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 1≫【이승만 대통령의 생애 및 통치에 대한 평가】Ⅰ. 서론Ⅱ. 이승만 박사 - 미국에서의 생활1. 이승만의 사상과 변화 - 삶의 궤적2. 미국 망명에서의 외교독립운동3. 망명생활에서의 특징과 환국과정Ⅲ. 이승만 대통령의 등장배경 및 대미관계에 끼친 영향1. 미군정의 정치적 입장2. 귀국 후의 이승만 대통령의 태도 및 한반도 정세3. 이승만 대통령의 통일노선4. 이승만 대통령의 통치정책과 문제점Ⅳ. 이승만 대통령의 역사적 평가≪목 차 - 2≫【박정희 대통령의 생애 및 통치에 대한 평가】Ⅰ. 서론Ⅱ. 박정희 대통령의 생애와 통치체제1. 대통령 이전의 박정희2. 박정희 정권 - 군정의 시작3. 국가의 비약적 발전을 도모 - 제 3 공화국4. 피로 물들인 유신정권Ⅲ. 박정희 정권의 등장배경1. 정치 ? 사회적 배경2. 박정희 군사 쿠데타 - 미국의 입장3. 박정희 군사 쿠데타 - 국민들의 입장Ⅳ. 박정희 정권1. 군부 권위주의 정권인 제 3 공화국(1) 제 3 공화국의 시작(2) 제 3 공화국의 주요시책(3) 제 3 공화국 당시 국내에 끼친 영향2. 민주주의를 사장(死藏)시킨 10월 유신체제(1) 10월 유신(2) 10월 유신의 과정 및 특징Ⅴ.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정책1.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정책 내용(1) 경제개발계획(2) 중화학 공업 정책 및 새마을 운동2.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관과 경제정책의 문제점Ⅵ. 박정희 대통령의 통일정책Ⅶ.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이승만 대통령의 생애 및 통치에 대한 평가】Ⅰ. 서론애국과 독재의 양면을 넘나드는 우남 이승만은 우리 근 ?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이승만에 대한 시비는 오늘날에도 매우 엇갈려있으며, 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결코 쉽지 않은 듯 하다. 이승만을 탁월한 애국적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한편,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권위주의자이며, 오늘의 한민족과 한반도의 운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문제의 독재자라고 혹평하는 사람도 많다. 이제 우리는 역사 속으로 들어가 우남 이승만을 들을 이롭게 할 뿐이라는 엉뚱한 주장을 하여 중국의 외교부장 송자문(宋子文)으로 하여금 루즈벨트에게 "한국인은 너무 분열도가 심해 효과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보고를 하게 한 바 있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으로 당시 임시정부가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고 임시정부를 연합국의 한나라로 인정받도록 이승만으로 하여금 미 국무성에 교섭케 했으나 미 국무성이 이승만의 의견의 듣지 않으려고 하여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전쟁이 막바지에 달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 창립준비가 연합국 사이에서 시작되자 이곳에 많은 한국인 지도자들이 독립 문제를 협의코자 모여들었다.그러나 이들 사이에서는 벌써 장차 독립 한국정부를 공산주의자와 연립하여 세울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정부 요직을 줄 수 없다고 주장하여 독립도 하기 전에 벌써 자리다툼을 하는듯한 인상을 샌프란시스코에 와 있는 외국지도자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참 정치적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8?15 직후 서울은 좌익의 장악 속에 있었고 미군 당국은 이들 좌익과 대항하기 위해서 반공으로 이름난 이승만이 필요해진 것이다.그래서 미국에서 발화, 갈등이 많아 귀찮게 여기었던 이승만을 맥아더 장군의 지시에 따라 갑자기 한국 민족의 영웅으로 대접하게 되어 이승만은 거의 힘 안 들이고 민족의 지도자로서 민중 앞에 군림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그는 미극동정책의 필요에 따라 한국 민족의 영웅으로 환국하게 된 것이다. 36년간 식민통치하에 신음하는 국내 민중과 사실상 연락이나 유대가 없었고 따라서 일반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영웅으로 추대되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승만의 행운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유리한 여건 속에서 이승만의 환국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Ⅲ. 이승만 대통령의 등장배경 및 대미관계에 끼친 영향1. 미군정의 정치적 입장1945년 9월 8일 한국에 진주한 미주둔군, 즉 미군정은 다음해인 1946년 초까지 서을 등경의 맥아더 원수에게 전하고 이 반탁성명서를 다른 관계국에 전달해줄 것을 요구했다. 한편 좌익에서는 하지 중장이 우익의 반탁운동을 선동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처음 한때는 신탁통치는 전적으로 소련의 주장에 의해 합의된 것이라는 설이 떠돌았다. 『한민당특보』(1946. 1. 10)는 일면 톱으로 "소련은 신탁을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고 발표했고 이승만측의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도 발표한 결의문에서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 번즈 국무장관, 맥아더 원수, 하지 중장은 모두 한국의 즉각 독립을 주장하고 신탁을 반대하고 있으나 국무성 안의 일부 용공분자들이 소련에 동조하여 신탁을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하여간 우익진영에서는 이 반탁운동을 통해 전면적인 반공?반소운동을 벌였으며 이로써 우익진영에서는 처음으로 자기들의 정치목적을 위해 대중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1946년 1월 하순,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한국문제 결정을 놓고 중대 위기에 빠졌다. 그것은 국내의 반탁운동만이 아니라 트루만 대통령 자신이 삼상회의 결정에 불만이었기 때문이었다. 트루만 대통령은 앞으로 한국에 강력한 중앙정부를 수립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 중장과 그의 보좌관들도 한국문제에 있어 소련과 공동으로 신탁통치를 하거나 또는 다른 문제에 있어 협조가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도 진주 초기부터 일방적으로 남한을 친미기지로 굳히는 일을 서둘렀다. 하지 중장의 한국문제 해결책이란 이승만과 같이 분단정부를 세우는 일이었다.이승만은 소련이 전한반도를 손안에 넣을 기회가 보이지 않는다면 결코 38선을 철폐할 의도가 없다고 믿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소련이 남한에 발을 붙이게 되면 그것은 결국 소련에 남한 전역을 넘겨주는 결과가 올 것이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리고 만약 신탁을 받아들인다면 소련과 공산당이 전 한국을 쉽게 지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그는 소련과의 협상이나 좌익과의 연립정부가 결코 한국의 자주독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하다가 실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유엔 위원단이 오기 전에 이박사를 붙들고 그의 번의를 위하여 마지막 정성을 다하려고 합니다”이승만과 김구의 노선이 서로 어떻게 다르고 그들이 서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가가 여기에 잘 나타나 있다.유엔 한국위원단은 1948년 1월 12일에 한국에 도착하여 활동을 개시했다. 그들은 좌우익의 지도급 인사들을 만나려고 했으나 좌익은 이미 거의 지하에 잠입해 만날 수 없었고 이승만? 김구 등이 그들과 만나 각각 의견을 교환하고 위원단에 의견서도 제출했다.이승만이 제출한 의견서는 “남한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하루 빨리 세워 한반도의 평화를 찾아야한다” 라는 것이고, 반면 김구는 의견서에서 “남북한 총선거로 통일자주정부를 세워야 하며, 미소군이 철수한 상황에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 라고 주장했다. 소련군뿐 아니라 미군까지도 철수해야 한다는 김구의 주장은 미국의 영향력에 힘입어 단정노선을 추구하고 있던 한민당 등으로부터 그것이 소련안과 무엇이 다르냐고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4. 이승만 대통령의 통치정책과 문제점유엔에서 실시하는 총선거는 그것이 남북총선거가 아니라 처음부터 남한 단선이 된다는 것은 이미 예상한 바였다. 그리고 남한 단선에 있어 치안을 담당한 경찰은 한민당의 영향 아래 있는 인사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한민당은 선거를 앞두고 인권유린을 막기 위해 유엔 위원단의 요청으로 성안된 개정 형사 소송법의 실시를 연기해줄 것을 요청했다. 경찰을 보조하기 위한 '향보단'이 전국 촌락에 조직되어 단선의 반대는 물론 선거 보이코트도 할 수 없게 엄중 감시했으며 이승만은 자기 선거구인 동대문 갑구에서 출마한 최능진을 방해해서 출마를 못하게 하고 후일 최능진을 학살하였다.마침내 미군정 3년간의 통치로부터 정권을 이양 받았으나 정치?경제 ?사회?문화는 극도로 혼란되고 부패는 만연되고 있었다.이와 같은 상황에서 정권을 이양 받은 이승만은 성안중인 농지개혁법이 한민당에 의해 지연되어 명무실하게 된 것을 방치했고 농범법혐의자의 검거 수만도 3만 5천여 건에 달하였다는 사실은 군정초기에 얼마나 철저한 구악일소작업과 강력정치가 진행되었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또한 군사정부는 국민운동본부를 설치, 생활간소화?가족계획?문맹퇴치사업을 벌이는 한편, 친선방문외교?초청 외교 등 적극외교자세를 보였다. 획기적인 경제조치의 하나로 단행된 통화개혁은 실패로 끝났다.군정 초기의 집권세력 내부에는 주류파와 비주류파의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져 일련에 반혁명사건이 꼬리를 이었다. 이 과정에서 비주류파는 완전히 거세되고 박정희 중심의 주류세력이 실권파로 정권장악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군정후반은 민정이양을 둘러싼 공방으로 전국이 소란하였다.박정희는 처음에는 2년 후에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겠다는 민정이양일정을 발표하였으나 1963년 1월부터 시작된 정치활동재개이후 야당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서는 이른바 '2?27선언'을 통하여 자신의 원대복귀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4?8조치'로 군정연장을 계획하였다가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철회하는 등 번의를 거듭하였다. 이 동안 군정은 이른바 '4대의혹사건'을 저질러 국민들로부터 '구악을 뺨치는 신악'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하였다.3. 국가의 비약적 발전을 도모 - 제 3 공화국박정희는 1963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단일후보인 윤보선을 근소한 표 차로 누르고 당선됨으로써 제3공화국의 통치권자가 되었다. 대통령 취임사를 통해 박정희는 "정치적 자주와 경제적 자립, 사회적 융화?안정을 목표로 대혁신운동을 추진함에 있어서 우리는 먼저 개개인의 정신적 혁명을 전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제3공화국은 박정희 정부가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한 작업은 경제발전과 한?일 국교 정상화였다. 박정희는 이미 군정기간인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 추진하였다. 사회경제적인 악순환을 지양하고 자립경제확립을 위한 기반구축을 목표로 한 제1차5개년 계획은 당시 후진국 가운데서는 가장 높은 국민총생산(GNP)성장률인 연평균 7.1%를 책정하였다. 그러나 계획 자체의 졸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