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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경학] 오래된 미래 평가A좋아요
    농업을 1차 산업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농업이 모든 산업의 근간이 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 하겠다.라다크에서는 서구화가 진행되면서 라다크 개발관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새로운 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이다. 이들은 전통에 대한 열등감으로 자기가 가진 것들을 버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새마을 운동을 주도한 세력이 유사한 작태를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새마을 운동이다.1970년대 새마을 운동과 서구 선진국들을 모델로 하는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면서 농가는 급속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무모할 정도의 행정력을 바탕으로 추진된 농촌 환경개선사업은 바로 이러한 외부적 엘리트 계층에 의한 접근이었으며, 위로부터 강제된 변화였다. 이제까지 농촌 근대화라고 하면 대개 관 주도의 환경개선사업을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주민들에 의한 자발적인 변화도 많은 부분 이것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농촌의 근대화에 따른 문제는 농촌을 둘러싼 구조적 모순을 총체적 시각에서 파악하고 개혁하려는 내적 욕구로부터 출발하지 못하였다는 데 원인이 있다고 생각된다.농촌 문제는 물론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정부안이 전무하다는데 있다.예외 없이 우리 농촌도 오직 경제적 수치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려드는 서구적 경제모델을 거울로 삼았고 모든 전통적인 것들은 미개한 것으로 치부되어졌다. 마을에서 이뤄지는 제례들은 사라졌으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향했다. 사람들은 그들이 살고있던 집들마저 버린다. 전통적인 가옥은 버려 두고 근처의 아파트 단지에서 살게된다. 흔히「서구식」이라는 말로 통하는 주거형태가 권장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관에서는 농촌개발의 모델로 서구의 예를 들곤 하였는데 아마도 우리의 농촌이 겉보기라도 그런 외국의 모양새를 닮아가길 바라왔던 것 같다.여기에는 농촌 문제가 서구화에 의해 해결될 것이라는 단순하고도 왜곡된 인식이 깔려있다. 또한, 농촌 문제가 심각하게 된 것은 한국경제의 대외의존적 개발과정(사실 도 불구하고 이러한 원인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그나마 농민보호를 목적으로 한다는 정책들이 있기는 하지만 너무나 근시안적인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경제적 입장에서 본다면 지금의 우리 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쌀 수매정책과 농가 보호법은 너무도 비효율적이다. 국제 시세의 세배가 넘는 가격의 쌀을 그것도 창고에 제고가 십 년 분이 넘게 넘쳐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직접 나서서 수매한다는 것은 불필요해 보이며 그나마 WTO 체제에서 더 이상의 정부개입은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될 것이므로 더 이상 이런 식의 농촌보조는 불가능해질 것이다.부실기업 정리와 구조개혁을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또 다시 추가공적자금을 지원하는 통큰(?) 정부가 유독 농촌에 대한 투자에는 인색한 것은 형평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농민을 무시하는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 이러한 문제의 중심에 관료에 의한 중앙 집중화된 개발이 있다.이렇듯 회생 불능 상태에 처해있는 농촌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현재 농민들이 요구하고 있는 농가 부채경감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농촌경제 활성화를 위한 보다 효율적이고 근본적인 대책 마련 - 나는 이것이 라다크에서의 예와 마찬가지로 탈집중화를 통한 작은 공동체로의 환원이라고 생각한다 - 과 지속적인 투자일 것이다.그렇다면 현재의 농촌문제에 대해서 살펴보자.우리나라의 가장 큰 불행은 서구화를 받아들일 때 그것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취사선택할 권리를 박탈당했다는데 있다. 역사적인 격동기를 거쳐왔다. 그 와중에서 서구화는 타율적으로 이뤄졌다. 일제강점기를 통해서 그리고 신탁통치 기간을 통해서 개발은 다른 사람의 손으로 이뤄져 온 것이다. 여기서 그것에 대한 피해의식에 대해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과정에서 우리가 한번이라도 서구화 라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고 자문해 본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역사적 강박관념을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나라를 보면서 우리는 서구화만이 우리민족의 살길이며 나라의 되었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중앙집중화와 권력의 집중, 부의 집중을 통한 서구화를 의미한다.식량 생산은 더 이상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돈벌이의 수단으로 인식되었고 그런 관점에서 농업은 더 이상 매력적인 돈벌이 수단이 아니었다. 과거 인구의 대부분이 소위 1차 산업이라고 불리는 농업에 종사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구의 10%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과거에 생산할 수 있는 양보다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기술만이 살길이고 서구화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이 고착화되었다.반개발 적인 관점으로 우리 사회를 재편하기 위해 개발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며 또한 많은 부분에서 계몽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산업화에 따른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직도 우리는 과거의 역사적 맥락과 연관지어 산업화의 필연성과 그 과정에서의 사람들의 희생을 필연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팽배한 사회에 살고 있다. 라다크 프로젝트 에 관해 논한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답 할 것이다.소위 선진국 사람들이 그들의 문제를 깨닫고 다시 환원하려고 한 시 점을 생각해봐∼. 그들의 문제가 너무도 극명해서 곪아터지기 직전이 아닌가? 우리는 아직 충분치 않다.아직도 양적 분석에 지배되는 좁고 단기적인 관점 에 의존하여 기존의 파괴적인 개발에 의존하고 있다. 문제를 인식한 사람들의 수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깨어있는 소수에 불과하다. 아직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개발속임수 에 빠진 체 하루하루의 생활을 위해 더 많은 파괴적인 일들에 일과를 맡긴다.우리가 서구화의 덫을 피하기 위해서는 가 얘기한 결집된 정보 캠패인 을 통한 개개인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인식을 해야 행동하지 않겠는가.또한 문제를 총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농촌의 문제를 하나하나 떼어서 생각한다. 농가 고령화는 산업농의 육성으로 노동력 부족은 기계화로 농촌 총각 문제는 외국의 처녀 수입으로 하나하나 따로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대안도 하나하나 제시해서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넓게 보면 그러한 현상들은 농가의있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증상을 치료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려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의 체계적인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깊이 들어가 보면, 인종적 폭력, 물과 공기의 오염, 가족의 와해, 문화적 해체 등 겉보기에 관련이 없는 듯한 문제들이 긴밀히 상호 연결되어 있다. 그런 문제들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그러한 문제가 너무나 어마어마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문제들의 접점을 발견한다면 그것들과 맞 싸우려는 우리의 시도가 훨씬 더 효과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각 문제를 개별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전체 그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어떤 가닥을 잡아당기면 되느냐 하는 문제로 된다.총체적으로 봤을 때 이 문제는 우리의 농업에 대한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 분명하다. 소위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매년 농민들의 집회를 보는 일은 익숙한 일이 되어버렸다. 농민들은 생존권 보장 을 적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자신의 손자뻘 되는 전경들과 몸싸움을 한다. 그들은 필경 우리들의 큰아버지나 외삼촌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현대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야 만 하는 통과 의례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농업에 왜 1차 산업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는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엘빈 토플러는 제3의 물결을 통해서 산업화 과정을 몇 가지 단계로 설명했다.그가 말한 농업은 (내가 생각으론) 기반 산업적 특성이 강하다. 지금의 정보화 혁명도 그 근원적인 면을 살펴보았을 때 농업이나 산업을 조금 더 세련된 형태로 포장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포장의 이면에 가려진 농업을 잊어버린 듯 하다. 이것은 마치 아파트에서 자란 아이가 수도꼭지만 돌리면 따뜻한 물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 과 같다. 따뜻한 물이 나오기 위해 수도관을 통해서 보일러를 거치게 되고 이 보일러는 도시가스관에서 공급되는 가스에 의해서 가동되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땅으로부터 유리된 엘리트 들은 산술적인 대차대조표를 통해 말을 꼭 빌리지 않더라도 농촌의 생활이 주는 정서적 안정감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대부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최근의 청소년 문제는 상당 부분 그런 경험이 전무한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게 아닐까 생각해 볼 문제이다.전통적인 라다크 사회에서의 좀더 넓은 자아개념은 서구문화의 개인주의와 대조를 이룬다. 라다크 사람의 정체성은 상당한 정도로 다른 사람과의 긴밀한 유대에 의해 형성되며, 상호연관성을 강조하는 불교적 관점에 의해 강화된다. 사람들은 그들 주위에 동심원을 이루며 펼쳐져 있는 관계의 그물 - 가족, 농장, 이웃, 마을 - 속에서 부양된다. 서구인들은 개인주의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때때로 개인주의란 고립의 듣기 좋은 이름일 뿐이다. 우리는 사람이 완전히 자기충족적이어야 한다고, 다른 누구도 필요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작금의 농촌의 문제는 서구화에 따른 돈의 문제와 큰 연관이 있다.여기서 라다크의 예를 살펴보자.전에는 자급을 위해 다양한 작물을 기르고 짐승을 몇 마리 키우던 농부들은 지금은 - 직접적으로나 지역경제를 통해서 - 멀리 있는 시장을 위해 단일 환금작물을 기르도록 권고 받고 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거대한 수송체계, 기름 값, 국제금융 변동 같은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힘들에 의존적으로 되었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그 때문에 종래 그들이 스스로 기르던 것들을 사먹기 위해 필요한 수입을 확보하려면 점점 더 많이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가장 빈약한 봉급이나 임금도 현금경제에서는 발전으로 생각되므로 환금작물의 생산과 그에 따른 상업과 수송의 증가는 예외없이 이익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개발은 일반적으로 농촌인구를 유혹하여 땅을 떠나 도시의 빈민가로 옮겨가게 함으로써 빈곤을 만들어내는 결과를 초래한다. 갈수록 사람들은 자원을 변두리에서 중심으로, 비산업화 지역에서 산업화 지역으로, 시골에서 도시로,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부자들에게로 끌어 모으는 경제체제 속에 갇히게 되었다. 흔히 이러한 자원들은 하나의아간다.
    자연과학| 2002.11.27| 8페이지| 1,000원| 조회(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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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비엔날레감상문 평가B괜찮아요
    비엔날레 관람이라...교대에 오게되면서 색다른 경험을 하나둘 한다. 무용복을 입는다던가 체조를 한다던가 하는 일이다. 그중에도 미술에 대해서 많이 접하는 것인데 아직도 생소한 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 색다른 경험을 하기에 앞서서 나는 부산 비엔날레 홈페이지를 방문했다.정말이지 이 마크는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다먼저 왼쪽의 촌스러운 부산 비엔날레 마크가 나를 맞았다.사실 이 마크를 보고 조금 좌절한 것은 사실이다.큐레이터들의 미적 감각 역시 이 마크와 같을까 걱정이 되었다. (우리 학교 마크와 유사한 촌스러움이 느껴진다)행사의 주제를 살펴보었다. "이번 2002 부산 비엔날레 현대미술전은 부산에서 출발하여 대도시의 환경과 그 안에서 형성되는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간의 다중적인 관계를 조망하고 상상하는 전시입니다. "라고 씌여있었다. 그리고 나서 인터넷을 통해서 작품들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하지만 홈페이지를 통해서 작품을 살펴본다는점은 한계가 있었다. 우선은 그 난해한 말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리고 실제 작품들이 어떤 것들인지 사진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햇살이 화창한 목요일 오후 비엔날레가 열리는 부산시립미술관으로 향했다. 그날은 날씨가 참 좋았다. 주차장을 통해서 행사장 입구로 가면서 나는 야외에 있는 작품들을 처음으로 접했다. 무덤을 소재로 삼고 생활인의 단절이라는 주제를 표현하려던 작품들은 너무나도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작품하나 때문에 제대로 감상하기가 힘들었다. 매표소로 가서 티켓을 끊고 행사장으로 들어섰다.왼쪽의 작품이 가장 먼저 눈에 띄인 작품이다. 작품해설에 의하면 관객이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는 경험을 하도록 작품이 동작해야만 하는데 전시회장에서는 작품이 동작하지 않았다. 그래서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파파라치의 폐해를 고발하면서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사적인 영역을 파괴당한 황량한 모습을 그린듯한 작품으로 비치기까지 했다. .이 작품을 보는 일은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었다. 작가의 말대로 입체와 평면의 경계가 참으로 모호하게 비춰지는 것이다. 비록 작가가 말하려던 정의와 폭력의 모호한 관계에 대한 느낌은 조금 덜 와닿았지만 입체와 평면의 경계를 허물수 있는 작가의 표현기법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작가의 말대로라면 게이머들의 공공장소라고 불리는 이곳은 창고와 같은 큰 공간에서 마우스조작으로 움직이는 현실세계를 재현한곳이다. 가상공간에 관한 관심이 커져가면서 이 장소에 대한 예술적인 접근도 이뤄지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었다.현대 미술은 다른 모든 예술활동들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현실을 치열하게 반영하는 것이다.이 작품을 보면서 몇 안되게 공감을 많이했던 작품이다. 작가는 비록 외국인이었지만 뛰어난 관찰력으로 부산에 대한 이미지를 너무도 잘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내가 예술가적 소양이 있었다면 나도 분명히 부산을이렇게 표현했을 것이다.번잡하지만 결코 정감을 잃지 않는 부산을...과 와 같은 대중적인 인기를 끈 영화를 감독한 브람빌라의 영상작업은 반복되는 구성 안에서도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디지털 기술로 추락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허공을 부유하는 이미지로 바꾸는 것은 참 인상적이었다.이 작품을 보면서 참 큐레이터들의 역할이 중요하구나 생각했다.전시공간의 부족도 있었겠지만 관람객들의 자각도 부족했겠지... 사람들은 이것이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듯 했다. 깔고 앉고 발로 기대는 모습을 보면서 느낀점이다.솔직히 이것이 작품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작가가 어려운 미술을 관객에게 쉽게 설명하려고 한 시도는 참 괜찮았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들의 대화를 통하여 때론 단순하고 때론 난해한 현대 미술에 대하여 설명했다.모든역사는 설화에서 시작된다고 했던가, 작가는 분명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싶어했던거 같다. 직접작품을 만지고 타고앉는 행위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실제 전시장에서는 만지는 것 마저도 금지되어 있었다. 이것은 명백히 관객에 대한 기만 행위이다.이풍경을 보면서 동경에서 첫비행기로 귀국하던때가 생각났다. 한시간 일찍 공항으로 간 까닭에 모든 상점들은 문을 닫은 상태 비행기들은 출발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정비공들과 함께 있었다. 왠지 모르게 이 작품이 쓸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이 작품이 전시되어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것은 많은 용기를 필요로 했다.낡은 병들이 가득쌓인 그것도 각각의 병들에 사람들의 사진이 있는 병들이 쌓인 방은 시체 보관소 같은 느낌을 줬다.현대화의 희생양들을 표현했다는 작가의 말이 너무도 잘 와닿는 순간이었다.태양계와 행성들의 모습을 보는 듯한 장엄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다. 평범한 경기장을태양계로 만드는 작가의 솜씨가 너무도 대단했다.우리는 작은 행성들이라는 작가의 주장이귓가를 맴도는 듯한 느낌이었다.솔직히 이것은 별로 작품이 아닌 듯한 느낌이다.때론 미사여구로 많은 부분을 매꾸기도 한다고 생각했다.물론 보는 사람의 안목이 모자라다고 하더라도 반박할 생각은 없다.작가의 발상이 참으로 기발했다고 생각한다.작가는 부산과 터키의 비슷한 환경을 주목하고 부산의 낡은 어선과 터키의 낡은 노를 만나게 하여 그 배와 노에 각인된 시간의 흔적을 관객이 더욱 잘 읽을 수 있도록 수십개의 돋보기를 부착한 작가의 발상은 참으로 대단했다.더 이상 쓰지 않는다는 이 인력거는 나에게 큰 호기심과 기대를 갖게 했다. 먼저 기계적인 움직임에 대한 호기심이고 이것을 환경이 열악한 요즘의 현실에 대응시키면 어떨까하는 생각이었다. 인력거를 최첨단 자동차 광고처럼 소개한 작가의 의도는 잊혀져가는 것들에 대한 작가의 아쉬움의 표현으로 보였다.LED의 점멸로 움직임을 표현한 이 작품은 작품성을 떠나서 큰 호기심의 대상이었다.단순함의 반복이 움직임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았다.강렬한 붉은색의 방작가는 분명 정신이 바른 사람은 아닐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점점 그 기능을 잃어가는 가정을 표현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독후감/창작| 2002.11.20| 8페이지| 1,000원| 조회(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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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레스타인사태를고찰하면서)종교의본질은무엇인가
    팔레스타인 사태를 살펴보면서 종교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관해 논하라세상 모든 것들이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종교만큼 그 양면성의 극단을 보여 주는 것은 없는 듯 하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인생의 빛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수많은 종교들이 세상에 존재한다. 차이점도 존재하겠으나 그들은 대부분 다음과 같 은 공통점을 가지고 사회에 작용한다. 종교는 개인으로 하여금 집단소속감을 깨닫게 해 주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지지해 주며, 실망하고 실패했을 때 위로를 주며, 개인의 정체성을 계발하는 데 공헌한다. 또한 인간생활과 노력의 유의미성을 보장하는 기초 적 근거를 제공하고 표현적 욕구의 출구와 인간감정의 정화를 제공한다. 종교는 또한 사회규범과 규칙을 신성화함으로써 인간의 법률을 지지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을 사회화하고 사회안정을 유지하게 하는 역할의 일부를 담당한다. 이러한 종교의 기능 들은 모두 사회응집에 기여하는 측면들이다.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종교가 문화적 통합에는 공헌하지만 그러한 통합이 사회의 전체적 통합에는 필요치 않다. 즉 현대사회는 가치나 규범 혹은 합의 등의 문화의 수 준에서 통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나 계약 등의 형식적 연계에 의해서 적당히 조직되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분화되어 있고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통합적 기 능은 상당히 감소되었으며, 오히려 세속사회로부터 종교가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또 종교의 사회적 통제에 대한 외적 형식은 명확한데, 종교집단 안에서 집단규범으로 부터의 일탈에 대한 제재는 거룩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가장 효과적이다. 인간뿐만 아 니라 신에 의해서도 심판 받는다는 것은 일탈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집단은 매우 형식적 통제, 즉 법이나 종교재판 등을 갖고 있기도 하고 또 어떤 종교집단에 의 해 이행된 사회통제의 형식들은 비 형식적 제재, 즉 범죄를 추방하거나 창피를 주는 것 그리고 격리시키는 것 등을 포함한다.종교조직에 의해 실행되는 사회적 통제는 사회 안에 있는 종교조직의 힘에 따라 변 한다. 종교와 사회가 미분화되어 있는 사회일수록 종교에 의해 수행되는 사회통제의 힘이 강력할 것이지만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도 종교는 법과 공식적 질서뿐만 아니라 비공식적 사회통제의 중요한 기초를 구성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보다 큰 사회로의 종 교집단의 적응이 커질수록 "우리 사람들"(our kind of people)에 대한 구성원들의 충성심이 커지고 따라서 변동을 억제하게 된다. 또한 종교적 관심 안으로 사회화된 사 람은 종교적 통제를 내면화한다. 따라서 내적인 종교적 통제가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선한 양심"을 지니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하거나 혹은 "죄책감"을 피하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삼가 할 때 신앙체계는 종교의 통제를 실행한다. 이러한 내적통제는 변동 지향 적 행위를 방해하기 쉬운데 개인들은 그들이 배운 규범들을 깨뜨리는 데에서 죄책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종교의 어떤 측면들은 사회변동을 억제하는 통합의 기능을 수 행하지만, 또 다른 측면들은 현상에 도전하고 변동을 일으키는 힘이 되기도 한다. 어 떤 조건 아래서 종교는 광범위한 혁명적 힘이다. 역사적으로 종교는 사람들의 행위를 연결시키는 믿음과 사회적 삶을 연결시키는 이상들 속에서 특별한 효력이 있기 때문에 변동에 대한 가장 중요한 동기들 중의 하나이다. 종교는 경우에 따라 변혁의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다원화된 현대 사회 안에서 종교적 표상들의 우월한 위치와 종교적 규범들의 설득력 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종교는 더 이상 공적 문제가 아니라 사적인 문제가 되어 버렸 다. 즉, 개인과 사회 혹은 개인과 종교의 문제들이 과거처럼 숙명적인 것으로 경험되 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로 바뀌어 진 것이다. 전형적인 전근대 사회에서는 종교 가 개인에게 객관적인 확실성을 부여해 줄 수 있었지만,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대조적 으로 이 확실성을 무너뜨리고 종교가 주관화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신들 을 선택할 필요에 직면하게 되었고 사회적으로 많은 신들이 가능해지게 되었다.하지만 대부분의 종교는 자신이 제시한 종교만이 절대적이라고 배타적으로 주장한 다.‘다름’을 곧‘그름’으로 등가화해 버리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를테면 사랑 을 위한 전쟁, 자비를 위한 증오, 순종을 위한 살육을 진정한 신앙으로 여기는 어처구 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돈독하고 순수한 신앙과 맹목적인 광신이 종교 적 속성에 공히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종교는 한없이 고상한 덕목을 실천 할 수도 있고, 동시에 야수성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내기도 한다.최근 들어서 일어난고 있는 일련의 테러사건들은 이러한 종교의 부정적 측면을 그대 로 반영하고 잇는 것이라 하겠다. 일부 무슬림들은 이 사태들의 테러범이 알라를 위한 위대한 순교자로써 죽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분명 그들의 신을 우롱하는 행위이 다.‘하느님에게 순종하여 평화를 얻는다’는 뜻의 종교 즉, 이슬람은 테러와 무관하 다. 결국 무슬림 테러가 우리에게 나타내는 것은 "경전의 사람들"이 - 모세오경과 예 언서의 유대인, 신구약 성경의 그리스도인, 코란의 무슬림 - 자주 하나님을 잘못 이 해하며 하나님을 엉뚱하게 섬긴다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빚어지는 것이다. 이 사건 은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섬긴다는 것이 이처럼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도 있 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유대인과 그리스도인 역시 하나님을 잘못 이해했었다. 이스라엘의 현재의 상황은 분 명하게 그들의 주장이 잘못 되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대에 들어와 예루살렘과 팔 레스타인은 이스라엘 국민에게 속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 에 그 땅을 다스리도록 그들에게 주셨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대사에 들어서 다시 그 땅이 이스라엘에게 다스리도록 주어졌다. 현대 중동에서 발생하는 군사적인 충돌은 팔레스타인에 있던 아랍인들을 추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 님께서 "거룩한 땅"을 이스라엘에게만 약속하셨고, 보증하셨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또한 왜 유대인은 현대사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땅과 나라를 필요로 했는가? 이 역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오는 현실이다.
    인문/어학| 2002.10.29| 3페이지| 1,000원| 조회(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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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학기술 발전의 빛과 그림자
    인류는 종(種)이 탄생한 이후로 도구의 발달을 발판으로 물질적인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이다.과학기술에 대해서 고찰해 보기 이전에 먼저 과학기술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먼저 과학의 의미는지식(scientia)→과학(science), 인간이 관찰과 경험을 통해서 얻은 체계적인 지식'과학적' : 누구나 신뢰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지식'비과학적': 아무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없는 미신과 같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함그리고 기술의 의미는원래 인간이 필요해서 고안한 것인간의 자기 보존을 위해 자연의 힘을 조종하고 지시하는 활동으로 정리될 수 있다과학이 현상적 세계를 체계화시켜 바라볼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였고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인류는 그 과학의 혜택을 풍미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과학기술 역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는 인류의 축복이기도 하지만 과학기술을 이용하는 주체가 객체로 전락하여 지배를 받게될 때는 인류를 멸망하게 할 엄청난 해악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흔히들 과학기술의 장점을 논할 때 아래와 같은 논의가 이뤄진다.1 많은 종류의 새로운 제품의 생산과 소비 대상의 확대2 의료 기술의 발달로 수명 연장. 질병 퇴치. 건강 증진3 교통 통신의 발달 - 상품과 인간의 교류. 대중 매체의 확산4 컴퓨터의 발달로 정보와 자료 처리 능력 증진단점으로는1 핵무기의 발달로 인간이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게 됨2 환경 오염의 초래 : 공장 폐수, 방사능 및 유해성 폐기물, 대기오염3 자원 고갈과 교통 주택난 : 주택 및 교통난, 사생 활 침해4 개인의 사생활 침해과학기술이 과연 인류에게 준 혜택이 무엇이었을까? 위에서 논한 장단점들은 단순하게 무수하게 많은 단점과 물질적인 풍요라는 단 하나의 장점간의 대립으로 비춰진다. 계몽주의자들은 과학기술이 인류에 무한한 부를 제공할 것이며 합리적인 사고의 틀을 제공함으로써 이상적인 사회의 건설에 이바지하여 인류에게 무한한 행복을 선사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은 인류에게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행복해지는 지식을 제공하는데는 실패한 것 같다. 아니 정확히 말해 과학기술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인류가 실패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기술은 인류에게 물질적인 발달 이상의 어떠한 가치도 아니다.사실 과학기술에는 어떤 가치도 들어있지 않다.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서 과학기술의 색깔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과학기술이 인류에게 약이 될 것인가 독이 될 것인가는 인류의 정신적 역량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인류의 역사를 살펴볼 때 과학기술의 발달사는 가히 경이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단적인 예로써 최초의 도구였던 석기가 제작과 청동기의 제작까지는 수천 년이 걸렸지만 청동기에서 철기로의 전환에는 그것의 절반이 넘지 않는 시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특히 최근의 기술혁명은 실로 기하급수적이다. 이것은 긴 시간을 두고 천천히 발전하고 있던 기타의 학문들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과학기술이 인류에게 물질적인 강박에서 벗어나 정신적인 여유를 주자 인류는 그 정신적인 여유를 다시금 과학기술의 발전에 투자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인류에게 참으로 떨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결국 작금의 기형적인, 정신적으로는 1000년 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사실 대부분의 정신적인 면에서 그 이하이다.) 물질적으로는 비대한 모습을 하게 된 것이다.논의가 여기에서 그치게 된다면 이분법적 단순화라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니 대안을 제시하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의 회복이다. 정신의 회복을 이루지 아니하고는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 사회가 해체되고 붕괴되는데 과학기술이 딛고 서있을 땅은 없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논의가 가능하겠지만 인문학을 되살려야 한다. 당장 우리나라만 살펴보더라도 당장의 성과물이 나오지 않는 인문학 등의 기초학문에는 전혀 투자가 이뤄지고 있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과학에 대하여 반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하는 인문학의 중요성이야말로 과학의 문제해결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것 중의 하나이다.또, 주체와 객체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창조한 기계를 사람보다 중시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는 인문학 못지 않게 시사점을 제공한다. 자신에 대하여 반성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류애를 깨달을 수 있는 장이 바로 종교인 것이다. 종교를 통하여 기술지배를 극복할 수 있다.
    사회과학| 2002.10.23| 3페이지| 1,000원| 조회(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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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덕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성인가 감성인가? 평가B괜찮아요
    # 붙 임이성(理性)-서양철학에서는 intellectus, ratio, raison, reason, vernunft 등의 이름으로 표현되며, 대개 다음과 같은 뜻으로 이해되었다.첫째, 이성은 인간의 논증적 사고 능력이다. 이것은 지식의 내용보다 형식적인 관계에 대한 능력으로 개념과 명제들을 논리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것은 분석적 판단의 능력이며, 수학의 능력 혹은 논리적 추리의 능력이다.둘째, 이성은 인간의 직관 능력이다. 이성을 논증적 능력으로 보는 것이 현대에 와서 일반화된 것이라면, 직관적 능력으로 보는 견해는 옛날에 덜 강하였다. 이성은 논증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진리를 바로 인식하는 능력이다.셋째, 이성은 선악 진위를 구별하는 능력이다. 이성은 논증하고 동시에 판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를 가능케 하는 이성은 욕망과 감정으로부터 해방되고, 따라서 비인격적, 비물질적이고 능동적인 순수 정신 능력이다.넷째, 이성은 계시나 신앙과 대조되는 중립적 지식 능력이다. 이성은 사실에 근거한 과학적인 것이며 계시나 신앙의 초자연적, 특수적, 미신적인 것과 대치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다섯째, 이성은 감각과 대조되는 인간의 지각 능력이다. 이성은 물질, 육체, 감성, 지각 등 물질로부터 독립해 있고, 따라서 보편적이고 형식적인 것이다.마직막으로 , 이성은 체계를 가능케 하는 능력이다. 칸트는 순수 이성의 체계술은 모든 부문들이 합법적인 위치에서 서로 유기적 관계를 가져 완전한 통일을 이룬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라는 헤겔의 사상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도덕과 종교(도덕의 기준은 무엇이가?)흔히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을 이성의 유무에 두고 있다. 감정보다는 이성이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살려주는 숭고한 것으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물론 필자도 동의한다. 정규교육시간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오면서도 한번도 그 말이 틀리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다. 윤리학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이성과 감정을 나눈 두개의 중요한 관점이 있다. 물론 조금의 차이는 있으나 고등학교에서 배운바 그것은 바로 절대론적 윤리설(이성중심)과 상대론적 윤리설(감정중심)이다.옛부터 많은 사상가들은 완전한 도덕을 위한 거울이 될 수 있는 절대적 윤리의 원리와 법칙을 초경험적, 초현실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밝히려 하였다. 이러한 절대론적 윤리설은 크게 목적론과 법칙론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목적론에 의하면 삶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선천적으로 주어진 절대적인 것이다. 그 목적이 무엇이냐에 관해서는 견해의 차이가 있으나 절대적, 궁극적 목적에 비추어 대답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의견을 같이 한다.아리스토텔레스는“모든 종류의 의도적인 활동은 어떤 선을 달성할 목표를 갖고 있다.”고 하였다. 이런 목적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에 도달하게 된다. 이를 행복이라 하였다.법칙론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누구나 지켜야 할 행위 법칙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법칙은 인간의 편의나 쾌락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여 미리 주어진 것 으로 절대 불변의 것이다. 이 법칙론자 중 대표적인 사람은 칸트이다. 그는 실천 이성의 법칙이 언제나 타당한 것이기에 무조건 적용되는 지상 명령이라 하였다.하지만 이렇게 이성을 중시하는 입장이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현대에 이르러 상대론적 윤리설이 크게 대두된 것은 세계 대전과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한 사회 양상과 생활 조건의 급격한 변화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자연 과학의 방법을 적용한 경험적 인간학은 인간을 진화의 산물로 보는 동시에 이성과 양심까지도 경험에 의하여 변화, 발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문화적 배경을 달리 하는 민족과 부족에 대한 연구는 전통과 인종이 다르면 양심도 크게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여 절대론적 윤리의 신빙성을 크게 약화시키고 있다.
    인문/어학| 2002.10.08| 3페이지| 1,000원| 조회(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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