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상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수 많은 민족(民族)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또한 이 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민족적(民族的) 구심점(求心點)(흔히들 말하는 시조(始祖) 따위 - 이들은 그 나름대로의 전설(傳說) 또는 신화적(神話的)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을 가지고, 그 것을 중심으로 단결(團結)하여, 하나의 문명(文明)을 이룩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물론 나 역시 환웅(桓雄)과 웅녀(熊女)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전설(傳說)을 가지고 있는 단군(檀君)을 시조(始祖)로 모시고 있는 민족(民族)에 속하여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민족적(民族的) 자긍심(自矜心)과 민족의식(民族意識)을 배워 왔다. 이처럼,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민족(民族)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들을 동질(同質)성(자신들이 속하여 있는 민족(民族)의 역량(力量)을 모으기 위한)을 느끼게 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로 한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한족(漢族)에 대하여 말하여보자.중국이란 어떤 나라인가? 광범위(廣範圍)한 영토(領土)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많은 민족(民族)들로 이루어진 나라이다. 그 중에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민족은 한족(漢族)이라고 불리 우는 민족(民族)일 것이다. 중국의 역사( 사기(史記) 를 지은 사마천은 삼황오제(三皇五帝) 중 삼황(三皇)을 역사(歷史)로 인정(認定)하지 아니 하였으며, 오제(五帝) 만을 인정(認定)하였다)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으며, 이에 나오는 황제(黃帝)를 자신들의 시조(始祖)로 생각하고 있다.당시 여러 제후들은 서로 침략을 일삼아 백성들을 괴롭혔으나 여러 제후의 맹주격인 염제 신농씨의 힘이 미약하여 이를 능히 평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괴로운 생활을 보내야 했다.이에 황제 헌원은 처음으로 창과 방패를 만들어 침략을 일삼는 제후들을 징벌하니 제후들이 모두 그의 곁에 모여 그를 따랐다. 이렇게 되자 맹주의 자리를 도로 찾기 위하여 염제 신농은 제후들을 괴롭히거나 침략하였다. 마침내 황제와 염제는 무력에 호소하여 판천에서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처음에는 쌍방이 모두 고전하였으나 3번의 싸움 끝에 황제가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황제의 명성이 크게 떨쳐 중원의 제후들은 모두 황제를 '천자'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황제는 천자가 된 후 배와 수레를 발명하고 집을 짓는 법과 옷짜는 일을 발명했으며 약초를 조사, 분석하여 의료기술을 폈다. 또 창힐에게 명하여 문자를 제작하게 하고 영륜에게는 악기, 대요에게는 십간 십이지를 만들게 하였고, 부인인 유조는 누에 치는 법을 가르쳤다. 이 때에 이르러 천하는 잘 다스려지고 백성들은 안락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황제(黃帝)가 장기적(長期的)이고 대규모적(大規模的)인 전쟁의 승리자가 됨으로써 지금까지 폐쇄적(閉鎖的)이었던 씨족 사회의 한계(限界)를 타파(打破)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각 씨족간의 융합(融合)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지금 한족(漢族)의 옛 전신(前身)인 화하족이 형성(形成)되었던 것이다. 이 것이 지금가지 내려와 한족(漢族)들이 자신들의 시조를 황제(黃帝)로 생각하고 이를 모시고 있게된 것이다.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을 생각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것은 황제(黃帝)가 각 씨족을 통합(統合)하여 하나의 나라를 건국(建國)하였다고, 현재 살고 있는 모든 후손(後孫)들이 황제(黃帝)의 자손(子孫)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명 모순(矛盾)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황제(黃帝)가 각 씨족들을 통합(統合)하는 과정에서 다른 씨족들의 모든 구성원(構成員)들을 죽이고 자신이 속하여 있는 씨족만이 남아 있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이후에 태어난 모든 후손(後孫)들이 모두 그의 자손(子孫)들이라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또한,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측면(側面)에서도 생각하여 볼 수도 있을 것이다.세계의 4대 문명(文明) 발상지(發祥地)를 가지고 있는 중국의 역사(歷史)는 세계의 그 어느 나라의 역사(歷史)보다 오래된 것이며, 다양한 것이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라 불리 우는 지금의 나라가 존재하기까지 수 많은 전쟁 등 역사적(歷史的) 사건들이 일어났을 것이며 그 와중에서 많은 이민족(북방에서 내려온 흉노(匈奴), 오환(烏桓), 선비(鮮卑), 강(羌), 돌궐(突厥), 고구려(高句麗) 등과 한족(漢族)들의 남방 이동에 의해 이(夷), 만(蠻), 월(越), 파(巴) 등의 유입)들이 왕래(往來)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떤 이들은 그 곳에 정착(定着)을 하였을 것이고, 그 들의 후손(後孫)들은 번성(繁盛)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도 황제(黃帝)의 자손(子孫)인 것일까?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일까. 이 것에 대하여 생각해보기 전에, 이와 유사(類似)한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앞에서 언급(言及)하였듯이 중국의 역사(歷史)에는 수 많은 역사적(歷史的) 사건들과 이민족들과의 전쟁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고, 여기서 만약 패하게 된다면 한족은 이민족의 지배(예를 들자면, 유목 민족(民族)이었던 부족을 통합(統合)하여 한족(漢族)들을 내부로 강제(强制) 이주시켜 건국한 거란의 송(960∼1277), 요을 멸(滅)하고 건국(建國)한 금(金)(1115∼1234), 세계적인 대제국(大帝國)을 건국(建國)한 몽고의 원(元) 제국(帝國)(1206∼1368) 등)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일개 피지배층에 불과한 한족(漢族)의 후손(後孫)만이 번성(繁盛)하였겠는가?이제 위 질문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사람들마다 나름대로의 견해(見解)를 가고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 내 생각은 이러하다.우선, 처음 부분에 언급(言及)한 민족(民族)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것은 위에서 말한 민족(民族)은 혈연(血緣)을 중요시한, 다시 말해 같은 직계(直系) 조상(祖上)에서 내려온 후손(後孫)들을 가르치는 것이라면, 지금 말하고자 하는(한족(漢族)을 의미) 민족(民族)은 혈연(血緣)이 아닌 문화(文化)와 전통(傳統)을 중요시하는(같은 문화(文化)와 전통(傳統)을 공유(共有)하고 살아가는) 후손(後孫)들을 뜻하는 것이다. 이제 위에서 제시(提示)한 예를 전자(前者)의 의미가 아닌 후자(後者)의 민족(民族)의 의미로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일반적(중국 역사(歷史)중 대부분이)으로 중국의 역사(歷史)를 이끌고 나갔던 한족(漢族)은 그 당시 자신들의 주위에 있는 그 어떤 민족(民族)(한때 한족(漢族)을 지배하기도 하였던 민족(民族)일지라도)들보다 뛰어난 문명(文明)을 발전(發展) 시켜왔으며, 또한 그에 걸 맞는 문화(文化)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그 들의 주위에 있는 미개한(그들 나름대로의 문화(文化)를 지니고 있었겠지만, 한족(漢族)에 그 것과 비교하여 상대적(相對的)으로 발전(發展)하지 못한) 민족(民族)들로서는 동경(憧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며, 그 것을 따라하거나,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던 중에 자신들의 군사력(軍事力)이 한족(漢族)의 그 것보다 우위(優位)를 점하게 되었고, 이 외에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 무력(武力)을 사용하여 한족(漢族)의 영토(領土)를 침략(侵略)하여 그 들을 지배(支配)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물론, 무력(武力)을 통하여 그 지역의 지배권(支配權)을 가지게 되었을 지는 모르지만, 상대적(相對的)으로 미개(未開)한 문화(文化)를 지니고 있는 민족(民族)이 뛰어난 문화(文化)를 지니고 있는 민족(民族)을 완벽(完璧)하게 지배(支配)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오히려 시간이 지나게 될수록 자신들이 한족(漢族)의 문화(文化)에 동화(同化)되어 가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어 그들은 한족(漢族)이라는 민족(民族)의 문화(文化)와 전통(傳統) 속에 편입(編入) 되었을 것이며, 이 것은 후자(後者)에서 말하던 민족(民族)에 의미에 부합(附合)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중국의 역사 중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으며, 대부분의 이민족이 새운 국가(위에서 예를 들었던 송(宋), 금(金)과 원(元)에서도)에서도 나타나는 현상(現象)이다.그럼, 이 것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 이러한 결과(結果)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또 다른 이유를 무엇이었겠는가.
1830년대까지 근대자본주의는 전 유럽을 지배하고 40년대부터 50년대에 걸쳐 중국의 개방, 캘리포니아와 호주의 금광 개발 및 급격한 식민, 일본의 개국등이 연이어 일어나고 세계 시장을 대략적으로 완성하였다. 1860년대는 자유 경쟁의 발전의 최고 한계였고 70년대부터 80년대 까지는 근대적 독점의 발생기이며, 제국주의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지구상의 대 분할이 19세기 말까지 진행되었다. 80년대 이후 서구자본주의 제국은 국내에 있어서의 경제공황, 그 밖의 경제적 모순을 타개하기 위하여 새로운 상품시장을 바라고 있었으며 또한 저하하기 시작한 이윤을 보충하기 위하여 풍부한 원료 자원과 새로운 자본투하 시장을 정열적으로 탐색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은 아시아, 특히 봉건중국과 봉건조선을 향해 집중적으로 쇄도하였다. 더욱이 조선은 동양진출, 특히 중국에 대한 침략의 한 지점으로 선택되어 있었다. 그런 만큼 청국으로서는 조선을 경유하여 파급되는 열강의 중압을 피하기 위해 당시 이미 반쯤 예속 상태에 있던 조선의 완전 독점 지배를 요구하게 된 것은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명치유신을 전기로 하여 급격한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밟게 된 일본은 그 국내외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군국적-침략적 성격을 띠게 되었고 따라서 조선과 중국에 대한 침공은 자본주의로의 발족 당시부터 이미 확정된 국가 정책이었다. 특히 조선은 상품 시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대륙침략을 위한 다리로서 당면 목표가 되었고 고종 13년(1876년)의 강화도 조약은 일차적인 현실적 성과였다. 이리하여 조선은 국제자본주의의 모든 시선이 집중된 곳이었으며 신흥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과 낡고 큰 봉건국가인 청의 결정적인 쟁탈점이 되어 있던 것이다. 그러면 조선 자체는 당시 어떠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가? 국가적 토지 공유제는 완전히 허구화하고 관료기구는 부패하고 생산은 약화 되었으며 백성은 궁핍화하고 그러면서도 착취는 가중되어 계급대립은 더욱 첨예화 하였다. 유럽에 있어서는 이미 15,16세기에 상품화폐경제가 낡은 사회기반을 침식하였고 근대적 생산은 더한층 성장하여 마침내 낡은 생산관계는 이미 견딜 수 없는 질곡으로 전화하였으며 이것은 전에 없던 격렬한 계급투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조선 봉건사회의 태내19세기말에 이르기까지 근대적 생산의 싹도 돋아나지 않았고 근대화의 아무런 요인도 배태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흔히 육의전을 말하고 객주와 여각을 말하고 장시와 보부상을 말한다. 그러나 객주,여각 등은 모두 서로 얽힌 징세,징공 청부의 기생적 투기꾼들이었으며 동시에 교활하고 간악한 관용 상인이 었다. 자유로운 상업은 지방의 장시에서 행해졌을 뿐이나 그것도 일시적인 교환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생산, 수취, 분배 조직하에 공업도 또한 공사천적인 노예관계 안에 폐쇄되어 버렸다. 그리고 지배계급에 의한 수탈의 증대는 결코 생산력의 증대에 따른 잉여 생산물의 증가분을 흡수한 것이 아니라 감금, 악형,강박 등의 수단으로써 생산의 기초자체를 파괴시키면서 민중의 고혈을 착취한 것이다. 생산력의 증대가 없는 착취의 증대, 이것이 조선 말기의 경제적, 사회적, 그 외의 모든 성격을 규정하는 본원적 조건이다. 또한 이것이 전형적인 동양사회로서의 조선사회의 역사적 성격을 규정한 주체적 기본조건이었다. 이리하여 근대화의 요인을 찾아볼 수 없는 침체와 부패의 소우주와 차관, 이권, 은행, 조폐소 등 모든 처방전을 떠맡기려는 외국의 개업의, 이러한 정세하에 살길을 읽어 버린 민중들은 고을마다 궐기하여, 민란은 하나의 행사거리가 되고 있었고 드디어 갑오년(1894)의 농민란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갑오농민란은 조선 말기에 자주 일어난 민란 중 전국적 범위의 가장 큰 농민반란이었다. 이 투쟁에는 동학당이 선두였기 때문에 동학란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나 실은 농민전쟁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투쟁에 참가, 동원된 절대 다수가 농민들이었고 또한 그들을 영도한 것이 크나 작으나 농민적 의식을 가진 동학의 하부 간부들이었고 또한 투쟁의 목표가 부패한 봉건주의를 타도하여 '폭정을 없애고 백성을 구한다'는 효과를 거두자는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이전의 동학인들에 의한 교조 신원운동과는 본질적으로 구별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갑오년의 농민반란은 그 이전의 동학운동의 단순한 연장 내지 확대가 아니고 이미 질적으로 변화한 발전 형태였다. 이 농민반란의 직접적인 계기는 고부 군수 조병갑의 수세 강징 이었다. 조병갑의 탐학과 폭정에 격분한 농민들은 1월 15일 새벽 크게 일어나 군아(郡衙)를 점령하고 즉시 무기고를 열어 무기를 몰수하고 관고에 쌓인 곡식과 돈을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봉기의 영도자는 곧 동학의 한 접주인 전봉준이었다. 이 고부 기포를 봉화로 하여 동학당의 조직 군중이 주력이 되어 수천 수만의 농민이 각지에서 궐기하였다.관찰사, 수령은 국가의 위태를 생각치 않고 제 몸과 가족을 살찌우고 윤택하도록 하는데 간절하다. 전선의 문을 보기를 재물이 생기는 길로 여기고 과거장은 모두 교역의 장터가 되어 버렸다. 허다한 재물이 국고에 들어가지 않고 개인의 배를 채웠으며 나라에는 계속 쌓아둔 채무가 있으나 갚을 생각도 하지 않고 교만하고 사치하고 음란하여 두려워하는 바가 없는지라, 팔로는 어육이 되고 만민은 도탄에 빠졌다. 부패 무능한 지배계급의 반동성을 폭로하고 도탄에 빠진 인민 대중에 호소하여 투쟁을 선포한 농민군은 단시일에 전주성을 점령하였고, 사태의 중대화에 놀란 중앙 관부에서는 청병의 파병을 요청하는 동시에 삼남 초무사 엄세영과 신임 전라 감사 김학진으로 하여금 기만적인 호도책을 강구하게 하였다. 그 양보조건은 (1)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2) 채권을 파기할 것, (3) 횡포한 양반과 토호를 엄단할 것, (4) 천민의 대우를 개선할 것, (5) 토지를 공평하게 분작할 것, (6) 동학을 용인하고 학인의 자유를 보장할 것 등이 었다.전봉준은 초무사의 제안을 수락하고 5월 8일에 평온하게 전주성을 퇴거하였다. 전주성을 퇴거한 전봉준 장군의 직속 부대는 순창, 남원 지역에 포진하여 북상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비록 전주성은 관군에 양도하였으나 호남각지는 거의 동학농민군의 세력하에 있었고 부분적으로는 충청, 경기, 강원, 황해의 각 도로 그 세력이 파급되었다. 당시 동학인들은 '마을마다 포를 설치하자'를 구호로 하여 조직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포'라는 것은 기초 조직이고 접주가 그 책임자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 정부는 광범한 인민반란 앞에 자신의 무력함이 폭로되자 청병을 요청하였는데, 청국은 천진조약(1885) 이래 미약해진 조선에 대한 발언권을 이 기회에 회복하고자 기도하고 직예 총독 이홍장은 곧 섭지기와 섭토성에게 출동을 명령하니 청병 1천 500명은 아산만에 상륙하였다. 한편 명치유신 이후 대륙침공의 야망을 품고 군비를 확충해 온 일본은 명치 25년(1892)년경에 이미 그의 당면 적대국인 청국에 대하여 군사적 우세를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군사적 출동의 기회만 노리고 있던 군국주의 일본은 천진조약(조선에 반란이 일어나서 청일 양국 또는 한나라로 부터 출병할 때는 상호 조회할 것을 약속함)을 구실로 하여 청병의 아산 상륙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대도의창이 거느린 부대를 인천에 상륙시켰다. 이에 조선의 운명은 청일 양국 사이의 전국에 의해 좌우되었는데, 병력과 훈련의 차이와 특히 전략적으로 불리한 상태에 있었던 청군은 성환에서 궤멸하였다. 이에 앞서 일본군은 왕궁을 점령하여 김홍집을 수반으로 친일 괴뢰정부를 수립하는 동시에 반일적 조선 군대의 무장을 해제하였다. 정세가 이렇게 급변함을 본 전봉준 장군은 그의 본래 계획인 북상을 조금도 지연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9월 하순에 동학농민군은 북상을 개시하여 강경 평야를 거쳐 일단 논산에서 집결한 후 세길로 갈라져 공주를 공격하였다. 충청도 감사 박제순 휘하의 관군은 일본군과 협력하여 이인, 봉황산, 우금치등지에 진을 치고 동학농민군의 전진을 막았다. 이 지역에서 5,6일간 밤낮에 걸쳐 대격전이 벌어졌는데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은 농민군의 일대 강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전봉준은 일단 후퇴하여 군용을 정비하고 한편으로는 전주에 있던 후진장 김개남에게서 원병을 얻어 공격을 재개하려는 계획하에 논산으로 퇴각하였던 듯하다. 그런데 퇴각중인 농민군은 11월 3일 아침 이인역에서 관군과 만나 7,8일 동안 혈전을 전개 하였는데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협공을 받아 엄청난 손실을 입어 논산에 머무를 수도 없이 호남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은 금구, 태인, 일대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였으나 우세한 무기를 가진 일본군과 관군을 막아낼 수 없었다. 공주 공격 때 합류하였던 손병희 통솔하의 북접군도 남접군과 운명을 같이하게 되어 전라도에서 서로 떨어지게 되었다. 반혁명군은 일본군, 관군, 수성군으로 구성되어 뿔뿔히 흩어진 농민군을 각처에서 소탕하게 되었다. 갑오농민운동은 1년 동안 계속된 후 진압되았으며 전봉준 장군은 적에게 체포되어 을미년(1895) 3월 17일 서울 감옥에서 동지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등과 더불어 교수형에 처해졌으니 그때 나이 41세였다.
우리 나라의 의병은 크게 3종류로 구분 할 수 있다. 처음에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 당시의 을미 의병을 전기 의병이라 부르고, 을사 조약 후 의병을 중기 의병(을사 의병)이라 부른다. 또, 한일 신협약 후 의병을 후기 의병(정미 의병)이라 부른다. 전기 의병은 보수적인 유림 즉, 양반 계층에서 그들의 지휘부를 맞은 것에 비해 후기로 가면서 평민들이 지휘부를 맞기 시작하였다. 특히, 후기 의병의 특징으로는 혁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혁신 유림들의 참여와 신분의 억매이지 않고, 자기의 능력에 따라 그 지휘가 결정되었다. 즉, 평민의 신분이더라도 그 능력에 따라 지휘를 할 수 도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의병은 지휘부와 병사 모두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받지 못 하였고, 여러 계층의 사람들(양반, 농민 등)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직적인 면이나, 규모면에서 일본군과 같은 정규군에 미치지 못 하였으며, 또한 그 들이 사용하는 전술은 조총등 신식 무기를 사용하는 것에 비해 효율적이지 못하였다.그에 반해 한일 합방 후, 조직된 대한광복회는 중앙에서 박상진을 총사령관으로, 부사령에 이석대, 이진룡을 선임하였고, 1917년부터는 김좌진이 이진룡의 뒤를 이어 부사령이 되었다. 1916년부터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하여 각도에 연락소를 설치하였다. 연락소는 누구나 쉽게 출입할 수 있으며, 금전 출납이 개방되어 있는 곡물상이나 잡화상, 그리고 여관이 대부분이었다.구성 인사로는 의병 출신인 유창순, 한훈, 권영만, 우재룡, 이진룡과 의병 관계자인 박상진,채기중, 김한종 등이 주축을 이루었으면, 후에 김좌진과 같은 구한말 계몽주의자와 면장을 지낸 경험이 있는 사람도 참가하였다.대한제국의 멸망을 전후하여 무장 독립 운동은 북쪽 국경선 일대와 추가령지구대·태백산맥·소맥산맥 일대와 선북간도와 연해주 등 해외에서 독립군기지가 개척되었다. 그러던 중 1913년 그 동안 국내의 의병과는 다른 성격을 갖는 무장 단체인 풍기 광복단이 결성되었는데, 후에 이것이 국내에 결성된 최초의 무장 독립운동 단체 광복회로 발전하였다. 또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1910년대 국내 민족 운동 단체 중 독립의군부, 민단조합, 조선국민회 등 몇몇 도 단위를 넘는 단체가 있었지만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지 못 하였지만, 대한광복회는 전국 8도에 지부를 설치하였을 뿐 아니라, 그 것을 기반으로 러시아 연해주의 우수리스크, 니코리스크에 지부 결성을 추진하였다대한광복회의 다른 특징은 식민시기 3 1운동, 6 10만세 운동, 광주학생운동과 같은 대중적 독립 운동은 있었지만, 혁명 기지를 마련한 후 일시에 전국적으로 봉기하여 혁명적 독립 전쟁을 조직적으로 계획하였고, 이를 성사 시키기 위해 전국 각지에 혁명 기지를 건설을 하였다. 또, 국내에서 조직됐음에도 공화주의를 표방하였다는 것이다. 1910년대 독립 운동의 이념은 독립의군부가 추구인 복벽주의와 북경에 있던 신한혁명당이 추구하던 보황주의, 1907년 신민회이래 새로 확산되어 가던 공화주의가 있다. 이 당시 공화주의를 표방하던 인물들은 조선산직장려계처럼 계몽운동가, 또는 권업회, 정학사, 간민교육회와 같이 해외에 망명하여 활동하였는데, 박상진, 이관구들이 주도한 대한광복회는 구내조직임에도 불구하고 공화주의를 표방하였다.이 당시 전과 다른 독립 운동의 형태인 의열 투쟁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 것이 독립운동 방략으로 이론화한 것은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서이지만, 의열 투쟁이 전개된 것은 1908년 장인화, 정명운의 스티븐슨을 단죄한 샌프란시스코 의거와 1909년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처단한 하얼빈 의거부터이다. 이런 의협 투열 투쟁을 조직으로 단행하는 것은 대한광복회에서 비롯되었으며, 후 1919년 암살단이나 주비단의 방략으로 이어져 의열단이 이르러 완성되었다.마지막으로 이런 대한광복회의 특징은 구성 인원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창설 인원은 의병 출신자, 의병 관계자가 주축을 이루어 무장 운동 단체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구성 인원을 볼 때, 청장년이었다는 점, 구시대의 반상을 가리지 않았다는 점, 혁신 유림이 주축을 이루었다는 점, 대종교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는 점 등이 공화주의를 표방하게 된 인적 기반이 외었던 것이고, 혁명전략을 세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이 처럼 대한광복회는 이전에 있었던 어떤 독립 운동 단체와는 다른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 이런 특징들은 이 후의 독립 운동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를 살펴보면,첫째로 민족 의식의 고취와 민족의 단결된 힘을 발휘 할 수 있게 하였다. 그 예로, 한일 합방 후 친일을 하여 부를 쌓은 부자들을 독립 운동 자금을 모집을 위해 처단을 하였던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나라를 배신하고 친일 행동을 하여 자신을 부를 쌓아 가던 사람에게는 경각심 심어 주게 되었고, 이 것이 다른 일제의 침탈에 순응하던 우리의 민족에게 민족 의식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또, 이들은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를 믿음으로써 우리 민족의 문화의 독자성, 정통성과 동질성을 느끼게 하므로, 역시 민족 의식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둘째로, 이 전까지의 독립 운동과는 다른 방식의 독립 운동을 사용하므로, 후에 있을 독립 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전의 계획과 전략, 전술에 의한 것이 아닌 독립을 원하는 의욕을 앞세운 독립 운동이었다면, 대한광복회 이후에는 미리 계획된 전술에 의한 독립 운동을 하였다고 하겠다. 그 예로는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산동광산과 직산광산을 습격하였을 뿐아니라, 경주에서 우편차를 습격하여 현금을 차압하였던 것, 전국적으로 100여개 소의 연락처를 두어 소규모 운동이 아닌 적국적인 독립 운동을 계획하였던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셋째로는, 민족 의식의 성장으로 구시대의 악습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었다는데 있을 것이다. 이는 초기에 유림 곳 양반들이 의병의 지휘부를 맞았던 것에서 후기 의병으로 오면서 신분이 아닌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자신의 위치가 결정된 것 즉, 아무리 하찮은 농민이라 하더라도 그 능력이 뛰어나면 지휘부를 맞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양반이라 하더라도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평민의 밑에서 그의 명령을 따라야 했던 것이다. 이는 이전까지는 생각도 할 수 없던 것으로 그 만큼 민족 의식이 성장하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世界大戰)은 20세기(世紀) 초엽 인류가 경험한 최초의 대규모적인 세계 전쟁이었는데, 그 발발의 배경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나타난 세계 제국주의(帝國主義)의 성립(成立)이 있었다. 이 시기에 유럽 제국과 미합중국, 약간 뒤늦게 일본 등에서는 자본주의(資本主義) 경제가 독점 단계로 들어가, 각국은 대형화(大型化)한 경제력의 배출구(시장 확보)를 필요로 했고 이에 따라 이들 국가는 해외에서 식민지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한 격렬한 경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세계는 제국주의 열강에 의하여 거의 분할되었으며, 이제는 그 재분할이 열강의 주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말의 쿠바나 필리핀을 둘러싼 미국-스페인전쟁이나,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Boer War) 후, 20세기에 들어서 제국주의 열강의 재분할 경쟁의 새로운 초점이 된 것은 중국과 투르크(터키)였다. 따라서 중국 동북(만주)과 한반도의 지배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러·일전쟁의 배후에는 각각 영국·미국과 프랑스·독일이 있으며, 1905년까지 제국주의의 국제 대립의 중심은 동아시아에서의 러시아와 영국 간의 항쟁에 있었다. 그러나 러·일 전쟁 후 러시아는 후퇴하고, 다시 그 진로를 발칸·중근동으로 향했기 때문에,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제국주의 열강의 국제 대립의 무대는 종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 영역이었던 발칸·근동지역으로 옮겨졌으며, 그 곳에서 대립의 주역이 된 것은 영국과 신흥 독일이었다.러·일전쟁 후의 세계 정세의 새로운 전개는 이미 전쟁 중인 1904년, 영국·프랑스 협상(協商) 성립(成立)에 의하여 시작되고 있었다. 이 2대 식민(植民) 제국은 세계 각지에서의 양국의 대립을 해소하고, 특히 이집트와 모로코를 서로 상대국의 보호령(保護領)으로 인정하여 협정(協定)을 맺었다. 이어 영국과 러시아도 러·일전쟁 후 중국에서의 대립이 완화(緩和)됨으로써 접근하기 시작하여, 독일의 극동 진출과 이란에서의 입헌혁명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양국은 이란에서 서로의 세력권(勢力圈)을 확인하는 등, 1907년 영국-러시아 협상을 성립시켰다. 이렇게 성립된 3국간의 협상 체제(體制)는 이들 3국이 세계 가운데서의 식민지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힘의 과시인 동시에,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3국 동맹에 대항하여 유럽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 관계였다. 한편, 3국 동맹 내에서는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와의 대립에서 프랑스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으므로 독일은 점차 국제적 고립(孤立)을 더하여 갔다.3국 협상과 3국 동맹의 대립의 주축은 영국과 독일로서 그것은 세계시장에서 이미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식민제국과 그 경쟁에 뒤늦게 참가한 신흥 제국주의(帝國主義) 국간의 대립(對立)을 나타내고 있었다. 양국 대립의 근원은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0년대에 시작된 영국의 3C정책(Calcutta·Cairo·Capetown을 잇는 지배권)과 독일의 3B정책(Berlin·Byzantium·Baghdad를 잇는 지배권)간의 암투는 1890년대에 들어오면서 독일의 공업과 무역이 영국의 구세력을 위협하자 더욱 첨예하게 대립하였으며, 양국은 세계 시장에서 격렬한 경제 경쟁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1898년에 독일이 대함대 건설에 나서면서 건함(建艦) 경쟁이 일어났으며 이로써 양국간 경쟁은 더욱 격화(激化)하였다.이와 같은 정세하에서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 보호령화에 반대하여 1905년 3월, 제1차 모로코사건을 야기시켰으나, 오히려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고, 영·프의 협력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1911년 7월의 제2차 모로코사건에서도 영국은 프랑스를 지지하여 전쟁도 불사한다는 강경 태도를 취하였으므로 독일의 외교 공세는 두 번 다 실패하였다. 한편 1903년 이래, 독일은 투르크에서 바그다드 철도의 건설을 추진하였고, 또 투르크 육군의 근대화(近代化)를 지도하여 이 나라에 대한 영향력(影響力)을 강화하여 갔다. 그리하여 국제적으로 고립함에 따라 독일의 대외 진출(進出)의 중점(中點)은 극동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의 독일의 3B정책은 지중해로의 진출구인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해협의 지배(地排)를 노리는 러시아의 진출과 함께 대영제국의 생명선을 잇는 3C정책에 대한 위협(威脅)으로 느낀 영국과의 마찰을 증대(增大)시켰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전의 국제 대립에서 이른바 주역을 담당하였던 영국과 독일은 서로 예리하게 대립(對立)하면서도, 그 행동은 신중하였다. 양국은 1908~12년 해군 군축 교섭을 계속하였고(하지만 성립되지 않았다.), 또 극동에서도 오랜 교섭 끝에 타협(妥協)에 도달하였다. 결국 대전은 양 대국의 직접적인 충돌(衝突)에서가 아니라, 협상(協商) 대(對) 동맹(同盟)이라는 두 개의 블록 사이의 대립(對立), 특히 양 진영 내에서의 조역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발칸 반도에서의 대립을 직접적(直接的) 계기로 하여 발발하였다.발칸은 일찍이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유럽의 화약고」였다. 이 곳에 열강,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진출(進出)하고 있어서,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내걸고 슬라브계 민족의 결집(結集)을 꾀하였으며, 한편 오스트리아는 이 영향을 겁내어, 독일의 지지하에 범 게르만 주의를 주창하여 이에 대항(對抗)하였다. 1908년 투르크에 혁명(革命)이 일어나고 불가리아가 독립(獨立)하자, 오스트리아는 슬라브인이 사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세르비아는 러시아에 지원을 바랬으나 러·일전쟁과 제1혁명(1905)의 후유증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배후의 독일과의 충돌(衝突)이 두려워 1909년 독일의 오스트리아의 병합 정책 지지성명에 굴복(屈伏)하고 말았다. 이 후 러시아는 1912년, 세르비아·불가리아 등에게 발칸 동맹(同盟)을 결성(結成)케 하였고 같은 해, 동맹은 투르크와 싸워(제1차 발칸전쟁) 승리하였으나 투르크로부터 얻은 영토의 분배를 놓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기타 제국 사이에 1913년 제2차 발칸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戰爭)에서 패한 불가리아는 이후 오스트리아·독일에 접근하였으나 세르비아의 승리는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의 승리를 뜻하여 오스트리아는 큰 타격(打擊)을 입었다. 이리하여 유럽의 일각 발칸에서 제국주의 열강은 자국의 세력 확장 때문에 소국(小國)의 운명을 조종하여 대립을 격화시키고 이 곳에서의 전쟁의 불꽃이 전 유럽을 휩쓰는 위험한 정세를 만들어내고 있었다.1914년 6월 28일, 긴장이 고조되는 발칸의 일각,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육군 대연습의 통감(統監)으로 이 곳을 방문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세르비아의 참모본부 정보부장이 밀파한 7명의 자객 가운데 G.프린치프의 흉탄에 맞아 피살(被殺)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세르비아를 타도하고, 발칸에서의 열세를 일거에 만회하고자 하였으며, 독일도 그것을 지지하였다. 오스트리아는 7월 23일, 세르비아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붙여 최후통첩을 보냈으며, 이것이 일부 거부되자, 즉각 세르비아와 국교(國交)를 단절(斷絶)하고 이어 28일에는 선전포고(宣戰布告)하였고, 7월 5일에 황제 특사를 독일로 보내어 대(對)세르비아 강경 방침에 대한 독일 측의 양해(諒解)를 얻었다. 종래의 정설은 독일이 오스트리아에 끌려서 전쟁에 말려들었다고 보았으나 근년의 연구로는 세르비아에 대한 강경 방침을 내세우면서도 주저했던 오스트리아의 지도자를 격려하고, 오히려 빨리 전쟁을 개시하도록 압력(壓力)을 가한 것이 독일 측 이었음이 밝혀졌다. 독일의 정부·군부 지도자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이 러시아나 프랑스까지도 끌어들이는 유럽 전쟁으로 될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이와 같은 강경 방침을 선택한 것은 깊어져 가는 국제적(國際的) 고립(孤立)과 해외 진출(進出)에서의 벽에 부닥친 처지를 타개(打開)하기 위하여 전쟁의 위험을 무릅쓴다는 결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독일이 이 시기를 택한 것은 독일측의 군비 강화가 1914년 여름에 그 절정에 달하는 데 대하여, 프랑스나 러시아의 그 시기는 1915년 또는 1916년이었음으로, 따라서 지금이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判斷)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한편, 러시아는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대(對)세르비아 선전포고에 대하여 즉각 대(對)오스트리아 동원을 하고 30일에는 총동원령을 내렸고, 이 것이 전쟁의 국지화(局地化)를 불가능케 하였다. 독일은 23~27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를 조정해 달라는 영국의 여러 차례의 요청을 무시하거나 거부(拒否)하였다. 영국의 중립 예상이 무너지고 전쟁 개입이 확실해지자 독일의 정부 지도자는 그 때까지의 강경한 태도를 약간 바꾸어, 오스트리아에게 러시아와의 교섭에 응할 것을 권장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7월 위기」는 위기로 그치지 않고 마침내 대전으로 급선회(急旋回)하고 만다. 31일 독일은 러시아에 대하여 총동원령 철회를 12시간의 기한부로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러시아로부터 아직 회답이 없는 상태에서, 8월 1일 대 러시아 선전포고를 하였다. 더욱이 8월 3일 독일은 프랑스의 벨기에 중립 침범을 비난하여 선전포고를 해놓고서도 스스로, 북서 프랑스 진공(進攻)을 위하여 벨기에에 침입하였고 영국은 이것을 이유로 하여 다음날 대독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은 이탈리아를 제외한 전 유럽 열강이 참가하는 유럽 전쟁으로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