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학사학위청구논문흑인 민권 운동에 미친 마틴 루터 킹의 영향2003년 1월김 주 영목 차Ⅰ. 서론흑인 민권 운동의 역사와 그 전개Ⅱ. 본론1. 흑백 논리 제도와 마틴 루터 킹흑백 논리 제도2. 통합주의와 비폭력주의기독교의 영향간디의 영향버스 승차 거부 운도통합주의 정신과 비폭력주의3. 말콤X의 분리주의이슬람교의 영향흑인 공동체통합주의와 분리주의공통점 (흑인저항운동)Ⅲ. 결론참고문헌Ⅰ. 서론미국은 자유와 정의, 평등이라는 이념을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념을 바탕으로 세워진 미국이라는 나라의 초기 정착은 그 이념들과는 대조를 이룬다. 종교 박해를 피해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자유와 종교 라는 이름하에 토착민을 말살시키고 나라를 세운 것이다. 즉 자신들의 자유와 정의를 위해 인디언이라는 토착민들의 자유와 정의를 침범한 아이러니컬한 상황을 보이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자유와 정의의 역사라는 이름의 미국 사회의 이면에는 흑인에 대한 억압, 차별, 분리, 편견의 역사가 존재한다. 즉, 350년이 넘도록 흑인들이 미국사회에서 분리와 차별, 인종적 편견을 참담하게 겪으며 살아온 역사가 존재해왔던 것이다.흑인 민권운동의 뿌리는 1619년 미국 땅에 처음 흑인 노예가 들어온 이후 350년간 참담한 곤경에 처해 있던 흑인들이 1950년대 중반 남부에서 자발적으로 일으킨 사회운동이다. 물론 흑인 민권 운동이 1950년대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이미 19세기 말부터 백인들의 인종 탄압에 저항하는 흑인 운동 세력들이 미미하고 단순하였지만 존재하고 있었다.1950년대에는 억압, 분리, 차별을 없애자는 자발적인 운동이 남부 여러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이 운동들은 사회의 일부분으로서 흑인들 자신을 단결하고, 투표권 등 그들의 법률적 권리를 완전히 보장하는 흑인의 민권을 주장하는 운동이었다. 이어 1955년에는 몽고메리에서 공공시설에서의 흑인 차별에 대항하여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이 일어났는데, 마틴 루터 킹 목사(1929-1968)는인 구심점이 돼 있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미국 흑인인권 운동사에서 킹 목사가 차지하는 지위는 20세기 흑인의 근본적 인간성을 대변한다는 점에 있다.앞에서 보다시피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 민권 운동의 선각자이자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부터는 흑인 민권 운동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차지하는 비중만큼 어떻게 그리고 어떠한 방법으로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론1. 흑백 분리 주의와 마틴 루터 킹1929. 1. 15 미국 조지아 애틀랜타의 흑인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한 킹 목사는 1968. 4. 4 테네시 멤피스에서 암살되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암살 당할 때까지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1955년 몽고메리에서의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시작으로, 1963년 워싱턴에서 있었던 대규모 평화 행진과 같은 흑인들의 비폭력적인 투쟁을 주도하기 위해 남부 그리스도교 지도자회의(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SCLC)를 조직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이러한 공로로 인해 1964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1986년에는 미국 의회가 그를 기리기 위하여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국경일로 지정했다. 흑인 민권운동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가지는 위치와 의미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계기를 통해 킹 목사는 흑인 민권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을까?흑백 분리 제도킹 목사는 남부 흑인 목회자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외조부는 모두 침례교 전도사였고, 따라서 기독교 집안의 특성상 그의 유년시절은 매우 성실하고 화목하고 평화로운, 한마디로 기독교의 이상인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유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상황은 흑백분리제도에 의해 흑인들이 차별과 억압과 분리를 당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마틴 루터 킹은 어린 시절부터 많은 인종차별을 경험하면서 성장하였다. 한때 친하게 지냈던 백인 아이와의 흑백 분리 로 인한 갑작스러운 이별,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또 그를 주라 고백하는 기독교인은 대의를 위하여 스스로 당하는 고통을 감수하여야한다고 역설하고 하였다. 그리하여 킹 목사는 십자가의 고통 없이는 부활의 기쁨도 없다고 하면서 고난 없이는 자유도 얻어질 수 없다고 항상 강조하였다.{) James H. Cone, MARTIN & MALCOM & AMERICA, 128.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볼 때 킹 목사의 흑인민권운동은 평화적 온건적 비폭력 저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기독교에 나타난 사랑, 평화, 정의를 기본 바탕으로 하는 민권운동은 폭력과 급진적이라기 보다는 평화와 사랑을 토대로 상대방을 아우르는 성격을 띄고 있다. 아래 글은 기독교의 가치인 사랑에 대한 킹 목사의 태도이다.아가페는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그 자신 의 이익이 아니라 그의 이웃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랑입니다.(고린도 전서 10:24) 아가페는 가진자와 못가진 자를 차별하거나 사람들이 소 유하고 있는 어떤 질적인 차이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그들 모두를 위해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 시작됩니다.운동을 이끄는 데에는 처음부터 어떤 기본적 철학이 있었습니다. 이 운 동을 이끄는 원칙은 비폭력저항, 그리고 수동적 저항 등 다양하게 말해져 왔 습니다. 그러나, 시위 첫날에 이런 표현을 어느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습니 다. 가장 자주 듣는 소리는 기독교인의 사랑 이라는 문구였습니다.{) 마틴 루터 킹,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김태복·채규철 옮김, (예찬사, 1989), 21∼22.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킹 목사가 주장하는 것은 통합주의이다. 그는 사랑의 철학을 통해 자신들을 탄압하는 백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묶으려는 통합주의의 사상을 확립하였다. 그는 정의, 사랑, 희망의 하나님을 믿었으며, 그에게 있어서 정의는 백인들이 흑인들을 평등한 존재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였으며, 이는 사랑을 통해 실현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있다. {) 마틴 루터 킹,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 클레이본 카슨 엮음/이순희 옮김, (바다출판사, 2001), 36.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은 끔찍한 것이기는 하지만 나치즘이나 파시즘, 공산주의 등의 전제주의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당시에는 사랑의 힘만으로는 여러 사회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으며 인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장폭동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워드 대학 학장인 모디카이 존슨 박사의 마하트마 간디의 일생과 사상에 대한 강연을 통해 그의 생각은 변하게 되었다.나는 간디의 명성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에 대해서 진지하게 연구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비폭력저항주의에 대한 그의 주장에 깊이 매료되었다. 특히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은 그의 바다로 향하는 소금행진 운동 과 여러 차례의 단식, 사티아그라하(satyagraha)'라는 개념이었다. 사티아(satya)는 사랑이자 진리이며, 아그라하(agraha)는 힘을 뜻한다. 따라서 사티아그라하 는 진리의 힘 또는 사랑의 힘을 의미한다. 간디의 사상을 깊이 탐구하느 과 정에서 사랑의 힘에 대한 회의는 차츰 엷어지고 사회개혁의 분야에서 사랑이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간디에 관한 책을 읽 기 전까지는 예수의 가르침이 개인적인 관계에서만 유용하다고 판단했다. 즉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밀어라 , 네 원수를 사랑하라 는 사상은 개인간 의 갈등에만 적용되는 것이며, 인종간 갈등이나 국가간 갈등에서는 보다 현 실적인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간디의 사상을 읽고 나서 이제까지의 생각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간디는 사랑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개인들간의 단순한 상호관계를 넘 어 강력하고 효과적인 대규머의 사회적 역량으로 승화시킨 최초의 인물이었 다. 간디에게 사회와 집단을 변모시킬 수 있는 강력한 도구는 바로 사랑이었 다. 간디의 사랑과 비폭력에 대한 설득력이 있는 이론 속에서 나는 지금껏 찾아 헤맸던 사회는 헌법 수정조항 14조가 발효되는 상황을 과거로 되돌리려는 남부의 인종차별 상황을 반영하는 법 적·사회적 체계의 운명이 백인세력이 아니라 흑인 운동세력의 손에 좌우된다는 새로운 변동의식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은 두 가지를 보여주었는데 하나는 흑인들의 지역공동체가 동원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저항운동이 일년 넘게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지속된 운동은 짐 크로우 체제에 대한 저항을 지역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계속하려면 흑인문화가 운동의 기반으로 작용해야 함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보이콧 운동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주의에 영향을 받아 비폭력 직접행동을 운동의 방법으로 채택하였는데 흑인이 벌이는 비폭력운동의 큰 의미 중 하나는 비폭력운동을 흑인의 주체적인 주도성과 결단으로 전개해 감으로써 백인 권력구조가 이제부터는 능동적으로 흑인 저항운동에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통합주의 정신과 비폭력주의1955년 몽고메리에서의 승차거부 운동 이전까지 흑인 저항은 즉흥적이고 산발적인 모습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런 단순한 저항으로 흑인의 지위향상, 나아가 인권과 시민권을 증진시킨다는 목표를 달성하기는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이는 사회의 구조적 거부와 필연적으로 맞부딪히기 때문이다. 경찰과 정부는 흑인 폭동을 물리력으로 제압할 수 있었고 흑인의 사회 조건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흑인 민권운동은 백인 지배 구조를 상대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상호적 성격을 지녔다. 백인을 부정하든지 아니면 백인과의 공존을 도모하든지 두 가지 중 하나인 것이다. 킹 목사의 관심은 후자의 길을 단지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목표로서, 이상으로서 선택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를 종교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설득하고자 했다. 그의 비폭력 철학은 간디와 예수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은 것이었다. 킹 목사는 간디가 방법을 제시했고 그리스도가 그 정신과 동기를 제시했다고 말하였다.{) King, Stride Toward Freedom,
요즘들어 반미 감정이 사회의 이슈가 되고 있다. 노근리 사건에서 시작된 반미 감정은 동계 올림픽때 미국의 안톤 오노 사건을 거쳐 여중생 장갑차 사고를 계기로 절정을 이루었고 이제는 반미 시위와 더불어 희생당한 효순·미선 두 여중생을 위한 추모 행진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와 함께 그동안 우리의 안보 및 여러 국제 정세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되어온 주한 미군에 대한 국민들의 시각 또한 부정적으로 변함과 동시에 주한미군의 철수까지 거론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사회 일각의 학자들과 시민 단체에서 주한미군의 부정적인 주장과 철수 주장이 봇물처럼 터지고 있다. 과연 그들의 주장대로 주한 미군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걸림돌인가?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에 진주하였던 미군은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 이후 철수했다가 1950년 북한의 남침(6,25)으로 유엔군의 일원으로 파견되어 주둔하게 된 지 반세기가 되고 있다. 주한 미군은 그동안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안보의 수호자이자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애써온 우리의 동반자였다. 주한 미군의 역할을 살펴보면 첫째, 주한미군은 지난 50년 동안 북한의 남침 억제는 물론 동북아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지대한 기여를 하여 왔다. 현재도 주한미군은 유사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의 자동개입을 보장하는 인계철선 역할을 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주한미군 전력과 첨단 장비(미 제2보병사단, F-16, A-10, U-2기 등)는 정보수집 및 조기경보 분야에서 우리 군사력을 강력히 보완해 주고 있다. 또한 막강한 미군의 증원전력과 핵우산 제공 등은 북한의 남침야욕을 저지하는 결정적 억제력을 제공하고 있다. 이와 같이 주한미군은 한반도 유사시 압도적인 전력 우위를 보장함으로써 북한의 오판을 방지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남북 정상 회담이후 전쟁 가능성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긴장 완화 조치가 없고, 일부에서는 북한의 변화에 대해서도 전술적 변화는 있으나 전략적 변화, 즉 한반도 적화 통일 노선에는 변화가 없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주한 미군의 철수는 시기 상조라 할 수 있다. 둘째, 주한미군은 평시 우리의 안보비용을 절감케 함으로써 지속적인 경제발전에도 기여하고 있다. 미군의 전쟁 예비탄(WRSA탄)과 장비, 물자, 그리고 수십 억불의 운영 유지비 등을 감안하면 미군 주둔의 기회비용은 엄청나다는 것이다. 만일 주한미군 철수가 이루어진다면 이 전력을 대체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추가적 국방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주한미군은 한 미 안보동맹관계의 상징으로서 동북아지역의 안정을 보장하고 우리의 국가전략 위상을 유지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우리의 지정학적 여건으로 볼 때 한·미 안보동맹은 주변 강대국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보장 장치이며, 통일에 이르는 과정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통일 이후에도 우리의 국가적 생존과 번영에 큰 연관을 갖게 될 것이다. 즉, 한반도 통일의 과정과 결과가 한국 주도 하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조하는 주도적 국가가 될 것이며, 주한미군은 동북아 지역에서 주변국간의 군비경쟁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함으로써 우리의 안보 부담을 경감시켜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주한 미군은 우리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며 주한 미군의 철수는 이루어 져야 한다고 하지만 아직은 시기 상조이다.현재 우리사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주한미군과 관련한 몇 가지 부정적인 주장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데 그러한 주장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럴 듯 하지만 반박의 여지가 많다. 우선 첫째, 주한 미군이 독립국인 우리의 자주권을 침해한다는 비판이 있다. 하지만 이는 법률적으로도 틀린 말이다. 주한 미군은 미국의 일방적인 요구가 아니라 1953년의 한·미 양국 간에 체결된 "한·미 상호 방위 조약"에 근거하여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것이다. 즉, 제4조에 "상호 합의에 의하여 결정된 바에 따라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주변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용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주한 미군의 주둔이 우리의 국익에 대한 우리 정부의 주권적인 결정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의미한다. 주권국가의 영토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경우는 선진국에서도 얼마든지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독일의 경우 냉전시기에는 물론 통일이 이루어진 현재에도 미군 7만여 명을 비롯하여 영국군, 프랑스군, 벨기에군 등이 주둔하고 있으며, 국에도 아직까지 미군 만여 명이 주둔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각국의 안보적 이해와 필요에 따른 결정인 것이다. 또한 주한 미군은 미국 일방의 국익이 아니라 한·미 양국의 국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이러한 공동 이익 관계는 우리의 안보상황과 지정학적 특수성으로 볼 때 현재는 물론, 통일 이후에도 상당 기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둘째, 우리 군의 작전 통제권을 미군 장성인 한·미 연합사령관이 행사하는 것은 불평등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동맹국간의 군사협력 방법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로 말미암은 것이다. 예를 들어 전형적인 동맹군이라고 할 수 있는 NATO의 경우 유럽동맹군사령관(SACEUR : Supreme Allied Commander Europe)은 미군장성이, 대서양동맹군사령관(SACLANT : Supreme Allied Commander Atlantic)은 미국 해군제독이 임명되어 있으나, 서북부동맹군사령관(CINC Northwest : Allied Commander in Chief, Northwest)은 영국군 장성이 임명되어 있다. NATO 회원국들이 각 국의 전력 제공 규모 등을 감안, 이와 같은 작전통제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군사적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으로써 한·미 양국도 이와 같은 논리에 따른 한·미 연합군을 구성, 연합사령관에게 통합적인 작전통제권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특히 유념할 사실은 작전 통제권을 미군 장성인 연합사령관이 독자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한·미 국가통수 및 군사지휘기구(NCMA)의 지시를 받아 행사한다는 점이다. 셋째, 주한미군 주둔에 따른 기지 사용과 행정협정에 관련된 문제다. 주한미군의 주둔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안보이익에는 일정한 비용이 수반되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 미국은 주한미군의 운영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대부분 부담하고 있지만 우리도 접수국(Host Nation)으로서 미군기지를 제공하고 그밖에 미군 주둔비용의 일부를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수준의 조치는 일본이나 독일 등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나라들에서도 동일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우리가 군대를 외국에 파견하는 경우에 상대국에 요구하는 조건들과 대동소이한 것들이다. 주한미군이 범죄행위를 저지르더라도 우리의 사법권에서 벗어나 처벌을 받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현행 “주둔군 지위협정” 즉 SOFA(Status of Forces Agreement)에서는 미군 상호간의 범죄와 공무 중에 발생한 사건 외에는 모든 미군 범죄에 대해 우리 사법당국이 재판권을 행사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물론 현행 SOFA에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미군 피의자의 형이 확정될 때까지 그 신병이 우리측에 인계되지 않고 있는 점이다. 이의 개선을 위해 우리 정부는 계속 노력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우리 정부는 여타 국가들의 SOFA와 비교하여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은 개정하도록 노력해 나가야 한다.
..PAGE:1엘 알라메인 전투..PAGE:21.개요 및 배경2.전쟁 / 작전계획3.경과4.분석 / 교훈5.질의 / 응답순 서..PAGE:3개요 및 배경북아프리카 전황북아프리카와 중동의 가치이탈리아의 이집트 침공독일의 롬멜 파견(2개 기갑사단)제2차 워싱턴 회담 개최몽고메리 제8군 사령관에 취임작전계획 변경 (철수->고수)혹독한 훈련, 군기 및 사기 진작(자신감 획득)기갑예비군단 편성 (미국 셔먼전차)공지합동작전..PAGE:4알람할파 전투(보급전의 양상)지뢰지대와 탄막으로대비독일군 연료부족..PAGE:5작전 / 계획영국군의 작전 계획주공 : 북방 제30군단, 제10기갑군단(지원)조공 : 남방 제13군단, 영국군 기만책 사용독일군 지뢰 지대 돌파(월광이 밝은 야간에 공격)보급지원의 특이성병력의 우세(병력수,전차,화력등에서 독일군의 2배)..PAGE:6..PAGE:7몽고메리의 단계적 공격 계획중령급 이상 전 장교에게 교육..PAGE:8알람할파전 이후 수비태세보급의 절대적 부족제해,제공권 상실병참선 신장의 아이러니히틀러의 관심 소홀롬멜의 부재독일군의 상황..PAGE:9작전 경과1942,10,23,21;40기습준비포격(탄막사격)영국공군의 공습지뢰지대개척(Break-in)..PAGE:102단계작전(Dogfight)롬멜 복귀영국의 전선 확장(병목현상 개선)독일 21기갑사단북쪽 이동..PAGE:113단계작전(Break-out)영국군 주공세를 8Km 남쪽으로 이동뉴질랜드2사단..PAGE:12뉴질랜드 2사단제15기갑사단독일군 영국군 공격 봉쇄성공(큰 피해 남은 전차 35대)최종공세..PAGE:13롬멜의 철수롬멜은 패배를 자인히틀러의 현지고수 명령11,4 영국군 키드니 언덕돌파 성공롬멜 퇴각 명령..PAGE:14..PAGE:15몽고메리의 추격과 롬멜의 철수
호주제의 정확한 인식을 통한 호주제 문제해결(폐지)목 차◈한국의 호주제도◎우리나라의 호주제◎호주제는 우리나라의 전통이 아니다.◈식민주의와 호주제◎호주제의 도입(침략자 일본 -> 식민지 한국)◎일본의 메이지 유신하의 이에제도◎일본의 이에 논리가 한국에 도입된 잘못된 병합과정과 그것의 고착(1)일본의 호주와 조선의 가계계승자의 차이(2) 호주제의 한국 고착◈호주제의 문제점과 그것의 폐지◎호주제가 전통으로 회자되는 이유◎을 강화하는 현재 조건◎호주제의 문제점과 폐지의 근거◎맺음말◈한국의 호주제도◎우리나라의 호주제'호적'이란 '사람의 신분관계나 그 변동을 공증, 기록하는 공문서'이다. 다른 말로는 국가가 국민을 파악하기 위한 행정문서인 셈이다. 더 자세히 말한다면 나에 대한 증명만 해주는 역할만 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호적법은 우선 '호주'라는 존재를 상정해놓고 있다. 호주로 하여금 호적상에만 존재하는 형식적 개념인 '가(家)'를 대표하게 하고, 가족 구성원을 통솔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부여함으로써 가족관계를 종적이며 권위주의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동시에 호주의 지위를 장남에게 이어주는 제도를 통해 남성 우월의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는 전형적인 가부장제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즉, 다른 말로표현하자면 개인의 신분관계를 표시하기 위해 그 개인이 중심에서야 할 호적에서, 정작 당사자는 '호주'의 변두리로 밀려나 호주와의 관계로 자신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호주제는 우리나라의 전통이 아니다.호주제는 일반인들에게 쉽사리 우리나라 고유의 가족제적 전통 으로 인식되고있고 그것이 존속되도록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조금만 살펴보고 철저한 고증을 통해 보면 그것은 우리의 전통이 아니라 일제시대의 민법 차용과정에서 이식된 제도이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식민지의 영향과 한국의 전통사이에 일어난 기이한 상호작용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례이기도 하다.◈식민주의와 호주제도◎호주제도의 도입(침략자 일본 ->식민지 한국)한국의 현재 호주제도는 민법전에 속하는 가족법령도 아닌 조선 총독의 명령으로 제정된 법률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선민사령 제11조는 조선인의 친족상속 영역에 관하여 특별한 법령이 없는 한 관습에 의거한다. 라고 규정함으로써 우리의 관습 원칙에 의한 가족법을 무시하고 일본 민법전의 내용을 적용도 아닌 차용의 형식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체계적인 법령이 아니라 정책적 편의에 따라 그때그때 필요한 조문을 빌려 쓰는 형식을 썼으니 식민지 조선의 가족법규는 그야말로 비체계적인 규칙들의 부정형의 집합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호적법의 강화를 살펴보면, 1915년 식민지 정부는 실제 거주 단위로서 가족을 기록하고 있었던 종전의 인구조사(실제 거주상태 파악)를 폐지하고 이와 무관한 추상적인 가(家) 의 개념을 도입했다. 이로써 결혼,출생, 사망, 양자, 파양, 분가, 부흥가등 가족 사항의 모든 변동을 호적관계 사무소에 보고하고 호적에 그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인정받게 하는 등록주의적 호적제도가 강화되었다. 한마디로 국가가 승인하는 가족생활의 방식만을 허용한다는 통제효과를 가진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 국가와 조직적, 이념적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인에게 호적은 그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유일한 문서이자 제도였다. 그리고 일본식 가족제도의 한국 이입은 가족제도의 이식이라는 측면뿐 아니라 일제와의 사회적, 행정적, 국가적 통합을 위한 정책이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일본의 메이지 유신하의 이에제도일본에서 가부장적 호주제도를 봉건사회의 잔재라고 쉽게 일컫지만 일본의 이에(家) 제도는 메이지 정권하에 단행된 일본식 근대화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에제도는 일본의 오랜 전통 이 아니라 일본 주민 중 극히 소수만을 점하는 무사계습, 즉 사무라이 가족을 모형으로 하는것이다. 이는 그것이 민법으로 확립되기 전에는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몰랐던 것들이었던 것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것은 근대화를 위해 입법자들이 자신들의 이념을 반영하여 구민법을 만들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이에제도안에 있는 개별 가족은 국가의 살아있는 세포이면서 동시에 국가는 이에의 확대된 형태라는 것이다. 이러한 배열에서 호주는 천황과 백성을 이어주는 연결점에 해당한다. 호주는 가족 내 문제의 책임자이면서 동시에 가족을 대표하는 남성 성인으로서 국가와 교류할 수 있는 일종의 시민의 지위를 갖는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보호와 복종의 상호교환, 천황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 같은 정신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에제도를 통하여 일본의 전 국민이 호주에 의해 편제된 가족으로 조직되었으며, 개개의 가족은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가족으로서 등록되었다. 이 과정은 이전에는 씨를 갖지 못하던 대다수의 평민이 씨를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전 주민이 국가가 승인하는 문서에 등록됨으로써 천황을 정점으로 한 가족 국가가 건설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 제도가 조선에서 실시될 때는 식민지 주민을 천황의 보호 안으로 통합시키는 이념적·행정적 제도로서 기능하게된 것이다. 즉, 일제가 도입한 호주 제도는 처음부터 식민지 지배를 위한 관심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일본의 이에 논리가 한국에 도입된 잘못된 병합과정과 그것의 고착(1) 일본의 호주와 조선의 가계계승자의 차이일본은 이에 제도의 틀을 한국에 이식하면서 조선의 관습 에서 호주 과 대응되는 것을 찾았는데 바로 가계계승자 였다. 조선 시대 가족 제도의 종자, 종손, 승중의 지위가 이에의 호주 지위의 관점에서 해석되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호주 와 가계계승자 사이에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다. 첫째, 가계계승자 가 갖는 권위의 원천은 조상집단에 있었던 반면 호주 는 국가가 승인한 서류상의 지위라는 점에서 국가가 인정하는 가부장권이며 국가에 그 권위의 원천이 있던 지위이다. 둘째, 따라서 가계계승자를 조상의 우두머리 로 보는 것은 틀렸다. 그것은 친척집단의 대표자로서 위치 지어졌다. 그러나 호주는 국가가 인정한 호적상의 지위를 기반으로 가족에 대한 우두머리 로서 존재한다. 셋째, 가계계승자의 역도 있었다. 다섯째, 좀더 궁극적으로 이러한 차이들은 조선과 일본이 상이한 가족원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로 수렴된다. 규모면에서 한국은 문중이라는 다섯 대 위의 조상(고조부모)을 공유하는 친척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호주로 편제되는 가족보다 규모가 훨씬 크며 봉사자의 필요성도 다섯 세대의 지도에서 본 본가의 계승 문제로 압축될 수 있었다.(2)호주제의 한국 고착폐적이란 법적으로 장자, 차자 등의 순위에 따라 호주계승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현재의 호주가 그 부적합성-무능력하다거나 현 호주에게 불손하다는 등-을 이유로 계승자의 지위를 박탈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한다. 이 제도는 호주의 권위를 한층 강화하기도 했지만 호주결정에 융통성을 주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인정되는 폐적제도가 한국에서 허용되지 않았다. 이유인즉, 식민지 한국에서 일본 이에 제도의 호주가 조선시대의 부계계승 원리에 의해 사고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가족원리가 현재 일본의 이에 원리에 의해 사고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조선의 관습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 채 조선의 관습 을 모두 한 덩어리로 본 것은 조선시대를 정태적이고 일차원적인 시간으로 동결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조선의 관습을 확정한 결과 식민지 조선에서는 호주계승의 금지, 포기, 선택이 모두 불가능해졌다. 이로써 조선의 호주제도는 일본에서보다 한층 더 철저하고 예외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이에 제도는 호주제도뿐 아니라 양자, 성씨, 결혼, 재산상속 같은 여러 가족제도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서양자제도나 폐적제도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에서 호주 선정의 방식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무궁무진하였다. 즉 현 호주의 평가에 따라 가족 안과 바깥에서 적당한 인물을 선정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일본 이에 제도의 호주란 재산상속제도, 양자제도, 여성의 지위, 씨제도 같은 여타 가족 제도와의 연결선상에 존재하며 여기에는 일본의 역사적·문화적 맥락호주제 라고 일컬어지는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유기적으로 통합된 일본의 가족문화는 약하게 수입되면서 국가에 의한 인정된 호주 라는 지위가 부각되었는데 이것은 다시 대를 잇고 집안을 대표하는 조선의 관습적 가계계승자 논리에 의해 해석되면서 오히려 일본보다 더욱 강하고 경직된 법칙성을 획득했던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의 가부장제를 한국의 일본문화의 선택적 친화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잘못되었다. 첫째, 무엇보다 호주제는 한국의 자율적 의도가 아닌 일제의 식민지 지배의 영향이 너무 컸다. 둘째, 식민지 지배 당시의 한국의 토착세력의 성격이다. 이는 즉 일본의 정치 지배세력과 한국의 토착세력이 가부장제라는 공통 분모라는 점에서 쉽게 담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특정한 남성주체들이 계속 정치의 주체로 대체되면서 가부장제는 이미 성찰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한마디로 어떤 제도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되면 그것이 잘못되었건 잘되었건 간에 그대로 지속시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호주제는 우리의 주체적 노력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조선 관습의 화석화와 일본 이에제도의 절름발이화가 빚어낸 산물이라 할 수 있다.◈호주제의 문제점과 그 이유◎호주제가 전통으로 회자되는 이유이런 호주제가 한국 가족의 전통으로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는 이유는 앞에서 밝혔듯이 첫째는 호주제 존속을 주장하는 전통론자들이 어떻게 호주제가 전통이 되는지 역사적으로 논리적으로 따지지 않고 주장만 하는데 있다. 둘째, 전통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 오래 전부터 아무 이상이 없고, 또한 지배계층의 아무런 문제시가 없다면 그대로 옳다고 생각하는데 있다. 셋째, 호주제에 대한 일반인들의 무관심과 무지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호주제에 문제점이 있고 옳지 못하다는 점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전통으로 회자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다섯째, 가장 큰 이유로는 사회의 기득권 층이 그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있고, 일반적으로 사람들도 그것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 자신에게 어느 정도 이익도 있고 아무런 이
기동전이란 무엇인가?평소 수업시간에 집중, 기습, 기동 등 여러 원리에 대해서 배웠다. 그런데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들은 교제에 짧게 간단히 요약해서 나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구체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 이번 군사 과제 기동전이란 무엇인가 는 나의 그런 불만을 조금이나마 해결해 주었다. 군인이 될 사람으로서 그리고 군의 엘리트인 사관생도로서 적어도 나의 전문 분야라고 할 수 있는 군사분야에서는 어느정도 식견을 쌓아야하지 않을까? 이번 독후감을 계기로 나는 하나의 결심을 하게되었다. 이번 독후감을 끝으로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한달에 한권 적어도 두달에 한권 정도의 군사관련 서적을 구입하기로...기동전이란 무엇인가를 내 나름의 방식으로 요약해 보았다.◎4F 원리의 형성(Find, Fix, Fight, Finish)● 풀러 의 3F원리풀러는 그의 저서 Lectures on F.S.R. Ⅲ에서 전투의 원리는 무기 위력이 어떻게 변화되든지 간에 그것에 따라 변화되는 않는다. 따라서 어떤 무기가 사용될지라도 적은 발견되어야하고(find), 견제되어야 하며(hold), 공격되어야 한다(hit) 라고 하였다. 이는 공·방자간에 공히 적용되는 원리로서 방자는 최선을 다하여 발견되지 않도록, 견제되지 않도록, 그리고 공격받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풀러는 그의 저서 Warfare Today에서 모든 전투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군의 의지를 적에게 강요하는 것으로서 해상이든, 공중이든, 육상이든 간을 막론하고, 아군은 마비(demoralize), 와해(disorganize), 파괴(destory)됨이 없이 적을 마비, 와해, 파괴하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전투의 기본요소는 엄호(guarding), 기동(moving), 타격(hitting) 이라고 하였다. 풀러는 두 저서에서 주장한 각각 다른 단어의 세 가지 요소는 같은 뜻으로서 Find, Guarding'은 Find로, Hold, Moving'은 Fix로, Hit, Hitting'은 Fi 이길 수 없게 되었음을 알리는 것으로 결정적 일격으로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종전의 방식이 통하지 못하게 됨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전투의 결과를 종합하고 발전시키는 용병술인 작전술이 발전하게 되었다. 핵심 개념은 전투의 결과를 발전시키는 것이요. 전투와 전쟁을 연결시키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용병술의 체계가 전술, 작전술, 전략 의 삼분법적 체계로 발전되었다. 즉, 3F의 마지막 원리인 'Fight'기능은 좀더 세분화되어 전투적 성격의 Fight 기능과, 작전 전략적 성격의 Finish가 되었다.●기계화 부대의 담당 기능기계화부대는 4F의 원리 중 Find, Fight, Finish 기능을 주로 담당하며 비기계화 부대는 Fix, Fight 기능을 담당한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기계화 부대와 비기계화 부대의 Fight 기능이다. 기계화 부대의 Fight 기능은 작전적 수준이고 비기계화 부대의 Fight 기능은 전술적 수준의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1)기계화 부대가 화력보다는 기동 속도로 전투를 하는 부대, (2)적을 분쇄하기보다는 마비 와해시키는 부대, (3)전술적 차원보다는 적전 전략적 차원에서 운용되는 부대라는 본질적인 기능의 차이 때문이다. 즉 같은 5분의 시간이라도 일반 도보 부대에게는 거의 의미가 없지만 기계화 부대에게는 1~2마일의 의미를 같기 때문이다. 기계화 부대는 적을 물리적으로 파괴하거나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로 정신적으로 마비시키고 조직을 와해하여 적을 굴복시킨다.●기계화 부대의 특성기계화 부대는 전술적 차원에서보다는 적전 전략적 차원에서 운용되는 특성을 가진 부대이다. 모든 공격 전투의 진행은 일단 적의 전술적인 방어 종심에서 취약점을 탐색하여 집중공격, 간격을 형성한 후 그 간격을 통해 작전적 종심으로 돌파구를 확장 발전시키고, 전술적 성과를 확대시켜 적에게 궁극적인 타격을 주는 과정을 거친다. 기계화 부대는 이러한 일견의 절차 중에서 주로 작전적 수준 이상을 담당한다. 이것은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기계화부대가 고 전쟁에서 부터일까? 이에 대한 답은 나폴레옹 전쟁 이라고 할 수 있다. 나폴레옹은 당시까지의 용병중심의 군대를 탈피시켜 국민군을 편성하였고, 보급품을 경량화하여 군대의 기동성을 대폭 향상시켰으며, 포병을 집중운용, 용병에 전적으로 의지하단 상대국을 격파했다. 사단편성을 실시하여 지휘의 분권화를 실시하였으며 지금까지의 호령전법 개념의 지휘체계를 명령전법 체계로 바꾸어 상대가 대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심프킨은 나폴레옹 전쟁을 현대 군사사상의 시발점으로 보고 그 이후 전쟁이론의 발전 패턴을 50년 주기로 분석하였다. 즉, 군사이론이 그 때부터 50년의 주기를 형성하면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첫번째 주기는 19C 초 나폴레옹 전쟁의 시기로서, 종전과 전혀 다른 방법 즉, 국민군 편성, 보급제도 개혁에 의한 기동력의 개선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두번째 주기는 19C 후반으로서 나폴레옹 전쟁부터 시작된 철도가 실용화되어 군의 주요 기동수단으로 역할을 하기 시작한 시기이다.세번째 주기는 20C 초반으로서 내연기관이 도입되고 지상군에 전차 및 항공기가 도입되어 군이 전면적으로 기계화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근력 전쟁 -> 기계 전쟁)네번째 주기는 20C 후반으로서 "rotary wing"에 의한 기동혁명에 직면한 시기이다. 이제 기동은 지상의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되었으며 전쟁에서 기술적 요소가 극도로 중시되는 새로운 양상의 전쟁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다.●기계화이론의 효시기계화전 이론은 제 3주기의 산물이다. 산업혁명의 결과를 수용한 군은 전쟁에서의 기동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할 수 있었다. 여기에 제 1차 세계대전의 교착된 전선 상황은 전차의 군내 도입을 촉진시켰으며 풀러 , 리델하트 등의 기계화전 이론가 배출을 촉진시켰다. 기계화전 이론의 창시자인 풀러는 중형 D전차의 속도와 기동성이 공격작전에 미치는 영향에서 기계회된 군을 운용할 아이디어를 최초로 제시한다. 이 이론의 핵심 내용은 빠른 기동을 통해 적 전부를 물리적인 격멸하는것이 아닌 중요 사령부(중추 신경)개념이며, 나아가 장교단이 평생을 두고 수련해야 할 중요한 용병술이다.△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원리를 단순화시켜 보면 결국 전쟁이란 2명의 레슬러간의 결투행위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순수한 원리로 보았을 때, 전쟁은 나의 의지를 적에게 강요하기 위한 하나의 무력행사 라고 정의할 수밖에 없다고 볼 수 있다.△한국군의 작전요무령에는 기동을 결정적 시간과 장소에 집중하는 수단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기동은 전투력의 필수요소로서 결정적인 시간과 장소에 우세한 전투력을 집중하여 상대적으로 전투를 아군에게 유리하게 하고 유리한 입장에서 적에게 충격을 가하는 것이다. 기동의 개념은 단순한 부대의 거리상의 이동에서 용병술, 전략의 주수단, 나아가서는 종심전투의 수단으로까지 범위가 확대되었다.●기동전기동전이라는 것은 기동이 결정적으로 승패를 좌우하는 전쟁, 즉 적의 장비 및 인원과 직접적으로 부딪쳐서 화력을 교환하는 전투보다는 그 이전에 이러한 전투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재기 위하여 기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전쟁을 말한다. 이러한 기동전에서 화력은 기동을 촉진시키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야 한다. 즉 적의 인원 및 장비를 섬멸시켜 적의 의지를 박탈하게 하는 클라우제비츠의 절대전 개념의 화력운용이 아니라 fire and maneuver' 개념으로 적을 고착시켜 아군의 전투부대가 행동의 자유를 획득하여 원하는 방향으로 지휘관의 의도에 따라 기동할 수 있도록 하고 또한 적을 제압할 수 있도록 운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동전의 특징에는 첫째, 정신적인 패배추구 둘째, 적의 중추부를 작전목표로 세움 셋째 비선형의 전선 형성 넷째, 단기 속결전 추구이다. 기동전의 원리는 부대지휘의 판단 및 결심주기를 신속히 하는 것 이다. 그러니까 기동전은 전장에서 적보다 먼저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기동전을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다음의 세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분권화 통제 둘째, 차진 정찰대 운용 셋째이었다. 특히 기동전의 사도들이 주창한 마비 와해를 통한 승리 추구라는 사상에 맞는 기동의 의미는 이보다 더 확장되어야한다. 즉 기도의 정의에 종심지역으로 기동, 결정적 목표를 타격하여 결정적인 성과를 획득하는 개념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동은 다음과 같이 그 개념을 확대하여 적극적으로 정의되어야한다.△기동은 전투력을 신속하고 조직적으로 전환하고 적보다 유리한 위치에 가져다 놓고, 중요목표를 탈취하기 위하여 종심으로 신속히 전진하는 것이다. 그 결과 기동은 전투력의 열세를 보충하며, 주도권을 장악하고, 적을 마비, 와해시켜 결정적 성과를 이루게 된다.●기동의 성격심프킨은 그의 높은 식견을 바탕으로 비교적 간다하게 기동의 실체를 나타내고 있다.첫째, 기동을 용병술 차원별로 정의하는 문제이다.둘째, 전사상의 기동이 갖는 위치이다.셋째, 기동 그 자체 즉, 기계적 원리 측면에서 갖는 기동성의 물리적 실체성이다.△기동대형에는 그것의 위력을 발휘하는 4가지 물리적힘있다.첫째, 종심기동시 취하는 종대대형은 반전개로 미는 힘을 발휘한다.둘째, 본대 그 자체는 잠재적인 힘을 자진다.셋째, 종대대형의 속도가 물리적 힘이다.넷째, 모멘트 혹은 속도 방향전환에 대한 저항으로 이는 속도와 질량에 비례한다. 이러한 종심기동의 4가지 요소는 4가지 특성을 가진다. 이것은 전투력의 발생범위, 잠재적힘의 발휘 조건, 모멘트의 예측성, 역동적 힘의 정지방법 측면이다.첫째 전투력의 발생 범위는 전술적 공간으로 제한된다.둘째, 잠재적 힘의 발휘 조건은 본대의 전력 발휘조건이다.셋째, 모멘텀의 예측성이다.넷째, 역동적 힘의 저지는 강력한 화력 집중과 역방향으로의 짧고 강력한 타격 이라는 방법으로 가능하다.△작전적 종심은 기동성 발휘의 주공간으로 돌파구가 확대되고, 전과확대 및 추격을 하는 곳이다. 작전적 종심으로 들어가면 점차적으로 내선이 확장되고 공자는 행동의 자유를 확보하면서 더욱 견고하게 유지하면서 방자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할 수 있다. 작전적 기동성의 힘은 지렛대의 원리로 발휘된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