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강 교육목적과 교육문제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상적인 인간의 형성을 위함이다.원시시대의 교육목적은 의식주의 해결을 위함과 집단의 사회적 경험 그리고 축적된 재산을 보존하고 영속시키는 것에 있었다.고대의 교육목적을 살펴보면 아테네에서는 국가의 보안과 시민적 자질을 갖춘 지혜와 조화로운 인간을 만들기 위함 이였는데 한마디로 교양교육을 목적으로 하였다.스파르타는 아테네와는 다르게 군사교육을 목적으로 하였다. 복종심과 인내심이 강한 인간을 형성하기 위함을 교육의 목적으로 하였다.로마에서는 교양교육과 군사교육을 동시에 목적으로 하고 있다. 용감하고 실용적인 면을 강조하였고, 지혜롭고 도덕적이며 웅변에 능숙한 인간을 양성함을 목적으로 하였다.중세 기독교의 교육목적은 미래 즉 죽음 후를 위한 준비과정으로 금욕주의 도덕적, 정신적인 교육을 중심으로 비현실적인 기독교인을 양성하기 위함 이였다.근세의 교육목적을 살펴보면 문예부흥기 즉 인문주의의 교육은 고전을 중심으로 조화로운 인간 양성을 목적으로 문화와 예술상의 개성표현을 중시했고 신교주의는 구교에 대한 개혁, 인간과 양심과 성서에 대한 기독교인의 양성을 목적으로 현실생활에 가치를 인정하며 시민교육에 치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17세기 실학주의는 실용성과 실천성을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로 하고 구체적인 사물과 실용적 지식을 중요시하였고 18~19세기에는 인간의 자율성을 중시하고 인간의 활동성과 창의성을 존중하였다.근대에는 아동중심으로 사회에 적응함을 교육목적으로 하였던 진보주의와 일류문화의 전통 중에서 탐구적인 가치를 지닌 본질적인 것을 교육목적으로 하였던 본질주의, 그리고 향존주의는 영원성과 절대성, 정신과 지성의 훈련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았다. 현대에 와서는 인간의 존엄성과 민주주의 실현에 교육의 기본방향을 두어 선인적인 이상적인 인간상을 그리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하고 있다.근대 우리 나라에서는 인간양성과 유교에 의한 윤리적 인격을 배양함을 교육목적으로 하고 있었고 현재 우리 나라는 홍익인간의 이념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 C 338년 시로네아 전투 후에 그리스인들은 정치적 독립을 잃어버렸다. 이때부터 교육과정의 질에 있어서 뚜렷한 퇴보가 일어났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개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내포한 유대 기독교의 등장 그 중요성이 점점 증대되면서 모든 인간의 가치를 주장했다. 노예와 군주의 계급제도로 조작된 세계에서는 군주의 적합한 교육이 필요했으나 실상은 빈약했다. 르네상스의 시작과 함께 도시생활이 부활함과 동시에 지적인 힘이 중요시되었다. 도시의 생활은 무역을 융성 시켰음에 따라 중산 계층의 출현과 정치적 중심의 이동, 귀족들이 도시로 이주하는 변화가 일어났다.18세기 영국의 가치 있는 교육은 가난하지만 유능한 자에게는 개방되어 있었다. 하류층의 교육에 불만을 가지고 계몽시키려하는 몇몇의 상류계층의 사람들마저도 천한 일이란 어느 사회나 있는 것이고 하류 계층이 그러한 일을 떠맡는 것은 현명한 신의 섭리로 여겼기 때문에 한계성이 있었다.새로운 민주적 질서하의 교육 전형은 18세기 혁명기의 프랑스에서 형성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자유주의 자들은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원칙을 진보시켜 나갔다.국가주의 옹호자인 피히테는 인간이란 그들이 인간이기에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발전이 국가의 주된 목적이었던 것이다. 페스탈로치는 다양한 재능을 고려한 뒤에 인간의 진정한 존엄성이 유지되고 의무가 적절히 수행될 수 있는 지적 자주성을 습득하는 기회를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평민들의 교육을 경시하였다.영국의 산업주의는 18세기 프랑스 민주주의에 영향을 받았고 19세기 중반 교육제도의 민주화를 시작하였다.미국 독립선언문에는 인간평등의 신념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독립 선언서를 작성한 제퍼슨이 생각하는 평등이란 재능이 어디서 발견되든 그 재능을 살릴 수 있는 법적 경제적 여건을 만드는 것이었다. 1916년 듀이는 을 출판하였는데 교육 및 정치, 사회 이론에 대한 가장 중요한 논문이었다.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까지 혼란된 의견과 토론의 결론은 화 시킬 필요성을 인식하여 미국어 사전을 편찬하였다. 프러시아에서의 국가주의 발생 배경을 살펴보면 전쟁의 패배원인을 국민의 무기력한 복종과 무관심 때문이라고 여겼음을 알 수 있다.국가주의는 평민의 감정해방, 평민의 개념확대 등에 영향을 미쳤고 피히테는 국가교육이 모든 사람의 도덕적, 지적, 신체적 가능성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8세기에는 개인을 중시했고 19세기에는 국가를 개인에게 종속되었다고 보았다. 19세기 중반에 와서는 맹목적인 국가주의를 외쳤으며 20세기에는 국가는 사회 그 자체와 동일한 것으로 취급, 시민의 교육만이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미국은 초기에 일종의 판매 증진책으로 교육법령을 정하였다. 미국 교육협회에서는 가르치는 대학이 아니면 연구하는 대학이 될 것을 강조하였다. 그 후 1787년에는 법령의 교육정책을 지속시켰고 1837년에는 잉여세법을 제정하여 꼭 교육목적에 사용하도록 의무화하지는 않았다. 링컨은 1, 2차 모릴법을 만들어 재정을 중요시하였다. 1차 세계대전 때는 교육관직을 둘 것을 제안하였고 문맹자와 부적합자를 일소하기 위한 보조금 설정을 제안하였다. 1929년 대공황 때는 공민 보호부, 국가 청년 행정부를 설립하여 젊은이들을 돕고 실업의 침체기를 극복하였다.20세기에 와서는 교육의 합헌성을 헌법에 나타내었다.교육에 있어서 교회와 국가주의의 관계를 살펴보면 라 샬로떼는 국가교육이 세속적 이여야 한다고 처음으로 주장하였고 카톨릭 교회에서는 국가주의가 너무 감정에 의존하고 단편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개신교 교회에서는 19세기 대부분의 세속적 국가의 공립체제를 후원하였고 피우스 9세는 저서 과오의 요목 에서 국가주의를 반대하였다.소련은 국가주의가 방출하는 역동적인 힘을 이용하기 위해 더욱 국가주의화 되었고 코메니우스는 인간복리와 보편적 평화를 진척시키는 수단으로 지식 협동과 통일을 추구하였다.샌프란시스코 헌장의 선언을 토대로 런던에서 국제연합의 교육조직에 대한 계획을 짜기 위해 모임을 가졌는데 여기서 국제연합의 유네스코를 창설하늘어가자 벼락부자의 여가는 크게 확대되었다. 르네상스 이후의 생활수준은 서구 문명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높아져 비록 소수인에 한정되었으나 그들을 위한 비교적 높은 수준의 교육을 항상 유지시키는데는 충분하였다. 미국의 식민지화를 교육에 관한 변경지방에서의 결과를 예시해 주고 있다. 그들은 자급경제에 매우 급급했으므로 교육은 무시되어져 버리는 암울한 위험에 쳐해졌다.고대사회에 있어서 여가란 사회 특권층의 소유물 이였고 특권층의 징표였다. 상류계층과 하류계층의 두 가지 계층구조 속에서 중간계층은 없었다. 이러한 사회적, 경제적 구조로부터 심각한 교육적 결과는 파생되었다. 르네상스에 바탕을 둔 무역과 상업의 부활은 사회경제적 계층구조에 변화를 불러일으켰는데 그것은 제3계층이었다. 중간계층이 형성된 것이었다. 중간계층이 형식적 교육을 독점하고 있는 상류층으로 상승하게 되는 데는 또 다른 경제혁명인 산업혁명이 작용하였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발달을 촉진 시켰다. 중류 계층의 성공은 산업혁명의 도움이였다. 중류계층은 교육의 귀족 지주계층의 우세를 박탈한 승리를 안정시킨 반면 새로운 진취적 하류계층에 의해 그들의 우세에 도전을 느끼기 시작하는데 이들 하류계층은 상업적 혁명에 의해서 뚜렷한 이익은 얻지 못했다.남북전쟁과 미국노동총연맹의 구성사이에 가장 주목할 만한 노동자 단체는 노동자회(Knights of Labor)였다. 그 연맹은 노동자의 시민에 대한 교육은 같은 체제 아래서 같은 전문적 감독아래 함께 행해져야 함을 지지했다.노동자들의 교육은 조금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들의 운동은 여전히 상류계층과 중류계층이 지배하고 있는 학교체제들에 있어서의 자그마한 변화를 초래했을 뿐이다. 미국의 철학자 듀이는 일과 여가 사이의 이원성을 연구하였는데 그는 민족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개념에 근거하여 계층간의 의사전달 통로를 열 것을 제기했다.그는 실용적인 교육철학이 명확하게 노동지향적이였다 할 지라도 그의 노동에 대한 견해는 힘의 강압을 통해 우세를 얻을 수 있다는 마르크스주의의 결론을 이게끔 해주는데 필요한 것이라 했고 습관은 무엇을 행할 수 있기 전에 배워야 할만할 때는 그 무엇을 실천에 옮겨 봄으로써 배우게 된다고 하였다. 이성은 실제적 이성과 이론적 이성을 분리시킬 필요가 있다고 했다.토마스 아퀴나스는 어린이는 적극적인 자질을 교육적 과정으로 옮긴다고 인식하였고 이러한 적극적인 자질을 천부적인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플라톤의 생각을 부정하였다.스콜라 기독교에서 초자연적인 덕목을 신앙, 소망, 자비 이세가지로 나누었다. 자연주의는 17세기와 18세기에 야기되었다. 새로운 자연주의적 교육철학에서 일차적으로 강조된 것은 자연과 일치하는 교육의 중요성이었다. 17세기 언어교육과는 반대로 코메니우스와 라트케의 휴머니즘은 사물의 감각적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낭만주의는 19, 20세기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루소의 낭만주의는 그로 하여금 교육의 반사회 이론을 지니게 하였다.헤르바르트는 실재론적, 현실주의적 관점을 주장한 학자였다.실용주의와 진보적 교육을 주장한 학자는 듀이였는데 듀이는 교육에 있어 지식의 본질과 역할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듀이의 교육철학을 살펴보면 변화나 새로움에 표현대로의 가치를 주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자연의 법칙으로 발견되어진 계속적인 성장과 다양화를 교육의 표준으로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 여파로 인해 미국과 보수 진영의 논쟁이 일어나고 냉전에 의한 불안으로 본질주의 교육철학에서 위안을 가지려고 했다.허친스는 신아리스토 텔레스 주의자로 진보적인 교육태도인 자연주의를 비판했고 자연법칙에 근거한 자연주의적 교육 철학을 찬성하였다.아들러는 교육의 목적이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서 모든 사람이 같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제6강 교육 심리학능력 심리학이란 학습문제에 대한 가장 초기의 그리고 여러 세기 동안 연구해 왔던 방법으로 사변적, 철학적 방법을 말한다. 플라톤은 처음으로 새로운 관념이 어떻게 인간정신에 들어오게 되는지를 물은 사람으로써 학습에 있어서 정신의 역할을 중시하는 반면 육체의 역할은 무시하였다.아리스토이다.
REPORT(고소설 감상문){임경업전 까치전남염부주지 만복사저포기강로전 노처녀가란학몽 서옥설서해무릉기 십생구사과목명:고소설론교수명:김기창교수님학과:국문학과학번:9820309이름:신지애강로전홍립은 광해군 10년 8월 월정 군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떠났다. 홍립은 대동강을 건너 자부터 번화한 서도풍속에 빠져 군사들은 돌보지 않고 가는 곳마다 술판을 벌여 놓았다. 이를 못마땅히 여긴 종사판 이민환이 기회를 틈타 그의 그릇된 행동을 깨우쳐 주려 했으나 홍립은 자신에게 비밀계략이 있다며 근심 말라 하면서 비밀계략은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이때 선천군수 김응하는 홍립이 싸울 생각이 없음을 알고 그에게 군사를 나누어 알라고 했다. 홍립은 김응하에게 군사 5000명을 떼 주며 그를 좌영장으로 임명하고 선봉을 삼았다. 다음해인 1619년 1월에 원정군은 의주에 도착하여 2월 25일을 기하여 두나라 군사가 다 경마전에 모이기로 약속을 하였다. 홍립은 기존 전투부대에는 쇠약한 군사와 건장한 말을 소속시켜 자기가 맡고 양식과 마초를 운반해야 할 후방부대에는 건장한 군사와 쇠약한 말을 소속시켜 대열의 뒤에 세웠다. 여러 장수들은 의아해하며 코웃음을 쳤지만 홍립은 이번에도 비밀계략이 있다며 근심 말라고 했다. 드디어 두 나라 군사가 경마 전에 모였는데 김응하가 거느린 좌영군만 먼저 오고 홍립이 오지 않아 명나라 도독 유정은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홍립은 날이 어두워져서야 도착하여 명나라 도독과 싸움을 의논하게 되었는데 식량이 도착하지 않아 군사들은 굶주렸고 중국의 지세가 험하여 군사를 움직일 수 없다하여 싸우기를 주저하였다. 다음날도 홍립은 식량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행군을 멈추고 하루를 머물렀다. 명나라 도독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따졌지만 여러 장수들이 달래었다. 이번에도 비밀계략이 있으니 홍립은 몇 일만 참으라고 한다. 그러던 홍립은 어느 날 몰래 여진 통역원 세 명을 불러 누르하치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면서 우리 나라가 군대를 일으킨 것은 명나라의 강요에 의한 것이니 서로 병기를밀지란 적에게 투항하는 것이었다.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그의 보든 행동은 한결같이 욕된 것이였다. 그의 반역행위는 후금군사를 대리고 조국에 쳐들어오는 데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작품에는 강홍립의 명령에 응하지 않고 적들과 용감히 싸운 김응하를 비롯한 긍정적 인물을 등장시킴으로 하여 강홍립을 긍정적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를 오랑캐, 개만도 못한 인간으로 단죄하고 규탄하고 있다.그러나 소설에서는 전반적으로 우리 백성들과 군인들의 투쟁모습을 일부만 보여주고 있을 뿐 옳게 서술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강홍립에 대한 증오심도 매우 미약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또한 소설에서는 명나라에 대한 작가의 사대주의적 관심도 표현되어 있는데 당시 조선사회 일부 사람들은 사태를 옳게 판단하고 강대한 역량으로 자라난 후금과 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음으로써 북방에 대한 방비를 더 강화하려는 입장을 취하였다.「강로전」은 작가가 사대주의적 입장으로 하여 작품에서 다른 나라 군사와 장군을 절대적인 존재로 묘사하고 명군이 패배하게 된 원인도 전적으로 홍립의 배신행위에 있듯이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명군이 패배하게 된 진짜 원인은 우선 자체의 세력이 약화된 데에 있었다.소설「강로전」은 부정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 그의 수치스러운 일생을 보여줌으로써 의미를 가진다.까치전구월산 어느 산골 안에 사는 까치부부는 봄이 오자 아스랗게 높은 나무 위에 궁전 같이 크고 아름다운 집을 지어놓고 낙성연을 베풀었다.학, 두루미, 까마귀, 꾀꼬리, 제비 등 각종 날짐승뿐만 아니라 마을의 좌상 두꺼비까지 까치의 청을 받고 낙성연에 참가하였다.까치의 청을 받지 못한 비둘기는 잔치 집에 찾아가서 자기와 무슨 원수진 일이 있냐고 생트집을 걸었다.속이 검고 포악한 비둘기는 까치의 집을 통채로 빼앗을 흉심을 품었던 것이다. 까치는 비둘기가 난동을 부릴까봐 겁나서 윗자리에 앉히고 음식을 많이 권하였다. 그러자 비둘기는 낙성연에 모여 즐겁게 춤추고 노래하던 꾀꼬리, 두견, 두루미, 박새, 할미새 등에게 트집을 걸어 다 쫓아버조의 명장인 임경업의 생애를 형상화한 전기체 역사소설이다. 이 작품은 병자호란(1636)의 패배가 초래한 역사적 충격을 극복하려 한 민중의지의 소산물로 민족이 현실에서 체험한 비극의 역사를 토대로 펼쳐지는 허구적인 임장군의 영웅적 이야기이다. 즉 사실로서의 기록이 아닌 민족의 의식 속에서 굴절된 문화적 진실의 표현인 것이다.이 작품에 나타난 가장 큰 주제는 배청숭명사상이다. 즉 명에 대한 충성과 청에 대한 적개심, 그리고 국치적 항복에 대한 정신적 복수를 주제로 보고 있다. 이 사상은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집권층의 통치이념이였고 자신들의 이념을 더욱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형적인 인물 임경업을 설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임경업의 영웅성을 드러내는 부분은 임경업과 호왕관계에 잘 나타나 있다. 병자란 전의 2차에 걸친 호군의 침입을 격퇴한 것, 임경업의 불굴에 자세에 감동하여 호왕이 세자 일행을 환국하게 해 준 것, 임경업의 귀환 역시 임경업에게 감화된 호왕이 정중하게 사신까지 딸려서 의주까지 배웅한 점이다. 또한 악인 김자점에 의해서 임경업의 영웅성은 더욱 부각된다. 임경업이 가달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우고 귀국할 때 김자점이 역심을 품고 있으면서도 임경업이 두려워 감히 발현하지 못한 것, 임경업이 호국에서 풀려나 귀국하자 이에 자신의 역모가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우려한 김자점이 동류와 의논하여 체포할 음모를 왕명을 사칭해 수감한 점이다. 이 모두가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것들이다. 당시의 사람들의 인식에 의해 임경업 더욱 영웅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의 결말부분을 보면 임경업은 선하고 가치 있는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악한 존재인 김자점의 손에 의해 죽는 걸로 되어 있다. 임경업에 대한 영웅화가 작품 곳곳에 실현되어 있지만 결국 끝 결말에서는 상대와 싸우지 않는 방식으로 구현되어 있다. 이러한 결말은 작품에 사실성을 더해 주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임경업전」에서는 주인공의 비극적인 결말을 사실적으로 잘 그려내어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있다. 대부분의 고대으로 삼고달 밝은 이 밤을 뜻없이 보내나니젊은 이 몸 외로이도 창가에 누웠는데어디선지 아름다운 피리소리 들려와라.....그러자 문득 공중에서 자네가 좋은 배필을 얻고 싶다면 그게 안될 리야 있느냐? 무엇을 걱정하랴! 하고 소리가 들리는 것 이였다. 양생은 그 말에 의아해 했지만 기쁘기 그지없었다.그 이튿날은 바로 스무 나흗날이었다. 사람들은 고장 풍습대로 만복사에 모여 연등놀이를 하며 부처 앞에서 자기들의 소원을 빌었다.양생은 날이 저물어 인적이 드물기를 기다리다가 조용히 불상 앞으로 나아가서 윷가락을 꺼내놓고 부처와 내기를 하여 부처님이 지신다면 아름다운 여인을 자신의 부인으로 얻게 해달라는 것 이였다.양생은 부처와의 윷놀이에서 손쉽게 이기였다.그는 부처에게 약속을 실행할 것을 다짐하고 궤짝 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아름다운 처녀가 사뿐이 나타났다. 처녀의 나이는 열 대여섯쯤으로 보였다.처녀는 긴 한숨을 짓고는 애통한 소리로 발원문을 읽어 내렸다.그 발원문에는 처녀가 삼 년전에 왜적에게 항거하며 절개를 지키다 목숨을 잃은 사연과 그후 홀로 지내며 전생의 연분을 그리워함을 나타내고 있었다.양생은 그 소리를 듣고 앞으로 뛰쳐나와 서로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며 즐기었다. 처녀의 거동은 이세상사람 같지 않았으나 양생은 귀가집 처녀가 부모 몰래 빠져 나온 것이라 생각했다.양생은 그 처녀와 사흘 밤을 보내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던 중 나흘째 되는 날 처녀는 송별잔치를 차리고 이웃동물들을 청하여 놀았다.검은머리 구름 같은 정랑이며 예쁘고도 연약한 양태머리처녀 오랑, 언제나 몸가짐이 단정스러운 김랑과 흰 옷을 즐겨 입고 절도 있는 생활로 얌전을 피우는 류량이 처녀의 초청에 응하여 찾아왔다.그들은 생전에 처녀의 친척이거나 한 동리에서 살던 동무들이었다.처녀들은 이승의 손님과 더불어 화답 시를 주고받으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었다.정랑과 오랑은 순결한 처녀의 사랑을 시에 담아 노래했고 김랑은 처녀의 지조와 절개에 대해 절조 높이 읊었으며 나중에 시를 지은 류랑은 이승의 손님과 집주인와 큰쥐에게 복수 한 다음 쥐구멍을 막고 고양이에게 지키게 하니 그후부터는 곡식에 축나는 일이 없어졌다.「서옥설」은 16세기 소설발전과 의인소설 출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우리 나라 첫 고전중편소설의 하나이다.작자는 백호 임제이다.이 작품에서 큰쥐는 교활한 방법과 술책으로 나라의 재산을 도적질해먹는 봉건사회의 탐관오리를 의인화하였고 창고신은 우유부단하고 무능력한 봉건사회의 통치자로 의인화되어 있다.작가는 간교하고 민첩한 큰쥐가 오랜 세월동안 나라의 곡식을 탕진하고도 그 죄를 남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발악하는 장면들의 묘사를 통해 봉건사회 탐관오리들의 교활성과 악랄성을 폭로하고 있다.또한 큰쥐를 잡아들이고서도 그들의 죄상을 제때에 밝히지 못하고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 무고한 짐승들을 잡아들여 고통을 주는 창고신의 우유부단한 처사를 보면 봉건적인 중앙 집권세력의 약화와 법을 다스리는 봉건관료들의 무능을 풍유로 비판하고 있다.작가는 이 작품에서 봉건관료들의 부패성과 봉건정치의 불합리성을 폭로, 비판하면서도 이러한 부정적 현상을 낳게 한 사회적 근원을 밝히지는 못했다. 작품은 태사씨의 평가로 끝맺고 있다.불은 당장에 꺼버리지 않으면 번지는 법이요 옥사가 결단성 없이 우유부단하면 번거로워지는 법이다. 만일 창고신이 큰쥐의 죄상을 밝게 조사하여 빨리 처단하였더라면 그 화는 반드시 그렇게 범람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 간사하고 흉악한 성질을 가진 자가 어찌 창고를 뚫는 쥐뿐이랴? 아, 참 두려운 일이다.작자는 이렇게 소설의 끝을 맺음으로 소설의 기본사상을 밝히고 있다.백성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나라의 재산을 약취하고 탕진하는 것이 아니라 봉건관료들이 정사를 잘못하여 국가의 중앙 집권력이 악화된 것에 있다고 간주한 작가의 사회 정치적 견해의 제한성을 드러내고 있다.이 소설은 의인화의 표현으로 동식물들의 특징적인 외형과 생태적 특질을 이용하여 속담이나 옛말의 이용으로 형상의 생동성과 개성화를 잘 나타내고 있다.란학몽송나라때 한언범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그는 간신들의 제멋대로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