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달리의 생애(Salvador Dali 1904. 5. 11∼1989. 1. 23)살바도르 달리는 1904년 5월 11일 스페인 카탈로니아의 작은 마을 피게라스에서 공증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돈 살바도르 달리’는 예술에 대 해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집안도 중류층에 속하는 비교적 좋은 환경을 이루고 있 었다.달리가 태어나기 3년 전에 이미 죽은 그의 형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그는 자신 에게서 죽은 형의 모습을 찾으려는 데에 강한 반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후일 그는 ‘나는 결코 죽은 형은 아니며 살아 있는 동생이라는 것을 항시 증명하고 싶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항시 자신의 형에 대한 콤플렉스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한편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너의 형은 십자가의 그리스도에 귀일 하였노라.’고 들려주곤 함으로써 어린 달리를 신비의 혼란 속에 빠지게 하였으며 그의 극히 내 성적이며 수줍던 성격이 때로 격렬한 폭발을 보인 것도 이 사실과의 깊은 관련을 보인다. 후일 달리는 종교화에 대해 대단한 집착을 보이는데 그의 대표작 는 이때부터 받은 자극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보겠다.그는 어릴 적부터 하얀 암벽이라든가 심연의 바다 등에 경이의 눈길을 보내고 있 었다. 이렇게 그는 어릴 적 그가 경험한 바 있는 카다퀘스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 졌고, 결국 그의 예술은 그것에서 잉태되었다고 볼 수 있다.1922년 마드리드 미술 학교에 입학한 그는 학교의 수업에는 만족치 않고 인상파, 점묘파를 거쳐, 미래파, 피카소의 큐비니즘 등에 관심을 가지기에 이르렀다.이듬해에는 이탈리아의 형이상 회화의 화가 키리코를 알고 나서 몹시 흥분하기도 했는데 그의 초현실적 성향은 그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것이다.그 후 1925년 피카소의 신고전주의에 대한 관심을 가져 실험을 거듭했지만 엄격 한 기하학에 이내 실증을 느끼고 만다. 그밖에도 베르메르, 벨라스케즈, 라파엘로 에까지 관심을 보여 달리의 고전화에 대한 집착은 평생 그의 생애를 통해 일관되 어진다. 단 그것법에 의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근대를 자극하는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미술 학교 재학 시절 반정부 활동 혐의로 잠시 감옥에 갇힌 바 있는 그는 차츰 무정부적인 타락된 생활이 심화되어 그로 인해 1926년 퇴학처분을 받고 귀향케 되었다.1927년은 그에게 있어 기념비적인 해가 되었다. 파리로 나온 그는 피카소를 만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고 그의 그림은 여태까지와는 달리 놀라운 변모를 보 인다. 이 시절 그는 피카소의 영향을 직접 받으면서도 그에 구애되지 않았고 미로 와의 접촉을 갖고 초현실주의 화가들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드디어 그는 초현실 주의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약을 하기 시작한다. 그 외에도 큐비즘, 미래파, 형이상 회화파 등에서 얻은 영향이 그 나름의 독특한 회화로 이르는 바탕이 된다.1929년 카다퀘스의 집에는 많은 손님을 맞게 되는데 그들 중 러시아 태생 폴 엘 뤼아르의 부인 엘레나(갈라)에게서 운명적인 만남을 직감하고 그녀에게 짙은 연민 의 정을 느낀다. 파리에서 한번 만나 본 적이 있는 그들을 카다퀘스에 방문토록 초청한 것이다. 두 번째의 만남에서 달리는 돌발적인 웃음과 이상한 행동 등으로 그녀의 주의를 끌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녀 역시 그러한 그의 열정에 못 이겨 그에게 이끌리고 만다. 극도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에서 벗어나려던 그는 ‘그녀야 말로 나를 치유해 줄 것이다.’라고 믿고 있었으며 그녀에게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다시 파리로 돌아온 그들은 1929년 말 파리에서의 작품전이 열리는 도중, 홀연히 그곳을 잠적, 사랑의 도피여행을 떠나 깊은 사랑에 빠져들었으며, 달리는 그때 요 람 속의 기쁨을 재음미하기에 이른다. 한때, 달리는 기억의 근원은 태아적부터 시 작되었음을 암시하는 듯 그 요람의 세계를, ‘거기는 정말 성스러웠다. 그야말로 천국이었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폐쇄된 그 호텔의 방 속에서 갈라와의 생활을 통해 태아의 아늑한 꿈을 만끽한 것이다. 그들은 곧 카다퀘스로 돌아와 그 곳에서 조금 떨어진 리가트 항에 인의 아내를 가로챈 아들의 부도덕에 노한 아버지는 결국 그에게 절연장을 보 내기에 이르렀고 달리는 그 충격으로 삭발한 채, 먹다가 남은 섬게 껍질과 함께 그 깎아 버린 머리카락을 흙 속에 묻고 말았다. 그 매장은 곧 그를 낳고 기른 아 버지와 가정이었으며 결국 그는 혈연을 잃은 대신 보다 정신적이며 숙명적인 갈 라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그는 그녀로 인해 참다운 달리로서 성장하게 된 것이 다.달리의 수많은 작품 속에는 갈라가 출현케 되고 모든 여성의 모습이 갈라로 변신 되었다. 심지어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 이르기까지도 갈라의 형상으로 대신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 노이로제에서 고통받는 그를 구하고 치유한 것이 갈라였기 때문이다. 아마 수많은 화가들 중 달리만큼 여자의 내조와 영향을 받은 사람도 드 물 것이다.또 하나 달리의 예술에 큰 영향을 준 것은 그가 성장한 카다퀘스의 해안과 리가 트 항이다. 태양이 불타고 바닷물이 섬, 바위들 사이로 넘나드는 곳에서 변덕스런 그의 기분을 억제하였던 것이다. 그는 리가트 항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불모의 고장이요, 아침은 난폭하고 거친 명랑함을, 저녁은 기분 나쁜 비애를 가끔 느끼게 하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특이한 환경이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데 그것 은 황량한 땅이지만 깊숙이 위치한 마치 자궁 안과 같은 평안함을 주는 곳이었기 때문이다.달리는 ‘천재의 일기’에서 ‘미치광이인 체하며 피타고라스적 정확성을 갖춘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말하고 있다. 전후의 달리는 겨우 합리와 비합리를 변증법 적으로 통합하기에 이르렀다.2. 달리와 그의 작품 세계살바도르 달리는 금세기의 가장 특이하며 괴이한 화가로서 그의 작품 속에는 현대 의 작품들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인간의 회의, 압도하는 무의식의 위력 등이 내재 되어 있다. 즉, 그의 작품 속에는 통속적 경험과 상식으로써는 전혀 감지하기 어려 운 기묘한 것들로써 이루어져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초현실의 세계를 전개하고 있 다.그러한 그를 두고 어떤 비평가들은 병(病)적인 그림,.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과 개성이 무의식적인 내용물의 홍수 속에 빠 져들어 잠적하는 현상은 마치 정신 분열의 증세와도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러나 이제 그의 그림을 두고 광인의 그림이라고 평할 수 있었던 시기는 이미 지났 다.달리 자신의 언급처럼 광인과 자신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그가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가 광인이라면 그의 작품에서 어떤 공감을 느끼겠는가? 만일 그 것을 느낀다면 그것 역시 모순이 아니겠는가라는 문제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우리 가 상식적인 관점에서 살펴볼 때 그의 손이 광인의 손이라 친다면 그의 괴이성을 제외하고라도 극사실적인 기법과 기발한 짜임새의 구성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달리는 철저한 자기 본위의 독특한 화가지만 그의 작품 속에는 현대인이 지닌 갖 가지 고민, 불안, 모순, 공포, 절망 등이 숨김없이 표현되고 있다.현대는 인간의 내적 상상력을 제어하고 인간의 추억이나 향수, 신앙, 전설, 영웅, 꿈들을 과감히 매도한다. 달리는 그러한 상상력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편집광적 비 판 방법(偏執狂的 批判方法, paranoia critic)을 연마하여 자신만의 자유로운 길을 개척해 나간 것이다.달리의 회화성은 같은 초현실주의자들과 비교할 때 혼란성을 띠고 있으나, 마그리 트와 같은 분열성은 보이지 않는다. 또 그가 초자연의 세계를 여실하게 묘사하였 고 그 대부분이 그로테스크(grotesque)하며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중세의 화가 보시(Bosch)와 곧잘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보시의 그림은 형언하기 어려우리 만치 세밀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달리의 그림은 두 세 가지의 요소만으로도 그의 환상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허버트 리이드는 두 작가의 차이점을 논할 때 보시는 저절로 주광화되어 나타난 현상을, 그리고 달리는 작위적으로 객관화하여 구성했다고 보고 있으며, 단지 보시 의 예술이 지닌 보증된 구성에 비해 달리나 그 밖의 초현실주의자들의 작품을 너 무 경솔하게 평가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하는 것에 관해 달리 자신은 ‘그것은 자기 개성에 관한 가장 나쁜 오해 중의 하나이다. 보시의 괴물은 안개 싸인 유럽 의 숲에 의한 것이며 중세에 대한 심한 소화불량의 증세를 나타내고 있다. 카다퀘 스의 밝은 빛 속에서의 나를 왜 보시로 만들려 하느냐?’고 반문하는데 이는 역시 달리다운 반응이라 하겠다. 우리는 이러한 달리의 독자적인 언행과 그의 그림을 부담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오히려 한 편으로 그의 전혀 예기치 못할 기상 천외의 의외성에 강한 흥미와 호기심을 가지게 되어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동조되고 있음 을 느낄 수가 있다. 그의 기발한 언행 등은 이미 통념에 젖은 모든 이들을 향해 날카로운 비판과 풍자를 함께 아울러 인간성 상실의 현대를 향해 노골적으로 파문 을 던지는 것이다.금세기에 들어 급진 팽배한 현대의 과학 문명과 더불어 국제간의 전화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전혀 새로운 유형의 화가나 회화가 등장한다 할지라도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다. 광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 존재 그 자체에 의문을 지닌 채 우리 들 의식 가운데 내재한 비합리적인 실상을 파헤쳐 보이는 달리는 금세기의 가장 정직한 예술가로서 남을 수 있으며, 가장 훌륭한 예언자이며 대변자이다. 어느 시 대를 막론하고 탁월한 예술가는 그 시대를 이끌거나 그 시대를 앞서 초월하는 예 언자적 역할을 한 예를 찾을 수가 있다.달리가 ‘비합리성에 도전’하게 된 것은 서구의 각국이 정치적 긴장의 팽배와 대 립에 의해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 1930년대였다. 즉, 유럽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개 혁과 부정, 정치적으로는 혁신과 혁명을, 예술적으로는 재래의 예술 형식을 파괴, 부정하는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무렵이었다.이러한 양상 아래 전개되는 제 미술 운동에 스페인 태생의 작가들이 많은 활약을 보인다. 이를테면 유기적 환상의 세계를 표출한 건축가 가우디(Gaudi)라든가 20세 기의 조형 혁명으로 불리우는 큐비즘의 대표적 화가 피카소(Picasso)라든가 그리 스(Gris) 등이 있으며 초현실주의의 미로 (Mi다.
1. Giotto의 생애Giotto의 생애와 예술적 발전과정의 대부분은 현존 작품들(그중 상당수는 그의 것으로 단정하기가 어려움)과 대개 14세기 후반부터 나오기 시작한 이야기들에 의존하여 추론된 것이다.Giotto의 출생연대는 1266(또는 1267)년이나 1276년으로 추측되고 있는데 10년의 연대차는 그의 초기 발전과정을 평가하는 데 근본적으로 중요하며, 아시시의 산프란체스코 교회에 있는 프레스코들이 그의 작품인지 여부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만약 그것들이 정말로 Giotto의 것이라면 그 프레스코들은 그의 중요한 초기작품이 될 것이다.자료에 의하면 그는 1267년, 또는 1276년에 피렌체 근교의 한 마을인 콜레 디 베스피자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지오토는 10세 되던 해 아마도 당시 유명 화가였던 치마부에(1240~1302)에 의해 발견돼 피렌체로 가서 그림 공부를 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피렌체의 세례당에서 모자이크를 그렸다. Giotto는 1337(구력 1336)년 1월 8일에 죽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것은 그 당시 빌라니 연대기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1373년경 피렌체 사람으로 읍사무소 직원이자 아마추어 시인인 안토니오 푸치가 빌라니 연대기를 운문으로 각색했는데, 거기에는 Giotto가 70세에 죽었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은 Giotto가 1266(또는 1267)년에 태어났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그것은 14세기의 자료(지금은 없어진 Giotto의 원래 묘비일 것으로 생각됨)를 근거로 한 것이 분명하다.1334년 그는 피렌체 성당의 감독자로 임명되었고, 시내의 건축(Giotto의 종루를 디자인했음)을 맡게 된다. 이것은 그를 위대한 건축 지식을 갖춘 화가로서의 면모을 빛내는데 공헌하게 된다. Giotto는 1337년에 사망했으며, 시로부터 명예를 인정받아 산타 리파라타에 묻혔다.그러한 견해를 처음 내놓은 사람이 바사리든 아니면 안토니오 빌리든 간에 Giotto가 죽었을 때 27세쯤이었던 안토니오 푸치의 견해가 가장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어 Giotto의 출생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다면 그의 양식의 기원에 관한 문제뿐만 아니라 아시시의 작품에 관한 문제를 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2. Giotto의 예술 세계그는 이탈리아에서 자연주의의 최초의 거장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저술가 빌라니와 보까치오 그리고 바자리까지도 Giotto의 충실한 자연묘사가 동시대인에게 끼친 엄청난 영향을 강조하고 있으며, Giotto의 예술양식을 그가 등장했을 당시 아직도 지배적이던 비잔틴풍 예술의 경직성 및 인위성과 대조하고 있는데, 이러한 생각은 모두 충분한 근거를 지닌다.다만 우리는 Giotto의 표현방법에서 볼 수 있는 명료성, 단순성, 논리성, 정확성을 후에 나타나는 더욱 세부적이고 유희적인 자연주의와 비교하는 데에만 익숙해 있을 뿐 Giotto 이전에는 회화적 수단으로 전혀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을 그가 비로소 볼 수 있게 해주고 이야기할 수 있게 해준, 사물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엄청난 회화기법상의 진보는 간과하고 있다.우리는 그를 위대한 고전적인 화가로만 보지만 실제로 그는 무엇보다도 단순하고 이성적이고 냉철한 시민 예술의 대가이며, 그의 고전성은 직접적인 인상을 정리·종합하고 현실을 합리화, 단순화한 데서 생겨난 것이지 결코 현실과 유리된 이상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그의 작품에서 고대적인 형식으로 돌아가려는 의지를 찾아보려 하지만 실제로 그가 의도했던 것은 현실을 간략하게 파악해서 정확하게 표현하는 그런 이야기꾼 같은 역할이었고, 그의 엄격한 형식주의는 반자연주의적인 냉담성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희곡적인 효과를 획득하려는 노력에서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그의 예술관은 비록 자본주의가 완전히 공고하게 시대에 나오긴 했으나 그래도 아직 요구조건이 까다롭지 않던 시민계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Giotto의 예술은 그 예술의 발주자들이 번영을 추구하고 권위의 신장을 원하면서도 외부적인 격식이나 과시적인 소비에는 아직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듯이 엄격하고 실질적인 예술이었다.르네상스의 선구자이며 피렌체파 회화의 창시자로 주로 성화를 그렸고,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성당 상원(上院)의 벽화 28도(圖)와 , 등 많은 작품이 있다.Giotto의 대표작으로 파도바에 있는 델아레나 교회당 벽면에 그린 (1306년 완성한 것으로 추정)을 보면 이 그림에서 비로소 중세적 평면성이 사라지며 그 대신 인물 사이의 공간이 형성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한 눈에 펼쳐지는 사건을 생생한 드라마로 제시한 그의 새로운 눈과 방법이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물론 아직 원근법이 확립되기 이전의 상태이지만 고딕적 회화에 익숙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이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생생한 현실감을 원근법에 익숙한 현재의 시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Giotto의 이러한 예술적 성취는 당시 인문주의자들의 관심을 끌었고『데카메론』의 저자인 보카치오(Boccaccio)는 그에 대해 말하면서 고전, 고대로부터의 자연모방의 개념과 예술감식가들의 개념을 환기시키고 있다. 즉 고대 로마의 퀸틸리아누스는 무지한 사람은 관능적인 것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예술의 조리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예술감식가 라고 말한 바 있는데 보카치오는 Giotto에게서 비롯된 예술상의 새로운 시대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테 또한 치마부에와 Giotto에 대해 언급하며 그들이 자신의 작품에서 장식을 배제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특히 마르티니와 친분이 깊었던 페트라르카는 자신의 애인 라우라의 초상화를 그린 마르티니의 회화에 심취하여 그를 베르길리우스와 비교, 대조하는가 하면 심지어 그리스의 전설적 화가인 제욱시스보다 뛰어나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Giotto 그림의 미술사적 의의는, 그를 발탁한 스승인 치마부에의 비잔틴양식 전통을 벗어났을 뿐 아니라, 조각가 N.피사노나 로마화파 카발리니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를 더욱 발전시켜 그리스도교 교의(敎義)에 따른 그림 해석으로부터 해방, 인간성과 종교성이 융합된 예술의 세계를 연 것으로 평가받는다.그의 그림에서는 필요한 주제만 파악하여 단순화되어 있으며, 화면은 인물과 공간을 투시법에 의해 입체적으로 구성함과 동시에, 인물상은 조형적으로 형태화시켜 작중 인물의 심리가 개성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이탈리아 회화의 창시자로 불리우며, 정신성과 현실성을 종합하여 고딕회화를 완성한 것으로 평가된다.3. 작품의 영향Giotto는 치마부에의 제자로 추정되어왔는데, 상세한 사항에 있어서는 각기 다르지만 그것은 사실인 것 같다. 더욱이 치마부에의 양식은 Giotto의 작품 경향과 매우 비슷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필연적인 것으로 보인다.치마부에는 13세기말 이탈리아에서 가장 뛰어난 화가였다. 그는 사실적 표현과 상상력을 통하여 중세미술의 도식화된 형태를 극복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화가였다. 그는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뛰어난 소묘력과 극적인 긴장을 표현해내는 능력에 영향을 받아 Giotto가 두드러진 발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 틀림없다. 한편 Giotto가 치마부에의 제자였을지라도 자신의 천재성으로 그보다 30년 가량 앞서 활동한 조각가 니콜라 피사노보다 훨씬 놀라운 혁신을 이룩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즉 Giotto야말로 진정으로 고전적 이상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13세기초에 성 프란키스쿠스가 종교에서 주창한 새로운 인본주의 사상을 미술로 표현했던 것이다.Giotto는 작품의 주제로서 오직 인간만을 다루었는데, 여기에 그려진 각 인물은 희생과 구원을 주제로 한 그리스도교의 숭고한 드라마에서 헌신적인 열정으로 그들의 배역을 연기하고 있다. Giotto의 작품과 비교해 볼 때, 그의 앞 세대 또는 Giotto 직후의 화가들은 화려하고 성스럽고 비개성적인 비잔틴 미술로 겉치레한 생명 없는 인형들의 꼭두각시 놀음을 그렸다면, Giotto는 이것을 성 프란키스쿠스의 주정주의적(主情主義的)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바꾸었다.그는 치마부에의 제자로서 그 능력은 이미 스승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베로끼오와 다 빈치 프란치아와 라파엘로도 그 한 예이다.4. 그의 작품1290년부터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 상당(上堂)에 그려진 벽화 제작에 관여하였으며, 그 후에는 성 죠반니 교회 회랑벽화를 제작하였다.1311년 그의 나이 44세 피렌체 정청의 기록에 의하면, Giotto가 임대 거래에 보증인으로 되어 있어, 이미 부유한 화가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