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여전히 교수님의 보이지 않는 강요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항상 판타지 소설이나 읽어오던 나에게 이런 책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교수님께 감사를 드린다. 전혀 관심 밖의 일들을 이런 책들을 통해 알게 되고 또한 거기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다니 믿을 수 없다. 한 학기 동안 글쓰기 수업을 하며 그전과 달라진 점이 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글을 써 본적이 없기 때문에. 허나 그 수업 이후로 읽기 싫어하던 책들도 이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장르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을 의향이다.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우리안의 파시즘 이란 책의 요약 및 내가 느낀 점·읽으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옮기도록 하겠다.파시즘의 어원은 파시스모 (fascismo). 고대 로마 근위병의 장식인 파쇼(fasci o)에서 유래했다. 무솔리니 체제의 전체주의적·집단적·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지칭했던 말은 다시 스탈린 시대에 가서는 혁명에 맞서는 무장자본주의 자들을 적대시하는 뜻이 되기도 했다. 오늘날 그 쓰임의 영역은 크게 확장돼 있다. 파시즘의 현재적 개념은 권위주의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통칭에 가깝다. 우리 안의 파시즘 은 같은 뿌리에서 싹터 민중의 삶과 의식 속에 다양하게 가지를 쳐온 일상적 파시즘 에 주목했다. 책은 민중은 독재 권력의 희생자였지만 동시에 공범자였다. 는 통렬한 자기비판으로 논의를 펴나간다. 예컨대 4월 총선 에서 재확인된 지역주의는 합의독재 의 기반을 민중 스스로가 마련해주고 있는 사례라는 것.무의식중에 일상을 잠식한 파시즘의 흔적은 예상치도 못했던 곳에서 드러난다. 김기중 변호사는 주민 등록제를 전체주의적 법질서의 토대라 꼬집는다.주민등록증 일제 갱신때 나라가 시키는 일 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단 두 달 동안 2,500 만 명의 성인이 강제 없이 동원된 사례는 우리가 병영사회 이자 동원국가 에 살고 있음을 입증해준 근거라고 주장한다. 세칭 386세대인 권 인숙씨 는 여성문제에서 파시즘의 뿌리를 본다. 학생운동에서건 조직사회에서건 성공을들먹이는 이런 말들은, 전체에 누를 끼치면 윤리적 중죄자로 취급되는 전체주의 사고방식에서 나왔다는 해석이다.또 13번째 이야기에서 전진삼씨는 한국 건축을 파시즘의 증식로 라 파악하고, 엘리티즘을 추구하는 건축물들의 파쇼적 혐의를 거침없이 따진다.세종문화회관, 예술의 전당, 독립기념관 등의 건축양식이 하나같이 정권 안정을 희구하는 기념적 상징들로 가득하다 는 등의 문제제기는 퍽 의미가 깊었다.예전 70-80년대를 풍미하던 구호는 "파쇼타도", "독재정권 물러나라", "타도 " 등의 구호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당시 집권하는 정치세력들이 만들어 놓은 정권이 바로 파시즘에 기초한 전체적, 독재적 정권이었기에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외치고 외치다 붙들리고 쓰러진 것이 아니던가. 요즘 2000년대에 접어든 이 시점에서도 이러한 주장이 쟁점이 되고 있는가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지도자를 한번 보자. 예전처럼 장기집권을 위해 법과 질서를 제 맘대로 구미에 맞게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를 비롯하여 정치적인 독재와 전체주의를 견제할 만한 장치를 곳곳에 마련하여 두었으며, 지금도 끊임없이 이를 제도화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파시즘은 이탈리아 무솔리니에 의해 주창되었고, ' 주의'와 같은 정치상의 한 흐름으로 볼 수 있는데, 이의 발현된 모습이 전체적, 독재적, 국수적인 모습 등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모두 정치의 장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러하기에 우리 한국에서는 흔히 독재정권이라 불리는 과거 정권은 모두 순조로운 정권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최근 선거를 통한 합법적인 정권교체의 과정이 이루어지면서 정치적 파시즘 논의가 더 이상 대중적인 화두가 되지 못한다. 자연 예전의 그 흔하던 집단적인 시위도 줄어들고, '파쇼' 및 '파시즘'이란 용어도 언급되는 횟수가 줄어들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렇다면 우리 주변에서 '파시즘'은 사라진 것인가? 우리가 모르는 사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그리사회적 관습의 형태로 드러날 때에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책 '우리 안의 파시즘'은 이렇게 드러나는 파시즘의 각 형태들을 소개하고 있다. 파시즘은 결국 힘의 논리라고 생각한다.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국가 앞에 선 나약한 개인, 가부장제 사회에 길들여진 여성과 남성, 제국주의의 칼날 앞에 왜소해지는 약소국, ' 드림'을 꿈꾸며 선진국으로 향하는 제3세계 노동자들, 이들을 착취하는 선진국의 자본가들, 등등 그 기저에는 모두 힘의 원리가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그 원인이 한국사회의 특수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반공주의와 군사주의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말 중 하나가 '빨갱이'이고, 가장 무서운 법이 '국가보안법'이었으며, 국가기관 중 성역화 하던 곳이 '안기부'였다. 지금은 개인의 사상에 대한 탄압이 예전처럼 강제적이고 물리력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직까지 레드컴플렉스가 존재하고 다양한 반공표어와 포스터 및 팻말이 곳곳에 세워져 있는 현실이고 보면, 반공주의는 일상화된 파시즘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나라 국방의 의무에서는 성인 남성이라면 모두 군대를 다녀오도록 하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그곳을 다녀오면 어른이 된다고 한다. 그곳에서 배우는 것이 무엇 이길래 어른이 되는 것일까? 어른이 되어 돌아오는 곳을 왜 사람들은 가기 싫어 정당하지 못한 편법까지 동원하는 것일까? 그곳에서는 혈기왕성한 나이에 가장 활발하게 자기개발을 해야할 시기에 억압적인 군사문화를 배우고 사회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경험들을 무용담처럼 모든 자리에서 수시로 타인과 공유한다. 그러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군사문화를 신봉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억울하게 군대를 다녀온 자의 보상심리 같은 .파시즘은 이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소위 '진보'를 부르짖는 집단속에서도 파시즘은 존재한다. 진보세력 내에서의 전통적인 성역할의 존재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고착된 성역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화된 파시즘의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있다. 산업연수생이란 이름으로 합법적인 통로를 밟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불법취업자들이다. 이들의 약점을 알고 있는 고용주들은 헐값으로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밀입국의 수단까지 동원하여 한국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이 동남아시아등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이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인종적 열등감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백인에게서 느끼는 열등감을 흑인 등의 유색인종에 대한 우월감으로 보상받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약자에 대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파시즘의 유형이 아닐 수 없다.한국은 자유 민주국가인가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국회에서부터 일상의 가정에까지 미친 듯이 퍼져 가는 이기주의의 물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서로 간에 대화도 통하지 않고 타협도 할 줄 모르는 집단들이 사회 전반에 게릴라처럼 퍼져 있는 것 같다. 의약분업, 여당의 국회법 단독처리,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논쟁, 혐오시설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반발, 지역감정 . 우리 안의 파시즘'은 일종의 사회 비판 서적으로서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한 고찰을 풀어내고 있어서 그런지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가슴속이 시원해지고 그 동안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지 못했던 문제의식이 명확해짐을 느낀다.이 책에는 현 사회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파시즘적 징후-반공주의, 사적이해를 우선시하는 정치문화, 군사주의, 전체주의적 사고를 구조화시키는 언어생활, 규율과 복종을 내면화시키는 교육, 약자와 소수자를 타자화시키는 가부장적 혈통주의, 전체주의를 생산하는 증식의 기계로서의 건축물들, 교회가 가진 세속적 권위주의 등-들에 관한 날카로운 포착들이 즐비하다. 또한 일반적으로 민중은 독재의 희생자로 여겨지지만 이들 또한 독재의 공범자로 지목하는 대목은 아주 인상적이다. 일상 속 민중들의 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한 파시즘적 징후들은 기존의 권력층에서 주입한 면이 있음에도 공범의 사슬을 벗어나기에는 힘든 면이 있다. 그 에 난무하는 다양한 이기주의의 모습들이 사회적 다양성의 정당한 이유가 될 순 없다. 사유재산을 지킬만한 진지한 사유가 부족하고, 공존에 앞서 행해지는 정치인들의 뻔뻔한 모의 작당,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구하지 않은 채 추진되는 기념관 건립 논쟁, 당연히 잡음이 발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율배반적인 자기모순을 바라볼 자신도 없는 한심한 나라의 '한'민족이란 생각이 든다.파시즘은 은유인가, 아니면 현실에 대한 하나의 비판적 재개념화인가. 내가 이 책을 손에 들고 가장 먼저 가졌던 의문이었다. 지금 이 시대를 파시즘을 통해 말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 것이며 또한 그것은 보편적으로 사용가능한 비판적 개념이 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은 비록 파시즘을 외재성이 아닌 내재성을 위한 분석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미 외재성을 향한 비판적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 안의 파시즘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파시즘의 대립 쌍으로서 체제로서의 민주주의를 두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파시즘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 분석대상의 층위가 다를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민주주의는 또 다른 비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안의 파시즘이란 민주주의 내의 파시즘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서문에서 예를 든 4.13총선 외에도 우리는 폭력과 대중동원, 그리고 합의와 동의라는 현 정치의 파시즘적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우리 안의 파시즘에서 중요한 것은 이 합의와 동의하는 내재적 규율로서 의식, 무의식적으로 남아있는 우리의 파시즘적 욕망과 충동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합의와 동의를 내재적 의식, 무의식으로 환원할 수 없는 외재적인 것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현 정치의 정치적 수사를 넘어서는 파시즘의 외재성을 우리는 충분히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의 파시즘을, 일상적 파시즘을 넘어 이 사회 안에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2001년 3월 22일 대학에 와서 첫 레포트 숙제를 받았다. 대우 자동차의 정리해고에 관한 영상물과 '아름다운 청년 전 태일' 이란 영상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다..영화 전 태일은 젊은 지식인 김영수가 청년노동자의 아름다웠던 짧은 생애를 더듬어 평전으로 써 가는 과정을 기본 축으로 삼고 있다. 남루한 애옥살이 탓에 12살에 학교를 그만 둔 전 태일이 날품팔이를 전전하다 평화 시장의 다락방 공장에 견습공으로 첫발을 디뎠을 때 실밥먼지가 자욱히 떠다니는 그 곳엔 변변한 휴일도 없이 하루 15시간을 넘는 고된 노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허리를 펼 수 없는 좁디좁은 작업장은 여느 노동자들과 똑같이 그의 삶 을 끊임없이 소모시켰다. 폐결핵에 피를 토하고, 혹은 기침을 쉴 새 없이 터뜨리고, 졸다 미싱 바늘에 손가락을 찔리고, 혹은 굶기를 밥먹듯 하다 위장병을 얻고, 신경통에 관절 마디마디가 시린 월급 3천원 짜리 '인간 이하'의 생활을 보며 그는 교통비를 모두 털어 나이 어린 여공들에게 풀 빵을 사주거나 잔업, 철야를 줄여주는 소극적인 행동에 나선다. 극중에 주사를 맞으며 졸음을 쫓는 모습은 가슴을 찡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우연한 말속에서 발견해낸 근로기준법은 전 태일의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그는 '노동자'로 바꿔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각성은 곧 적극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시장 안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화 "삼동 친목회"를 만든 그는 근로조건 실태 조사에 나서 "평화시장 종업원 중 경력 5년 이상인 사람은 전부 환자"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혀낸다. 그러나 조사 결과가 적힌 진정서를 들고 노동청의 문을 두드렸을 때 그에게 돌아온 대답은 "알았으니 가봐"였다. 환풍기를 달아달라는 최소한의 요구조차 업주들과 노동청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쓸모도 없는 근로기준법을 불구덩이에 던져 넣는 것 뿐 이었다.그래서 그는 결국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외마디의 외침과 함께 스스로를 불살랐다.극에서..노동자의 모습은 그야말로 최소한의 인간으로서의 대우 밖에 못 받는다. 사용자 아니 고용인은 노동자들을 일만 하는 기계로 생각하며 고장나면 교체해버리는 모습으로 그려냈다. 결핵에 걸려 피를 토하며 일하던 노동자를 그 동안의 월급도 주지 않은 채 못 나오게 하는 모습에서 그 당시의 고용인들 모습을 여실히 들어내준다. 그리고 공무원과 경찰은 노동자들을 사람으로조차 취급하지 않는 것 같다. 공무원은 노동자들의 권리개선 항의를 보잘 것 없는 일로 여기며 귀찮은 일을 떠맡은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극중에 전 태일이 공무원에게 진정서를 건네러 갔을 때 모습이 바로 그렇다. 경찰들은 또 어떠한가.. 노동자들이 단결을 꾀하여 민중에게 자신들의 뜻을 표현할 때 그것을 무마시키기 위해 충돌을 피하지 않고 폭력을 휘두른다...고용인..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의 단결을 깨려는 의의는 잘 모르겠다. 노동자들의 타협을 불허로 만드는 그런 모습은 영화를 지켜보는 동안 깨우치지 못했다. 허나 단편적인 나의 생각이지만 고용인 자신들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서 그런 것은 아닐까. 당연한 것이지만 그들에게 이익 보단 손해가 많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노동자들이 단결을 꾀하는 것은 불만이 있어서 그런 것 일 테고 그 대상은 결국 고용주이다. 그로 인해 고용주들에게 돌아오는 큰 피해 때문에 일찍 그런 싹을 제거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전 태일이 자살을 할 수밖에 없던 모습.. 그것은 결국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노동자들을 인간이 아닌 기계로 취급하는 그 시대의 구습을.. 모든 노동자들의 권리를 그 혼자서 책임지고 희생하였다. 그 당시의 그 구습을 타파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몸을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결국 지금의 노동자들의 권리는 그의 희생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분신 장면을 볼 때는 정말이지 말로 표현 못할 느낌을 받았다. 온몸이 오한을 느꼈으며 어찌할 줄 모를 심정이었다. 근로기준법과 노동3권의 필요성 또한 잘 나타난다. 누누이 말하지만 노동자들은 일을 하는 기계로 취급받는다. 허나 노동자도 같은 인간이다. 그들 또한 일한 만큼의 대가가 충분히 주어져야 하며 부당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돼다. 그렇기에 근로기준법과 노동3권은 꼭 있어야 한다. 특히 노동3권 중 단체교섭권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노동자들 또한 주어진 일을 할 때 그들이 일 할 환경이나 대우는 고용주와 서로가 교섭을 통해 만들어 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다. 노동자와 고용자.. 그 둘의 관계는 서로가 꼭 필요로 하는 존재로 계층이 나뉘어져 있어서는 안될 그런 불가분의 관계이다. 노동자는 필요한 것을 고용자에게 부탁하고 고용자 역시 노동자들에게 바라는 점을 밝히며 서로의 관계를 좋게 이끌어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서로를 인정해 줘야 하며 서로의 입장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도 근로 기준법과 노동3권은 꼭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