 미국의 도시계획에서는 백색도시를 하나의 표본다.)
    인문/어학| 2011.12.18| 15페이지| 1,500원| 조회(473)
    미리보기
  • `The Sign of Four` - Alienation of Indian about Indian treasure
    Nineteenth-Century English Novel 2"The Sign of Four"- Alienation of Indian about Indian treasure1. Intro한때 인도는 세계 경제의 40퍼센트 가까이를 차지하던 경제 중심지였다. 그러나 무굴제국의 몰락과 영국의 지배 때문에 인도는 300년의 세월 동안 식민지가 되었다. 인도는 영국에게 ‘왕관의 보석’이었고, 세계 패권국가 ‘대영제국’은 인도를 소유하기 때문에 존재했다. 그러나 19세기 영국인은 인도를 멸시했다. 비록 인도는 영국에게 가장 중요한 식민지였지만, 영국인은 인종적, 문화적 우월감 때문에 인도와 인도인을 야만적이라고 생각했다. 인도는 영국에게 일종의 풍부한 젖소에 불과했다.“The Sign of Four” 는 홈즈 시리즈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홈즈가 나온 두 번째 소설이고 이 소설에서 중요 인물인 왓슨은 결혼을 하게 된다. 이 소설은 인도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일단 왓슨부터 인도 부근에 있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 의사이다. 또한 의뢰인인 메리 모스턴은 인도에서 복무했던 부친을 두고 있다. 솔트 형제의 부친도 인도에서 메리의 부친과 같이 복무했다. 무엇보다도 작품의 중요 축인 ‘보물’은 본래 인도인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인도는 작품에서 단지 일종의 장치로 쓰일 뿐이다. 인도인은 야만적이거나 파괴적인 이미지로 잠깐 나올 뿐이다. 인도인의 보물이지만 보물을 둘러싸고 싸우는 이들은 영국인이다.이 작품에서(In this novel,) 인도와 인도인은 완벽하게 소외되었다. 또한 19세기의 인도도 영국인들에 의해 소외되었다. 보물은 인도인의 것이지만 인도인의 것이 아닌 영국인의 것처럼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인도의 자원과 부는 인도의 것이지만 영국의 것처럼 여겼다.이것은 당시가 식민 제국주의가 한창 진행되던 19세기라는 점과 관련 있다. 그때에 사람들은 제국주의 침략을 당연시했고, ‘백인의 짐’이라는 용어로 침략을 정당화했다. 당시의 영국인들에게 인도는 신의 축복이며 제국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인도를 지배하는 것을 당연시했고 인도인에게서 자원을 수탈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결국 영국 때문에 인도는 자신의 자원으로부터, 자신의 부로부터 소외되었다. "The Sign of Four"의 이면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인도를 소외시키는 대영제국의 무자비함이다.2. "The Sign of Four" , The jewel of crown and India : Back ground"The Sign of Four" 시대는 식민 제국주의가 한창 진행되던 19세기 말이다. 당시 유럽 국가들은 세계 각지로 진출하고 침략하며 식민지를 확대했다. 그 중에서도 영국은 세계 최강의 해군력과 산업력을 바탕으로 가장 드넓은 식민지를 차지했다. 아프리카 동부, 캐나다, 남아프리카, 이집트, 오스트레일리아, 홍콩에 이르기까지 영국의 식민지는 전세계에 걸쳐 있었다. 특히 인도는 영국 제국을 지탱하는 핵심이었다.인도는 식민지가 되기 이전에 중국과 함께 세계 GDP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는 부국이었다. 그러나 무굴제국이 분열하면서 서구 열강의 침략 대상이 되었다. 무굴제국의 유명한 황제의 다이아몬드는 서구 열강의 가십거리로 전락했다. 인도의 면화와 황금은 영국의 부를 확대시켰다. 인도의 수많은 인구는 영국의 하청 생산인력으로 변모했다. 무엇보다도 인도는 영국의 중요한 상품 판매 시장이 되었다. 1870년에는 인도 내부의 수입품 중 80퍼센트가 영국 제품이었고 1913년에도 60퍼센트가 영국 제품이었다. 인도는 전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영국 수출 시장이었다. 특히 인도의 주요 수출품인 아편은 영국이 중국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그러나 영국은 1857년 이전까지 인도를 직접 지배하지 않았다. 18세기 이래로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를 간접 지배했다. 정치보다 경제가 앞섰기 때문이다. 1857년 세포이 반란이 일어났다. 이후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해산하고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영토 3분의 2는 영국이 직접 통치했고 나머지 3분의 1은 600개의 공국(Princely India)로 나뉘어 간접 통치되었다.20세기 초에 인도는 4000명의 영국인 관리가 있었다. 영국인 군인은 6만 명이었고 인도군 전체 총 숫자는 20만 명이었다. 또한 9만 명의 인도 민간인이 영국을 도왔다. 하지만 인도인의 총 숫자는 3억 명이었다. 3억 인도인의 부는 7만 명의 영국인에게 수탈되었고 오직 영국만을 위해 사용됐다.즉, 인도는 실로 영국의 ‘왕관의 보석’이었다. 인도 없는 대영제국은 없었다. 세계 패권국인 대영제국은 인도의 부를 통해서 풍요로워졌고 경제적 패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인도는 영국이 필요 없었고 영국에 의해 이익을 얻지 못했다. 인도는 영국에게 완전히 소외되었다."The Sign of Four"는 이러한 시대에 영국의 핵심인 런던을 배경으로 한다. 런던에서 인도는 빼놓을 수 없는 배경이다. 그러나 동시에 절대로 주체가 될 수 없는 대상이다. 비록 작품 속 인물들은 인도의 보물을 추격하지만, 인도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다. 마찬가지로 작품 속 인도인들은 작품의 내용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The Sign of Four"가 보여주는 인도는 그 시대의 인도가 그랬던 것처럼 완전히 소외되어 있다.3. Alienation of Indian작품은 홈즈가 메리 모스턴을 만나는 대목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메리의 아버지인 모스턴은 인도에서 복무한 군인이었다. 모스턴의 동료였던 솔트 소령은 인도에서 보물을 훔쳐왔고 동료를 배신했다. 그리고 홈즈와 왓슨, 모스턴은 인도의 보물을 찾기 위해 추리와 모험을 하게 된다.인도인은 이 소설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있다. 우선 가장 처음 등장하는 인도인은 3장 막바지에서 등장하는데 새디어스 솔트의 하인이다. 그는 작품 속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다음으로 ‘적’으로 묘사되는 스몰 일당 중에서 인도 출신 범죄자가 나온다. 그는 앤다만 섬의 토인으로 독화살을 쓰는 자다. 8장에서 나오는 토인은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앤다만 섬의 토인은 지구에서 가장 키가 작은 인종이다. (중략) 성질은 잔인하고 여간해서는 다른 사람과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중략) 그들의 얼굴은 흉하고 손발은 아주 작다. (중략) 영국은 오랫동안 그들을 평화로운 백성으로 길들이려 했지만 실패한 사실이 있다. 그들은 난파선을 습격하여 살아남은 사람을 막대기로 치거나 독화살로 쏘고 고기를 먹는다’이 인물은 야만적이며 전혀 문명화되어 있지 않은 식인종이다. 영국인을 죽인 것도 토인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인도 야만족이 영국인을 죽이기보다 영국인이 인도인을 죽인 숫자가 훨씬 많았다. 이러한 현실은 작품에서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심지어 홈즈가 유일하게 죽인 사람이 토인인데도 이 점 역시 중요하지 않게 여겨진다.스몰의 생각도 인도인의 소외를 보여준다. 세포이 항쟁으로 추측되는 폭동이 있을 무렵, 스몰은 인도인 일당과 함께 그 보물 중 절반을 얻는다. 여기서 스몰은 마치 인도인이 영국인을 공격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듯 말한다. ‘토인 병정들의 총이나 나팔, 입고 있는 옷들은 모두 영국에서 받은 것이었는데 얄궂게도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영국을 공격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국의 부가 인도에서 빼앗아간 것이다. 작품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없다.
    인문/어학| 2011.12.18| 3페이지| 1,000원| 조회(102)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12
12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8
  • A좋아요
    2
  • B괜찮아요
    1
  • C아쉬워요
    1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03일 일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5:58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