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Kari Marx)1. 생애와 저술1) 1818∼35(트리어시대)마르크스는 1818년 프로이센 라인주의 트리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했다. 그의 양친은 모두 유대혈통이었으나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피하기 위해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였다. 그의 가족은 부유하지는 않았으나 안락한 생활을 누렸으며, 종교와 정치에 대해서 급진적이지는 않았지만 자유주의적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트리어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2) 1835∼41(대학생 시절)마르크스는 본 대학에서의 잠시 동안의 수학을 거쳐, 베를린 대학에서 5년간 공부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헤겔철학을 접하게 되고 또한 주로 종교비판에 관심을 쏟고 있었던 '청년헤겔학파'로 알려진 좌파적 철학자집단과 만나게 된다. 그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제목의 박사학위논문을 썼다. 이 시기의 받은 헤겔주의적 영향은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3) 1842∼43(저널리즘과 철학)이 기간 동안 마르크스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였고 또한, 쾰른이 『라인신문』 편집인으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 그의 논설은 언론자유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보호조치등에 관심을 가진 급진적 자유주의자로서의 마르크스를 보여주고 있다. 신문이 1843년 초 정부에 의해 탄압받게 되자 이후 여름 내내 마르크스는 철학연구에 몰두하였다. 그 결과가 『헤겔법철학비판』과 이다.4) 1843∼45(파리와 공산주의)1843년 말부터 1845년 초까지 마르크스는 파리에 머물렀다. 파리에서 마르크스는 급진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과 어울렸고 그의 철학적 입장을 명확히 하게 된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에서, 프롤레타리아가 그 자신을 해방시키고 그럼으로써 전 사회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자신의 믿음을 진술하고 있다. 그는 또한 『1844년 경제학·철학수고』또는 『파리수고』로 알려진 자본주의에 대한 장문의 비판을 썼다. 이 수고의 중심주제는 자본주의하에서의 인간소외의 개념이었다. 파리시절 동안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일생 동안 계속될 우정을 맺게 되었다룬 장이 중요하다.9) 1852∼62(미국신문에의 기고)생활비를 벌기 위해 마르크스는 10여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유욕 데일리 트리뷴지의 유럽통신원으로서 거의 500편의 논설을 기고했다. 그 대부분은 역사나 정치에 대한 짤막한 분석인데 특히 영국의 인도지배 및 영국정치에 대한 논문이 중요하다. 이것들은 프랑스문제에 대한 저술을 보완해 주는 것으로 유용하다.10) 1864∼72(제1인터내셔널)마르크스는 유럽 노동조합조직인 '국제노동자협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는 협회의 발기사와 규약을 집필했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초기에 마르크스는 프루동을 추종하는 일군의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해 성공적으로 대처에 나갔으나, 후시에 바쿠닌을 중심으로 한 또 다른 무정부주의자들과의 대립으로 협회는 분열되게 된다. 이 시기에 씌어진 가장 중요한 저술은 1871년의 파리코뮨에 대한 유고인 『프랑스 내전』이다.11) 1873∼83(만년)마르크스의 만년은 극도의 건강악화로 점철된다. 그는 『자본론』의 원고를 게속 집필해 나갔으나 별 진전이 없었다. 그는 흥기하는 독일 노동운동을 멀리서 지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고타강령비판』이라는 중요한 저작을 남겼다. 또한 그는 러시아역사 및 사회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자본주의가 성숙되지 않은 후진국에서의 혁명전략에 대해 러시아 사회주의자들과 의견을 교류하였다. 마르크스는 1883년 3월 영국의 런던에서 폐종양으로 사망했다.{ 최장집, 『마르크스』, p.3 ∼ p.8,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02. 사상▣ 개관-마르크스주의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전시킨 일단의 학설체계이다. 인간학, 역사철학, 정치·경제 이론의 3부분이 상호연관을 맺고 있다. 이들을 결합시켜 일관된 논리체계를 형성하려는 마르크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말년, 특히 사후에 내려진 다양한 해석과 소련의 공식 이데올로기로서 채택된 이후의 정치적 요청으로 말미암아 많은 타협과 절충이 이루어졌다. 오늘날 '마르크스주의'는 공산주의·사회주의 제정당의 이념과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현실의 모순을 '소외'라는 말로 표현했다. 노동자 계급이 노동의 결실을 회복하게 되는 그날이 도래할 때, 소외는 극복되고 모든 계급의 구분들은 사라지게 될것이다.{ 최장집, 『마르크스』, p52,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0마르크스에 있어, 인간은 활동적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의 활동은 절대자의 자기인식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 자신의 창조이며 변혁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에 있어 인간은 결코 완성될 수 없으며, 인간에 대한 최종적인 궁극적 규정도 불가능한 것이다. 때문에 마르크스의 인간관은 결코 개념으로만 머물 수는 없다.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지 인간이 과거에 무엇이었나를 이해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히 현재까지의 존재 그것이 아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가능성이며 당위성인 것이다. 실천에로의 마르크스의 전환도 이에서 나온다. 즉 그의 인간관은 단순한 개념에 머물 수 없으며, 자신의 인간적 가능성을 실현시키지 못하는 소외된 인간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인간성을 쟁취하기 위한 인간주의적 투쟁의 계획인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인간관은 그의 인간주의적 소외론 및 탈소외론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2) 사적 유물론사적유물론, 즉 유물사관은 마르크스주의 사회관으로서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인 변증법적 유물론 또는 유물변증법과 일체를 이루고 있다.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을 역사의 추진력으로 간주한 뒤 인류의 역사는 계급없는 사회의 출현으로 정점에 오를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고 시작되는 『공산당 선언』의 첫 구절은 마르크스 역사관의 가장 강력한 표현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모든 역사는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 사이의 투쟁의 연속으로 비쳤다.역사는 전쟁·발견·발명·조약·음모들 등으로 전개된다는 것이 종전의 견해였다면 마르크스는 이들이 밖으로 드러나는 허상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 마르크스에게 역사의 동인은 인간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생산수단의 발전에 있었다.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물질에의 의존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마르크스이리하여 마르크스는 이제부터 인간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사상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선언하고서, 자신의 철학을 실천적인 휴머니즘 이라 명명하였다.마르크스는 애초부터 인간의 본질로서 중요시한 점은 오히려 인간의 실천 이며, 구체적인 행동 이었다. 이제 모든 철학은 현실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르크스가 생각하고 있는 물질은 완전히 인간화된 물질이다. 세계와 역사에 대한 관찰, 그리고 인간의 전체적인 사고와 행위를 규정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과의 관계 속에 있는 물질 혹은 물질과의 관계 속에 있는 인간 이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그의 역사적인 유물론에서 중요시한 것은 그 안에서 물질과 인간이 서로 적응해 나가는 과정이었다.그런데 인간의 실천은 그것이 공동체 가운데서 수행된다는 사실을 도외시할 수 없다. 포이어바하가 인간을 소외된 개인으로 파악하려 했다면, 마르크스는 인간을 항상 그가 소속되어 있는 사회의 견지에서 바라보려고 했다.3) 계급마르크스주의에 있어 사회계습의 개념은 그 기본 개념 중의 하나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전 교의와 이에서 도출되는 정치적 프로그램의 상징이 되었다. 이 개념은 '계급적 입장, ' '계급적 관점' 등의 용어로 표현되는데, 이는 마르크스주의 진영에 있어 최근까지도 '마르크스주의적 입장' 또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과 같은 의미로 이용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계급적 입장' 이란 곧 '부르주아적 입장'과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마르크스주의 교의에 있어 계급개념의 역할이 이렇게 막대함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이 항상 쓰고 있는 이 개념의 정의를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저작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음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여러문장을 비교해 봄으로써 그것을 추론할 수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사회계급이란, 공통의 경제적 이해를 지닌 사회집단 또는 그 구성원들이 동일한 경제적 조건을 공유하고 있는 집단 등과 같은 보다 포괄적인 범주 안에서 다양하게 분화되어 나타나는 집단을 의미하고예술문제에 대한 짤막한 견해들과 소견들이 적지 않게 눈에 띠며, 드물기는 하지만 간혹 보다 상세한 분석작업도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진정한 사회주의 를 실랄하게 비판하는가 하면, 하이네(Heinrich Heine : 1797 ∼ 1856)나 베르트(G. Weerth),헤르베크(G. Herwegh) 및 프라일리그라트(F. Freiligrath)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 후 마르크스는 문학의 화해적 성격을 강조하는 피셔(Fr. Th. Fischer)의 이상주의 미학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마르크스는 특히 발자크(Honor de Balzac : 1799 ∼ 1850)의 리얼리즘적 기술방식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러한 발자크에 대해 그는 정치 경제학 분석작업을 완료한 후 방대한 연구에 들어갈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라살(Ferdinant Lassalle : 1825 ∼ 1864)의 글 (Franz Von Sickingen)>(1859)을 공격한다. 라살은 이 글에 실러(Johann Christop Friedrich Von Schiller : 1759 ∼ 1805)의 본을 받아 농민전쟁을 개인적인 비극으로 묘사할 뿐 아니라, 농민대중 대신에 기사당(騎士黨)의 대표인물들을 혁명의 역사적 주체로 만들고 있다. 후기 엥겔스의 서간에 들어있는 문학이론에 관한 언급들(하부구조와 상부구조{ 『경제학 비판』 서문에서 "인류는 그들의 생활의 사회적 생산에 있어서 일정한, 필연적인, 그들의 의지(意志)와는 독립된 여러 관계, 그들의 여러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조응(照應)하는 여러 생산관계를 가진다. 이러한 여러 생산관계의 총체(總體)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이룬다. 즉, 그 위에 하나의 법제적(法制的) 정치적 상층(上層)건축이 치솟아 있고, 거기에 일정한 사회적 의식형태가 조응하는 현실적 토대를 이루는 것이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양식은 사회적 정치적 및 정신적 생활과정 일반을
롤랑 바르트1. 생애 및 사상적 경향롤랑 바르트는 1915년 11월 12일 셰르부르에서 태어났으나, 해군 사관이었던 아버지가 16년의 해전에서 죽자 곧 거기를 떠나 바이욘에 갔기 때문에 그곳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그가 속한 사회 계층은 가난한 부르조아지이었다. 그는 청년 시절을 셍 제르멩 데 프레에서 지냈으나, 방학때는 언제나 바이욘으로갔다. 파리에서 그의 어머니는 제본으로 생계를 이어 나갔으며, 바이욘에 있던 그의 숙모는 피아노 선생이어서, 거기서 피아노를 배웠다. 그가 다닌 학교는 바이욘 중학교, 몽테뉴 중학교, 루이 르 그랑이었다. 1934년 3월 철학 바카로레아를 준비하다 객혈을 하여 피레네 산맥으로 요양을 갔으며, 그 후 그는 고등 사범학교를 포기, 소르본의 고전 문학반에 들어간다. 그때 나중에 나치에 학살당한 쟈크 벨과 소르본 고전 극단을 만든다. 전쟁중에 그는 사나토리움에 있었는데, 거기에 있으면서 사나토리움의 학생 잡지 『실존』에 관해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때 그는 사르트르에 심취해 있었다. 46년경에 그의 친구가 알고 있던, 『콩바』지의 나도에게 짧은 글을 보이는데, 그것이 그의 인정을 바아 그에게서 청탁을 받는다. 그것이 그의 『잠재태의 기술』의 시작이다. 그것은 두 사람의 문인의 주목을 받는데, 그들은 크노와 베겡이다. 그는 베겡의 소개로 쟝 케이롤과 함께 쇠이유에 연결된다. 1948∼50년에 그는 부카레스트와 알렉산드리아에서 선생을 하는데,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는 그에게 야콥슨, 마토레, 예름슬레우를 가르쳐 준 이야기의 기호학의 그레마스를 만나게 된다. 1950∼52년 동안에 그는 문화 교류국의 명예 박사 담당 직원으로 있었으먀, C.N.R.S에서 사학으로 장학금을 받게 된다. 그는 그러나 그것에 대한 논문을 끝내지 못한다. 그때 로베르 브와젱의 알선으로, 뤼시엥 페브르와 죠르쥬 프리드만을 알게 되어, C.N.R.S의 사회학 부분으로 옮겨가게 된다. 거기서 받은 장학금으로 쓰려 한 것이 의복의 사회 - 기호학적 분석이었으며, 그것다. 모든 것은 감각에서 시작된다. 육체,대상, 분위기 등이 자아를 위한 최초의 공간을 형성한다. 그리고 바로 구체적인 효과를 통해 문학 형식, 주제, 이미지 등이 탄생한다.『미슐레 그 자신』은 현상학적 비평이라는 새 물결을 탄 작품이지만, 바르트의 후기 저작들과 비교해 볼 때 두 가지의 사항이 눈에 뛴다.첫째, 바르트는 미슐레의 저작을 파편화시키는 방법론을 썼다. 글쓰기의 목적이 일관성, 연속성, 구조 - 미슐레가 써낸 역사서에는 이런 특징이 갖추어져 있다. - 에 관한 것이 아니라, 파편화된 텍스트의 즐거움, 기이한 문장이나 이미지로부터 느낄 수 있는 독자의 쾌락을 그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둘째 이러한 텍스트의 즐거움은 바르트로 하여금 텍스트의 주위를 빙빙 돌면서 글을 쓰게 하는 자유로움을 주고 있는데, 그 즐거움은 주로 몸으로 느끼는 즐거움이다. 그러니까 즐거움(육체적 쾌락)이 글쓰기와 공간 및 실체에 대한 물리적 경험을 서로 연결 시켜 주는 매개 노릇을 하고 있다.『라신에 대하여』는 상상의 세계에 집중한다는 점에서는 『미슐레 그 자신』과 닮은 점이 있으나, 『미슐레 그 자신』처럼 조각난 단편이나 문장을 가진 글을 써 나간 것도 아니고 또 실체와 특성에 초점을 맞춘 현상학적 기술도 아니다. 바르트는 라신의 언어나 상상력에는 별 관심이 없고 라신이 창조한 등장인물들이 갇혀 있는 그 비극적 우주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바르트는 자신의 작업이 온건한 정신분석적 언어 로 라신형 인물들의 인간학 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비극적인 우주에 어떤 인물들이 살고 있는지 물으면서, 바르트는 라신의 연극들을 중층적으로 검토한다. 그리고 그 극들이 라신의 비극 체계를 다양하게 발현시키는 변종들이라고 취급하면서 그러한 상황, 그러한 인물을 만들어 낸 근본적인 관계를 포착하려고 노력한다.평론가 바르트의 활동 중 눈에 띄는 또 다른 사항은 아방가르드 문학행위를 옹호하고 권장한 것이다. 그의 첫 번째 관심사는 연극적 글쓰기였는데, 그것은 그가 1950년대 베르톨트 어떻게 분절하는지 파악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바르트는 이처럼 기호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했으나 후기에 가면 역설적으로 기호의 과학성 을 거부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는 1960년대 초반을 회상하면서 나는 과학성이라는 황홀한 꿈을 통과했다 라고 다소 냉소적으로 말하고 있다. 바르트는 의미작용의 과학성을 거부하는 모든 것에 대한 관심, 이것을 기호학의 정의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기표를 기의 위에 두는 기표우선주의가 곧 과학성의 거부라고 말하게 된다.바르트는 후기에 가서 비록 의미작용의 과학성을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긴 했지만, 오히여 그의 후기 저작에서는 한층 진일보한 의미작용의 층의를 드러내고 있어서 더욱 흥미롭다.결론적으로 바르트 담론의 주된 관심은 기호와 그것이 환기시키는 의미에 대한 체계적 반성이 될 터이다. 왜냐하면 의미가 있는 곳에 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바로 그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4. 구조주의자로서의 롤랑 바르트구조주의{ 1960년대에 들어와서 K.마르크스, M.하이데거, S.프로이트 등의 견해에 대립하여 프랑스에서 새로이 형성된 사상적 조류이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실존주의나 마르크스주의와 같이 명확한 형태를 갖춘 사상적 경향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인류학자·사회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철학자 M.푸코, 리시안 세바크, L.알튀세르, 정신분석학자 J.라캉 등이 구조주의를 주창한 주요 멤버인데, 그들 사이에서도 통일된 의견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공통점이 있다면 마르크스주의나 실존주의 등 이제까지의 사상적·사회과학적 업적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여 현대과학의 종합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특징으로서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논쟁을 벌인 점에 있고, 인간의 주체성과 자유의 문제에 대해서 새로운 견해를 전개하려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사회의 구조와 시스템에 대해서, 그리고 의미론(意味論) 등을 재구성하려고 한다.가 충분한 권위 있는 사상으로 자리잡자, 바르트는 이 사상과 거리를 두면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후기 구조주의자 로 부르는 것는 것. 텍스트의 상상적인 꼬리같은 것. 서가위에 고정될 수 있는 것.텍스트 - 방법론적인 영역. 표현되는 것(라캉의 실재the real). 표현의 과정에서 말해지는 것. 언어안에서 담론의 움직임 안에서 존재하는 것. 작업활동에 의해서만 경험되는 것. 멈출 수 없는 것. 횡단의 움직임.2 위계와 장르의 파괴로서의 텍스트 - 같은 방식으로 텍스트는 (좋은) 문학에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위계 질서나, 심지어 단순한 장르 구분에도 포함될 수 없는 것이다.작품 - 좋은 작품과 나쁜 작품이라는 질적인 구분이 가능하다. 장르의 구분이 있다.텍스트 - 위계질서나 장르의 구분이 적합하지 않다. 오래된 분류들을 향한 파괴적인 힘이다.예) 바타이유는 어떤 작가인가? 그는 시인도 소설가도 논평가도 경제학자도 철학자로도 분류되기 어렵지만 그는 하나의 텍스트를 지속적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텍스트가 분류의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것은 텍스트가 언제나 어떤 한계의 체험에 연루되기 때문이다.3 하나의 기의로 닫히는 작품과 기의가 무한히 지연되는 텍스트 -텍스트는 기호에 비해 접근하거나 체험되는 것이다.작품 - 하나의 기의로 닫힌다.1 명백한 기의가 있는 경우 - 문헌학적 대상으로서의 작품2 궁극적이고 은밀한 기의가 있는 경우 - 해석이나 해독의 대상으로서의 작품.텍스트 - 기의의 무한한 지연과 관련되며 기표의 영역의 활성화이다. 기표의 무한성은 궁극적인 기의의 표현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희의 개념을 지칭한다. 텍스트를 지배하는 논리는 이해가 아니라 환유이다. 텍스트는 언어와 마찬가지로 구조화되어 있으나 탈중심적이며 개방적이다. 단절, 중복, 변주의 연속적인 움직임에 의해서 인지된다.4 일원론적 작품과 복수적 텍스트 - 텍스트는 복수태이다. 이 말은 텍스트가 단지 여러 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의미의 복수태 자체를, 환원 불가능한 복수태를 구현한다는 뜻이다.작품 - 원천이나 기원이 있으며 일원론적이다텍스트 - 복수성. 한계없는 복수성. 복수적 의미의 공존이 아니라 의며, 그것을 역사에서 떼어놓으려는 경향을 띤다. 왜냐하면 어떠한 울타리도 영속성의 관념 없이는 세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가 아주 명료하게 움직이는 것은 역사가 거부된 곳에서이다.바르트의 문학은 1850년 이후의, 자신을 성찰의 대상으로, 객체로 생각할 수 있게 된, 제도화된 문학이다. 자신에 대한 성찰이 가능한 문학은 문학을 어떤 것으로 규정하려고 하며, 그 규정이 사회성원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될 때 그것은 제도가 된다. 제도가 되면 그것은 역사성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제도의 역사는 가능하다. 제도의 역사란 문학에 대한 생각의 역사이다. 그가 문학이라는 기호의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2 언어와 문체 : 언어란 사람들 사이의 말의 규칙의 총체이며, 문체란 개인적인 언어이다. 바르트의 언어·문체는 소쉬르의 랑그/파롤에 가깝다. 그에 의하면 언어는 문학 이편에 있고, 문체는 문학 저편에 있다. 바르트가 언어와 문체를 구분하게 된 것은 순진한 사회적 규약의 총체로서의 언어와, 개인의 물질적 경험에서 야기되는 필연적인 일탈로서의 문체를 구별하지 않으면 문학적 언어의 불투명성을 설명하기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3 기술 : 기술이란 문체와 언어 사이에 있는 형태적 실재이다. 랑그와 문체란 시간과 생물학적 개인의 자연적 산물이다. 글쓰기는 역사적 연대성의 행위이다. 언어와 문체가 대상들이라면, 글쓰기는 기능이다. 그것은 창조와 사회 사이의 관계이며, 사회적 목표 때문에 변화가 된 문학적 언어체이다. 글쓰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그것이 창조의 심리학과 결부된 것이 아니라,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인간의 의도적 선택과 관련된 것이라는 것이다.4 잠재태 : 잠재태는 기술이라는 용어와 함께 바르트의 애용어이다. 잠재란 無가 아니라 의미하는 부재이다. 음운론에서 나온 잠재태라는 개념은 여러 분야에 폭넓게 적용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것을 지시하는 개념이다. 의미론에서는 명백한 시니피앙이 없는데도 그것이 그
탈 춤1. 탈춤의 기원탈춤이란 연기자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자신과는 다른 인물이나 동물 혹은 초자연적인 존재로 분하여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연극이다. 탈춤의 기원은 크게 세 방향으로 논의되어 왔다.1) 산대희설(山臺戱 )산대희에서 산대도감극이 생겨났으며 산대극의 전파로 각 지방의 탈춤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산대희는 신라에서 시작되어 고려를 거쳐 조선에서도 국가적인 행사로 계속 공연되었다. 산대도감극이라는 명칭은 조선 전기 궁중의 나례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나례도감(儺禮都監)이나 산대도감(山臺都監)의 관장 아래에 있으면서 산대라고 불리우는 무대에서 상연되었던 때의 호칭에서 유래된 것이다.국가적인 행사로 공연되었던 산대도감극은 1634년(인조12년) 유학자들의 너무 문란하다는 주장으로 잠시 중단되고, 영조 이후에는 폐지되기에 이른다. 산대도감에서 녹을 받던 연희자들이 해산하여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지자, 점차 민중 오락인 탈춤으로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 이두현 교수의 학설이다.2) 기악기원설(伎樂起源說)음악 전공인 이혜구 교수의 학설로, 중국 오나라의 기악에서 기원을 찾는 외래기원설이다. 백제인인 미마지(味摩之)가 중국 남조 오나라의 기악을 일본에 전했다는 기옥이 13세기 일본 문헌인 『교오꾼쇼(敎訓 少 )』에 전하며, 그 기록에 근거할 때 우리나라에도 기악이 있었고, 그것을 오늘날의 탈춤의 기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양주별산대놀이의 개략적인 내용이 기악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점이 논의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근거가 된다.3) 농경의식설(農耕儀式說)농경의식설은 조동일 교수의 주장이다. 논의의 타당성을 위해 앞의 두 학설의 문제점을 제시한다. 산대희설의 경우, 산대도감극은 관에서 주도하던 것으로 상층문화인데, 그것이 대표적인 하층문화인 탈춤이 되었다는 것은 침강문화설을 의미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이다. 기악기원설의 문제점은 천여년 동안의 탈춤의 발전을 인정하지 않은데 있다. 7세기 경에 존재했었을 기악과 그보다 천년이 지난 조선조 후기의을 한 것이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취발이의 아들을 낳는다. 인형으로 표현된 취발이의 아들 마당 이도 붉은 탈에 야성적인 머리카락 하나를 이마에 늘어트렸다.늙고 비생산적인 노장과 대조적으로 젊고 생산적인 취발이의 행동양상은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인 출산과 빠른 성장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노장과장에서 노장은 겨울신이고 취발이는 여름신이다.양주별산대놀이에서 제6과장 샌님과장의 제3경에는 샌님과 포도부장이 나온다. 둘 사이에는 각시가 있다. 샌님은 늙었으나 돈이 많아 젊고 예쁜 각시를 아내로 두었다. 그런데 각시는 샌님이 외출하기만 하면 포도부장을 불러들인다. 샌님의 일반적인 반응은 상대남성인 포도부장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이고 각시 또한 온전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탈춤에서의 반응은 의외이다. 샌님은 두 남녀를 불러놓고 자신의 욕심이 과했다며 둘이 잘살라고 한다. 탈춤에서 여름과 겨울의 싸움에서 젊고 생산적인 여름이 승리하고 늙고 비생산적인 겨울이 패배한 또 하나의 예인 것이다.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동일 교수는 현존하는 탈춤의 내용을 예로 들어 그것의 구조 속에서 여름과 겨울의 싸움에서 겨울을 물리치고 여름을 맞아들이는 내용이 잔존하고 있음을 검증해 보임으로써 자신의 풍농굿기원설, 농경의식설을 증명하고 있다. 풍농을 위한 주술인 성적(性的)결합 과 여름과 겨울의 싸움 이 기본이 되어 점차적으로 사회적인 것으로 이행되었다는 것이다.농악대 풍농굿에서는 농악대와 함께 선비나 각시, 창부, 포수 등으로 분장한 잡색들이 탈을 쓰고 뒤를 따랐다. 그들이 풍물을 연주하는 악사가 되었고, 잡색의 역할은 확대되어 탈꾼이 되었다는 것이다.탈춤의 기원을 뱀설화로 본 것은 박종성님의 최근 연구 결과이다. 조동일 교수의 학설에정면 도전한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뱀설화 유형 - 마을에 큰 뱀이 나타나 여러 가지 재앙을 가져오자 정해진 기간에 처녀를 공희로 바치고 뱀으로 인한 재앙이 물러났다 -에서 탈춤의 기원을 밝혀볼 수 있다는 것이다. 노장과장 바보제 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바보제는 당시 절대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던 카톨릭 교황과 신부를 바보로 만들어 조롱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그 기간동안 그것이 허락되었던 것이다.지배층이 허락했던 이유도 이와 비슷한 논리로, 그 기간을 제외한 나머지 기간동안 지배와 억압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흉년이 들었다는 표면적인 이유로 허락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는데, 그것의 이면적이유는 비판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농촌탈춤은 마을굿에서 떨어져 나올 수 없는 한계 때문에 지배층에 대한 비판도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지배층이 허락하는 범위내에서 비판이 가능했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전승이 중단된다.2) 떠돌이 탈춤떠돌이 탈춤은 녹번. 애오개. 사직골 딱딱이패와 같은 서울 근교의 본산대 놀이패와 경남지방에 본거지를 둔 오광대를 퍼뜨렸다는 대광대패, 그리고 유랑 연예집단이었단 남사당패가 공연하던 덧뵈기춤이 있다. 남사당패는 풍물과 버나(대접 돌리기), 살판(땅재주 넘기), 어른(줄타기), 덧뵈기(탈춤), 덜미(꼭두각시 놀음)등 여섯 가지 연희 종목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연희 종목 중 하나인 덧뵈기 춤은 가면을 쓰고 문둥이춤 등을 추며 간단한 극적 구성을 갖추었다. 노장과장이나 양반과장과 흡사한 내용으로 진행되는 등 남사당패의 탈춤은 본산대패나 대광대해와 더불어 본격적인 도시탈춤의 발달을 재촉하게 된다.3) 도시탈춤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탈춤이다. 떠돌이 탈춤을 모방하는 한편, 농촌 탈춤을 계승·발전 시킨 의미를 갖는다. 도시 탈춤이 번성했던 곳은 교통과 상업이 발달하였단 지역이다. 이속이나 무부(巫夫)가 주도하거나 상인들이 후원자가 되어 사람을 모으고 물건을 팔 수 있어 투자한 이상으로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도시탈춤은 마을굿에서 떨어져 나와 연극으로 독립되는 경향이 있어 체제에 대한 강한 비판과 예술적 세련미가 더하여졌다.도시탈춤은 크게 네 유형으로 나뉘어 진다. 해서탈춤과 중부의 산대놀이계열, 남부의 들놀음(野遊)계열과 오광대계열이 그것이다.(1) 제2과장은 옴중마당, 제3과장은 연닢, 눈끔적이마당이다. 제4과장은 팔먹중마당으로 첫째 거리는 북놀이, 둘째거리는 곤장놀이, 셋째 거리는 침놀이로 되어 있다. 제5과장은 노장마당으로 첫째 거리는 파계승놀이, 둘째 거리는 신장수놀이, 셋째거리는 취발이 놀이이다. 제6과장은 샌님마당으로 첫째 거리는 의막사령놀이, 둘째 거리는 샌님, 미얄할미놀이, 셋째 거리는 샌님, 포도부장놀이이다. 제7과장은 신할아비 신할미마당으로 신할아비와 신할미의 가족간의 갈등관계를 나타내고 있다.(3) 야류계열1 동래야류(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들놀이라 부르는 탈춤으로, 대개 시내에서는 장터, 마을에서는 타작마당, 시냇가 넓은 곳 등에서 연희되었다. 연희자는 대개 지방의 평민이었고, 하급관리도 섞여 있었다. 동래야류는 4마당으로 구성된다. 제1과장은 문둥이마당으로 천형의 설움과 원한을 나타내는 것으로 영남지방에 나병 환자가 많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제2과장은 양반마당으로 샌님을 노새에 빗대어 익살을 부리는 등 양반의 체면을 여지없이 농락한다. 제3과장은 영노마당이다. 영노라는 가상동물이 등장하여 양반을 잡아먹으로 한다. 제4과장은 할미마당으로 영감의 처첩간에 싸움이 벌어진다. 봉건적인 가족제도의 모순상을 나타내고 있다.2 수영야류(중요무형문화재 제43호)수영동에 전수되는 탈춤으로 정초에 연희자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지신밟기를 해주고 전곡을 추렴하여 놀이 경비를 충당하였다. 지신밟기를 하는 동안에 일정한 장소에서 들놀음에 사용되는 탈을 제작하는데, 이 작업이 끝나면 탈제를 올리고 탈놀이가 무사히 끝맺기를 기원한다. 놀이가 끝나면 연희자들은 탈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제사를 지내면서 제액과 만사형통을 빌며 탈들을 전부 태워 버린다.수영야류는 4마당을 짜여진다. 제1과장은 양반마당, 제2과장은 영노마당, 제3과장은 할미 영감마당, 제4과장은 사자춤마당으로 구성된다.(4) 오광대계열1 고성오광대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7호)경산남도 고성지방에서 전승되는 탈놀이로, 낙동강 도연의 탈춤을는데 비하여 양주별산대놀이는 일상회화조의 대사를 주로 하고, (ex.옴중과 취발이의 대사) 영남 탈춤에서는 취발이가 없는 대신 말뚝이의 재담이 주가 되어 있다. 말없는 탈의 연기에서는 노장의 몸짓춤이 가장 우수한 것으로, 춤과 몸짓만으로 소무로 인한 파계 과정을 훌륭하게 보여준다.노래는 장단을 청하는 짤막한 불림과 ,, 등으로 가짓수가 많지 못하다. 덕담 외에는 첫 허두만 부르다가 곧 춤으로 바꾸어 버리는 춤의 시작신호 같은 구실을 한다. (ex."양주별산대놀이에서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노던 달아 , 녹수청산 깊은 골에 , 금강산이 좋단 말을 풍편에 넌짓 듣고 등 허두만으로 타령장단 반주가 연주, 염불 장단 불림으로 얼-수 절-수 지-화 허-자 저르르르 가 있고, 굿거리 장단 불림으로는 얼-수 절-수 )탈춤의 무대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는 산대라고 불리우던 가설무대에서 놀았고, 민중의 놀이로서는 동리나 산기슭의 비탈진 곳에서 놀았다. 왼편에 탈막(改服廳), 오른편에 삼현청(三絃廳)악사석이 있고 가운데에 탈판, 탈판보다 얕은 곳이나 산비탈에 관객들이 삼면에 둘러앉아 구경하게 된다. 탈막은 탈이나 옷을 갈아입는 곳으로 전체를 백포(白布)로 둘러싸고 탈판으로 두개의 출입문이 있어 연기자들의 입퇴장에 사용하였다. 봉산탈춤의 탈판은 탈판 둘레에 다락을 만들어 특별관람석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중부지방 탈놀이의 의상은 대체로 양반이나 중, 서민남녀 등장인물들의 의상과 소도구가 조선후기의 그것과 같으나 배역에 따라 특수한 상징적인 특성을 보인다. 예를들면 천신을 나타낸다는 연닢은 등에 학(鶴)을 그린 청창의(靑 衣)에 붉은 띠를 매고, 푸른 행전을 치고 화선( 扇)을 든다. 지신을 나타낸다는 눈끔적이는 등에 호랑이를 그린 회색 장삼을 입고 붉은 띠에 회색 관을 쓰고 꽹과리를 가진다. 노장은 등에 호랑이를 그린 회색 장삼을 입고 붉은 띠에 회색 행전, 송낙을 쓰고, 목에는 긴 염주, 손목에는 작은 염주를 걸고 한 손에 화선을 들고 다른 손에 지팡이를 짚고, 투전도 가지
Vygotsky1. Vygotsky의 소개러시아의 심리학자 비고츠키(Lev S. Vygotsky : 1896∼1934)는 3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그 동안 180편이 넘는 논문, 저서 및 연구물을 출판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결핵으로 고생하였고,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교육받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심리학자인 비고츠키의 이론은 그 당시 정치적인 어려움으로 정부로부터 거부 당하고 말살되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의 계속적인 연구로 비고츠키의 아이디어는 확장되었고, 그의 사상은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2. Vygotsky 이론의 이해유아들은 문제를 해결하며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정신의 도구들을 사용한다. 여기서 말한 정신의 도구는 유아들이 점차적으로 높은 수준의 정신적인 능력을 확득해 가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러시아 심리학자인 비고츠키가 만들어낸 개념이다.1) 비고츠키 이론의 틀 : 심리학과 교육의 기본원리. 유아들은 지식을 구성한다. 발달은 사회적 맥락과 분리될 수 없다.. 학습은 발달은 주도한다.. 언어는 정신발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1) 지식의 구성비고츠키는 삐아제와 마찬가지로 유아들은 그들 자신의 이해를 구성해 가며,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수동적으로 재생산하지 않는다고 보았다.1 인지적 구성은 항상 사회적으로 매개되며, 현재와 과거의 사회적 상호작용에 영향 을 받게 된다.- 교사가 유아에게 보여주는 것들은 그 유아가 무엇을 '구성할 것인가'에 영향을 미침- 교사의 생각은 유아들이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학습하는가를 중재하거나 그에 영향을 미침2 물리적 조작과 사회적 상호작용 모두 발달에 필요하다- 유아는 적목을 만져보고, 물리적으로 비교해 보며, 이리저리 놓아보고, 또 다시 쌓아보고 해야 비로소 '크다/작다'의 개념을 갖게 되며, 그 같은 개념을 자신의 인지적 저장소에 포함시키게 된다.3 비고츠키 접근법에서는 학습을 지식의 내면화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유아가 학습과정에서 취하게 되는 능동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전반적인 문화나 사회적 특성)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1 문화가 인지에 영향은 준다는 아이디어는 매우 중요- 유아를 둘러싼 총제적인 사회 환경은 그 유아가 무엇을 아는가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그 유아가 어떻게 사고하는가를 결정짓기 때문- 유아는 그 속에서 특별한 종류의 생각하는 사람, 기억하는 사람, 의사소통하는 사람이 되는데 이것은 사회적 맥락의 반영2 사회적 맥락이란 하나의 역사적 개념- 인간의 마음 또는 정신은 인간의 역사나 계통발생, 그리고 한 사람의 개인적 역사나 개체발생의 산물- 현대 인간 정신은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생겨나며, 개개인의 정신은 또한 특이한 개인적 경험의 산물3 유아들이 그들만의 지식과 이해를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라, 문화 속에서 축적된 풍부한 지식의 체계를 자기 것으로 내면화하는 것으로 가정- 발달해 가는 유아는 이같은 정보를 획득하며 획득한 정보를 사고에 활용- 우리 선조들의 문화사는 우리의 지식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 과정에도 영향 미침4 사회적 맥락은 발달에 핵심적인 역할- 정신 과정의 획득에 결정적이기 때문- 정신 과정은 개인의 내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 사이의 교환에서 발생도 가능- 유아는 정신 과정을 나누고, 이를 다른 사람과의 상호 작용에 활용함으로써 하나의 정신 과정을 배우거나 획득(즉, 타인과 더불어 공유한 경험을 가진 뒤에야 유아는 비로소 그 정신 과정을 내면화하고 활용)삐아제를 비롯한 기존의 여러 이론에서는 '인지'를 개인에게만 국한된 내면적인 일련의 정신 과정으로 보고 있으나, 비고츠키 학자들은 '인지'란 서로 나누어 가지는 과정이며, 이같은 정신 과정의 획득에는 사회적 맥락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비고츠키는 성장과 성숙의 역할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공유된 경험이 인지발달에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3) 학습과 발달의 관계비고츠키의 이론에 의하면, 발달이 학습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학습이 발달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는 새로운 정보를 학습하려고 하는 특정한 발달 수준에 도달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삐아제의 연구에 따르면, 유아가 논리적으로 사고하려면 구체적 조작기에 도달해야 한다. 이는 사고의 내면적인 재조직은 새로운 것을 학습하는 능력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즉, 더 높은 수준의 정보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수준의 발달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그 정보를 학습할 수 없다는 것이다.2 모든 유아들마다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각 유아의 발달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확실한 처방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 학습과 발달 사이의 정확한 관계가 유아마다 다를 수 있고 영역마다 다르다.- 교사는 각 유아에게 교수-학습 과정을 조절할 방법들을 마련해야 한다.(4) 발달에 미치는 언어의 역할언어가 인지에 좀더 큰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언어는 사고를 위한 실제적인 메카니즘이며, 정신의 도구이다. 언어는 사고를 더욱 추상적이고, 융통성 잇고, 즉각적인 자극들로부터 독립적인 것으로 만든다.1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는 언어를 통해 새로운 상황에 영향을 주고 , 따라서 그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2 언어는 유아로 하여금 상상하고, 조작하며, 새로은 생각을 만들어 내고, 그런 생각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언어는 우리가 서로 사회적 지식을 교환하는 방법들 중의 하나- 언어는 인지 발달의 도구이며, 인지 과정 그 자체의 일부분3 언어는 다른 정신적 도구들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데 중요한 도구가 된다.- 어떤 활동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그 활동에 관해 말을 해야 함(말을 하지 않고서는 서로 상대방의 의미를 알 수 없기 때문)4 언어는 인지 과정을 구성하는데 필요한 공유된 경험을 촉진시킨다.- 교사와 유아와의 언어적 상호 작용으로 주제에 대한 학습 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지식 발견의 인지 과정도 획득2) 비고츠키 이론의 틀 : 고등 정신 기능교사는 유아를 가르쳐서 도구를 획득하게 하며, 유아들은 자신의 행동을 지배하고, 독립성을 갖추고, 좀더 높은 수준의 발달을 이루기 위해 이 도구들을 사용하게 행 착오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2 고등 정신 기능 : 학습과 교수를 통해 획득되는 인지적 과정이며, '숙고되고', '매개되고', '내면화된' 행동들ㄱ 매개된 지각 : 비슷한 색깔을 구별하는 것.ㄴ 의도적 주의 집중:어떤 자극의 두드러진 정도에 상관없이 어떠한 자극에 대해서도 집중하는 능력.ㄷ 의도적 기억 : 무엇인가를 기억할 때 암기 전략을 사용하는 것.ㄹ 논리적 사고 : 논리나 다른 전략을 사용해서 정신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모든 고등 정신 기능은 하등 정신 기능의 토데 위에 문화마다 각각 다른 방식으로 세워진다.(2) 고등 정신 기능의 성격고등 정신 기능은 의도적이고, 매개적이고, 내면화된 행동이다.1 고등 정신 기능은 개인에 의해서 통제되고, 개인의 사고와 선택에 따라 달리 사용된다는 점에서 의도적 유아들이 고등 정신 기능을 획득하게 되면 문제해결에 가장 적절한 환경에 맞추어 행동2 매개는 사고 과정에서 특정한 표시나 상징을 사용하는 것으로 행위나 환경 안에 있는 사물을 나타내기 위해 대용물을 사용하는 것을 포함 매개는 보편적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매개체를 사용할 수도 있음3 내면화된 행동은 개인의 정신 속에 존재하고 관찰될 수 없는 것으로, 이는 유아들이 하는 행동이 외적 표현과 동일한 구조나 초점 및 기능을 유지하면서 정신 내부로 변화해 들어가는 것을 말함(예) 머리 속으로 더하는 것은 내면화된 행동내면화 과정의 초기 단계에서 어린 유아가 자기 혼자 중얼거리거나 노래를 부르며 암기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고등 정신 기능이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 줌(3) 고등 정신 기능의 발달비고츠키는 고등 정신 기능이 특정한 방식으로 발달한다고 보았다.1 고등 정신 기능은 하등 정신 기능에 의존2 고등 정신 기능은 문화적 맥락에 의해 결정3 고등 정신 기능은 공유된 기능에서 개별적 기능으로 발달4 고등 정신 기능은 도구의 내면화를 포함3) 비고츠키 이론의 틀 : 근접 발달 지역문화적 도구를 획득하고 좀더 높은 정신적 발달을 이루려면 그 도구가 유아의 근접발달지달 지역의 경계가 되는 두 수준 사이에서 나타난다.ㄱ 하한계- 유아가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가능한 수준- 유아가 혼자서 알고 행동할 수 있는 수준ㄴ 상한계- 유아가 도움을 얻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수준- '도움을 받아야 수행할 수 있는' 수준2 근접 발달 지역안에 있는 기술과 행동은 역동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현재 유아가 도움을 받아야 할 수 있는 일도 내일이 되면 독립적으로 할 수 있게 됨-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성취 수준은 유아가 발달해 감에 따라 변화3 유아가 도움을 받아 수행할 수 있는 수준이란 상호 작용의 결과로 유아의 정신적 활동에 향상이 있는 경우는 모두 포함된다.- 상호 작용 예 : 암시와 실마리 제공하기, 질문의 내용을 다시 설명해주기, 유아에게 교사가 설명한 내용을 다시 말하도록 하기, 유아가 이해한 것 묻기, 과제 설명하기 등4 근접 발달 지역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아가 좀더 높은 수준의 사고와 지식을 달성함에 따라 계속 변한다.- 발달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역이 계속해서 연결되는 것5 근접 발달 지역은 유아에 따라 다양하다.- 어떤 유아는 학습에서 아주 작은 향상을 얻기 위해서도 가능한 모든 도움을 필요로 하는 반면, 어떤 유아는 아주 작은 도움에도 커다란 도약을 하게 됨6 근접 발달 지역의 크기는 같은 유아라 하더라도 학습의 지역에 따라, 그리고 시기에 따라 다르다.- 유아가 학습 영역에 따라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한 영역이 있음(2) 교수-학습을 위한 시사점 (근접 발달 지역)- 과제 수행시 유아를 돕는 방법- 유아를 평가하는 방법- 발달에 적합한 내용을 결정하는 방법 등에 영향을 미침3. 유아 학급에서의 교육 원리1) 교육 원리적 측면1 학습은 발달이 아니며, 유아의 현실적 발달수준보다 앞서야 하며, 따라서 우리는 학습을 통해 유아의 지식형성을 촉진시킬 수 있다.2 유아의 발달은 인위적인 환경에 의해 그 방향이 결정지워진다.3 효과적인 과제 선정의 중요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4 각 유아들의 상호 주관성(intersubj.
1. 서론만해 한용운의 작품중에서 가장 대표작은 그의 연작 시집 제목이자 대표시인 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조국 광복의 신앙으로 승화된 망국(亡國)의 비애를 나타낸 시라고 한다. 아마도 이 시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부분,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 이 시에서 나오는 '님'일 것이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만해 한용운의 생애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신분적·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그의 작품과 작품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님'이란 시어(詩語)도 신분적·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생각해 본다면, 각기 서로 다른 해석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만해 시의 독특한 운율의식에 관해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다른 여느 시에 비하여 경어체를 사용한다든지, 만연한 문체를 나타내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을 본론으로 들어가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2. 본론본론에서는 서론에서 언급하였던 만해의 생애, 그의 책에 대한것들과, 그의 시 에 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논의 되어 왔던, 그의 시에 등장하는 '님'의 의미 또한 알아볼 것이다.1. 卍海 韓龍雲의 생애(生涯)1879년에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1944년에 생을 마감했다. 승려시인이면서 독립운동가 였다.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본명은 정옥(貞玉)이다. 아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卍海). 응준(應俊)의 아들이다. 유년시대에 관해서는 본인의 술회도 없고 측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유년시대는 대원군의 집정과 외세의 침략 등으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 시기였다. 그 불행한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여건은 결국 그를 독립운동가로 성장시킨 간접적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4세때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10년동안 한학(漢學)을 익혔다. 14게때 고향에서 성혼의 예식을 올렸다. 16세 되던 해 동학란(東學亂)과 갑오경장이 일어났다.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대로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설악산 운동으로 전개, 추진되었다. 52세 때 불교 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그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 전까지는 권상로가 맡아오던 이 잡지를 인수하여 불교의 홍포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향상·기강확립·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 55세 때 부인 유씨와 다시 결합하였다. 57세 때 조선일보 에 장편소설 을 연재하였고, 이듬해에는 조선중앙일보 에 장편 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60세 때 그가 직접 지도해온던 불교계통의 민족투쟁비밀결사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이 일어났고, 많은 후배동지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 1939년 회갑을 맞으면서 경상남도 사천군 다솔사(多率寺)에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 1944년 5월 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동지들에 의하여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친하던 벗으로는 이시영·김동삼·신채호·정인보·박광·홍명희·송월면·최범술 등이 있었으며, 신채호의 비문은 바로 그가 쓴 것이다.2. 시집 님의 침묵 에 대하여한용운의 시집 및 표제 시명이다. 1925년 내설악 백담사에서 쓰여져서 1926년 회동서관에서 초간되었고, 1934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재판되었다. 광복 후 1950년에 다시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재간되었으나 초판 및 재판과는 크게 달라졌다. 광복 후의 한성도서판은 초판과 재판을 기저본으로 하였지만 현대 맞춤법으로 고치는 과정에서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그 뒤 이 책을 모본으로 하여 유통본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유통본들에서 오류가 답습되고 있다. 이러한 오류는 한용운전집 (1973)과 송욱의 님의 침묵 전편해설 (1974)에 와서 많이 시정되었으나 여기에서도 간혹 오류가 발견되었다. 시집 님의 침 침묵'이라는 표제에서 침묵의 의미는 그것이 단순한 명상의 침묵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몸부림과 깨달음이 용솟음치는 생성의 적극적 침묵인 것이다. 표면적으로 남녀간의 아기자기한 사랑의 애환을 노래하면서 그 심층에 당대의 빼앗긴 현실과 민족을 되찾으려는 끈질긴 극복의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성과 시사성의 조화를 성공적으로 성취하고 있다. 임을 상실한 아픔과 비극적 현실의 쓰라림을 기다림과 희망의 철학, 사랑과 평화의 사상으로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방법론적인 면에서의 특징은 은유와 역설을 탁월하게 구사함으로써 현대시적인 면모를 확보하는 데서 드러난다. 시단의 형성단계인 1920년대 중반에 독창적인 은유와 역설을 시희 중심방법으로 삼아 적극 계발함으로써 우리 현대시의 한 기점이 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또한, 시어면에서 충청방언을 활용하고 개인 시어를 구사한 것도 민중적 정감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었으며, 특히 독창적인 시형태를 개척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지금까지 한용운의 시는 산문시라고 막연히 불려져 왔다. 그러나 그의 시는 행과 연의 구성이 독자적인 법칙과 체례를 지닌다는 점에서 산문시가 아닌 자유시의 전형에 해당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미지면에 있어서도 식물적 이미지, 광물적 이미지, 천체적 이미지 등을 섬세히 조형하여 시적인 심미감을 고양시켜 주는 특징을 지닌다. 시사적인 면에서도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시정신과 방법·문제·구조 등에서 전통시와 깊이 접맥되어 있기 때문이다. 향가·고려가요·시조·가사는 물론, 한시·불경에 흐르는 정신사적 형지로가 시적 방법이 님의 침묵 에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육당시·소월시 등 당대의 시와도 폭넓은 상관관계가 인정되며, 이육사·조지훈·서정주 등 후대의 시와도 영향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님의 침묵 이 성취한 사랑·자유·평등·평화의 깊이 있는 사상성과 방법론적인 예술성을 현대적인 것으로 심화·확대 시킴으로써 현대시가 나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3. 작품론3.1있는 '참아'는 부사 '차마'와 인내의 뜻 '참아'가 결합되어 있는 중의적인 표현이다. 차마 어쩔 수 없이 임이 떠나갔을 수도 있고, 아픔을 꾹 참고 떠날때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무엇이 되었건 결국 우리의 사랑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깨어질 수밖에 없었음이 분명해진다.3행은 계속되는 절망감의 표출이다. 임과 나의 맹세가 깨어지고 만 슬픔의 크기를 광물 이미지로 포착하여 사랑의 견고함을 표현하고 있다 . '황금의 꽃'이라는 은유는 광물과 식물의 결합에서, 부드럽고 아름답지만 견고하고 변하지 않는 사랑의 절대성을 표출한다 . '차디찬 티끌'에서 '차디찬'이란 촉각 이미지는 사랑이 화자에게 준 절망의 정도를 보여 준다. 한숨의 미풍에 과거의 꿈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회한의 심정이 노출되고 있다 . 한숨의 미풍은 것을 무화시키는 허무의 표상이다. '황금의 모든 꽃'에서 보이는 견고한 이미지와 이 미풍의 허망한 이미지의 대립이 드러난다.4 행 , '날가로운 첫 키쓰'는 물론 임과 나의 만남을 뜻한다. 그러나 그 만남(키스)을 날카롭다고 한데서 임과의 사랑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고, 나의 온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정도의 충격적인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아뜩할 정도로 사랑은 강렬하게 찾아 왔고, 그리하여 나의 삶의 지표를 다르게 변화시켜 놓았는데, 그만 임이 가고 없다는 상실의 재확인이다. 날카로운 키스라고 한데서 임과 나의 만남이 단순한 애정에 의한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 달콤한 키스가 정감을 불러오는 데 반하여 날카로운 키스는 정신적 충격의 의미가 더 강하다. 여기 에서 임이 다층적(多層的)실체임을 짐작할 수 있다 . 어쨌든 화자는 임에 절대적 사랑을 바친 것이다.5 행도 임이 나에게 절대적 존재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눈멀고 귀멀 정도의 사랑이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좋아서 죽겠다"는 표현처럼 아름 다운 얼굴에 차라리 눈멀고, 아름다운 목소리에 차라리 귀멀었다는 표현은 역설이다. 이 역설은 사랑의 절대성을 극도로 높이는 효과를 준다.6 행, 사랑하면 헤어알수 없어요〉는 산문형태의 자유시로서 6행으로된 非戀詩다. 유장한 산문형태의 문체는 타골의 시에서 영향받은 것처럼 보이며 이러한 형태가 〈알 수 없어요〉에서는 경건함과 엄숙함을 나타내기에 적합한 미적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각 행마다 끝부분에 「누구」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이「누구」는〈님〉이라는 말을 의문형식(설의법)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이 시는 크게 ①행~⑤행의 전반부와 ⑥행의 후반부로 나누어진다. ①~⑤행에서는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과 발견, ⑥행에서는 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님의 등불이 되어 님이 부재하는 어두운 공간을 밝히고자 하는 소명감으로 이어지게 된다. ①~⑤행이 자연 또는 자연현상을 통하여 현현(顯現)하는 '님'의 모습을 보여 주는데 비해 마지막 한 행에는 '님'이 없고, '나'만 있다. '님'이 없는 상황의 어둠이 '밤'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앞부분은 님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의 밝은 분위기를 가진 것이다.전체적인 흐름은 ①~④행에서 '님'은 나에게 점점 가까이 느껴진다. 처음에 님은 발자취 소리만 나다가 먼 빛으로 얼굴이 보이고, 좀 더 가까이 다가와서 입김을 느끼게되고, 그리고 내 귓가에 노래를 부르게 된다. 그것은 매우 밝은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다.⑤행에서는 그러나 님과의 이별의 순간이 온다. 그것은 저녁의 침침함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 비극적 순간이 장엄한 시처럼 느껴진다. ⑥행에서 님은 사라지고 나는 어두운 '밤'에 홀로 남겨진다. 그 밤 속에 침몰하지 않기 위해 나의 가슴은 약한 등불을 켜게 된다. 그 등불은 절대적인 님의 존재에 비해서, 또 님과의 이별이라는 엄청난 현실 앞에서는 당장은 '약한'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타고 남은 재가 기름이 되듯이' 나의 가슴은 끊임없이 타올라 그 등불이 언젠가는 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비추어 줄 횃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이 시의 골격을 간추려보면 ①행에서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님의 발자취가 아니겠습니까」「알 수 없어요」라 는 말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