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대,서태지,그리고 저항홍종윤 석사과정Ⅰ. 여는 글 : 서태지 와 신세대 문화Ⅱ. 대중음악 : 서태지의 존재기반으로서의 음악과 산업1. 예측가능한 사운드의 구조2. 관습적인 가사내용3. 음반회사, 방송사, 그리고 국가4. 서태지 문화의 저항근거점, 대중의 문화적 실천Ⅲ. 서태지 뮤직비디오 분석1. 자유와 저항의 상징 : 용모 appearance2. 나 와 너, 그 자기중심성과 동등성의 구현 : 노래말3. 통제된 일상적 움직임의 거부 : 춤Ⅳ. 맺는 글Ⅰ. 여는 글: 서태지 와 신세대 문화가히 열풍이라 할 만했던 대중문화 연구의 붐이 이제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듯하다. 기획의 참신성을 무기로 대중의 일상적 생활에 대한 문화적 탐험을 시도하는 시리즈물의 줄이은 출간, 대중매체 관련 서적들의 출판 붐, 매호마다 특집 이라는 상표가 붙은 문화비평과 매체비평을 품고 진열되는 잡지 등은 이미 낯익은 서점가의 풍경이다. 이러한 대중문화에 대한 집중된 관심과 연구가 그리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특히 현실 변혁운동의 침체라는 상황적 배경과 맞물리는 시기에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는 경우를 역사적으로 종종 목도해 온 것이 사실이며 그것은 기존의 좌파적 실천전략에 대한 일종의 비판적 성격을 띠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의 문화연구는 이전과 달리 보다 발본적인 문제제기를 내포하고 있다. 결코 이전처럼 주변적이 아닌 중심적인 문제설정 영역으로서의 문화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민중문화와 대중문화의 이분법적 대립관계라는 이전의 도식성을 탈피하여 대중들의 구체적이고 다양한 문화적 실천양식의 탐구 노력들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신세대라는 용어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일련의 문화연구영역은 이 중에서도 특히 제일 높은 상품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대가 변하면 앞선 세대들의 반정립상으로서의 신세대는 항상 있기 마련이고, 더불어 요즘 애들 버릇 없어라는 상투어로 시작되는 기성세대들의 신세대 타령과 (이는 주로 기성세대 그 자신들의 상실된 패기와 젊음에 대한 자조적 위안물로 뮤지션인 그가 차지하고 있는 특수한 위치가 본 글에서 좀더 중점적으로 착목하려는 지점이다. 거칠게 말해서 서태지는 한국 대중음악 문화 수용의 모순, 나아가 신세대 문화의 모순의 결절점에 자리잡고 있다.서태지를 통해서 감지해 낼 수 있는 신세대 문화의 모순은 자본주의 문화산업의 통제와 그에 대한 저항과 관련되어 있다. 흔히 신세대 문화의 긍정적 측면으로 자신들에게 부과된 억압적인 사회적, 문화적 제한과 지배이념에 의해 일방적으로 제시되는 사회적 정체성을 거부하는 저항이 부각되곤 한다. 이에 대해 그러한 저항이 종국적으로는 체제의 변혁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통제로 귀결되는 한계성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른바 반동일시(counter-identification)'라는 프리즘으로 신세대들을 평가하는 입장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는데, 신세대 문화를 이러한 반동일시의 시각으로 파악하면 신세대들의 저항적 문화는 기성세대의 지배적 가치를 거부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상징적 차원의 수준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사실상 본 글의 기본적인 문제의식도 여기에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반동일시의 시각으로 신세대 문화를 바라보는 것을 그 잠정적인 출발점으로 삼으려 하는데, 굳이 잠정적이라는 단서를 단 것은 주체의 소멸과 주체구성의 약화,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던적인 신세대 문화현상의 분석을 명확히 주체구성이론에 기반한 기존의 방법론에 의거하여 수행한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물론 주체구성을 거부하는 문화가 역설적으로 주체구성이론에 의해서도 잘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주체구성이론적 시각을 온전히 채택한다 하더라도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신세대 문화의 저항적이고 해방적인 측면에 좀 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는 취지에서, 즉 반동일시의 역동일시 disidentification 로의 전화가능성을 열어두며 또한 그것을 적극적으로 고려한다는 취지에서 잠정적이라는 단서를 달기로 한다.이러한 문제의 이슈들에 대한 보수적, 안정적, 현상유지적 사고방식과 관련된, 또한 음반회사들과 방송국들의 활동을 특징지우는 사업방식과 관련된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주입될 수 있는 통제의 유형'으로 제일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안정된 이윤확보를 위한 예측가능한 사운드의 구조, 특히 이미 수익성을 인정받은 특별한 포맷을 따르도록 강제하는 방법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한국적 토착화의 불가능 판단을 받고 있던 랩이라는 음악적 형식을 들고 나온 서태지' 음악의 모험성과 실험성은 당시로서는 충분히 당황스러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대중들의 폭발적인 열광이 당황스러움을 압도하게 되자 음반회사들과 방송국들은 발빠르게 대응하기 시작한다. 서태지'에 의해 촉발된 랩댄스 음악의 인기는 곧이어 현진영, 철이와 미애, 노이즈, 잼으로 이어지는 댄스뮤직들이 순식간에 라디오와 TV 매체를 점령해버리는 결과로 이어졌는데, 이러한 상황은 최단기간 내에 최대의 이윤을 추출해내고 새로운 포맷으로의 전환을 꾀하는 음반회사와 방송국의 전략적 결과물인 것이다.음악적 기호가 쉽게 변하는 대중들의 생리를 겨냥하고 있는 이러한 전략에 대해 서태지'의 대응은 주목할 만한 것인데, 그들은 천부적인 음악감각을 바탕으로 항상 새로운 실험을 수행해 나간다. TV 브라운관에 등장하는 기간 동안 끊임없이 시도되는 이 새로운 음악적 변용은 대중들이 식상함을 느낄만한 틈을 허락치 않으면서 화면을 유린했다. 하나의 노래를 가지고 전주 부분이나 간주 부분의 몇 소절에 변화를 주거나 노래 중간에 파격적인 단절을 설정한다. 또한 춤은 그 자체의 역동적인 움직임만큼이나 계속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하고, 곡을 완전히 재편곡하기도 한다. 끝없는 변화는 원본과 복사본의 구별을 불가능하고 무의미하게 만든다. 난 알아요'에서 환상속의 그대'로, 다시 너와 함께 한 시간속에서'로 레파토리가 이동해갈 때도 이전의 노래들이 폐기처분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노래들이 서로 짜집기되면서 일종의 혼성모방이 무한히 시도된다. 데뷰앨범에 수록된 음악적 형식들인 것과는 어느정도의 차별성을 담지하고 있는데, 서태지의 노래들에 나타나는 사랑은 남녀간의 연애감정이기 보다는 친구간의 우정이나 연대의식에 더 가까운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그 표현에 있어서도 독특한 문체사용으로 색다른 정서적 분위기를 불러 일으킨다.명시적 주제가 사랑이 아닌 것으로는 환상속의 그대'와 Rock'n Roll Dance', 죽음의 늪', 수시아(誰是我)' 등을 꼽을 수 있는 데, 여기서는 환상적인 일상성에서의 탈피와 새롭게 거듭남에 대한 권고, 자유로움에 대한 예찬과 동경,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능력의 발휘와 자신감의 표현 등이 어우러지면서 자신을 억압하는 기존의 사회적 가치로부터의 일탈과 그 해방감이 내면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래의 내용들은 기존의 가치체계에 대한 저항이나 사회적 모순들이 명시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비껴져 있는데, 이는 심각함을 거부하고 즐거움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신세대들의 사고방식의 일면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3. 음반회사, 방송사, 그리고 국가소수의 주요 음반회사들에 의해 장악되는 음반시장과 방송사들에 의한 규제, 그리고 사전심의와 사후검열로 이어지는 음반법을 통한 국가의 개입은 가장 명시적인 통제의 요소들이다. 표절판정과 대마초 사건이 주요한 통제의 수단의 하나로 사용되는 한국 대중음악계의 풍토 덕에 음반회사들과 검열기관 간에 일시적이고 국지적인 이해관계의 대립상황이 도래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들은 서로 유기적인 연결망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서태지'의 경우, 주로 방송사들과의 갈등관계가 몇번 연출되었는데, 갑작스런 출연펑크나 히피풍 복장, 레게 스타일의 헤어스타일 등 돌발적인 행동으로 인한 방송출연정지 결정이 내려진다. 독립적인 영상문화 상품으로서의 뮤직비디오 시장이 아직 보편화되지 않은 한국대중음악산업의 상황을 고려해볼 때, 댄스 뮤지션인 서태지'의 TV 출연정지는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서태지'는 이러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돌파하기보다는 즉각적인 사과와 얌전한 의상과 헤어스타일로의 후퇴를 통해 타협한다.질 수 있는 것이다. 서태지로 대변되는 신세대 문화 또한 이러한 하위문화의 일종으로 기존의 억압적 교육제도로 대변되는 경쟁주의 가치관에 저항하고자 하는 의식적, 무의식적인 욕구가 투영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서태지 문화가 저항적일 수 있다면 그것을 지지하는 문화수용자들과의 긴밀한 교감때문인 것이다. 즉 서태지 음악이 대중의 문화적 실천과 연계되기 때문이다.Ⅲ. 서태지' 뮤직비디오 분석서태지 음악의 빠른 템포와 현란한 율동은 사실상 뮤직비디오의 훌륭한 소재가 되기 충분하다. 아래에서는 시중의 서태지와 아이들'의 뮤직비디오 3종과 TV 프로그램에서의 공연장면 등을 토대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텍스트 속에 내재된 저항성과 신세대적 특성을 살펴보기로 한다.1. 자유와 저항의 상징: 용모 appearance 와 패션서태지와 아이들'의 기호체계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세 명의 멤버들 자신이다. 서태지는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을 지닌, 그러한 음악적 재능의 발현을 위해 학교수업을 일찌감치 외면한 미소년이다. 해맑음과 장난스러움의 이미지가 가득한 그의 앳된 얼굴은 그저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말 잘 듣는 모범학생으로 소개하면 제일 잘 어울릴 듯하다. 그런 외모적 기대감과는 달리 그는 일찌기 입시교육의 규범에서 벗어나 그가 하고 싶어하는 음악을 찾아 비상한다. 헤비메탈 그룹의 베이스 기타 연주자로서의 그의 경력 자체는, 개개인의 개성과 적성을 어두운 교복 색깔 속으로 가둬버리는 획일화된 학교교육에 대한 반항이자 이탈을 웅변하는 것이다. 온순한 맏형의 이미지를 지닌 양현석과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터프가이 스타일의 이주노는 학창시절 교과서 대신 춤을 그들의 유일한 생명혼으로 택한다. 춤은 곧 그들에게 자유의 등가물이었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젖히는 해방공간이었다.무대 위에서 이들 세 명의 구성원들은 각자의 독특한 개성을 지니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평등한 관계를 구성한다. 물론 음악적 측면에서 많은 부분을 서태지에게 의존하고 있지만 그것이 세 가지 개성의 개별적 발현에 .
평론가와 매니아조성진 ([Hot Music]) 편집장국내 음악계-소위 팝 컬럼니스트, 또는 음악 평론가라는 호칭으로 활동하는-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글을 보면, 과연 이게 평론인지 아니면 감상문인지 번역문인지 구분이 안갈 때가 자주 있다. 외국의 자료 등에 게재된 것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번역해 자기 글인 것처럼 하는가 하면, 전혀 어떠한 논조도 없이 유치찬란한 형용어들을 나열해가며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적 감탄사를 중심으로 하는 중학교 독서 감상문식의 글을 쓰기도 한다. 락과 팝에 관한 국내 음악지가 처음 태동하던 1970년대에서 80년대 초반까지 활약했던 소위 1세대 평론가들의 글이 이런 것을 대표한다. 그리고 이런 유형은 현재까지도 젊은 평론가(?)들에 의해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나는 이런 유형의 글을 쓰는 사람 모두에게 '평론가'가 아닌 '매니아'라는 호칭을 부여하고 싶다.매니아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본다면 매우 순수한 의미를 내포하지만 좀더 따지고 들어가 본다면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면을 모두 갖고 있다. 매니아는 무언가를 너무도 사랑하고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다. 특정 대상에 대한 이유없는 그리고 대가를 전혀 바라지 않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매니아는 순수함의 표상이다. 그리고 특정 분야에 몰입해가다보니 삶의 윤활유도 되고 특정 분야에 박식해지기도 한다. 음반 수집을 위해 돈을 훔친다거나 음반가게에서 음반을 슬쩍 가져오는 것, 또는 자기가 좋아하는 아티스트나 음악에 대해 누가 비판하는 것을 참지 못해 시비가 이는 것 등등 이런 것은 매니아의 부정적인 모습들이다. 매니아는 광의의 개념이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평론가도 매니아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의 매니아들과 다른 점은, 평론가는 담론을 생산하는 집단이고 유통시키는 집단이라는 것이다. 평론가의 글 한 줄이 매니아들끼리의 여론을 형성하기도 하고, 또 그 것은 광범위하게 퍼진다. 하지만 잘못된 평론은 엄청난 결과를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담론이 잘못 전달되었을 때 그 피해는 곧바로 담론의 소비자인 음악팬들에게 전이된다. 이래서 평론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평론가는 어떻게 보면 막대한 권력집단일 수도 있다. 때론 유명 평론가의 글 한 줄이 음반 소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평론가는 문화권력을 쥔 자들이다. '문화권련'은 담론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유통구조까지 장악해 음악계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평론가라는 존재의 필요 유무에 대한 논의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음악은 언어처럼 기호의 논리적인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매우 감성적이다. 언어는 어떤 말을 내뱉는 그 순간 그 단어가 뜻하는(또는 규정하는) 의미는 일반화되어 있어 누구에게도 공통적인 의사 전달을 한다. 그러나 음악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언어처럼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느껴지느냐'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A라는 사람은 어떤 음악을 즐겁게 들었던 반면 B라는 사람은 그것을 매우 답답하게 들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음악은 극히 개인적이며 감정적인 것이다. 매니아는 이런 개인적이며 감정적인 느낌을 즐기는 극히 일상화된 집단이다. 반면 평론가는 각자 다르게 들으며 느낄 수 있는 그런 음악이 어떤 정체성을 띤 것인지를 생각하고 각자의 개인적인 느낌의 최대 공약수를 찾아 품질 유무를 논하는 집단이다. 다시 말해 매니아들이 음악을 듣고 느끼는 좋고 나쁜, 또는 슬프거나 기쁜 등의 주관적 감정들을 객관화시켜 미처 경험하지 못한 매니아들에게 '가이드' 역할을 해주거나 또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을 '지적'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B라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는 오랫동안 수많은 음악을 들어 누구와 얘기해도 결코 음악적으로 뒤지지 않는다. 음반만 해도 1만여장이 넘는다. 전 장르에 걸쳐 음악 역사 및 계보를 훤하게 파악하고 있고 그 전망 및 그외의 상황들을 진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막상 자신의 그런 것들을 글로 옮기려 하면 그 순간부터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한다. 자, 그렇다면 이 사람은 과연 평론가일까?결코 아니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음악적 역량이 뛰어나도 그는 평론가가 아니다. 그저 매니아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말을 하기는 쉽다. 그러나 막상 자신의 생각들을 논리 정연하게 글로 옮기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글로 옮기는 작업은 그 자신의 어휘력이나 문장력, 음악적 식견, 어떤 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풀어 나갈지에 대한 효과적인 접근방법론 등 다양한 문제들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평론가라는 것은 바로 이 모든 것을 갖추고 그것들을 적시적소에 포진시키며 자신의 견해를 글로 완성해가는 집단인 것이다. 따라서 평론가는 말이 아닌 글로 그 능력을 심판받아야 한다. 음악에 관해 말을 아무리 잘하고 멘트를 잘할지라도 글 한 줄 제대로 써 내려가지 못한다면 그는 평론가가 아니다. 소설가랍시고 말을 잘한다고 해서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소설가는 곧 문학작품으로 능력을 검증받는 것이다.아직도 음악계에서 글을 쓰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문장 구사와 같은 아주 기초적인 기본기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한 논리력이 결여되어 있어 계속 읽다보면 이 사람의 논점이 무엇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 때도 있다. 음악에 관한 이해도 약해 특정 음악이나 음반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바로크메틀이나 또는 프로그레시브메틀을 쓰면서 베로크 시대의 음악이다 클래식 음악 등에는 전혀 문외한이며, 러쉬나 마하비슈누 오케스트라 등과 같은 밴드 등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결국 이들이 쓰는 글은 거시적으로 조감하는 총체성이 결여될 수밖에 없고 부분적인 분석에 있어서도 설득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재즈를 평론하는 사람들만 봐도 기본적인 클래식 현악 4중주나 오케스트라의 음악 등에 대해 문외한인 경우가 적지 않다. 클래식의 화성적인 지식도 전혀 갖고 있질 않다. 브람스의 작품들을 들어보면 3화음(Triad)을 기본으로 멜로디컬한 진행이 많다.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비틀즈의 음악이다.
서태지와 인물 비교분석20세기를 지나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문화에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이에 서태지와 관련한 자료들 중에서 여러 인물과의 비교분석을 통하여 우리 나라의 대중문화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으면 한다.참고로, 아래의 자료들은 태지존, 우들스. 대자보, TVnTODAY, 스포츠조선에서 서태지와 관련된 인물 비교분석 자료만을 발췌하여 정리하였다. 다음 자료들을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해서는 안되며, 작가와 출처를 밝혀주길 바란다.목 차1.서태지와 신현준-A.지식인과 민중의 숙명적 대결B.유토피아디스토피아 관전요령2.조용필학? 서태지학!3.서태지, H.O.T, 그리고 음악적 자의식4.황순원선생과 서태지5.신해철 & 서태지6.시대의 거울 김민기와 서태지1-A.서태지와 신현준- 지식인과 민중의 숙명적 대결김동렬(drkim@simplexi.com) 혁명이 실패하는 이유의 상당은 지식인과의 관계설정에 실패하는데 있다.사대부, 엘리뜨, 테크노크라트, 노멘클라투라 이들을 어떻게 요리하는가가 개혁의 성패를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스탈린은 무자비한 숙청으로 해결하였고, 마오는 문화혁명의 이름으로 변방에 하방하였으며, 대부분의 사회주의권에서 지식인탄압이 있었고, 그 결과 혁명은 독재화하여 본래의 도덕적우위를 상실하였고 도덕성의 위기는 곧 혁명의 의의를 근본에서 퇴색시켰다.김대중정권이 처한 위기도 근본 역사에 있어서 무수한 혁명과 개혁들이 지식인, 부르조아와의 관계설정에 실패하므로 하여 좌절한 것과 동일한 속성을 가진다.조광조와 송시열에 관한 책이 서점가에 나왔는가 본데 두가지 지식인의 상을 보여준다. 혁명가로서의 지식인과 수구세력으로서의 지식인의 모습이다.그대는 조광조인가 송시열인가?체 게바라는 적어도 조광조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나 조광조의 후학이 되어 조광조의 명예를 물려받은 송시열은 조광조를 충분히 팔아먹고 전혀 조광조가 아니었다. 카스트로 역시 친구 체 게바라의 명예를 빌되 전혀 체 게바라가 아니었다.묻노니 그대는 여태 조광조인가민이 시스템의 바깥으로 빠져버린다. 이때 여전히 시민을 시스템 안에 붙잡아놓기 위하여 황제가 필요해진다.즉 소수 원로원의 권력을 다수 민회로 돌려주는 것이, 민주주의인데 생산력-생산관계 시스템의 순조로운 발전이 주어지지 않으면, 시민은 이 시스템에서 제거되고, 민회의 권력은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황제가 등장하며 황제가 민중을 대표하게 되고, 황제의 권력이 높을수록 민주주의가 되는 역설이 발생한다.즉 독재가 민주주의라는 아이러니가 탄생하는 것이다.이를 서태지소동에 비유해보자. 초기 권력은 소수 가요계 주변에 의해 독점된다. 팬들은 단순한 소비자에 지나지 않고, 가요계의 한 축을 담당하지 않는다. 즉 가요계라는 시스템에서 소수 귀족들만이 권력을 누리며 민중은, 곧 팬들은 배제된다. 팬들은 그냥 가요계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다. 가요계는 극소수 가수들과 신현준같은 평론가들을 위한 그들만의 안방이 된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신라의 화백제도 처럼 소수귀족의 특권을 의미할 뿐이다. 이때황제가 등장한다.한명의 스타가 뜨면 팬들이 조직된다. 팬클럽이 만들어지고 이때 조직화된 대중은, 더 이상 단순한 소비자의 위치에 머무르지 아니한다. 조직된 팬들은 가요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그들의 기득권을 빼앗는다. 신현준 같은 글배운 지식인이 왜 서태지를 비하하는지 알수 있다. 자기밥그릇 지키기인 것이다.가요계 귀족들은 일반 팬들을 가요계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너희들이 언제부터 음악을 알았느냐" 이거다. 너희들은 말잘듣는 소비자로서 그저 충실하게 주는대로 받아먹기만 하렸다.대중은 그 시스템 안에서, 자기존재를 보존하기 위하여, 황제를 필요로 한다. 그 황제가 계속 대중의 편에 서 있는 한은, 시스템은 테크노크라트인 귀족과, 긴장관계를 형성하며 민주주의를 구가한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첨예한 긴장 가운데 절묘한 균형을 가지고 겨우 존재한다.태평시기에 천하가 안정되면, 황제는 민중을 배반하고 한명의 귀족이 되어 버린다. 즉 시스템은 작동을 중지하고, 더 이상 전쟁은 없으며 전쟁은근한 이야기들은 뒤쪽에 있는 법이다. 뒷장부터 펼치면 유토피아디스토피아가 눈에 들어온다. 먼저 정훈이님의 만화를 보고, 다음에 와호장룡은 별이 다섯개인데 왜 공동경비구역JSA는 세 개반 밖에 안되냐고 따져보게 된다.김규항 역시 냉소적이라는 면에서 유쾌하지 않지만 그래도 공감하는 경우가 많다. 신현준에 대해서는 '장선우의 모든 영화를 안보기로 올해 계획을 잡았다'는 거 외에 기억할 만한 것이 없었다.(장선우 이 아저씨는 안된다꼬 봄. 영화계 퇴출 대상 1호다)굳이 인상을 말한다면 서태지에 대해 철저하게 냉소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 새로 얻어들은 정보로 말하면 안티서태지활동에 대해 냉소적인 지식인답게 '중립적인 참여(?)'를 표명했다는 거 정도이다.중립적인 참여라..절묘하다. 그거 참..! 할말을 잃는다.이 아저씨에 대해 다시 함 생각해보기로 하자며 지난 글을 디비는데 씨네21 지지난호에 올라온 '서태지 컴백 관전요령'이 눈에 들어온다. 서태지 이후에 대한 예상평이 있다. 예리하다.이런 대목도 있다. 그의 심사를 이해할 법도 하다."문화평론가들은‘서태지특수’로 잠시 분주해질 것이다(확률 75%).TV 방송사에서 ‘X만원에 10초 출연’해달라는 요청도 꽤 있을 듯."한겨레 서태지토론방에 가보니 '신현준죽이기(?)'로 난리가 아니다. 어쿠! 그새 제법 바쁘셨군. 이쪽에 막고 저쪽에 치랴 힘도 좋으시다. 하긴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이 거기서 일부 서태지팬들이 '신현준 뒈져버려!'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든다.이런 미묘한 상황에서 지식인이 어느 줄에 서야 잘된 보신주의로 소문이 날꺼나? 김규항은 신현준이 주간조선(맞나?)에 기고하는거 쯤이야 '지지한다'고 말했지만 유쾌하지 않다. 하긴 누가 말하길 '남의 밥벌이는 건드리는 것이 아니다' 하더라만.그렇다. 나 또한 개떼처럼 몰려들어 신현준을 물어뜯는 우매한 군중들 속의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한명의 '황제'가 필요했고 이 질식할 것만 같은 시대를 견뎌내면서, 그 한명의 황제가, 혹은 초 순진한 감정은 원초적으로 해당사항 없는 논외였었나 말이다.누가 한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부자 서태지가 저항을 노래한다는 건 이상하다"고 표현한 넘은 "돈 벌어서 어디다 쓸거냐"하고 물은 어떤 기자넘, 그리고 은메달 강초현에게 장학금 주겠다고 우낀 조성모 만큼이나 그냥 한방 턱주가리를 때려주고 싶다.목차로이동2.조용필학? 서태지학!우들스 출처:우들스(1999/2)외국에는 이미 한 스타에 대한 음악적, 사회적 연구를 체계화시켜 학문으로 발전시킨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비틀즈 학'은 이미 '비톨로지'라는 이름으로 전문화된지 오래고, 마돈나의 경우 그녀 자체가 하나의 학과목으로 정해져 있는 대학도 있을 정도이다. 이는 현대 문화계에서 대중문화의 비중이 날로 커지고 있고, 스타는 그당시 사회의 산물이자 특정 장르가 아닌 대중문화와 미디어의 유기적인 관계에 의한 결과물임을 생각해 봤을 때 당연한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 특유의 연예인 경시풍조로 인해 이런 시도는 아직 우리나라에서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이런 가운데 음악, 미학등의 평론가 10여명으로 결성된 '조용필 연구모임'이 생겨 화제다. 전북대 김익두 교수가 주축이된 이 모임은 조용필의 음악 및 인문사회학적 의미에 대해 연구할 목적으로 생긴 것으로, 조용필의 음악이 김지하의 '생명사상'과 맞닿아 있다는 독특한 관점으로 출발한다. 폭발적이었던 80년대의 노래에서 90년대로 넘어오면서 화해화 용서를 구하는 노래로 변해간다는 것. 또, 언제나 끊임없는 장르변신을 하면서도 인기를 얻었고, 그 노래속에 한국인의 사랑, 한, 희망을 잘 표현해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 뮤지션이라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이런 대중문화의 학문적 접근 시도는 학계에서 처음 있는 일.그러나, 범위를 학계가 아닌 일반 음악팬층까지 넓히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미 조용필 이전에 오히려 조용필보다 학문적으로 토론이 오고 갔던 음악인은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이미 그들이 4집 활동을 할 때였던 95년, 국내 것이 음악성과 깊은 관계가 없다면 서태지 신화는 어떻게 창조되어진 것일까? 감각적이고 세련됨, 신선함, 그것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였다. 사실 서태지의 앨범들은 어떤 뚜렷한 장르적 일관성과 깊이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았다. 국악과의 퓨전, 락, 갱스터 랩, 얼터너티브 락, 그의 앨범은 매 번 색깔이 바뀌었고 그 음악의 색깔에 따라 그의 패션과 춤이 바뀌었다. 그 매 번의 새로움이 10대 팬들의 감각을 사로잡았고 열광케 했던 것이다.서태지 개인의 카리스마 역시 한 몫 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곡을 작사 작곡하고 프로듀싱 해내는 보기드문 오버 그라운드의 음악 감독이었으며 천재라는 수식어가 이러한 그의 능력을 더욱 휘황하게 만들었다. 이미 잘 알려진 탁월한 신비주의적 전략 역시 그를 이 시대 최고의 문화 영웅으로 만드는 데 일조 했음은 물론이다.중요한 것은 서태지가 음악을 잘 만들고 못 만들고가 아니다. 사실 대중들은 대체로그 음악을 판별할 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대중들에게는 어린 나이의 서태지가 고등학교를 때려치우고 사나위에서 베이스를 연주했다는 것, 그리고 전곡을 스스로 만든다는 그 사실이 보다 더욱 중요하고 그것이 곧바로 H.O.T에게 가해지는 비난의 제일성이 되는 것이다. 사실, 서태지가 새로 들고 나온 핌프 락과 H.O.T의 힙합 중 어느 것이 더 낫다 그르다 말할 수 있는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그것은 기성 세대들에게 똑같이 소음일 따름이다. 가령 서태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H.O.T에 별로 호감을 가지고 있지 못한 청자에게 서태지의 '울트라맨이야'를 서태지가 아니라 H.O.T가 불렀다면 과연 똑같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서태지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보다 더 오래도록 활동을 했어야 했다. 그는 분명 사막같이 건조한 한국 대중들의 귀 한 쪽 영역을 확장시켰다. 그것도 언더가 아닌 오버 전면에서 하나의 폭풍 같은 문화 기호로서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 신선한 음악적 영역을 깊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가 좀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