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Thorndike와 Skinner의 조작적 조건형성1. ThorndikeThorndike는 자극-반응결합설을 확립한 이론가로서 그는 “동물에 있어서의 연합과정의 실험”을 통한 학위논문인 “동물의 지능(animal intelligence)”에서 학습은 시행착오 과정의 결합으로 밝히면서 목표달성을 하지못한 무효동작은 배제되고 유효한 유효한 동작이 완성 되는 것은 유기체의 충동과 자극사이의 연합에 의한 것으로 주장하여 “결합설” 혹은 “시 행착오설”을 확립하게 한다.이러한 공로로 그는 교육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리우게 된다. 그가 최초로 행한 실험은 고양이를 이용한 문제상자 실험으로서 고양이의 시행착오를 통한 문제상자 탈출은 제대로 의 반응이 각인(imprinting)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일련의 실험을 통해 Thorndike는 세 가지 기본법칙과 다섯 가지 종속법칙을 제시하게 되었다.가. 기본법칙1) 효과의 법칙(law of effect)효과의 법칙은 결합에 수반하는 만족감이 크면 결합이 강화되고 불만족사 계속 되 면 결합은 약화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즉 결합에 수반되는 만족의 여부에 따라 반응에 차이를 가져온다는 것을 설명하는 법칙이다. Thorndike는 여기서 벌보다는 보상이 행동 형성에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2) 연습의 법칙(law of exercise)연습의 법칙은 빈도의 법칙(law of frequency)으로도 불리워지는 법칙으로 하위 법칙 으로 사용의 법칙(law of use)과 불사용의 법칙(law of disuse)을 포함하여 이 법칙은 연습의 횟수나 사용빈도가 많을 수록 결합은 강화되고 횟수가 적거나 사용되 지 않을 때에는 결합이 약화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3) 준비성의 법칙(law of readiness)준비성의 법칙은 학습하는 태도나 준비와 관련되어 그런 자세가 되어있을수록 결합이 용이하고 그렇지 못하였을 때에는 결합이 약화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준비성의 개념은 교육에서 말하는 개념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나. 종속법칙1) 다양반응의 법칙(law of muliple response)적절한 반응이 나타날 때까지 여러 가지의 반응을 시도하게되면 그 중 우연히 나타 난 적절한 반응이 결합된다.2) 자세 또는 태도의 법칙(law of set or attitude)유기체의 자세나 그 태도에 따라서 결합이 결정된다.3) 연합.전이의 법칙(law of associative shifting)반응하기 쉬운 장면에서 결항이 쉽게 일어나며 자극과 반응사이에 일련의 변화로 완전히 보존되면 새로운 장면에서의 다른 자극에 대하여서도 그러한 반응이 일어난 다.4) 유사성의 법칙(law of assimilation)자극이나 어떤 상황하에서의 반응은 과거의 경험에 근거한 유추 혹은 동화에 의한 반응이며 어떤 장면에서의 특정요소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한 반응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5) 요소 우월의 법칙(law of prepotency of elements)자극에 대하여 무선택적, 무작위적 방법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중요하고 우월하다고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을 통하여 반응을 하게 된다는 법칙이다.Thorndike의 이론에 따르면, 동물이 학습하는 것은 우연히 성공이 반복되기 때문이며 성공에 의한 만족감을 느끼는데서 성립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동물의 모방에 의한 학습을 설명하지 않고 있으며 또 효과의 법칙이나 연습의 법칙으로 설명될 수 없는 또 반대되는 현상이 인간에게 수없이 나타나는데 대해 설명이 배제되어 있어 이론의 한계를 느끼고 있다. 또한 동물과 어린이를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속성을 지녔다는 “기계적 인간”으로서의 신조를 가지게 할 수 도있어 비판받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2.Skinner하버드 대학의 Skinner(1904 ∼ 1990)는 행동주의를 급진적으로 발전 시켰다. 그는 복잡한 행동계열을 조작적 조건화라고 불리는 원리를 통해 의식과 관련짓지 않고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Skinner의 설명체계는 반응-자극 학습원리, 즉 유기체에 의해 행동이 먼저 발생하고 그 결과로서 자극이 따르게 된다는 원리로 볼 수 있다. 그는 행동주의에 강화(强化)라는 개념을 도입했다.강화는 반응에 이어서 주어지는 자극을 말하는데 이 자극이 어떠냐에 따라서 그 반응의 빈도가 증감된다. Skinner의 주장은 모든 생물은 강화를 받음으로써 특정 행동을 하도록 학습된다는 것이다.가. 스키너(Skinner)의 조작적 조건형성조작적 조건형성이론은 미국의 심리학자인 스키너(Skinner)에 의해 제안된 이론으로서 인간을 스스로의 의지를 지닌 자발적인 존재로 다루었다. 인간은 외부 자극에 의하여 단순히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스스로 조작함으로써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어떤 결과를 일으키게 조작하는 행동을 조작적 행동이라 부르고, 이러한 행동을 통하여 형성되는 조건형성을 조작적 조건형성이라 한다.조작적 조건화에서는 자극보다는 유발된 행동의 결과에 관심을 둔다. 행동으로 인한 결과 즉, 어떤 행동이 보여진 이후에 나타나는 산물에 관심을 둔다. 예를 들어, 수업시간에 특별히 대답을 잘 한 학생에게 주는 교사의 칭찬이 바로 그것이다.나. 스키너(Skinner)의 조작적 학습을 설명하는 원리1). 강화가) 정적 강화와 부적 강화(1) 정적 강화 : 가치있는 어떠한 것을 제공함으로써 바람직한 행도의 강도와 빈도를 증가시키는 것을 의미예) 노트 정리를 잘하는 학생에게 칭찬을 해줌으로써 더욱 노트정리를 잘하도록 유도 하는것, 미술시간에 그림을 잘 그린 학생의 작품을 교실에 전시하여 학생이 미술 에 전념하도록 유도하는것.(2) 부적 강화 : 바라지 않는 어떠한 것을 제거하여 바람직한 행동의 강도와 빈도를 증 가시키는 것을 의미.예) 수업시간에 집중을 잘하고 좋은 질문을 하는 학생들에게는 청소당번을 면제해주는 경우.가) 강화 계획바람직한 행동을 보였을 때 주어지는 강화물의 적절한 시기와 방법에 대한 일종의 원칙.(1) 강화 계획과 학습과의 관계(가)학습 측정 기준 : 학습 속도, 반응 속도, 소거 속도· (나)학습속도 : 계속적으로 강화를 제공하는 방식이 가장 효과적, 초기학습을 촉진.학교 수업에서 초기 학습은 후기 학습 보다 많은 양의 강화가 제공되어 야함을 시사해 주며 저학년에 갈수록 지켜져야 할 원리로 간헐적으로 강 화되어 형성된 행동보다 소거의 속도가 빠름(다)소거속도 : 강화가 제공되지 않는 시간에서부터 행동이 멈추어진 시간까지에 경과 된 시간.(라)반응속도 : 강화 스케쥴에 따라 달라짐.다) Premack의 원리빈번하게 일어나는 특정한 행동이 상대적으로 자주 일어나지 않는 행동을 강화하기 위 하여 이용되는 것으로 개인의 행동을 관찰하여 가장 자주 발생하는 행동을 비교적 적게 발생하는 행동에 대한 보상으로 이용할 수 있음을 의미. 할머니가 아이를 다독이듯 하 는 원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할머니 원리 법칙 이라고도 한다.예) 편식 습관을 지닌 아동에의 Premack의 원리이용- Premack의 원리는 보상이 될 수 있는 것이 개인들마다 다르며 개인 내에서도 언제든 지 바뀔 수 있으므로 교사에게는 아동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그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으 로 보상하는 세심함이 필요.
목 차Ⅰ. 들어가며2Ⅱ. 행동주의적 학습이론21. 행동주의적 학습이론의 기본전제32. 학습의 정의33. 학습의 속성3Ⅲ. 고전적 조건형성4Ⅳ. Thorndisk와 Skinner의 조작적 조건형성9Ⅴ. Bandura의 관찰학습13Ⅵ. 행동주의 이론의 교육적 시사 16Ⅰ. 들어가며인간은 주위환경과 상호작용함으로써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고, 지식을 활용하여 생활에 적응하고 생활하여 나간다. 또한 생활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면서 인간은 상당한 지식을 축적하게 되고 이들 지식을 활용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행동을 취하게 된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태도를 습득하고, 새로운 기능을 습득하며 기존의 지식 등을 새롭게 사용하는 방법도 습득한다. 이처럼 학습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학습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정의하지 않으면 성숙이나 학습된 능력과 같은 다른 개념과 혼동하기 쉽다. 따라서 학습은 무엇이며, 학습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심리학자들은 "학습은 경험의 결과로 나타나는 비교적 영속적인 행위나 능력의 변화에 의해 추론되는 하나의 과정"이라 본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학습이라는 의미는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첫째, "행동의 변화과정"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학습의 의미는 달라진다. 행동의 변화과정 그 자체를 강조하는 경우, 행동의 변화과정이 곧 학습의 과정이며 행동의 변화 그 자체가 학습의 결과인 것이다. 반면 행동의 변화과정을 하나의 내적인 변화의 과정으로 본다면, 학습이란 행동의 변화에 의해 추론되는 유기체{ ) 유ː기―체(有機體)1. 생물에서, 유기적으로 이루어진 생활 기능을 가진 조직체, 곧 동식물 따위. ↔무기체.2. 많은 부분이 일정한 목적 아래 통일.조직되어 그 각 부분과 전체가 필연적 관계를 가진 것.내부의 변화과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행동의 변화는 학습의 결과를 추론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에 불과하며, 학습과정은 유기소로 세분화하여 연구한 자연과학 분야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들은 환경은 여러 단위 자극으로 구성된 집합체이며 유기체의 어떤 특정한 행동을 야기시키는 것은 환경 전체가 아니라 환경에 내포된 특정한 자극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러한 특정한 자극과 반응 사이의 관계를 밝혀야 한다고 보았다.셋째, 유기체의 행동에 관한 연구를 과학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관찰 측정이 가능한 것을 연구의 대상으로 한다. 어떤 자극에 대한 유기체의 내적 과정은 너무 복잡할 뿐만 아니라 외부적으로 관찰되거나 측정될 수도 없다. 따라서 행동주의에서는 이러한 내적 과정을 검은상자(black box)로 취급하여, 존재만을 인정할 뿐 연구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대신에 단지 관찰이 가능한 자극으로서의 환경과 반응으로서의 행동만이 된다는 것이다.넷째, 인간과 동물의 질적인 차이를 거부한다. 이들에 따르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양적인 차이에 불과하며, 근본적으로 똑같이 환경자극에 대한 반응으로서 행동하기 때문에 질적인 차이는 없고, 다만 인간의 신경구조가 좀 더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자극과 반응에 대한 관계가 더욱 복잡할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복잡한 구조의 인간보다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의 동물을 대상으로 함으로서 보다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고 보며, 연구를 통해 얻어진 원리나 법칙은 그대로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2. 학습의 정의가. 넓은 의미의 학습경험이 개인의 지식이나 행동에 비교적 지속적인 변화를 야기시킬 때 일어나는 것으로 변화는 고의적이거나 비의도적일 수도 있고, 좋은 것일 수도 나쁜 것 일 수도 있으나, 학습으로 칭해지려면, 이 변화는 경험에 의해서-한 개인과 그의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의해서-야기되어야 한다.나. 행동주의 학습이론(behavioral learning theory)행동주의 관점은 일반적으로 학습의 결과는 행동상의 변화임을 가정하고 개인에 있어서 외적 사건들의 결과를 강조한다. J. B. Watson과 같은 몇몇 초기 행동주의자들은 사고, 의도, 다른 내적니라 생리적 과정에도 영향을 준다.ex8) 신체면역기능억제 실험 { 고전적 조건형성과 면역억제연구자들은 고전적 조건형성을 자동적이고 기계적인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획득]고전적 조건형성에서 획득이란 새로운 조건반응의 경향이 확립되었다는 것을 말한다.Pavlov는 CS와 UCS의 시간적 접근에 의해 조건반응이 획득된다고 보았다.그러나 현대 학습이론가 들은 조건형성이 이처럼 자동적이고 기계적이지 않다고 주장함.ex9) 앞서 제시한 중년여성의 경우 또다른 자극쌍에 대한 예연구결과에 따르면 조건형성은 일상적인 자극보다는 새롭고, 특이하고, 강렬한 자극이 효과적인 조건자극이라고 한다.이 외에도 조건반응의 획득에 영향을 주는 요인들이 몇가지 있다.[소거]소거란 조건형성된 반응경향이 점진적으로 약화되어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고전적 조건형성에서 무조건자극을 제시하지 않고 조건자극만 계속 제시하면 조건반응은 소거된다.ex10) 실제 생활에서 소거의 예소거속도는 여러 요인에 따라 다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연합강도이다.쉽게 조건형성된 반응은 쉽게 소거되고,어렵게 조건형성된 반응은 소거가 쉽지 않다(easy come, easy go).{ 획득, 소거 및 자발적 회복[자발적 회복]소거된 조건반응이 일정한 휴식시간 후에 다시 나타나는 것을 자발적 회복이라고 한다.조건반응을 소거시킨 후 다시 조건자극을 제시하면 조건반응이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ex11) Pavlov 의 실험[자극 일반화]조건형성과정에서 실험동물은 원래의 CS 뿐만 아니라 그와 유사한 다른 자극에 대해서도 반응하는 경향이 있었다.ex12) 행동주의의 창시자인 Watson의 실험이와 같은 자극일반화의 용이성은 원래의 CS와 새로운 자극 간의 유사성에 달려있다.즉 원래의 CS와 새로운 자극이 유사할수록 일반화의 가능성은 커진다.반대로 유사성이 감소할수록 일반화정도는 줄어든다.{[자극변별]자극변별(stimulus disrimination)은 자극 일반화와 상반된 현상이다.ex13) 애완용 개가 주인의 차소리를 듣고 반응하히 보 존되면 새로운 장면에서의 다른 자극에 대하여서도 그러한 반응이 일어난다.4) 유사성의 법칙(law of assimilation)자극이나 어떤 상황하에서의 반응은 과거의 경험에 근거한 유추 혹은 동화에 의한 반응이며 어떤 장면에서의 특정요소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한 반응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5) 요소 우월의 법칙(law of prepotency of elements)자극에 대하여 무선택적, 무작위적 방법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중요하고 우월하다고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을 통하여 반응을 하게 된다는 법칙이다.Thorndike의 이론에 따르면, 동물이 학습하는 것은 우연히 성공이 반복되기 때문이며 성공에 의한 만족감을 느끼는데서 성립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동물의 모방에 의한 학습을 설명하지 않고 있으며 또 효과의 법칙이나 연습의 법칙으로 설명될 수 없는 또 반대되는 현상이 인간에게 수없이 나타나는데 대해 설명이 배제되어 있어 이론의 한계를 느끼고 있다. 또한 동물과 어린이를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속성을 지녔다는 “기계적 인간”으로서의 신조를 가지게 할 수도 있어 비판받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2. Skinner하버드 대학의 Skinner(1904∼1990)는 행동주의를 급진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복잡한 행동계열을 조작적 조건화라고 불리는 원리를 통해 의식과 관련짓지 않고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Skinner의 설명체계는 반응-자극 학습원리, 즉 유기체에 의해 행동이 먼저 발생하고 그 결과로서 자극이 따르게 된다는 원리로 볼 수 있다. 그는 행동주의에 강화(强化)라는 개념을 도입했다.강화는 반응에 이어서 주어지는 자극을 말하는데 이 자극이 어떠냐에 따라서 그 반응의 빈도가 증감된다. Skinner의 주장은 모든 생물은 강화를 믿음으로써 특정 행동을 하도록 학습된다는 것이다.가. 스키너(Skinner)의 조작적 조건형성조작적 조건형성이론은 미국의 심리학자인 스키너(Skinner)에 의해 제안된 이론으로서 인간을 스스로의 의지를 지닌 자학교에 남아 있도록 하는 것.---Skinner의 벌에 대한 견해---어린이에게 공부할 수 있게 체벌한다고 말할 때, 체벌이라는 어휘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셈이 다. 어린이가 공부함으로써 체벌을 피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고 있다. 어린이에게 잘못된 행동 을 하지 않도록 체벌한다고 할 때, 당신은 그 행동을 억제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체벌은 현재 반응하려는 행동경향성을 감소시켜 줄 뿐이다. 왜냐하면, 극단적으로 심한 체벌은 영구히 그 행동을 억제하게 만들지 모른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어떤 행동에 부수적으로 체벌을 빈번히 사용한다면, 그 행동은 체벌이 중단된 후에 곧 회복될 것이고, 어린이는 더 심한 체벌을 받는다 고 할지라도 그 행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부활용 때문에 혐오적 통제 방법을 반대하는 것이다. 부정적 부작용을 일으키는 모든 종류의 감정들이 싹트게 될 것이다.- Skinner의 견해에 의하면 체벌은 행동을 통제하는 가장 비효과적인 방법이며, 체벌이 너무 과 다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이유로 이 혐오적인 통제에 대한 반박은 사회에서 Skinner에 의해서 제 시되었다. Skinner는 교육에서 비효과적인 체벌은 최소화하고, 긍정적 강화를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Ⅴ. Bandura의 관찰학습1. 관찰학습의 정의관찰학습(observational learning)이란 다른 사람(모델)의 행동을 관찰한 결과 행동이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관찰학습의 과정은 Bandura(1977, 1986)가 처음 체계적으로 연구를 하였는데, 그는 관찰학습을 고전적 및 조작적 조건형성과는 다른 별개의 학습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조건형성 이론가들이 직접 경험을 강조한 반면에 그는 관찰을 통해 대리적 조건형성이 일어날 수 있다고 강조함으로써 조건형성의 범위를 확장시켰다.그에 의하면 사람은 타인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새로운 반응(행동)을 학습할 수 있기도 하고 특정의 행동을 억제하거나 회피하게 되기도하며, 때로는 새로은 행동의 형성이나 억제를 촉진하게 된다고 하면말한다.
I. 건강의 개념과 정의인간은 누구나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며 또한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건강하게 사는 것이란 바로 자신의 건강 상태를 정확히 알고, 건강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방법들을 통하여 건강 상태를 더욱 증진시킬 수 있는 생활양식을 말한다.먼저 건강에 대한 개념을 살펴보면, 세계보건기구에서는 건강(Health)에 관한 개념을?건강이란 단지 질병이 없거나 허약하지 않다는 것만이 아니라 신체적(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Health is a complete state of physical, mental and social well-being and not merely the absence of disease or infirmity : WHO 헌장 서문 - 1946)?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여기서 말하는?사회적으로 완전하게 안녕 상태?란 복잡한 사회 환경 속에서 각자의 기능과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갈 수 있는 만족스런 상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 정의는 추상적이고 선언적인 의미에 그치고 있어서 이어 1957년에 더욱 실용적인 정의를 내렸는데?유전적으로나 환경 적으로 주어진 조건 하에서 적절한 생체 기능을 나타내고 있는 상태?라고 하였다.우리는 일반적으로 건강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육체적인 건강만을 강조한다. 하지만 생활하여 온 것과는 달리 이 정의의 특징은 신체적 건강 외에 정신적 건강과 사회적 건강의 측면까지 포함하여 건강의 삼위일체를 설명해 주고 있다.II. 신체적 건강신체적으로 건강하다 함은 우리가 항상 추구하는 질병이 없고, 몸에 장애가 없는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소원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일 것이다. 새해에 어른들께 세배를 하면서 하는 인사말을 보면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인류의 아주 오래부터의 소망은 불로불사와 더불어 건강하게 사는 것이다.신체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영양소를 섭취하는 것과 적당한 운동, 적당한 수면, 그리고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하지만 요즘 현대인들의 생활습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적당한 수면을 취해야 하고, 아침식사가 하루 3끼의 식사중 가장 중요하단걸 알면서도 새벽까지 잠을 안 자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늦게 잠들어 아침밥을 거르고 허둥지둥 출근하거나 등교하는 사람이 많다. 이렇게 되면 직장이나 학교에서 하루 종일 몽롱한 상태로 일이나 공부를 제대로 못 하게 되고, 운전을 하는 사람은 졸음운전 때문에 사고를 내는 등 하루의 생활이 흐트러지게 될 것이다. 게다가 청소년, 여성의 흡연이 많아지고 있고, 바쁜 일상생활 때문에 자신의 몸관리는 뒷전으로 하고 그저 돈과 명예만을 쫓다가 많은 부분을 잃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돈과 명예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자신의 건강이란 것을 모르는 것일까?위에서 예를 든 것과 같이 행동하는 것이 몸에 나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실천하기란 정말 힘들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우리를 망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몸을 사랑한다면 혹사시키지 말고 아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하루 3끼 식사와 꾸준한 운동, 적당한 수면이 꼭 필요하다.정확한 시간에 기상해서 아침, 점심, 저녁을 매일 비슷한 시간에 먹으며, 적당한 휴식과 운동을 하고, 기분 좋게 잠이 든다면 건강을 위해서 보약을 먹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밥이 보약입니다.”란 광고도 있지 않은가?III. 사회적 건강사회적 건강은 사회에서 각자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해 나가느냐 하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직장인이 직장인으로서 직장에서 필요한 일, 맡겨진 일을 수행하며 가정에 돌아가서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사회에서 남에게 해를 주고 남이 애써 해놓은 것을 훔치거나 빼앗는 일을 하는 것은 물론 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을 회피하여 사회에 부담을 주는 경우엔 사회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정신질환이 없음은 물론 지능이 낮지도 않고 육체적으로도 건강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남에게 부담만 주는 경우가 있다면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누가 과연 그를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사회적으로 건강한 사람들 중에는 자기를 희생해가면서까지 남을 보살피기를 꺼려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문제에 능동적으로 관심을 갖는 사람도 많다. 즉 불우 청소년, 오갈 데 없고 의지할 데 없는 노인과 괘질 환자를 숨어서 돕는 사람, 부모도 버린 불구 아동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말이다.보통 많은 사람들이 신체적 건강만을 중요시 여기고 각종 종합검진이라던지, 운동을 한다. 물론 신체적 건강도 중요하다. 하지만 직장에서 자신의 일을 제대로 못하여 항상 상사한테 혼나고, 집에서는 무능한 남편이라고 아내에게 잔소리를 들으며, 자식들 역시 무시한다면 슈퍼맨이 된들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아무리 신체가 건강하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건강하다고 할 수 없다. 사회적 지위가 뛰어난 것만 가지고 사회적으로 건강하다고도 할 수 없다. 사회적으로 건강하다 함은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또한 함께 살아가는 사회 모든 구성원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IV. 정신적 건강정신적인 건강은 말 그대로 그 사람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얼마나 건강한지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일에 매사 부정적이며, 남을 깔보고 자신만이 최고라고 알며, 정신적 분열이나 정신병자 그리고 웃음이 없는 사람들을 보고 우리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이런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도 건강하지 못 할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고, 짜증나게 만들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웃음이 만병의 통치약이라고 말하는 황수관 박사의 말처럼 정신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는 항상 웃고 매사 즐거운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하며, 힘든 일이 있더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정신적 건강의 형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의 시기에 많은 부분이 형성된다. 이 시기에 형성된 정신적 상태가 어른이 되어서 나타나게 되고, 인격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들의 가정교육이 중요하다고 할수 있는 것이다.괴로운 일을 잊기 위해서 담배를 피고 술을 마시고, 심지어는 마약에까지 손을 뻗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위에서 말한 것 중 항상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과 동일하다. ‘난 뭘 해도 안 돼. 술이나 마시자’, ‘아! 우리 부장님 때문에 내가 못 살아. 담배나 피워야겠다!’ 같은 행동을 하는 것보단 즐거운 것을 생각하던가, 즐거운 것을 행하는 것이다. 영화, 연극을 보던가,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 찾아가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스트레스를 풀던가, 낚시나 축구 같은 취미생활을 하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담배나 술 같은 것은 그 당시 상황에서는 잊을 수 있겠지만 계속 스트레스가 남고 쌓여서 나중에는 더욱 큰 병을 가지고 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서 론朝鮮初期(조선초기)에는 개방적 사회체제는 지양되고 兩班官僚(양반관료) 중심의 폐쇄적 사회체계가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양인의 사민화 현상이 커져 신분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는 한편, 군역인구가 급속히 감소하였다. 거기에 더해 대외적으로 事大交隣(사대교린)에 바탕을 둔 쇄국정책을 실시함으로서 北虜南倭(북로남왜)의 침략이 잦았다. 특히 명종 10년의 을묘왜변과 선조 16년에 일어난 이탕개의 난을 계기로 서역과 공사천의 군역 편입이 실현되었는데, 당시 鎭管制(진관제)가 制勝方略制(제승방략제)로 전환되었던 군사제도의 전술적 변화에서도 양인 인구의 감소로 군역인구의 감소 현상을 알 수 있다.이와 같은 군제 변동은 조선후기 武科(무과)에 큰 영향을 미쳐 임진왜란으로 군액 징발체계가 붕괴된 상황에서 정부는 필요한 군병의 확보를 위하여 천인의 무과 급제를 용인 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이후 후금이 서북쪽 국경을 침략할 경우 무과 출신자를 즉시 赴防軍士(부방군사)로 전환하기 위해 廣取武科(광취무과)를 통해 많은 급제자를 선발하였다. 따라서 천신분이 불법적으로 무과에 급제할 수 있는 여지가 더욱 많아졌다.한편 똑같은 불벌체제를 고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인조.효종 대에는 천인의 무과 급제가 억제된 방면, 숙종 대에는 활성화되었는데, 이 같은 현상은 정치.사회변동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천인이 무과를 통해 신분 상승하는 과정을 다음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려 한다. 첫째는 임진왜란 직후부터 선조대 말까지의 賤人武科(천인무과)시기이고, 둘째는 전란은 끝났지만 후금의 침략이 예상되었던 광해군대의 廣取武科(광취무과) 시기이며, 셋째는 인조 대부터 숙종 대까지의 萬科(만과) 시기가 그것이다. 무과를 통한 천인의 신분상승 과정을 이와 같은 세시기로 나누어 고찰하면 어느 정도 천인의 신분변동에 접근할 것으로 본다.본 론제 1 절 천인무과와 신분변동조선전기에는 공사천의 무과응시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나, 세조 대의 북정과 이시애의 난 및 선조 대의 尼湯介(니탕개)의 난을 계기로 허통할 군병이 부족하였기에 선조가 壬辰倭亂(임진왜란)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공사천 무과를 삼의사의 잡과와 똑같이 설치하되 급제자는 종량과 동시에 장군에 편입시킬 것이며, 만약 사천이 군역에 편제되는 대가로 종량하면 그 본주에게는 許通(허통), 免賤(면천), 軍功補官(군공보관) 등의 방법으로 보상하였다.세조대 북정과 이시애의 난 및 니탕개의 난 등 국가의 존망과 직결되는 것이 아니면 종량의 폭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선조는 우선 '왜군격퇴'를 명분으로 공사천무과의 설치를 표방하였으나 양반계급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먼저 비변사가 천인무과 설치의 부당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첫째, 우림위는 금군에 속하므로 시취성적이 우수한 자만 제수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양인으로 삼을 것. 둘째, 본주에게 제수한 관직은 신중히 결정하되, 가능하면 代口免賤(대구면천)을 권장할 것 등이다.이와 같은 비변사 의견에 대해 선조는 관직의 제수는 물론 혼란이 예상되지만, 천인무과를 계속 실시하기 위해서는 국가 재정과 관련된 代口免賤(대구면천)은 적당하지 않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어쨌든 임진왜란으로 양반관료들이 천인무과의 설치에 정면으로 반대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조선 전기와 비교하여 천인의 신분적 상승여건이 조성된 것이다.그리고 세조, 선조 양대에 실시된 軍功免賤(군공면천) 등이 모두 전란을 계기로 가능하였음을 고려하면, 임진왜란은 전기의 엄격한 신분질서를 크게 붕괴시킨 요인 내지는 전환점이었다. 무과에 급제한 천인들이 모두 西班織(서반직)에 제수되지는 않았지만, 홍패만을 소지하고서도 사족으로 행세할 수 있었던 사례 또한 이와 같은 선상에서 파악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임진왜란 기간 중 선조가 생원, 진사시의 초시에 무재를 시험하고, 공사천 무과 실시를 시도한 것은 전란만이 아니고 조선, 일본, 후금의 세력관계를 통한 모든 국민의 방위의식 고취에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임진왜란 중 선조가 문치주의적 성리학을 강하게 배척한 반면 무예를 기본 소양으로 서원을 철폐하고 무학을 설립해야 한다"는 하교 등이 국난을 극복하려는 조처이긴 하지만 만약 공사천무과를 허락한다면 명분이 문란해지고 명분이 문란해지면 휴일 亂臣賊子(난신적자)가 반드시 출현할 것이라고 주장한데 이어 비변사에서도 사론이 이렇게 강한 이유는 자상할 계책도 없이 중국 조정에 추종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 문묘의 정례를 거행하고 공사천무과는 取才(취재)에 불과하므로 과거라고 호칭할 수 없으며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으니 즉시 중지하라고 하였다. 마침내 선조가 비변사의 의견을 좇음으로서 2년 이상 논의되었던 천인무과 실시는 중단되고 말았다.실제로 천인은 무과에 응시할 수 없기 때문에 임진왜란 중 무과를 통한 천인의 신분상승은 실현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기간 중에도 정부의 묵인 하에, 현편으로는 응시자의 불법적 수단에 의해서 무과를 통한 천인의 종량은 광범위하게 실현되었다.국가가 천인의 무과급제를 묵인한 사례를 보면, 먼저 피난지에서 실시한 병시무과에 토병이 대량으로 급제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음 사료에서 사천들도 토병이 되는 경우를 확인할 수 있다.이광정이 아뢰기를 "토병이 전무하여 육진이 모두 비었으니 공사천을 토병으로 충정해야만 버틸 수 있을 것입니디".... 승훈이 아뢰기를, "이광정의 말은 육진의 사정을 모르는 것입니다. 북방의 공사천은 三南(삼남)의 공사천과 같지 않아 호환이 있으면 모두 싸움에 나가니 일종의 토병입니다.위 사료에 따르면 土兵(토병)의 신분규정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토병을 양인으로 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사천도 토병으로 간주한 것이다. 여기서 감소된 육진의 토병을 공사천으로 充定(충정)하자는 전자의 경우는 군역 의무가 없는 공사천을 公民的(공민적) 존재인 양인으로 편제함으로 국가 재정을 확총하자는 의도가 강하게 내포되었다. 북방의 공사천은 하삼도의 공사천과 다르게 토병의 일종이라는 후자의 주장은 국가에 대한 공민적 부담을 지지 않기 위해서 천인신분으로 계속 남아 있되, 관따라 천인들의 무과에 급제할 수 있는 여지가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둘째, 임진왜란 직후부터 계속된 사회현상인데, 五衛(오위)의 군사제가 붕괴됨으로써 양반계급과 부유한 양인 상층이 군역에서 면제되거나 혹은 군역을 회피하는 현상이 확대되었다. 그 결과 군병의 총 숫자는 임진왜란 이전의 9분의 1에 불과하였으므로 천인의 양인화를 확대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모색되었다. 셋째, 광해군 대에 실시된 일련의 종량 정책은 광해군과 北人政權(북인정권)의 개장적인 신분정책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따라서 광해군 8년(1616) 12월 광취무과 실시 이전의 종량 정책중 선조 대의 그것과 구별되는 것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양계지방의 내노와 공사천이 보충대와 장용대의 거관을 통해서 종량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망한 사천이 內需司(내수사)에 투속한 다음 내수사의 勸力(권력)을 이용해서 종량하는 것이다.하지만 사천은 소유재산으로 인정되었기에 본주에게 공천으로 代口(대구)하거나 관직을 제수해야 하는 등 국가 재정 내지는 관직의 질서 확립 차원에서 문제가 되었다.광해군 전기는 무과급제에 대한 정부와 급제자가 상호 다르게 인식한 과도기였다고 생각된다. 즉 정부가 임진왜란 이후의 무과급제를 부방군사의 확보 수단으로 인식한데 반해, 무과출신자들은 官職(관직)과 官品(관품)을 제수받아 신분상승하는 수단으로 보았다. 따라서 당시 무과출신자들은 紅牌(홍패)를 소지한 순간부터 부방을 기피할 방법을 모색하였는데 첫째, 서울과 경기지역의 무과 출신자들은 부방이 제외되었으므로 지방응시자가 武科榜目(무과방목)의 거주지 난에 서울로 표기하거나 둘째, 軍官(군관), 千摠(천총), 把摠(파총),哨官(초관) 등의 군직에 제수되어 부방을 모면하고 셋째, 本邑(본읍)의 吏胥(리서)와 결탁하여 노쇠하거나 병들었다고 핑계한 다음 북도의 침방과 부방을 면제받는 방법이 있었다.무과급제자들의 부방 면제는 광해군 대부터 강화된 후금의 군사적 압력에 직면해서 개선되어야 할 시급한 문제였다. 이에 당시 정부가 니라 부방도 면제될 여지가 많았기 때문에 천인들의 무과응시는 점차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요약하면 광해군의 개방적인 신분정책을 배경으로 무과에 급제한 천인들의 신분적 지위가 상승되었으며, 또한 천인으로서 補充隊(보충대)와 壯勇隊(장용대)의 거관을 통하거나 혹은 納贖(납속).軍功免賤者(군공면천자)가 광취무과에 급제함으로서 양인으로서의 신분이 더욱 확고해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무과를 통한 천인들의 이러한 신분상승은 결국 조선 후기 신분직역의 변동을 초래함으로서 중세적 신분질서를 해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제 3 절 萬科(만과)를 통한 신분변동본 절에서는 북벌론에 적극적이었던 인조, 효종, 숙종대의 세 왕조에서 실시한 천인들의 무과급제 현황을 살피고, 이 시기 천인의 身分變動(신분변동) 추이를 살펴보려고 한다.광해군의 親候金政策(친후금정책)을 반정의 명분으로 삼았던 인조정권에서는 성리학적 명분론을 지배이념으로 표방한 결과 신분의 개방성은 폐쇄적 성향으로 전환되었으며, 이에 따라 천인의 양인화도 대폭 축소되었다. 병자호란을 중심으로 인조 대를 전.후반기로 나눌 때, 전반기는 反正功臣勢力(반정공신세력)이 정국을 주도한 관계로 특히 신분제의 보수화 경향이 심화된 시기였다. 따라서 병자호란 이전의 경우는 천인들의 무과 참여가 실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從軍(종군), 軍器(군기), 軍糧(군량)의 수송에 의한 軍功免賤(군공면천)과 公私賤(공사천).內奴(내노)가 補充隊(보충대)와 壯勇隊(장용대)를 거관함으로서 종량되는 현상은 전반적으로 억제되었다.인조반정에서 천인의 양인화가 실시되지 않음으로서 이괄의 난에서는 인조의 어가를 扈從(호종)할 천인이 한 사람도 자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정치적 격변기에 시행되었던 천인의 종량이 인조 대에서는 전혀 실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어가를 호위할 군사를 확보할 목적으로 천인무과와 관련된 두 가지 조처를 취하였다. 하나는 광해군 재위기간에 천인으로서 불법으로 종량되어 무과에 급제하였거나 금군이 .
관련 인터넷 싸이트 : http://myhome.shinbiro.com/~funhome/진시황.html진시황 그는 과연 폭군인가 영웅인가?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이륙할 때, 가장 마지막까지 육안으로 확인되는 인류의 건조물은 만리장성이라고 한다. 사람들에게 중국을 상징하는 문화물을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슴없이 진시황대에 세워진 만리장성을 꼽을 것이다.하지만 진시황 시대에 아방궁, 불로초,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중국 진(秦)나라의 시황제를 얘기할 때마다 따라붙는 단어들이다. 진시황은 13살에 왕위에 올라 37년 동안 통치하면서 봉건제를 폐지, 천하를 36개군(郡)으로 나누고 군밑에 현(縣)을 두는 군현제(郡縣制)를 도입하여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였다. 스스로 황제칭호를 사용하고 짐(朕)이니 폐하(陛下)니 하는 황제 전용어를 쓰게 한 것도 이때부터다.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하고 북으로 흉노에서부터 남으로 월남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넓힌 것도 진시황의 업적이다.진시황제는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는 과업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중국역사상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통일제국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폭군으로 부각되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중국이 전국 7웅에 의해 분열되어 서로 각축을 벌이는 시기인 기원전 259년에 태어난 그는 불과 13세의 어린 나이에 진왕에 즉위하였으나 친정(親政)에 들어가 본격적인 영토 확장작업에 착수한 것은 23세 때였다. 놀랍게도 그의 통일사업은 기원전 230년부터 221년까지는 아주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기원전 8세기부터 분열된 중국이 하나의 통치체제 밑에서 역사를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그는 중앙집권적 전제정치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그는 황제라는 존호를 최초로 제정하고 이세(二世)나 삼세(三世)는 물론 만세(萬世)까지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 칭했다. 또한 전국을 하나의 통치체제로 편입시키기 위해 군현제도를 실시했다속의 인장에 의해서 그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었다. 이 인장에는 읽을 수 없는 문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것이 육국문자 즉 진시황제에 의해서 폐지되었던 문자였던 것이다. 같은 문자가 전국에서 통용된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의사소통을 도모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단순히 국토통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참된 뜻으로의 천하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진시황의 통일정책으로 또 하나 유명한 것은 '동궤(同軌;궤(軌)를 같이 한다)' 즉 바퀴 폭의 통일이다. 당시 각관련 인터넷 싸이트 : http://myhome.shinbiro.com/~funhome/진시황.html관련 인터넷 싸이트 : http://myhome.shinbiro.com/~funhome/진시황.html관련 인터넷 싸이트 : http://www.startour.pe.kr/local/china/china_infom_1_01.htm국은 제각기 다른 나라의 수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의 폭을 달리 하고 있었다. 수레는 대부분 전차(戰車)였다. 말이 끄는 전차는 도로에 깊은 바퀴자국을 만들고 그것이 레일같이 되어 있었다. 그 레일에 차륜을 넣어서 수레를 달리게 했던 것이다. 전차는 싸움을 위한 것이므로 타국의 전차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자국의 폭을 다르게 해 두면 적의 침입을 막는데 효과가 컸다. 그런데 이제는 천하가 통일된 것이다. 바퀴자국의 차이는 전국적인 교통의 흐름을 저해시킨다고 여긴 시황제는 전국에 '치도(馳道)'라는 도로를 만들고 차륜의 폭을 통일시켰다.치도에 대해서는 진(秦)나라가 멸망하고 30년이 채 되지 않은 무렵 한(漢)나라의 문제(文帝) 시대의 가산(賈山)이란 사람이 글을 남겼다. 그것이 도폭은 50보(步)였다고 한다. '보(步)란 길이의 단위이며, 1보는 지금의 1.35m 정도이며, 50보의 폭이면 67m 정도이다. 그리고 3장(丈)마다(당시의 1장은 2.25m이며, 3장은 6~7m) 수목이 심어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성들이 동원되어 도로가 만들어지고, 그 도로가 비에 의해 유실되면 보수를 해야따라서 도로로 인해 각지의 교역(交易)이 번창하게 되었고 산업경제가 활성화되는 데도 큰 힘이 되었다.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시켰다는 점도 아주 중요하다. 한 홉[合], 한 되[升], 한 말[斗]이라든가, 길이의 단위인 보(步), 장(丈) 등이 각국에서 약간씩 달랐다. 되나 말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 어느 나라에서는 한 말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래서 전국의 도량형을 엄격히 통일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천하를 통일했던 바로 그 해에 실시되었다. 한 홉이라는 표준 용기를 제작하여, 전국에 그것을 따르도록 명령했다. 중앙에서 보내온 한 홉짜리 용기가 동북 지방 근처에서 출토(出土)된 것으로 보아 사실상 전국에 배당되었던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산업과 경제가 발달했다. 이제까지는 각지에서 다시 하나하나 환산해야만 했던 것이 그러한 수고를 면하게 되었다. 화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진(秦)의 화폐가 전국에서 통용되었다.그의 불로장생(不老長生)에 대한 집착은 너무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이 영원하기를 원하듯, 통일제국이 영구히 존속하도록 온갖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집념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가 기원전 210년 50세의 나이로 사망한 후 얼마 못되어, 진 제국의 장수(長壽)도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관련 인터넷 싸이트 : http://www.haochina.co.kr/tour/seoan2pic.htm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진시황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어떻게든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진시황은 서시(徐市)에게 어린 소년 소녀 3천명과 많은 보물을 실은 배들을 거느리게하여 동해에 있다는 신선이 사는 섬에 가서 불로장생의 약초와 약을 구해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서시는 몇 년이 지나도록 약을 구하지 못하자 돌아와 거짓말로 둘러댔다. 그러나 서시일행은 끝내 영약을 구하지 못하고 일본쪽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 후 진시황은 스스로 신선이라 m, 동서 약 6백m, 남북 2백여m), 그 외에도 무수한 건축물이 조성됐다. 당연히 이를 위해 과다한 세금을 징수하게 되어, 통일된 후에는 세 부담이 무려 20배로 늘었다고 백성들이 불평할 정도였다.본래 만리장성은 진시황 때 이 무렵 중국 북방을 위협하던 흉노족은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것이다. 흉노는 아시아 최초로 기마술을 터득한 유목민족으로 놀라운 기동력으로써 중국의 북방을 위협하고 있었다. 장성은 서쪽의 감숙성 임조에서 시작, 황하 북쪽을 휘돌고 음산을 따라 조나라와 연 나라 때 이미 축조되었던 성벽을 연결, 동쪽으로 요령성 양평에 이르는 것으로 현재보다는 훨씬 북방에 이어져 있었다. 비록 기존에 있던 성벽을 연결한 부분이 있었다 하더라도 참으로 엄청난 대역사였다. 성벽은 단순히 높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넓이도 대단해서 성벽위로 5필 정도의 말이나 10열의 병사가 동시에 보행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우리가 만리장성을 중국통일의 상징물로, 또 진시황이라는 전제군주의 위대한 권력의 화신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진시황은 죽음을 그렇게 피하려 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열세살 즉위 할 때부터 자기가 죽어서 들어갈 묘 자리를 파고 있었다. 시황릉(일명 여산릉)은 높이가 116m, 주위의 길이가 2.5m, 사방이 각각 600m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로 무려 70여만 명의 죄수가 동원되어 공사를 했다. 관은 동으로 주조하였으며 무덤 내부는 궁전과 누각 등의 모형과 각종 진귀한 보물들로 가득 채웠던 것이다. 그리고 수은으로 황하, 양자강 및 바다를 본 떠 만들고 수은을 계속 흐르게 하였으며 천장에는 진주로 아로 새긴 해와 달과 별들이 반짝이게하여 지상의 세계를 그대로 펼쳐 보이도록 했다. 아울러 고래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조명시설도 해놓았다. 또한 내부에는 활을 설치하여 도굴자가 침입할 때는 즉시 자동 발사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진시황이 죽어 시황릉에 매장되게 되자 후궁들도 모조리 생매장되었으며 매장 직후에는 비밀유지를 위하여 능 안의 모든 문을 걸어 잠그어 매장 너무나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무엇보다도 국가권력에 의해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억업되는 최초의 선례가 됐던 셈이다.진시황 통치 34년의 어느 날 문무백관을 한자리에 불러모아 함양궁에서 큰 잔치를 하고 있을 때, 박사 순우월이 황제에게 고하길, "은과 주나라가 1천여 년 동안이나 왕위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왕족이나 공신을 제후로 봉하였기에 가능했으나, 지금은 군현제도 때문에 설사 왕족이라 할지라도 일개 백성에 지나지 않으며 모름지기 옛일을 돌이켜 보지 않고는 국가의 장구한 안전을 바랄 수 없습니다." 이에 군현제도의 초안자이며 개혁론자인 승상 '이사'란 이가 반박하며 "즉시 승상께서는 사민필수(四民必須)인 '의약, 복술, 농경, 진의 역사 기록' 을 제외한 모든 글, 다시 말해 시, 서, 제자백가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태우셔야 합니다." 또한 노생과 후생이라는 자들을 특별히 신뢰하여 후대했는데, 이들은 시황제에게 아첨, 재물을 잔뜩 얻어 가지고 도망간 뒤에 진시황에 대한 온갖 욕설을 퍼붓고 했기에, 진시황이 사람을 시켜 정탐하게 하니 실로 조정을 비난하는 이가 많았는데 그 수는 460명이었다. 시황제는 산채로 이들을 구덩이에 모두 매장해 버렸다.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0~1986)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구비문학대계』, 1980∼1986관련 인터넷 사이트 : http://myhome.netsgo.com/kimjh97/History/3/10.htm사실 진시황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강력한 추진력으로 역사상 가장 거대한 통일 국가를 실현시켰던 것이다. 진시황의 왕성했던 정력은 대단해서 하루에 1석(약30kg)의 서류를 결재하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전국시찰만 해도 통일 후 다섯 번이나 강행군하였다. 교통편도 변변치 못했던 그 시대에 중국 대륙을 다섯 번 시찰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라 할 것이다. 시황제 37년 10월, 황제는 다섯 번째 지방 시찰에 나서 회계산에 다녀오는 길에 해안을 끼고 북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