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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역사] 중화인민공화국 50년사를 읽고 평가B괜찮아요
    중화인민공화국 50년사중국 정치론 기말 리포트1. 중국의 역사와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중국의 역사 이야기는 그리 멀게만 느껴지는 이야기는 아니다. 중학교 때부터 조금씩 배우던 세계사 시간에 중국은 자주 등장했다. 옛날 황하문명과 하·은·주 시대 때부터, 유명한 진시황의 이야기를 지나 화려했다던, 그리고 양귀비가 나오는 당나라, 국사에서조차 자주 나오는 징기스칸의 원나라, 영화 마지막 황제를 떠올리게 만드는 청나라까지 세계사 교과서에서 동양사 부분이 되면 동양사인지 중국사인지 알 수 없을만큼 중국 역사는 친근했다. 하지만 근현대사 부분으로 넘어가면 항상 짤막하고 부족하게 나올 뿐이었다. 옛날이야기처럼 재미있는 고대사에 비해 근현대사는 쑨원이나 마오쩌둥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신해혁명, 5·4운동, 문화대혁명이 어떤 의의를 가지고 있는지조차 잘 모르면서 머릿속에 우겨넣어야 했다. 가깝지만 항상 뭔가 막연히 멀게만 느껴지던 중국 근현대사에 대해서는 대학에 와서야 제대로 배울 수 있었고, 그제야 억지로 집어넣었던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정리되기 시작했다.'중화인민공화국 50년사'는 아마코 사토시라는 일본의 학자가 바라본 중국의 근현대사를 옮긴 책으로 변화의 개혁의 시기로서 다이나믹한 중국 근현대사 속에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저자는 이것을 객관적으로 이야기 하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쉽게 다루어지지 않는 부분인 중국 현대사를 자세하고 깔끔하게 다루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는 것 같다. 물론 내용도 군더더기 없이 잘 정리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무엇보다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과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어체, 그리고 다른 역사책과는 달리 쉽고 편안한 설명 형식의 글이 읽는 내내 편하게 다가왔다. 또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으로 다른 근현대사 책들과는 달리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의 일들에 대하여 특히 문화대혁명 이후 70~90년대의 일들이 상세하게 다뤄져 있었다.2.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청나라 말기의 혼란함과 아편전쟁으로 인한 체제의 붕괴는 중국의 역동적인 근현대화를 이루는 중심적 사상으로 자리 잡게 된다.혼란 속에 청조는 멸망하고 쑨원은 신해혁명을 통해서 '중화민국'을 출범하였으나 위안스카이의 독재로 성공하지 못했고, 중국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이러한 와중에 세계는 1차대전을 치루면서, 일본은 중국 침략의 야욕을 보이고, 러시아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소비에트가 수립되었다. 반일감정이 높아지던 시기에 5·4운동이 벌어지고 이어 신문화운동이 유도되었다. 동시에 러시아혁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공산주의에 공감하는 청년들이 증가하고, 21년 7월 코민테른의 영향으로 중국공산당이 결성된다. 공산당과 국민당은 잠시 연합하지만 최초의 국공합작은 쑨원의 사망과 더불어 분열되었고, 장제스의 군벌로서 형식상의 통일 정부인 난징 국민정부가 탄생하였다.하지만 소멸될 것처럼 보였던 공산당의 세력은 마오쩌뚱이라는 지도자의 휘호에 조금씩 그 세력을 넓혀나가는 내부의 우환으로 자리 잡았고, 장제스는 이를 해결하기위해 일본의 침략을 방관하였다. 장제스의 추적을 피해 마오쩌뚱의 세력은 후에 '장정'이라 불리는 대이동을 통해 세력을 서서히 넓혀나갔다. 장제스의 집요한 공산당 탄압은 결국 시안사건을 일으키고, 결과 공산당은 형식적으로나마 인정을 받게 되어 그 세력을 조금씩 체계적으로 정비하게 된다. 이어 외적 문제인 중일전쟁을 힘겹게 해결하고 마오쩌둥은 지속적으로 관리해온 군대와 철저한 분석과 예측을 통한 행동으로 국민당 세력을 중국 본토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청조 붕괴이후 40년 만에 드디어 통일된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한 것이다.3. 사회주의 건설의 모색이 시점에서 저자는 새 정부의 탄생을 바라봄에 있어 냉철한 자세로 새로 탄생한 중국의 국가는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로서 확립된 체제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전시체제'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당시 중국의 상황을 설명한다. 우선 국민당군과의 전투는 여전히 각지에서 계속되어 불안정했으며 대외적으로 미·소의 대결, 즉 동서 냉전으로 인한 국제 긴장의 굳히게 된다.건국 이후 곧바로 사회주의의 틀을 잡은 것이 아닌 중국은 신문주주의 개혁은 오랜시간에 걸쳐 서서히 이룩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당 내부에서는 1967년 세차례 5개년 계획을 지닌 후에 완성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1956년 1차 계획이후 사회주의 노선은 완성되었다고 선언하였다. 앞선 도시, 농촌에서의 개혁이 예상외의 성과를 얻어내어 윤활유 역할을 하게 되었고 세계질서상의 냉전으로 인해 국가체제의 빠른 확립이 필요했다. 그리고 당시 공산당 최고 지도자였던 마오쩌둥의 추진력의 합일로 예상보다 빠른 사회주의 국가를 이룩하게 되었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이 소련 흐루시쵸프의 스탈린 비판이 소련을 절대적 리더로 여기는 신화에서 벗어났으며 목표를 실현할 수 있다는 신념과 자기 과신이 더해져 독자적 사회주의 건설을 마오쩌둥에게 심어주었다고 설명한다.이러한 마오쩌둥 독자 노선은 농업의 합작사화, 집단화를 통해 그 시작을 보였다. 이러한 모험은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고 이러한 실패를 뒤로하고 58년 대약진 운동을 시작, 인민공사화를 시작한다. 공업과 농업, 중앙과 지방을 동시에 발전시키고 서양기술에 중국의 전통기술을 병용하여 발전한다는 주장으로 시작한 대약진운동은 대대적인 생산운동과 사회의 대 개조를 목표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중국사회주의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인민공사가 탄생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비록 눈에 보이는 효과를 얻었을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결국 사회주의의 모순을 담은 '공산풍'의 낭비같은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결국 대약진운동은 실패로 규정되고 그러한 와중 마오쩌뚱은 당시 긴장이 고조되어있던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스스로의 노선을 고집하였다.4. 문화대혁명문화대혁명은 65년부터 마오쩌둥이 사망한 76년까지 10여년동안 있었던 마오의 이념추구, 권력다툼의 정치투쟁과 그것으로 인한 사회, 정치, 경제, 심리적 혼란 및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벌어진 현상이라 말한다. 좀 더 좁은 의미로 바라보면 66년부터 69년까지 전국대회에서 진행된 홍위병, 받게 되었다. 이에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의도적으로 비판하여 그들의 비판 여론을 선동하였으며 자신의 이념과 야심을 욕구불만인 사회에 접목시켜 그 꿈을 이루고자 했다. 즉, 국내적으로 극도의 긴장상황을 의도적으로 선동하여 그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미국의 위협과 함께 증대되었던 소련의 위협에 대한 강렬한 위기감을 그 근본적 원인으로 삼고 문화대혁명을 결행하였다. 그것은 사회적 차별 구조에 대한 대항을 이용하여 착취계급과 반동계급을 타도해 새로운 사상, 문화, 풍속, 습관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공포와 의심속에서 극단적 개인숭배와 군사독재, 사회의 군사화로 특징지어지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이 시기로 인해 부활하려던 중국 경제는 다시 후퇴하였고 마오쩌둥과 린뱌오의 권력 투쟁의 계기가 되었다.5. 근대화로의 전환과정린뱌오 사건은 그 정황이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대략 이러한 사건이다. 린뱌오가 마오쩌둥 암살 쿠데타를 시도했다 실패하여 소련으로 망명을 기도하다 몽골 상공에서 추락사 한 것으로 공표되고 있는 사건으로 이에 따른 여러 음모설, 책략설, 권력 투쟁설 등의 무수하다. 이것은 대략 국가주석의 지위를 둘러싼 대립과 마오쩌둥 천재론의 정치적 이용만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하고 당시 국제관계에 이해가 필요하다. 마오는 문화대혁명의 실패로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한 시점에서 부족한 린뱌오의 '직위를 수거' 한 것이다. 이것은 외교노선의 전환과 혁명의 허구가 무너지며 생겨난 사건이며 이 후에 저우언라이가 부곽되는 시점이기도 하였다.문하대혁명의 실수를 깨달은 마오쩌둥은 외교노선을 전환하고 근대화 건설에 다시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저우언라이가 훌륭히 역할을 해내었다. 이 시기의 미국과의 '핑퐁외교'를 시작으로 닉슨대통령의 중국 방문이라는 커다란 사건이 있었다. 이것을 계기로 중국은 서방과의 외교가 활발해졌으며 소련과의 관계는 단편적인 반소관계가 아닌 적도 아닌 우방도 아닌 관계로 근대화를 위한 실리적인 노선의 추임과 더불어 최초의 시민들의 자발적 정치참여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는 제1차 천안문 사건이 일어났고 이에따라 주더 장군과 마오쩌둥의 사망 등의 사건이 연이어 지자 정국은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권력다툼은 실제로 드러나고 과도기의 화궈펑체제를 지나 덩샤오핑이 권력을 승계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덩샤오핑은 당 내외의 우호적인 정세의 힘입어 근대화 건설이라는 노선을 제창하여 중국은 새로운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6. 개혁·개방과 천안문 사건화궈펑은 문화대혁명과 마오주석의 관계로 비판받으며 실각하게되고 덩샤오핑은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후야오방이 당 주석에 취임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국의 근대화 건설을 위해 국제적 환경 조성을 위한 외교정책을 펴나가며 타이완과의 평화적 통일의 의지를 표명했다. 또한 농촌과 연해지방을 중심으로 개혁정책을 시행하였다. 첫 번째로 지방의 인민공사를 해체하였으며 연해지역 중심으로 경제특구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지방의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생산책임제를 시행하는 등 서서히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특히 도시개혁은 그 중심에 있었으며 기업개혁부터 시장형성과 시장조절의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는 등의 전면적 개혁을 실시하였다.개혁의 물결 속에서 시민들의 민주화 의식은 고양되었고 시장 경제로의 변화로 인한 사회의 모순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도시와 지방의 격차, 연해와 내륙의 격차, 이러한 가운데 후야오방의 사망 후, 팡리즈 등 지식인을 중심으로 후야오방의 명예회복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학생들은 노동자 지식인을 포함한 광범위한 시민층을 대표하여 5월 13일 이래, 베이징대학과 베이징사범대학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모인 학생대표들과 함께 톈안먼 광장에서 단식연좌시위를 계속했다. 5월 15일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베이징에 도착했으나, 17일 발생한 100만 명이 넘는 대규모시위로 일정을 변경해야만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정부는 학생들의 시위를 난동으로 규정, 베이징시에 계엄을 선포했다. 한편,.
    사회과학| 2003.12.06| 5페이지| 1,000원| 조회(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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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역학] 한,러관계와 발전전략
    러시아와 동북아 기말 리포트한·러 관계의 역사와 전망러시아와 동북아 기말 보고서러시아와 동북아 기말 보고서러시아와 동북아 기말 보고서러시아와 동북아 기말 보고서한국과 러시아, 당시 구소련과의 수교는 1990년 6월 4일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과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정상회담을 통해 한소수교의 원칙을 합의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분단이후 양국은 냉전을 거치면서 거의 교류가 없었을뿐만 아니라 적대적이던 한소관계는 1970년대 동서진영의 데탕트가 시작되면서 상호입국허용, 제3국을 통한 간접교역, 문화교류 등으로 점차 호전되었다. 그러나 1983년 9월 1일 'KAL기 피격사건'으로 개선의 분위기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냉랭하던 양국관계는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구상서(口上書)를 교환하는 것을 시작으로 소련이 올림픽에 788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참가시키면서 다시 호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89년 4월 3일 소련연방상공회의소 서울사무소가 개설되었고, 7월에는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모스크바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89년 11월 17일 양국간 영사처(Consular Department) 설치를 합의, 86년 만에 공식외교관계를러시아와 동북아 기말 리포트복원하였다. 나아가 1990년 6월 한소수교정상회담의 결과, 9월 30일 유엔본부에서 '한·소 수교 공동성명서'에 서명함으로써 한국과 소련은 역사적인 수교를 수립하게 되었다.이러한 국교수립의 배경으로 소련의 입장과 우리의 입장을 생각해볼 수 있다. 소련의 국교수립 목적은 서방세계에 비해 급격히 떨어진 경제적 부분에 대한 협력과 발전이었으며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의 협력을 위하여 한국과의 수교를 수립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북방외교의 노선중 한 가지로서 공산정권과의 관계를 정상화 시키면서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목적으로 소련과의 수교를 맺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목적으로 서로 국교를 수립하자 두 나라의 관계는 국교수립 이후 불협화음이 생기게 되었다.구체적 원인의 첫 번째 여건으로 인한 혼란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특히 경제적 부분에 있어 한국의 투자 및 차관 제공 등의 조건이 러시아에게는 매력적인 것이었으며, 실리를 추구하기 시작했던 당시의 러시아 정치 경제의 분위기로 보아 한국과의 외교 수립을 통해 많은 이익을 바라볼 수 있었다. 실제로 우리 정부는 러시아에 30억 달러의 차관을 약속하였고, 민간 교류가 조금씩 증가하면서 한국 국내의 러시아에 대한 관심 또한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러시아가 한국과의 수교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요소들이 되었다.한편 우리나라는 중국·동유럽국가 등의 사회주의국가 및 북한을 대상으로 하는 외교정책인 북방외교를 추진하던 중,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고, 사회주의국가와의 경제협력을 통한 경제이익의 증진과 남북한 교류·협력관계의 발전을 추구하며,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국가와의 외교 정상화와 남북한 통일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또한 북한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소련과 수교함으로서 간접적으로나마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과 우회적으로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기회를 원했다.이렇게 시작점이 달랐던 두 나라의 외교 수립은 시작 이후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소련의 해체와 러시아 공화국 성립의 불완전함, 이후 러시아 공화국 내부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 등의 이유와 인프라의 부족, 높은 세율, 외국인 투자제도의 불완전함 등의 이유로 러시아가 원했던 경제적 투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한국 정부 역시 이러한 사항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이 부분에 대한 러시아의 불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반면에 러시아는 국내, 외적인 문제 등으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현저히 감소하게 되었고, 이러한 원인으로 한국 정부가 원했던 북방외교에서의 성과는 예상보다 낮았고, 대북한 정책에 있어 초기 목적을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각각의 요구사항이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자 각 국가들은 서로 소 서로 상반되고 대립되면, 사실상 협력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양국의 정책목표가 서로 어우러질 수 있다면 협력의 범위와 심도도 그만큼 커지고 깊어질 것이다.먼저 러시아는 러시아의 한국에 대한 정책목표와 한국의 국익을 연관시켜 분석해야 할 것이다. 러시아의 한반도정책은 러시아 극동지역의 평화로운 주변 환경 유지, 남북한 등거리외교를 통한 실리추구, 아·태 진출의 교두보 확보 등의 목표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여기에서 첫째 목표인 극동지역의 평화로운 주변 환경 유지를 위한 한반도 평화정착은 한국의 일차적인 안보정책 목표와 상합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목표인 남북한 등거리외교를 통한 실리 추구에서는 북한과의 선린관계 유지·발전이 한국의 국익과 어떻게 관련되는지가 문제시된다. 북한의 개방·개혁 등 체제변화를 유도한다는 차원에서 남북관계를 볼 경우, 러시아의 이러한 정책은 한국의 국익에 이득이 된다고 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러시아 지원하의 북한의 군사적 도발 가능성이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불리할 것이 없다고 판단된다. 더욱이 러·북관계가 실질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러.북관계의 복원, 유지가 남북한관계 개선 또는 한·러관계 발전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다.셋째 목표인 한국과의 협력 강화를 통한 러시아의 경제실리 획득과 이를 통한 아·태진출의 교두보 확보가 러시아의 국력신장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경계를 유발시킬 수도 있으나, 사실상 러시아가 현재의 국내 정치, 경제혼란을 수년 내로 완전히 극복하고 명실 공히 패권국가로 재등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국내정치와 경제 안정과 세계질서 재편과정에의 적극적인 동참을 통한 러시아의 국력신장 가능성을 패권화의 우려에서 부정적으로 보기 보다는 오히려 세계질서의 안정관리 차원에서 유리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특히 극동시베리아 개발을 통해 강력한 극동지역이 등장한다고 하여도, 그 개발과정에 한국이 참가하여 역할을 수행하였을 경우에는 새로익과 배치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더욱이 러시아와 한국 경제는 상호보완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러 경제협력은 경쟁, 대립관계가 아니라 호혜적 동반자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첫째, 무역 분야에서 원자재와 연료를 수출하고 내구소비재를 비롯한 공산품을 수입하는 러시아의 무역구조와 원자재와 연료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공산품을 수출하는 한국의 무역구조간의 상호보완성이 뚜렷하다. 둘째, 직접투자분야에서 외국자본의 진출을 거의 경험하지 못한 러시아의 해외투자 유치 필요성과 거대한 러시아시장 개척을 위한 한국의 투자 필요성이 서로 상충한다. 셋째, 기술협력분야에서 러시아가 기술수출을 통해 경제실리를 거두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데 반해, 세계적인 기술보호주의 추세 하에서 선진국 진입을 위해 기술 고도화를 추진해야 하는 한국에게 기술대국인 러시아는 매력적이다. 넷째, 자원개발분야에서 러시아는 자원의 보고인 시베리아개발에 국운을 걸고 있으나, 자원도입선의 다변화 및 안정화를 추구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극동시베리아 개발 및 진출이 필요불가결하다. 이런 점에서 한·러 경제교류협력은 경쟁대상국인 여타 국가들과의 경제교류협력과는 구별될 필요가 있다.한편 한국은 러시아에 대해 쌍무관계 발전을 통한 국익 증진, 대북한 변화 유도와 평화통일을 위한 국제적 지원이라는 목표를 추진하고 있다. 첫째 목표는 양국간 정치, 경제, 군사교류를 통하여 국제무대에서의 한국의 국제적 입지를 강화하고, 경제실리를 취하는 동시에, 군사력을 증강한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국제무대에서 한국을 외교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러시아가 빈곤으로부터의 탈출 실현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으며, 한국의 경제발전은 동북아에서의 새로운 강자의 등장 가능성에 대한 우려보다는 러시아의 효과적인 경제파트너로서의 가치를 증대시킬 것이고, 한·러 군사협력을 통한 한국의 전력 증강은 러시아의 경제실리 뿐만 아니라 한국에 대한 지렛대 확보 차원에서 유용할 것이다.둘째 목표와 관련하여 북한의 체제 변화는 러시아의 국익에도 유익하며, 것이라는 점에서 러시아에 유리하다. 더욱이 한반도 통일을 위한 국제적 지원이라는 측면에서 러시아는 여타 주변국과는 구별되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하여 왔다. 이는 결국 한반도에서의 현상변경 나아가 통일과정을 통하여 러시아의 역할을 확보하려는 러시아의 정책목표와 연계되어 있다. 적어도 통일한국이 러시아에 적대적인 세력으로 되지 않는다면-이는 러시아가 한반도 통일과정에 개입하면서 획득 가능한 목표로 될 수 있을 것이다. 통일한국의 강대국 잠재력을 우려하지 않고 통일을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러시아가 양극체제 붕괴이후 새로운 패권 보다는 세력균형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동북아지역에서 중국과 일본의 패권화에 대해서는 경계하고 있으나, 열세에 있는 러시아의 역내 지위를 회복시킬 수 있는 돌파구로서 한반도 통일과정을 활용하기 위해 통일한국의 강대국화에는 보다 주목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이러한 남한, 북한, 러시아간의 삼각협력은 앞으로 동북아 경제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 할 수 있다. 북한이 개입하는 삼각 협력체는 앞으로 무한히 발전할 가능성을 가진 중국과 선진 기러시아와 동북아 기말 리포트술을 소유한 일본등과 동등한 위치에서 견줄 수 있는 경제적 중심지가 될 수 있다. 만약 북한이 제외된다면 핵문제 등 언제 어떤 방식으로 위기가 올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없으며 경제적 공동체에 불안감이 조성되기 쉽다. 게다가 최근의 추세로 보아 북한이 개입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음으로 앞으로 개방적이고 좀 더 안정적인 체제로 가기 위해서는 한-중-일 협력 이외에도 남·북한-러시아간의 삼각협력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구체적 방안으로는 먼저 북한의 개혁개방을 점진적이고 안정적으로 이끌어내야한다. 북한이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변화하도록 유도하고, 이것을 통하여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사안일 것이다. 현재 북한 핵 문제로 모든 경제적 교류가 지연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북한과의 관계 안정이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사항이 될 것이며,것이다.
    사회과학| 2003.06.17| 4페이지| 1,000원| 조회(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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