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구란?장구는 장사훈의 『국악대사전』에서 ‘혁부’ 악기의 하나로 ‘장구’라고도 쓰며, ‘세요고’라고도 하는 타악기로 설명하고 있다. 사기?기와?나무 등으로 만든 통 양쪽에 가죽을 꼭 붙여서 대나무로 만든 채로 치는 타악기를 가리킨다. 장구의 각 부분별 명칭을 그림과 함께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악학궤범이나 문헌통고의 인용을 빌리자면 갈고, 장고, 요고는 중국 한나라 위나라에서 사용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에 송나라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나 신라의 범종에 요고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장구는 허리가 가늘다고 해서 세요고라고도 부른다. 원래 명칭은 장고(杖鼓)가 맞지만 현재는 장고, 장구로 표기하고 있다.1993년 국립국악원에서 발표한 국악용어 통일안에서 장구로 표기하는 것으로 하였기에 현재 장구라는 명칭으로 두루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장고라고 해도 틀린 말을 아니다.2. 장단의 개념장단(長短)이란 국악에서 박자, 빠르기, 리듬의 주기들을 지정해 주고, 때로는 악장을 의미하는 일종의 리듬형을 말한다.3. 장구 기보법서양음악에서는 3/4이니 6/8이니 하는 박자 기호를 써서 박자를 표시하지만 국악에서의 장단은 주로 장구나 북과 같은 타악기의 고법으로 장단을 기보한다.4. 장구의 문헌장구에 관한 가장 오래 된 문헌은 1076년(고려 문종 30) 장구업사(業師) 가 있었다는 기록이며, 이보다 앞선 고구려의 고분벽화와 신라의 범종(梵鐘)에 새겨진 그림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1) 1076년(문종 30년)의 기사1076년의 기사는 대악관현방을 정하는 내용인데, 여기에 ‘장고업사’로 표현된 장구를 담당하는 악사의 이름이 보인다. 이 장고업사는 창사업사, 당무사위, 비파업사, 당적업사, 향당비파업사, 방향업사, 필률업사, 중금업사, 가무박업사 등과 함께 고려시대 음악의 중요한 담당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종30년(1076)에 대악관현방의 급료를 정하는데, 당무와 창사를 가르치던 악사와 생을 지도하던 악사는 미(米) 1과(科) 10석을, 비파를 가르치던 악사는 미(米) 1과(科) 7석을, 장고(2명)?당적(2명)?향비파?당비파?방향?필률?가무?박?중금을 가르치던 악사의 급료는 미(米) 2과(科) 8석(石)으로 정했다.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장고업사(杖鼓業師)로 표현되어 있는 담당 악사는 당적업사(唐笛業師)와 함께 2명으로 편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나머지 악사들은 모두 1명으로 편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관현방 악사들의 급료는 거의 비슷한데, 이는 당시 다른 직책을 가진 이들과의 비교에서 낮은 수준으로 확인된다.2) 1114년(예종 9년) 6월 기사예종 9년(1114)의 『고려사』 기사를 보면 송나라에서 새로 악기를 보내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때 새로 보내 준 악기 가운데에는 여러 악기가 있었는데 장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장구는 총 20면(面)을 보내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 때 줄과 장고채 그리고 자색담경 파복 전부를 보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종 갑오 9년(1114년)에 예종실록에 이르기를, 6월 초하루 갑진일에 안직숭(安稷崇)이 송나라로부터 돌아왔다. 송나라 황제가 왕에게 악기를 기증하였다. …(중략)… 당신은 황국의 임금으로서 대의를 사모하여 서로 왕래하였는데 지금 사절이 와서 새 음악을 듣기를 희망한다고 하니 그 성심을 가상히 여기어 이것을 선물로 보내기로 하고 이제 귀국의 사신 안직숭이 돌아가는 편에 당신에게 신악(新樂)을 선사한다.”철방향(鐵方響): 5가(架) 외에 탁자(卓子) 방망이(子), 주칠누금가자(朱漆縷金架子), 비단으로 싼 책, 금리책(錦裏冊), 조금도은탁자(條芩鍍銀鐸子), 조결(條結), 자라협파, 자견단파들 부속 전부. 비파(琵琶): 4면(面) 외에 도금한 유석 봉구(金鍍鍮石鳳鉤), 주치누금가자(朱漆縷金架子), 도금은탁자(金鍍銀鐸子), 조결(條結), 누금발자(縷金撥子), 자라협대(紫羅夾袋)등 부속 전부. 오현금(五絃琴): 2면(面) 외에 금도유석봉구(金鍍鍮石鳳鉤), 주칠누금가자(朱漆縷金架子), 금도은탁자(金鍍銀鐸子), 조결(條結), 누금발자(縷金撥子), 자라협대(紫羅夾袋)등 부속 전부. 쌍현금(雙絃琴): 4면(面) 외에 금도유석봉구(金鍍鍮石鳳鉤), 주칠누금가자(朱漆縷金架子), 소금생색(銷金生色), 친현, 자라협대(紫羅夾袋) 전부. 공후: 4좌(座) 모두 누금하였다. 필률: 20관(管) 도금한 은실로 감싸 묶었으며 각종 자라협대(紫羅夾袋) 한 갑에 담은 것과 홍색비단 방석, 자라협복자(紫羅夾複子) 전부 저: 20관 소(簫): 10면 주칠누금(朱漆縷金)으로 장식하였고 금도은탁자(金鍍銀鐸子), 조결(條結), 각 종 자라협대(자羅夾袋) 한 갑데 담은 것과 홍색 비단 방석, 자색 비단 협복자(紫羅夾複子) 전부. 포생(匏?): 10찬(撰) 외에 금도금속자(金鍍今束子), 각종 자색 비단협대(紫羅夾複子) 2갑에담은 것과 홍색 비단 방석, 자색 비단 협복(紫羅夾複) 전부. 훈(壎): 40매(枚), 세 갑에 담은 것. 대고(大鼓): 하나 동유(桐油) 칠하고 전체 꽃을 그렸다. 그 외에 받침 북채(?槌) 자색 비단 덮개(紫絹衣) 전부.
오페라 감상 및 연구Donizetti의 도니제티의 Donizetti의 도니제티의 1. 작곡가에 대하여 - 가에타노 도니제티(1797~1848)이탈리아의 작곡가. 베르가모 출생.베르가모의 음악학교와 볼로냐의 음악원에서 공부하였으나, 그를 법률가로 키우려던 부친과 불화로 군에 입대하여 1818년 군인의 신분으로 발표한 가 호평을 받아 작곡가의 길을 걷게 됨파리로 나가 오페라 작가로서의 기반을 굳히고 40년 전후 전성기를 맞다가, 45년 두통에서 비롯된 신체 마비상태에 빠져 사망함.대표곡으로는과 과 와 가 있다.그의 작품은 로시니의 모방이라고 할 수 있는 초기의 작품을 빼면, 유창하고 아름다운 선율과 적절한 극적 효과에 특징이 있으며, 이런 점은 빈약한 관현악법과 대본의 평범함을 보완해준다.2.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 대하여영화 제5원소 장면중 외계인 제니퍼가너가 를 부르다가 댄스로 넘어가 더욱 유명해졌다.도니제티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이 오페라는 1835년 나폴리에서 초연한 이래 전국적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계속하여 유럽 여러 나라에서 다투어 공연하여 크게 성공한 오페라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인해 나폴리 음악학교 부교장의 영예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 오페라 대본의 소재는 월터 스코트(Walter Scott 1771~1832)의 소설「람메르무어의 신부」에서 취재한 스코틀랜드의 이야기이다. 작품의 흐름은 간소하면서도 신선하고 아름다운 멜로디에 충만해 있으며, 효과적인 요소에의 집중과 극적인 박력 등이 오페라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비록 비극적인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흐르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낙천적인 국민성을 보여준 이탈리아적인 오페라이다.이 14일 만에 완성한 것에 반해 는 작곡하는데만 40일이 걸렸으며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초연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1) 작곡연대 : 1835년2) 초연 : 나폴리 상 카를로 극장3) 배역가. 루치아(엔리코의 여동생) : 소프라노 - Joan Sutherland나. 에드라르도(젊은 성주) : 테너 - Richard Greager다. 엔리코(람메르무어의 성주) : 바리톤 - Malcolm Donnelly라. 아르투로(공작) : 테너 - Sergei Baigildin마. 라이몬도(루치아의 가정교사) : 베이스 - Clifford Grant4) 유명한 아리아가. Regnava nel silenzio(주위는 고요한 침묵속에 잠기고)나. Verranno a te sull'aure I miei sospiri ardenti(나의 애타는 마음은 산들바람처럼 두둥실 떠가서 그대에게 전해지리)다. Scena della pazzia(광란의 아리아)라. Ohime! sorge il tremendo fantasma(광란의 장면)마. Fra poco a me ricovero(세상과 마지막 작별이요, 저무덤은 나를 맞아주고 덮어주리라)바. Tu che a Dio spiegasti l'ali(날개를 펴고 하늘로 간 그대여)5) 그이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어요 대사 - 제3막 광란의 아리아그이의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어요.아, 그 목소리가 내 마음에 울려왔어요!에드가르도! 나는 당신 옆으로 돌아가겠어요.에드가르도!아, 나의 에드가르도! 그래요, 당신 옆으로 돌아가는 거에요.당신의 원수로부터 빠져나온 거에요.싸늘한 것이 내 가슴을 기어 올라오네, 온몸이 떨려요, 다리가 후들거려요.잠시 동안 샘가에 같이 앉아 있어요아, 저 무서운 유령이 나타나서 우리를 떼어 놓으려고 해요!아, 에드가르도! 이 제단 밑에 숨어용, 에드가르도, 장미꽃을 뿌려 놓았어요.천상의 음악이 들리죠? 아, 결혼의 성가가 울리고 있어요!우리를 위한 의식이 준비되어...6) 원본 : 영국의 윌터 스코트가 쓴 소설 3. 전체 내용비가극인의 무대는 17세기의 스코틀랜드.선조때부터 원수로 지내던 람메르무어의 성주 엔리코와 레이벤즈우드의 젊은 성주 에르가르도.어느날, 엔리코의 여동생인 루치아가 사나운 황소에게 쫓기는 것을 젊은 에르가르도가 목숨을 걸고 구해줌으로 해서, 두 원수지간 가문의 불행한 연인들이 비극적인 사랑을 한다는 것이 극적인 전제로 되어 있다.제1막은 사냥을 나갔던 엔리코의 무사들이 말을 탄 수상한 기사가 숲에서 쏜살같이 달아나더라는 이야기로부터, 그 기사는 원수인 에르가르도라는 것까지 밝혀진다.한편, 루치아의 오빠인 성주 엔리코는 정치음모에 가담했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루치아를 정약결혼의 제물로 바쳐서 가문의 안전을 꾀하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루치아가 에르가르도와 밀회한다는 말에 엔리코는 펄쩍뛰며 분노한다.장면은 바뀌어서 숲속의 달밤.정치적인 용무를 띠고 프랑스로 떠나야 하는 에르가르도는, 루치아와 만나서 증표가 담긴 반지를 교환하며 변치않는 사랑을 맹세하고 헤어진다.제2막은 루치아가 오빠에게 에르가르도와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엔리코가 에르가르도의 가짜 편지를 루치아에게 보이자 그녀는 통곡한다.울고있는 루치아에게 궁정의 유력자인 아르투로 공작과 결혼하지 않으면 우리 가문은 파멸할 것이라고 엔리코는 말한다. 이윽고 아르투로 공작의 등장으로 무대는 화려해진다.
오페라 감상 및 연구오페라의 역사오페라의 역사1. 오페라의 탄생 - 순수한 음악극 - 1500~1580일반적으로 고전적인 음악 형태는 교향곡이든 협주곡이든 소나타든 언제 어디에서 누가 만들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냥 그렇게 생겨났을 뿐이다. 물론 그 뒤에는 꽤 많은 급진적인 혁명가들이 있었겠지만 보통은 그냥 이렇게 저렇게 생겨난 것들이다. 그러나 오페라는 약간 다르다. 오페라는 발명되었다.옛날 카메라타로 알려진 피렌체의 실험적 문학 지식인 모임이 있었다. 갈릴레이와 바르디가 주도로 정기 모임을 가지고 예술, 인생 세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오페라’라는 개념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고대 그리스 극 음악을 재창조하는 것이다.그 때까지만 해도 이 모든 것은 그저 이론에 불과했는데, 한 사람이 모임의 구상과 비슷한 것을 시험 삼아 한번 써보겠다고 선언했다. 그 사람이 바로 페리이다.페리의 라든지 로부터 오페라는 시작되게 되었다.또 다른 시점에서 오페라의 탄생으로 손꼽히는 작품이 있는데, 그 곡이 바로 몬테 베르디의 이다. (최초의 대작 오페라로 꼽히는 몬테베르디의 도 있다. )이 시기의 오페라는 일정한 형태 없이 공연 여건에 따라 멋대로 수정, 추가, 삭제되었으며, 다른 시각 예술들과 동일한 작업방식으로 만들어졌다.1. 각 국의 오페라 - 1550~17501) 영국 - 디도와 아이네아스이탈리아가 오페라라는 형식을 만들어내자마자 17c중엽에는 프랑스와 독일도 꿈틀대기 시작했다. 영국은 좀 뒤쳐진 감이 있는데, 위대한 작곡가 퍼셀조차도 거의 세미오페라, 부수 음악 때문에 대본은 통째로 빠진 연극이나 가면극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탈리아식의 레치타티보의 영어 대사를 붙인 래니어의 영향으로 1656년에 로도스 섬의 포위라는 작품을 씌어졌으나, 올리버 크롬웰의 화극 금지법 때문에 무위로 돌아갔고 지금은 분실되었다.퍼셀의 작품 중에 오페라로 불릴 만한 유일한 작품은 이다. 이 작품은 영국 첼시에 있는 요시아 신부의 여자 기숙학교 공연을 프랑스인들도 나름대로 오페라의 개선에 기여했다. 오페라에 발레 음악을 삽입하고, 아주 화려한 무대 공연을 연출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들은 눈길을 끌지 못했으며, 다른 형식의 음악극들을 마구 뒤섞은 것으로, 프랑스 화극의 깊은 전통에 따라 화려한 장관을 연출에 아낌없이 돈을 쏟아 부었다.이러한 경향의 선두에 륄리가 있었다. 그는 영화와 절대 권력에 흠뻑 취해 있던 독재자 루이14세와 프랑스 궁정에 잘 보인 덕에 왕립 음악 아카데미로 알려져 있던 파리 오페라단 의 초대 총감독을 맡았었다. 서정비극의 작품을 주로 썼는데, 등이 있다.륄리의 그늘에 가려 활동한 샤르팡티에는 황태자를 비롯해 아주 유명한 인사들의 후원을 받고 있었지만, 2인자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란 오페라가 있다.또한 륄리 이후로 걸출한 작곡가들이 프랑스 오페라를 짊어지고 나갔는데, 그중에 라모의 서정 비극 다섯 편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등이 유명하다.3) 독일 - 마테존, 헨델, 텔레만 등이 있음드레스덴, 슈투르가르트, 빈에서 활동하던 하세, 요멜리, 칼다라 같은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들과 빈의 궁정 시인이자 위대한 이탈리아 대본 작가인 메타스타시오와 더불어 수입된 음악이 오랫동안 확립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일찍부터 있었다. 자국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빈의 독일 사람들은 독일어를 사용했다.저 멀리 북쪽의 함부르크에서는 좀더 오랜 세월 이어질 독일어 오페라가 조용히 탄생하고 있었다. 특히 겐제마르크트 극장은 1670년대 후반부터 1700년대 중반까지 독일어로 씌어진 작품들을 주로 공연했다.징슈필이 나타났는데 징슈필이란 독일 고유의 민중적 형태의 연극으로서 영국의 후기 발라드 오페라의 영향을 받았다. 우선 빈에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징슈필은 대사와 가사를 섞었고, 희극적인 요소가 강했다. 가수들 대부분은 노래를 꽤 할 줄 아는 배우였다.3. 헨델 등장하다 (1710~1726)그가 런던에 나타났다. 청년 헨델은 함부르크에 자신의 첫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그는 남쪽, 로마로 떠났다. 1720년 시즌 개막작으로 쓴 작품 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다음 시즌에는 를 썼고기타 등등의 작품을 발표했다.하지만 이탈리아 오페라를 보는 관객들은 줄거리가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해도 아리아를 원했다. 어떤 변화이든 일어나야 했다. 헨델은 어려움 속에서 계속 오페라를 써 냈다 하지만 귀족오페라의 간계는 그칠 줄 몰랐고, 대중의 취향도 이미 변한 터였다. 런던의 이탈리아 오페라는 사양길을 걷게되었다. 헨델은 오라토리오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해 새롭게 성공하였다.4. 오페라 부파 (1700~1800)메타스타시오의 오페라 세리아 반대편에는 오페라 부파. 즉 희극 오페라가 있었다. 유럽의 다른 희극 오페라와는 달리 오페라 부파는 완전히 음악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일정한 관습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인물은 여섯 명에서 아홉 명사이로 정해지고, 그 목표는 풍자를 통해 교훈을 전달하는 것이다. 오페라 부파라 칭할 만한 최초의 작품은 미켈란젤로 파졸 리가 1706년에 쓴 이다.페오렌티니 극장은 1909년 안토니오 오레피체의 파트로 칼리엔노 델라 코스타를 시작으로 오페라 부파를 정기적으로 상연하는 나폴리 최초의 극장이 되었다.오페라 부파는 유럽 전역에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이제 지식인들마저도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오페라 세리아에서는 가수들이 노래를 주로 신경을 쓴 반면, 오페라 부파에서는 연기가 우선이고 노래는 그 다음이었다. 빈틈없는 희극적 타이밍과 거치없는 극의 흐름을 보면 잘 알 수 이TEk. 또한 오페라 부파의 잠재적인 시장은 오페라 세리아 보다 더 넓었다. 우선 오페라 부파는 문학이나 희곡의 시대적 풍조를 풍자하고, 당대의 정치적 음모나 의혹 등에 응수할 수 있었다. 또한 구속되거나 형식에 얽매이지 dskg고 자유로운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교하지 못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뛰어난 오페라 부파 작곡가들은 대개 오페라 세리아도 잘 쓰는 음악가들이었다. 어떤 일에서든 다양함이야 말로 활력소가 된다.1724년에 나폴오페라 부파였다. 모차르트의 등은 18세기 오페라 부파의 절정을 보여준다.5. 글루크의 오페라 개혁 (1740~1790)글루크는 이탈리아에서 여덟 편의 오페라를 써서 성공하고 런던에서 두편의 실패작을 쓴 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1762년 빈에 정착했다.살기 좋은 빈에서는 오페라 세리아 대본 작가인 메타스타시오가 한창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고 있었고 빈 극장의 마음 넓은 감독관인 두라초 백작이 파리에서 최신 유행의 오페라 코미크들을 수입해 왔다. 글루크는 그 작품들에 자신의 아리아와 서곡들을 덧붙였다. 그는 자신만의 오페라 코미크를 여덟 편 쓰고, 관습적인 디베르티스망 앙 당스보다는 발레 닥시옹으로 구성된 혁병적인 발레 작품 이 초연되자 파문이 일어났지만, 빈의 진보적인 관객들은 그 작품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그 당시 오페라 세리아는 극의 진행보다는 주인공의 아리아에 치중한 나머지 곡의 흐름이 바뀌기 일쑤였다.의 서문에는 글루크는 오페라 세리아의 방종함을 없애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준다. 그 대신 노래로 표현하는 대사가 계속될 것이고, 서곡은 내용이나 비례 면에서 적절한 것이며,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는 너무 심하게 대조를 이루지 않을 것이고, 발상은 명확할 것이다. 개혁 오페라로 알려진 이러한 공식은 모차르트나 바그너에게도 영향을 미쳤다.6. 오페라 코미크 (1700~1790)오페라의 시대에 륄리와 몰리에르는 궁정 공연을위해 코미디 발레를 써서 유머감각을 뽐냈다. 하지만 륄리의 고상하고 진지한 서정 비극은 패러디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코미디 극단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런 패러디가 법적으로 금지되자 극단들은 무언극을 하면서 대본이 적히 카드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관객들 사이에 박수부대를 심어 대중적인 노래들, 혹은 풍자적인 노래인 보드빌을 유도하도록 해서 그런 작은 어려움을 극복했다. 1715년에는 오페라 코미크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음악은 여전히 부차적인 요소였지만, 중요한 음악의 혁신이 일어났다. 보드빌과 아리아 중간 형태인 시몽 파바르이다. 어느 정도 성숙한 오페라 코미크는 구식의 서정비극에 맞설 분비가 되어 있었으니, 부풍 논쟁이 시작된 후에 작곡된 루소의 는 논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 오페라는 신이나 왕보다는 변변찮은 보통 사람들을 이야기 했다. 그 후 50년 동안 오페라 코미크는 오페라계를 완전히 장악했고, 희극적인 요소는 점점 줄어 들었다.7. 고전시대의 오페라 (1750~1790)1) 모차르트 - 등 코믹하면서 용기, 신뢰, 사랑의 미덕을 강조하고, 외견상 단순하지만 매력적이며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오페라를 많이 작곡하였다.2) 베토벤 - 유일한 오페라 압박, 고통, 희생, 용기 그리고 사악함을 이기는 고귀한 인간적 직관에 대한 ‘구원’ 오페라, 위대한 작품, 흥미로운 드라마, 정치적으로도 전적으로 올바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8. 그랜드 오페라 (1790~1880)프랑스 혁명은 특권의 종식을 의미했다. 적어도 인류 평등주의자라고 자처하는 나폴레옹이 자신의 지위 위에서 망상을 품기 전까지 그랬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작은 극장들이 활성화되고 왕당적인 전통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1840년에 프랑스 오페라는 다시 한 번 웅장함이 그 미덕이 되었다. 오페라는 떠들썩한 행렬이 꼭 등장해야 하는 현란한 구경거리가 된 것이다.그런 방식으로 씌어진 작품들은 대개 금방 잊혀진다. 하지만 베를리오즈는 이탈리아 태생의 가스파레 스폰티니를 견찬했다. 스폰티니의 가장 유명한 오페라인 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적인 요소들에 글루크 식의 진지함을 결합시켰다. 그러나 부르봉 왕조가 부활하고 가스등, 다게르와 시세리의 환상적인 세트 등 새로운 무대 기술이 도입되며, 1824년에 조아키노 로시니가 파리에 등장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그랜드 오페라가 시작되었다.9. 19C 오페라 (1820~1890)1) 이탈리아19세기에 들어와서도 이탈리아에서는 18세기 이래의 전통적 형식이 계승되어 등의 오페라 부파로 알려져 있는 G.A. 로시니, 등을 쓴 G. 도니체티, 등 오페라 세리아만을 남긴 벨였다.
현대음악 교육론.*★12음기법에 대하여★*..*★12음기법에 대하여★*.1.쇤베르크의 생애쇤베르크는 1874년 9월 13일 오스트리아의 비인에서 태어나, 1951년 7월 13일 미국 로스앤 젤레스의 교외 산타모니카에 있는 자택에서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20세기 현대 음악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준 사람 즉, 현대 음악에 혁신적인 영향을 준 지도적인 작곡가를 든다면 스트라빈스키, 바르톡, 그리고 쇤베르크 이 세 사람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쇤베르크는 이른바 12음의 음악의 발명과 동시에 완성자로서 20세기 전반기에 있어서 위대한 존재인 동시에 같은 시대는 물론, 그 이후의 세대에 커다란 영향을 준 사람이다.자아 비판적인 자세와 창조의 논리적 엄격한 그리고, 미학적인 철저함에 있어서 쇤베르크 처럼 독창적이고 견고한 천재는 최근의 음악 사상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다. 쇤베르크는 그 혁신적인 기법과 반 역사적인 사상에 의해 20세기의 음악에 일대 전환기를 가져 왔으며, 그 의 제자들인 알반 베르크라든가 베베른 등과 더불어 이른바 비인 12음 악파라고 일컬어지는 유파를 형성하였다.후기낭만주의의 묘사적 경향과 인상파의 인상 존중의 사고방식을 불안하고 내적인 마음의 움직임이나 정신의 힘을 표출하는 데 주안점을 두는 이른바, 이 표현주의는 조성의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무조를 채택하게 되고, 종래의 음 체계를 파괴하여 8도 속에 포함되어 있는 12음에 모두 평등한 중요성을 주어서 이를 일정한 순서로 나열하고 이 음열을 토대로 음악을 구성하는 이른바, 12음 기법을 완성한 것이다.마지막으로 쇤베르크 음악의 난해성을 설명하는 데 무조성과 음열기법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게다가 이런 요소가 난해성의 본질적인 이유는 전혀 아니다. 이 난해성의 진정한 원인은 리듬과 사고의 예외적인 밀도에 있는데, 이 사고는 하이든의 사고와 마찬가지로 다른 작곡가들의 경우에는 훨씬 더 큰 규모를 필요로 할 일시적인 음향공간 속으로 수많은 음악적 사건들을 집중시킨다. 그래서 알반 베르크는 왜 쇤베르크의 음악은 그다지도 이해하기가 어려운가?(1924)라는 제목의 그의 논문의 실례로서 음조적 작품인 현악4중주곡 제1번 op. 7을 고의로 선택했다. 또한 다음과 같은 쇤베르크의 기지에 찬 말도 알려져 있다. 나의 음악은 현대적인 것이 아니라 연주가 잘못된 것이다. 오늘날, 음악언어와 음악적 어휘의 문제는 그의 작품의 깊은 정신적 조화 앞에서 희미해졌는데, 그가 유례없는 고도의 기교를 사용한 것은 감정의 고양 때문이었다. 특히 1908년부터 1913년 사이에 작곡된 그의 작품에 대한 격한 반감은 조성의 포기 때문이라고 하기보다는 그가 표현한 새로운 감정적 세계 때문이었던 것이다.그의 메시지가 청중에게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것은 청중이 너무도 그의 메시지를 잘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아주 우수한 지성을 아낌없이 활용했으며 그의 직관력 또한 매우 뛰어났다. 또 그의 성격의 특징의 하나는 자신의 발견을 합리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집착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의 가장 유명한 평론(음악에 대한 마음과 지성)의 제목에 나타나 있는 이중성을 쳄린스키는 이미 1902년에 간파했었다(그(쇤베르크)는 거기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이 모르는 것은 느꼈다). 자신의 예술에 관해서는 종종 완고해서 손을 댈 수 없게 되는 성격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자와 친구들로부터 신처럼 존경받은 쇤베르크는 역사 속에 가장 위대한 사람만이 남길 수 있는 발자취를 남겼다. 현악 4중주 제 4번 "기대" [1909] "행복한 손" [1913] "오늘부터 내일 까지" [1929] "모세와 아론" [1932,미완성] "필레아스와 멜리장드" [1902-3]"구레의 노래" "달의 피에로" "근대 시편" [미완]2. 12 음기법1910년경 비엔나에서 나타난, '조성'이라는 당시까지 유럽음악의 전통적 규칙을 따르지 않은 쇤베르크, 베르크, 베베른(제2 비엔나 악파)의 음악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음악의 특징은 옥타브 분할을 통해 얻어진 12개의 반음들을 평등하게 사용하여 과 (예: 바탕음과 여타 음들, 으뜸화음과 여타 삼화음들, 혐화음과 불협화음)을 구분할 수 없게 한다. 베베른의 {다섯 개의 게오르게 노래} op.3 (1907/08)와 쇤베르크의 세개의 피아노소품(Drei Klavierstucke op.11(1909)이 바로 그런 음악들이었다. 어떤 규칙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던 무조음악은 1920년 초에 12음기법이라는 작곡방법을 갖게 된다.위에서는 무조음악 또는 무조성의 개념을 한꺼번에 설명하고 있다. 용어의 한문 표기, 가장 흔히 쓰이는 외국어(영어)와 원래 이 용어가 쓰였던 말(독일어)도 제시되어 있다. 그 다음의 개념 설명은 제2 비엔나 악파에만 국한시키고 있다. 여타의 무조적인 음악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이는 무조음악(무조성)이란 말이 실제로 거의 제2비엔나 악파의 음악에 관해 설명하는 것과 관계가 깊다. 그 다음에는 이 악파의 최초의 무조음악 작품들이 소개되고, 한 걸음 더 발전된 무조음악의 작곡기법인 12음기법이 소개된다. 이 항목을 읽는 사람들은 "무조음악"이 말뜻대로 "조가 없는 음악"이라고 이해되지 않고, 일정한 시기의 일정한 사람들이 작곡한 음악을 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쇤베르크가 단지 연달아 관계하고 있는 12개 음을 가진 작곡 이라고 언급한 12음 구조는 한 옥타브 안에 속해 있는 12개 음들을 새롭게 배열하는 것이다. 그 때 조성적인 배열이 포기되고 12개 음들은 서로 간에 완전하게 독립적일 뿐 아니라, 완전하게 동등한 의미를 갖는다. 작곡가는 12개의 동등한 음들로부터 작품을 성격화하는 예비배열로서 하나의 열을 구성한다. 그것으로 음열적 사고의 근본을 이루는 원칙이 확정된다.쇤베르크보다 앞서 이러한 연구를 시도했던 하우어의 열규칙은 12음에 의거한 작곡에 있어서 하나의 다른 방법을 제공했다. 하우어의 열규칙은 6개의 음으로 구성된 두 그룹의 혼합에 의해 만들어진다. 각 그룹 안에서의 음순서는 자유롭다.12음기법은 발견 이후 20세기 전반에 몇몇 작곡가들에 의해 음렬의 구성에서나 또는 그 전개방법에서 다양성을 보이며 수정되었고, 1950대 작곡가들에게 다시 관심의 대상이 되면서 음악의 모든 매개변수에 열의 법칙을 적용하는 더 넓은 의미로 확장된다. 이러한 음악을 세리얼 음악, 총렬음악으로 총칭된다.3. 쇤베르크의 음렬을 만드는 원리1) 음열은 가능한 한 모든 12음을 포함해야 한다.2) 음정 간격의 선택은 다양해야 한다.3) 음열의 기본 형태로부터 전통적 대위법의 원칙에 의해 전위를 얻어낸다. 더 나아가 역행과 전위역행을 형성할 수 있다.4) 이러한 네 가지 형태의 각 음렬은 옥타브 12단계의 각 음으로 이조되어질 수 있다. 그것으로 인하여 48개의 음열을 얻어낸다.5) 하나의 음렬을 구성하는 각각의 개별적인 음은 임의의 옥타브 위치에서 나타날 수 있다.6) 즉각적인 음의 반복은 허용되지만, 그 밖의 음 반복은 피해야 한다.7) 음열을 구성하는 음들의 연속진행 속에서 리듬 배열은 자유롭다.8) 옥타브 중복은 원칙적으로 피해야 하지만, 음색적 토대로서 옥타브 중복은 가능하다.9) 음열 속에서 너무 자주 동일한 음정을 쓰지 말아야 한다.10) 3개의 음을 합쳐서 장단3화음을 구성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11) 12음렬의 순서는 음역에 관계없이 유효하다.12) 이명동음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13) 음역의 모든 음이 제시되고 나서 다른 음열을 제시해야 한다.4. 12음 기법의 특징1) 이 기법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음렬(Serie, Tone row)이다. 이 음렬은 작품을 쓰는 데 있어서의 골자 또는 핵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이것을 가지고 멜로디도 화음도 만들게 된다. 그런데 Eimert의 학설에 의하면 음렬은 4억7천9백만1천6백 종이나 만들 수가 있다는 것이다.2) 하나의 음렬을 가지고 원형(Original form)을 만들거나 왼편으로 뒤집어서 역행형(Retrograde form)을 만들거나 또는 아래로 뒤집은 것을 다시 왼편으로 뒤집어서 역행전위형(Retrograde Form of Inverted Form)을 만들어서 자유자재로 멜로디를 작곡할 수 있고, 이러한 멜로디의 도수를 바꾸어 즉 이도(移度,Transposition)하게 되면 원형, 전위형, 역행형, 전위역행형을 각각 12종씩 합해서 48종이나 만들 수가 있다.3) 음렬 자체의 순서를 변경시킬 수도 있다. 즉 1,2,3,4,5,6,7,8,9,10,11,12의 순서를1,6,12,4,9,2,7,12,5,10,3,8,이나 1,8,3,10,5,12,7,2,9,4,11,6 또는1,6,7,12,2,5,8,11,3,4,9,10 등등 얼마든지 바꾸어 그것에 둘째와 셋째의 수법을 적용하면 또한 수없이 많은 멜로디를 작곡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4) 화성법에 있어서는 음렬을 4등분해서 1,2,3음과 4,5,6음과 7,8,9음과 10,11,12음을 가지고 각각 화성을 만들거나 또는 3등분해서 1,2,3,4음과 5,6,7,8음과 9,10,11,12음을 가지고 각각 화성을 만들되 그 화성의 사용법에 있어서는 멜로디와 화성이 철저하게 어긋나도록, 다시 말하면 멜로디에 있는 음이 절대로 화성에 동시에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멜로디와 화성에 같은 음이 중복되면 그 음이 중심음이 되거나 조금이라도 조성을 느끼게 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5) 대위법에 있어서는 원형(O), 전위형(I), 역행형(R), 전위역행형(RI)을 서로 동시에 결합시키면 O+I, O+R, O+RI, I+R, I+RI, 0+R+RI, O+I+R, O+I+R+RI의 8종이 되는데 역시 Eimert의 학설에 의하면 1천8백17억7천6백만6천1백44종이나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음악 교육론.*★시리얼 뮤직과 점묘주의에 대하여★*.점묘주의 음악 &Total Serialism = 총렬주의 = 전음렬주의우선 점묘주의부터 살펴보도록 하겠다.1. 점묘주의베베른은 12음기법을 그의 스승인 쇤베르크와는 다른 관점에서 사용했다. 그는 지금까지의 주제적 보작이란 선적사고를 지양하고 개개의 음악 확산과 응집에 의한 음향현상으로 바꿔논 것이다. 작품에 있어서, 음과 침묵을 동등한 조건으로서 형식화하는 기초적인 발견을 하여 극도로 절약된 음으로써 구성되었다. 그의 작품은 항상 짧지만, 가식없는 요소만이 남아서 간결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점묘주의의 음악은 7도, 9도, 2도 음정을 즐겨쓰며, 이로 인하여 종래의 멜로디의 개념은 소멸되고, 드디어는 Non melody Anti-melody의 음악을 발생케 했다. 다음 악보19의 Variation은 모든 마디가 전부 16분음표의 등분된 연주시가로서 쓰여져 있어, 쉼표까지 포함하여 같은 리듬으로 되어 있다.그 Variation은 음고와 리듬이 다같이 Mirror Form으로 되어 있다.점묘주의 음악에서는 극단적인 음색선율이 잘 사용된다. 음색선율이란 음색의 변화 연속에 의한 흐름을 말하며, 음고와 리듬의 변화와 같이, 음색변화도 악곡구성의 본질적 요소로 하고 있다. 보통 선율이 음높이를 항상변화시켜가는데 비하여, 음색이 항상 변해 가는 것을 말한다.악보 21(Five pieces for orchestra Op.16 -Schoenberg)의 a는 쇤베르크의 작품인 중의 제3곡의 제시부이며, 여기서 단 하나의 화음이 끊임없이 그때마다 다른 악기의 용법으로 되풀이되어 나타난다.악보21의 b는 같은 곡중의 제5곡의 첫 부분을 나타낸 것인데, 가장 진보된 색체변화의 용법을 경험하였다고 볼 수 있다.악보24는 베베른의 Op.10 중 제1곡이다. 이곡에서는 하나의 음이 길게 뻗쳐지기도 하고, 연타되는 사이에 악기가 교차되어, 음색이 변하는 예가 여러군데 보이며, 또 일련의 선율이 차례차례로 악기를 바꾸어 연주되는 경우가 많다.베베른의 음악이 성근 짜임새를 보이는 이유는 아주 짧은 모티브가 소개되면 곧 이어 이와 비슷한 모양과 길이의 모티브가 다른 음역(훨씬 더 높거나 낮은 음역)에서 나오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면 마치 여기 저기 점을 찍어 놓은 듯한 구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짜임새는 미술에 있어 아주 작은 원색의 점들을 수없이 모여 선이나 전체적인 현상을 이루는 점묘주의 회화에 비유되어 점묘주의적 선율, 혹은 음악어법이라고 표현된다.대표작곡가 : 베베른, 블레즈, 노노, 슈톡하우젠※ 점묘주의 예시 - 교재 82~932. 총렬주의 음악쇤베르크에 있어서 12음기법은 음악의 조성을 의식적으로 하여 하나의 통일적 악상 위에 건설하여, 새로운 질서에 바탕을 둔 음악을 창조하는데에 그 이유가 있었다. 그는 개개의 음 사이에 존재하는 기능적 종속관계를 단절하고 각 음의 평등화, 객체화를 도모하였으나 그는 그것을 새로운 음의 시간적 배치로서 파악하지는 않았다. 이 12음기법에서 다루었던 12의 음고 이외에 다른 Parameter-음가, 연주, 강약등-에도 12음기법의 개념을 확장시켜 적용한 음악들을 Serial music 이라고 한다.1945년대에 시작한 총렬주의 음악은 12음기법의 순열기법적 사고를 음악 구성의 모든 매개변수로 그 범위를 확장한 것으로서 쇤베르크의 음열의 원칙을 음의 고저 외의 다른 음악의 요소들에까지 확대시킨 것이다. 쇤베르크가 했던 것처럼 반음계의 12음을 음열화시킬 수 있다면, 길이, 강도, 음색, 구성, 침묵 등의 요소들도 음열화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으로 출발하였다.그러나 18세기와 19세기에는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전통적으로 상호의존 했음에 반해 이제는 모든 것들이 간단하게 교체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음고의 열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음고가 아닌 요소의 음열과 결합될 수 있음을 보였다. 메시앙이 그의 과 보비트의에서 보여준 것과 같다.다른 음열들이 독립적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고, 혹은 하나의 수학적인 음열들로부터 이런 저런 방법으로 모든 음열들이 유출될 수도 있다. 어느 경우에서나 여러 가지 음열은 모든 것이 동시에 진행하는 가운데 한 작품의 세 부분을 넘어선 “전체적 조절”점에서 끼워들게 된다. 이것은 임의로 또는 기계적으로 여러 음열과 그 결합을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들의 관계는 음악적으로 합리적이어야 하며, 단순하게 수학적인 것이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점에서 전체적인 조절의 적용은 전체적인 우발사건을 초래하는 음악을 만들게 될 것이다.특히 훈련되지 않은 귀에게는 기법을 가지고 만든 음악적으로 아주 민감한 작곡가들에 의한 작품에 그러한 우발사건이라는 인상은 쉽게 피할 수 없을 것이다.그러한 인상의 한 원인으로는 이러한 원리들에 기초한 음악이 전형적으로 무주제 즉, 미리 지각된 선율/리듬/화성적 실체와 그것들의 재인 가능한 확대, 일탈, 발전이라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주제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이에 더해 분명한 리듬의 맥박이 전형적으로 결핍되어 있고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진행이 결핍되어 있다.예를 들어 하이든 시대부터 19세기를 통하여 있어 왔던 교향곡의 특징이었던 작품의 끝을 향하여 절정에 도달하는 예견할 수 있는 틀림없는 지점을 향한 움직임이란 의미에서의 진행은 그 곳에 없다. 대신 사람들은 계속해 들리고 반복이 없고 예견할 수 없는 음악적 사건만을 의식할 수 있다. 그러한 사건들은 소리-음색, 멜로디, 리듬-의 미세한 “점”이 분명히 우발적인 방식으로 서로 뒤얽히고 암전하는 형식을 택하게 될 것이다.물론 한 작품이 잘 구성되었을 때 사건의 전체성이 논리적인 패턴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많이 연구하고 계속해서 듣고 난 후에야 알 수 있게 되는 아주 복잡한 형식일 수 있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