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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교론] 80년대 이후, 중-소 관계 개선과 3대 장애 요인
    『80년대 이후, 중-소 관계 개선과 3대 장애 요인』영어영문학과 010080 김주연Ⅰ. 서론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시대가 바뀌면서 양국간에는 밀월적대관계정상화 등의 다양한 형태로 외교관계가 도출됐다. 이는 양국간의 국내 상황에 의한 영향도 있었지만 외부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정리에 의한 영향도 결코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등소평의 개혁정권이 등장하면서 중소관계 개선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지만, 중국은 소련에 대해 기존의 대중 포위 전략을 전면적으로 포기할 것을 요구하였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등장, 신사고 외교를 제안하면서 중국의 요구를 수용, 마침내 1989년 중소 국교정상화가 실현되었지만, 중국의 천안문사태와 소련 연방의 해체 등으로 중소관계가 표류하였다. 그러나 소련 연방을 계승한 러시아공화국의 등장으로 소련 위협 요인이 소멸되고, 一超多强의 탈냉전시대에 미국의 패권주의를 견제할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가 형성 발전하게 되었다.그럼 이제 구체적으로 중국과 소련의 관계 개선의 상황과 중국이 주장한 3대 장애 요인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Ⅱ. 본론 -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중소 국교정상화1980년대 초에도 중소관계는 대결과 갈등의 악순환을 계속하였다. 중국에서 대담한 개혁개방 정책이 추진되고, 소련에서도 현실사회주의의 정체성을 극복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소관계의 개선이 필요했지만, 전통적인 상호 불신과 양국의 국내적 여건의 미성숙 때문에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중국 개혁개방에서 미국 및 서구와의 관계를 더 중시하는 개혁파 정권의 입장에서도 중소관계 개선은 필요하였다. 미국과의 협력과정에서도 소련 카드의 사용은 전략적으로 필요했고, 또한 경제발전과 현대화에 집중하기 위해서도 중소 분쟁이 초래할 수 있는 안보 위기를 경감시킬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중소관계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 지도부의 입장에서 중소관계개선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중국에 대한 소련의 위협이 실질적으로 소멸되었다는 점이 입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3가지 전제조건의 실천을 주장하였다. 그것은 곧 중소 국경선에 배치된 소련 병력의 철수, 아프가니tm탄에서의 소련군 철수, 그리고 캄보디아 문제 해결을 통해 소련이 중국 적대정책을 포기했다는 것을 행동으로 먼저 보이라는 것이었다. 중국의 이런 요구는 사실상 소련 의 대 아시아정책 기조의 일대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결국 그런 정책 전환은 고르바초프의 등장으로 소련 국내외 정책의 일대 전환이 시도되는 시점까지 유보될 수밖에 없었다.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85년 고르바초프가 등장한 이래 소련은 소위“신사고”외교를 주창하면서 미-소 관계와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에 대한 대담한 정책 변화를 시도하여 1989년 소련과 미국의 몰타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는 냉전의 종식, 미국과 소련의 화해와 협력에 기초한 신 국제질서 시대의 개막을 선언하였다. 동구 문제에 대해서도 소련의 개입을 정당화했던 이른바 브레주네프 독트린을 포기함으로써, 동국 대변혁과 독일의 통일이 실현될 수 있게 하였다.이와 같이 고르바초프의 신사고 외교는 유럽에서의 냉전질서 붕괴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동시에 아시아에 대한 소련의 기존 정책에도 중대한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게 하였다. 1986년 7월의 블라디보스톡 연설, 1988년 9월의 글라스노야르스크 연설에서 고르바초프는 아시아-태평양지역에 대한 소련의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한 이래, 이 지역에서의 긴장완화와 경제협력을 증진하려는 소련의 신 아시아 정책을 정력적으로 추진하였다. 그것은 소련의 시베리아 개발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 경제와 연계해야 하며, 그렇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소련에 대한 경계심을 완화시키고, 지역적 긴장완화가 필요하다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따라서 고르바초프는 중소 관계 정상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주변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기 위해서도 중국이 주장하는 3가지 요구를 단계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이를테면, 소련은 1987년 이후 단계적으로 중국과의 국경교섭을 통해 국경선확정을 시도하면서도 국경분쟁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하였고, 1988년 4월부터 단계적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의 철병을 착수, 1989년 2월에 완전 철수를 실천하였다. 또한 고르바초프는 1988년 12월 유엔 총회 연설에서 아시아에서 20만 병력 감축을 선언하였고, 그것을 또 실천하였으며, 베트남을 설득해서 캄보디아로부터 베트남군의 철수를 실현함으로써 사실상 중국이 국교 정상화의 전제 조건으로 요구하던 3가지 사항이 실질적으로 해소되었다. 이와 같은 고르바초프의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로 1989년 5월 16일 고르바초프의 중국 방문이 실현되었고, 등소평 - 고르바초프 정상회담을 계기로 중국과 소련의 국교 정상화가 실현되었다.* 중·소 공동성명중국과 소련은 사회주의 맹주자리를 놓고 오랫동안 치열한 다툼을 해 왔기 때문에 국제질서가 바뀔 때마다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양국간의 관계가 정상궤도에 이르게 되면서 협력관계 동반자의 입장에서 공동성명을 여러 번 발표했다. 여기서 가장 대표적인 공동성명 몇 가지를 들어보면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1989년 5월 15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중국을 방문하여 양상곤(揚尙昆) 국가주석과 등소평 중앙군사위 주석, 이붕 총리, 조자냔 당 총서기와의 회담 등 양국정상회담 실현으로 중·소 이념분쟁 이래 30년간 냉전 상태에 있던 양국 관계를 정상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때 고르바초프는 중국 지도자들과 공동성명을 발표한 후 귀국했는데 이 공동성명의 요지를 보면, 평화 5원칙에 입각한 양국관계 발전 추진 및 평화적 협상을 통한 분쟁해결에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호혜평등의 원칙아래 양국간 경제·사회·문화·과학·기술 분야에 있어 협력 노력을 증진한다. 이외에 쌍방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어떠한 형태의 패권추구 시도나 행동도 배격하며, UN의 권위 강화 지지 및 세계 평화 발전에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이는데 합의했다.이 후에 두 나라는 1990년 4월 23일 이붕 중국 총리가 소련을 방문하여 고르바초프 및 리즈코프 수상과의 회담을 통해 '평화공존 5원칙'에 기초한 협력 확대와 지속적인 대화가 필요하다는데 인식을 같이 하고 국경병력 감축협정, 경제·과학기술 장기 협력협정 등 6개의 협정을 체결했다. 6개의 협력 협정을 구체적으로 들면 소련의 대 중국 장기차관 공여에 의한 중국 핵발전소 건설에 협력한다. 쌍방 및 국제적인 관심사에 대한 협의 차원에서 중·소 외교부간 의정서를 체결한다. 장기 경제·과학기술협력 및 발전에 상호 협력한다. 국경지역 군사력 상호 감축 및 군사 분야 신뢰를 추진한다. 우주공간의 평화적 이용 및 연구개발에 관해 서로 협력한다. 중국은 경공업제품 및 의류를 포함한 일용품 500만 스위스 프랑을 단기차관으로 소련에 제공한다.두 나라의 관계는 1991년 5월 15일 강택민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소련을 방문하여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 이 때 나온 공동성명의 요지를 보면, 중·소 관계, 국경문제, 대만문제, 사회주의 노선과 개혁, 국제정세, 한반도문제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중·소 관계에서는 양국은 정치·경제·무역·과학기술·군사 등 각 분야에서 상호협력관계를 안정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민간 접촉을 장려하고 이들 간의 교류·협력을 적극 추진하고 민·사법 사건의 처리에 관한 사법적 지원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협의해 나간다. 또한 양 국가는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는 국경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협상을 계속하고, 양국 군대의 정상적인 우호협력·교류를 지속시켜 나간다. 대만문제에 있어서는 중국 측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만이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대만은 분리될 수 없는 중국 영토의 일부분임을 강조했으며, 소련은 이런 중국의 입장을 적극 지지했다. 국제정세에 있어서는 양국은 어떤 형태의 패권주의도 반대한다는 방침을 재확인했으며, 새로운 세계질서 수립과 아·태지역의 평화안보를 위해 상호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는 양국은 한반도의 긴장완화가 동북아 전체의 안정과 안전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남북한 쌍방에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적 통일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어떤 행동도 자제할 것을 호소했다.
    사회과학| 2004.01.02| 4페이지| 1,000원| 조회(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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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정치] 여말선초의 성리학적 정치 담론에서의 개혁과 안정
    『여말선초의 성리학적 정치 담론에서의 개혁과 안정』영어영문학과 010080 김주연Ⅰ. 서론성리학은 원래 송의 주희가 완성한 것으로, 종래 자구의 해석에 주력하던 한. 당의 훈고 학풍에서 벗어나 인간의 심성과 우주의 원리 문제를 철학적으로 규명하려는 신유학이었다.성리학이 고려에 처음 소개된 것은 충렬왕 때 안향에 의해서였다. 그 후, 백이정이 직접 원에 가서 배워와 이제현, 박충좌 등에게 전수하였으며, 고려 말 이색(李穡), 정몽주, 권근(權近), 정도전(鄭道傳) 등이 성리학을 발전시켰다. 그 중에서도 정몽주는 '동방 이학의 조' 라는 칭호를 들을 만큼 뛰어난 성리학자였다.고려에 수용된 초기의 성리학에서는 형이상학적인 면보다는 일상 생활에서 관계되는 실천적 기능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주희의 소학이 중시되었다. 또, 예속을 바로 잡기 위해 소학과 함께 주자가례(朱子家禮)가 권장되었다. 한편, 정도전(鄭道傳)을 비롯한 일부 성리학자들은 불교 사상 자체가 현실과는 유리된 허황한 것이라 하여 불교 자체를 공박하기도 하였다. 성리학의 수용으로 종래의 훈고학적인 유학 철학적인 유학으로 바뀌었으며, 고려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는 쇠퇴하고 성리학이 불교를 대신하여 새로운 국가 사회의 지도 이념으로 부상하게 되었다.그러면 이제 [창업과 수성의 정치 사상]의 대략적인 내용과 그 중에서 특히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에 대한 좀 더 자세한 필자의 생각과 느낌,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Ⅱ. 본론성리학이 대안의 정치 담론으로 확립되기 위해서는 첫째로 유, 불, 도 3교의 경합 상대를 극복하고 유교의 독점적 지위를 보장해줄 수 있는 철저한 벽이단론(闢異端論)이 확립되어야 했고, 둘째로 정치 지도자의 자격이 출신 성분이 아니라 학문적 교양과 능력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이른바 성인가학론(成人可學論)을 확립함으로써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갖지 못한 신진 사대부들이 정치에 더 많이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줄 필요가 있었다.성리학이 대안적 정치 담론으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경쟁적인 담론들에 대인간 존재의 법칙을 하나의 원리로 이해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둘째로 주자의 본체론 적 이기론(利己論)은 그것을 그대로 인간의 문제에 적용하면 인성론이 된다. 세 번째로 주자는 이기론적 인성론에 따라 맑고 깨끗한 본연의 성을 회복하고 어둡고 탁한 기질의 성을 극복하는 윤리적 실천을 강조했다.고려 시대 유학의 전반적인 경향은 귀신과 죽음을 경원하는 고대 유학 사상의 현실 지향적 측면을 수용하여 정치 제도의 실질적 운영과 관련해서는 유학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종교적인 내면 세계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불교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고려 말에 성리학이 지배적인 정치 담론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성리학에 대한 예비적인 이해를 통해서 성리학 수용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민왕은 개혁 정치의 일환으로 흥학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구 정치 세력과는 연계되지 않은 신흥 정치 세력을 집중적으로 등용했고, 이 과정에서 안향 이래로 좌주-문생 관계를 통해 정치적 연대를 강화시켜 가고 있었던 성리학자들이 대거 중앙 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이색은 공민왕의 개혁 정책을 주도함으로써 순조로운 정치적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색의 개혁 노선은 그가 정치권력의 핵심에 접근해 가는 과정에서 점차 보수적인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이는 결국 이생으로 하여금 급진 개혁 세력과는 다른 길을 선택하도록 만들었으며, 구 체제의 수호를 주장하던 이색의 의지는 좌절된 대신에, 이성계 세력에 의해서 새로운 국가의 건설이 주도되었던 것이다.왕조 교체의 갈림길에서 새로운 왕조의 건설을 선택했던 정도전(鄭道傳)은 역성 혁명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국가의 제도적 청사진을 제시했고, 불교와의 정통성 논쟁을 주도한 이론가였다. 그러나 정도전(鄭道傳)은 혈통상의 하자 때문에 평생을 시달려야 했고, 자신의 태생적 불운을 보완해 줄 후원자를 직접 찾아 나서야 했다. 그는 재간 있는 여우가 되는 데는 성공했지만 불행하게도 사자의 위엄을 갖추지는 못했 기준으로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을 비교한다면, 정도전(鄭道傳)의 정치 인식을 수기보다는 치인을 강조하는 창업의 정치론인 반면에, 권근(權近)의 정치 인식은 치인보다는 수기를 강조하는 수성의 정치론이다. 따라서 정도전(鄭道傳)의 창업론이 혁명과 새로운 질서의 수립을 강조하는 난세의 정치론 이라면, 권근(權近)의 수성론은 안정된 시대의 도덕적 긴장을 강조하는 치세의 정치론이다. 후대에 미친 영향을 고려하여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의 사상적 특징을 대별한다면, 정도전(鄭道傳)의 경우에는 객관적 존재의 세계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던 데 비해서, 권근(權近)은 그의 천인 심성 합일론 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가치의 세계에 일차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따라서 문제의식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정도전의 존재의 세계에 대한 관심은 서경덕(徐敬德)의 존재론적 사유로 연결됨을 볼 수 있고, 권근(權近)의 가치의 세계에 대한 관심은 이언적(李彦迪)의 도덕적 인간학과 연결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내면적 도덕성을 강조하는 이황과 상황 주의적 정치 지향을 가지는 이이가 조선조 성리학적 정치담론의 두 주류를 형성했음을 염두에 둘 때, 정도전(鄭道傳)의 객관적 존재세계에 대한 강조와 치인 중심적 사고 및 권근(權近)의 가치의 세계에 대한 강조와 수기 중심적 사고는 각각 화담과 외재를 거쳐 율곡과 퇴계로 이어지는 원형이 되었다고도 판단할 수 있다.성리학적 정치 체제 구상의 방법론과 체제 개혁의 방향과 정치 체제의 구상에 있어서 이색과 정도전(鄭道傳) 그리고 권근(權近)은 분화된 모습을 보인다.우선 성리학적 정치 체제 구상에 있어서 이색은 도덕 중심적 정치 인식, 정도전(鄭道傳)은 치인 중심적 정치 인식, 권근(權近)은 안전 지향적 정치 인식으로 분화되었다. 이색(李穡)은 성리학을 정통 담론으로 인식하고 그 실천 윤리적 측면에 주목하기는 했지만, 성리학을 유일한 지배 담론으로 확립하여 기존의 권위와 정치 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데 활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분이 달성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다음으로 이색(李穡)의 순응주의적 세계관, 정도전(鄭道傳)의 합리적 개혁주의 세계관, 권근(權近)의 가치 통합적 세계관을 살펴보면, 이색은 성리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정치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했다. 그는 성리학을 정통 정치 담론으로 확립하여 새로운 정치 체계의 대안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지위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색의 성리학적 인식은 성리학적 세계관의 한 측면인 보수주의적이고 도덕 지향적인 측면에 치중되어 있었다. 그 결과 이색(李穡)은 기존 정치 체제의 유지를 중시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서는 정치 지도자의 내면적 수양과 도덕적 교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수기보다는 치인을 강조하는 정치 인식의 이론적 기초는 변화를 강조하는 세계관이었다. 정도전(鄭道傳)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는 성리학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었지만, 그 구체적인 입장은 변화와 발전에 대한 관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정도전(鄭道傳)에게 있어서 태극은 세계의 무궁한 변화와 발전 가능성을 인식하게 해주는 논리적 기초였다.또한 권근(權近)은 우주론과 인성론 및 실천론을 하나의 체계 속에 용해시켜 성리학적 정치 담론의 이론적 체계화를 시도했다. 뿐만 아니라 권근(權近)은 성리학적 정치 담론을 조선의 정치 사회에 침투시키는데 있어서, 주자의 해석에 구애 받지 않고 조선의 정치적 상황과 그에 대한 자신의 문제의식에 기초해 독자적인 이론화를 시도했다.다음으로 불교에 대한 대응 양식에 있어서는 이색(李穡)은 유불동도적 불교 인식을, 정도전(鄭道傳)은 정통/이단의 구분과 실천적 배불론을, 권근(權近)은 세계관의 정교화와 내면적 벽이단론을 주장하였다. 이색(李穡)은 성리학을 정치 담론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그가 불교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성리학에 대한 체계적이지 못한 인식은 그로 하여금 불교 신앙의 효용성을 긍정하는 양면성을 띠게 했다.정도전(鄭道傳)에게 있어서 불교적 세계관은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방법론을 결여한 것 안정을 위해서는 정치 체계의 전반적인 체질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이색(李穡)의 체제 개혁에 관한 기본적인 입장은 기존 체계의 유지에 부합되는 한도 내에서의 부분적인 개선, 죽 체제 유지적 한계 조정을 지향하고 있었다.오히려 정도전(鄭道傳)이 지향했던 체제 재혁의 기본적인 방향은 구체제의 혁명적 청산과 새로운 정치 질서의 신속한 건설이었다. 정도전(鄭道傳)이 참여한 새 왕조의 모든 설계도는 창업을 강조했던 혁명적 추진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들이었다.또한 권근(權近)의 시중적 제도관은 상고론과 시의론의 통합을 지향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제도의 안정적 운영이 강조되는 수성 시대의 문제의식에 기초하고 있었다. 권근(權近)은 제도 자체의 문제보다는 성리학적 정치 담론의 이론적 심화와 사회적 침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다음으로 정치 체제를 구상함에 있어서 이색(李穡)은 왕권 중심적 정치 체제를, 정도전(鄭道傳)은 신권 중심적 정치 체제를, 권근(權近)은 재상 중심적 신권론을 주장하였다. 이색(李穡)의 주장은 왕통에 약간의 하자가 있다 하더라도, 이것 때문에 극단적으로 고려 왕실을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군신 관계를 가족 관계에 기초한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에서는 군주에 다한 견제를 강조하는 신권의 관념이라든가 구 왕실을 버리고 신 왕조를 선택하는 역성 혁명의 논리는 용인될 수 없었다.정도전(鄭道傳)에게 있어서 군주가 토지와 인민에 대한 최상급 소유권자라는 사실은 별도의 사적 소유권을 제한할 수 있는 근거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도전(鄭道傳)은 과감하게 한당(漢唐)의 사례를 인용하여 군주의 사유재산 보유가 모든 폐단의 근원임을 주장할 수 있었다. 정도전(鄭道傳)의 재상 중심론으로 인해 야기된 왕권론과 신권론의 갈등은 조선조 정치 체계의 장기적이고 역동적인 균형을 촉발시킨 요인이었다. 이러한 왕권론과 신권론 사이의 갈등은 조선조 정치 체계에 긴장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통태적인
    사회과학| 2004.01.02| 7페이지| 1,000원| 조회(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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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문학] Emily Dickinson의 Poems 평가C아쉬워요
    『Emily Dickinson의 Poems』영어영문학과 010080 김주연Ⅰ. 서론미국 문학 사상 가장 훌륭한 여류시인 중의 한 사람인 Emily Dickinson은 지적이며 함축적인 내용과 응축된 시 형식을 사용한 독특한 시인이다. 따라서 그녀의 시는 상징성이 짙어 20세기 모더니즘 시처럼 난해하다. 난해한 Dickinson의 시를 이해하는 데는 그녀의 특이한 삶에 의해 형성된 독특한 심미적 태도를 알아야 한다. Dickinson은 1860년대 초 은둔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시인으로서의 자각을 하게 되면서 시 이론과 시적 기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녀는 전통적인 시 형식을 버리고 자신의 독특한 시적 이미지와 감각으로 시 형식을 개발하였다. Dickinson의 시는 어휘가 비록 한정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압축된 그녀의 시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그럼 이제 그녀의 일생과 시세계, 그리고 그녀의 대표적인 시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Ⅱ. 본론1. 생애Emily Dickinson은 1830년 12월 10일 미국 Massachusetts 주 Amherst에서 변호사이자 정치가인 Edward Dickinson의 청교도의 가정에서 3남매 중 둘째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그녀는 소녀 시절엔 명랑하고 사교적이었지만 성격이 점차 내성적으로 변하여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고, 문밖 출입을 거의 하지 않은 채 독신녀로 폐쇄적인 삶을 살았다.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여동생 역시 그녀처럼 독신으로 지냈고 오빠인 Austin은 Dickinson의 친구인 Susan과 결혼해 옆집에 살았다. 할아버지 Samuel Dickinson은 Amherst 대학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며, 아버지 Edward Dickinson은 이 대학에서 재무이사를 지내기도 했다.그녀는 철저히 남들과의 관계를 피하고 은둔생활을 하긴 했지만 그녀는 생전에 여성들뿐만 아니라 두세 명의 남자와도 교분이 두터웠던 듯하다. 그러나 그녀의 편지나 시의 내용으로 보건대 아무래도 그녀와 누구보다 가까이 지낸 사적으로 자신을 집안 울타리 속에 고립시킨 채 거의 30년 동안 고독과 좌절 속에서 영원에 대한 진리와 불멸을 찾아 나섰다. 그러므로 Dickinson의 은둔은 단순히 외부 세계와 단절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다 더 깊은 정신 세계로 나아가 인간과 사물 그리고 우주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상상력을 배양하기 위한 것이었다.Dickinson은 New England의 신의 절대 주관과 인간의 죄 된 속성을 강조하는 청교도 주의,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초월주의 운동, 그리고 과학과 이성을 밑바탕으로 하는 실증주의적 사고가 서로 교차하며 새로운 가치관이 형성되어 가던 시대인 19세기 후반에 살았던 시인이다.그녀는 어려 서부터 이미 어떤 외적 조건에도 굴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고집을 지니고 있었으며, 점차 인습적 가치관을 싫어하고 자유 분방한 정신을 좋아하는 자유주의자로 성장했다.그녀는 청교도 가문에서 성장하였지만 청교도적 신앙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소녀 시절 친구들이 종교적 열정에 휘말렸을 때도 신앙의 확신을 얻지 못했으며, 1844년 Amherst가 온통 신앙 부흥 불결에 휩싸였을 때도 그녀는 신앙의 확신을 얻지 못했다.청교도 정신으로 무장된 주변 사람들이 Dickinson에게 기독교인으로의 개종을 끝임 없이 요구하였으나 신앙의 확신이 없었던 그녀로서는 청교도 교리에 의존하여 막연한 영생을 위해 개종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캘빈주의적 청교도 사상이 낳은 내세의 불멸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당시 Amherst는 대도시의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조용한 산간 지방 이였기 때문에 청교도 문화가 지배적이었으며, 진보적 사상이나 새로운 예술 형태가 아직 침투되어 있지 않았다. 이러한 청교도적 분위기 속에서도 Dickinson은 Mount Holyoke 학교에서 배운 수학, 천문학, 과학 등의 영향으로 청교도 정신에 홀로 저항하였다.그녀는 “비록 죽게 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위해 이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다” 고 생각했다.Boston이나 인간의 직관력과 상상력, 인간의 신성과 존엄상 등을 강조하였다. 초월주의 사상의 대변자인 Emerson은 Nature, "Divinity School Address" 등 대부분의 그의 저술 속에서 인간의 죄 된 속성과 신에게서의 절대 의존은 강조했다면, 초원주의는 인간의 신성과 자기 신뢰를 강조하였다. 청교도의 예정론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Dickinson은 청교도 교리와 초월주의 사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자신의 영혼 구제에 대한 성찰을 밀도 있게 하였다. 초월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그녀는 “영원은 현재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으며, 그리스도가 인간적으로 되었을 때 신적인 존재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 인간도 인간적일 때 더욱 신적인 존재가 된다고 생각했다.그녀의 생활 주변에서 목격한 마을 사람들의 장례식과 그 장례행렬, 그리고 남북전쟁 때의 수많은 젊은이들의 죽음 등은 초월주의적 사고를 지녔던 Dickinson에게 죽음에 대한 사색을 깊이 있게 하도록 자극하였으며, 죽음은 그녀의 시에 구체적인 이미지가 되어 나타났다. 어느 비평가의 말대로 죽음이란 Dickinson에게는 삶을 위한 매개체였는지도 모르며, 또한 죽음이란 불멸에 이르는 매개체였는지도 모른다. 또한 어느 비평가의 말대로 “Dickinson의 죽음에 대한 시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죽음을 통한 ‘의미의 추구‘이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탐구는 건전한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Wordsworth의 죽음을 보고 나서 그녀는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자문한 적이 있으며, Lord 판사가 죽고 나서 그녀는 불멸의 사실인지 어떤지 의문을 던진 적이 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임종을 앞에 두고 “신은 지금 살아 있는가?”라고 강한 반문을 하였다. 이와 같은 죽음과 불멸에 대한 그녀의 강한 두려움이 자신의 죽음과 자신의 죽은 모습 그리고 자신의 장례식 등을 묘사하는 예술로 승화되었다.Dickinson은 시인다운 예리한 통찰력으로 죽음을 탐구하고, 죽음에 대한 어두운 인식의 세계에서 만족을 얻었다.그녀의 초판 시집들은 그녀의 시들을 사랑Love, 자연Nature, 우정Friendship, 죽음Death, 불멸Immortality등과 같은 인습적인 시의 범주로 나눈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녀의 시의 대부분은 유한한 시간 속에 갇혀 있음을 인식한 자아의 패러독스와 딜레마에 관한 것이므로 인습적인 주제로 범주화 한다는 것은 그녀의 시에 나타난 완곡성과 기지(wit), 및 다양한 인간적시적 특징을 이해하는데 장애가 될 것이다.근자에 들어서 Dickinson을 철학적이고 비극적인 차원의 의미를 지닌 시인, 즉 자신의 기원, 조건, 연고, 운명 등을 끊임없이 이해하려는 인간 의식의 본질과 의미라는 영구적인 의문에 예리하게 응답한 시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전형적인 Dickinson의 시들은 확신에서 시작해서 노골적인 부정은 아니라고 할 지라고 의문으로 끝을 맺는다.그녀의 가장 중요한 시들은 현재의 순간(nows)을 영원(forever)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디킨슨 시의 인쇄상의 특징은 수사적인 강조나 음악적인 효과를 걷기 위한 시인 특유의 구두점, 대문자, 대쉬 등이 많으며 단편적(fragmentary)이라는 점이다.4. Emily Dickinson의 시Success is counted sweetestBy those who ne'er succeed.To comprehend a nectarRequires sorest need.Not one of all the purple HostWho took the Flag todayCan tell the definitionSo clear of victoryAs he defeated---dying---On whose forbidden earThe distant strains of triumphBurst agonized and clear성공은 끝내 성공하지 못한 자들이가장 감미롭게 여기는 것.감로의 맛을 알기 위해서는가장 절실한 욕구가 필요하다.오늘 깃발을 쟁취한보라 빛 승리의 무리 가운데 be the stormThat could abash the little birdThat kept so many worm.I've heard it in the chilliest land,And on the strangest sea;Yet, never, in Extremity,It asked a crumb of me.희망은 깃털 달린 것그것은 영혼 안의 횃대에 앉아 있다.가사 없이 곡조를 노래하며그칠 줄을 모른다.강풍 속에서 부드럽게 들리고폭풍은 매섭다.희망은 작은 새들을 당혹하게 했고그것은 많은 이들을 따뜻하게 했다.가장 추운 땅에서도 희망을 들었고그리고 낯선 땅에서도그러나 위급한 경우나에게 빵 한 조각 청하지 않았다.Dickinson는 1862년에 약 300편이 넘는 시를 썼는데, 이 시는 1861년에 쓰여진 시이다. 출판은 1891년에 출판되었다. 그녀의 시의 특징 중에서 시행이 짧고 어휘가 간략한 점을 이 시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마침표나 대문자, dashes(-)의 사용은 많지 않다.작가는 희망을 새(feathers, perches)에 비유하고 있다. 희망은 마음 속에 있고 항상 노래한다. 강풍과 폭풍은 힘들고 괴로운 상황을 나타내고 그런 상황에서도 희망은 있다.6행까지 현재 시제이고 뒤에는 과거시제를 쓰고 있다. 나는 추운 땅이든 낯선 땅에서든 마음 속의 희망이 노래하는 소리를 들어왔다. 마지막 두 행에서 희망은 나에게 주기만 하는 것이고 나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희망은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다(과거). 이런 희망은 사람들의 마음 속(in)에 항상 존재( never stops at all) 하는 것이다(현재).I never lost as much but twice,And that was in the sod.Twice have I stood a beggarBefore the door of God!Angels―twice descendingReimbursed my store―Burglar! Banke이다.
    인문/어학| 2004.01.02| 9페이지| 1,000원| 조회(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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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현대사상사] I Have a Dream
    Ⅰ. 서론“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내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언젠가 살게 되는 꿈이 있습니다.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 어린이들과 형제 자매처럼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노예 해방 선언을 한 워싱턴의 에이브라함 링컨 동상 앞에 모인 25만 명 흑인들에게 마틴 루터 킹(1929 ~ 1968)목사는 흑인과 백인이 하나 되는 세계에 관한 자신의 소박한 꿈을 역설했다. 1963년 8월 28일 이 날 워싱턴 행진에서 킹 목사의 열변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차별의 족쇄를 찬 채 절름거리며, 가난의 섬에 고립되어 미국 사회의 구석진 곳에서 고통 당하는 2,000만 흑인 형제들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워싱턴의 이 집회 장면은 전 세계로 방영되었고 인류의 미래에 강한 확신과 용기를 주었다. 전 세계는 그 이듬해 비폭력주의 민권 운동의 공로를 인정 받은 그에게 노벨 평화상으로 경의를 표했다.그럼 이제 이러한 킹의 자서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의 전반적인 내용을 간략히 알아보고, 이 책에 대한 필자의 생각과 느낌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Ⅱ. 본론흑인 박해가 심한 미국 남부 애틀랜타에서 침례교 목사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마틴 루터는 강직하고 반인종주의적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흑백 분리 제도의 부당함에 일찍이 눈떴다. 총명했던 그는 19살에 모어하우스 대학을 졸업한 뒤 크로저 신학교에 입학하고, 22살 때 다시 보스턴 대학 대학원에 들어가 55년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대학 시절부터 흑인 민권 운동에 관여했던 그가 본격적으로 이 분야의 운동가로 뛰어든 것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침례 교회 목사로 부임한 뒤 1년이 지나서였다. 이른바 '버스 보이콧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백인 전용 좌석에 흑인이 앉지 못하게 한 흑백 분리법을 위반한 죄로 한 흑인 여성이 체포된 것이 이 운동의 기폭제였다. 26살의 킹은 운동을 선두에서 이끌며 무려 381일 간의 투쟁 끝에 흑백 분리법이 위헌이분수령이 된 63년 워싱턴의 대규모 집회에서 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미국 내 흑인들은 물론 일부 백인 사회에도 깊은 감명을 주었다.그러나 그가 보였던 불굴의 용기와 진실에 대한 굳건한 옹호에 비하면 웅변술은 부차적이었다. ''선에 협력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이듯이 악에 협력하지 않는 것도 도덕적 의무다.'' 정곡을 찌르는 그의 진실 어법은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그가 버밍햄 교도소에서, 흑인 운동을 비난하는 백인 목회자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악한 사람들의 완벽한 몰이해가 아니라 선량한 사람들의 (흑백 차별의 현실에 대한) 천박한 인식입니다.''1964년 킹은 '제2의 노예 해방 선언'이라 할 '시민권 법령'의 입법화를 끌어냈고, 그 해 12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 뒤에도 그의 민권 투쟁은 계속됐고, 67년에는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으로 확산됐다. 그는 68년 백인의 흉탄에 서른 아홉 해 삶을 마쳤다. 지난해 열린 킹 목사 암살 재심 법정은 킹이 정부 내 비밀 조직과 마피아 등 범죄 조직이 연루된 거대 음모의 희생자라는 평결을 내렸다.킹은 흔들리는 나라의 균형을 바로잡아준 사람이다. 헌법이 표방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숭고한 이념 속에 조상의 신분과 피부색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이 포용하도록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이다.인간의 생각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기고 그 변화가 새로운 제도의 건설로 구체화되는 것을 혁명이라고 부른다. 킹은 미국의 민권 혁명을 이룩한 지도자이다. 그가 주도한 혁명은 피와 폭력을 수단으로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빛난다. 킹의 삶은 '사랑과 정의를 향한 지칠 줄 모르는 열망' '폭력과 위선으로 가득한 세계에 맨손으로 맞선 용기' 등으로 정의되곤 한다. 어린 시절부터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을 목격하면서 불의의 사회를 개혁하려는 열망을 지녔던 킹은 폭력이 아닌, 정의의 몸짓으로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에 불을 붙인 사람이다. 킹 목사의 생애가 감동적인 것은 그가 이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더 낫다는 믿음' 의 내부에는 끈질긴 악의 역사에 저항하면서도 끝까지 인간의 선의(善意) 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어떤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을 것이다.킹 목사의 '우리 운동을 증오의 운동으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운동은 백인과 흑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정의와 불의간의 싸움입니다. 우리 운동은 백인들에 대항한 흑인들의 반항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킹 목사가 추구했던 것은 폭력과 억압에 대한 단순한 저항이 아닌, 그것의 완전한 종식이었다.결국 킹 목사 자신 그 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지만, 마틴 루터 킹이라는 이름은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우리에게 역사의 부끄러움과 위대함을 생생히 일깨워주고 있다.백인의 흑백 분리법을 철폐하기 위해 피와 폭력을 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흑인 평등권 운동은 더욱 빛났으며, 킹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호소는 우리 모두를 감동시켰다. 킹은 감옥을 제 집 드나들 듯 하며 민권 운동을 지휘했던 진정한 투사였다.'분리하되 평등'(separate but equal) 이라는 기이한 평등의 원칙을 신봉하는 미국 국민에게 인종 분리는 '원천적으로 불평등한' 것임을 깨닫는 도덕적 각성의 계기를 마련한 그에게 노벨 평화상이 수여된 것은(1965)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백인의 인종 분리 제도를 철폐하기 위해 그가 택했던 런치 카운터 연좌 운동, 승차 거부 운동, 평화적 집회 등의 저항 방법은 도덕적 인간은 불평등한 제도에 순응하지 말고 저항할 의무를 진다는 헨리 소로우와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과 실천 방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불의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번번이 경찰에 연행되어 감옥에 갇히고, 피부색에 근거한 아무 근거 없는 편견에 사로잡힌 백인 우월 주의자들에게서 온갖 협박과 테러,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육신은 살해당하고 말았지만 그가 부르짖었던 '정의'는 지금도 살아남아 흑인들의 영원한 스승으로 기려지고 있.이제는 듣기 힘든 노래, 그러나 한 때는 이 땅의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의 한 구절이 문득 귓전에 들려온다."우리 나라 좋은 나라~"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나고, 잠꾸러기만 없으면 좋은 나라였던 그 노래, 천진스런 그 노래가 오늘 문득 새롭다. 과연 어떤 나라가 '좋은 나라'고 어떤 나라가 '나쁜 나라'일까.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간단한 네 가지 기준이 있다.첫째, 그 나라의 국민들 중에서 밖으로 이민을 나가서 살고 싶은 사람이 많으냐, 아니면 그 나라에 이민을 하여 들어와서 살고 싶은 사람이 많으냐 하는 것이다.둘째, 그 나라 감옥에 양심수가 얼마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고,셋째, 그 나라 국민들이 대통령 선거를 할 때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 관심이 많으냐 적으냐 하는 것이다.넷째, 그 나라의 가장 약한 사람들(노인들과 어린이 그리고 신체 장애자 등)이 얼마나 사람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만일 어느 누군가가 이 네 가지 기준 가운데 하나를 우리에게 물어 온다면 우린 얼마나 자랑스레 대답할 수 있을까? 오래 전 모 법무장관처럼 "대한 민국에는 양심수가 한 사람도 없다."라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다면 이 나라는 정말 좋은 나라일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찰스 베어드' 교수의 얘기를 분명히 기억한다.어느 날 베어드 교수가 모 대학에서 강연회를 마친 후 학생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교수님이 역사를 공부하면서 얻은 교훈은 무엇입니까?"그 때, 베어드 교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나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네 가지 교훈을 얻었네. 그 첫째는 하나님은 그가 멸망시키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권력에 미치게 만든다는 사실이네. 그 둘째는 독재자들이 제 아무리 골방에서 모사를 꾸며도 하나님은 다 내려다 보고 계신다네. 그 셋째는 벌들은 꽃에 가서 꿀을 훔쳐가지만 그 벌들은 꽃을 번성하게 만든다는 이치네. 그 넷째는 밤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하늘의 작은 별빛은 더 빛나는 법이라네."그렇다. 어둔 밤일수록 우리는 빛나는 신 새벽이 오는 희망을 약속을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Ⅲ. 결론'간디의 가슴에 총알이 박히는 순간 인류의 가슴 속에는 간디의 사상이 박혔습니다.' 1959년 마틴 루터 킹이 한 연설에서 말한 것이다. 9년 뒤인 1968년 4월 4일, 킹 역시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인류의 가슴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자유와 평등의 숭고한 정신을 심어놓았다. 이 책은 착한 소년에서 민권 운동가로의 변신, 비폭력주의와 폭력 투쟁 사이에서의 고뇌와 갈등, 숱한 투옥과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인내, 흑인 해방 운동가에서 반전(反戰)운동 빈민 운동가로 발전해가는 과정 등 킹 목사의 치열한 삶을 담고 있다. 매년 1월 셋째 주 월요일은 킹 목사의 탄생 기념일로 미국의 국경일이다. 특정 인물의 탄생일을 국경일로 정한 것은 미국에서 조지 워싱턴과 킹 목사뿐이다. 마틴 루터 킹은 단순한 흑인 운동가를 넘어 자유와 정의를 염원하는 모든 이들의 정신적 지주로 우뚝 서 있는 것이다.[참고 문헌 및 인터넷 사이트] HYPERLINK "http://www.libro.co.kr/books/book_detail.asp?goods_id=*************" http://www.libro.co.kr/books/book_detail.asp?goods_id=*************국민일보 - 이상(理想)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두 갈래 길을 보여준다 HYPERLINK "javascript:mediaReview(review3,%20review3a)" 조선일보 - 'I have a Dream!' HYPERLINK "javascript:mediaReview(review4,%20review4a)" 세계일보 - 사랑과 정의를 향한 지칠 줄 모르는 열망 '루터 킹의 삶' HYPERLINK "javascript:mediaReview(review5,%20review5a)" 경향신문 - '비폭력 무저항' 꿈과 삶 오롯이 HYPERLINK "javascript:mediaReview(review6,%20review6a)" 중앙일보 - 폭력, 3
    인문/어학| 2004.01.02| 5페이지| 1,000원| 조회(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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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미 관계에서 한국의 자주성 증대 방안 평가A좋아요
    한·미 관계에서 한국의 자주성 증대 방안1. 서론미국과 한국의 관계는 1871년 미국 군함 5척이 강화도를 침입함으로써 일어난 신미양요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한 때는 이양선을 타고 와 개방을 요구하는 '침입자'로써, 6.25때는 함께 피를 흘린 '혈맹'으로 미국은 마스크를 바꿔가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지금도 역시 '영원한 우방'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동안 한미동맹은 한국 안보의 보루와 경제 발전의 버팀목이 되어왔지만, 탈냉전과 남북 화해의 진전, 한국 국민의 반미 기류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이 과연 자주적으로 군사주권 및 외교권을 행사하는 나라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군사 동맹적 관계에서 경제적인 관계로 변모하는 지금, 한국의 자주성을 증대하는 노력이 없다면, 우리의 미래는 결코 밝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분야별 자주성 증대 방안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2. 본론1)문화적 측면현재 문화적 동반자 관계란 적어도 한미 양국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상식적으로 동일한 문화권도 아닌 나라와 어떻게 문화적 동반자관계가 성립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미국의 문화란 경제적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문화산업에 의해 생산되어 공격적으로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문화적 제국주의를 그 실체로 한다. 따라서 미국식 자본주의 논리에 따른 문화침략에 최선의 대응을 하는 것이 우리의 길이 될 것이고, 그것은 어쩌면 최소한의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는 일환이 될 것이다.우리는 미국과의 문화적 동반자관계에 열중하기보다는 우리의 음악, 우리의 정서, 우리의 삶의 조건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음악이 죽고, 우리의 철학이 죽고, 우리의 예술이 죽고 나서, 우리의 정치, 경제가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며, 그럴 때 우리의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2)군사 및 안보적 측면한미간에 그 동안 한국의 군사주권을 제약해 온 불평등 조약 문제는 작전지휘권 이양 문제, 상호성이 결여된 한미방위조약의 문제, 불평등한 한미행정협정, 과다 방위비 분담 특별조치협정, 그리고 자주국방을 저해하는 한미 미사일각서, 이 다섯 가지로 집약된다. 완전한 작전지휘권 행사는 전시 작전지휘권 없이는 불가능하다. 특히 남북한 화해 협력의 장전인 남북기본합의서의 상호 불가침 약속을 실현하는 데서 군 작전 지휘권은 매우 중요하며, 나아가 민족문제를 남북이 주체가 되어 해결하는 데서도 군사작전지휘권 환수는 필수적인 요건이다.21세기 평화통일시대를 대비한 바람직한 한미관계는 내부적으로는 역사를 올바로 세우고, 대외적으로는 자주적인 주권국가의 면모를 회복하는 일이다. 특히 국제법상 주권국가란 자국 내에서 법질서를 위반하는 자에 대한 형사재판 관할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있어야 하고, 군 작전지휘권과 자국의 영토, 영해, 영공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군사적 자주성 회복에 대한 노력은 군 작전 전 지휘권 환수와 더불어 구조적으로 불평등한 한미방위조약, 한미행정협정의 개정, 과다한 방위비 분담 특별조치협정의 폐기, 그리고 미일 미사일각서 폐기 등 한미간의 불평등한 조약의 시정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이제 21세기의 한미관계는 과거같이 일방적 특혜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하는 동반자 관계이며 또 그렇게 발전되어 가야 한다. 따라서 국제적 차원에서 한국의 세계화는 과거 제국주의시대, 냉전시대에 그리고 정부의 정통성이 없는 시대에 불평등하게 체결된 조약의 개정작업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통한 우리정부의 외교·군사적 자주성 확보는 남북기본합의서를 충실하게 실천하게 만들 것이며, 나아가 북한을 우리의 대화 테이블에 돌아오게 할 것이다.3)정치적 측면노무현 정권의 동북아평화번영협력체 전략은 21세기 동북아 세력 균형자와 평화조정자로서의 새로운 한반도의 위상과 결합되어 한반도시대를 개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남북공조와 동북아시아 공조를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전쟁 광이 득실거리는 공화당 지배의 미국과 이에 부화뇌동하는 일본과 남한 내 친미예속사대주의들의 책동에 대비해 우리의 민족생명권을 확보할 수 있는 한 방안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발돋움을 위해서는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이거니와 일본과 협력관계를 유지하여 일본을 이 동북아협력구도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매어두는 것이 중요이다.그러나 핵심은 역시 북한이 개혁과 개방 및 경제회복을 제대로 진전시키고 안보라는 생명권이 보장될 때 이 동북아협력체가 가능하게 된다는 점이다. 바로 이 때문에 북한에 대한 대대적인 마샬 정책이 노 정권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더불어서 남과 북이 동북아경제대국화 및 동북아평화협력체화의 공동 주도 및 조정자로서 함께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동북아 5개국 중심의 탈미(脫米) 동북아협력체 전략은 엄청난 지각변동을 동북아에 초래하는 만큼, 이로써 동북아의 발판을 점차 상실하게 될 미국으로부터의 반격과 방해를 맞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비해 우리가 맡은 바 역사적 직분을 다할 때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지 그냥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 직분은 바로 미국의 제국주의세력, 이에 부화뇌동하는 일본과 남한 내 친미예속사대주의들의 반역사적인 책동을 극복하는 실천이다.4)경제적 측면경제적 이익이라는 측면에서도 한국은 미국에게 포기하기 어려운 동맹국이다. 1996년도의 한국의 대미수출은 216억 7천만 달러, 수입은 333억 5백만 달러에 이르며, 수출의 경우, 미국은 한국 수출의 총 16.7%, 수입에서는 22.2%를 차지하여 미국은 한국의 최대무역상대국이며, 미국에 있어서는 수입과 수출에서 한국이 제8위의 무역상대국으로 성장해왔다.
    사회과학| 2003.11.09| 3페이지| 1,000원| 조회(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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