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C , 20C의 복식 정리◆1. 19C의 복식(1) 사회·문화적 배경- 프랑스 제2제정의 붕괴와 더불어 복식문화사에서도 현대라는 새로운 시대의 막이 열렸다. 1870년대를 시작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제국주 의 시대가 전개되었으며, 19세기 말의 주목할 만한 변화로는 직물의 기술적 혁 신을 들 수 있다. 합성섬유와 합성염료의 발명이 바로 이것이다. 합성염료의 개 발은 이전부터 진행되어 오던 것으로 이 시기에 색상과 실용성이 더욱 향상되었 으며, 합성섬유 및 합성염료의 발명은 현대 직물산업에 새로운 발전의 길을 열 고 양과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산업의 발전과 함께 도시생활이 확대됨에 따라 일상생활의 형태도 다양해져, 복식에서도 점차 그 구분이 뚜렷해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사회활동이 많은 남성복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이 시기에 있어 전체 복 식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 여성의 사회진출이다. 오랫동안 집안에 갇혀 있던 여성이 공장으로 진출함에 따라 여성문제는 사회의 중요한 문제로 대 두 되었다. 여성의 사회진출과 함께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해지 고, 우선 복장으로써 그 첫 단계를 실행하려 했는데, 여성복에 바지가 등장한 것 이 바로 그것이다.- 1870년대에 들어서면서 화려한 크리놀린 스타일이 새로운 양상을 나타냈 는데, 화려한 분위기의 크리놀린 스타일은 현저히 줄어들고 장식도 비교적 간소 화되어 갔다. 그러나 이제까지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던 귀족풍의 양옆의 부풀 림은 폴로네즈 스타일로 바뀌었고 폴로네즈 스타일은 버슬 스타일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것은 19세기 후반을 지배하던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어서 19세기 말에 나타난 예술양식 중의 하나인 아 르 누보는 이 당시 건축, 조각, 회화, 공예, 의상 등 조형예술분야에 커다란 영향 을 미쳤다.(2) 여자의 복식① 버슬 스타일(Bustle Style, 1870∼1890년)- 버슬 스타일 시대의 콜셋은 앞이 납작하고 힙을 부풀리기888년 이 되면서 그 크기가 갑자기 약화됨.4) 1890년대 - 1888년에 버슬의 크기가 약화되면서 1890년대가 되면 거의 사라져 버슬 스타일이 갑자 기 새로운 아워글라스 실루엣으로 변화하게 됨.1870년 이후의 여자 머리형은 한층 우아하게 단장되었다. 힙 뒤를 부풀리고 하이힐을 신고 약간 앞으로 숙인 듯이 걷는 부인들의 모습과 같이 머리형도 이 와 균형을 이루듯이 차츰 높아져 갔다.1880년대의 모자는 머리형보다도 더욱 특징적이었는데, 샤포의 챙과 크라운을 각자 개성대로 변형시켰고 때로는 동물과 식물을 모방한 기이한 장식을 하여 주 목을 끌었다.② 아르 누보 스타일(Art Nouveau Style, 1890∼1910년)- 아르 누보란 아르와 누보가 합쳐진 '새로운 예술'이란 뜻으로 기계생산품에 반대하여 손으로 만든 수공예품에 가치를 두자는 미술 수공예운동을 배경으로 한다. 아르 누보의 정신적 골격을 형성하는 상징주의는 대상을 향한 감정이나 이성에 의해 나타나는 사실적 표현이 아닌 암시적인 표현을 위주로 하며, 당대 의 사실주의, 실증주의, 자연주의에 대해 반발하고 기존의 정치·사회·문화· 예술의 체제를 거부하며 절대 자유를 추구했다. 아르 누보 예술가들은 직선을 피하고 소용돌이치거나 서로 교차하는 곡선을 주로 사용했다. 아르 누보의 곡 선은 구불구불하고 물결치는 듯하며, 음악적으로 율동하는 듯하고, 타오르는 듯 하고 섬세하며, 환기시키는 듯한 힘을 지닌 상징적인 선으로 표현되었는데 특 히 이 특성은 주로 장식분야 즉, 건축의 외형과 생활미술 전반에 걸쳐 나타났 다.- 아르 누보의 소재로는 꽃과 식물 그리고 여인이 대표적이며, 곤충이나 동물 도 많이 이용되었다. 색채 면에서는 인상주의에 의해 형성된 부드러운 파스텔 색조가 주조를 이룬다.③ 아워글래스 실루엣(Hourglass Silhouette, 1890∼1900년)- 1890년부터 스커트는 버슬이 갑자기 줄어들면서 장식도 없어지고 단순해지 는 반면, 관심의 초점이 상체의 어깨와 소매로 옮겨지면서 어깨를 더하기 위해 스커트길이가 더욱 길어져 바 닥에 끌렸으므로, 걸을 때는 치맛자락을 걷어올리거나 들고 다녔다.1890년 이전에는 어둡고 컴컴한 색조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아르누보 영향기에 들어서면서부터 환하고 연한 파스텔 계통의 부드러운 색조가 유행했다. 이 시기 의 복식에 많이 사용된 레이스와 러플은 부와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환상적인 색채효과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도 쓰였다.산업혁명 이후 여성 근로자가 많아지고 이 시대에 와서 여성의 사회참여가 활발 해지자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노력이 시도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남성 복에서 디자인을 본딴 테일러드 수트 차림이 의생활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 었다.테일러드 수트는 착용하기에 덜 불편했고 원피스 드레스보다 기능적이었기 때문 에 사회에서 일하는 여성 수의 증가와 함께 인기를 더해 가게 되었으며, 사회 참 여 외에 스포츠 붐으로 인한 필요성으로 더욱 다양하게 개발되었다.(3) 남자의 복식(1870∼1910)- 남자복식의 기본은 상의, 조끼, 바지가 한 벌이다. 상의는 길이가 힙 근처까지 오고 앞트임은 2∼3개의 단추로 여미게 했다. 모양은 앞여밈이 다소 둥글려진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변화가 없다.- 조끼인 베스트는 예복으로 사용되고 질레는 현재의 형태와 거의 비슷했지만 작은 칼라가 달린 것이 차이점이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짙은 색 울이 많이 사용 되었다. 바지의 기본적 구성은 현재에 이르도록 변화가 없고, 가랑이의 폭이 약 간 좁아진다든가 끝에 커프스가 붙는다든가 하는 변화에 그쳤다.- 외투는 힙까지, 또는 무릎까지 등 길이가 다른 여러 가지 형태가 있었다. 그 중 인버네스 케이프(inverness cape)가 1870년대부터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케이프에 소매가 달린 코트이고 벨트를 맸다. 특히 여행이나 날씨가 나쁠 때에 착용되었다.2. 20C의 복식(1) 아르 데코 스타일(Art Deco Style, 1907∼1930)1) 벨 에포크(Belle Epoque) 시대의 복식(1907∼1914 강하고 단순한 형상을 적절히 표출하기 위해 밝 은 색상과 강렬하고 뚜렷한 색채 대비를 구사했다.- 장식의 경우에는 기하학적이거나 구상주의적인 형태들을 양식화시킨 것이 많았다.- 아르 데코 스타일이란 아르 누보 스타일에 대치되는 장식·응용미술의 최 신 유행품의 모든 것으로 아르 누보의 곡선적이고 유기적인 성격과는 달리 직선적이고 기하학적인 성격을 대표적 특징으로 하고 있다. 아르 데코 스타 일은 동양적인 이국주의와 색채면에서 야수주의를 동반하고 있기 때문에 아 르 누보 영향기의 복식과 아르 데코 영향기의 복식은 실루엣·텍스춰·컬 러·디테일에서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② 패션의 경향- 아르 데코 스타일은 1908년경부터 1914년경까지의 벨 에포크 시대의 복식 으로 벨 에포크 시대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디자이너는 영국의 루실과 프랑 스의 폴 푸아레(Paul Poiret) 였다. Poiret는 아르 누보 시대부터 잠재되어 온 변화에의 욕구를 수렴하여 S-커브 실루엣으로부터 여성들을 과감히 탈피시 킴으로써 복식을 현대화했고, 따라서 이때부터 현대 패션이 시작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10년경 Poiret는 튜닉 드레스의 아랫단을 좁힌 호블 실루엣을 발표하였 다. 호블 스커트는 무릎 부분의 통이 좁은 치마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상 체에서 무릎까지는 여유가 있고 무릎부터 발목까지는 좁혀준 라인으로 비기 능적인 형태의 의상이다. 활동이 불편함에도 호블 스커트가 널리 보급된 것 은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과거 중국 귀족들의 발의 구속이나 르네상스 시대 의 러프로 인한 목의 부자유스러움과 같이 일종의'사치스러운 상징'으로 간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체의 구속을 더욱 추종했을 것이며 이런 점 이서 호블 스커트의 다리 구속은 Poiret가 추구한 복식에서의 현대주의의 한 계가 된다.- 1913년 Poiret는 새로운 실루엣으로 미나레 튜닉 스타일을 발표했다. 오버 스커트를 램프처럼 펼쳐 주기 위해 스커트 단에 철사를 넣어 주었는데 이러 한 미나레 스타일을 고 큰 변혁을 가져왔는데 여성의 사회적 분야의 진출이 바로 그것 이다. 여자들의 사회적 진출은 여자복장에 합리성과 기능성을 추구하는 등의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으나 억압된 의생활에 대한 반발로 오히려 여성 다움이 강조된 복식도 유행했다.② 패션의 경향- 이 시기의 여성복식의 형태는 곡선이 암시되지 않는 직선적인 모습이 이상 화되어 허리선이 사라지고 가슴이 납작해졌으며 길이가 짧아져 남장에 가까 운 모습을 한 보이쉬 스타일과 주름과 리본, 너풀거리는 스커트 등 여성스러 움을 가미했던 가르손느 스타일을 특징으로 한다.- 1910년경에 이르러서는 바지의 변화가 눈에 띈다. 즉, 상의에는 어깨에 패드 를 넣어 폭이 넓어 보이게 했고 바지는 힙을 헐렁하게 하고 아랫단을 좁게 하 여, 전체적으로 역삼각형의 실루엣을 만들어 호블 스커트와 조화를 이루었다.- 1920년대의 남자복장은 1910년대와 비슷하고 칼라의 넓이와 바지의 폭이 약 간 넓어졌을 뿐이다. 정장복 외에 캐주얼 웨어로는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그 위에 스웨터를 입고 아래에는 승마용 바지를 입는 것이 유행했다.- 남자들의 신발은 실용적이고 간편한 형이 환영을 받았다.(2) 1930년대의 복식(1931∼1940)- 1930년대의 일반적인 실루엣은 홀쭉하고 긴 슬림 앤드 롱 스타일로 스커트가 길어지고 허리선이 제 위치로 돌아왔다. 30년대 후반에와서 롱 스커트로 여성미 를 강조한 이브닝 웨어가 많이 디자인됨과 동시에 일본, 독일, 이탈리아에서의 파시즘 정책으로 군대복장형의 밀리터리 룩이 유행했다.(3)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복식(1941∼1947)- 제2차 세계대전은 일반인의 생활의 많은 측면을 변화시켰고 복식에서도 밀리 터리 룩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했는데 이것은 각진 어깨와 짧은 스커트의 딱딱 한 느낌을 가진 실용적 기능복이었다. 즉 노동력과 의복의 부족은 실용계획안을 도입해 의복의 수와 종류를 제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창조성이 제한되고 유행의 변화가 느려졌다. 반면 제조적 측면에서는 복식산업의 구조와 생다.
◆당의(唐衣)◆조선시대에 여자들이 입었던 예복의 하나. 당저고리·당적삼·당한삼이라고도 한다. 저고리를 입은 후 저고리 위에 덧입었다.[ 역 사 ]당의의 유래는 당의의 자로 미루어 중국 당나라의 옷이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라고 하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으며, 문헌에 나타난 기록과 유물로 볼 때 조선시대에 착용된 것만은 틀림이 없다.《사례편람(四禮便覽)》에 보면 라고 하였다. 궁중에서는 평상복으로 사용되다가 조선 말기부터 소례복(小禮服)으로 사용되었다. 소례복으로 사용할 때에는 가슴·등·양 어깨에 흉배를 붙였다.[ 종 류 ]사용된 색에 따라 연두당의·자주당의·남송(南松 ; 노란색)당의·백색당의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가장 많이 쓰인 것은 연두당의이다. 계절에 따라서는 겹당의·홑당의가 있으며 홑당의는 당적삼·당한삼이라고도 부른다. 겨울에는 주로 겹당의를 입고 여름에는 홑당의를 입었는데, 5월 단오 전날 왕비가 흰색 홑당의로 갈아입으면 단오날부터 궁중에서는 모두 당적삼으로 갈아입었으며, 또 추석전날 왕비가 다시 겹당의로 갈아입으면 추석날부터 궁중의 여자들은 일제히 겹당의로 갈아입었다고 한다.[ 형 태 ]당의의 형태는 저고리와 비슷하나 앞길과 뒷길이 저고리보다 길어, 입었을 때 무릎 근처까지 닿으며 도련은 둥근 곡선으로 되어 있다. 옆은 진동선 이하가 트여 있어 앞길이 좌우 두 자락, 뒷 길이 한 자락으로서 모두 세 자락으로 되어 있다. 옷감은 겨울철에는 비단, 봄·가을에는 사(紗) 종류로 하였다.
Ⅰ. 서 론색이란 빛이 있기 때문이며, 색 감각은 빛에 대한 지각적 현상이다. 따라서 색채에 있어서도 태양광은 그 기본이 되며, 그 중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색채를 볼 수 있게 하여 주는 것은 태양광이다. 따라서 색채에 있어서도 태양광선은 그 기본이 되며, 특히 태양광의 여러 성분 중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색채를 볼 수 있게 하여 주는 것은 가시광선이다. 태양광은 우리들 눈에 보이지 않는 백광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무색광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 무색광에는 우리의 눈에 색채로 지각되는 부분이 있으며 이를 가시광선이라고 한다.색의 정의에 대해서는 색채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는데, 색은 광학적인 현상이라는 물리학적 견해와 색은 물질이라는 화학적 입장에서의 해석, 색은 눈을 통한 감각과 지각 현상이라는 생물학적 견해, 그리고 심리적인 것이라는 견해 등이 있다.앞으로 본론에서는 색의 기본 개념과 우리의 전통색, 그리고 색이 실생활에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실례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본 론1. 색의 기본개념① 색의 3속성 : ㉠ 색상 - 각각의 유채색들의 구별되는 성질을 말하며, 그 색들을 서로 비교하는데 기준이 된다. ㉡ 명도 - 색의 밝고 어두운 정도를 명도라고 하는데, 이것은 물리적으로 시감반사율의 고저를 말한다. 무채색은 시감반사율의 고저에 따라 명도가 달라지는데, 유채색의 경우도 반사율 곡선이 평행선을 이루지 않고 굴곡이 심하더라도 그 색 나름의 시감반사율은 다 가지고 있다. 시감반사율이란 물체면으로 부터 반사되는 광속과 물체면에 입사되는 광속과의 비율을 말한다. 우리 인간의 눈은 색의 3속성 중 명도에 대한 감각이 가장 예민하며 그 다음이 색상, 채도의 순서이다. ㉢ 채도 - 색의 지각적인 면에서 본다면 한마디로 색의 강약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말에 진한색, 연한색과 흐린색, 맑은색 등은 모두 채도의 고저를 가리키는 말이다. 색의 혼합량으로 본다면 어떠한 색상의 순색에 무채색(백색 또는 흑색)의 포함량이 많을수록 채도가 낮아지고, 포함량이 적을 순색이라고 한다. 그러나, 순색의 정확한 개념은 색광에 있어서 스페트럼의 단색광을 순색이라고 하는 것이다. 물체색에 있어서도 오늘날 안료의 발달로 말미암아 비교적 강한색을 얻을 수 있으므로 이것을 순색이라 부르며, 또 그렇게 사용해도 무방하다.(실용색채학 P26 - P27)② 색환 : 색의 변화를 계통적으로 표시하기 위해서 색표를 둥근 모양으로 배열한 것이다. 적외선과 자외선은 볼 수 없는 가시광선이므로 물체색인 자주색의 매개에 의해서 둥근 고리를 연결시킬 수 있다. 이러한 색환에서 사용되는 색표는 색상을 기준으로 하여 배열하였으므로 색상환이라고 불리운다.③ 보색 :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상의 빛을 혼합하여 특정한 백생광의 자극을 만들 수 있는 파장을 가진 빛들을 보색이라고 하며, 대체로 색상환에서 서로 바주 보고 있는 반대색과 같은 두 개의 색을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반대색이 보색은 아니다.④ 스펙트럼 : 빛과 같은 방사 에네르기를 가진 물질을 분량기에 통과시키면 파장에 따라서 다른 굴절율 때문에 일어나는 분산을 하나의 면에 파장의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다.(색채조형의 기초 P18 - P19)2. 한국의 전통색과 색채심리① 백의민족과 무채색 : 태극은 음과 양으로 나누어져 생기며 처음의 출발 준비적 태세가 음이 되고, 그의 발동이 양이라고 말한다. 이는 모든 사물의 선후는 작은 것이 크게 자라고, 어두운 것이 차차 밝아지고, 낮은데서 높은 데로 뻗어지며, 정을 기본으로 해서 동(動)이 생기는 것이 사물의 자연적인 순서라고 생각해 왔다.그럼 무채색이란 색상을 갖지 않는 색이라는 색채학적인 정의대로의 색이 아니고, 약간의 유채색기를 띠고 있는 색을 포함해서 화려한 다른 색에 비해 상대적으로 백색이나 회색 혹은 회색에 가깝다고 느끼는 색들을 말한다. 이들은 소박, 검소하며, 세련된 색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으며, 모든 색을 인식하게 되는 출발점인 동시에 도한 아름다움이나 색채감각의 종착점인 셈이다.백자의 살은 백색이다. 하지만 우리 백자의 살은 섣불리 백 난백이 있고, 또 그냥 희기만 한 순백이 있다. 그리고 잿빛을 곁들인 회백, 누르스름한 황백, 푸르스름한 청백등 한 가지 백색에도 그 다양한 변화는 이루 말할 수 없다.② 백색의 상징 : 우리 조상들은 백색을 말할 때 아주 희다는 뜻으로 순백 또는 수백, 백정, 정백 그리고 때로는 선명하게 희다고 해서 선백이라고 표현했다.삼국사기에는 태종 무열왕 때에 우수주에서 흰 사슴을 왕에게 바쳤다는 내용을 비롯하여, 성덕왕 때는 청주에서 흰 매와 흰 참새를, 그리고 경덕왕 때는 무진주에서 흰 꿩을 나라에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또, 경도잡지의 풍속, 혼의편을 보면 "신랑은 흰 말을 타고 자색 비단의 단령을 입고..."라고 되어 있듯이 말 중에서도 흰 말을 지정했다. 백색문화의 바탕인 소색·백색에 대한 한국인의 기호는 대단했었다. 태어나자마자 흰 옷을 입는다. 그리고 평생 흰 옷만 입는다. 이 흰 옷은 무색, 소색의 이미지이며 무색의 인간생활이 공수래공수거의 사상과 일치하는 즉자연에의 동화이며 그 자체인 것이라고 여겨왔다. 한국인은 자기 속의 감정을 즉각적으로 나타낸다는 것은 점잖지 못한 것으로 여겨 왔으며, 하고 싶어도 하고 싶지 않는 체하는 본능 억지력이 아주 강하다. 본능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얼굴색이 푸르락 붉으락 하다는 것은 일종이 색이 있음을 뜻하며(유채색) 이것은 점잖지 못함에 속하고, 심지어 부도덕적인 인격으로 인식한다. 즉 본능의 억제를 겸양지덕으로 비약시킨 것이다.그래서 백색은 자연에 귀착하는 것, 자연과의 동화이며 결과적으로 원색에서 탈퇴하며, 채색을 금하는 사고방식으로 발전되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회색·백색조의 무채색계를 선호하는 기호반응을 나타내고 이 사고방식이 우리들의 머리속에 잠재하게 된 것이다.실이나 옷감의 색에 관해서는 표백 기술이 발달되기 이전까지는 백색을 소색이라고 했으니 현실과는 그다지 차이가 없었던 셈이다.소(素)자는 흰 소 또는 순백 소라 하여 빛깔이 흰 옷을 소의라 했으며 겨울의 흰 눈을 소설, 흰 얼굴을 소안이라 쓰기도 했으며, 색을 하지 않은 바탕대로의 상태를 소지라 하며, 결국 표백이나 착색의 기술도 색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본래의 바탕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말한다면 인류의 색채문화의 근본은 소색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③ 백의민족의 색채의식 : 한자의 白은 본시 도토리 꼴의 열매에서 생겨난 상형문자였으며 측백나무 열매의 속살이 희다고 하는 데서 생긴 글자이며, 흰백이라 불려 서방색(西方色)으로 되어, 음양 오행설의 서쪽이며 가을을 나타낸다.예로부터 백흑이라 하여 선과 악 또는 정과 사로 옳고 그름으로 비유하여 백흑지변을 흑·백을 가린다는 말로 써 왔다.청구영언에 실린 옛시들에는 백색이 붙는 낱말로 흰달, 흰눈, 흰꽃, 흰옷, 백일, 백발, 백지 등이 지나칠 정도로 많이 나오고 있으니 이들은 한결같이 우리 겨레의 충절을 표현하며, 그리고 아무런 사심이 없는 선비의 깨끗한 마음을 나타내어 읊었다.겨레의 옷인 백의의 바탕을 이룬 무명이라 하면 목화에서 짜낸 옷감이며 목화의 씨를 중국에서 들여온 고려 제23대 공민왕때의 문 익점의 큰 공을 잊을 수가 없다. 육당 최 남선 선생은 저서인 「조선상식문답」에서 「우리 민족이 백의를 숭상함은 아득한 옛날부터이며, 이러한 풍속은 우리 민족이 옛 날에 태양을 하나님으로 알고 하느님의 자손이라고 믿었으며, 태양의 광명을 표시하는 의미의 흰빛을 신성하게 알아 흰옷을 자랑삼아 입다가 나중에는 민족의 풍속을 이루었다고 하며,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서나 태양을 숭배하는 민족은 모두 흰 빛을 신성하게 알고 또 흰 옷을 입기 좋아하니 애급과 바빌론의 풍속이 그것이다」라고 했다.「조선의 예술」이라는 1922년대의 책에서 저자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그토록 색채가 다양한 의복이 발달하고 있는데 조선에서는 이것을 볼 수 없으며 그들이 입고 있는 의복은 아무런 색도 가지지 않은 흰 빛이며, 그렇지 않으면 가장 색을 적게 갖는 연한 옥색이 아닌가. 늙은이도 젊은이도 남자도 여자도 한결같이 흰 옷을 입는다는 것은 어찌된 연유일까. 이 세상에 나라도 많고 민족도 많지만제나 쓸쓸하고 심성이 많은 마음의 상징이며, 백성은 흰 옷을 입음으로써 영원한 상을 입은 것이며, 한민족의 고통스럽고 의지할 곳 없는 역사적 경험이 흰 옷을 입게 했으며, 오히려 어울리게 만들었다」라고 말했다.또한 저자는 조선 사람들이 색채를 즐길 여유를 갖지 못했던 예를 도자기에서 언급했다. 즉 도자기에 있어서 색채가 가장 발달한 것은 명나라 때였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짐에 이르러 색채는 한층 더 야단스러워졌다. 중국에 있어서나 일본에 있어서나 다같이 발달한, 유약위에 그리는 그림의 수법이 저 도자기 시대였던 이조에 있어서 조금도 채용되지 않았던 것은 조선사람들이 전혀 빛깔을 즐길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이조는 참으로 영원한 도자기가 있다. 그러나 사용된 도료는 쪽과 철사와 약간의 진사뿐이다. 그것도 모두가 은근한 색조여서 화려하고 해맑은 것을 보는 경우는 적다.(한국의 전통색과 색채심리 P13 - P28)3. 색채디자인이 실생활에 사용되는 실례① 라면과 포장지색 : 매운 라면은 포장지가 빨간색인데 그 이유는 라면포장의 빨간색이 매운맛을 색깔로 더 강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장지 색깔은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여기에는 제조업체들의 치밀한 상술이 숨어있다. 포장지의 색깔을 통해 은연중에 제품의 특성을 알리고 있는 것. 예컨대 라면 포장지는 얼큰한 맛을 강조하기 위해 갈수록 빨간색이 많이 들어가고 있다. 라면의 원조 격인 삼양식품의 삼양라면이나 농심의 안성탕면 포장지는 빨간 색보다 덜 자극적인 주황 색. 그러다 대 히트를 친 농심 신라면이 빨간 색이 많이 들어간 포장지로 나왔다. 그 뒤에 나온 빙그레 매운콩라면이나 오뚜기 열라면은 신라면보다 더 빨갛다. 고추장도 예외없이 빨간 색 용기에 담겨있다. 반면 여름에 많이 팔리는 비빔면은 파란 색이 대부분. 물론 시원한 맛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아이스크림도 파란 색이나 초록 색 계통 포장지를 주로 쓴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제품 특성에 맞는 포장지 색깔을 고르는 것이 매출과 직결된다" 며 "그러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