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前)산업시대 유럽의 농업계급구조와 경제발전-로버트 브레너-본 논문의 목적은 경제적인 모델의 구성을 위한 그러한 시도들이 처음부터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있으며, 그 이유는 다름아니라 특정한 인구변화와 상업적 변화들이 소득분배와 경제성장에서의 장기적인 추세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결정하는 요인은 계급관계의 구조 즉 계급간의 세력구조이지, 그 거꾸로는 결코 아니기 때문임을 주장하려는 데 있다. 필자가 여기에서 사용하고자 하는 의미의 계급구조는 분석적으로는 서로 뚜렷하게 구별되지만 역사적으로는 하나로 통합되어있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첫째 측면은 직접생산자들이 직접 생산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그들 사이에 서로 맺는 그리고 또한 그들의 도구 및 토지와 맺는 관계로, 이는 "노동과정" 또는 "사회적 생산력"이라고 불리어왔다. 둘째 측면은 비생산자계급이 직접생산자들로부터 생산물의 일부를 그에 대한 대가 없이 수탈하는 장치로서 본질적으로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재산의 소유권에 따른 관계인데, 이는 "소유관계" 또는 "잉여착취관계"라고 불릴 수 있다.산업화시대까지 포함한 유럽경제사의 서술에서 이른바 인구의 요인이 점점 더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해가고 있다는 점은 일찍이 1958년에 하버쿡크에 의해 그의 유명한 논문「근대영국의 경제사」에서 지적되었다. 인구증가와 그에 따른 가격상승, 농업수익의 증대, 대다수 인구에 대한 실질임금의 하락, 산업에 불리한 교환조건―이와 같은 것은 사회제도들에서 이루어진 변화들에 따라 상황이 다르기는 하지만 13세기와 16세기 및 17세기 초 그리고 1750∼1815년 사이의 시대를 묘사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장기적 맬더스주의라 불릴 수 있을 접근이 얼마간 정통설의 지위를 얻어왔다는 것은 거의 놀랄만한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주기적인 동력학은 단선적인 "시장의 성장" 대신에 전산업사회에서 이루어진 장기적인 경제적·사회적 변화를 해명하는 열쇠로 등장하게 되었다. 우리가 첫 번째로 어떤 경제가 농업생산성에 개선을 이루어낼 수 없다고 전제하고, 두 번째로 토지의 공급은 한정되어있는 가운데 인구는 자연적으로 증가해 가는 추세를 보인다고 전제한다면, 그에 따라 하나의 소득분배이론이 필연적으로 나타나리라고 여겨진다.토양의 지력이 점점 더 떨어져가고 점점 더 질이 낮은 토지에로 경작이 확대되는 데 따라 농업생산성도 낮아져간다면, 우리는 논리적으로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게 되고 그에 따라 산업에 불리하고 농업에 유리한 교환조건, 임금의 하락, 식량가격의 상승, 그리고 대부분 영주와 농민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지대의 상승이 나타나게 되리라고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 모델은 그 자체 안에 그 자신의 방향전환과 장기적인 움직임을 자동적으로 결정해주는 자체교정의 메커니즘을 갖고있기도 하다. 포스탄은 중세유럽의 경제발전에 관한 그의 인구모델을 제시한 1950년의 고전적인 논문에서 그가 자신이 중세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인구와 토지에의 정착, 생산기술과 경제활동의 전반적인 추세들, 요컨대 법적·사회적인 제도들의 작용과 계급들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지 않고서도 고찰될 수 있는 모든 경제적 사실들"로 규정하였다. 포스탄은 계급관계로부터 따로 떼어내어 "이러한 무리의 주제들을 함께 다루는 것을 반드시 필요하고도 또 가능한 일로" 만드는 점은 "그러한 주제들 모두가 최근에 와서야 경제활동의 전반적인 추세들에 관한 고찰에, 또는 좀더 유행을 따라 말하자면 사회적 소득의 '장기적인 동향'에 관한 고찰에로 편입되어 들어왔다"는 사실이라고 주장하였다.소득분배의 장기적인 추세에 관해서 필자는 중세와 근대 초에 토지보유조건에 관한 문제가 언제나 모호하고 또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맬더스적 모델이 매우 극복하기 힘겨운 어려움들에 마주치게 된다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영주와 농민 사이에 토지소유권이 어떻게 분배될 것인가 하는 점 자체가 그 시대 내내 줄곧 문제가 되고 있었다. 농민이 토지의 세습적 보유권과 고정된 지대를 확립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는가? 그랬다면 지대의 의미 자체가 바뀌었을 것이고, 영주계급이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은 위태로운 처지에 빠져버렸을 것이다. 반면에 영주가 토지소유권을 확립해 놓은 상황에서는, 또 하나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었을 것이다. 영주들은 그들이 거느린 차지인들의 몸뚱이에 대해 경제외적 권한을 획득하여 결혼을 규제하고 특히 토지의 양도와 농민의 이동을 통제할 수 있었는가? 그랬다면 농민에 대해 경제외적 또는 자의적인 납부금들을 부과할 수 있을 가능성이 나타났을 것이다. 따라서 중세 말과 근대 초에 이루어진 소득분배의 발전에 관한 어떠한 설명도 반드시 토지에서 직접 수확된 생산물의 분배가 어떻게 변해갔는가 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보다 중요한 것으로서 영주와 농민 사이에 재산이 어떻게 분배되었고 지대관계에서 무력이 직접 사용될 수 있었는가 아닌가하는 문제들도 해석해낼 수 있어야만 한다.장기적인 정체를 낳는 맬더스의 주기는 경제적 후진의 다른 형태들과 다름없이 이미 확립되어있는 계급관계의 구조가 빚어낸 산물로 파악될 경우에만 완전하게 이해될 수 있고, 꼭 마찬가지로 경제발전도 새로운 생산조직과 기술혁신 그리고 생산투자수준의 상승에 보다 유리하게 작용하는 새로운 계급관계의 등장에서 빚어진 결과로 파악될 경우에만 완전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러한 새로운 계급관계는 그 자체가 그에 앞서 비교적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계급갈등의 과정에서 비롯된 결과였다.포스탄에 따르면 12세기와 13세기는 인구의 증가로 특징지어진다. 그러한 인구증가는 한계지의 경작과 토양의 지력감퇴를 낳고 그리하여 식량가격 및 지대를 상승시킨다. 그러나 포스탄 자신이 물론 잘 알고 있듯이 우리는 이 시대에서 매우 특수한 형태의 지대를 다루고 있다. 직접적인 임대차 협약이나 계약에 따라 정해지는 지대는 아주 드물다. 그 대신 우리에게는 토지보유의 조건을 결정하는 관습적인 권리 및 의무들로 짜여진 이론적으로는 고정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계속 변화하고 있는 구조가 놓여있다. 이러한 권리 및 의무들은 우선 농민이 그의 토지를 보유하기 위해 영주에게 납부해야만 하는 정규적인 부담들을 구체적으로 명시해준다. 그러나 그에 더하여 그것들은 종종 또 다른 일련의 토지보유조건들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한 조건들로는 이례적인 부담들을 추가로 부과할 영주의 권한, 토지를 이용하고 양도하고 상속할 농민의 권리, 그리고 끝으로 자신의 몸뚱이에 대한 농민의 처분권 따위를 들 수 있다. 여기서 포스탄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로 뭉뚱그려져 농민의 관습적 지위를 결정하는 이러한 조건들은 그것들이 장기적인 경제적 추세와 관련을 맺는 한 그의 수요-공급에 따른 인구적 모델에 얼마간 직접적으로 통합될 수 있다.인구의 증가와 농산물가격의 상승 그리고 토지가치의 증대가 가하는 자극 아래에서 토지에 대한 수요는 더욱 강렬해졌고 토지의 사용은 더욱 효율적으로 되어갔다. 경작지가 팽창하였다. 소규모 보유지들의 희생 위에 대영지들이 형성되어갔다. 다시 말해서 프랑스에서는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보유지들이 극도로 분해되고 생산성이 하락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정반대로 경작단위가 점점 더 크게 형성되어 가는 것, 즉 보유지를 더욱 크게 통합하고 그것을 대규모 차지농에게 임대하며, 그 차지농은 다시 그 땅을 임금노동의 도움을 받아 경작하는 것이 지배적인 성향으로 나타났다. 생산조직에서 나타난 이러한 변화에 수반하여 농업생산성에 커다란 증대가 이루어져 실로 획기적인 결과들을 낳았다.예농제의 본질은 영주가 지대수준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특히 농민의 이주를 금지하고 그리하여 차지인들을 거래대상으로 하는 자유로운 시장을 금지시킴으로써 농민들에게 시장외적인 압력을 떠 안게 만들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 있었다. 따라서 교역에서의 변동들, 더 나아가 실로 어떤 형태로든 시장의 요인들에서 나타난 변동들이 그 자체만으로는 예농제의 해체를 결정하는 데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은 거의 놀랄 필요가 없는 당연한 사실이다. 예농제는 세력관계로서, 말하자면 그 자체를 통해서만 즉 계급들 사이의 세력균형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통해서만 뒤엎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영국에서는 흑사병이 휩쓸었던 1349년 이후에 영주의 반동이 나타났다. 그것은 농민들에게 이주허가를 받기 위한 벌금을 도저히 치를 수 없을 만큼 큰 액수로 부과함으로써 농민의 이주를 억제하려는 시도로, 또한 임금을 규제하기 위한 법률의 제정으로, 그리고 몇몇 지역에서는 실제로 지대가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1400년에는 영주의 공세가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반란과 도주가 15세기 내내 줄곧 계속되어 예농제를 종말로 이끌었던 것이다. 예농제라는 계급관계를 규정했던 잉여착취관계와 농민생산의 발전 사이에 나타난 모순들은 농민의 축적과 농민생산성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농민의 생존을 위기에 빠트리는 경향이 있었다. 이 위기에 수반하여 기존의 구조에 내재되어있던 계급갈등은 더욱 강렬해지게 되었으나, 그 결과는 맞서고있는 계급들 사이의 세력균형에 입각하여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동유럽과 서유럽이 서로 다른 길을 따라 발전해간 것 특히 예농제가 대두한 것을 설명해주는 요인으로 어쩌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이 지역에서 도시들이 미약하게 발전하게 이 지역 전체를 영주의 반동 앞에서 보다 무력하게 만들었다는 데에서 찾아져왔다. 도시들이 규모도 작고 또 발전도 뒤늦어 있었으므로 귀족들은 더욱 쉽게 도시들을 압도하고, 그리하여 농민이 도망쳐 갈 수 있는 가장 주된 출구를 막고 농민들로부터 중요한 동맹세력을 박탈해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중세도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당연하게 부자유농민들의 동맹자가 되었는가도 역시 결코 명백하지 않다. 여러 가지 이유로 도시의 상인귀족 은 농민에게 맞서 귀족들과 제휴를 맺는 경향을 보이곤 하였다. 이 두 계급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재산을 수호하며 서로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상업적 교환관계를 보호하는 데에 공통된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