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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적 도서관 건축
    ▷도서관 건축◁< 목 차 >I. 들 어 가 며1II . 건 축 의 주 안 점1III.건축 일반 계획21. 대지의 선정22. 기본적 공간구성3(1) 도서관의 기본 기능 구성33. 건물의 배치 계획41) 도로와 대지와의 관계42) 도로로부터 건물에의 접근43) 출입구의 배치54) 증축 예정지의 확보54. 동선의 계획5(1) Control Desk(C.D)와 동선계획55. Module과 층높이의 결정61) Module62) 층 높이 결정 요소76. 각부 공간의 계획87. 도서관의 디지털화111) 디지털 도서관의 건축122) 디지털 도서관 시스템13Ⅳ. 끝내며15Ⅴ. 참고도서15I. 들 어 가 며도서관의 3 대 요소는 직원, 자료, 시설이다. 그런데 3 대 요소의 하나인 시설은 나머지 요소에 비해 상대적으로 도서관 관계자들의 관심에서 가장 먼 요소인 듯 하다. 일례로 문헌정보학 관련 논문을 살펴보더라도 직원이나 자료, 이용자에 대한 논문은 부지기수이나 시설을 다룬 논문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도서관 시설의 핵심적인 부분인 도서관 건축만 보더라도 이에 관한 연구는 문헌정보학보다 오히려 건축학에서 많이 다루어지고 있다. 물론 기술적이고 예술적인 부분들은 건축학의 영역임에 틀림없으나, 도서관 건축계획에 있어 기능적 영역들은 반드시 문헌정보학에서 지원되어야 할 내용이다.도서관 건축에 대한 도서관인들의 관심이 부족한 이유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의 이유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전문도서관이나 학교도서관과 같이 규모가 작은 도서관은 독립 건물로 존재하지 않고 모기관의 건물의 일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둘째, 독립된 건물인 공공도서관이나 대학도서관의 건축은 지금까지 도서관의 건축이 도서관 전문가나 실무 사서가 아닌 도서관의 기능을 이해하지 못한 행정진들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대학도서관의 건축계획에서는 종종 실무 사서의 참여가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대학 본부의 시설과나 자문교수의 영향력이 더 크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이러한 경향은 공공도서관에서 국의 경우 상당 비율이 이러한 병설관으로 성공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병설관의 이점으로 주차장 등의 서비스 시설의 공유로 대지의 확보가 유리하다는 점이다.이상에서, 공공도서관의 설치 장소는 지역 중앙관의 유기적 봉사망 시스템에 관한 광역적 검토를 전제로 하고, 큰 도로의 교차점으로 지역 주민이 접근하기 쉬운 교통, 상업, 업무지역의 중심지에 학교 및 직장 등과 관계를 갖고 설치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현재 우리나라의 일부 도서관처럼 중심지에서 벗어나 설치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도리어 접근이 용이한 위치를 선정해야 하는 것이다.2. 기본적 공간구성(1) 도서관의 기본 기능 구성도서관의 기본 기능과 각 기능의 수행을 위해 중요한 필요 제실은 다음과 같다.{기 능필 요 제 실레 퍼 런 스부분별 열람실(사회, 인문, 자연과학, 지방자료 등)신문잡지 열람실, 목록실, 참고 열람실, 특수자료실 등도서관 상호 협력상호 협력실, 봉사망내 종합 목록실, 아동도서실, 작업실, 북모빌 차고, 샤워실 및 갱의실집 회시청각 자료실, 제작실, 사무실, 스튜디오, 조정실, 강당, 집회실, 전시코너서 고폐가 서고수 입 정 리수입실, 정리실관 리관장실, 응접실, 관리사무실, 회의실, 직원휴식처, 경비실, 전화교환실, 분서실, 청소부작업실통 로복도, 계단, 엘리베이터, 로비, 라운지, 화장실설 비기계실, 전기실, 보일러실, 저수조 등{전체적 구성을 결정함에 앞서, 기능적으로 공통적인 것을 BLOCK의 개념 하에 결합시켜 이 들을 유기적으로 연계시키는 가운데, 합리적 공간 구성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블록의 조합 이라 한다.단위 블록은 크게 열람용 공간, 수장용 공간, 집회용 공간, 사무관리용 공간, 기타의 공간이 있으며, 각 블록을 구성하는 좌의 표와 같다.3. 건물의 배치 계획대지 내에서의 건물 배치 계획상의 고려 사항으로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1) 도로와 대지와의 관계1 도로가 대지의 1면에 접하는 경우는 도로를 향하여 대지의 전면에 배치되거나 앞마당을 가 출입 동선에 접근되고 그 배후에 사무 작업 부분을 배치시키게 된다.5. Module과 층높이의 결정1) Module도서관은 기능의 변화와 발전에 따라 구획의 변경이 필수적으로 대두되므로 제약을 최소한으로 하고, 공간적인 flexibility를 제공하기 위하여 기둥이나 고정 칸막이를 적게 하며 화장실, elevator, 계단 등 당초부터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집약적으로 통합하여야 한다. 또한 바닥의 고저차, 천장 높이의 변화 등 내부 배치 변경에 있어서 유동성을 제한하는 요소의 적용은 가급적 피한다.도서관 건축계획에서 자주 언급되는 Modelar plan이란 이와 같은 생각을 추진해서 된 것이며, 미국에서 1940년대에 제안되고 1950년대 이후 도서관 건축의 계획 방법으로 정착되었다.이러한 도서관의 모듈 계획에서, 조명기구나 콘센트, 스위치의 위치 공조의 흡출입구 등은 칸막이나 가구 등으로 분할된 공간이 지장 없이 사용될 수 있도록 미래 장래의 사용법을 예측하여 설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모듈이란 기둥의 중심에서 다음 중심까지의 거리이며, 4각형이나 장방형의 네 기둥에 둘러싸인 공간을 bay라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모듈러 플랜은 곧 SPAN (끝에서 끝까지의 거리)의 결정에서 시작되며, 일반적으로 개가식 서가 배열과 폐가식 서가 배열 모두에 통용되는 치수를 SPAN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러 종류의 모듈 중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6.9mX6.9m의 SPAN이며, 이것을 적용하여 1BAY의 서가 배치에 필요한 장서수를 구할 수 있다.{도 서 관 명Module(m)TRINITY 대학BATES 대학PRINSTEN 대학5.4X5.4대판시립중앙도서관SOLNA 공공도서관WASHINGTON 주립대학6.9X6.9일본국립 국회 도서관서울대학 도서관국립중앙도서관MINNE 대학 도서관7.5X6.9모듈의 크기는 도서관 건축 계획의 기초가 되므로 서고와 관련하여 연구되어야 하며, 이에 앞서 결정되어야 할 10가지의 요인은 다음과 같다.{1 기둥의 크기와 가 대출실이 전체의 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주요한 공간이다. 특히 분관에서는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주된 공간이며 대부분 하나의 큰 공간으로 구성되고, 내부에는 전시공간, 컨트롤데스크 주위, 라운지, 어린이 공간, 브라우징 코너, 레퍼런스 코너 등이 포함된다.개가 대출실은 통로에서 가급적 직접 들어오도록 하고 충분히 밝게 하여야 한다. 개가실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조금이라도 많은 자료를 수용하고 또 이용자가 손쉽게 도서를 선택할 수 있게 하는데 있다. 이용자에게 있어서 중앙부의 서가는 낮게, 벽쪽은 높게 서가를 배치하며, 통로 공간도 좁지 않게 하여야 한다.도서관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현관 홀 주위에 부품을 많이 놓게 되는데 이는 입구와 서가와의 사이에서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되며 될 수 있는 한 입구와 서가와의 거리는 가깝도록 유지한다.내부는 항상 Flexibility가 필요하도록 공간 구성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함에 있어서 외부에 창을 통한 태양 빛의 조절을 적절히 고려하도록 한다.5 브라우징 코너브라우징 코너란 열람실 내에서의 가벼운 독서나 독서후의 간단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다. 안락한 소파를 놓고 융단 등을 설치하여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중, 소 도서관에서는 신문, 잡지 코너를 겸하는 경우가 많다.6 레퍼런스 코너레퍼런스의 의미는 조사하는 것을 도움 이다. 실제로 레퍼런스의 이용상황을 보면 일반 주민이 다소 전문적인 것을 조사하고 싶을 때, 마찬가지로 학생의 조사물, 작업상의 필요로 특허 등 법률이나 관보를 조사하는 등으로 사용된다.7 집회용 공간집회용 공간은 도서관의 구성요소 중의 하나이며, 도서관에 있어서 집회 활동이나 시청각 활동을 하는데 필요한 공간이다. 이들의 활동은 그 지역의 주민들과 공공도서관과의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및 주민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꾀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며, 도서관 활동 중의 사회 교육적인 일면을 실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이러한 활동은 관원 측이 주최하는 경우존할 수 있는 의미에서 유리한 방법이다.⑪ 아동열람공간대상은 유아, 초등학생, 중학생으로 스스로 아동열람 공간에서 구분이 되며, 컨트롤 데스크는 항상 붐비게 되므로 이를 고려하여야 하고, 어떤 경우에도 성인 부분을 가로지르지 않도록 한다. 화장실은 가급적 어린이 부분에 가까이 두던가, 어린이용의 화장실을 별도로 설치한다. 또한 이야기실이 필요하며, 최소한 35인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5.5m×5.5m 정도의 규모로 계획한다. 실내의 구성에 있어서도, 어린이의 키만으로 책을 꺼낼 수 있는 높이는 4단 내지 5단인데 시선을 좋게 하기 위하여는 3단이 적당하다.7. 도서관의 디지털화현재 대부분의 도서관들이 인터넷이나 CD-ROM 형태로 제공되는 전자출판물을 보유 혹은 접근을 통하여 이용자들에게 제공 해줌으로써 도서관을 '정보 소유'에서 '정보접근', '정보공유' 개념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더욱이 최근 들어 도서관은 컴퓨터와 정보통신의 발달로 도입된 온라인열람목록(online public access catalog : OPAC), 온라인 데이터베이스, CD-ROM 데이터베이스, 인터넷 등의 각종 다양한 전자정보원을 재 공하여 대학구성원에게 접근시켜 주고 있으며, 결국 도서관 이용자들은 이러한 전자정보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연구하고 학습하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전자정보원이나 정보전달 방식 등의 혁신은 도서관내의 각종 전자정보원을 수용하고 이용하는데 필요한 컴퓨터와 관련장비의 설치를 요구하게 되었다. 또한 다양한 형태의 전자정보원을 이용자들이 효율적으로 이용시킬 뿐만아니라 정보활용교육을 수행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운영·관리할 수 있는 대학 디지털 도서관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따라서 이러한 이용자의 정보에 대한 욕구는 결국 도서관의 환경의 변화를 초래시킨다.첫 번째 정보기록매체의 변화를 살펴보면 기존도서관이 종이, 필름, 사진 형태의 기록매체였다면 디지털 도서관은 디지털, 미디어 형태의 기록매체로 변화되었다. 두 번째 정보관리 시스템의 변화는 기존도다.
    공학/기술| 2004.11.16| 18페이지| 1,500원| 조회(1,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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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속] 실리콘 (Silicone) 평가A좋아요
    원소명의 어원 : 석기시대에 화살촉이나 칼을 만드는데 사용된 flint라는 광석의 라틴어 어원 silex(silicis) 규소는 지각에 산소(46%) 다음 두번째로 풍부한 원소로서(27%), 규소가 산소를 매우 좋아하여 항상 실리카(silica, SiO2)의 형태로 존재 자연속에 주로 산소와 결합된 산화물이나 규산염 상태로 존재 규소는 일년에 약 50만톤 정도가 합금성분으로 소모되고 반도체 생산에 소모되는 양은 그리 많지는 않으나, 그 영향은 훨씬 크다. 1822년 스웨덴의 화학자 J.베르셀리우스가 처음으로 발견하였고, 플루오르화규소를 금속칼륨으로 환원시켜서 얻었다 생물학적으로 규소섭취가 부족할때는 포유동물에는 발육장애가 발생. 한편 작업장에선 안전을 위해 허용치를 규정하고있다.Si의 개관밀도(비중) = 2.38 g/㎤, 어두운 청흑색, 비금속 원소 탄소, 게르마늄등과 같은 IVB(4)족 결정질은 침상 또는 판상으로 비뚤어진 8면체이고 다이아몬드 구조이다.Si 화학적 위치(1)Si공유반경(10-10 m)1428.*************.111.8원자번호원자량녹는점(oC)끓는점(oC)전기음성도Si의 화학적 위치(2)금속성 색을 나타냄에도 불구하고 게르마늄과 함께 전형적인 반도체 성격을 가진다. 다이아몬드와 같은 결정구조로 단단히 연결되 있지만 어느정도 전기를 통하는 것은 비어있는 d-orbital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산소와 결합력이 크다. → 산화물에 대한 방대한 영역(세락믹) Al 과도 쉽게 결합해서 다양한 무기화합물들을 형성 상온에서는 안정하지만 플루오르와는 반응하며, 가열하면 염소,산소, 질소 등과도 반응 탄소와는 고온에서 반응하여 탄화규소 형성 王水에 의해 서서히 산화되어 이산화규소가 되고, 플루오르화수소산과 질산의 혼합물 및 수산화알칼리용액에는 쉽게 녹지만, 그 외의 산에는 침식되지 않는다.Si의 성질“Silicon”과 “Silicone” 의 용어는 언뜻 보기에 서로 유사하나, 화학적으로 두개의 용어는 엄밀히 구별된다. 즉 전자의 Silicon은 원소다. 실리콘(Silicone)은 유기기를 함유한 규소(organosilicone)와 산소 등이 화학결합으로 서로 연결된 모양으로 된 폴리머를 의미한다. 실리콘은 유기성과 무기성을 겸비한 독특한 화학재로서 여러 형태로 응용되어지며, 대부분의 모든 산업분야에서 필수적인 고기능 재료로서 위치를 점하고 있다. 19세기 후반 실험실에서 합성한 Silicone의 화학식 R₂SiO가 케톤의 R₂CO와 유사하였던 관계로 Silico-Ketone(규소케톤)이라 불렀으며, 이것이 다시 줄여서 Silicone이 된 것이다. 단 케톤은 저분자량의 유기화합물인 반면, Silicone은 기술한 바와 같이 폴리머이며 양자에 화학구조상의 유사성은 없다“Silicon”과 “Silicone”Silicone의 제조 과정Quartz SandMetallic SiliconSilanesLinear or Cyclic SiloxanesFluids, Resins, Gels, Elastomers금속의 합금 첨가 원소로서 금속재료 부문 고규소주철, 규소강판, 구리합금, 알루미늄합금 반도체 silicon 초 고순도의 금속 Silicon, 트랜지스터, 다이오드, 컴퓨터칩 등 유기 실리콘 제품 실리콘 오일 (Silicone Oil), 실리콘 겔 (Silicone Gel) 실리콘 고무(Silicone Elastomer), 실리콘 레진 (Silicone Material) 등규소(silicon)의 용도실리콘 오일 (Silicone Oil) 주로 측쇄에 메틸기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선형 실리콘이며 용도에 따라 폭넓은 범위의 분자쇄와 분자량을 갖게된다. 내열성 및 물리적, 화학적 안정성이 우수하다. 응용분야에는 절연유, 액체커플링, 완충유, 윤활유, 열매체, 발수제, 표면처리제, 이형제, 소포제, 왁스첨가제, 의료용, 화장품용, 플라스틱용, 도료용 등이다. 실리콘 겔(Silicone Gel) 다소 가교된 실록산 쇄에 실리콘 오일이 물리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가교도와 포함된 오일의 양에 따라 겔의 물리적 특성은 크게 영향을 받) 고무가 있지만, 이제는 실록산쇄의 길이와 가교도에 따라 주로 분류한다. 액상 실리콘 고무는 기계적 특성이 약한 것외에는 고무로서 우수한 특성을 갖고 있어서, 건축, 토목, 전기, 전자, 자동차, 사무용기기, 항공, 우주산업 등에 그 응용분야가 무궁무진하다 실리콘 레진 (Silicone Material) 실리콘 오일 및 실리콘 고무에 비해 경화하면 단단한 피막과 성형품을 형성하는 특징이 있다. 전기 절연용의 내열성 바니쉬로써의 내열, 내후성 도료용의 베이스 레진으로써 또는 성형재료의 베이스 레진으로써, 발수, 이형용으로 사용된다.Silicone의 용도(2)Silicone 응용분야 사진Silicone 응용분야 사진원소 Si가 합금주철의 조직에 미치는 영향 Si는 주철중의 Fe3C를 분해하여 흑연화하는 원소이며 Si가 높은 주철을 급냉하지 않는 한 편상 또는 공정흑연을 정출한다. 또 기지조직에 대하여는 ferrite 중에 고용하여 silico-ferrite를 만든다. Si가 15% 이상이 되면 ε상(FeSi)이 정출하여 현저하게 경도가 증가해서 HB 480∼520에 이르고 매우 취화하여 인장강도, 항절강도도 격감한다. 4%이상의 Si주철은 안정한 산화막을 만들어 내산화성이 매우 좋아진다. Durion 고Si주철 C 0.7∼1.1%, Mn 1.5%이하, Si 14.2∼14.75%, Cr, Cu, Mo 각각 0.5%이하 철계합금에서 내식성은 가장좋다. 그러나 매우 취약하고 제조할 때 특수한 기술을 요하므로 응용은 한정된다. 각종산을 처리하는 펌프, 밸브에 쓰이는 외에 파이프, 스프레이 노즐, 교반기, 증발접시 등 화학장치의 내산부품에 사용[2] 합금제로서의 Si 사용(1)함규소황동 10∼16%Zn에 4∼5%Si 첨가 주물만들기 쉽고, 내해수성, 강도 우수, 선박부품등의 주물에 사용 규소청동(Silicon bronze) Si가 Cu중에 852℃의 포정온도 부근에서 약 5%, 300℃에서 약 3%까지 고용, 실용합금에서는 4% Si이하의 것이 사용하며 열처리 효과가 거Zn, 〈0.6%Ni, 〈0.05%Pb 용도는 저장조, 나사류, 못, 리벳, 너트, 피스톤링, 화학공업용기구 등합금제로서의 Si 사용(2)Cu-Ni-Si합금 1927년 Corson에 의해 발견, Corson합금 또는 C합금이라 함. 종류로는 조성에 따라 C, CA, CAZ 합금이 있다. 강력하고 도전율이 좋아 강력도전재로 이용 Al-Si계 합금 Silumin합금이라 하고 10∼13%의 Si가 첨가된다. Si 용해도가 적어 열처리 효과없다. 용융점이 낮고(577℃의 공정온도) 유동성이 좋아 엷고 복잡한 사형 주물에 이용. 공정부근조성에서 Si의 6각판상의 조대한 결정으로 인한 취약성은 개량처리로 극복한다 Al-Mg-Si 합금 조성은 0.45∼1.5%Mg, 0.2∼1.2%Si이다.Mg2Si상의 석출과정에 의한 시효경화성이 있다. 인성이 좋고 용접성, 내식성이 좋으며 전기저항이 낮다합금제로서의 Si 사용(3)Ge나 Si과 같은 물질은 도체와 절연체 중간 정도의 전기 전도도를 가지고 있다. 순도가 높은 결정체로 되어 있을때는 절연체이지만 결정체에 전자를 더 해주거나 빼주는 불순물이 천만분의 일이라도 섞이게 되면 전도도가 매우 크게 바뀌게 된다. P, Sb, In, Al 등의 불순물을 조금 넣으면 순수반도체보다 전기를 잘 통하게 된다. 즉 약간의 에너지에도 이동 가능한 전자나 정공의 수를 증가시켜 전류의 흐름을 용이하게 한다. 반도체를 이용하여 다이오드, 트랜지스터, 집적회로 등 많은 전자소자를 만든다.[3]반도체용 실리콘2. 규소봉 절단3. 웨이퍼 표면연마(1) 반도체용 실리콘 제조 공정1.단결정 성장4.회로 설계5. MASK(RETICLE)제작(1) 반도체용 실리콘 제조 공정7. 감광액 (PR; Photo Resist) 도포8. 노광 (EXPOSURE)6. 산화 (OXIDATION)공정 :(1) 반도체용 실리콘 제조 공정10. 식각 (ETCHING)11. 이온주입 (ION IMPLAN-TATION)공정9. 현상(DEVELOPMENT)(1) 반도체용 실리콘 제조 공정절단 (SAWING)16. 칩접착(1) 반도체용 실리콘 제조 공정17. 금선 연결 (WIRE BONDING)18. 성형 (MOLDIG)19. 최종검사 (FINAL TEST)(1) 반도체용 실리콘 제조 공정단결정 제조 방법▲ Bridgman 법 계략도1. Bridgeman method Crucible 이동 → 융액의 온도구배 제어 → 결정성장 양질의 대구경 단결정 성장에 유리▲ Bridgeman 법으로 성장한 단결정2. Czochralski 성장장치 단결정 육성방법 중 가장 널리 사용되는 방법이다. 쵸크랄스키법은 원료를 도가니에 넣고 용융한 후, 용융온도로 유지 한 채 종자결정을 융액(melt)의 표면 중앙부에 접촉한 다음 서서히 끌어올림으로서 표면장력에 의해 융액 표면 직상부로 인상된 융액을 고화시켜 단결정을 얻는 방법이다.http://kr.encycl.yahoo.com/ http://www.ksia.or.kr/ http://science-lab.x-y.net/reference/reference_html/atom_story(4).htm http://www.dssilicone.net/m3_2.htm http://www.rnd.lgchem.co.kr/chemical/element/html/Si.html http://my.dreamwiz.com/moff/favorite.html http://www.webelements.com/webelements/elements/text/Si/key.html http://user.chollian.net/~phyjun/sci65.htm http://user.chollian.net/~lsdlsd/data/data11.htm http://dongyang.no-ip.com/yungu/silicon/silicon1.html http://dcsilicone.com/si01.html http://swsilicone.com/silicone01.htm http://www.kanggo.net/~chem/periodic/elements/Si.htm 신ow}
    공학/기술| 2002.06.11| 25페이지| 1,000원| 조회(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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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개항 이후의 사회경제 변동과 동학운동 및 농민전쟁
    개항 이후의 사회경제변동과 동학운동, 농민전쟁{1. 머리말2. 본문(1) 개항 이후의 사회경제 변동 (2) 동학농민전쟁1) 대외무역과 상공업의 발달 1) 교조신원운동의 전개2) 농촌 사회의 변화 2) 제1차동학농민전쟁3) 국가 재정의 파탄 3) 제2차 동학농민전쟁4) 사회경제적 위기의 고조3. 맺음말1. 머리말동학 농민 전쟁의 근본 원인은 한국 전통 사회의 역사적 조건과 19세기 후반기 동양의 국제 정세에 깊이 관계 있다. 19세기 말 조선의 지배 체제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내부의 모순과 1876년의 강화도 조약을 맺은 후 이루어진 새로운 사태의 추이가 또 다른 배경이다. 따라서 동학 농민 전쟁에 대해서는 시대 배경, 즉 사회적 배경과 사상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우선 되어야 한다. 개항 이후 조선의 자주권이 약화되어 가는 가운데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의 실패로 청일 양국의 조선내 경제적 침탈은 더욱 가중되어 갔다. 친청사대적인 민씨 정권은 부패와 무능력으로 인해 국가재정의 궁핍과 조세수탈로 인한 농민들의 불만을 증가시켰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동학은 농민들에게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 동학은 농민들 사이에 급속히 번져 나가고 결국 동학교도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주장하는 투쟁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건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2. 본문(1) 개항이후의 사회경제 변동1) 대외무역과 상공업의 발달조선후기 이래 발전해 온 상품화폐경제(商品貨幣經濟)는 아직 자본주의(資本主義)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개항에 따른 대규모 대외무역은 조선의 경제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대외무역의 발달과 성격은 1885년부터 1900년까지의 무역 수출입 통계를 통해 알 수 있다. 수출의 대폭적인 증가는 거의 대일수풀에 의한 것이고, 대청수출도 늘긴 하였지만 대일수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러한 대일무역의 증가는 흉년에 시달리던 조선이 십수년 이래 처음으로 풍년을 맞아 엄청난 수량의 쌀을 수출하였기에 가능하였다. 반면 1889년 일본은 큰 흉년이 들어서 조선 시작함에 따라 면직업이 급속히 쇠퇴되었고, 결국 조선은 일본면제품의 소비시장으로 전락하는 한편 면화를 생산하는 원료공급지가 되고 말았다.개항이후 가장 번창한 산업 중에 하나는 금채취가 중심이 된 광산업이었다. 1880년대 중반 이후에는 개화파의 광산개발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재정 확보책으로서 금광과 동광 개발이 적극 추진되었다. 이시기의 금채취는 거대한 자본과 기술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에 농촌에서 축출된 빈농을 비롯한 극빈자들이 광부로 전신하여 채금에 나섰다.2) 농촌사회의 변화가혹한 지주제와 과도한 조세수탈에 시달리던 조선농민은 설상가상으로 개항이후 새롭게 전개되는 사회경제적 모순 속에서 이중으로 고통을 당하였다. 더욱이 1890년부터는 쌀이 높은 가격으로 일본에 대량 수출되기 시작함으로써, 농촌사회에는 상품화폐경제가 빠른 속도로 자리를 잡아나갔고, 농민도 대외무역의 영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지주들은 지대수입을 높이기 위해 소작지 이동과 소작료 인상 등 소작조건을 악화시켰고 소작인은 열악한 조건 아래에서도 과다한 소작료 수탈을 감수해야 했다. 일제하 조선인 대지주계급은 대체로 1890년대와 1900년대 시기에 100정보 이상의 대지로 성장하였는데 이들 가운데는 농업경영을 철저하게 한 경우도 있지만, 다수는 개항장 부근에서의 상업활동을 통해서 얻은 수익을 토지매입에 투입함으로써 대지주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 토지 겸병 의 폐단이 발생하였고, 빈농들은 토지를 상실하고 더욱 궁핍한 처지에 빠졌다. 따라서 불안정하고 비자립적이었던 소농민 경영이 이 시기에 더욱 영세화하고 대거 몰락하였던 반면에 지주제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대일 미곡수출에 힘입어 오히려 강화되고 있었다. 또한 조선 농업경영의 고수익에 눈을 뜨게 된 일본인도 직접 토지를 매입하거나 입도선매(立稻先賣){) 서있는 벼를 판다는 말로 대개는 중간상인이나 고리대금업자가 장래의 수요 공급을 예측하고 현금이 필요한 영 세농민 또는 생산업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매점매석함으로써 이익의 극대 증대하는 것이었다. 조세의 지세화가 진행되면서 새로 나타난 폐단인 도결(都結){) 서리(胥吏)나 공전(公錢)이나 군포(軍布)를 사용하고 그것을 메우기 위하여 전지(田地)에 부과하는 결세에 덧붙 에 받는 수법을 썼다. 아전들은 여러 명목의 세금을 토지에 부과시켜 전지 1결(結)당 2,000~3,000전, 또는 이보 다 초과해서 징수하였고,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농민들은 쌀 100여두(斗)를 팔아야 했다.외에도, 환곡과 군역에서도 온갖 폐단이 난무하였다. 전세나 대동미 등 기존의 법정세보다는 정부와 관리의 필요에 따라 자의적으로 창설하고 세액을 결정할 수 있는 이른바 무명잡세라고 하는 일종의 특별세와 수수료가 대폭적으로 신설되었다. 경제활동이 조금만 활발한 곳이 있다면 어김없이 잡세가 부과되었고 새로운 정부기구와 제도를 증설하고도 별다른 재원을 확보할 수 없었으므로 그를 운영하기 위해서 특별세를 만들었다. 징세와 상납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설치한 전운영(轉運營)도, 당초 목적과는 달리, 오히려 큰 폐단만 발생시켰다. 전운선이 운행된 다음에는 조세의 완납기간이 다음해 봄에서 당해 연도 12월까지로 단축되었고, 전운기선의 운행비용 등 각종 소요잡비도 모두 납세자에게서 징수되었다. 전운영에서 1893년 가을과 겨울부터 다음해 봄까지 미납조세를 혹독하게 징수하고 몇 년 전의 것도 독봉하였으므로, 결국 농민들의 저항이 일어나고야 말았다.4) 사회경제적 위기의 고조19세기에 들어 외척의 세도정치가 등장함으로써 완만하게 진행되던 양반관료지배체제의 붕괴가 가속화되었다. 권력에서 소외된 양반들은 불만세력으로 변하여 집권세력을 비판하였고, 민중들은 체제를 위협하는 변혁운동을 전개하였다. 권력의 정당성을 상실해 가던 집권세력은 유교적 규범에 의존해서 사회통합을 겨우 유지해 나갔지만, 지배체제는 이미 회생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근대국가 수립을 지향한 개화파의 급진적 개화책이 실패로 돌아갔고, 민씨척족을 중심으로한 수구세력은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지중의 입도내용 또한 사실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손화중의 입도는 이미 조사된대로, 동학이 전라도에 전래되기 전에 스스로 동학을 찾아가 입도한 경우일 것이다.이처럼 일찌기 동학에 입도한 손화중은 이후 전라도로 돌아와 부안 정읍 일대에서 동학을 포교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자신의 근거지를 무장 성송면 괴치리 사천마을로 옮겼다. 손화중이 무장에 정착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이미 1891년 3월 이전부터 김덕명 김개남 등과 함께 전라도내 동학의 유력인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로 볼 때, 그는 늦어도 80년대말경에는 무장에 정착하여 동학을 포교하면서 대접주로 성장해갔다고 판단된다. 한편 농민 혁명 당시 손화중은 괴치리 사천의 이웃마을이 陽室마을에 거주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또 그는 동음치면 두암리 사기동에도 근거지를 두었다. 이 점은 이 곳에 그의 小家가 있었던 사실로 알 수 있다. 이렇듯 손화중은 무장 성송면과 동음치면 일대에 여러군데 근거지를 두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1892년 중반경 그는 폭발적으로 교세를 확대해갔다. 다음의 기록은 무장지역 동학교인들의 동향과 손화중의 세력 확대과정을 상징적으로 전해준다."1892년 8월의 일이다. 전라도 무장현 선운사 도솔암 남쪽 수십보쯤되는 곳에 50여척이나 되는 층암 절벽이 있고 그 절벽바위 전면에는 큰 불상 하나가 새겨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그 석불은 지금으로부터 3,000년전 검당선사의 진상(眞像)이라고 하며 그 석불의 배꼽속에는 신기한 비결(秘訣)이 들어있다고 하며 그 비결이 나오는 날은 한양이 다된다(몰락한다)는 말이 자자하였다. (손화중 휘하의 동학교인들이) 석불의 배꼽을 도끼로 부수고 그 속에 있는 것을 꺼내었다."즉 1892년 중반 손화중 휘하 무장의 동학교인들은 새 세상이 열리기를 기대하는 심정을 담아 미륵비기를 탈취했다는 것인데, 이 사건은 "손화중 포에서 무장 선운사 석불속에 있는 비결이라는 것을 꺼낸 이후, 무장 고창 영광 장성 흥덕 고부 부안 정읍 등 여문에 제 고을에서 잡으러온 장교 사령이라든지 진영이나 감영이나 서울에서 내려온 포교라 할지라도 동학당을 잡아갈 때에는 동학당이 사면으로 쏟아져서 포교들을 둘러싸고 잡힌 사람을 빼앗아 간 일이 많았다. 이런 일을 충청도나 경상도보다도 전라도에서 먼저 생겼으며 전라도에서도 정읍대접주 손화중 포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사람은 점점 많아지고 지목은 모두 이곳으로 집중되어 할 수 없이 이런 방책을 하게 된 것이다. 그때 쯤은 도인들이 모여 앉으면 도담보다도 난리이야기가 많았다."즉 1893년 중반 이후, 손화중 휘하 무장의 동학교인들은 확대된 세력을 바탕으로 관의 수탈에 대해 물리력을 동원하여 강경하게 맞섰으며, 나아가서는 '난리'를 이야기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고창일대에서는 농민혁명 직전부터 손화중 포를 중심으로 항쟁의 분위기가 익어갔고, 이때 형성된 세력이 1년뒤 무장기포를 가능하게 한 기반을 이루었다.동학농민전쟁은 1894년 1월10일 일어난 고부민란{) 고부민란은 1월 10일 전봉준·김도삼·정익서 등의 주도로 고부농민들이 봉기하여 온갖 폭정을 저지르고 있던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을 몰아내고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萬石洑)를 허물어 버린 사건.을 계기로 촉발되었다. 고부민란은 몇 가지 측면에서 종전의 민란과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데, 1892-1893년에 일어났던 동학교단의 신원운동과 고부지방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된 1893년 11월의 사발통문모의계획{) 참여자의 이름을 순서대로 적지 않고 원 주위에다 적었기 때문에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는 이점이 있었다. 예를 들면 동학농민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고부민란 때 사용한 사발통문을 들 수 있는데, 각 리(里)의 집강을 수신 자로 하여 1893년 11월에 돌린 이 사발통문은 전봉준 등이 그해 11, 12월에 관에 정소를 준비하기 위하여 작성 되었다.과 깊은 관련을 가짐으로써 일련의 연속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고부민란을 주도했던 전봉준 등 지도부는 민란을 수습하고 진정시키기 위해 파견된 이용태의 가혹부른다.
    인문/어학| 2001.12.28| 10페이지| 1,000원| 조회(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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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5·18 광주민중항쟁
    5·18 광주민중항쟁Ⅰ.머리말Ⅱ.본말1. 역사속의 5·182. 5·18 민중항쟁과 우리의 오늘3. 5·18에 대한 역사서술의 변천4. 대책Ⅲ.맺음말Ⅰ. 머리말근대 이래 한국의 역사는 서로 상이한 두 궤도를 따라 전개되었다. 하나는 위로부터의 지배의 역사로, 일제의 식민 지배에 뒤이어 해방 후 분단 상황하에서 전개되었던 반공 독재 및 개발 독재의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래로부터의 저항의 역사로, 일제하의 민족 해방 투쟁에 뒤이어 해방 후 반분단, 반독재의민주변혁 운동의 역사가 그것이다. 한국에서 지배란 아래로부터 나온 동의에 바탕을 두기보다는 위로부터 강제적으로 부과되었고, 따라서 아래로부터 지배의 정당성을 제대로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진년의 초겨울을 강타한 TV청문회는 실로 한국정치사에 일대 사건으로, 또 한국 정치문화에 하나의 혁명으로 기록될 것이다. 고양된 국민의 정치의식은 다시는 이땅에 압제의 시대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굳은 결의로 타올랐으며, 이는 결국 '국민의 힘'이야말로 역사를 움직이는 진정한 동력이라는 사실을 입증해내고야 만 것이다. 과거 한국정치 민주화를 가로 막았던 군부의 정치개입 및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시키는 핵심적 요소로 작용했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싶다. 광주항쟁이 한국정치에 있어서 군부의 정치개입을 종식시키는 역사 '결정적 국면'의 원천으로 작동하였다는 점 또한 의의가 있다. 광주민중항쟁의 전개과정을 중심으로 자세히 살펴보자.Ⅱ. 본말1. 역사속의 5·18해방이후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무력이 동원된 각종의 투쟁이 빈번하게 발생했으나 그 가운데 최초로 발생한 대규모의 무장투쟁은 1980년 광주에서 발생한 5·18민중항쟁이었다. 해방직후의 대구사건, 정부수립 전후의 4·3사건과 여·순사건, 1960년의 4·19학생혁명 등이 개별지역 또는 전국적 상황에서 발생한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성격의 정치투쟁이었다는 측면에서 광주항쟁과 괘를 같이하고 있다. 그렇지만 시민들이 무장을 통해서 국가권력에 정면으로 대항했던 광주항쟁은 이들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제2권, 1997, p.23.무기를 제작하라.(다이너마이트, 화염병, 사제폭탄, 불화살, 불깡통, 각종 기름 준비)전 시민 관공서를 불태워라.차량을 획득하라.특공대를 조직 군무기를 탈취하라.아! 형제여! 싸우다 죽자!1980년 5월 20일범시민민주투쟁위원회 학생혁명위원회사망자 500명, 부상자 3,000명, 연행자 3,000명!놈들의 발포가 시작되었다.서울, 대구, 마산, 전주, 군산, 이리, 목포도 봉기!전주, 이리서는 경찰이 시민에 가담!학생혁명군, 상무대에서 무기 탈취에 성공!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정부 당국으로서는 처음으로 광주사태 담화문'을 21일 저녁 7시 30분에 TV 및 라디오를 통해 발표했다. 그의 담화문은 광주사태'를 불순분자 및 간첩들의 파괴·방화·선동'에 기인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계엄군의 자위권을 강조함으로써 발포명령이 이미 내렸음을 암시하였다. 그러나 계엄사령부가 도청 앞 집단발포가 있기 전인 5월 21일 상오 이희성 계엄사령관실에서 관계 지휘관 및 참모 참석 하에 광주사태를 분석하고 아래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1. 계엄군을 광주시내로부터 외곽으로 전환 재배치2. 자위권의 발동3. 1개 연대를 추가 투입(공수부대)4. 전투력 공백 보전책으로 2개 훈련단 훈련동원 소집5. 폭도 소탕작전은 5. 23이후에 익명 실시6. 대북괴 경계강화 재조치(5월 21일 16:00 전국 일원에 진돗개 '둘'을 발령함과 이울러 방어준비 태세를 변경, 주둔지 자체 경계와 대태업 대책 등을 강화하도록 조치함)대학생들이 사태를 촉발시켜놓고 치열한 투쟁이 요구되는 단계에서는 대부분이 투쟁 대열에서 이탈해버렸을 뿐만 아니라 학생 수습위의 일부가 어떤 대책도 없이 무기를 회수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항쟁지도부로서는 항쟁의 장기화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조직적 통제가 가능한 대학생들을 무장시켜 시민군과 함께 조를 편성하여 통합체제를 형성한다면 도청방어와 시내치안유지에 훨씬 통제가 용이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대해하는 혼란'이라는 국가의 지배 담론은 '민주화·민중항쟁·반(反)외세 자주'라는 민주화운동 세력의 대항 담론에 의해 도전받았고, 1987년 6월항쟁 이후 대항 담론 중 '민주화운동'이라는 의미만이 국가에 의해 공인되었다.) 담론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언어를 통해 개인들에게 제공하는 어떤 의미 구조나 표상방식이라기보다, 차라리 담론은 개인들이 특정한 방식으로만 실천하게 만드는 실천의 양태와 그러한 실천을 강제하는 규칙이다. 따라서 이글은 담론을 어떤 사물을 의미하는 언어와 대비되는 하나의 행위 개념으로서 의미를 만들고 재생산하는 사회적 과정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국가의 5·18담론은 전두환정권의 강력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힘입어 한동안 독점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쿠데타 직후부터 정치 풍토 쇄신법을 만들어 국회와 정당을 비롯한 기존의 정치 사회를 해체시켰고 대신 국가보위입법회의를 발족시켜 수많은 법률을 개폐하는 동시에 유신 체제와 유사한 대통령우위의 간접선거에 의한 대통령제를 채택하여 자신들의 집권을 보장하였다. 또한 그들은 군사쿠데타를 주도한 군부 세력들을 주축으로 여더인 민주정의당을 창당하였고, 심지어는 국가안전기획부를 통해 야당인 민주한국당과 국민당의 결성을 배후 지원하였다. 이로써 국가는 정치 사회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5·18담론들이 주로 광주를 내란 또는 폭동으로 규정하는 국가의 담론에 대한 부정과 구속자의 석방과 같은 인도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1981년5월 전남도민의 이름으로 발표된 시국선언문은 처음으로 5·18의 민주적 성격에 주목하였다.한반도 속의 미국,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 현대 민족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미국이라는 외세가 끼친 영향력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올바른 접근은 무엇인가가 방법론이다.첫째, 현대사 전반에 끼친 영향력을 규명하기 위하여 현대사의 출발인 해방공간의 역사적 자리매김과 이 국면에서 미국의 위치를 규정할 필요가 있다.둘째, 미국의 구조적 강제력이나 친미 인맥의 특성, 쌍무적 지배 등은 고유지 정책을 사후승인한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신군부 중심의 집권에 장애가 되는 요소, 곧 야당, 재야, '급진적'인 교수,지식인,시국관련 복학생 등을 안정화를 저해시켜 안보를 해친다는 인식하에 부정적으로 보고 압박하였다.넷째, 5월22일 백악관 회의에서 광주 진압을 위하여 20사단을 추가 투입하는 것을 승인하고는, 만약 신군부가 사태 수습을 원만히 하지 못할 경우에는 미군을 직접 투입하여 광주를 진압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기까지 하였다.다섯째, 엄청난 피를 흘린 뒤 전두환이 명실상부한 집권자로서 위치를 굳힌 시점에서도 미국은 5월22일의 결정대로 수출입은행장의 한국 방문을 통하여 6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였고, 한 달 후에는 미대사가 전두환을 만나 국무장관의 대한안보공약을 재확인해 주어 전두확 굳히기를 마무리짓고, 81년2월에는 전두환을 초청하여 축복을 내렸다. 5·18광주의 비극 속에서 잉태되고 발전될 수밖에 없었던 6월 항쟁은 1982년 9월 문부식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반미자주화투쟁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민주와 민족자주가 통일적 관계를 이루면서 진전되기 시작하였다. 반미노선의 격화와 더불어 투쟁 노선에서 제헌의회 소집 등 극좌에서부터 호헌조치에 이르는 극우반동에 이르기까지 백가쟁명(百家爭鳴)의 마당이 형성되어 한국전쟁 이후 가장 이념적 지평이 넓어졌다. 이러한 결과 87년의 6·29선언으로 질적전환을 맞게 되면서 노동자 대투쟁으로 전선이 바뀌게 되었다. 1993년 3월부터 시작된 영변핵 위기는 94년 10·21조미협정이 체결되던 10월까지 무려 5번의 민족 생존권 위기를 맞았고, 그 가운데 94년 6월 위기는 최악의 위기로서 당시 민족 생존권은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었다. 최종순간 평양을 방문 중인 카터에게서 백악관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미군의 추가 병력이 있을 경우 북한이 선제공격을 하리란 보고였다. 미국의 이러한 일촉즉발의 전쟁 놀음 기도에는 북한의 핵무기 제조 능력 그 자체보다는 이를 구실로 탈냉전과 걸프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미국의 단일 패화와 종석적 신자유주의를 추진하여 IMF의 요구를 능가하여 대외 개방을 급진적으로, 또 광범위하게 진행시키는 IMF특별 장학생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더욱더 분명한 사실은 IMF의 원인에 외인론, 내인론의 기원에는 미국이 직간접으로 행위 주체로 개입하였다는 점이다. 남한은 발전국가 모순이 누적된 상황에서 미국의 세계 자본주의 질서 재편 전략에 휘말린 것이다. 남한이 가장 많이 빚진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일본과 유럽연합인데도, IMF신탁통치에 대한 모든 조치와 처방은 주로 미국 재무부의 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재미 한인 사회의 정치는 영사관 주도의 구조였다. 영사관은 재미 한인 사회의 언론 기관, 어용단체들과 삼각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한인 사회의 정치를 장악하면서 여론을 이끌어갔다. 당시만 해도 이민 역사가 짧았던 까닭에 대부분의 한인들은 미국식보다는 한국식 관행에 더욱 익숙했기 때문에 재미 한인 사회에서도 관료-일반인의 관계는 종적 관계였다. 아직 경제적 기반이 약했던 당시의 한인 사회는 모든 행사나 단체활동을 영사관의 재정적 지원 없이는 할 수 없었다. 또한 영사관은 한인 언론에 대한 검열을 실시하여 재미 한인 사회의 여론을 통제하고 이끌어갔다. 한인회는 친정부 활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어용단체다. 한인 사회의 대표기관임을 자처하면서 한인 사회의 권익 신장보다는 한 개인의 이익 추구를 위해 한인회가 운영되던 시기였다. 요약하면 광주항쟁 이전의 로스앤젤레스 한인 사회는 삼각 연합 체제 구조였다. 민주화 또는 반정부 활동을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방해·와해시켰다. 반정부 활동에 가담하는 개인 또는 단체를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어 커뮤니티로부터 고립당하도록 만들거나, 언론 통제를 통해 반정부 여론을 묵살시키거나,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어용 단체 활동을 적극 지원하거나, 영사관의 행정력으로 개인 또는 단체의 활동을 방해하기 등이 민주화운동을 통제하고 억제한 방법들이다. 광주민중항쟁이 한국 정치에 대한 재미 한인들의 새로운 인식과
    인문/어학| 2001.12.14| 10페이지| 1,000원| 조회(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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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민씨정권의 초기정책과 수구파의 반발(임오군란) 평가A+최고예요
    민씨 정권의 초기 개화정책과 수구파의 반발민씨 정권의 초기 개화정책과 수구파의 반발Ⅰ. 머리말19세기 후반 서구제국주의 열강은 동아시아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여 자국의 상품시장을 건설하고, 자원을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은 밖으로는 서구열강 및 일본의 침략위기를 극복하고, 안으로는 봉건체제의 모순을 타파하여 자주적 근대화의 길을 모색해야만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조일수호조규와 민씨정권의 개화정책은 아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이 글에서는 이러한 민비의 정치참여와 정치과정 그리고 민비를 중심으로 한 민씨정권의 정치성격을 통해 당시의 조선사회가 안고 있었던 내·외의 정치상황과 이들의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Ⅱ. 몸말1. 민씨 정권의 등장민씨 정권이 처음 정부의 주요관직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민비가 왕비로 책봉된 1866년 천후였다. 이는 대원군의 안동 김씨 견제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다. 실제로 대원군 집권기 정치세력의 구성을 보면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이라는 기존의 인식과는 달리 여전히 김병학을 위시한 안동김씨 세력이 주요 관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정치적 기반이 전혀 없이 정권을 잡게 되었던 대원군의 입장에서, 오랫동안 정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안동김씨 세력을 하루 아침에 척결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고, 또한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막대한 경제력이 당시 궁핍한 국가제정의 형편에서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대원군은 조대비와의 연대를 끊고 독자적 정치구도를 형성해가는 1866년부터 정치적 대결보다는 제휴세력으로 안동 김씨를 재기용하는 한편,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전주 이씨 종친세력, 여홍 민씨 등을 끌어들였다. 따라서 민씨 정권의 지도부들은 대원군의 하야와 함께 민비의 주도로 정계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미 대원군의 세력견제라는 전략에 의해서 정계에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물론 이들이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873년 11월 4일 밤 국왕의 친정하교였다. 당시 민씨정권은 최권은 기존의 동래 지역의 외교 담당관들을 제거하고 일본에 대한 유화책을 모색하게 된다. 민씨정권은 이러한 정책표명을 통해 일본에서 일었던 정한론을 유보시키는 동시에 청국의 정치적 자문을 받아들이는 일본 중심의 회유책을 이용했다. 이는 민비와 척신들이 당시의 국제정세를 파악함에 있어서 일본을 가장 강력한 무력충돌 가능국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1874년 8월, 민비는 고종으로 하여금 일본에 강화할 것을 원하는 친필외교문서를 조영하를 통해 동래에 있는 일본인들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이러한 대외관계 변화는 대청 무역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병인양요 이후 조선 정부는 서양목을 비롯한 일체의 서양물품의 수입을 금지하였었는데, 1874년 5월 서양산이 아닌 광동산 직조물의 수입은 허락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 광동에서는 그러한 직조물을 생산하지 않았었다는 점을 볼 때, 결국 광동목 수입 허가 조처는 청전 혁파로 곤란을 겪고 있는 의주 관세청의 수세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서양목 수입을 허가하는 것이었다.즉 민씨정권이 공식적으로는 위정척사론을 국론으로 추켜세우면서도 사실은 서양 및 일본에 대한 유화책을 대외정책의 기본방침으로 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3. 조일수호조교의 체결1) 조약의 체결일본의 명치정부는 1875년 통교교섭을 위한 사신을 보내 왔지만, 조선에서 그 서사가 오만하다는 이유로 응하지 않게 된다. 이에 일본은 측량을 위장하여, 해군함 운요호를 파견해 강화도에 접근하였으며 계획적으로 도발을 행하였다. 이에 조선군이 초지진에서 포격을 가하자 그 보복으로서 영종도에 상륙하여 관아와 민가를 불지르고 30여명의 조선민을 살육하는 한편, 다른 군함을 부산에 파견하여 해병대를 상륙시켜 동래공관을 위협하였다. 이와 같은 일본의 행위는 일본이 미국 군함에 의해 강제로 문호를 개방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자국의 경험을 되살려, 치밀하게 짠 사전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일본정부는 이와 같은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삼아 전권대사에 구로다, 부전권대사에 이노우에를 임명하고 6척의 군함에 30본인들이 조선에서 재산을 팽창시킬 수 있는 특권을 보유받았음과 하등의 다름이 없으며 또한 조선의 금융을 교란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조약에 의거하여 일본은 실질적으로 조선의 엽전·동전·백동전 등을 그들의 화폐와 교환하여 대량으로 끌어 내어 갔기 때문에 금융고갈을 초래하여 조선경제는 파탄되어 갔으며, 일본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도구의 지위로 완전히 전락해 갔던 것이다.4. 조일수호조규 후의 개화 정책운요호 사건 및 강화도 조약 등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민씨 정권은 개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다양한 정책을 펼쳐나가게 된다. 이러한 정책은 단순히 외교적인 면에 걸친 것이 아니라 정치·사회·군사 등 다방면에서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는 이러한 개화 시책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1) 서양 열강과의 조약 체결① 미국과의 조약세계 정황에 무지했던 민씨정권) 당시 조선이 국제 조약에 얼마나 무지했던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무관세'를 들 수 있다. 그 당시 일본 협상 책임자가 소지한 훈령에는 조선측이 세관 징수를 하리라 예상하고, '조선측이 수입품세를 제의할 경우, 가격의 5푼세를 수락하는 동시에 수세법의 1관의 통상장정에 규정토록' 지시하였지만, 조선측 대표는 10회의 협상과정에서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를 맺은 이후, 이 조약이 불평등조약일 뿐만 아니라 일본 1개국과만 개국통상을 실시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 불리함을 깨닫고, 세력 균형을 이용하기 위해 다른 서양 국가와의 개국 통상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민씨정권의 의도는, 빼앗긴 조선에서의 종주권을 찾으려는 청과 아시아로 진출하려던 미국의 이해관계) 청국은 적극적으로 조선과 구미열강제국과의 조약에 개입해 이를 청국의 조선에 대한 종속관계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한편, 일본에 의한 조선무역의 독점을 막는 수단으로 사용코자 하였다. 반면 .미국은 이미 1865년경에, 동방아시아에 있어 자국의 해군근거지 획득문제를 심의할 무렵에 조선을 미래의 근거지의 하나로 설정했던 조선정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朝鮮策略』은 러시아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서 조선은 청국, 일본, 미국과 우호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러시아는 대원군 집권기 이래 비공식적인 관계를 진전시키고 있었고, 미국과의 교섭도 진척시키려던 입장이었던 집권세력들에게 『朝鮮策略』의 내용 자체가 하등 신기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청국 관원이 조선에 미국과의 수교를 제의하였고 그것이 공식적으로 논의되었다는 점에서 큰 방향을 일으켰던 것이다.② 신사유람단의 파견김옥균·박영효 등이 1879년 일본에 파견한 이동인의 활동의 결과로, 조선 조정은 일본의 개화실태를 시찰하기 위한 일본국정조사단을 1881년 1월 파견하게 된다. 당시에는 위정척사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는 시기였기에 시찰단은 비밀리에 동래에 집합하여 일본으로 향했다. 이들은 일본의 정부기관, 산업, 군사, 교육 시설 등을 시찰한 후 국왕에게 보고서를 작성하여 개화시책에 영향을 주었고, 박문국·전환국 설치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또한 조사시찰단을 파견하기 이전에 이미 조사들이 시찰할 대상의 선정과 그 경험을 활용할 청사진이 치밀하게 마련하여, 그들을 통리기무아문에 그대로 등용하게 된다. 즉 집권세력은 통리기무아문이라는 청의 양무운동 추진기구를 모방한 기구를 설치하였으나 실제의 정책은 일본의 경험을 더욱 중요시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③ 영선사의 파견민씨 정권은 조일수호조규 이후 일본을 통한 서구문물제도, 특히 무비자강책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에 따라 신무기 도입이나 학습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러나 척왜론자들의 주장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유일한 길은 청을 통한 문물의 도입이었다. 이에 민씨 정건은 1880년 4월 30일 군기제조기술 학습을 위한 유학생 파견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게 된다. 이때 이유원만이 국가재정 형편상 유학생의 파견보다는 중국인을 초빙하여 배우게 하자고 수정 제의한 것 이외에는 모든 사람이 난색을 표하였다. 하지만 그들 역시 청을 통한 서양식 무기제조 기술의 도입 두루 선출하고, 각 지역으로부터 도착한 소초(疏草)를 검토하여 소론인 전 예조참판 강진규(姜晉奎)의 상소문을 채택하였다.영남유생들은 이만손을 소수로 2월 초 산양을 출발하여 1차 복합상소는 2월 중순부터 진행되었는데, 상소에 참여한 유생은 처음 270 ~ 300여명이었으나, 2월 하순경에는 400여 명에 이르기도 하였고, 경상도의 안동·상주·경주·대구·김해 5진(鎭)중 안동진과 상주진의 유생이 150여명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2월26일 만인소가 받아들여져 1차 상소가 끝나게 되자 유생들을 2차 상소의 논의를 하여 3월 초 김조영(金祖永)을 소수로 추대하여 2차 척사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복합상소 도중 유생의 일부가 귀향하여 세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복합하는 당일 김종영이 피체되어 제2차 복합은 끝나고, 3월 초 유생들을 3차 상소를 올리기로 하고, 김석규(金碩奎)를 뽑아 복합하기 시작하였다.그런데 김조영·김석규가 유배되어 버리자 3월 하순 유생들을 4차 상소를 올리기고 하고 임원을 선출하여 소수에 김진순(金鎭淳)을 추대하고 척사론을 전개하였다.이 영남만인소에서는「조선책략」에서 주장한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결합하고 미국과 연합하여 러시아를 막는다는 내용, 특히 미국과 연합한다는 사실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였고, 우리 나라에는 옛날부터 훌륭한 법규가 있으므로 서학을 수용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또한 기독교와 천주교에 대한 이해도 기독교는 단지 천주교의 명칭만을 바꾸어 전파를 용이하게 하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그런데 영남만인소는 당초에 개화를 추진하는 민씨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을 정도로 매우 정치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으나, 점차 반외세투쟁의 성격으로 바뀌어 가는 특징이 있었다. 더구나 영남만인소는 신사척사운동의 시발이 되어 그 뒤 경기·충청·호남·강원의 상소가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일본과 서양세력의 동점에 맞서 전 유림이 당론과 지역을 초월하여 연대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이처럼 영남을 것이다.
    인문/어학| 2001.12.14| 14페이지| 1,000원| 조회(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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