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는 승려를 뜻하는 말로, 그의 할아버지는 고위의 성직자였고 아버지 페테르 크리스티안 뭉크(Peter Christian Munch, 1817~1889)는 노르웨이의 군의관이었으며 나중에는 관료 봉급에 보태기 위해 당시 도시였던 크리스티아니아(오늘날의 오슬로)근교 빈민가의 의사였다. 그의 집안은 노동자가 많이 살던 그 일대에서는 거의 유일한 관료집안이었다. 종교적 성향이 강했던 그의 아버지는 1861년 44세의 나이로 23세였던 로이라 카트리네 비욀스타와 결혼한다. 여기에서 1862년 딸 소피에가 태어났고 1863년 12월 12일에는 에드바르트 뭉크가 태어났다.아버지 크리스티안과 어머니 레우라의 금슬은 매우 좋은 편이었다. 크리스티아니아 시절 뭉크의 형들 안드레아스(1865~1895), 로이라(1867~1926), 잉게르(1868~1952)가 태어났다. 죽음이 임박한 어머니는 제일 위의 두 아이 소피에와 에드바르트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이것은 소년 에드바르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뭉크의 모친은 8년간의 결혼생활 끝에 결핵으로 죽었을 당시 30세였다. 그녀는 일곱 살의 소피에, 여섯 살의 에드바르드, 세살의 안드레아스, 두 살의 로이라, 11개월 된 잉게르 등 어린 아이 다섯을 두고 갔다. 뭉크의 모친은 자신이 잉게르를 출산하기 전에 자신이 죽을 것을 예상하고 아이들에게 작별의 편지를 써놓았다고 한다. 뭉크가 여섯 살의 나이로 경험한 어머니의 죽음은 최초의 크나큰 상처였다.죽음과 지옥의 경험 - 성장기뭉크의 아버지 크리스티안은 부인인 레우라가 죽기 전까지는 유머도 풍부하고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러나 1868년 겨울 사랑하는 아내가 뱃속에 마지막 아이를 담은 채 죽어 버리자 크리스티안은 점점 더 슬픔에 빠져들었다. 그는 병약하고 민감했던 뭉크에게 의사가 되라는 말을 귀가 닳도록 했다고 한다. 하지만 뭉크는 아버지의 꿈을 저버리고 미술학교에 입학한다. 게다가 아내를 잃은 슬픔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아버지는 점점더 광적인 신자가 되었고, 이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물론 그런 죽음에 이르는 병을 견디기 위한 탈출구로서의 예술 활동을 뭉크가 발견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아버지의 지극한 신앙심을 물려받은 뭉크의 여동생 로이라는 종교에 극도로 심취하여 결국 정신병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거기에는 분명 유전적 요인도 있었지만). 열세 살 때 뭉크는 심하게 앓았었다."열세 살 되던 크리스마스날 밤 나는 피를 토했었다. 열이 온몸을 흔들고 끔찍한 쇼크가 나를 삼켰다. 그러자 다음 순간 네가 최고의 심판자 앞에 서게 되다니, 넌 영원한 저주받을 거야." 이 소년은 단지 죽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맹세했었다. "이제 그는 신과 계약을 맺었다. - 신에 봉사하기로 약속을 한 것이다. 그가 다시 건강해진다면 - 어지럼증이 없어진다면 - 이전처럼 그렇게 마냥 즐겁게 살 수 없으리라고."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에드바르트는 건강을 회복한다. 그러나 그의 누이이자 그 동안 어머니를 대신해 어머니 역할을 해 오던 소피에가 결핵에 걸렸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나고 만다.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라는 상처를 앓고 난 소년은 이제 소피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고 믿고 괴로워하며 스스로를 자책하게 된다. 한창 성숙해 가는 청년 뭉크는 그림에 뛰어난 소질과 재능을 보였다. 이모는 이러한 그의 재능을 후원해 준데 반해 아버지는 그가 엔지니어가 되기를 바래 그는 1879년 공과대학에 입학하지만 얼마 후에 그는 공과대학을 자퇴한다. 뭉크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타고난 재능을 보였지만, 미술에 관한 정식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다. 그는 오슬로 크리스티아니아에 있는 미술·공예 학교에 잠시 다녔다. 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노르웨이의 중요한 자연주의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그(1852~1925)는 뭉크를 지도했으며 그에게 프랑스의 인상주의를 소개했다.이국의 방랑자로 살아간 뭉크뭉크가 1885년에 처음으로 파리를 여행한 뒤에 그린 〈저녁 시간 The Evening Hour〉 같은 그림들은 인상주의 양식을 보여주었다. Karl Johan Street〉(1891, 라스무스 마이어스 컬렉션 소장)와 표현주의 양식인 〈저녁 때의 카를 요한 거리 Evening on Karl Johan Street〉(1892, 라스무스 마이어스 컬렉션 소장)의 대조가 이러한 표현 양식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준다.뭉크가 젊은 시절을 보낸 크리스티아니아는 작은 지방 도시였는데, 그는 이 도시를 다스리는 상류계급이 편협하고 독선적이며 문화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고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뭉크는 일찍부터 사회적 행동과 도덕 및 예술에 대해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자유분방한 사람들과 사귀게 되었다. 이런 환경은 인습의 굴레에서 그를 해방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뭉크의 미술은 성(性)과 사회적 상황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파리로 간 그는 인상파, 신인상파, 후기인상파의 영향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그림을 통해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인간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뭉크는 스칸디나비아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과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노르웨이의 소설가 크누트 함순,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를 비롯한 중요한 작가들을 많이 사귀게 되었다. 그는 헨리크 입센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특별한 친밀감을 느끼고, 입센의〈왕위를 노리는 자들(The Pretenders)〉에 삽화를 그렸으며〈헤다 가블러 Hedda Gable〉와 〈유령 Ghosts〉을 상연할 때는 무대장치를 설계하기도 했다.뭉크는 요람에서부터 죽음을 안 사람이라고 스스로 말하곤 했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누이의 죽음마저 지켜봐야 했다. 정신적으로 나약한 형제들, 신경질적인 아버지. 유년 시절의 어두운 기억은 뭉크의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그의 삶이 불행하고 어두웠던 만큼 그의 작품이 갖는 주된 테마는 죽음과 사랑이었다. 뭉크는 자신의 생애 동안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끊임없는 갈등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뭉크를 절망의 화가라고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뭉독일 미술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그 또한 독일의 미술, 특히 표현파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 등 독일에서 화가로서의 꽃을 활짝 피웠다.베를린 소동과 뭉크1892년 9월 24일 뭉크는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는 노르웨이 출신의 화가 아델스텐 노르만(Adelsten Normann)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편지는 매우 정중한 어조로 쓰여 있었고, 내용은 전시 초청장이었다. 편지를 받은 뭉크는 좀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베를린이라면 그야말로 유럽의 강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통일 독일의 심장부가 아닌가. 뭉크는 노르웨이 국내에서의 전시회도 그다지 성공적이랄 수 없는 결과를 맛보았다. 그는 파리까지는 아니어도 베를린이라면 그의 그림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찜찜한 기분을 털어 버리고 베를린으로 자신의 작품 중 최근작을 엄선해서 55개의 작품을 보냈다. 그리고 자신도 베를린으로 향했다. 그의 전시회는 11월 5일 토요일 오전 10시에 개막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장소는 '베를린 건축가의 집'이었다. 뭉크는 개막 5일 전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드디어 개막일 전시장은 개막행사에 맞춰 도착한 독일 미술가 협회 소속 미술가들을 비롯한 일반 관람객으로 붐볐다. 그리고 사람들이 뭉크의 그림을 보며 일으킨 반응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그들 중 대다수 사람들은 뭉크의 그림을 예술에 대한 모욕이라고 야유를 했으며 어떤 이들은 당장 전시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뭉크의 그림을 옹호하려 한 사람들도 뭉크의 그림을 이해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예술 창작의 지유를 옹호해야 한다는 취지이거나 외국 화가에 대한 결례라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뭉크의 전시회는 새로운 제국의 수도라는 자부심으로 가득찬 베를린을 뜨겁게 달궜다. 뭉크의 그림을 두고 마치 네티즌들 사이에 찬반논쟁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시끄러웠던 것이다. 결국 전시회가 시작된지 일주일만에 전시회는 중단되고 말았고, 독일 미술가 협회는 이 일을 제국 건설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애국심과 민족적인 자각 속에 독일 예술계는 온통 미래와 현실에 대한 분홍빛 전망으로 가득한 작품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돌연 북구의 어둠 속에서 날아온 화가가 자신들의 그런 전망에 대해 정면으로 배치되는 작품들을 들고 나타난 것이었다. 그 무렵 독일은 프랑스의 인상주의의 회화 흐름조차 경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나타난 뭉크는 가히 충격이었다.나치, 괴벨스, 퇴폐 미술1920년대에 이르러 뭉크는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이 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다리파(독일 표현주의의 한 유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독일의 욱일승천하던 기세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통해 한 풀 꺾였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 특히 프랑스에 대해서만큼은 더욱더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민족적인 감정이 부각되었다. 이런 독일의 민족주의 감정은 한 발 더 나아가 인종주의적 편견으로 자라났다. 독일의 일부 비평가들은 이런 감정을 섞어 게르만족의 원형이 잘 보존된 북구 스칸디나비아 반도 출신의 화가에게 프랑스 인상주의에 맞설 수 있는 게르만 정신의 발현으로 생각하고 싶어 했다. 얼마 후 나치의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고, 선전상이 된 괴벨스는 뭉크를 통해 북유럽 국가들에 좋은 인상을 주고, 자신의 의도대로 선전되길 기대했다. 그들은 뭉크에게 괴테 메달을 수여했고, 괴벨스는 뭉크에게 최대의 찬사를 바치며 아부했다. 그러나 뭉크는 이들에게 협조하길 거부했다.뭉크의 협조 거부 탓은 아니었지만, 괴벨스나 히틀러의 나치스는 뭉크의 작품 세계가 그들이 의도하는 바와 맞지 않다는 것을 결국 깨우치게 되었고, 한때 그들이 지원하기도 했던 독일 내 전위적인 예술 그룹에 대한 탄압을 시작한다. 그들은 다가오는 전시를 위한 독일 국민에 대한 선동으로서의 예술과 유럽을 비롯한 세계에 게르만 인종의 우수성과 나치 체제의 강력함을 선전해줄 예술가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괴벨스최대의 찬사는 순식간에 최대의 경멸로 뒤바꼈고, 그의 그림은 박물관에서 렀다.
에드바르트 뭉크가 사람들에게서 시체의 얼굴을 보았다면 쟈코메티는 그들 영혼의 가벼움을 보았다. 인간을 그 영혼을 담고 있는 형체가 아닌 영혼의 기본적 실체에 포커스를 맞춘 작가. 쟈코메티(Alberto Giacometti). 그가 남긴 조각 작품을 보면 점점 가늘어져만 가는 모습에서 위태로운 현실에 처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 때 그의 작품은 성냥갑 속에 들어 갈 만 큼 작았고 깍아내다 못해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고 할만큼 형태의 무게감을 덜어내고자 열중했음을 알 수 있다. '쟝 쥬네’의 말처럼 쟈코메티는 겉치레가 없어질 때 인간에게 남아 있게 될 것을 발견하기 위해 시선에 방해가 되는 것을 제거해 버릴 줄 아는 작가였다.1901년 10월 10일 스위스의 보로고노브에서 태어나 1966년 1월 11일 쿠르에서 사망한 이 조각가는 또한 인간의 고독을 강렬하게 드러냄으로써 문학의 실존주의와 비견되기도 하는 작품들을 남겼다. 지금까지도 많은 작가나 시인들이 그의 적품을 사랑하게 된 까닭은 사실 여기에도 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후기 인상주의 화가인 아버지 조반니와 야수파 화가이자 그의 대부인 퀴노 아미에트에게 많은 격려를 받았다. 그는 스탐파 근처의 마을에서 이런(예술적 환경이란 점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후에도 그는 평생 어릴 적 추억이 담긴 스탐파를 규칙적으로 들렸다고 한다. 그의 유명한 작품인 는 그의 동생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그의 동생인 디에고는 가구 디자이너로 명성을 날렸고, 또 다른 남동생인 브루노는 건축가가 되었다.쟈코메티는 20세기의 뛰어난 미술가였다. 다른 전위파 예술가들이 실재와 유사한 표현을 추구하기 보다는 비구상적이거나 표현주의적인 내용을 묘사하려고 할 때 그는 자신이 모델로 한 인물이 드로잉이나 회화나 조각에서 마치 살아 있는 사람 같은 충격을 겪을 만큼 실제 세계에 필적하고자 하는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를 추구했다. 그의 인물상들을 정면에서 보면, 처음에는 부피도 무게도 없는 듯 가늘고 길게 이어져 있는 듯이 보이지만 곧이어 닥쳐오는 묘한 충격과 감동에 젖게 된다. 멀리 어느 공간엔가 확실한 존재감을 가지고 그의 조각들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쟈코메티는 살아 생전에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몽파르나스의 초라한 작업실에서 살기를 고집할 정도로 소박한 은둔자의 삶을 살았다. 자코메티가 그의 가늘고 길다란 위태로운 모습의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가지게 된 것은 1919년에서 1921년 사이의 미술 수업과 함께 피렌체와 로마, 파리에서 많은 이집트 미술품들을 감상하면서부터 그 단초를 마련하게 된 것 같다. 그는 그곳에서 정형화된 형태와 경직된 정면상을 보이는 고대 원시종교미술 형식이 실체와 같은 묘한 힘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쟈코메티는 이 시기 파리체류 기간 중 거의 매주 일요일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했으며 그에게 인상적이었던 작품들을 많이 복사하였다. 이러한 조각들 중에는 이집트 구왕국(Old Kingdom) 시대의 조각들을 비롯하여 선사 키클라데스 시기의 대리석 상들이 있었다. 쟈코메티는 그리이스 고전 조각보다는 이집트 조각과 키클라데스상에서 더욱 많은 매력과 힘을 발견했다. 이 시기에 쟈코메티의 조각에서 이런 원시종교미술의 영향이 형식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난 경우는 드물지만 그의 작업이 계속되면서 이런 원시종교미술과의 어떤 내적인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그후 그는 제네바의 미술학교와 공예학교에서 수학하고 1922년 파리의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에서 선생인 에밀 앙투안 부르델에게 배우며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들은 입체파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들로 알렉산더 아르키펭코, 레이몽, 뒤샹, 비용 등의 조각들과 양식상 흡사했다. 그는 또한 (1926)과 같이 원시 아프리카나 오세아니아 원주민들의 그것과 같은 형태로 파리의 현대 미술가들에게 인기를 얻게 되었다.그는 일찍부터 실존주의적 고민에 빠졌다. 1920년대 어느 날 한 소녀를 그리려다 그 소녀의 응시만이 살아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느낌에 강한 충격을 받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때마침 습작해 왔던 인간의 해골과 응시를 제외한 소녀의 모든 것이 도대체 다를 게 무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순간 응시, 곧 인간의 의식만이 살아있는 모든 것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인간의 의식만이 살아있는 것이라면, 예술가는 인간을 무엇보다 하나의 의식으로 표현해야 한다. 이로 인해 한동안 그의 조각은 자꾸 작아졌다. 물량감이 크면 `의식으로서의 인간'을 배반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마지막 조각칼질에 나머지 흙덩어리마저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이 딜레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탈출구를 찾다보니 이제는 공중에 수직으로 연필선을 그은 것마냥 가늘고 긴 형상이 나타났다. 그로서는 덩어리감과 물질감을 크게 덜면서 의식으로서의 인간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1947년 작 '가리키는 사람'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창조된 그 특유의 인간상이다. 이런 조각적 인간상과 관련해 그는 재미있는 어록을 남긴 바 있다.“…나는 내 조각을 한 손으로 들어 전시장으로 가는 택시 안에 넣었다. 나는 다섯 사람의 장정도 제대로 못드는 커다란 조각들을 보면 짜증이 난다. 거리의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무게가 없다. 어떤 경우든 그들은 죽은 사람보다, 의식이 없는 사람보다, 가볍다. 내가 부지불식간에 가는 실루엣처럼 다듬어 보여주려는 것이 그것이다. 그 가벼움 말이다.” Giacometti자코메티가 자기 동생을 조각한 '디에고'(1952~53년) 역시 `무'로서의 인간을 나타낸다. 그러나 가슴 부분은 양괴감이 강해 `존재'의 느낌 또한 준다. 인간은, 자신은 `무'이면서 운명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물, 곧 `존재'로 본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이 개별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를 사물로 취급하는 인간은 상호 적대적이다. '디에고'는 이런 존재와 무의 긴장속에 있는 인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원한 고독과 부조리로서의 인간상인 것이다.
REPORT-제주도 왕벚나무에 관한 관찰과 목 :담당교수 :제 출 일 :학 번 :이 름 :제주도 왕벚나무에 관한 관찰. 서론벚나무의 개화기인 4월중에 벚나무와 벚꽃에 대해서 조사해 보았다. 제주도에 가장 많이 자라고 있는 벚나무는 왕벚나무로 조사과정에서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사옥이라 불리는 제주벚나무가 왕벚나무의 조상과 같은 기본종 일 수도 있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벚나무와 제주도에서 자라는 기본종인 왕벚나무에 대해 알아보겠다.. 본론1) 벚나무산지에서 널리 자란다. 높이 20m에 달하고 나무껍질이 옆으로 벗겨지며 검은 자갈색 이고 작은가지에 털이 없다. 잎은 어긋나고 달걀 모양 또는 달걀 모양의 바소꼴로 끝이 급하게 뾰족하며 밑은 둥글거나 넓은 예저로 길이 6∼12cm이다. 잎 가장자리에 침 같은 겹톱니가 있다. 털이 없고 처음에는 적갈색 또는 녹갈색이지만 완전히 자라면 앞면은 짙은 녹색, 뒷면은 다소 분백색이 도는 연한 녹색이 된다. 잎자루는 길이 2∼3cm이며 2∼4개의 꿀샘이 있다. 꽃은 4∼5월에 분홍색 또는 흰색으로 피며 2∼5개가 산방상 또는 총상으로 달린다. 꽃자루에 포가 있으며 작은 꽃자루와 꽃받침통 및 암술대에는 털이 없다. 열매는 둥글고 6∼7월에 적색에서 흑색으로 익으며 버찌라고 한다. 벚나무는 때로는 개벚나무(Prunus leveilleana)와의 구별이 곤란하지만 톱니의 밑부분이 넓어서 침처럼 되지 않는 것이 다르고, 중국 동북부에서 자라는 것은 전부 개벚나무의 학명을 쓰고 있다.2) 종류와 특징가) 올벚나무키는 10m 가량 자라고, 잎은 길둥근 모양에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으며 어긋맞게 난다. 4월에 분홍색 꽃이 잎보다 먼저 핀다. 작고 둥근 열매는 6∼7월에 검게 익는다. 전남 구례군 화엄사에 있는 것은 천연 기념물 제38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지리산, 보길도, 제주도, 위봉산, 장산곶 등지와 일본에 분포한다.나) 산벚나무장미과의 낙엽 교목. 대표적인 벚나무로 높이는 약 25m이다. 벚나무와 비슷하나 작은 가지가 더 굵고, 나무껍질은 틈이 가고 짙은 회갈색이다. 어린 잎은 붉은색이고, 때로는 노란색 갈색인것이 있다. 잎은 어긋나며 톱니가 있고, 앞면에는 털이 나 있는 것도 있다. 잎자루의 밑부분에는 한 쌍의 꿀샘이 있다. 봄에 연분홍색 꽃이 산형으로 달리는데, 꽃에는 꽃자루가 없다. 꽃받침조각은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꽃잎은 둥글고 끝이 오목하며 암술대와 씨방에 털이 없다. 꽃받침, 꽃자루, 싸개, 비늘조각 등에서 끈적끈적한 물질이 나온다. 여름에 둥근 열매가 검은색으로 익는데 먹을 수 있다. 바닷가의 들이나 산에서 자라며, 정원수로 많이 심는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등지에 분포한다.다) 왕벚나무장미과에 속하는 낙엽 교목. 잎은 호생하며 장타원형 또는 도란형으로 길이 10㎝안팎이다. 급첨두이며 원저 또는 넓은 설저이고 털모양의 거치나 복세치가 있다. 잎 양면과 엽병에 털이 없으며, 뒷면은 회록색을 띤다. 엽병은 길이 2∼3㎝로 2∼3개의 밀선이 있다. 꽃은 4월에 잎과 거의 동시에 피며 산방화서 또는 산형화서에 3∼5개씩 달리며 담홍색 또는 백색이다. 화경과 꽃받침등에 털이 없으며 화축에 포가 있다. 열매는 둥글고 6∼7월경에 적색에서 흑색으로 익는다. 수피는 암갈색으로 옆으로 벗겨지고, 소지는 털이 없으며 암갈색이다.제주도와 전라남도 대둔산에서 자생하며, 제주도 남제주군 남원읍 신예리의 왕벚나무 자생지는 천연기념물 제156호로, 제주시 봉개동의 왕벚나무 자생지는 제159호로, 전라남도 해남군 산삼면 구림리의 왕벚나무 자생지는 천연기념물제173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양지 바르고 배수가 좋은 곳에서 잘 자라지만 대기 오염에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수명은 약 60년 정도이다.이외에 가는잎벚나무(var. densiflora Uyeki) : 잎이 피침형인 것. 털벚나무(var. tomentella Nak.) : 제주도에 자라고, 엽병, 잎뒷면의 중륵에 융모가 밀 생하고 화경에도 털이 많은 것.사옥(var. quelpaertensis Uyeki) : 제주도에 자라고, 엽병 및 화경에 잔털이 있고 화경의 길이가 2∼3㎝인 것이 있다.자연 상태에서의 결실률은 올벚나무 89%, 산벚나무 16%, 자생하는 왕벚나무 4.2 %라는 연구 결과가 말해 주듯이 왕벚나무 증식은 어려운 상태에 있다. 그래서 지금도 자생 왕벚나무의 개체수는 무척 적고 드물다.3) 제주 왕벚나무의 유래왕벚나무는 1901년에 처음으로 학계에 보고되었다. 일본 도쿄 교외의 꽃집에서 자라고 있었으며 도쿄대학교 부속식물원에서도 1그루 자라고 있었으나 1911년 50년생 정도에서 죽었다. 꽃집에서 자라는 것에 대하여 명명되었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전국에서 자생지를 찾았으나 모두 허사였다. 1907년 4월14일 제주도 홍노리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프랑스의 타케 신부가 한라산에서 제주 사람이 사옥이라고 하는 식물을 채집하여 유럽으로 보냈다. 이것을 벌링대학교의 케네교수가 왕벚나무의 변종으로 발표하였다. 이 표본의 일부는 일본 쿄토대학의 표본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왕벚나무의 변종이 한라산에서 발견됨에 따라 왕벚나무의 고향이 한라산이라 믿게 되었으며 한라산 남쪽 사면의 해발 600m 지점에서 사옥은 물론 이의 기본종인 왕벚나무가 같이 자라는 곳을 찾았다.4) 연구자료가) 제주 왕벚나무의 기본종산림청 김찬수 박사는 한라산의 왕벚나무 분포를 밝혔는데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관음왕벚나무 prunus yedoensis var한라왕벚나무 prunus Hallaiensis탐라벚나무 prunus longistylus위의 3종류는 암술대에 털이 있는 것이 공통특색이다. 그리고 관음왕벚과 한라왕벚나무의 꽃받침통에는 털이 있으나 탐라왕벚나무의 꽃받침통에는 털이 없는 것이 다르다. 어느 기관에 털이 있는 종류와 없는 종류가 교잡되었을 때 나타나는 털의 분포는 일정하지 않다. 따라서 위 3종류에서 불 수 있는 털의 분포는 잡종현상에서 유래하였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이는 왕벚나무가 잡종화에 의하여 생성된 것이라면 제주벚나무는 왕벚나무의 형성과정에서 생긴 잡종형이 아니고 왕벚나무를 직접 만드는데 기여한 기본종으로 볼 수 있다.
REPORT-식물의 영양흡수 기작과 목 :담당교수 :제 출 일 :학 번 :이 름 :- 식물의 영양흡수 기작 -1. 수동적 흡수(passive absorption)수동적 흡수 - 체내의 대사작용과 전혀 상관없이 일어나는 흡수1 확산설(diffusion theory)이온이 확산현상에 의하여 흡수된다는 설이다.예) K+는 수용액속에서 Na+보다 2배정도 빨리 확산되나 세포내에서는 7배나 빨리 확산된다.2 집단류설(mass flow theory)잎에서 수분증말에 따라 발생하는 증산류가 연쇄적인 반응에 의해 뿌리에까지영향을 주어 토양 수분에서 용질을 흡수, 운반한다는 설이다.3 이온접촉치환설(ion contact exchange theory){4 도난설(Donnan theory){2. 능동적 흡수(active absorption)능동적 흡수 - 체내 대사작용과 관련이 있는 흡수1 운반체설(carrier theory)생체막내에 어떤 분자(운반체)가 있어 이것이 외부의 이온과 독특한 결합자리를 이용해 결합한 다음 세포질이 있는 내부로 이동하여 이온을 분리 시킴으로써 흡수가 이루어진다는 설이다.생체막은 그 내부에 어떤 분자가 있어 그 분자로 하여금 이온의 막을 통과하여 이동할 수 있도록 한다. 이때 이 분자를 운반체라고 한다. 이 운반체는 어떤 특정한 온도에 상응하는 독특한 결합자리를 갖고있는 선택적 이온 수송을 가능케 한다고 한다. 이런 운반체의 생성은 직·간접적으로 ATP를 필요로 하며, 따라서 활동성 운반체는 일종의 인산화된 화합물이라고 생각된다. 운반체는 막 내부에서 확산성을 갖고 있어서, 막의 외부경계에 접근하여 친화력을 가진 특정의 이온과 만난다. 이렇게 만나 이오는 운반체에 붙어서 운반체 이온 복합물에서 인산기를 분리시킨다. 이렇게 하여 이온에 대한 친화력을 잃어, 탈피된 이온은 인접된 매체, 즉 세포질에 들어간다.{2 이온 펌프설(ion pump theory)생체막에 있는 ATP분해 효소에서 나온 H+이온이 생체밖으로 나감으로써 거기에 상응하는 양이온을 막을 통해 흡수한다. 반면에 ADP는 세포질에 들어가 수분과 결합하여 OH-농도를 증가시키게 되고, 이때 OH-는 음이온 운반체로 하여금 OH-과 치환할 수 있는 음이온을 선택적으로 흡수되게 된다. 이와같이 양이온과 음이온을 흡수하는 것이 이온 펌프설이다.{과정(1) 운반자의 세포안쪽에 Na+가 결합된다.(2) ATP가 ADP와 Pi로 분해되며 Pi가 운반자에 결합한다. 즉 운반자가 인산화 되는 것이다. 이때 ATP가 갖고 있는 에너지는 운반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3) Pi가 갖고 있는 에너지를 받은 운반자는 구조적인 변형을 일으키며 Na+를 세포밖으로 밀어내며 동시에 K+와 결합할 수 있는 운반자의 특정부위가 세포바깥쪽을 향하여 노출된다.
1895년 P.퀴리와 결혼 후 남편과 공동으로 연구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물리학에서는 새로운 사상(事象)이 잇달아 발견된 시기였는데, 뢴트겐의 X선 발견, H.베크렐의 우라늄 방사능 발견에 자극되어 퀴리 부부도 방사능 연구에 착수하였다. 먼저 베크렐의 추시부터 시작, 이때 방사능의 세기를 측정하는 데에 전기적 방법(피에르가 발견한 압전기의 이용)을 썼다. 그것은 방사선의 정량적 측정법으로서 베크렐의 사진법(寫眞法)보다 편리했다. 토륨도 우라늄과 마찬가지의 방사선을 방사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방사능(放射能:radioactivity) 이라 불렀다.또한 방사능이 원자 자체의 성질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러 가지 시료(試料)에 대하여 측정하던 중 우연히 우라늄광물 피치블렌드가 우라늄 자체보다도 강한 방사능을 보인다는 것을 관찰하고, 그 속에 미지(未知)의 강한 방사성 성분이 존재할 것이라고 추정, 이것의 추출을 시도했다. 보헤미아의 요아힘스탈에서 산출되는 피치블렌드에 대하여 방사능을 바탕으로 화학분석을 하여(방사화학분석법의 시초), 1898년 7월 폴로늄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그녀의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다. 이어 그 해 12월 라듐을 발견하였다.이 두 원소는 방사성원소로서 발견된 최초의 것으로, 특히 라듐은 우라늄에 비하여 훨씬 강한 방사능을 가진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이 발견은 방사성물질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새 방사성원소를 탐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업적으로 1903년 퀴리 부부는 베크렐과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피에르는 소르본대학 이학부(理學部) 교수, 마리는 그 실험실 주임이 되었다.얼마 후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자, 이 후 단독으로 방사성물질을 계속 연구, 1907년 라듐 원자량의 보다 정밀한 측정에 성공하고, 1910년에 금속 라듐의 분리에도 성공하였다. 그 동안 남편의 후임으로 여성으로서 최초의 소르본대학 교수가 되었고, 라듐연구소 건립에도 노력하였다. 이것은 그 후 파스퇴르실험소와 퀴리실험소가 되었는데, 그녀는 퀴리실험소 소장으로서 프랑스의 과학 연구에 공헌하였다.1911년 라듐과 폴로늄 발견으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물리학자인 장녀 이렌은 마리의 실험조수로 있던 F.졸리오 퀴리와 결혼, 1935년 남편과 함께 인공방사능 발견의 공적으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지 61년 만인 1995년 4월 20일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여성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역대 위인들이 안장되어 있는 파리 팡테옹 신전으로 이장되었다라듐 radium(Ra)1898년 폴로늄(polonium)과 함께 우라늄광석에서 발견된 최초의 방사성원소이다. A. H.베크렐의 방사능에 관한 실험을 추시(追試)하여 여러 시료에 관하여 방사능의 유무를 검토하고 있던 중, 우라늄의 존재량에 비례하지 않는 특별히 강한 방사능을 갖는 피치블렌드를 발견하고, 그 속에 강한 방사능을 갖는 미지의 원소가 존재하고 있음을 추정하였다. 그리하여 부부 협력하에 다량의 원석(原石)을 처리 분리하여 비스무트와 공침(共沈)하는 부분에서 폴로늄을 발견하고, 이어서 바륨과 공침하는 부분에서 강한 방사성 물질이 존재하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부분을 염화물로서 반복하여 분별결정(分別結晶)을 시행하여 바륨을 분리하고, 스펙트럼분석 결과 등에서 새로운 원소임을 확인하였다. 라듐이라는 이름은 방사선을 뜻하는 라틴어인 radius에 연유한다. 방사능은 우라늄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나, 우라늄보다 훨씬 강한 방사능을 갖는 라듐의 발견은 방사능에 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단서가 되었다.【존재】 천연으로는 233Ra(악티늄 X AcX: 붕괴, 반감기 11.68일), 224Ra(토륨 X ThX: 붕괴, 반감기 3.64일), 226Ra(우라늄 계열: 붕괴, 반감기 16.02 102년), 228Ra(메소토륨 Ⅰ MsTh Ⅰ: 붕괴, 반감기 6.7년)의 4종의 동위원소가 존재한다. 퀴리 부부가 발견한 것은 226Ra으로, 보통 라듐이라 할 때는 이것을 가리킨다. 226Ra은 동위원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모든 우라늄광석 속에 함유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피치블렌드 1 t 속에는 약 200 mg이 존재한다. 클라크수 1.4 10-10(제84위)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희소한 원소의 하나이다.【성질】 은백색의 광택이 있는 금속으로서 방사성원소의 대표적인 것이다. 바륨과 비슷하지만 바륨보다 휘발성이 크다. 알칼리토금속 중에서는 화학적 성질이 가장 격렬하다. 공기 중에서는 즉시 산화하여 표면이 검게 변한다. 물과 반응하여 수산화라듐이 되어 수소를 발생한다. 산소와 접촉하면 산화물이 된다. 일반적으로 다른 알칼리토금속과 비슷한 성질을 보이지만, 다른 것보다 훨씬 격렬하다. 불꽃반응은 분홍빛이다.【제조법】 라듐은 피치블렌드나 카르노타이트 같은 우라늄광석에만 함유되어 있다. 이것을 바륨과 함께 분리하여 분별결정법에 의해서 바륨을 제거하고, 라듐염 용액을 수은전극을 써서 전기분해하여 아말감으로 만들고 이것을 수소 속에서 증류하면 금속라듐을 얻는다.【용도】 22a626Ra은 반감기 1602년으로, 방사능의 이상적인 표준으로서 사용된다. 또, 선원(線源)으로서 의료용나 공업용 방사선사진법, 발광도료 등에 사용되어 왔으나, 라듐을 쬐게 되면 건강을 해친다는 사실이 밝혀져 최근에는 다른 인공방사성동위원소가 사용된다.원자번호 88가장 안정한 동위원소 226녹는점 약 700끓는점 약 1,737비중 약 5원자가 2전자배열 2-8-18-32-18-8-2또는 (Rn) 7s2폴로늄 polonium(Po)1898년 피치블렌드에서 라듐과 동시에 발견되어, 부인의 조국인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때 발견된 것은 반감기 138.401일인 폴로늄 210 210Po이며, 보통 폴로늄이라고 할 때는 이것을 가리키는데, 우라늄-라듐계열의 마지막에 위치하는 방사성원소이며, 라듐 F(RaF)라고도 한다. 천연 방사성계열에는 다음 7종의 동위원소가 존재하는데, 토륨계열에는 토륨 A(216Po), 토륨 C'(212Po)가, 우라늄 계열에는 라듐 A(218Po), 라듐 C'(214Po),라듐 F(210Po)가, 악티늄계열에는 악티늄 A(215Po), 악티늄 C'(211Po)가 속한다. 이 중에서 라듐 F(210Po)이외는 수명이 짧다. 210Po은 우라늄 238 238U의 붕괴생성물로서 우라늄광석 속에 함유되어 있지만, 피치블렌드에는 광석 1t당 0.1 mg 이하의 미량이 함유되어 있다. 클라크수는 4 10-14(제87위)이다. 최근에는 비스무트를 원자로 내에서 중성자를 조사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