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Bronze개인인증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16
검색어 입력폼
  • 인터넷의 역사와 응용서비스
    학번 :이름 : 전나슬1. 인터넷의 역사와 발전과정연 도역 사내 용1960ARPANet 구축미 국방성에서 정보를 분산시켜 전쟁 수행에 필요한 컴퓨터와 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개발. 1970년에는 UCLA와 BBN(볼트 베라네크&뉴먼사)사이의 대륙 횡단 연결이 이루어짐.1972E-mail 프로그램 개발, Telnet 표준안 확정 발표전자우표를 주고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원격지의 호스트 컴퓨터에 접속할 수 있는 프로토콜(Telnet)이 개발됨. 표준안(RFC318)1973FTP 표준안 확정 발표컴퓨터 간 파일을 전송할 수 있는 프로토콜(FTP)의 표준안이 확정됨. FTP표준안(RFC 454)1977E-mail 표준안 확정 발표E-mail 표준안(RFC733)1979Usenet 서비스 시작특정한 주제에 대해 토론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결성됨. 관련 분야에 대한 데이터를 등록할 수 있어 특정한 분야에 대한 주제 토론이 가능함.1982TCP/IP 도입ARPANet의 규모가 커져 기존의 네트워크 관리가 힘들어짐에 따라 TCP/IP체제를 도입1983ARPANet을 MILNet(군사용)과 ARPNet(연구용)으로 분리하면서 인터넷 시작TCP/IP의 개발로 ARPANet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밀넷(군사전용 네트워크)과 아르파넷(연구전용 네트워크)으로 구분함1984DNS 제시네트워크에서 도메인이나 호스트 이름을 IP주소로 해석해주는 서비스가 제시됨. 이에 따라 com, edu, gov등의 기관, au, ca, kr, uk 등의 국가도메인이 결성.1986NSFNet 개발미국과학재단이 ARPANet을 통합하여 미국의 전체 통신망을 대표하는 기관이 됨. 여섯 곳의 슈퍼컴퓨터를 연결하는 NSFNet을 개발하여 모든 대학, 연구소, 학술 단체를 국가 연구망으로 연결함(인터넷의 출발점).1988IRC 개발인터넷을 이용한 채팅 프로그램이 고안됨. IRC는 인터넷 릴레이 채트(Internet Relay Chat)의 머리글자를 딴 것.1989스위스의 '팀 버너스리'가 WWW 개발 제안인터넷망에서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고안된 방법으로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서 나오는 엄청난 양의 연구결과의 공유를 목적으로 개발됨.1990ARPANet 폐지, Archie 서비스 시작, ARPANet 역할 NSFNet으로 이관FTP 서버를 이용해 개인이 특정한 파일을 찾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최초의 검색엔진(Archie)이 탄생. ARPANet은 폐지되고 그 기능은 NSFNet으로 이관됨.1991WAIS 서비스 시작,Gopher 서비스 시작상용 인터넷 협회가 설립되어 기업과 개인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됨.1992WWW 서비스 시작,Veronica 서비스 시작WWW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인터넷 사용자가 증가.1993'모자이크' 발표최초의 월드 와이드 웹 서비스용 프로그램. 이 프로그램은 다음해에 넷스케이프로 개명 됨.1994'넷스케이프' 발표웹 브라우저, 전자우편, 홈페이지 제작 툴 기능을 한 번에 포함하는 인터넷 접속 프로그램 ‘넷스케이프’ 발표.2. 인터넷 응용서비스이 름내 용전자우편(e-mail)네트워크로 연결된 사용자 사이의 우편을 교환할 수 있는 서비스로 실시간으로 전송되고, 거리제약을 극복할 수 있다. 다양한 형태의 파일을 포함하여 전송할 수도 있어 일반우편을 빠르게 대체하였다. 송신자의 편지는 자신의 호스트에서 서버로 전달되고, 메일 서버는 목적지 주소를 분석하여 전달한다.원격 컴퓨터 연결(telnet)원격지에서 컴퓨터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서비스로 Client와 Server 통신환경이 필요하다. Client가 Server에 요청하면 Server는 Client에 응답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파일 전송(FTP)인터넷을 통해서 파일을 송/수신하기 위한 프로토콜. 계정이 필요하지만 Anonymous FTP의 경우에는 별도의 계정 없이 파일을 송/수신 할 수 있다.유즈넷 뉴스(Usenet News)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끼리 그룹을 형성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서비스. 거대한 게시판과 같은 역할을 한다. 예컨대 alt는 일상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주제, biz는 사업에 관한 주제, rec은 취미/오락에 관련된 주제를 나눈다. 나치즘이나 인종차별주의 같은 불건전한 사상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되고 있다.인터넷 정보 검색(Gopher)인터넷에 산재되어 있는 정보를 한 곳에서 검색할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 국내의 네이버, 해외의 Google 같은 검색엔진이 여기에 속한다.인터넷 대화와 토론(IRC)인터넷에서 공간의 제약 없이 전 세계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대화할 수 있는 서비스. Usenet이 게시판적 성격이라면, IRC는 대화방 형식으로 동시대화가 가능하다.전자 게시판(BBS)참가자 전원이 읽고 쓸 수 있는 전자적인 게시판 서비스로, 현대의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 컴퓨터 통신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다.하이퍼텍스트 정보 열람(WWW:World Wide Web)인터넷망에서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고안된 방법 또는 세계적인 인터넷망으로, 하이퍼텍스트를 기반으로 이루어져 웹문서 활용에 편리성을 제공.온라인 게임
    공학/기술| 2010.05.31| 2페이지| 1,000원| 조회(289)
    미리보기
  • 마이너리티리포트 영화 감상문
    마이너리티 리포트 영화 감상문-전체를 위한 개인의 사생활침해를 중심으로-전나슬Ⅰ. 서 론전체가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가, 개인이 전체를 위해 존재하는가. 이에 대한 사유는 ‘국가’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이래로 계속되었다. 전자를 개인주의, 후자를 전체주의 혹은 국가주의라고 부른다. 개인주의자들은 국가가 개인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존 F. 케네디의 "국가가 당신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바라기보다 당신이 국가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더 생각하기 바란다“는 유명한 취임연설에 반기를 든다. 국가가 만들어지기 전에 개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치즘과 파시즘에 반대한다. 전체주의는 이와 반대다. 개인은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라는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도 정당화하고,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 개인의 사생활을 어느 정도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이 글에서는 영화, 의 줄거리에서 반영된 전체의 안전을 위한 개인의 사생활침해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밝혀보았다. 전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 국가가 개인의 사생활을 감시할 수 있다는 영화의 ‘프리크라임’ 체제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 글을 통해 전체를 위한 개인의 사생활침해를 중심으로 1)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사생활 침해와, 영화에서 제시되었던 2) 예언을 바탕으로 한 사생활 침해의 부당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Ⅱ. 본 론1)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사생활 침해영화 속에는 편리한 기술들이 많이 나온다. 영화의 주 핵심 소재인 범죄예측 시스템은, 실행된 지 1년도 안되어 워싱턴의 범죄율을 거의 0%에 가깝게 낮춰준다. 예언능력을 과학기술과 접목하여 범죄예방 시스템을 만들어 논 것이다. 또한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고 동영상까지 볼 수 있는 신문인 e-paper, 홍채와 망막을 통해 정보를 추출하여 탑승자의 정보를 알 수 있는 전철 시스템과 범죄자를 구별해내는 거미로봇, 자기역학을 응용하여 빌딩 벽을 오르내리고 스스로 운전하는 자동차 등,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바꿔줄 수 있는 기술들이 계속적으로 등장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생활에 편의를 주는 것임에 분명하다.그러나 이러한 과학기술이 오히려 인간을 잠식한다면 그것은 목적의 전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그러한 점이 발견되었다. 개인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외부의 통제의 대상이 된 것이다. 영화 속 기술들이 현실화 될 경우 가장 우려되는 점은 ‘빅브라더 현상’이 벌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빅브라더는 조지오웰의 소설 『1984년』에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 혹은 시스템을 일컫는다. 사회의 정보를 독점하고, 사회구성원들을 모두 감시하는 권력체제인데, 일단 영화 속의 생체 인식 시스템만 하더라도, 적용되는 순간 우리는 지하철, 일반 쇼핑몰, 그 외 건물 등 모든 곳에서 우리의 위치와 행동을 감시당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지 중앙정부는 개인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다.절대 정보의 권력을 쥔 국가가 개인을 통제하면 개인은 국가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데 그 문제점이 있다. 새로운 전체주의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는 국가의 안전과 세수확보 등을 위해 개인의 이동과 구매 등을 일일이 확인하고 통제한다. 개인을 장악하는 것이다. 이는 당연히 민주주의의 후퇴를 낳고, 결국 인간의 소외를 낳게 될 것이다. 인간이 소외된 국가는 의미가 없다. 국가는 국민이 운영하는 것이다.2) 예언을 바탕으로 한 사생활 침해영화에서 제시한 시스템은 3명의 예지자를 통한 예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법률적 측면에서 본다면 예측시스템을 이용하여 범죄자를 잡는다는 것은 형법의 기본원칙에 위반된다. 형법에서 말하는 범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행위가 이루어 져야하는데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범죄행위를 미리 예측하고 이를 바탕으로 범죄자로 낙인찍는 다는 것은 명백한 위법인 것이다. 그리고 범죄행위가 있다하더라도 책임에 대한 기대가능성이 없으면 범죄가 성립될 수 없는데, 행위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책임의 기대가능성을 논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또한 이것은 ‘결정론’이라는 종교적 개념을 사회에 도입한 것이다. 이는 미래의 모든 일은 정해져 있다는 개념으로, 예지자의 예언은 미래에서 반드시 현실이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런 가정을 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사회과학적으로 오류이며, 영화 내에서는 개인이 예언을 조작할 수 있다는 내용을 통해 예언을 바탕으로 한 치안에 일격을 가했다. 또한 20세기 양자역학의 ‘확률론적 결정론’에 반하는 것으로 시대역행적이기까지 하다. 따라서 예언을 바탕으로 하여 사생활을 침해하는 설정 자체가 법률적으로, 과학적으로 오류이다. 운명에 대한 신앙 여부는 개인의 차원으로 넘겨두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독후감/창작| 2010.05.08| 2페이지| 1,000원| 조회(419)
    미리보기
  •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연구에 끼친 영향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연구에 끼친 영향역사학과 김 현마르크스주의는 20세기 역사에 혁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역사가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실증주의 예찬이 교활하게 탈선된 형태’로 간주되던 마르크스주의는,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면서 주목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세계 대공황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 심화로 그 정확성이 입증되면서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20세기 역사는 마르크스의 유산’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마르크스주의는 20세기 역사학에도 혁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19세기 역사학자들은 인류역사의 확실한 해석을 내놓지 못했다. 홉스봄은 “역사학은 19세기 인문∙사회과학의 최저 기준과 비교해 보아도 매우 후진적인 분야였다”면서 19세기 역사학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마르크스주의가 등장하여 합리적이고도 정확∙명료하게 인류역사를 해석함으로써 역사연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이 글은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연구에 과연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보려는데 있다. 홉스봄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이 역사 서술의 현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쉽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정확한 기여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면서 “역사가들에게 끼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은 강력한 일부 견해들과 동일시되어 왔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정확한’ 영향을 끼쳤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속류 마르크스주의가 나타나기도 하였고, 구조기능주의나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왜곡되고 변질되었기 때문이다.俗流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일부만 선택하거나 비마르크스주의적 견해를 융합한 것을 말한다.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경제적 역사 해석’을 두고 경제적 요소는 근본 요소로서 그 밖의 다른 요소들은 경제적 요소에 종속된다는 이른바 경제결정론을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종교개혁, 30년 전쟁, 십자군 전쟁 등의 모든 사건들의 원인은 모두 경제적인 것에 있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마르크스의 ‘역사 법칙과 역사적 필연성’, 즉 인간 사회가 역사 속에서 체계적∙필연적으로 발전했다는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우연적인 것은 역사의 발전으로부터 대부분 배제하기도 한다. 때로는 이들의 연구가 마르크스가 무심결에 해버린 말이나 마르크스로부터가 아니라 마르크스의 이론과 연결된 운동에서 시작되기도 하였다. 마르크스의 ‘계급적 이해와 계급투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홉스봄은 “(속류마르크스주의가) 분명히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마르크스의 사상과 특별한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해야만 한다”고 말해 마르크스주의와 속류마르크스주의를 구분할 것을 주장하였다.구조기능주의는 사회를 하나의 체제 및 유기체로 보는 점에서는 마르크스주의와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구조기능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역사의 변화를 다루는 방식에서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마르크스주의는 토대와 상부구조가 사회 현상의 위계질서를 강조하고, 사회에는 자기 지속적인 체제의 경향에 반작용하는 내적 긴장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는 변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구조주의자들은 현재의 사회는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안정되어 변화란 없다고 주장한다. 구조기능주의는 역사를 보다 거시적이고 전체적으로 보기 때문에, 말하자면 날마다 움직이는 바다의 표면보다는 深海을 보기 때문에 사회의 위계질서와 변화를 다루지 않는데 그 이유가 있다. 이러한 구조기능주의는 사회의 전반적 구조를 설명하는 데는 유용하다. 하지만 역사적 변화를 설명하는 데는 적절하지 못하다. 구조주의자들은 ‘파도’가 아닌 ‘심해’를 다루기 때문이다. 이들은 변화를 제거하여 과정을 가장 단순한 것으로 만든다. 홉스봄은 “(구조기능주의는) 역사가나 사회과학자들이 어떤 체계의 전반적 구조보다는 그것의 구체적 내용을 설명하려고 할 땐 별로 유용하지 못하다”고 말하였다.사회과학 역시 인간 사회의 현상들을 연구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유사하다. 그러나 사회과학의 역사변화 메커니즘은 마르크스주의의 그것과 반대 입장을 가진다. 홉스봄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의 메커니즘은 “충분히 긴 시간에 걸친 단일 방향으로의 변화나 진보”를 의미한다. 사회를 단일방향으로 진보시키는 동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반면 사회과학의 메커니즘은 역사를 변화시키는 동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회과학은 역사연구에서 사건과 현상 그 자체만을 파악하여 역사를 단기적인 범위에서 살피기 때문이다. 다시 바다로 비유컨대 사회과학은 ‘파도’라는 단면적인 면만 보는 것이다. 사회과학자들은 역사를 편집하여 단순하게 파악하고, 심지어는 임시변통으로 제거하기도 하기 때문에 이들이 주장하는 역사는 빈약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마르크스주의는 20세기 역사뿐만 아니라 역사학에도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속류마르크스주의와 구조기능주의와 사회과학에까지 파급되어 현재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연구자들에 의해 마르크스주의는 왜곡되고 변질되어 마르크스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 되어버렸다. 마르크스가 살아있을 당시 “내가 아는 한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했던 말은 마르크스주의가 본래의 의미에서 얼마나 많이 변색되었는지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홉스봄은 “속류 마르크스주의 모델의 사용이 최근 몇 십 년 동안 감소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 역사 서술이 실질적으로 정교하게 발전되었다”면서 마르크스주의의 미래를 낙관했다. 필자 역시 역사가들이 마르크스를 좀 더 정확히 이해하고, 왜곡되지 않은 시선으로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를 연구한다면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했던’ 더 정확한 마르크스주의를 알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인문/어학| 2007.05.12| 2페이지| 1,000원| 조회(290)
    미리보기
  • 북학의 감상문
    박제가의 『북학의』를 읽고김 현박제가(朴齊家)는 청에 사신으로 다녀와 정조 2년(1778)에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대표적으로 상공업의 진흥을 위해 생산과 소비와의 관계를 우물물에 비유하며 생산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절약보다 소비를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물건을 이용할 줄 모르고 아끼기만 하면 물건을 생산하지 않게 되고 이 결과 날로 궁핍해지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절약을 선비의 미덕으로 여기는 종래의 관념에서 탈피한 것으로, 성리학적 사고에서 벗어난 실학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북학파의 거두라고 평가받는 박제가가 집필한 『북학의(北學議)』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한 뒤, 이 책을 읽은 소감을 기술하고자 한다.『북학의(北學議)』는 크게 序文과 내편, 외편의 세 부분으로 되어있다. 그는 서문에서 박지원을 글을 싣고는 오랑캐에게라도 이들에게서 털끝만큼이라도 배울 것이 있다면 배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박제가가 인용한 박지원의 글은 다음과 같다.“學問之道는 無他라. 有不識이어든 執道之人而問之가 可也라. 童僕이 多識我一字면 姑學예라. 학문을 연구하는 방법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라도 물어야 한다. 종이라도 나보다 한 자를 더 안다면 그에게서 배워야 한다”『北學議』「內篇」은 거선(車船), 성벽(城壁), 궁실(宮室), 도로(道路), 교량(橋梁), 목축(牧畜), 고시(賈市) 등 39항목으로 되어 있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기구와 시설에 대한 개혁론을 제시하여 설명하였다. 특히, 박제가는 중국에서 수레와 벽돌을 들여오고 싶어 했다. 당시에는 수레로 금방 갈 곳을 도보나 나귀등으로 가다보니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박제가는 교통수단의 발달을 원한 것 같다. 그는 우리나라의 돌쌓기와 중국의 벽돌쌓기를 비교 하고 있다. 벽돌이란 것은 가루에 벽돌 재료인 회를 섞어서 별돌 가마에서 구워내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돌은 천연의 돌을 말하는 것이고 그는 우리나라가 성이나 집의 담벽을 벽돌로 짖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수리비와 보충비로 쓰는 것을 벽돌 쌓는 돈으로 충당하면 이익이 크고 백성들도 세금을 적게 내고 궁핍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것 같다.그는 여기에서 조선이 소만을 가축으로 기르고 먹는 것을 비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중국은 가축의 울고 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거지마저도 나귀를 몬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나라도 중국처럼 가축을 많이 키워야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 그는 “목축이란 것은 국가의 큰 사업으로 농사하는 자는 소를 사육하며 군사는 말을 훈련시키며 요리하는 주간에서는 돼지, 양, 거위, 오리 등을 길러야 한다.”라고 기술했다.그는 또한 “중국의 거리는 상점이 무수히 즐비하고 간판도 되어 있어서 황금 글자가 한길에 번쩍거린다”면서 중국의 시정을 부러워했다. 이런 중국의 모습을 사람들이 사치스럽다고 하니까 박제가는 “중국이 사치로 멸망한다. 그럼 우리나라가 검박으로 점차 쇠망하는 것은 무어냐고”하며 반박하기도 하였다. 이어서 그는 “자기의 것을 가지고도 낭비하지 않는 것을 검박하다고 하는 것이지 자신이 가진 것이 없어서 낭비하지 못함을 검박하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런 점에서 그는 절약보다 소비를 권장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것은 박제가의 대표적 주장이라 하겠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기술했다.“쓸 줄 모르면 생산할 줄 모르게 되며 생산할 줄 모르면 인민이 날마다 빈궁하여 지는 것이다. 재화라는 것은 비유컨대 우물과 같다. 물을 자주 길으면 물이 불고 긷지 않으면 물이 없어진다.”北學議 「外篇」은 전분(田糞), 상(桑), 농잠총론(農蠶總論), 과거론(科擧論), 관론(官論), 녹제(祿制), 재부론(財賦論) 등 17항목의 논설을 개진하여 농업기술의 개량과 외국무역의 이점을 설파하였다. 특히 재부론을 주장하면서 재주나 포부를 가진 사람들을 뽑아서 중국 사신 대열에 넣고 중국에 들어가서 중국의 법을 배우게 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알아 온 것을 전국에 기관을 만들어 전수케 해서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자고 하였다. 그는 대개 한 사람을 세 번 보내고 세 번 보내어도 성과가 없으면 그 사람을 해임시킨 후 다른 사람을 뽑아서 보내자는 구체적 계획까지 제시하였다. 그리고 고는 이렇게 계속한다면 10년 이내에 중국의 모든 것을 배워 가지고 일천리의 우리나라는 일만 리가 될 것이요, 3,4년 걸려야 수확할 수 있는 곡식을 비로소 1년 만에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박제가는 선박의 중요성도 피력했다. 여기에서 그는 중국을 이용하여 무역을 할 것을 말하고 있다. 4월경에 우리나라 해삼을 따 가는 중국인들을 잘 구슬려 배 만드는 법을 배우자고 적고 있다. 이렇게 해서 배를 만들어 무역을 하게 되면 무역으로 기술을 배우게 되고 기술을 배우면서 그들의 풍속도 자연히 배운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물 안 개구리의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사회를 위해서도 유익하고 교역으로 얻는 이득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니까 얼마나 이롭냐는 것이다.이상에서 북학의의 서문과 내편, 외편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박제가가 북학의를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그의 사상은 무엇일까? 위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학의’는 기본적으로 실용서라고 할 수 있다. 박제가 당시 중국의 문물제도를 자세히 소개하면서, 그러한 선진 기술을 도입하여 농업을 중심으로 한 여러 분야의 혁신을 꾀할 것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박제가가 보기에, 별다른 전란 없이 백여 년 동안 평화가 지속되고 백성이 사치하지 않는데도 나라가 늘 빈곤한 까닭은, 과학 기술, 문물제도의 낙후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낙후는 다름 아니라 중국의 선진 기술을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북학의’를 단순한 실용서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요컨대 청나라에서 접한 문물을 단순히 나열해 놓은 것이 아니라, 박제가 나름의 입장이 전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박제가의 ‘북학의’를 일관하는 정신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제가는 일상생활 속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많은 도구, 물건의 제작법, 사용법 등을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북학의’의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윤리, 도덕에 몰두했던 이전의 유학자들과는 사뭇 다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박제가는 ‘북학의’ 서문에서 “대개 삶을 이롭게 하고 넉넉하게 하는 것에 하나라도 빠진 것이 있으면, 올바른 덕을 해치게 된다”고 함으로써 구체적인 문물과 제도의 개선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이롭게, 넉넉하게 하는 것이 윤리, 도덕을 바로 세우는 데에 기본이 되는 것이라는 그의 입장을 내보였다.전통적인 유학에서는 물질적인 욕심을 극도로 경계한다.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방법도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들의 사치를 금하게 하는 것 정도에 머무르는 것이 보통이다. 욕망을 억제하여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 그래서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던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라를 망친 왕들은 대부분 극도의 사치를 부린 왕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런데 박제가는 유학의 이러한 관점에 대해 “사치가 날로 심해진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근본을 알지 못한다. 다른 나라는 진실로 사치로 인해 망하기도 했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검소 때문에 쇠퇴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에 따르면 우물물은 이용하지 않으면 말라버리는 것이다. 비단 옷을 입지 않으면 비단 짜는 기계가 없어지고, 그 기술도 쇠퇴하여 기술자가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결국 직조 기술 전반이 쇠퇴하여 백성들은 언제나 남루한 옷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독후감/창작| 2007.05.12| 4페이지| 1,000원| 조회(537)
    미리보기
  • 조선시대 형벌제도 평가A+최고예요
    조선시대의 형벌제도金 賢 (歷史學科)< 차례 >1. 들어가면서2. 오형(五刑)3. 부가형(附加刑)4. 법외(法外)의 형(刑)5, 나오면서1. 들어가면서고려말 이래 형벌을 집행함에 있어서 그 적용에 관한 기준이 없어 혹형(酷刑)이 난무하고 동일범죄에 대한 형벌이 관청이나 관사에 따라 경중의 차이가 심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이에 태조는 조선의 건국과 동시에 형법의 정비를 급선무의 하나로 내걸고, 그의 즉위교지에서 모든 범죄를 처결함에는 반드시 중국의 대명률(大明律)을 적용하도록 선언하였다.) 이후 대명률은 이두(吏讀)문으로 번역되면서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수정되었고 ―이를 두고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라 한다― 세조대에 이르러, 우리나라 최초의 완비된 법전인 경국대전에 실림으로써 실질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우리나라 형사법으로써의 지위를 획득하였다.이번 발표에서는 대명률에 명시되어있는 형벌제도 부분에 대해서 다루고자한다. 조선시대의 생활사 중에서 구지 형벌제도에 대해서 다루고자 하는 까닭은 첫째, 조선왕조 500년을 아울렀던 형벌제도와 그 역사를 통해 조선시대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의 제도나 사상은 그 사회의 생활양식의 표현이요, 반영이라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제도, 특히 형벌제도라는 관점을 통해 조선시대의 생활양식을 파악해보고 싶었다. 둘째, 조선시대의 형벌제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조선시대만의 고유한 문화를 접하기 위해서다. 현재 우리의 형사법체계는 일본법의 계수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형사제도는 우리 조상들의 전통과 슬기가 전수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고 하겠다. 옛 것을 바로 알아야만 오늘의 삶을 더욱 뜻있고 풍요롭게 할 수 있을 것이며, 형벌제도의 분야에서도 그 이치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이하 본론에서는 현대의 형벌분리법에 따라 2. 주형(主刑)과 3. 부가형(附加刑)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법에 규정되지는 않았지만 공공연히 행해지던 4. 법외(法外)의 형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맺는말에서는 조선시대 형벌법의바로 노역에 종사하게 되는데, 대명률직해에 따르면 소금을 굽거나 쇠를 불리게 하는 작업을 부과시키며, 염장(鹽場)에 보내진 자는 매일 소금 3근을 굽고, 야철장(冶鐵場)에 보내진 자는 매일 철 3근을 불려서 그 몫을 싸서 각각 상납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염장이나 철장이 없는 관아에서는 제지(製紙)?제와(製瓦)?역체(驛遞)?각종잡역 등에 노역을 부과하였다.복역 기간 중에 도형수가 도주한 때에는 1일에 태 50대를 과하고, 매 3일에 1등(等) 씩을 가중하되 장 100을 최고한도로 하여 처벌하고, 다시 복역하던 곳으로 돌려보냈다. 또한 감독관이 고의로 죄인을 도주하게 하거나 도형수가 다른 사람을 삯을 주고 사서 대신 복역을 하는 것을 용인해주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때는 감독관을 죄인의 복역기간과 같은 기간의 도형에 처했다.KEYWORD사령_나라에 경사가 있어 죄인을 놓아줄 때 내리던 명령.소결_죄수를 너그럽게 처결함.도형수의 귀휴, 병가제도도 있었다. 죄인이 친상(親喪)을 당하였을 때 역모에 관계된 죄인이 아니면 말미를 주어 다녀올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도형수가 복역 중 병이 났을 때 도형수에게 병가를 주기도 하였는데 병이 완쾌되면 일수를 계산하여 다시 노역을 보충하게 하였다.도형의 일종으로 충군(充軍)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이는 죄를 범한 자를 도역을 대신해 군역에 복무시키는 제도로서 도형기간만큼 군역에 복무해야 했다. 충군에는 대체로 ‘장일백?충군’, ‘장일백?극변(極邊)충군’, ‘장일백?수군(水軍)충군’의 세 가지가 있는데 이는 충군이 천역(賤役)에 해당하는 수군이나 국경지대를 수비하는 군졸로 보내졌음을 시사한다.(4) 유형(流刑)유형(流刑)은 사람이 중한 범죄를 범한 경우에 사형까지는 처하지 못하고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어 죽을 때까지 고향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다. 귀양 보내는 거리에 따라 유2,000리, 유2,500리, 유3,000리의 3등급이 있고 반드시 장100대가 부과되었다.) 유형은 도형과 달리 기간이 정해지지 않는 점이 특징인데 임금의 유배지가 생활 근거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배정되는 사례도 종종 발견되고 있다는 점은 실재 양반관료들에게 부과된 유배형의 형벌성이 그만큼 약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따라서 관료들에게 유배형은 형벌보다는 징계 처분의 성격에 가깝다고 보는 편이 낫다고 하겠다. 이 같은 유배형의 형벌성 약화로 자연히 유배 관료들은 유배지에서 다소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고, 때에 따라서는 그곳에서 학맥을 형성하거나 커다란 사상적 ? 문화적 족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평안도 희천에 귀양 온 김굉필에게 조광조가 수학한 일화가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이 외에 연산군대 김종직의 문도로 몰려 낙안에 유배간 박한주의 후진 양성과 교육, 명종대 18년간 진도에서 유배생활한 노수신의 정력적인 학문과 저술 활동 등도 잘 알려진 사례들이다.끝으로 조선 정치 운영의 특징과 관련하여 두 가지, 즉 적어도 유배형이 조선전기 정국 변동과정에서 관료들에 대한 과도한 유혈을 막는 역할을 하였다는 점, 한편으로 다수 관료들에게 유배 생황을 정치 복귀를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 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5) 사형(死刑)사형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최극형으로써 교수형(絞首刑)과 참수형(斬首刑)의 두 가지가 있다. 교수형 내지 교형은 죄인의 두 손과 두 발목을 묶고 높은 데에 매달아 목을 졸라 죽이는 것이요, 참수형 내지 참형은 죄인의 목을 큰 칼로 베어 죽이는 것을 말한다.사형과 관련하여, 능지처사(陵遲處死) 또는 능지처참(陵遲處斬)은 모반대역죄나 친부모살인죄와 같은 최고의 반도덕범에 대하여만 적용되던 것으로 죄인의 머리, 양팔, 양다리, 몸체를 찢어 각지로 보내 여러 사람에게 보이거나 신체의 수십 군데에 칼질을 하여 상처를 내고 목을 베는 형벌이다. 또한 죄인의 몸을 네 개 또는 다섯 개의 수레에 묶은 다음 각 방향으로 잡아 당겨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과 머리를 벤 다음 팔, 다리, 몸체를 자르는 오살(五殺)과 육시(戮屍)의 방법도 사용되었다.그밖에 사사, 부관참시가 있었다. 사사(賜死)는 왕명으사(酷寒 ? 酷熱赦), 농사를 장려하기 위한 권농사(勸農赦) 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대개의 경우 대사에 해당하는 사면이다. 따라서 특사나 곡사 등에 있어서는 각기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대사에서 보는 사면의 이유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 있다.그러나 조선왕조의 사면제도는 세도적 ? 당파적 정치에 좌우되어, 극도로 정실적 ? 정략적으로 남용되었기 때문에 그 본래의 목적을 충분히 다할 수 없었던 것이 한계점이라 할 수 있겠다.3. 부가형(附加刑)부가형(附加刑)은 주형(主刑)에 덧붙여 가해지는 형벌이다. 이러한 부가형적 성질을 가지는 것으로 자자(刺字)와 몰관(沒官)을 꼽을 수 있다.(1) 자자(刺字)자자(刺字)는 죄인의 얼굴이나 팔에 흠을 내어 먹물로 죄명을 새겨 넣는 형벌로 주로 재물에 관한 죄를 범한 자에게 장(杖) 또는 도(徒) 등의 형을 가하고 이에 덧붙여 자자를 과하였다. 자자형을 부과하는 목적은 전과자임을 널리 알려 수치심을 가지게 하는 동시에 요시찰로 관리하기 위한 데 있었다.글자는 오른팔에 새기는데 그 크기는 4방 1촌 5분(약4.5cm)의 네모 안에 넣어야 하고, 침(針)으로 글자를 새겨 넣은 다음 그곳을 포대로 가리고 옥에 가두어 씻지 못하게 하였다가 일 후 먹이 피부 깊숙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다음에 내보냈다. 강도로서 사형에 처해지지 않은 자는 율에 따라 논죄한 후 ‘강도(强盜)’라는 두 글자를 얼굴에 새겼다. 강도의 초범은 오른팔에 새겼지만 재범은 왼팔에도 자자하였고 3범자는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또한 창고를 지키는 자가 스스로 그 안의 전곡(錢穀)을 도취한 때에는 ‘도관전(盜官錢)’이라 자자하고, 남의 물건을 탈취한 때에는 ‘창탈(?奪)’이라 자자하였다. 만약 자자한 사람이 그 글자를 제거하면 장60의 형에 처하고 다시 자자하였다.숙종 원년에는 팔뚝에 하는 자자는 눈에 띄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든 자자를 얼굴에만 하도록 하여 경면(?面)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하였으나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영조 16년에 자자의 잔혹성과 비인간성을 우에 매질을 하고, 또 개인 집에서 고문을 집행할 때에 대체로 등을 때리는 일이 많아서 사람의 생명을 상당히 해치고 있으니 정말 마음 아픈 일이다. 지금부터는 중앙과 지방의 관리나 그 외 누구든지 어린 사람이나 노비를 고문할 때에 등에는 매를 때리지 못하게 하여, 내가 백성에게 형을 집행하는 데 조심하는 취지에 부합되게 하라. 『세종실록』12년 11월 21일.(3) 압슬형(壓膝刑)압슬형(壓膝刑)은 무릎 위에 무거운 물건을 놓아 압력을 가하는 형벌로 고문할 때 시행되었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압슬은 1차 시행에는 2명이, 2차 시행에는 4명이, 3차 시행에는 6명이 하는데, 그 죄가 10악(惡))이나 강도?살인과 같은 중죄가 아니면 이를 시행하지 못한다고 하였다.압슬형은 현종 6년 왕명으로 금지되었다가 영조 원년에 이를 영구히 없애라는 명이 내려져 폐지되었다.(4) 난장(亂杖)난장(亂杖)은 여러 명이 장을 가지고 죄인의 몸의 어느 부분도 가리지 않고 마구 때리는 형벌로써 고문의 일종으로 사용되었으며 자칫하면 목숨을 잃게 하는 위험한 형벌이었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주장당문형(朱杖撞問刑)이 있는데, 이는 죄수를 가운데 두고 여러 명이 죄수의 주위를 돌면서 붉은 몽둥이로 때리는 형벌이다.난장은 영조 46년에 금지되었으나 천민이 신분이 높은 여자를 범하였거나 근친상간 등의 반인륜적인 죄를 범한 자를 멍석으로 싸서 여럿이 몽둥이로 패는 사벌(私罰)로서의 난장은 민간에 오랜 관습으로 존재하였다고 한다.(5) 낙형(烙刑)낙형(烙刑))은 쇠를 불어 달구어 몸을 지지는 형벌로써 포락형(?烙刑) 또는 당근질이라고도 한다. 대역죄인의 고문에 사용되었으며 권문사가에서는 노비의 죄를 벌할 때 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세종 26년에 금지되었으나 없어지지 않고 있다가 영조 9년에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다.(6) 의비형(?鼻刑)의비형(?鼻刑)은 죄인의 코를 베어버리는 형벌로써, 원래 중국에서 시행되었다고 하며, 조선시대에는 권세 있는 사가에서 노비의 죄를 다스릴 때 집행한 경우가 있었다.세종이 .
    인문/어학| 2007.03.08| 12페이지| 1,500원| 조회(2,679)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7
7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2
  • A좋아요
    1
  • B괜찮아요
    3
  • C아쉬워요
    1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29일 금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6:06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