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끝은 또 다른 시작을('황하에서 천산까지'를 읽고서...)과 목동서양의 만남교 수황 효순 교수님제출일2001. 5. 5학 과지구환경 건설공학부학 번1995001999성 명이 동 헌Ⅰ. 머리말[황하에서 천산까지]라는 책을 읽으면서 우선 [동서양의 만남]이라는 과목을 접하기 전의 내 생각과 8주 정도의 강의를 들은 후의 지금의 나의 생각을 비교해 보았다. 수업을 받기 전에 우선적으로 지녔었던 생각은 中國을 중심으로 한 漢字文化를 배우는 것이나, 西洋文明의 메카라고 할 수 있을만한 그리스에 대해서 배우는 것으로 생각하였었다. 하지만, 수업을 들으면서 실크로드가 인류 문명에 끼친 영향이 너무나 위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교수님께 전자메일을 통해서 보낸 적도 있는 내용이지만, 세계의 중심이 로마(Pax Romana) → 미국(Pax Americana) → 중국(Pax Sinica)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바였다. 또한, 실크로드의 중심지가 바로 중국이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아주 큰 감명을 주었다.그렇기에, [황하에서 천산까지]라는 책을 읽으면서, 실크로드에 대해 더욱더 자세히 알고자 하였다. 우리는 곧잘 강한 자와 강한 민족의 역사에 매료된다. 위인과 영웅의 생애에 감명을 받는 것은 어쩌면 우리 내면에 '권력에의 의지'가 꿈틀거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때는 중앙아시아에서 대제국을 건설했었던 유목민들이 지금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신음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환상에 찬 실크로드보다는 억압받는 소수민족들의 삶에 관심이 더욱 쏠렸다. 따라서, 책에 서술되어 있는 것처럼, 4개의 소수민족(티베트족, 회족, 몽고족, 위구르족)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의 소수민족들의 억압된 삶을 보고 내가 느낀 것을 말하고자 한다.Ⅱ. 본 문[황하에서 천산까지]라는 책은 표지에도 나와 있듯이, 도도히 흐르는 황하(黃河)의 거친 탁류를 건너 소수민족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천산(天山)으로 가는 동안의 네 개의 민족을 대상으로 서술되어 있다.1장은 티베트 민족의 고난에 찬 과가를 들려 주고 그 민족들이 소중하게 간직하려 했던 신앙의 자취를 보여주려 한 것 같다.1. 티베트 [초몰랑마, 달라이 라마여! 우리에게 희망을 주소서!]익히 알다시피 티베트는 지구상 최대(最大)·최고(最高)의 고원인 티베트 고원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고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지역이 해발고도 4,000m가 넘어 파미르 고원과 함께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린다. 이 같은 고원지대에서 오랜 세월을 불교적 전통과 함께 살아왔던 티베트족들. 건조하고 물도 부족한 고원지대에서 이들이 삶을 헤쳐나갈 수 있었던 것은 강한 불교신앙 때문이었다. 불교가 전해지기 전까지는 샤먼[巫者]을 중심으로 하는 본교(敎)가 성행하였으나, 8세기 이후 불교가 들어와 17세기부터 달라이 라마를 정치·종교상의 군주로 하는 독특한 제도가 유지되어온 나라가 바로 티베트이다. 허나, 불교신앙이 투철한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14대)가 중국의 공격으로 인하여 1959년 4월에 인도로 越境을 하고, 또한, 티베트인들 조차도, 중공군의 학살과 탄압에 견디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의 망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나에게 정말 충격을 주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떠난다는 것(자의적이 아닌 타의적)이 얼마나 큰 고통이고 슬픔이라는 것은 인간인 인간(?)들은 다 알리라! 그 동안 TV나 기타 매체를 통하여 티베트에 대해서 접했었던 평화적인 모습들이 중국이라는 커다란 장벽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저 겉으로 나타나는 가식적인 것이었음을 짐작케 해주었다. 티베트의 비폭력적인 독립운동으로 198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마치 우리 나라가 30 여년간의 오랜 시간동안 일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처럼, 티베트도 그러하였을 거라는 생각은 참 마음이 아프게 했다.한때(630년경) 티베트는 '송첸감포'라는 왕의 지배아래 강대한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던 나라였다. 그리고 그는 당나라 태종에게 공주를 보내달라 하여 태종의 공주인 문성 공주와 혼인을에 라마교의 지배자가 정치적 지배권도 함께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청이 무너지고, 황제와 달라이 라마 사이의 특수한 관계가 소멸됨에 따라서, 티베트는 중국으로부터의 獨立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중국은 티베트가 원래 중국의 일부였기 때문에 청이 무너졌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고 하면서 그것을 거부하는 어떤 주장도 집단도 용인하지 않았다. 마치 지금의 일본이 자기들의 침략 전쟁을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대책이었다고 역사를 왜곡하는 것처럼 말이다. 중공군의 침입과 티베트 점령이후 정치적 탄압, 경제적 곤란, 정신적 황폐화 등으로 인해 티베트인의 사망한 숫자가 120만명에 이른다고 하니 말 그대로 대학살(massacre)이었다. 이러한 티베트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제고시키기 위해서 달라이 라마는 여러 나라를 순방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 예로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인정하되, 티베트의 진정한 자치권과 정치적 민주주의를 보장하라는 스트라스부르 제안을 들 수가 있다. 이 제안은 폭력을 지양하고 비폭력을 지향하는 평화적인 제안으로 중국과 티베트 어디에도 환영받지 못했으나,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198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하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정치적 탄압은 계속되고 있다.초몰랑마. 티베트어로 '성스러운 어머니'라는 뜻으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에베레스트산의 이름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빼앗겼어도, 없어지지 않고 빛나는 성스러움. 가난함 속에서도 순박한 종교적 심성. 이것이 바로 티베트의 영혼이 아닐까 한다.2. 회족(回族) [마명심의 꿈꾸던 나라는 어디로!]회족은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된 중국 내에 소수민족이었다. 사전을 찾아보니까, 중국 내에 거주하며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소수민족이라고 하였다. 전혀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접하니까 이해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난주의 도시개발로 인해 마 명심의 묘지가 파괴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아홍이 온몸을 내던졌던 사건(1983년)을 두고, 중국작가 장 던진 예수의 죽음, 그 뒤를 따라 순교의 길을 택한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가 있기 때문이었고 전 태일이 평화시장 노동자였을 당시의 노동자들의 극한 상황을 표출하기 위해서, 분신자살을 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노동자들의 힘에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1719년 하주(현재의 임하)에서 태어난 마 명심은 어렸을 때 양친을 잃어 숙부와 함께 살았는데, 9세 때에는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 사실로 보아서 마 명심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그 지방은 이슬람교가 있었던 같이 보였다. 그곳에서 10여년을 머물며 순례를 한 마 명심은 스승의 권유에 따라, 다시 중국으로 와서 이슬람교를 전파하였다. 그가 개창한 교단인 자흐리 교단과 기존교단인 화사(花寺)교단과의 차이로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런 교파간의 전쟁이 결국은 청나라에 대한 반란(하지만, 나는 이것이 반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그들의 권리를 나타내고 싶어하는 하나의 행동이라고 생각한다.)으로 비화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마 명심은 처형을 당하게 되었고, 반란은 진압되기에 이르렀다. 반란을 진압한 청나라는 마치 지상에서 자흐리 교단을 없애버리려는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였다. 이 사건은 단지 자흐리 교단 순교 역사의 서막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몇 년 후에 자흐리 교도들이 다시 반란(행동)을 일으켰고, 탄압은 계속 되었다. 한 예로 석봉보의 성전이 끝난 이후 진압을 했던 건륭제가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 마음의 고통을 참을 수 없다'고 한 말을 보면서 가해자가 그렇게 느꼈을 정도였으면, 당시 그 탄압이 얼마나 잔혹했었는가를 보여 준다. 하지만, 5대 마 화룡(참고로, 1대 마 명심, 2대 목 아홍, 3대 마 달천, 4대 마 이덕)의 죽음과 함께 자흐리 교단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닌, 내부의 분열로 인한 결과였던 것에서 더욱 가슴은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청조가 붕괴되면서, 자흐리 교단은 본격적으로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와 몽골공화국으로 우리의 남과 북처럼 분단된 민족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에 몽고에 대해서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몽고족은 한때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라고 불리울 만큼의 대제국을 지배하던 민족이었다. 민족마다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있다지만, 이들처럼 확연하게 명암이 갈리는 경우도 흔치는 않으리라. 원래 몽고족은 초원에서 가축을 치며, 풀과 물을 찾아 이동하는 생활을 하던 유목민족이었다. 하지만, 그 '이동'이라는 의미는 집시처럼 마음내키는 대로의 이동이 아니고 계절에 따라 정해진 route를 따라 옮겨 다니는 것이었다. 그들은 토지에 속박되지 않은 자유민으로서 무한한 긍지를 느꼈던 것이다. SBS에서 방영되었던 중국기행에 보더라도 유목민족의 무소유라는 개념은 모든 것이 자기 것이다라는 것과 동등한 의미를 뜻한다. 우리가 보는 무소유라는 개념과는 큰 차이가 있다. 즉 관점의 차이로 인해서 또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유목민족을 대표하는 몽고족은 급속도로 거대한 민족을 만들었던 만큼 급속도로 멸망하여 갔다. 권력 다툼과 라마교의 타락이 붕괴의 주원인이라고 하겠다. 마지막 황제 토곤 테무르의 죽음 이후 원은 멸망하였다. 원나라의 멸망은 그 후 진행된 몽고족의 퇴락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원나라의 멸망 후 북방의 초원으로 되돌아간 그들은 내분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고, 결국 만주족에게 무릎을 꿇고 말게 되었다. 그런 싸움의 한가운데에 고려인들이 있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몽고족의 운명도 우리와 기이한 인연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원과 명의 교체기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 고려 여인 기황후(奇皇后)가 서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기황후를 중심으로 음모와 횡자가 저질러 원나라를 와해시키는 촉진제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나, 고려에서 공녀(貢女)와 엄인( 人)을 강제로 차출해 간 몽고인들의 무자비함을 생각하면 원조가 그들에 의해 수난받은 것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 할 수 밖에이다.
日帝 侵略史ㆍ韓民族의 受難史를 중심으로 본한국근대사1876년 11 일본 군함 7척, 경기 해안에 정박. 강화에서 朝日修好會談 시작. 최익현은 斥邪疏를 올리고 강화조약교섭을반대하여 흑산도로 유배됨.2 불평등조약 韓日修好條規(丙子修好條約)조인. 김기수를 일본 수신사에 임명.4 수신사일행 서울 출발, 부산포에서 일본기선을 타고 도일.6 수신사 김기수가 국왕에게 귀국 보고. 일봄 이사관 宮本小一이 朝日修好條規 비준서를 가지고 와서 정납.7 朝日修好條規 부록 11款과 貿易章程(朝日通商暫定協約) 11款 조인.12 동래부사 홍우창이 주부산항 일본 관리관 近藤眞鋤와 부산항 일인 거류지 組借 條約 조인.1877년 5 동래부사 홍우창이 近藤眞鋤와 조일 표류선 취급협정 조인.8 일본 대리공사 花房義質이 부산 도착(10월 입경하여 일본 사신의 주경기한과 2개 항의 개항장 선정문제를 협의 하였으나 회담 실패, 귀국).1878년 4 일본 군함 천성호가 개항장 물색을 위해 함경도 덕원연안에서 수심 측량.6 일본 제일은행이 부산에 지점 설치.8 부산항 수출입 화물이 과세를 위한 세목, 통행규칙을 정함. 일본군함 천성호가 전라와 충청해안을 측량.9 부산 모두진에 세관을 설치하고 병자조약에 위배된다고 동래부에 철폐를 요구. 일본 상인 135명, 동래부에서 세관설치반대 시위. 정부는 계속 수세를 명함.11 일본 대리공사 花房이 군함비예호로 부산에 이르러 해병을 상륙시켜 군사시위. 일본 상인, 동래부 난입시위 철 관요구. 정부, 무력시위에 굴복하여 부산 세관의 수세를 중지.12 개화승 이동인이 東本願寺 부산분원을 방문하고 접촉 시작.1879년 3 일본 해병, 동래부청에 총격.5 일본 공사가 요구한 일본 화폐의 통용, 등대의 설치 등을 허가. 花房에게 원산 개항을 허가하고 인천 개항은 거절함.7 인천, 부평에 포대와 진을 설치. 청의 북양 대신 李鴻章이 조선에서의 일본과 러시아 세력견제를 위해 조선에 서양 제국과의 통상을 권고. 원산 개항예약 7개조 의정 조인(1880.3.23 통상개시).1880에 육군헌병사령부를 둠).7 지방대의 명칭을 鎭衛隊로 통일, 원수부에서 연대로 편제. 한강 철교 준공. 경인철도 완전 개통. 최초로 경인간 해외전화 개통. 용산에 조폐국 완성, 업무 개시.8 중추원의사규칙 공포 시행. 원수부 회계총국장 민영환이 헌병대사령관 겸임. 조병식이 주일본 특명전권공사에 임명됨. 궁내부관제 개정 공포(親王府를 신설). 일본 지리학자 小藤文次郞이 남부지질조사차 인천 도착. 일본인이 가설한 경부전선의 복선공사 완료.9 軍部官制 전면개정 공포.10 간도거류민들이 정부에 관리 파견을 요청. 일인 어업구역을 전라, 경상, 강원, 함경도에서 경기도를 추가 허가.11 일본의 三井物産에 官蔘위탁판매 허가. 한일통상조약 맺음.12 고종황제, 빅토리아 영국여왕으로부터 훈장 받음. 궁내부 관제 일부 개정.1901년 1 미국특명전권공사에 이용태가 임명됨.2 신식화폐조례 공포(금본위제 채택).3 벨기에와 수호통상조약 조인. 주미공사에 박정양, 주영 벨기에 경임공사에 민영돈. 주불공사에 조민희, 주독ㆍ墺겸임 공사에 민철훈을 임명. 벨기에와 朝日修好通商條約 조인.5 정부는 일본의 요구에 따라 방곡령과 기타로 인한 손해배상 11만 원의 6個年賦 지불을 약속. 마산 일본 특별거류지 설정을 발표.7 전국적인 흉작으로 토목공사왕 미곡의 반출을 금지케 함. 충청과 전라북도의 방곡령 해제를 일본공사가 요구.8 일본인 澁澤榮一이 직산금광의 채굴권을 얻어냄.9 일본 제일은행에서 조세를 담보로 50만원 차관.10 방곡령 해제를 공포. 정부전복음모사건에 연루된 활빈당원 하원홍, 엄주봉 등 9명 참형.1902년 1 외부대신 박제순이 駐箚청국공사에 임명됨.2 궁내부관제 일부 개정 공포. 量地衙門을 地 衙門에 통합. 내장원경 이용익이 私鑄錢을 엄금하고 白銅貨를 각 지방에까지 통용시키고자 화폐 교구책 상소. 각국 공사는 일본공사관에서 회동하고 白銅貨 주조의 금지를 요구.5 일본제일은행은 當銀行券(1원 권)을 조선에서 발행하여 유통시킴. 마산에 70만 평을 일본 거류지로 허가. 이범윤을 북한강경책을 훈령. 伊藤博文은 헤이그 밀사 사건을 이유로 고종의 퇴위를 강요. 이완용, 송병준 등 전 각료는 어전회의에서 고종의 양위를 주장. 皇帝讓位式이 中和殿에서 거행됨(20일). (정미7조약) 강제 조인. 일본은 통감 伊藤博文의 요청으로 보병 제12여 단을 파한. 을 공포하여 반일 세론을 탄압. 國有未墾地利用法 공포. 군대해산 詔勅 발표.8 한국군대를 강제 해산. 시위 1연대 1대대장 박성환이 군대해산을 반대하여 자결. 侍衛隊는 일병과 충돌(이후 해산군인, 각지 의병과 합류 전국적 항일전전개)함. 고정은 이강년에게 밀지를 내려 의병을 일으킬 것을 호소. 한국정부 각부에 일본인 관리를 대량으로 배치. 대한자강회 해산령을 내림. 龍井에 통감부 임시 간도 파견소 설치.9 서울에서 경성박람회 개최.10 를 강요, 일본헌병대의 편성을 고쳐 증원. 통감 伊藤博文, 주한영국총영사에 공문을 보내『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 베델의 처벌을 요청. 일본 황태자 내한.11 일진회는 의병에 대항하여 自衛團 조직, 각지에 파견. 재정고문 日賀田種太郞의 강압으로 일본흥업은행으로부터 다시 2천만 원 차관.12 중앙, 지방관제 개정. 재판소구성법 공포. 한국 황태자 이은은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연행됨. 허위, 이강년, 이록영 등이 양주에서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여 이인영을 13도 창의군에 추대. 서울 진공을 계획.1908년 1 청진을 강제적으로 개항. 통감부에 의해 사법제도 대폭 개정. 의병장 허위가 3백 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서울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했으나 일군에 패퇴, 13도 倡義大陣所 해체. 의병장 민긍호. 치악산전투에서 전사. 내각에서는 훈령 보고문을 日文으로 작성하기로 결정.3 통감부에서는 日人관리 대량 임명이 주는 나쁜 인상을 피하기 위해 일인 任官 임명은 관보에 기재치 않기로 결정. 탁지부는 함경북도에 러시아 화폐 사용 금지를 명령. 정부는 일본과 차관계약을 맺음(시정개선을 위해 5년간에 1,968만 원을 차관).4 신문지규칙 공포. 헌병보조원으로 조선인을 채용.와 거류지 永貸借地權 정리안 및 거류지 철폐정리에 관한 의정서 조인.5 도로단속규칙 공포.6 총독부 및 소속관서 문관채용에 관한 규칙 공포.7 신민회사건 공판에서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등에 6년 선고, 그외는 무죄.8 지세징수에 관한 건 공포.9 일본육해군형법, 요새지대법의 일부를 시행. 의병장 유시연이 대구지법에서 사형언도를 받음.10 府制 공포. 일본인학교에 관한 학교조합령 공포. 역둔토 특별처분령 공포(일본 이민의 토지대여에 우선권 부여). 각지의 농공은행, 정관개정(조선에 거주하는 조선인만이 주주가 될 수 있음).12 도의 위치 관할구역 및 府制의 명칭 위치 관할구역을 정함.1914년 1 호남선 개통. 부제시행규칙 학교조합령 시행규칙 공포.3 지방행정구역 개편(317군 4,351면을 12부 218군 2,517면으로). 연초세령, 지세령을 공포.4 조선선박령, 조선선세령 공포. 부동산등기령 개정 공포. 농공은행령 지방금융조합령 공포.7 행정집행령 공포.8 경무총감부, 군사사항보도를 당분간 금지시킴. 경원선 새통. 조선간접국세범칙자 처분령 공포. 일본의 대독선전포골로 서울의 독일총영사관 및 인천의 세창양행 폐쇄됨.9 국교에 관계되는 사항의 보도를 통제. 총독부는 군수중공업원료 및 석탄 수출의 단속. 러시아 관헌은 일본의 요구로 블라디보스톡의 한인을 국외로 추방. 총독부에서 시정 5개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개최. 시장규칙 공포. 원산에서 경원선 개통시 거행.1915년 2 신민회사건으로 복역중이던 윤치호, 양기탁 등이 전원 가석방됨. 米穀검사규칙 공포.3 민적법을 개정(조선인 호적사무를 부윤, 면장에게 이관). 사립학교규칙 개정. 유동열, 박은시그 신규식, 이상설 등이 상해 영국조계지에서 新韓革命黨 조직. 진남포 축항 완공.4 중추원관제 개정 공포(조선인의 관습과 제도를 조사케 함). 경기도, 국비조림을 착수.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해 제주도와 울릉도에 도청을 설치하고, 島司에 도령을 발할 권한을 부여하고, 경찰서장을 겸임시킴.7 조선 중요물산 동럽조합령 공산시험장 설치. 중국 간도 주둔의 일본군 철수.6 산업조사위원회규정을 공포. 소위에 관한 호적법 정비.8 친일단체인 朝鮮小作人相助會가 서울에서 조직됨(회장 송병준).9 산업조사위원회 설치. 경성인쇄공친목회는 창립총회를 광무대에서 개최.10 조선생명보험회사 설립을 허가.11 조선변호사 시험규칙 공포. 특허법, 특허등록령 공포. 상표등록규칙 공포(1922.1.11 시행).1922년 2 신조선교육령 공포.3 신교육령에 따라 조선총독부 제학교관제, 조선공립학교관제 공포. 사립학교 교원의 자격 및 원수에 관한 규정 공포.4 평양 탄전의 일부 및 총독부 평양광업소 시설을 해군성에 이관. 조선무진업령 공포.7 일본 新瀉縣 信越전력 공사장에서 한인 노동자 약 1백 명이 학살됨.8 총독부 경무국장, 과격사상과 공산주의에 대한 단속방침 발표.9 대동군 평천리 주민 1백여 명이 日군용지로 징발된 토지 20만 평 반환을 평남도청에 탄원.11 이상재, 이승훈, 조만식 등이 朝鮮民立大學期成會 발기. 양정고보 학생들 日人 교사를 배척하고 맹휴. 안창남이 東京一大阪간 비행 성공.12 조선사편수위원회 규정 공포. 조선총독부 재판소령을 개정하고 고등법원의 권한을 확장. 조선호적령 공포.1923년 1 朝鮮物産奬勵會 창립. 임정 내분을 수습하기 위해 상해에서 국발을 위한 광업기술관 파견규칙 공포.3 진해를 해군요항으로 하고, 영흥 요항을 폐지.4 조선종두령 공포. 강상호 등이 진주에서 衡平社 창립.5 성진, 청진항 공사 착공. 일경, 조선노동연맹회 주최 메이데이기념 시위행렬 금지. 평양시내 전차시운전 실시.6 조선 재정조사위원회 규정 공포.9 관동대지진을 계기로, 을 날조하고 재일조선인을 수천 명 학살. 철도회사를 통합한 조선철도주식회사를 설립.10 총독부, 독립운동자의 국내잠입을 막기 위해 경기와 함경남도에 外事警察課를 신설. 조선부업품공진회 개최.11 총독부도서관관제 공포. 선미협회 설립.12 총독부, 재판소 및 檢事局 영장취급규정 공포.1924년 1 제1회 조선재정조사회 개최.3 친일단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