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우리나라의 역사서 중 최고라 할 수 있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그 명성만큼 다양한 평가들이 나오고 있다. 두 역사서 모두 삼국시대를 다루고 있지만 같은 시대의 역사를 평가 하는데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번 레포트를 통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시대, 서술방식, 체제, 저자, 역사관등 다양하게 정리해보고 두 고서가 가지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가지는 역사적인 의의를 정리해보고자 한다.Ⅱ. 본론1.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시대적 배경(1) 삼국사기국사편찬은 왕권강화의 기념적 사업인 동시에 당시의 정치 문화수준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편찬도 이 책이 만들어진 12세기 전반부의 정치상황 위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때는 고려 건국 후 200여년이 흘렀고, 고려의 문벌 귀족문화가 절정기에 이르렀으며, 유교와 불교문화가 융합됨으로써 고려왕조의 안정을 구가하는 과정에서 자기 역사의 확인 작업으로 전 시대의 역사정리가 필요하였다. 다음으로 당시의 조정에서는 거란 격퇴 이후의 여진의 위협에 따르는 강렬한 국가의식이 고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소실된 국사의 재편찬은 단순한 유교 정치이념의 구현만이 아니라 민족의식의 차원에서 요구되었다.또한 당시 고려사회는 문벌귀족간의 갈등과 대립이 첨예화되고 있었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당시의 문벌 가문의 대립과 갈등을 실제로 겪은 사람이다. 대각국사 비의 찬을 둘러싸고 윤관 가문과 대립하였고, 이자겸의 가문과도 대립하였다. 이러한 대립과 분열의 양상은 당시 지배층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묘청의 난이 김부식에게 토벌되자 자주적이고 정체로서의 유교는 사라지고 사대적인 유교가 득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역사적 교훈으로 현실을 비판하는 삼국사기가 나오게 된 것이다.(2) 삼국유사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무신란 이후의 혼란한 사회에 대한 자각과 반성에서 그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기준을 찾기 위해 과거의 전통을 재인식하려는 문화적 배경이 고경으로 천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무리한 천도운동으로 개경의 관료들이 반대를 많이 하였다. 게다가 서경의 길지설을 입증하기 위해 거짓으로 자작극을 꾸몄지만 그게 드러나게 됨으로써 오히려 신뢰감이 떨어지고 김부식 등의 주청으로 서경 행차 역시 중단 되었다. 서경천도가 이대로는 이루어 질수 없다고 생각한 묘청 등은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에 김부식이 반란군 제압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중앙에서는 급공 하라는 요구가 있었지만, 김부식은 완공을 택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2월쯤 되어서야 서경의 반란을 진압 할 수 있었다.반란을 진압한 김부식이 돌아오기도 전에 인종은 공을 포상하였다. 그리고 높은 직위를 주었다. 하지만 개경에서 돌아온 김부식은 그 직위를 사양하는 상소를 3번이나 올리고 국가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군사를 쓰는 중요한 기회마다 방해를 한 죄로 자기 휘하의 윤언이와 한유충의 처벌을 요구했다.이러한 오랜 숙적관계에서 인종은 일단 김부식의 편을 들어 윤언이를 좌천 시켰지만 얼마 후 인종의 태도가 변해 전국에 사면령을 내려 윤언이를 중앙 정계에 복귀하게 하였다. 또 김부식을 지지하던 세력도 탄핵을 받아 대간직에서 물러났다. 이에 김부식은 정년퇴임을 1년 8개월 남겨두고 사직을 청하였다. 김부식의 마음이 불편함을 인종은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왕은 삼국사기를 그의 집에서 편찬하게 하고 그가 천거 하는 곳에 8명의 관료를 보내 편찬을 돕게 하였다. 김부식은 3년여에 걸쳐 ‘삼국사기’ 50권을 편찬하여 인종에게 바쳤다.김부식의 역사관은 다양하게 정의되고 있으나 핵심은 유교적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유교 사상이 전래한 것은 기원 전후부터라고 할 수 있지만 문화적 전통으로 이어진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골품제도와 무인 중심의 사회문화적 환경 때문에 유교사상은 학문적으로만 수용되고 정치적으로는 실현될 수 없었다. 유교사상이 정치적으로 실현된 것은 고려조에 들어와서이다. 당시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유교적 사적 사실 혹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포폄을 드러낸 것은 개인의 주관성이 확연하게 가미된 것이지만, 따지고 보면 철저한 역사의식 없이는 불가능한 경구이다.일연의 ‘찬 왈’은 칠언절구라는 한시(漢詩)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그 ‘찬’에 가장 강조된 것이 국가의식이다. 일연은 불법(佛法)을 통하여 자신이 처해 있던 고려의 국난(國難)을 타개해 보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보건대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서 찾기 힘든 가치를 함유하고 있다. 특히 고조선, 기자 및 위만조선 등에 대한 서술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5천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우수한 민족임을 다시금 깨우쳐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는 아마도 비합리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결코 종속적이지 않고 자주적인 입장에서 서술하려는 찬자의 의도와 잘 부합된다 하겠다.4.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체제(1) 삼국사기삼국사기의 서술방식은 신라본기 12권, 고구려 본기 10권, 백제본기 6권으로 신라에 대해 중점적으로 서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의 주요구성은 본기, 지, 표, 열전으로 되어있다.총 28권인 본기에서는 왕과 왕비의 인적 사항을 기록한 후 각 년마다의 정치업적, 자연재해, 자연현상, 중요 관리의 임면 기사, 전쟁 기사, 외국과의 사신 파견 등을 기록하였다.지는 잡지(雜誌)라 하여 삼국의 자료를 분야별로 분류하여 기록한 것이다. 제사, 음악, 복식, 수레, 집에 대한 지 2권, 지리지 4권, 직관지 3권으로 모두 9권의 지가 있다.열전은 총 10권이다. 열전 중 첫머리에 놓은 김유신 열전 3권, 애국명장, 충신, 화랑들, 유학자, 반역 열전 등으로 편찬하였다. 이외에도 단순한 기록과는 달리 자신의 견해를 사론이라는 형식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삼국사기에는 김부식이 직접 쓴 사론 31편이 실려 있다. 여기서 김부식은 삼국을 각각 아국(我國)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어 삼국 모두를 고려의 전신 국가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2) 삼국유사삼국유사는 5권 9편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은 왕력 와 당나라 사이에 있었던 독특한 외교적 존재이다.2) 지(志)삼국사기에는 잡지(雜志)라 하였으나, 그 내용은 지이다. 제1권은 제사(祭祀)와 악(樂), 제2권은 색복(色服), 거기(車騎), 기용(器用), 옥사(屋舍), 제3-6권은 지리지이다. 그리고 제7-9권은 직관지(職官志)인바 중앙관부(7권), 궁정관부(8권), 무관과 외직(9권)으로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제도의 해설에 치중하였고 특히 지리지에 가장 큰 비중을 둔 것은 오행지에 중심을 둔 한서나 예악지에 중점을 둔 당서와 그 특징이 다르다.우선 제사지에는 5묘(廟), 3사(祀)의 설명이 중심이며 악지는 악기, 가악(歌樂), 무(舞),악공(樂工)의 순서로 되어 있다. 그리고 복색조, 기용조, 옥사조에 나타난 금지조항은 전 국민을 하나의 법규 속에 묶어 국민의 의미를 제시한 것이며 4두품과 평민간의 같은 대우는 주목할 내용이다. 지리지가 큰 비중으로 취급된 것도 일종의 영토의식의 표현으로 생각된다. 직관지에서는 중앙행정관부에 있어서 14관부와 19전(典:7寺成典 포함)의 균형적 배려와 궁정관부가 110여개가 넘고 있어 강력한 왕권유지의 제도적 뒷받침을 엿보게 한다.3) 표(表)표는 박혁거세 즉위년(서기전 57)부터 경순왕 9년(935)까지를 연표 3권으로 나누고 있다. 이는 중국문헌의 연표에 재상표(宰相表), 종실표(宗室表), 방진표(方鎭表)가 있는 경우를 대조할 때 그 내용이 빈약하고 간소하다.4) 열전(列傳)열전 10권은 중국문헌에 비하면 매우 빈약한 편이다. 따라서 인물기준도 항목별(名臣, 循吏, 酷吏, 儒林, 叛逆 등)로 된 것도 아니고 왕후, 공주열전도 없다. 특히 10권의 열전 중에서 김유신(金庾信) 개인열전이 3권이나 되며 나머지 68인을 7권에 포함시키고 있다. 특히 7세기에 활약한 인물이 34인이고 나라를 위하여 죽은 사람이 21인이나 되고 있어 위국충절의 인물나열이 핵심이 된다.제1-3권은 김유신전으로 그 안에 선조(武力, 舒玄)와 후손(三光, 允中, 巖)의 업적을 강조하였고 제4권은 왕 이후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까지의 신라 왕조 기사와 백제?후백제 및 가락국에 관한 약간의 유사 등 25편을 다루고 있다.편에는 신라를 중심으로 한 불교 전래의 유래와 고승들에 관한 행적을 서술한 7편의 글을 실었다. 편에는 사기와 탑?불상 등에 얽힌 승전 및 사탑의 유래에 관한 기록을 30편에 나누어 각각 실었다.편 역시 신라 때 고승들의 행적으로 14편의 설화를 실었으며, 편에는 밀교의 이적과 승려들의 전기 3편을, 편에는 부처와의 영적 감응을 이룬 일반 신도들의 영검이나 영이 등을 다룬 10편의 설화를 각각 실었으며, 편에는 높은 경지에 도달하여 은둔한 승려들의 이적을 10편에 나누어 실었다. 마지막 편은 뛰어난 효행 및 선행에 대한 5편의 미담을 수록하였다.삼국유사의 신간본으로는 1908년 간행된 일본 도쿄대학 문학부의 사지총서본(史志叢書本)이 가장 오래된 것이고, 조선사학회본과 계명구락부의 최남선 교감본 및 그의 증보본(增補本)이 있으며, 그밖에 1921년 안순 암수택(手澤)의 정덕본을 영인하여 일본 교토대학 문학부 총서 제6에 수록한 것과 고전간행회본이 있다. 8?15광복 후로는 삼중당본, 1946년 사서 연역회에서 번역하여 고려문화사에서 간행한 국역본, 이병도의 역주본 등 여러 가지가 있고 동서 문화센터의 이학수 영역본과 1954년 역사학보 제5집의 부록으로 이홍직의 삼국유사 색인이 발간된 바 있다.6.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서술방식(1) 삼국사기김부식은 삼국의 역사를 기전체(紀傳體)라는 방식으로 풀어내었다. 기전체란 역사 기술·편찬의 한 체재로 편년체(編年體),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와 함께 동양에서 사서편찬법의 정통을 이루는 형식으로, 전한(前漢) 때에 사마천(司馬遷)이 편찬한 사기에서 시작하여 후한(後漢)의 반고(班固)가 편찬한 한서에서 그 정형이 완성되었다.(2) 삼국유사일연은 삼국의 복잡한 역사를 다루기 위해 그만의 독특한 집필방식을 채택했다. 춘추나 서경 등 대부분의 역사서에서 동일하게 따르고 있는 원칙과는 다르다. 다만 춘추 이후
목 차Ⅰ. 머리말Ⅱ. 서유견문의 집필 과정Ⅲ. 서유견문의 형식과 내용Ⅳ. 서유견문의 역사관Ⅴ. 서유견문이 미친 영향Ⅵ. 맺음말Ⅶ. 참고문헌Ⅰ. 머리말우리나라의 고서는 역사, 지리, 정치, 경제, 국문, 과학, 예술, 종교 등 그 종류와 분야가 실로 방대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서들의 이름정도만 들어보았을 뿐 그 고서들의 내용이 어떠한지 그리고 누가 편찬했으며 왜 그러한 고서들이 편찬되었는지는 잘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대표적인 국문학 고서중에는 총 10권 5책 125장으로 된 조선 건국의 송가집인 용비어천가, 조선조 초기의 문인 매월당 김시습이 한문으로 지은 전기(傳奇) 단편소설집인 금오신화, 조선조 영조4년에 김천택이 고려 말이래 그 당시까지 여러 사람의 시조들을 모아 엮어놓은 고시집인 청구영언이 있으며, 조선조 숙종 때 김만중이 숙종의 폐비설을 반대하다가 남해 고도로 유배 갔을 때 늙은 어머니의 병환을 위로하기 위해 썼던 구운몽, 조선조 말기에 유길준이 구미여행에서 돌아와서 쓴 서유견문 등이 있다.이렇듯 다양하고 방대한 양의 고서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수많은 고성 중 국문학 고서 중 하나인 서유견문에 대해서 정리해보고자 한다.Ⅱ. 서유견문의 집필 과정서유견문의 저자 유길준은 자가 성무(聖武), 호는 구당(矩堂), 본관은 기계(杞溪)로서 서울 출신이다. 그는 1881년(고종 18)에 일본에 건너가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했다가 1882년 귀국, 1883년 외무랑관(外務郞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한 뒤 주미 전권대사 민영익(閔泳翊)을 수행하여 도미(渡美), 보스턴대학을 다녔다. 1885년 유럽 여러 나라를 시찰하고 돌아온 뒤 개화당으로 몰려 구금되었다. 구금기간에 집필한 것이 바로 이 서유견문이다.서유견문은 연금생활에 집필하기 시작하여 1895년 탈고했다. 유길준은 1894년 갑오개혁 때 외무참의(外務參議) 등을 지내고, 1895년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내무협판(內務協辦)을 역임, 1896년 내부대신에 올랐으나 아관파천(俄館播遷)유길준(1856~1914)은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미국유학생이 되었을 뿐 아니라 갑오개혁기 군국기무처의원· 내각총서· 내부대신 등 요직을 맡으면서 그 개혁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개혁운동을 주도했던 사상가이자 정치가였다. 특히 그가 저술한 국한문 혼용체의 서유견문은 단순히 서구의 제도와 문물에 대한 소개서 혹은 전문가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개화사상과 제도개혁구상을 집약한 개화사상서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Ⅲ. 서유견문의 형식과 내용서유견문은 국한문혼용체로 그 내용을 활자로 조판하여 직접 현판인쇄를 하거나 또는 조판한 판을 가지고 연판을 떠서 연판인쇄한 활자본이다. 이 책의 출간(出刊)으로 인해 당시의 신문·잡지가 국한문혼용체를 많이 따르게 되었고, 새로운 개화사상(開化思想)에 눈을 뜨게 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사상적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그 내용을 살펴보면 서유견문의 1책은 1895년(고종 32) 간행되었으며 모두 20편(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 2, 19, 20편은 세계의 인종·물산(物産)·도시에 대해 수록되어 있고, 3∼4편은 국가의 주권(主權) 및 교육 문제, 국민의 권리문제, 5∼6편은 정부의 기원(起源)·종류·제도·직분, 7∼8편은 세금·국채(國債) 문제, 9편은 교육·군대양성 문제, 10편은 화폐의 본질·법률·경찰의 역할과 규칙, 11편은 서양 각국의 정당·직업·윤리·개인의 건강 문제, 12편은 서양의 학술·군제(軍制)·종교·역사 등의 개관, 14편은 상인(商人)의 위치와 역할, 개화(開化)의 바른 길, 15편은 예절 문제, 16편은 서양의 풍속·습관, 17편은 사회복지제도, 18편은 서양의 근대기술 등이 수록되어 있다.이 중에서 유길준이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은 둘째 부분이며, 그 부분 중에서도 14편의 개화의 바른길은 그의 독창적인 견해가 두드러지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그 이유는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소개함으로써 조선의 현실을 인식시키는데 중점을 둔 대부분의 항목과는 달리 이 항목은 개화의 개념과 그 방법 등 유길준 자신의 개화萬物이 至善極美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그런 까닭에 개화하는 境域은 한정하기 불능한 것이다.”고 개화의 개념을 정의하고 “연대가 내려올수록 사람의 개화하는 도는 전진한다고 파악함으로써 역사를 진보적·발전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어 그는 개화를 행실, 학술, 정치, 법률, 기계, 물품의 개화로 구분한 다음 이들을 총합해야 비로소 개화를 구비할 수 있다고 보았다.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유길준은 유교윤리를 바탕에 두고 서구 문물과 제도의 장점을 수용하려는 동도서기론적 사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이와 같은 태도는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개화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에 있던 집필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비교적 자유스러웠다고는 하나 연금상태에 있었던 개인적 환경에 적지 않게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으리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요인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말미암아 그의 개화관 혹은 개혁관이 현실의 시세와 처지를 중시하는 쪽으로 변화된 데에서 찾아질 수 있다.그는 ‘시세’와 처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외국의 것만을 숭상하고 자기나라의 것을 업신여긴 ‘개화당’을 '개화의 죄인‘으로, 외국인과 외국의 것을 무조건 배척하고 자기 자신만을 최고라고 여기는 ’수구당‘을 ’개화의 원수‘로 아무런 주견 없이 개화의 겉모습만 따르는 자들을 ’개화의 병신‘으로 각각 규정하였다. 한마디로 그는 개화를 반대, 배척하는 수구파들보다 현실을 무시한 채 성급하게 개화를 추진하였던 갑신정변의 주도세력을 더욱 신랄하게 비판하였던 것이다.이처럼 ‘시세’와 ‘처지’를 감안하여 ‘집중’의 태도를 취해야 된다는 입장은 개화에 대한 유길준의 핵심사상으로서 개화의 등급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즉 그는 개화를 맹목적인 허명개화를 지양하고 현실에 맞는 실상개화를 추진하자고 재차 역설하였던 것이다.Ⅳ. 서유견문의 역사관서유견문에 나타난 역사관을 살펴보면,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기초로 ‘미개화’, ‘반개화’, ‘개화’의 3단계로 하여 최초의 시대 구분을 하였다. 즉, 개화한 자는 "천만가지 사심이 없으며. 능한 자가 어떠한 지 능치 못한 자가 어떠한지 분별조차 못할 정도여서 거처와 음식에도 일정한 법도가 존재치 않는 야만이라는 것" 이다.이처럼 개화하는 일을 주장하고 힘써 행하자는 자는 또한 개화의 “주인”이기도 하다. 반면 개화하는 자를 부러워하고 배우기를 기뻐하고 갖기를 좋아하는 자는 개화의 “빈객”이고 개화하는 자를 두려워하고 미워하되 마지못하여 따르는 자는 개화의 ‘노예“가 된다. 비록 시세와 처지는 인력으로 어찌 하기 어렵지만, 노예라 할지라고 순순히 뒤따라 견문이 넓어지고 지각이 고명해지면 빈객이 되고, 부단히 노력하면 주인의 자리에까지 나아갈 수 있다고 하였다. 요컨대, 정부가 지혜로 경장을 추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부득이한 경우 차선책으로 용단 혹은 위력으로 경장을 추진함으로써 국민이 노예로 되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개혁의 추진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유길준의 논리는 갑오개혁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확보하고 나아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근거가 되었다.각국은 그 역사적 과정과 조건에 따라 독특한 개화의 길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개화사상을 본다면, 첫째 개화란 인간의 모든 일들이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개념을 규정하고, 둘째 개화는 고유한 전통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하였으며, 셋째 개화의 유형을 실상(實狀)개화와 허명(虛名) 개화로 구분하고 있다. 넷째 개화에 대응하는 타이프를 개화의 주인, 개화의 손님, 개화의 노예, 개화의 죄인, 개화의 원수, 개화의 병신들로 분석하고 있다. 다섯째 개화하는 데 있어서 윤리 문제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으며, 여섯째 국가의 구실을 강조하고, 일곱째 개화 정책의 대체(代替) 가능성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상들은 실학에서부터 싹튼 근대사상으로 계급적 시점(視點)과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이 불철저한 한계성을 내포하고 있다.유길준은 서유견문을 1천 부 발행하여 각 계 각 층의 인사들에게 무료로 배부하였는데, 이 서유견문의 개화사상은 갑론을 적절히 모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겠다.Ⅴ. 서유견문이 미친 영향1896년 2월에 국왕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유길준이 일본에 망명함에 따라 서유견문 역시 정부로부터 금서조치를 당한 결과 국민계몽이란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널리 보급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듯이, 아관파천으로 갑오개혁 때 추진된 근대적 제도개혁을 전면 중단시킨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갑오개혁 당시 유길준의 행적에 대한 비판은 있었을지언정 개화사상서인 서유견문에 대해 엄격한 금서조치가 내려질 만한 분위기가 팽배해 있지는 않았다. 따라서 서유견문은 개화 혹은 개혁을 지향하는 사람들에 의해 널리 활용됨으로써 다음과 같이 개화사상을 널리 퍼뜨리고 개혁의 필요성을 홍보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서유견문이 미친 영향을 정리해보면 첫째, 서유견문이 금서로 취급받지 않은 단적인 예로는 학부에서는 서유견문 등을 時宜의 合用한 서적으로 평가하고 이를 소학교 학생들에게 읽히라고 권장하였던 것이다. 우선 서유견문 등의 서적들을 보냈다는 점으로 미루어 이들을 교과서로 사용하도록 조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학부는 훈령 속에 근대식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소학교 학생들로 하여금 서유견문 등의 서적을 읽힘으로써 궁극적으로 부강지도를 탐구토록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서유견문이 소학교의 교과서로 활용되었던 점과 관련하여 어윤중이 사립 시무학교의 교사로 재직하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둘째,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의 내용에서도 직접 서유견문을 거론하지는 않았으나 그 내용을 참고·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독립신문은 1899년 2월 23일자에서 "현금 등 서양 각국이 다 등수가 있으니 제 일등은 문명국이요 그 다음에는 개화국 이요 그다음에는 반 개화국 이요 그다음에는 개화 못한 야만국이라“ 고 전재한 다음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를 문명국으로 일본, 이태리, 러시아, 덴마크, 네덜란드를 개화국으로 청국, 태국, 페르시아, 미안마를 반개화국으로 분류하고 야만국은 기록하다.
Ⅰ. 서론의료윤리에 있어서 임신중절 문제처럼 사람들을 흥분하게 하는 것도 드물 것이다. 임신중절문제에 대해서 찬성하든, 반대하든 간에 낙태라는 것이 큰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번 과제를 통해 임신중절이란 무엇이고 어떤 방법으로 시술되고 있으며, 어떤 상황이 임산부들이 임신중절수술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지 그리고 임신중절을 방지 할 수 있는 대책에는 어떤 것들이 알아보도록 하고, 임신중절에 대한 나의 생각을 간단히 작성해보기로 한다.Ⅱ. 본론1. 낙태의 정의낙태란 자연분만기 전에 자궁에서 발육중인 태아를 인공적으로 제거하는 일로 의사의 지시에 따른 적법한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대개 좁은 의미로 불법적인 임신중절만을 의미한다. 이것은 임신부 스스로 행하든, 타의에 의하여 시행되는 것이든 두 가지 경우 다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의사에 의한 합법적인 임신중절이란, 임신의 지속으로 모체의 건강이 현저하게 나빠질 우려가 있거나, 악질적인 유전적 소인을 없애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 태아가 모체 밖에 나와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시기에 행하는 것을 뜻한다.2. 낙태의 종류낙태의 종류에는 자연적 낙태, 치료적 낙태, 우발적 낙태의 세 가지 경우가 있는데 먼저 자연적 낙태란 통상적으로 유산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로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낙태를 뜻한다. 치료적 낙태는 모체나 태아의 건강 목적, 기형아 출생 가능성 방지, 강간이나 근친상간으로 임신했을 경우 합법적으로 이루어지는 낙태를 뜻하고, 우발적 낙태란 위에서 언급한 경우가 아닌 다른 이유로 실시되어지는 낙태를 말한다.3. 낙태의 방법(1) 진공흡입술흔히 소파수술이라고도 불리며 자궁경부를 임의로 확장시킨 후 날카로운 날이 달린 튜브를 삽입시켜 자라고 있는 태아를 조각내고 그 조각들을 흡입기 튜브를 통해 용기 속으로 빨아들인다. 강력한 흡입력으로 낙태시술 때 자궁과 경부에 심한 손상을 입고 통증을 가져다주며 감염의 위험성도 높고 때로 아기의 머리가 산모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진공흡입술은 반드시 시술 전 태아가 살아 남아있지 않는지 확인해야 한다.(3) 경관확장 자궁배출법대개 임신 2기 초기동안 행해지며 28주까지도 시술한다. 태아는 손발이 잘려 하나하나 그 조각을 제거되고 시술자들은 낙태 전에 태아의 사지를 먼저 잘라 태아가 피를 흘리며 죽을 때까지 기다린다. 몸집이 큰 태아는 몸조각이 자궁 경부를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머리를 잘게 부순다. 이 방법을 시술하기 3일 전 자궁경부가 미리 확장되어 있어야 하므로 '라미나리아'라고 불리는 마른 해초 막대를 자궁경부에 집어넣는데 이것은 경부 내의 액체를 흡수하여 경부의 크기를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한 시술자들은 스테인레스 쇠막대로 단 몇 분내로 경부를 강제 확장시키기도 한다.(4) 유도분만술임신 20주가 넘으면 태아가 많이 자라있기 때문에 '라미나리아'와 같은 약재를 사용하여 자궁경부를 열어 놓은 후 '프로스타글라딘'이라는 호르몬을 투여한다. 이는 분만을 촉진시키는 작용을 한다. 이 방법만으로는 아기가 아직 살아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요서나 소금물 등을 먼저 주입하여 아이를 죽인 후 시술하기도 한다.(5) 먹는 유산약 'RU486'1997년 FDA의 승인을 받은 유산약으로 연구결과에 의하면 임신 3개월 이내에 이 약을 600mg을 먹은 후 48시간 내에 프로스타글라딘 합성제제를 투여하면 100% 인공유산이 가능하다고 한다.4. 낙태의 실태(1) 우리나라우리나라에서 한 아기가 태어날 때 약 2.5명의 태아가 낙태로 죽어간다. 한 해에 60만 명이 태어나고 150만 명이 낙태 당한다. 이것은 세계 2위의 낙태율의 결과를 초래했다. 낙태 건수는 놀랄만한 속도로 증가했다. 한 해 150만 건, 하루에 4000건, 20초당 1인이 죽어 가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낙태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피임 실패’ 즉 ‘원하지 않는 임신’ 이다. 실제 태아 건강에 문제가 생겨 낙태를 하는 경우는 2.7%에 불과하다. 더욱더 심각한 상황은 전체 낙태 건수 중 30%가 미혼여성이라는 점이다. 이들 중 50%는 2회의하여 행하여질 때에는 처벌되지 않는 것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 규정은 1975년 2월 25일 연방 헌법재판소에 의하여 위헌 판결을 받게 되었다. 이 판결의 요지는 ‘모체 안에서 자라고 있는 생명은 독립된 법인으로서 헌법의 보호를 받는다. 국가의 보호 의무는 태아의 생명에 대한 직접적인 국가에 의한 침해를 금지할 뿐만 아니라 국가에게 그 생명을 보호할 것을 요구한다. 태아의 생명 보호는 원칙적으로 임신의 전 기간에 걸쳐 임부의 자기 결정권에 우선하며 그 기간에 따라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독일 형법 제 218 조의 a는 1976년 5월 18 일 제 15차 형법 개정 법률에 의하여 적응규정에 의한 제한적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의하면 낙태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지만 의학적 또는 윤리적 적응이 이 있는 경우에 제한적으로 허용되고 있다.(3) 미국미국의 연방대법원은 1973년 1월 22일의 Roe V. Wade 사건에서 모체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 이외에는 낙태를 금지하고 잇던 Texas주법을 위헌이라고 판결하였다. 이 판결에서 ‘privacy'에 관한 여자의 권리는 낙태의 가부를 결정할 수 있는 정도로 광범위하고 임신 최후 10주 이후에는 태아가 자궁 밖에서는 생존할 수 있으므로 주법으로 낙태를 금지해도 좋다고 판시하였다. 이러한 취지의 판결은 그 이후에도 나왔는데 임신 12주 이내의 낙태에 배우자의 동의를 요구하는 것은 위헌이고, 미성년자도 단독으로 낙태를 결정할 수 있는 헌법상의 권리를 갖는다고 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독일의 입법화와는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고 할 수 있겠다.(4) 구소련이미 1920년대부터 병원에서의 낙태를 공인하여 왔으나 1930년대 이후에는 일시 금지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1945년에는 자기 낙태의 형사책임이 폐지되고 다시 1955년에는 병원에서의 낙태를 허용하였다.(5) 영국처음에 태아보호를 위한 경우에만 면책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후 1967년의 낙태법에서는 모체의 신체적 건강 이외의유롭게 허용되고 있다.5. 낙태의 원인(1) 혼전성교?미혼모의 증가피임에 대한 무지의 상태에서 극히 돌발적으로 이루어지는 혼전성교는 대부분 원치 않는 임신을 초래하여, 무책임한 남성과 절대 다수의 여성들은 낙태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있다. 98년 한 해 전체 여고생의 0.4%인 4천700여명이 임신을 하여 이 가운데 64.3%가 낙태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나머지 35.7%는 출산을 했지만, 산모와 아이는 정상적인 가정에서 대접을 받고 있는 않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인「미혼모 증가문제와 정책방향」에 의하면 보호시설에 입소한 미혼모 중 10대의 비율이 지난 96년 42.5%, 97년 47.9%로 갈수록 높아지고 있으며 80년대와는 다른 현상인 미혼모의 저연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미혼모가 된 주된 이유는 32.8%가 피임실패, 29.4%가 성에 대한 무지임을 보고서는 지적했다. 10대 미혼모 중 45.5%가 중?고교 재학 및 중퇴생으로 나타나는 등 미혼모 연령이 급속히 낮아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10대가 학업을 중단하고 있다는 심각한 분석 결과가 나와 충격을 주고 있다.(2) 남아 선호 사상가부장적 문화에서 가능한 남아선호사상과 남성 우위라는 가치성이 성감별 등의 의료기술 발달과 만나 성별구분 낙태를 가중시키고 있다고 파악할 수 있다. 특이할 만한 사실은 일반적으로 고학력?고소득 계층에서 더욱 심한 남아선호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통계조사에 따르면 성감별에 의한 여아 낙태는 연평균 2만2천400여건이나 된다. 이는 한 해 태어날 수 있는 전체 여아의 약 9%에 해당하는 것이며, 백분율로 보았을 때 여아 100명 중 약 9명이 생명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추세마저도 "단순 추정에 지나지 않으며 최근 급격히 줄고 있는 영아 사망률을 감안한다면 실제 성감별에 의한 여아 낙태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3) 임산부의 건강 및 자율권임산부 자신의 몸과 권리가 중요시되는 이유로 낙태가 행해지기도 한다. 전통적들이며, 생명을 경시하고 자신이 맡은 일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있지 못하는 무자격 의료인이라고 생각한다. 정부는 그런 무자격 의료인을 가려내는 일을 등한시하고 있다. 또한 그런 무자격 의료인을 허가한 책임도지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 법은 법대로, 현실은 멀고, 생명을 이어가게 돕도록 선택된 히포크라테스의 후계자들은 앞장서서 살인을 현실화시키는 시대, 의료 윤리가 절대적으로 결여된 군상들의 시대가 되었다.6. 임신중절의 문제점(1) 자궁 경부 무력증임신 시 자궁경부는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굳게 닫혀 있다. 낙태수술로 이것을 무리하게 개대할 경우, 중간적 자궁 경부 열상, 출혈이 오고 자궁경부가 무력하여져서 차기 임신 시 유산, 조산을 유발할 확률이 높다.(2) 자궁천공낙태 시술시 자궁의 크기가 경관의 방향을 알려주는 쇠막대기 같은 자궁 소식자를 이용한다. 이 때 소식자가 너무 깊게 삽입되거나, 자궁 개대기로 자궁을 개대하여 큐렛(curet)으로 태아의 산물을 긁어 낼 때, 자궁이 뚫어질 우려가 있다.(3) 골반 염증성 질환낙태로 자궁 나팔관에 염증이 생긴다. 이것은 난관을 막아 불임 혹은 자궁외 임신을 초래한다. 낙태를 한 여성 중 10.9%가 골반 염증성 질환이 있고, 골반 염증성 질환이 있는 경우 다시 재발한 경우가 25%이다. 불완전한 유산이 행해질 경우 태아의 일부분이 자궁 내에 남아 부패하여 산모에게 패혈증을 유발할 수도 있다.(4) 다음 임신에 악영향낙태시술 후 다시 임신이 되면 우선 자궁내막 손상으로 인한 전반적인 자궁 기능 저하유산, 조산, 저체중아 분만의 가능성이 높다. 자궁경부 손상은 중반기 유산의 경우엔 50%정도 온다고 보며 중반기 유산의 경우는 생명을 잃는 경우도 있다.(5) 자궁외 임신낙태 때문에 자궁 외 임신이 잘되는데, 그 이유는 수정란이 손상되거나 감염된 자궁내벽에 착상하지 못하고 자궁이외의 곳에 착상을 하기 때문이다. 자궁 외 임신은 임신을 지속시키지 못할 뿐더러 산모에게 큰 위험을 초래한다.(6) 약물주입 부작용약물주입으으킨다.
1. 서론서울특별시 도봉구 창1동에 위치하고 있는 도봉문화정보센터는 지역의 정보화, 지방화 시대를 맞이하여 지역 주민의 문화적 욕구를 수용하고 평생교육의 장으로 확대하여 지역문화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자 하는 취지로 계획, 건립되었다. 도봉문화정보센터는 도봉구민 사람들에게 도서관이 갖고 있는 기본 목적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지역정보의 요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도봉문화정보센터가 어떠한 장서를 보유하고 있고 이용자들이 이용하기에 시설이 적합하게 갖추어 있는지, 그리고 이용자들의 요구를 적절히 수행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도서관을 탐방해보았다.2. 본론(1) 도봉문화정보센터의 역사도봉문화정보센터는 1997년 도봉정보도서관 건립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1999년에 건축공사를 착공하여 2001년 2월 20일에 ‘도봉문화정보센터’라는 도서관 공식명칭을 결정하였다. 같은 해 8월에 도봉문화정보센터 건물이 준공 되었고, 10월 도봉문화정보센터가 개관하여 지금까지 지역정보의 요람으로서 자리 잡아 오고 있다.(2) 도봉문화정보센터의 소개도봉구 창1동에 위치하고 있는 도봉문화정보센터는 2001년도에 ‘도봉문화정보센터’ 라는 공식명칭을 사용하며 개관을 하였으며, 주차장과 식당이 자리 잡고 있는 지하에서부터 지상2층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도봉문화정보센터는 이용자들의 자원봉사활동을 통하여 센터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도모하고 이용자들의 이용을 확대하고자 자원봉사 활동 참가를 권장하고 있다. 자원봉사 대상은 관내 중. 고등학생 및 대학생,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며, 자료열람실의 도서 정리, 도서관 환경미화, 열람실 안내 등 도서관 업무 보조를 활동하도록 시행하고 있다.(3) 도봉문화정보센터의 구성과 특징지하층주차장, 매점, 식당, 보존서고 및 자료정리실, 기계실 등지상1층자유열람실Ⅰ, 어린이열람실, 종합자료실, 컴퓨터교육실,연속간행물실 등지상2층자유열람실Ⅱ, 자유열람실Ⅲ, 문화시청각실, 멀티미디어실,전자문서작성실, 어학실습실 등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도봉문화정보센터의 지하에 있는 보존서고에는 약 7000권 정도의 장서의 보관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놓았으며, 주차장을 완비해 두었다. 그리고 매우 넓은 식당 및 휴게실이 마련되어 있었다.도봉문화정보센터 입구로 들어서면 처음 방문하는 이용자를 위해 정보센터 안에 있는 각 자료실의 위치를 편리하게 알 수 있도록 게시판과 위치판을 걸어 놓았으며, 들어가자마자 큰 안내데스크가 위치하고 있었다. 안내데스크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 종합자료실에는 자료를 검색, 열람 및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어린이열람실에는 아동열람실과 유아열람실을 따로 배치하여 자료를 관리하고 있었으며, 어린이들이 편하게 앉아서 독서 할 수 있도록 낮은 의자와 둥근 모양의 책상들을 배치하고 있었다.신문, 잡지, 등이 비치되어 있는 연속간행물실은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으나, 외벽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어서 마치 편안한 하나의 휴식공간처럼 자유롭게 이용되고 있었다.1층에는 또한 20석 정도의 컴퓨터교육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 컴퓨터교육실은 엑셀, 홈페이지 작성, 정보처리기능, 포토샵, 웹 그래픽, HTML, 자바스크립트 등 문화교실 컴퓨터 강좌 수업을 하기 위해 마련된 곳으로서 컴퓨터 강좌 수강생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제한을 둔다고 하였다.도봉문화정보센터에는 총 3개의 자유열람실이 있는데 시간에 제한을 두지 않고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했다. 1층에 위치한 자유열람실Ⅰ은 중. 고등학생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독서실 형태의 칸막이 책상으로 개인공부를 남에게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2층에 위치한 두개의 자유열람실은 대학생(만20세 이상)이상이 이용가능하며 이 두개의 열람실 역시 사람들이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일종의 독서실 형태로 만들어 놓았다.종합자료실과 비슷한 크기의 문화시청각실이 있었다. 비디오나 DVD로 영화를 볼 수도 있으며 작은 규모의 회의나 단체행사, 위성방송도 수신이 가능한 이 문화시청각실은 각종 행사나 기념식을 할 때 이용되기도 하며 매주 토요일, 일요일에는 가족영화를 상영하고 있다고 한다.대형모니터가 위치한 어학실습실은 말 그대로 어학실습을 하거나 어학관련 강좌를 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대형모니터를 통하여 자막방송이 가능하였으며, 세계 주요 방송사의 위성방송 또한 청취가 가능하다고 한다.1층에 컴퓨터교육실이 이용자의 제한을 두어서 인터넷을 이용하려는 이용자들에게는 조금 불편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는데 2층에는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멀티미디어실이 있었다. 컴퓨터교육실보다는 2, 3배 정도는 커 보이는 멀티미디어실에서는 매우 많은 컴퓨터가 구비되어 있었고, 인터넷이나 비디오, DVD, CD등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 놓았으며, 초등학생이상이면 누구나 이용이 가능했다. 그러나 몇몇의 독점에 제한을 두기 위해서 1회 이용시 2시간 이내로 제한을 두어 이용하도록 하였다.10석도 안되어 보이는 작은 규모인 전자문서작성실은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워드나 엑셀, 파워 포인트와 같은 다양한 문서를 작성하고 출력할 수 있도록 하였다.도봉문화정보센터에는 센터 내에 설치되어 있는 자료검색용 컴퓨터에서 도서를 검색 할 수 있도록 해 놓았으며, 각 자료실의 도서의 경우 대출하고자 하는 도서를 검색하여 청구기호를 메모 한 후 청구기호의 순서대로 도서를 쉽게 찾을 수 있는 한국십진분류표(KDC)의 기호 순서로 배열이 되어 있었다. 또한 자료실은 개가제로 운영되고 있어서 이용자가 직접 원하는 도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도봉문화정보센터는 어린이가 가정에서 보다 편하게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도록 어린이들 위주의 전자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다양한 강좌를 마련하여 문화교실을 운영하고 있었다.도봉문화정보센터의 모든 시설과 도서자료는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으나 도서 대출에 한해서는 도봉문화정보센터 홈페이지에 회원가입을 하여 회원증을 소지한 사람만이 가능하며, 각 실별로 다음과 같이 이용자의 제한을 두었다.어린이열람실보호자를 동반한 미취학 아동 이상연속간행물실중학생 이상종합자료실중학생 이상멀티미디어실초등학생 이상자유열람실Ⅰ중. 고등학생자유열람실Ⅱ대학생(만 20세)이상의 성인(4) 도봉문화정보센터의 장서현황종합자료실에는 약 33000권 정도의 청소년자료, 성인자료는 물론 비도서인 CD도서(Talking Book)와 녹음도서(Tape)도 약 200점 정도가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어린이자료실에는 15000권 정도로 많은 양의 아동도서가 소장되어 있고, 어학실습실에는 영어나 일본어를 비롯한 많은 외국어자료가 약 2000점 정도가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CD-ROM이나 비디오, DVD, 전자책등과 같은 약 6000점 정도의 비도서가 멀티미디어실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연속간행물실에는 연번이 1번부터 96번까지는 정기간행물이 있고, 97번부터 120번까지는 기증간행물이 있다. 아동잡지와 신문도 많이 소장되어 있다.
1. 도시경관을 중심으로1) 경관의 개념.- 경관의 사전적 의미 : 풍치 또는 특색 있는 풍경형태를 일정한 지역- 경관은 지형적 의미와 함께 지각적 측면을 함축.- 경관은 생존을 위한 생태적. 경제적 속성뿐만 아니라 상징적 , 철학적 속성을 가짐.- 이것은 경관이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차원을 갖기 때문.2) 경관의 종류.- 경관 : 인공경관(문화경관)과 자연경관으로 구분.- 인공경관 : 도시경관과 농촌경관으로 구분.- 경관을 바라보는 주 대상이 무엇인가? 에 따라 구분.(가로, 건물 , 전원등)- 도시경관 : 도시의 건축물, 가로, 광장등의 집합체.도시 거주자의 환경적 이미지.도시 거주자의 생활의 질.- 도시경관의 분류 : 가로경관. 수경관, 공공경관, 역사경관, 언어경관, 색채경관, 기후경관.경관요소.3) 도시경관의 구성.* 도시 형태적 구성.- 원소재 : 포장재료, 전주, 건축물, 가로.- 구성의 4가지 측면 : 외관. 공관, 동작, 시간.* 시각 구조적 구성.- 시야의 연속성과 단절.4) 가로경관.- 구성요소 : 차도, 보도, 간판, 가로수 , 횡단보도, 가로 시설물, 광장.- 가장 직접적인 시각적 대상 : 간판과 , 가로수 , 가로시설.5) 수경관(=수변경관)6) 공공경관, 광장, 보행자경관.7) 평면, 입체, 경관.- 기타 : 색채경관, 언어경관, 기후경관, 역사경관.2. 도시의 형태와 이미지.- 외부형태 : 집단형, 선형, 복합형, 분리형.- 내부형태 : 규칙형, 불규칙형, 혼합형.- 도시 이미지 구성의 5가지 차원.- 통로(공간을 지각하는 하나의 차원인 됨), 경계(구역경계), 결절(통로가 만나는 교착점),샌드, 마크(버스에서 내릴 때 알고 내리는 것) 도시경관의 해석학.1. 가상현실과 영상문화.- 현대 사회에서 의미의 전달 : 인쇄매체 보다 시각매체를 통해.- 미디어 기술의 비약적 발전 : 가상현실(cyberspace)- 실제 공간과 개념상의 공간이 구분되지 않는 상황.=> 현실이 아닌 것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음.=> 가상의 것이 현실보다 더욱 현실감 나게 재현.=> 영상작품 : 도시 경관의 의미를 발견하는 유용한 수단.(표현주의 작품의 배경 자체가 영화의 주제를 나타내는 경우 올라간다.)2. 텍스트로서의 도시경관.- 도시경관은 건축물, 거리, 쇼핑센터, 가게, 아파트, 무리지어 유동하는 군중등의 여러 표 현체로 가득찬 공간.- 이들 표현체 속에는 모두 나름대로의 의미들이 담겨져 있다.=> 3.1 빌딩과 6.3빌딩은 근대화의 상징물로 한국사회의 발전을 나타냄.=> 명동성당은 사회 운동가들에 의한 메카로...=> 여의도 광장은 전체주의와 군사문화의 상징으로..- 결국 도시는 무수히 많은 의미들이 그물망처럼 엮어 있는 공간.- 문제는 다양한 의미들로 구성된 텍스트로서의 도시. 이 텍스트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도시 경관을 읽을 수 있어야 영화로 도시 읽기도 가능..- 경관을 텍스트로 보기 시작한 근원은 자연환경을 하느님의 뜻으로 새기는 자연신학에서 비롯됨. => 자연 환경을 일종의 성경으로 취급.3. 텍스트란?- 일련의 기호들의 집합체.=> 독자들에게 특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어떤 맥락안에서 작가 의도하고 정렬하고 선택한 기호들의 집합.- 의미 를 갖는 기호들의 구조 혹은 질서화된 상징체가 곧 텍스트.- 텍스트는 말하는 것. 쓰는 것 뿐만 아니라 이미지, 조각, 건축형태, 음악, 신체적 운동등 다양한 형태를 포함.- 좁은 의미에서는 쓰여지는 것 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상징을 표현하는 것들을 모두 포함. => 따라서 의미로 가득찬 도시경관도 역시 텍스트..- 도시 경관의 의미들은 주체들이 특정한 의미구조를 삽입하고 독해하는 과정에서 발생.=> 만든이들의 의도된 의미 와 보는 이들의 해석된 의미 복합적 의미.- 최근 문화 지리학에서는 인간이 자연을 개조하여 만든 경관을 다른 사람에게 어떤 메시 지를 전달하는 텍스트로 봄.- 따라서,경관을 단순히 보는것 또는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읽듯이 읽어야 한다는것.- 글을 통해 저자가 어떤 가치관이나 사회 이념을 정당화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받아들이 도록 시도 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