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고도성장기의 변화 양상들』1. 가족생활의 변화고도성장기를 통해 사회의 기초단위인 가족의 형태와 역할도 변하고 있었다. 부부 또는 부부와 자녀로 구성되는 핵가족은 1955년의 59.6%에서 1970년의 63.4%로 약간의 증가에 그쳤지만, 전전(戰前)의 일본처럼 결혼한 장남이 부모와 동거하면서 대가족을 구성하는 형태는 줄어들었다. 결혼해도 부모와 동거하지 않고 핵가족 형태를 유지하는 경우가 증가해, 그 이면에 소외된 노인의 생활문제가 심각해졌다.또 도시를 중심으로 독신세대가 늘어, 1955년의 3.4%에서 1970년에는 10.8%로 증가했다. 도쿄에서는 기숙사, 하숙생활까지 포함한다면 전세대 중 36%가 독신생활자였다. 그리고 대가족은 1955년의 36.6%에서 1970년의 25.5%로 줄었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 가족규모는 1세대당 4.97명(1955년)에서 3.67(1970년)으로 크게 감소하였다.가족형태의 변화는 가족관계의 변화를 수반하고 있었다. 그동안 증가한 노동자가족에 있어서도 남편은 밖에서 근무하고, 아내는 가사.육아를 담당하는 성적(性的)분업이 고정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맞벌이 부부의 증가에 의해 가정내의 성적 분업이 붕괴, 평등한 부부관계를 만들려는 새로운 움직임도 시작되었다.가족과 사회의 관계에도 켜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생산수단을 가지고 생산물의 일부를 스스로 소비하는 농민가족에 비해 생산의 수단을 갖지 않는 노동자가족은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어 거주지에서는 소비적 기능만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 결과 소비의 사회적 의존도가 높아져서 인스턴트 식품, 냉동식품 등의 소모품이 가정으로 들어오고, 냉장고. 청소기 등의 가전제품 보급이 급속히 이루어졌다. 또한 가족형태가 변화하여 공동체의 상호부조기능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보육원 등 사회적 시설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아졌다.소비의 사회적 의존도가 높아진 결과 소비지출이 증대해, 가계지출 구성도 변화했다. 소비지출의 증가를 가능하게 한 것은 소비자물가 상승을 넘어서는 임금의 상승이었다. 1960년부터 1970년까지의 10년간 근로자세대의 평균지출은 2.6배의 증가를 가져왔고, 지출구성의 내용은 식료비의 비율이 낮아진 반면 내구소비재나 문화비, 교제비 등의 지출이 증가했다. 기업의 대량판매전략으로 흑백 TV, 세탁기, 냉장고 등은 1970년에 90%이상의 보급율을 나타냈고, 자동차, 칼라TV, 에어컨 등은 1968년 이후 보급되기 시작했다.도시에서 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한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여가는 내일의 활력을 얻기 위해 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소득의 증가, 노동시간의 단축에 의해 여가를 즐기려는 조건이 확대되는 가운데 레저산업은 사람들의 욕구를 자극했다. 볼링, 골프, 스키, 여행이 대중화되고 붐을 일으켰으며, 자가용시대가 도래했다. 또 추석과 정월에는 민족대이동이라고 불리우는 귀성객이 증가했고, 주말의 관광지는 단체여행자들로 혼잡을 이루었다. 가계지출 중에서 차지하는 여가관련 지출은 급격히 증가하였다.2. 사생활주의의 확대와 기업사회대량소비 생활양식의 보급과 더불어 1960년대 전반부터 생활의 기초단위로서 “사생활(마이홈)” 이 중시되었다. 아파트단지에서 생활하는 ‘단지족’을 전형으로 당시의 도시핵가족 가운데 나타난 ‘마이홈주의’는 직장의 기술혁신에 수반하는 끊임없는 경쟁, 소외에 직면한 노동자가 내구소비재를 고루 사들이고, ‘좁지만 즐거운 우리집’을 가꾸며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데서 나왔다. 그런 의미에서 ‘마이홈주의’는 무엇보다 가정을 대기업의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장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동시에 마이홈을 위해 모범사원으로 열심히 일하고, 기업을 번영시켜 임금인상을 도모하게 함으로써 소외감을 갖는 노동자를 기업사회에 보다 강하게 밀착시키는 역할도 했다. 더욱이 대기업 노동자의 경우 마이홈(사생활)은 기업내 복지정책에 의해 유지보완되었고 그런 측면에서 ‘마이홈주의’는 기업사회에 편입되어 있었다. 생산현장에서의 불만을 사생활 속으로 흡수시키고 사생활면에서의 욕구를 기업사회내에 역성적인 힘으로 투입시켜 기업은 생산성을 향상시켰다. 그러한 가운데 생산된 제품이 시장에 나와 사생활의 욕구를 한층 부추기는 구조가 형성되었던 것이다.이러한 구조를 통해 생산현장에서는 노동자로서의 계급의식보다도 사생활(마이홈)의 향유라는 소비의식이 상위에 놓여지고, 소비생활의 향상, 풍족함, 남에게 뒤지지 않는 생활이라는 조건은 쉽게 중간층 의식과 연결되어졌다. 중간층 의식은 사생활 중시의 확대와 더불어 급속히 상승했다.그러나 1960년대를 통해 높아진 노동자의 소외감은 노동의욕, 회사지향적 의식을 감퇴시켰다. 한편 노동현장에서 시민생활의 영역으로 가치를 전환시킨 노동자들 앞에서 인플레가 나타났고, 공해 등의 도시문제가 심각해져 사생활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생활은 풍족해졌으나 ‘전년에 비해 생활이 어렵게 되었다.’는 민중의 생활악화의식은 매년 증대했다. 또 공해의 확대는 ‘소비의 미덕’이라는 의식에 의문을 제기하였다.더욱이 마이홈주의의 본래 근거인 주택보유 상황에 있어서도 보유율은 1960년대에 더욱 낮아지고 있었다. 마이홈의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현실에서는 가정에 충실할 여유를 갖지 못하는 ‘일벌’과 같은 노동자의 부인들은 남편들과 거리감이 넓어져 갔다.이리하여 마이홈주의가 위기에 직면하는 가운데, 마이홈주의적인 것과 성격을 달리하는 ‘생활방위로서의 사생활주의’가 등장했다. 그것은 비록 사생활에 가치를 두는 점에서는 마이홈주의와 같았으나, 사생활을 둘러싼 어려운 상황에 대한 능동적 대응 , ‘사생활 방위’라는 행동을 한다는 측면에서 다른 특징을 갖고 있었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기에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던 주민운동은 새로운 ‘생활방위로서의 사생활주의’를 반영한 것이었다.이러한 사생활주의는 기업과 노동조합이라는 2중의 귀속의식에서 이탈하게 하면서, 이제까지의 정당지지의 움직임에서도 벗어나게 만들었다. 따라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하여 ‘지지정당을 갖지 않는 층’ 이 탄생되었다. 이 계층은 이제까지의 정치적 무관심과 달리 정치적 관심을 갖고 있었다. 정치적 관심은 사생활의 방위에서 시작되며, 자민당정치에 비판적이면서도 기본적으로는 보수적(사생활의 보수)이었고, 또 사생활이 위기에 직면한 이 시기에는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해 혁신세력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혁신자치단체의 시대를 가져온 1971년 지방선거의 결과는 이러한 동향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고도성장하에서의 사생활주의는 국정에서도 ‘평화와 민주주의’의 사생활화, 사생활을 위한 평화지향으로 나타났다. 헌법 제9조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그동안 높은 비율로 유지되어 온 것은 그것의 반영이었다. 그렇지만 이 경향은 주로 군사화에 대한 ‘사생활보수주의’적 대응이며, 군사화의 배우에 있는 미. 일 안보조약 그 자체를 문제로 삼는 세력은 국민의 다수파를 형성하지 못했다. 1960년대에는 미. 일 안보조약에 대한 찬성. 반대가 다 같이 확대되었으나, 찬성하는 측이 반대하는 측을 넘어서는 경향이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