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 절 대외무역 및 국제교류의 변천과정1.근대무역 및 국제교류의 형성과정인천지역의 대외무역과 국제교류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883년 제물포가 개항되면서부터이다. 인천은 1876년에 채결된 병자수호조약에 따라 부산과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개항되었으나, 관세 자주권이 박탈된 상태에서 일제의 경제적 침략의 발판으로 이용되는 불운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당시 인천은 일찍이 구미열강들이 진출한 국제항구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개항과 동시에 일본을 비롯해 청나라,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 구미 각국의 외상들이 앞 다투어 진출함으로써 인천지역이 한국의 근대무역과 국제교류가 형성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그것은 인천이 서해의 유일한 개항장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구한말 수도 한성의 제일 해상관문으로서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또한 앞서 개방된 부산항이 일본의 독점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과 달리 청국을 비롯해 영국, 미국 등 수교국들과의 다각적인 무역관계를 형성하였다. 수출입화물의 유통도 부산의 경우 경상도, 전라도지방으로부터 낙동강 연안에 무역을 중개하는데 국한했던 것과는 달리 인천은 수도 한성을 비롯해 경기도, 충청도 등 중부지역과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북부지역의 수출입 화물의 집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국내 최대의 개항장으로 발돋움하였다.이처럼 인천이 국내 최대의 개항장으로 발전함에 따라 구미 각국 외상들의 진출 또한 증가해 무역 이외에 도소매, 금융, 운수, 보험, 창고, 해운, 숙박업 등 각종 상업분야에 진출이 늘어나는 등 국제교류가 확대되기 시작하였다.당시 이들 외국상인들은 주로 곡물, 해산물, 우피, 면화, 광물 등 국내 특산물을 수출하고 각종 잡화를 비롯해 면사, 포류, 주류, 설탕, 인촌, 약품 등을 수입하는 무역업에 주로 종사해 왔으나 도소매, 운수, 금융, 여관업 등 무역 이외의 분야에도 진출하였다.그 후 일제의 식민통치가 본격화되면서 경부선의 개통과 육로 수송망의 확대로 인천항에 집중되었던외무역6ㆍ25전쟁은 경인공업지대가 위치해 있던 인천지역에도 피해를 끼쳤다. 건물의 44%와 대규모 공장이나 주요산업시설이 42%가 파괴되고 항만시설마저 파괴되어 대외무역기능을 상실하는 등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또한 전란으로 인하여 중앙정부가 부산으로 이전하게 되고 수출입 물동량 또한 부산항에 집중됨으로써 국내 부산항에 제1의 무역항으로서의 지위를 넘겨주는 등 인천항의 역할과 기능은 크게 위축되었다. 1950년 인천항의 무역규모를 살펴보면 수출 1,000만 환, 수입 1,200만 환을 기록하여 부산항의 수출입규모에 비해 각각 5.2%와 31%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1953년 이후 휴전이 성립되고 전후 복구기에 들어가면서 인천항의 수출입 규모는 매년 급속한 증가율을 기록하였으나 1955년까지는 수출입 모두 부산항의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조한 실적을 보였다. 1958년에는 수출입 비중이 부산항에 비해 6.6%와 25%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나 1950년대 하반기에 들어서도 인천항의 무역기능은 회복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인천항의 수출입 상품구조를 살펴보면 수출의 경우 1953년에는 광물 금속 및 동제품 부문이 전체 수출상품의 77.9%를 차지하였고 1959년에 들어서 광물 금속 및 동제품의 전체 수출의 45%를 차지하여 수위를 기록하기는 하였지만, 5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 수출상품구조가공업제품으로 점차 다양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수입상품구조를 살펴보면 1953년에는 식료품 음료품 담배가 전체 수입의 78.5%를 기록하고 전기기기 차량 항공기기계류가 8.3%, 약품류 화장품 폭발물이 5.5%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1956년까지는 상기 3대 품목의 구성비가 각각 36.8%, 5.4%, 1.2%로 크게 감소하고 반면에 면포 면제품을 포함한 섬유류제품과 동식물, 동식물 산품 동제품과 광물 광물제품 동제품 등 공업용원료의 수입이 7.2%로 증가하였다. 5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는 섬유 및 동제품의 수입비율이 44.3%까지 확대되어 식ㆍ음료품 마련해 주었다. 이는 1966년에 들어와서는 1,189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기록하여 전년 대비 31.8%가 증가하였고, 1967년에는 1,628만 달러, 1968년에는 2,244만 달러, 1969년에는 3,146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기록하는 등 연 평균 37%의 높은 수출증가율을 기록하였다. 특히 수출산업공단 조성이 완료된 이후에는 공산품대 대한 수출비중이 높아져 1968년에는 전체 수출액의 94.7%에나 이르렀고 수출대상국도 1965년 10개국에서 22개국으로 2.2배 이상 늘어났다. 또한 수출업체 수도 48개로 늘어나 인천지역의 수출기반이 정착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3)인천항의 수출입 물동량 추이인천항은 부산항에 이어 우리나라 제2의 항구로서 1960년대에 들어 무역량이 증가함에 따라 무역항의 관문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인천항의 수출입 물동량을 살펴보면 1960년대에 46만 6,259M/T에 불과했으나, 1967년에는 195만 1,146M/T로 4.1배 들어났고 1969년에는 279만 8,610M/T로 1960년에 비해 6배 이상으로 물동량이 늘어났다.3)1970년대의 대외무역 및 국제교류(1) 국내 무역동향1970년대는 1960년대 개발의 성과를 기반으로 개발과정에서 파생된 부작용을 시정하는 동시에 경제의 양적 확대와 산업의 질적 고도화를 추진한 시기였다. 특히 무역부문에 있어서 수출주도형 성장정책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수입대체 산업을 육성하고 수출촉진법을 비롯해 각종 지원책 등 관련법규 및 제도를 개선하는 등 수출확대를 위한 노력이 배가되었다.그러나 1970년대 들어와 IMF 체제가 붕괴되고,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과 이로 인한 보호무역주의 강화 등 국제경제환경 악화와 경제 질서의 대변혁은 수출주도형 성장정책을 추진해온 한국경제에 커다란 제약요인으로 작용하였다.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한국의 대외경제정책은 외채원리금 상환 부담을 축소하는 한편 수출기반을 확충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 조치의 일환으로 외자도입의 방향을 종래의 차관형태에서 외국인투자를 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1970년대를 통하여 기계제품이 주종 수출상품으로 등장하는 등 중화학 공업제품의 수출이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그 결과 1981년 전체 수출액 중에서 기계제품에 대한 수출비중이31%에 이르게 되었고, 전자제품이 15%, 화학제품이 14%에 달하여 이들 3개 품목이 전체 수출의 60%를 차지하는 등 중화학 공업제품의 수출구조로 전환되게 되었다.(3)인천항 수출입 물동량 추이1970년대 들어와 인천항에도 항만 확충을 비롯해 하역능력이 향상되는 등 커다란 변화의 바람이 일었다. 1972년 3월 종래 미8군이 사용해 오던 제1도크가 우리정부로 정식 이관되게 됨에 따라 인천항 전체가 상업항으로서의 기능을 회복하게 되었다. 또한 1966년 6월 항만시설 확충사업으로 추진되었던 인천항 전면 도크화 공사가 1974년 완공됨으로써 5만 톤급의 대형선박을 위시하여 28척의 선박이 동시 접안할 수 있는 능력과 연간 1,000만 톤의 하역능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따라서 1969년에 11만 9,000 M/T에 불과하였던 수출입 물동량이 1970년에 들어서는 467만 9,000 M/T로 무려 40배 이상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971년에도 계속 이어져 전년대비 2배 이상이 증가한 837만 7,000M/T를 기록하였고, 이후 1973~1976년에는 수출입 물동량이 2,400M/T로 증가하였고 1980년에 들어서는 7,900M/T로 전년대비 3배 이상이 증가하는 등 1970년대 들어 인천항의 수출입 물동량은 급격한 증가세를 나타냈다.(4)인천지역의 외국인투자 현황1970년대 경제정책 중에 커다란 변화는 외자도입의 방향을 종래의 차관형태에서 외국인투자를 유치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는 점이다. 정부는 산업구조의 고도화 국제수지를 개선하기 위하여 수출 진흥 정책의 추진과 함께 해외로부터의 기술도입과 외국과의 합작투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특히 1970년대 들어 『수출자유지역조치법』과『외국인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 조정에 관한 임시 조치법』을 제980년 13억 9,200만 달러에서 1989년 30억 3,20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증가율은 1980년대의 우리나라의 연 평균 수출 증가율 13,9%에 비하면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특히 수출 증가율의 기복이 심하게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수출비중이 크게 떨어지는 등 1980년대 인천지역의 수출은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1981년과 1984년 각각 전년대비 17.4%, 30.7%의 높은 증가율을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추세는 3저 현상이 지속되었던 1988년에까지도 계속 이어져 1987년에는 전년대비27.5%가 증가하였고 3저 호황이 끝나면서 1989년 전년에 비해 10.6%가 감소되었다.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1980년대의 수출 상품구조도 커다란 변화가 이었다. 그것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주종을 이루었던 목재제품에 대한 수출비중이 크게 감소된 반면 전기 전자, 기계류 등 중공업제품에 대한 수출비중이 현저히 높아졌다는 점이다.수출시장규모를 살펴보면 1989년 미국에 대한 수출이 12억 8,200만 달러로 전체 수출액의 42.3%를 차지하고 있고, 다음으로 일본이 13.7%, EC제국이 15.1% 홍콩이 4.5% 중동지역과 대양주가 각각 2.5%로 나타났다. 수출시장이 점차 세계의 여러 국가로 다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미국에 대한 수출의존도가 40%이상이나 초과하여 대미 편중현상이 가중되었고 대 일본 시장 확대는 크게 진전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수출확대에 커다란 문제가 제기되었다.(3)인천항의 수출입 물동량 추이세계 해운환경이 선박의 대형화 규격화 추세에 따라 1980년대에 들어서 인천항도 이에 대처하기 위한 항만 확충과 부두기능의 전문화를 위한 사업이 계속 추진되었다. 특히 심각한 체선ㆍ체화 현상을 해소하기 위하여 선거(船渠)내 부두확장을 비롯하여 화물의 특성을 고려한 부두별 기능을 전문화하고 항만관제 기능의 효율을 높이는데 주력했다. 그 결과 1989년에는 연간 하역능력이 2,378만 4,000 M/T로 1979년에 비하여 2.7배
진 남 제개 요□ 발생 배경□ 행사 내용□ 다른 축제와의 비교□ 행사의 기능□ 지역과 관련된 음식문화□ 축제 발전 방향□ 발생 배경○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호국문화축제인 진남제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전란이었던, 조선?일본?명나라 3국이 치열하게 싸웠던 국제전이다. 그때 가장 큰 역할을 한 곳이 전라좌도수군절도영 (양칭:전라좌수영) 본영이 있었던 지금의 전라남도 여수시였고, 그 때의 주력은 전라좌수영 함대였다. 이 역할로 전라도가 보존되었고 조선은 국력을 회복하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그 때의 상황을 이순신장군은(선조26년) 사헌부 지평현덕승에게 보낸 서한문 속에 이렇게 남겼다.(竊想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是無國家)『즈윽이 생각하건데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라. 만일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지는 것입니다』진남제 행사의 목적은, 그 당시 용감하게 싸워 전세계 해전사상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지금의 전남동부 지역인 오관오포(五官五浦) 영민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향토의식의 앙양과 향토 예술을 개발하는데 목적이 있다.전라좌수영은 조선 성종 10년(1479년)에 설치되었고, 그 때의 사령부 건물인 진해루는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중이었던 정유재란 때 왜적에 의해 불타버리고 선조 32년(1599년) 기해년 12월에 삼도수군통계사겸 전롸좌수사인 이시언 장군께서 진해루터에 우리 나라 단일 목조건물 중 최대규모인 진남관(보물 제 324호)을 세웠다.진남제의 어원은 ?진남관(보물 제 324호)?이란 건물에서 나왔으며, 진남(鎭南)이란 ?남쪽을 진압하라? 또는 ?왜적선을 침몰시켜라?하는 뜻이 강한데 임금님이 계시는 도성에서 바라보면 남쪽이 일본이기 때문이다.- 연혁1967.5.5 제1회 전라좌수영 진남제 행사 개최1975.5.5 제9회 제전행사를 여수시에서 민간주도행사로 시행1977.5.5 제11회 제전행사부터 순수 호국향토 축제로 시행1979.3.30 사단법인 진남제전보존회 정관제정문화공보부장관 승인사단법인 진남제전보존회 법인 리 알리게 되었고 아울러 진남제도 그 이름이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발전된 진남제는 1997년5월 제31회까지 여수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대규모의 행사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진남제를 매년 5월4일에 개최하는 이유1592년 임진년에 왜적이 16만 대병으로 부산성을 침범하여 개전 20일만에 도성이 함락되고, 조정은 평안도 의주로 몽진을 하게 되었다. 국토의 대부분이 초토화되었고, 국권이 명멸지경(明滅之境)에 이르게 되었을 때, 이곳 전라좌수영 함대는 이순신 장군과 이 지역 영민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세계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창제하는 등 모든 준비를 마치고, 1592년5월4일 첫 출전하여 작전지역인 전라좌도쪽을 넘어 구국의 영남 부원출격(赴援出擊)을 단행하여, 11번의 해전에서 크게 승리함으로서 임진왜란의 일대 승리를 잡게되었다.진남제를 매년 5월4일에 개최하는 이유는 위의 첫출전일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며, 5월3일 전야제, 가장행렬을 시작으로 3일간 호국, 민속, 특별 등 다양한 행사를 하고 있다.행사 내용□ 행사 개요○ 명칭 : 제39회 진남제 여수 거북선 축제○ 일시 : 2005. 5.3(화) ~ 2005. 5.5(목) (3일간)○ 장소 : 여수 시내 일원- 주 행사장 : 신항 제2부두- 부 행사장 : 거북공원, 선소, 충민사. 자산공원, 어항단지, 진남체육공원□ 행사 일정○ 5월 3일(첫째날)행 사 명시 간장 소주 관 처고 유 제08:00 ~ 09:00충 민 사위 원 회동상?위령탑?충혼탑 참배10:00 ~ 11:00자 산 공 원위원회?라이온스전국남여 공도대회(예선)08:00 ~ 17:00무 선 정궁도협회(무선정)오관오포 농악경연대회(예선)10:00 ~ 18:00오 동 도국 악 협 회시민 화합 잔치18:00 ~ 18:30시민회관→신항 부두위 원 회용 줄 다 리 기18:30 ~ 19:30중앙동 로타리위 원 회소동줄놀이 경연18:30 ~ 21:00시민회관→신항부두위원회위 원 회농악 시 연18:30 ~ 21:00시민회관→신항부두위원회위 원 회가 장 행 일체 유주, 무주 고혼을 천도하기 위하여 전통불교의식으로 범천의 소리인 범패, 제법구 등으로 가장 범위가 큰 영산재이다. 수륙대제는 호국 영령들을 기억하고 호국안민의 정신을 계승하자는데 의의가 있다.○ 영당풍어제여수 어업의 발원지인 종포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하루 전에 이충무공께서 거북선의 현자포를 처음으로 발사시험을 했던 역사적인 현장으로 널리 알려진 사적지이며 일제가 전선을 강점한 후에 식민화 정책 일환으로 많은 일본인들을 내선일체라는 미명아래 조선에 위주케 했을 때 일본 이와현에서 어선어업을 주업으로 삼았던 일본 어민들이 대거 이곳에 이주 집단촌을 이루웠던 곳이기도 하다. 이렇듯 종포 주민들은 거의 대부분이 어선 어업을 경영하거나 종사하였던 탓으로 항상 해상 자연재해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비단 종포뿐만 아니라 어민들이 가장 두려워 한 것은 태풍으로 인해 어선의 대파는 물론 인명피해일 것이다. 이때 어민들은 미신에 심취하고 무속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종포 주민들은 이러한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용왕의 노여움을 풀어주고 어민들의 무사안일을 기원하는 제기를 음력정월대보름날을 택해서 종포 주민 공동의식으로 해변에서 모셨다.또한 구전에 의하면 여수의 어민들은 정월 대보름에는 푸짐한 음식과 제수를 장만하여 남산동 수재 당머리 에 위치한 영당에서 고사를 지냈다고 하며 노한 남해용신을 달래기 위해 무의식에 의한 「용신 풀이굿」을 했다고 한다.- 용신맞이 풍어굿여수는 옛부터 생업의 근거를 어업에 두고 있고 해안과 바다는 우리 어민들의 생활의 터전으로서 숱한 환과 함께 그들 나름대로의 생활 습속과 신앙을 갖고 있다. 그들의 속신(민간에 전해지는 관습적인 신앙)의 내용은 거의가 풍어제를 지내고 출어날에는 오색기를 배에 꽂고 선상에서 용왕제를 올리는게 관행으로 되어 있다. 여수지방 어민들은 옛날부터 남해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여겨 매년마다 음력 정월대보름 정오부터 새벽녘까지 용왕신에게 풍어제를 올렸다. 여수지방 풍어제는 처음 무녀들로 주축을 이룬 무속의 형태를 갖추년들이 「덜이 덜롱 (달이 둥글다는 옛말)」 이란 민요가락에 맞추어 이웃 부락과 줄다리기를 해 왔다고 하며 줄을 잡아 당기면서 힘을 쓰는?어차?소리와 옆에서 응원하는 역성 소리가 마을의 악귀를 쫓아낸다고들 믿었다고 한다. 주로 줄다리기 놀이는 일출정앞 공지와 토목국에서 개최되었다고 하며 어둠이 스며든 초저녁에 시작하여 날이 맑아지는 뒷날 새벽까지 이어졌고 또한 붐비는 인파 속에 삼현육각을 잡힌 농악놀이가 더욱 흥을 돋구고 경앙된 양편 응원자들의 고함소리와 술에 취한 주민들의 난무가 온통 거리를 휩쓸고 흥분 시켰다고 한다.이러한 우리 조상들의 이면에는 사실상 나라 잃은 설움과 분노의 응어리가 서려 있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줄다리기 놀이는 일제의 압제 하에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 협동심과 애국심을 고취 앙양시키는데 큰 힘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사유 때문인지 일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되자 한국인의 반일감정이 악화 될 것을 우려하여 한국인의 집중된 힘과 열을 분산, 와해시키고자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인 줄다리기마저도 중단시켰던 것이다.이와 같은 훌륭한 향토민속전통놀이가 오랜 세월 동안을 중단됨에 따라 주민의 관심에서 소외되어 소멸되다시피 했으나 다행이도 향토민속연구가인 정흥수 진남제전보존회 이사의 부단한 노력과 헌신적인 재현작업의 의해 1978년에 이를 발굴 재연시킴으로서 제12회 진남제 행사의 공개행사로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용줄다리기때 부르던 민요는 3가지로 구분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민요가사가. 후렴--------------어얼사 더리덜렁우리군사 잘도하네 [후렴]힘을써서 잘들 당기소 [후렴]각심을 쓰면 못이기네 [후렴]일심동력 힘을쓰세 [후렴]우리군사 작지만은 [후렴]사기만은 하늘높네 [후렴]우리군사 이기면은 [후렴]사발광대 씌워줌세 [후렴]등이 있다나. 힘의 집약시 [후렴] 우야, 허다. 결전------[후렴] 영차, 영차○ 소동줄 놀이이 고장 전래의 집단 민속놀이인 용줄다리기의 전위놀이로써 대보름을 전후하여 어린이들이 볏집을 꼬아 줄을 만들고 떼를 제전민속실에서 사물로 편성. 연주를 지도 하였음.옥수레 : 정유년 2월 26일 왜국간첩(요시라)의 책략에 넘어간 조정은 충무공에게 죄를 씌어 금부도사를 한산도에 보내 옥수레로 압송할 때 거리마다 백성들이 통곡하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친 단장의 수난행렬동풍용왕상 : 속신에 용왕은 물을 관장하는 최고의 신으로 민간신앙에서 경배하는 대상신이다. 용은 용왕의 아들로서 비와 바람을 마음대로 조절하는 능력있는 영물로 속신하는 습속이 있어 풍어와 풍농을 기원하는 오신행렬이다.이충무공의 효 : 나라가 위태로울 때 스스로의 신명을 바쳐 겨레를 지켜주신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 중에서 ?이날은 어머님의 생신일이라 슬프고 애통함을 참을 길이 없었다. 닭이 울자 일어나 앉아 불효에 눈물만 흘렸다.?라고 적고 있다.임진란이 일어난 뒤 난중임에도 본가는 부인에게 맡기고 77세의 노모를 아산에서 여수시 시전동 송현마을에 만 5년 동안 모셨는데 본영에서 20리 남짓하여 노모의 안후를 살피기 거리인 곳에 군관으로 있는 당시 여수 출신인 정대수 장군댁 초당인지라 안심하고 모실 수 있었으며, 어버이를 여의고 의지할 곳 없어 조모님을 따르는 조카들에 대하여도 어진 숙부가 되어 노모의 심려를 덜어 둘러 싼 사실 또한 효성이 지극했던 이 충무공의 지극한 효심을 재현한 작품다른 축제와의 비교□ 아산 성웅 이순신 축제 (牙山聖雄李舜臣祝祭)충남 아산시에서 해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을 전후하여 열리는 문화관광축제로 1961년 시작되어 매년 4월24일~28일까지 현충사에서 행해지는 축제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애국애족정신을 되새기고 국난극복의 위업을 계승하고자 1961년 온양문화원이 주관하여 온양문화제로 개최되었다. 1962년부터 아산군이 맡아 주관하였고, 1982년 온양읍이 시로 승격한 뒤 온양시가 주관하다가, 1992년 아산시가 공동지원하여 온양아산문화제로 이름을 바꾸었다.1988년 온양문화제로 이름을 변경하였다가 2004년 정부지정 문화관광축제가 되어 지금의 이름으로 변경하여 교육체험형 프로다.
‘큰손’과 ‘좀도둑’의 정치경제학을 읽고제 1장 길 떠나기에 앞서1. 저절로 굴러가는 나라를 찾아서우리나라에서 교육이 무너졌다는 내용의 신문은 비일비재하지만 2001년 경제협력기구가 만 15세 학생을 상대로 한 학업성취도를 국제비교 한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 학생들이 과학에서 1위, 수학에서 2위를 차지했다. 실로 놀라운 성적이다. 앞뒤가 안 맞아 보이지만 한 가지가 밑바닥에 깔려있다. 주입식교육이 창의력을 억눌러 학교 교육을 지겹게 만들면서, 짧게는 시험성적을 크게 올렸지만, 길게는 뒤탈을 불러온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정치와 경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60년에서 90년까지 30년 동안의 경제 성장률을 보면 세계 114국 평균이 연 1.8% 인 데 비해 우리나라는 그 세 배가 넘는 연 6.7%로 단연 첫째였다.그 비결은 바로 정부주도형 경제성장이다. 주입식교육이 창의력을 망치듯 정부주도형 경제성장은 정치와 경제의 자생력을 크게 떨어뜨렸다. 자생력이 떨어지면 나라가 푸석해 질 수밖에 없다. 오늘날 선진국의 정치와 경제에서 공통점을 찾는다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간추려 볼 수 있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그 밖의 체제들과 다른 점은 바로 자생력, 곧 저절로 굴러가는 힘에 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바탕은 주권재민 사상과 재산권이며, 이는 곧 정치와 경제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히는 것이다. 정치와 경제가 잘 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첫째 주인이 얼마나 직접 나서느냐 둘째. 대리인이 얼마나 주인처럼 굴도록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개혁은 바로 주인 노릇을 잘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문제점이 무엇이고 해결책이 무엇인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각 주인이 또는 대리인이 알아서 찾아내게 된다.이제 느릿느릿 커온 선진국의 정치*경제와 견줘보면서, 우리가 그동안 어떤 대목을 무리하게 건너뛰었고, 그래서 어떤 문제를 갖게 됐는지 들여다보자.2.잠깐, 경제위기는 우리가 못난 탓?1997년에 즈음하여 우리나라의 기업과 금융은 엄청난규모가 큰 경제위기에는 어느 나라고 정부가 나설 수밖에 없다. 외한위기는 곧 은행위기로 나타나는데 정부는 엄청난 공적자금을 쏟아 부어 은행을 살리면서, 회계 공시기준을 다지고 , 금융감독기관과 감독규정을 다듬고, 여신분류 기준과 충당금 적립조건을 단단하게 바로잡는 등의 수많은 법과 규정과 제도를 손질하고 없애고 또 새로 만들었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 시장경제의 바탕은 이제 막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까지 우리는 이런 여러 가지 제도들도 없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심지어 어떻게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고도성장을 30년 넘어서까지 이어올 수 있었는가. 그 비결을 살피기에 앞서 먼저 선진국들이 지나온 나날을 돌이켜보자.4.철모르던 시절의 폭력과 독점처음부터 무르익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가지고 걸음마를 배운 나라는 온 누리에 없다. 우리보다 근대화 역사가 긴ㄴ 선진국도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은 경우는 적지 않다. 문제가 쌓이고 위기가 닥치면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배워 가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가장 먼저 발달시켜 성공한 나라인 영국 또한 국가원수는 세습군주였고, 의원출마는 단독출마가 정상이었으며, 공개투표였으며 소수에게만 투표권이 있었다. 산업 또한 면공업과 철강산업조차 처음에는 인도보다 못하였으며, 교육도 문맹률이 40~50%에 이르렀다. 미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치는 돈벌이 수단으로 수단이었으며 힘있고 겁 없은 부호들은 얽어맬 아무것도 없었다. 이처럼 선진국들의 지난날은 정의는 폭력과 유사했다.그러나 여기에는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 아귀다툼하는 가운데 정치와 경제의 자생력이 상호견제를 통해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나라가 커온 모습과 견줄 때 두 가지가 두드러진다. 첫째, 자본가는 우리나라처럼 정치의 권위에 기대어 커 온 것이 아니라 어지간히 혼자 힘으로 커왔다. 둘째, 정치는 힘센 자들 사이에 어느 누가 독차지 못하도록 하는 견제와 균형을 바탕으로 발전해 왔으며, 봉건제적 전통이라는 힘의 다원화라는 측면에서 이바지했다. 정치와 경제과 같은 시장경제의 밑바탕이 생겨나고 자본이 쌓여간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이렇게 시작해서 천천히 발달해 왔다.2.길드 독점은 첨단제도였다.서양 중세시대에 있던 상인길드는 자본주의 발달사에서 눈여겨볼만하다. 상인길드는 상거래를 독차지하는 조직인데 이상한 점은 상인길드가 들어선 곳에서는 교역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 무렵 상인들에게 가장 골치 아팠던 문제는 거래의 안전성이었다. 중세시대는 무법천지에 가까운 시대라 거래중의 살인, 강도, 약탈은 비일비재 하였다. 그렇다고 하소연 할 데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당한 사람으로서는 거래를 끊는 것만이 오로지 남은 화풀이 수단이었지만, 혼자 거래를 끊어봐야 상대방에게 큰 타격은 줄 수가 없었다. 이에 단결을 함으로서 상대방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렇게 함으로서 거래 위험이 크게 줄어 거래가 늘어나면서 이익이 됐던 것이다. 만일 한두 사람이라도 배반해 몰래 물건을 판다면 거래중단이라는 집단보복을 행하였기 때문에 상인들의 배신행위는 자멸을 뜻하였다. 독일의 한자동맹도 이에 포함된다. 이처럼 위험을 줄이고 신용을 높임으로써 길드는 상거래를 크게 그리고 멀리까지 할 수 있었다. 상인들은 돈을 벌었고, 소비자들은 귀한 물건들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3.스스로 커온 상업도시서유럽 경제가 정치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클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은 바로 자유도시였다. 봉건제 체제 아래에서 왕고 봉건영주 사이에서 통치의 빈틈을 타 관심 밖의 불모지를 매입하여 자치권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이런 곳은 나라의 힘이 미치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이었으며, 달리 말하면 밖에서 정치적 압력과 경제적 경쟁이 다함께 들어오지 못하게 가로막힌 곳이었다. 영토국가의 입김에서 벗어난 유럽 자유도시에서 동인과 상인들은 자기들끼리 길드를 만들어 회원들의 영업을 규제하고 보호함으로써 잘살게 됐다. 이들은 불모지였기 때문에 원격지무역에 나설 수밖에 엇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거래 위험성을 줄이고 거래규모를 늘려 비용을 줄이도록 하는데 크게 이바지했으며, 단 기술’ 인 보통선거로부터 출발했으나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완전경쟁시장에서 작은손들 만으로는 시장경제가 이륙되지 않듯이, 보통선거제에서 작은손 들만으로는 참된 민주주의를 뿌리 내리기가 어렵다. 민주정치는 큰손을 없애는 정치가 아니라 국민이 큰손 노릇을 이어받아야 하는 정치다.2. 조폭이 고마운 이유선진국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 초기 회원국의 절반은 군주국이었다. 이는 군주국이 강대국이 되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였다는 주장이 아주 엉터리는 아니라는 증명이다. 다시 말해 힘으로 하는 지배는 인류역사에서 두루 나타났던 자연스런 현상이다. 군주란 존재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원래 도둑이요 깡패요, 요즘 말로 하면 조폭이다. 통치자를 도둑으로 보는 생각은 뿌리가 깊다. 그런데 깡패들이 힘으로 하는 지배가 역사 발전에 도움이 된 측면도 있다. 흩어져 있는 상태로는 공공재를 대기가 어려운데 이런 상태로는 큰 발전을 이뤄내기 어렵다. 이때 정치적 거래비용을 줄여 공공선택 문제를 손쉽게 해결하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은 바로 힘센 사람이 힘으로 지배하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올슨의 논리를 살펴보자. 좀도둑의 경우 천원짜리 물건을 훔치면서 만 원짜리 유리창을 깨는 식의 일을 밥먹듯하여 사회에 피해를 준다. 유리창은 남의 것이기에 서슴없이 깨는 것이며, 유리창이 달린 집까지는 훔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을 통째로 뺏을 수 있는 큰도둑은 자기 것이 될 유리창을 함부로 깨지 않는다. 큰 도둑은 집이 잘 되야 살기도 편하기 때문에 도둑등에 대비하는 등의 공공재를 대는 책임을 자청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몫이 작은 좀도둑은 좁은 이해관계만을 사회와 함께 하는 데 반해, 몫을 많이 갖는 큰도둑은 넓은 이해관계를 갖는다. 몫이 클수록 도둑은 사회에 피해를 덜 주거나 또는 더 보탬이 된다.3. 관료제와 봉건제-조폭은 싸움면서 큰다.일반적으로 관료제는 선진국 제도이고, 봉건제는 후진국 제도인데, 중국과 우리나라가 오래 전부터 관료제를우리나라도 튼튼한 나라가 될 수 있었지만 붕당정치로 정국 주도자가 자주 바뀌는 등으로 어느 집단도 큰손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한 가운데 중앙과 지방 모두 주인다운 주인이 없는 상태가 돼버렸다. 일제 식민지 때에는 근대적 경제제도가 이식되는 둥 자유시장경제가 이루어지는 듯 하였으나 한국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농촌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금융자본과 산업자본 모두 일본에서 건너온 것으로 우리나라 자체로는 자본축적이 거의 될 수 없는 식민지 산업화였을 뿐이다. 또한 대부분의 국민이 양반 조상을 갖게 됨으로서 사회의 주인 노릇에 부족했기 때문에 허례허식만 흉내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해방과 그에 이은 분단은 또 다른 어려움을 가져왔다. 우리나라 정치와 경제를 이끌어 갈 능력 있는 지도층, 곧 책임 있는 큰손이 없었다는 점이다.2. 이승만 시절-수도꼬지 마음대로해방이라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 근대식 생산설비를 상당 부분 잃게 됐는데, 남한의 경우는 특히 심했다. 공장시설의 대부분이 북한지역에 있었으며, 자본과 기술을 쥐고있던 일본인들이 갑자기 떠나간 뒤 원자재와 전력까지 모자라 결국 공장들은 가동을 자주 멈췄다. 이승만 정부는 정치에서는 권위적이고 독재적이었지만, 경제에서는 자유방임에 가까웠다. 또한 외자유티가 어려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미국의 어쩔 수 없는 원조로 우리나라는 숨을 내 쉴 수 있게 되었지만 한국은 미국의 입김에 놀아났다. 이처럼 이승만 정부의 자유방임 정책은 기꺼이 선택한 결과라기보다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미국의 막강한 영향력에서 끝내 벗어날 수 없었던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이승만 시절 시행한 농지개혁은 지주계층을 해체하고 자작농 체제를 굳힘으로써 경제적으로는 농업생산력 향상과 소득분배 평준화에 이바지했지만, 정치적으로는 국가권력을 견제할 만한 대표적인 정치세력을 크게 역화시켜 결과적으로는 독재를 도운 셈이 됐다.50년대 말 미국의 원조정책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미국원조를 중심으로 그럭저럭 돌아가던 우리 경제는 불황에 빠져들게 됐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