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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수궁에관한보고서 평가A좋아요
    Ⅰ. 서론1. 덕수궁이란?① 덕수궁의 창건덕수궁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한양으로 환도하였으나 백성들에 의해 궁궐들이 모두 불태워진 바람에 머무를 궁이 없어서 겨우 정릉동에 위치하고 있는 월산대군(月山大君) 의 집에 임시 행궁을 마련하였다. 그 뒤를 이은 제 15대 왕 광해군은 창덕궁 복구공사 가 마무리될 때까지 이 곳에 머물다가 광해군 3년(1611) 10월에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이때 이 행궁을 경운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광해군은 그 해 12월에 다시 경운궁으로 옮 겨 7년(1615) 4월에 창덕궁으로 이어하기까지 이 곳에 머물렀는데 이 시기에 경운궁은 처음으로 궁다운 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보인다.② 대한제국 시대의 덕수궁고종 32년(1895), 명성황후가 건청궁에서 일본인들에 의해서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 어 나자 고종은 1896년, 경복궁에서 아관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한다. 이 때, 태후와 태자비를 경운궁으로 옮겨 살게 하였고 경복궁에서 시해된 민비의 빈전과 열성조의 초상 화(어진:御眞)도 함께 옮겨오면서 경운궁은 궁궐로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고종은 아관에 머물면서 경운궁에 전각 짓는 일을 지휘하였고, 1896년에 경운궁의 준공을 보게 되었고 이듬해 비로소 아관을 떠나 경운궁으로 이어(移御 :옮겨가 사는 일)하게 되었다. 그 후 로도 공사가 계속되어서 선원전, 함녕전, 보문각, 사성당 등이 건립되었고 이 해에 고종 은 즉조당에서 대한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광무 4년(1900)에 궁성(宮城)을 쌓는 일이 모두 끝났고 같은 해 봄에 발전 시설이 되어 궁내에 전등을 밝히게 되었다. 광무 9년 (1905)에는 경희궁으로 바로 건너 갈 수 있는 구름다리가 완성되었다. 6년 2월엔 국가 예산 31만 5천원으로 법전(法殿)인 중화전 창건공사가 시작되어 10월에 완공되었다. 광 무 8년(1904)에 경운궁에 큰불이 났다. 침전인 함녕전을 수리하다가 실화한 것이 강풍을 타고 옮겨 붙어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등 중심곽 건물과 그 곳에 비치되었던 모든 수 있게 한다는 알량한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이후 담장은 원래의 사고석 담장으로 복원되고 궁 내부도 어느 정도는 정화되었으나, 선조 이래 갖추 고 있었던 궁궐의 면모를 지금으로선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덕수궁은 창덕궁이나 경복 궁의 규모엔 미치지 못하지만은 파란만장하였던 한말 역사의 현장으로서 우리들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궁궐이라고 하겠다.2. 내가 덕수궁에 가게된 동기우리나라는 반세기동안 일제 강점기에 있었다.500년간의 조선의 역사가 자취를 감추는 시기에 우리 왕조가 거처하고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발생한 덕수궁에 관하여 좀 더 알고, 역사적 조사를 통해 덕수궁의 중요성을 알기위해 조사하였다.아직까지는 궁궐하면 많은 사람들이 경복궁을 떠올린다.물론 경복궁도 중요한 역사적 사료지만 근한국사를 통해 본다면 오히려 덕수궁이 더 중요한 사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왜 조선말 황제는 궁궐을 옮겨야했을까? 왜 덕수궁 안에는 다른 궁궐과 달리 서양식건물이 있을 수 있을까?이제 내가 직접 본 모습과 역사 조사를 통해 그 사실을 알아보겠다.Ⅱ. 본론1. 대한문(大韓門)대한문의 원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으로써 고종 때 그의 비서승인 유시만의 건의에 의해 개명되었다.대한문은 궁궐 정문 치고는 드문 단층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 지붕은 우진각으로 지어졌다. 대한문의 현판은 당시 예조판서와 한성판윤을 역임하였던 남정철의 글씨이다. 도로를 새로 조성하면서 대한문 석계단은 매워져 온데간데 없고 석계단 좌우에 위엄있게 버티고 앉아 있을 서수(瑞獸)만 시멘트 바닥 위로 몸만 살짝 나와 있어 애처롭기 그지없다. 궁궐주인의 운명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대한문을 지나 눈에 띈 것은 '어구와 돌다리' 였다.2. 어구와 돌다리이 돌다리는 대한문에서 중화전으로 가기 전에 통과해야 하는 다리이다. 다리 아래에는 어구가 있는데 옛날엔 물이 어디로부터 흘러왔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은 물이 고여 있어 마치 웅덩이같이 보였다.어구는 그 형식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도 생겼으면 하는 바램이다.4. 연못과 매점대한문에서 들어가서 표를 끊고 오른쪽을 쳐다보면 기와장을 얹은 건물 한채가 있는데 이것이 덕수궁에 있는 두개의 매점 가운데 하나이다. 매점 앞에는 여러명이 함께 앉을 수 있는 간이용 의자와 식탁이 나열되어 있고 주변은 음식을 먹고 남은 쓰레기봉지와 기타 등등 여러 쓰레기들 때문에 매우 지저분하다. 꼭 이런 매점이 궁궐 안에 들어있을 필요가 있을까? 그것은 그만큼 궁궐이 시민들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겠지 만은 궁궐의 청결에는 지장을 주기 때문에 궁 안에 있는 매점들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가질 수 없다. 매점 뒤에는 작은 연못이 있어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진 촬영하기 좋은 장소이다.5. 중화문 (中和門)중화전 앞에 커다란 문 하나가 외로이 서있는데 이 문이 중화전의 정문인 중화문(中和門)이다. 중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광무 6년(1902) 7월 7일에 정초(주춧돌을 놓음)하고 7월17일에 입주하고 8월12일에 상량(집을 지을때, 기둥에 보를 얹고 위에 마룻대를 올림)하였다. 10월경에 완성되었다고 보인다. 그것이 1908년에 불에 탔다. 중화전과 함께 소실되어서 중화전이 단층으로 복구될 때 중화문도 단층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중화문은 1960년대에 중수되면서 보완되었는데 2층이던 것을 1층을 하자니 나약해 보였던지 지나치게 지붕을 크게 만들어 건축적으로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원래 중화문 좌우에는 행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오른쪽 끝부분에 약간의 형태만을 가지고 남아 있다.6. 중화전 (中和殿)중화전은 1902년 9월 13일에 상량한 2층 건물이었다. 그러나 1904년 화재 때 소화되어 버리고서는 단층으로 복구를 했다. 그래서인지 중화전 건물을 보면 왠지 건물의 전체 모습이 아래로 눌려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중화전 앞에 있는 품계석을 보면 아무리 봐도 옛날의 돌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1984년도에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중화전근 구멍에 중신기전과 소신기전을 꽂아 사용하였다. 발사 할 때에는 신기전기가 실려있는 화차의 발사각도를 조절한 뒤, 신기전 약통에 붙 여진 점화선을 한데 모아 불을 붙이면 발사되었다. 신기전의 사정거리는 중신기전이 50미터, 소신기전이 100미터 가량이며, 또한 제작 당시의 설계도가 남아있는 것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③ 흥천사 종 (興天寺 鍾)세조 8년(1462)에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를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종으로, 신 덕왕 후의 무덤인 정릉 근처 흥천사에 있었던 종이다. 중종 5년(1510) 흥천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영조 23년(1747)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으로 옮겼다가, 창경궁을 거쳐 이 곳에 걸려있다. 이 종은 명문에 의하면 효녕대군과 임영대군, 영응대군 등이 만들었으며, 문장은 한계희, 글씨는 정난종이 썼다. 규모가 큰 이 범종은 전형적인 조선 전기의 양식이다.④ 보루각 자격루 (自擊漏) : 국보 제 229호자격루는 조선 중종때 만든 물시계이다. 세종 16년(1434)에 장영실 등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자동시보장치를 물시계에 연결 표준시계로 썼다. 세종 때 발명된 자격루는 단종 때 자동시보장치의 고장으로 사용이 중지되고 말았다. 자격루가 다시 움직이게된 것은 예종 때였고, 연산군 시절에는 자격루가 창덕궁으로 이전되어 새로 지은 보루각에 설치되었다. 그런데 시간 이 잘 맞지 않아서 중종 때에 새로운 자격루를 만들었다. 이 유물은 광복전 경성박물관 에 전시되어 있을때만 해도 파수호와 수수통을 잇는 대롱이 있었고, 대석(臺石)도 있었 는데, 지금은 용이 새겨진 누기(淚器)만이 남아있다.8. 포덕문 (布德門)지금 현재 포덕문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문은 원래 평성문(平成門)이라는 문이었다. 덕수 궁 서편에 있는 유일한 문이 평성문이기 때문이다. 포덕문은 원래 지금의 서울시청 쪽에 위치하고 있던 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왠일인지 포덕문이라는 현판과 함께 덕수궁 안내도나 덕수궁에 관련된 자료를 보면 거의 포덕문이라는 설명되어 있 다.9.서 전시를 하였지만 그 곳에 전부 진열치 못하고 궁궐의 다른 건물에도 미술품이 산재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덕수궁 미술관(석조전) 옆에 한 동을 더 지어 창경원 박물관의 고미술품을 옮겨 오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오늘날의 미술관 서관이 건축된 것이다. 당시 이 신관(서관)과 석조전을 합쳐 이왕가(李王家)미술관이라고 칭하였다. 서관이 착공되기는 1936년 8월 21일, 준공은 1938년 3월 31일이었다. 평면적인 배치는 석조전과 직각으로 동쪽을 면하고, 두 건물의 연결을 위하여 중간에 보일러실을 두고 그 위에 건널복도를 만들었다. 중앙 정면은 돌계단으로 홀에 이르고, 지층(地層)은 사무실, 창고 등을 두고 2층 홀 정면은 귀빈실로 충당하고, 그밖에는 3개 층 모두 진열실과 일반 휴식실로 하였다. 외장은 정면 계단, 대석(臺石), 허리와 처마돌림띠 등은 화강석으로 하고 일반 벽체는 캐스트스톤으로 하였다. 3층 건물과 면적은 건널복도를 합하여 1,130여 평이다. 양식은 기왕 있었던 석조전과 조화되게 하기 위하여 고전주의를 택하고 있다. 6·25전쟁 후 일시 박물관으로 사용되었고, 지금 현재는 과천현대 미술관에 별관으로 덕수궁 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11. 분수대석조전 앞에 보면 멋있는 정원과 함께 그 중앙에 분수가 하나 서 있다. 이 분수는 유럽식으로 제작되었으며 분수주변에는 넓은 풀밭으로 제작되어 있어 휴식하기에 매우 편리하다. 결혼 사진을 찍기 위한 사람들이 많이 사진을 촬영하는 장소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이제 이 분수는 덕수궁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없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만큼 우리 생활에 밀접하게 다가온 것 중 하나라 하겠다.12. 준명당 (浚明堂)준명당의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조선조 고종 광무 원년(1897)에 중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은 한때 고종황제가 거처하면서 외국사절을 접견하기도 한 곳으로, 후에는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를 봉안하기도 하였다. 이 전각은 정면 6칸에다 측면 4칸의 방형 평면을 뒤쪽으로 달아내어, 전체적으로는 "L"였다.
    인문/어학| 2000.11.19| 9페이지| 무료| 조회(3,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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