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고 온 연극은 셰익스피어 원작의 '베니스의 상인'이다. 베니스의 상인 같은 경우 국내에서의 상연도 꽤 여러번 될 뿐만 아니라 굉장히 유명한 연극이고 대본도 구하기 쉬웠던지라 극을 이해하는데는 별 무리가 없었고 굉장히 부담 없이 볼 수 있었다. 이야기의 내용은 간추려보면 대강 이렇다.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는 친구 바사니오의 구혼을 돕기 위하여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돈을 빌린다. 평소 안토니오와 사업상의갈등을 겪고 있던 샤일록은 돈을 갚지 못할 경우 1파운드의 살점을 도려내겠다는 조건을 제시하고, 안토니오는 한달내에 갚을 수 있다며 조건을 수락한다.한편 벨몬트에 사는 포오셔에게 각지에서 구혼자들이 몰려온다.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세 종류의 상자 중 포오셔 초상화가 들어있는 상자를 고르는 시험을 치뤄야 하지만, 많은 구혼자들은 그들의 허영심으로 잘 못된 상자를 선택한다. 샤일록의 딸 제시카는 바사니오의 친구 로렌조와 함께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고, 분노에 찬 샤일록은 기독교도들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벨몬트로 간 바사니오는 진실한 사랑의 태도를 묻는 시험에서 포오샤의 도움을 받아 결국 그녀를 얻게 된다. 그 순간 베니스로부터 안토니오의 배가 침몰하여 빚을 갚지 못하게 되고, 샤일록과의 계약에 관한 재판이 열리게 된다는 소식이 전달된다. 서둘러 재판정에 도착한 바사나오는 법으로도 안토니오를 구할 수 없음을 알게되고, 젊은 재판관은 샤일록에게 법이 지탱되는 것은 엄정한 집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베푸는데 있다고 설득을 한다. 기독교인들로부터 박해와 멸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샤일록은 법의 공정하고 엄정한 집행만을 원한다. 그때 이 재판장이 내린 판결은 살을 잘라내되 피 한방울도 흘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판결이었다.이런식으로 하여 샤일록은 안토니오의 털끝도 건드리지 못했고 살인미수죄로 재산의 반을 몰수당하고 기독교로 개종당하는 결과까지 낳게된다.재판이 종결되고 재판장으로 남장하고 있던 포오샤는 바사니오의 결혼 반지를 달라고 떼를 쓰고 난처하지만 안토니오의 생명의 은인이었던 그 재판장에게 그 반지를 주고 만다. 그 일로 벨몬트에서 포오샤와 약간의 해프닝이 생기지만 역시 웃으며 극은 내린다.우선 이 '베니스의 상인'이란 연극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간추려보면 첫 번째로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 희극의 하나로서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다른 희극들과 달리 어이없는 상황이나, 연인들간의 엇갈린 사랑 등이 없고, 사람을 판단하는 가치기준이나 법, 정의와 자비에 대한 문제 등,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사실적으로 다루어 지고 있다. 이 극에서 내가 포인트를 가지고 본 부분은 포오샤의 재판장면과 고리대금 업자 샤일록에 관한 것이다.샤일록이라는 인물을 주목해보자. 우선 이 희곡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영국에서 팽창하던 반유태적인 감정을 고취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매개체가 샤일록이란인물인 것이다. 당시 엘리자베스 여왕의 전의인 유태인 로페츠라는 사람이 스페인 국왕에게 매수되어 여왕을 독살하려다가 발각된 암살미수사건이 유태인 배척사상의 불씨가 되었다고 한다. 셰익스피어는 동시대 영국인들처럼 유태인에 대하여 대단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싶다. 그렇기 때문에 '샤일록'을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의 기독교인의 구미에 맞도록 잔혹하고 잔악한 유태인으로 형상화 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샤일록을 아직까지 그런 고전적인 악의 화신으로만 파악하기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모욕과 박해만 받아온 유태인으로서의 회한과 기독교인들을 향한 적의와 복수심으로 불타는 '샤일록'을 그저 악인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부족하다. 재판시에 샤일록이 안토니오의 '일 파운드의 살'을 떼고자 벼르는 장면에서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은 결코 복수심에 불타있는 타락한 악인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극도의 타락한 인간성을 극복한 후의 보편적 인간성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사람이 사는데 있어 남자인가, 또는 여자인가 라는 것이 과연 그렇게 중요한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남자다운 행동 여자다운 행동같은 것을 분류하는 것은 사회생활을 좀더 수월하게 좀더 질서있게 해나가기위한 일종의 규칙이라고 생각한다. 어릴때부터 여자아이는 그들의 어머니를, 남자아이는 그들의 아버지를 보고 배우며 닮아가는데, 이것을 선천적인 여자다움,남자다움의 상징으로 보기에는 억지가 있다. 흔히들 겉으로 규정하는 성정체성의 모습들은 단지 '사회화의 결과'라고 보고싶다. 보통 자연스럽게 일반인들이 규정짓는 성정체성의 모습에서 나는 비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일들을 많이 본다. 예를들면 '여성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현모양처이다' 라던가 '여자는 다소곳해야한다' 라든지 하는 굉장히 성차별적이지만 성 정체성이라고 우겨지는 인식들말이다.나는 애초부터 성정체성에 관해 이렇게 규정짓고 일반화시켜 그것을 따르게 만들려고하는 사회제도자체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알고있는 여성성,또는 남성성의 모습들은 후천적으로 사회환경에 따라 나타날 수밖에 없는 성별의 차이를 규정지은 것은 아닐까? 하지만 모두 그런 획일적인 모습을 가질수는 없는 것 아닌가?이세상에 한사람도 같은 사람은 없다. 그런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들을 육체적인 차이로 구분지어 행동양상에 대해 분류시키고 정신적인 차이를 굳이 찾아내어 그것을 공식화 시킨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내가 여자로서 살아가기에 적합한 모습이겠는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성 정체성은 이렇다. 물론 여자와 남자와의 차이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게 분류 지을만큼 차이난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예를들어 나는 여자지만 보통의 남자들이 좋아하는 게임이나 컴퓨터 분야를 좋아하고 어떨때는 남자보다 더 적극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남자지만 십자수를 즐겨할 수 도 있는것이고 조금은 내성적일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성정체성의 공식에 옮겨보자면 이런 모습들은 약간씩 어긋나는 모습들 아닐까? 여성과 남성은 육체적인 차이에서 오는 약간의 차이점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차이점에서 오는 서로의 단점이나 장점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여자가 남자보다 힘이 약하다거나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차이점이기 때문에 만약 여자가 어떤 무거운 짐을 들 수 없어서 남자에게 맡기기 전에 남자쪽에서 먼저 들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남자가 하기 힘든 어떠한 일을 여자가 하는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차이점에서 성정체성의 구별이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것을 굳이 구별 지을것이 아니라 생활속에서 그대로 그들의 특성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장단점을 커버만 해줄 수 있다면 굳이 남성 여성을 갈라서 생각치않아도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트랜스젠더에 대해 반대하는 쪽은 아니다. 물론 찬성하는쪽 까지도 아니지만 그들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을 거부하여 자신이 성을 선택한다는것에 대하여 그다지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리수를 예로 들 때 사회적 관점의 논의점 중 하나가 정말 하리수를 여자로 볼것인가 남자로 봐야할 것인가? 라는 것인데 나는 그사람이 자신을 정말 여자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또한 그냥 여자로 봐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하리수가 여자로서 부족한 점이라면 생명창조의 능력이 없다는 것 정도 아닐까? 물론 여자로서 생명을 가진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여자들도 있다. 여자로서의 필수조건까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을 완전한 여자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부정해야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성별의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다는 생각이 내 생각이다. 또한 여자로서의, 남자로서의 성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 그 개념은 좋지만 그 성정체성에 너무 얽매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