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새로운 일을 계획하기를 좋아하고 말로는 항상 변할꺼야, 변해야지 하면서도 막상 실천하지 못하는 나에게 어머니께서 책 한권을 사다주셨다.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 는 제목의 책이었는데 제목이 썩 맘에 들지는 않았다. 우선은 엄마가 이 책 제목을 보고 나를 떠올렸다고 하는데서 챙피하기도 했고 책 제목이 작심삼일을 일삼는 내모습인 것 같아 부끄러우면서도 꼭 읽어봐야겠다는 호기심이 생겼다.이 책은 변화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깨우치고 변화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설명하고 있다. 예전에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라는 책을 읽어본적이 있는데 그 책에서 변화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비유적으로 시사하고 있다면 이 책에서는 변화의 필요성을 다시한번 강조하고 그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나아가서 변화 자체를 주도하고 이끌기 위한 실천방안들을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제시하고 있었다.평소 인문학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변화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변화를 부정적인 의미로 생각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변화는 나에게 방해만 되는 피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난 항상 변하지 않는 것은 없을까? 하며 변하지 않는 것, 즉 안정적인 것만을 찾기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어쩔수 없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때의 나의 태도는 매우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었다. 그런 나에게 이책은 커다란 가르침과 깨달음을 주었다. 바로 변화에 대한 나의 시각이다. 이 책을 통해 변화의 긍정적인 면과 중요성들을 알게 되었고 나아가서 변화를 맞이하는 나의 자세 역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를 취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책은 강한신념, 강한품성, 강한행동의 3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의 끝에는 자가진단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있어서 내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반성할 수 있었다.변화에 관한 신념은 당신이 하는 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변화에 대한 신념은 그 어떤 테크닉 즉 기법, 기술, 솜씨 혹은 역량 등 보다 더 중요하다. 테크닉은 우리가 그것을 사용해야겠다고 생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변화의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 따라서 변화에 적응하고 나아가서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변화, 그 이면에는 변화와 안정을 동전의 양면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즉 변화는 안정없이 존재할 수 없고, 안정은 변화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나 역시도 언제나 안정적인 것들을 추구하다 보니 옛것을 그리워하고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안정이 당연한 것이고 변화는 예외적인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안정과 변화 모두 정상적인 것이고 동전의 양면처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한다. 고인물은 썩게 마련이듯이 나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깨우쳐서 더 많이 성장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겠다.두 번째 신념에서는 변화에 대한 저항과 부정적인 반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저항과 부정적인 반응은 버팀의 에너지 로서 곧 어떤 변화가 가치있는 변화인지 검증하기 위해 소리높여 외치는 안정의 목소리 로 보아야 한다. 안정이 정상이고, 변화는 예외이다 라고 믿는 나에게 변화에 대한 저항과 부정적인 감정은 매우 크게 작용하고 있다. 이것은 두려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자아를 보호하고 변화에 관한 모든 정보와 변화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생기는 두려움들이다. 물론 변화 가운데는 단기적으로는 긍정적이지만 장기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들도 있기 때문에 변화의 결과를 그렇게 확신하고 저항하는 것이라면 옳은 판단이라 하겠다. 그러나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저항은 옛 특성과 특질을 재편성하여 새로운 목적에 기여하라는 외침의 의미이다. 저항은 스스로가 위협당하고 있다고 느낄 때 나오는 반응으로서 싸우거나 방어하거나, 달아나는 것 아니면 순응하는 것 등의 자연스런 반응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들은 단기적으로는 안정적이고 안전한 것으로 생각될지 모르나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우리를 해치는 반응이다. 변화에 통해 동력과 지혜를 모은 변화는 주변에서 중심영역으로 들어선다. 조직이나 기업 뿐 아니라 나 자신의 목표를 세울 때도 그 변화들이 목표를 향해 항상 직선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계획에 없던 에로사항이 생기기도 하고 내 힘으로 바꿀수 없는 상황이 되면 포기하고 체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아무런 간섭 없이 변화를 지켜보라고 한다. 진척이 안되고 오히려 후퇴하는 느낌이 들어도 큰 목표를 늘 염두에 드고 원래의 계획에 맞추어 끝까지 밀고 나가라고 강조한다.평소 인내심도 부족하고 귀도 얇은 나는 내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혹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면 참지 못하고 방향을 바꾸거나 다른 사람의 말대로 계획에도 없던 일들을 첨가시키거나 혹은 계획을 취소하기도 했다. 이런 나의 행동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게됐다. 융통성 있게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수용해가며 계획을 수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변화를 향한 에너지와 희망은 계속 유지하면서 큰 목표를 늘 염두에 두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다섯 번째 신념에서는 동참의 시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변화가 성공하면 동참하겠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낡은 신념이다. 나 자신이 그 변화에 동참해야 성공을 이끌어 낼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모든 종류의 조직이나 기구가 개방적으로 변해가고 유연해짐에 따라 개인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커지고 있다. 따라서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은 버리고 변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때 예전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있는 일들을 해낼 수 있다.여섯 번째 신념에서는 리더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리더들만이 하는 일이고 리더는 반드시 완벽해야 하며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은 낡은 신념이다. 변화의 과정에서 리더들 역시 부하들과 같이 배워나가는 사람이라는, 보다 민주적이고 열린 신념을 가져야 한다. 과거에는 권위적이러 카리스마 있는 리더들이 능력있는 리더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부하들, 혹은 아랫사람들은 리더의 통솔하에 리더가 이끄는 데로 잘 따라주시키지 못한다 하더라고 적어도 우리 자신이나 주변의 사람들을 위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변화는 삶의 한 부분이다. 특히 새천년의 초기라 할 수 있는 지금 우리는 변화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가 이 지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종족으로서, 전보다 더 강력한 종족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통제 불가능한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유전자 코드를 하나씩 해명하고 있는 중이며, 지구 온난화를 가속화시키는 화학물질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있다. 동시에 세계 곳곳에, 최빈숙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정보 기술, 여행, 미디어의 힘이 전파되고 있다. 세상 저쪽 구석에 사는 사람의 행위가 이쪽에 사는 사람에게도 그 여파를 미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폭발하듯 확산되는 정보와 지식이 예전에 존재하는지 조차 몰랐던 새로운 영역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도 못했던 상품과 서비스, 그리고 아이디어가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새로운 지식과 정보가 가정, 교회, 직장 등 우리가 전통적으로 든든한 보루라 생각했던 장소를 뒤흔들고 있다.권력이나 힘이 증가되면 그만큼 책임도 뒤따르는 법이다. 변화 에 대해 생각해 보면 과거엔 당연시 생각되었던 변화가 이제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 선택을 해야 할 것으로 바뀌었다. 왜냐하면 변화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가 우리의 역할을 의식하든 못하든 그 변화에 우리 모두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품성은 평생을 살면서 발전시키는 어떤 것이다. 품성은 기술처럼 쉽게 개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품성은 우리가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제 2장에서는 강한 품성에 대해 나와있다. 오늘날의 시대는 우리 개인의 능력과 개성이 예전 그 어느때보다 더 많은,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우리 각자의 품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첫 번째 품성으로 분명한 입장을 취하자고 주장한다. 우리 모두이다. 자신의 감정을 변명하거나 숨기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조절하면서 그 감정의 에너지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직장에서나 우리가 속한 조직에서 가능하면 감정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불안감이나 염려의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있다는 느낌을 다시금 받는 것이다. 감정은 주의를 촉구하는 신호이기도 하다. 감정은 늘 우리에게 또다른 활력의 단계를 생각하고, 그 방향으로 움직이기를 촉구하는 신호이다. 또한 감정은 공동체의 신호로서 우리를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한데 묶어주는 역할도 한다. 따라서 이런 중요한 역할들을 하는 감정을 꽁꽁 숨기기만 하지 말고 거짓으로 변명하지도 말고, 자기 감정에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그것이 나 자신을 좀 더 풍요롭게 하는 길이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오해나 갈등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된다.마지막으로 강한품성의 네 번째로 자신의 세계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라고 주장한다. 우리들 대부분이 좋아하는 사람,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은 희망을 지니고 낙천적인 사람이다. 우리는 에너지를 좋아하기 때문에 생동감있고 활기찬 사람에게 호감이 가는 것이다. 각자가 맡은 분야에서 낙관과 희망을 갖고 최선을 다할 때, 작지만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런 품성들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선택, 즉 후천적인 것임을 꼭 기억해야 겠다. 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 즉 품성도 역시 노력하는 자들만이 희망적이고 낙관적이며 생동감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겠다.물론 우리의 품성에 어울리지 않거나 신념에 어긋나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있을수 있고, 그런 환경에 처할 수도 있다. 어떤 큰 보상에 눈이 멀어 혹은 혹독한 징계가 두려워 본연의 자세를 버리고 행동하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른다. 무엇이 바로 그런 품성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는지 잘 살펴보면 실제로 우리는 품성이 지닌 힘을 겠다.
제1장; 서론20세기 후반 문화의 주요한 특징 하나는 영화를 위시한 영상매체의 눈부신 활약과 이미지 문명의 급격한 확산일 것이다. 컴퓨터와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힘입은 영상산업의 급속한 성장과 텔레비전, 비디오, 영화 등의 양적, 질적 팽창은 현대 사회의 문화 현상 전반을 규정짓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정보와 오락이 영상매체에 의한 생산, 소비되고 있고 대다수의 현대인들의 삶은 영상이 제공하는 신속성과 명확성에 익숙해 있다. 한편의 드라마나 영화가 일으키는 사회적 파장이라든가 노래조차도 비디오로 제작되어 보여주려 하는 경향 등에서 이 시대 영상이 누리는 위상은 쉽게 가늠해 볼 수 있다. 현대를 가리켜 영상시대라 일컫는 게 이제는 새삼스럽게 여겨질 정도로 오늘날의 사화 문화 전반을 가장 광범위하고 강력하게 지배하는 매체는 영상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영상매체의 부각은 이른바 문학의 위기 의 유일한 원인은 아닐지라도 분명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심각한 원인으로 자리한다. 문화매체적 표현 양식의 침체와 위축은 영상매체의 성장과 활약에 절대적으로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영화를 위시한 영상매체의 위세 앞에서 소설은 이야기로서의 매력을 현저히 상실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소설을 포함하여 문학의 존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각도와 보다 넓은 시야에서 탐구되고 성찰되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영상매체가 주도하는 이미지 문명이 현대사회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면 그런 상황 속에서 문학과 영상의 관계를 고찰한다는 것은 분명 긴급하고 중요한 일이 아닐수 없다. 문학 주변 환경의 변화에 대한 인식은 당연히 문학 혹은 문학연구의 변화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소설과 영화의 관계는 사실 깊고도 오래다. 영화는 그 탄생 초기부터 소설에게서 이야기를 빌려왔다. 그만큼 소설은 영화에게 거대한 자료의 저수지로서 기여해 왔으며 영화가 성장하는데 있어 더없이 소중한 자양분이 되어 왔다. 초창기 영화 대본의 상당수는 소설의 서술 시간은 84분이다. 영화는 소설을 거의 두 배의 길이로 연장시키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소설 텍스트의 이야기에 적지 않은 변형이 가해졌음을 충분히 추정해볼 수 있다. 이야기 시간에 있어서도 양 텍스트는 상당한 차이를 갖는다. 소설은 나 가 10여년 전 시골학교에 부임하고 나서 그곳을 떠날 때까지 삼 년이라는 시간이 경과한 것으로 설정하고 있는 반면에 영화에서는 수옥(소설에서의 나 )이 그곳에서 1년 뒤에 떠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즉 소설은 3년 동안의 이야기 시간을 갖는 반면 영화에서의 이야기 시간은 1년에 불과하다. 이야기 시간 면에서 영화는 소설보다 훨씬 축소되어 있다는 것이다.2) 이야기 요소의 차이소설 과 의 주요한 이야기상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1) 소설은 성적 타락을 전하는 뉴스를 보던 남편이 세태를 개탄하고 그 말을 들은 나 가 10여년 전의 사건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와 달리 영화는 수옥이 시골학교로 부임을 받고 산골 마을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즉 소설에서는 화자가 10년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이 분명한 데 반해 영화에서는 그렇지 않다.(2) 소설에서 나 가 지금의 남편 을 만나 약혼하게 된 것은 시골학교로 부임한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수옥은 시골학교로 부임받기 이전에 이미 영훈(소설상의 남편)과 약혼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소설의 주요 대목을 이루고 있는, 부임 첫해의 여름 방학 때부터 다음 해 봄까지의 거의 반년 동안에 있었던 나 와 지금의 남편 과의 만남에서 약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영화에서는 당연히 찾아 볼 수 없다.(3) 소설 속에서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나 와 깨철이, 그리고 가게 주인, 소년, 최선생, 화천이 뿐이다. 그 외 마을주민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상세한 정보를 알수는 없다. 반명 영화에서는 새로운 인물들이 상당수 첨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장 부부, 교장과 교사들, 순이 할머니, 산월이, 동만 부부 등이 그들이다. 작부 산월이는 마을 남양한 이미지의 활용과 음향 등을 통해 인물의 내적 사고를 추측케 할 뿐이다.2) 장면화와 시간 변조의 약화소설과 영화는 시간 연속을 통해 표현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소설과 영화는 또한 공통적으로 현실 세계의 시간을 변조시킨다. 현실 세계의 시간은 선조적이고 불가역적이며 항구적이다. 하지만 소설과 영화는 이러한 순차적이며 연속적인 현실의 시간 논리를 거역하며 변조시키고 그 계기적 질서를 깨뜨린다. 그러나 소설과 영화는 시간을 다루는 데 있어 다소 상이한 양상을 띠게 되는게 그것은 영화가 소설과 달리 영상이라는 평면 공간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점에 기인한다. 소설은 문자들의 단선적인 나열로 구성되며 따라서 의미 구축을 위해서는 시간의 경과만이 필요한 시간예술이다. 그러나 영화는 화면이라는 2차원적 공간을 구성의 근간으로 삼는다. 영화는 화면 위에 펼쳐지는 순간적인 그림들의 연속이며 공간들의 시간적 연쇄인 시공간 예술이다. 순간적인 그림들의 연속이란 곧 시간의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며 어떤 순간의 공간도 어떤 시간의 흐름으로 지탱됨을 의미한다. 시간의 흐름이 사라지면 영상의 공간도 사라져버린다. 영화에서 시간은 공간에 구속된다. 시간의 변화는 공간의 변화를 통해서만 감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지 블루스톤의 말대로 소설에서는 시간이 우위에 있고 영화에서는 공간이 우위에 잇다 영화가 시간예술이면서 동시에 공간예술이기도 하다는 점은 영화가 관념적 추상적 내용을 표현하기가 소설만큼 용이하지가 않음을 보여줌은 물론 시간적 개념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도 적지않은 차이를 갖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3) 화자의 소멸과 인물의 변형소설에서의 이야기 전달자는 화자이다. 아무리 객관적인 서술에서도 화자는 존재한다. 그는 이야기를 통제하고 조절하며 인물의 발화 내용을 그 인물 자신에게 떠넘기기도 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즉 간접화법으로써 전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는 언어가 아니라 영상으로 전달된다는 점에서 화자가 소설에세 누렸던 발화 장악력은 급격히 감소될 수밖에 없게 되며 대발산하는 몇 상황들을 새롭게 첨가시키고 있다. 화천댁의 광기, 동만의 처를 통해서 폭력적인 선정성을 특히 잘 보여주고 있다.3 해학성의 첨가 ; 영훈을 만나지 못하고 혼자 돌아와 슬픔에 잠겨 있는 수옥을 관섭 부부가 위로하는 장면은 일종의 난센스로서 해학적이다. 또한 화천댁의 칼부림을 피해 깨철이가 도망쳐 들어간 곳에서는 우연히도 산월이와 상교가 정사를 나누고 있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상교는 옷을 입을 겨를도 없이 부리나케 집밖으로 도망쳐 나오는데 마침 화천댁을 찾아나선 화천의 일행과 마주친다. 팬츠 하나만 걸친 채 추운 겨울 길 한가운데에서 어쩔줄 말라하며 엉거주춤 서 있는 상교의 모습과 그런 그를 의아해하는 화천 일행의 모습은 한편의 희극을 연상시킨다.4 감상성의 강화 ; 영화는 수옥의 산간벽지에서의 외로움과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여러 차례에 걸쳐 부각시킨다. 특히 영훈을 만나지 못한 채 돌아온 장면에서는 그녀의 슬픔과 실망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한다. 또한 영훈을 만나기 위해 둑길 위를 달려가는 그녀의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정류장으로 달려가는 그녀의 모습을 약간의 슬로우모션으로 담아낸다.5 소란스러움 의 첨가 ; 영화의 여러 장면에서 보이는 마을 주민들의 소동은 소설의 분위기와는 달리 영화를 다소 시끄럽게 한다. 깨철이의 바보스러움을 놀려대는 아이들의 모습이나 깨철이의 생식능력을 확인하려는 남정네들의 장난, 빨래터에서 깨철이와 성적 농담을 주고받거나 저희들끼리 은밀한 농지거리를 하며 웃어대는 아낙네들의 장면 등은 영화에 소란스러움 을 부여한다.3) 대중성 강화의 의미소설의 영상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대중성 강화는 일차적으로 영화의 대중매체적 속성에 기인한다. 소설의 독자는 개별적으로 작품을 구매하고 자율적으로 독서 행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에서 텍스트와 수용자의 관계를 개별적, 사적이라고 한다면, 동시에 다수의 대중을 대상으로 해야 하는 영화는 상대적으로 집단적, 공적인 성격을 띤다고 하겠다.소설의 영상화 과정에서 대중적 요소가 강화되고 있다는 명백한 다 용이하게 생산하고 발휘하면서 대중적 관심과 흥미를 효과적으로 촉발시키고 획득해낼 수 있다는 점은 소설 텍스트가 갖는 총체적이고 심오한, 그러나 자칫 엄숙하고 심각하기 쉬운 메시지와 주제 역시 영상화 과정을 통해 대중적으로 용해하면서 그 소통의 영역을 확대시킬 수 있음을 시사한다는 것이다.문학이 애써 고급문화로 행세하면서 자신과 대중문화를 구분하려 한다거나 대중과 거리를 두려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위축시키고 고립화시키는 것에 다름아니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 문학 역시 수용자와의 만남과 그 소통 과정 속에서 비로소 완성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의 영상화 작업, 즉 소설이 가장 대중적인 매체인 영상의 힘을 빌린다는 것은 대중과의 소통을 모색할 수 있는 상당히 유효하고 요긴한 방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소설이 자칫 범하기 쉬운 고답성과 엘리트주의적 틀에서 벗어나 대중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소설은 영상화 작업을 통해 마련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기술적 장치와 기교를 통해 대중적 이야기 요소들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발휘할 수 있는 영상의 힘은 소설에게 있어서도 대중들을 끌어들이고 그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게 하는 유력한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제4장; 소설과 영화의 서사전달 방식 비교1. 들어가는 말영화가 그 출발 시기부터 소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빌려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만큼 소설은 단순한 기록문학 이상으로 영화의 기본 자양이 되어왔다. 초창기 영화 대본의 상당수가 소설의 각색물이었으며 그러한 차용 관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소설과 영화가 함께 논의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둘 사이의 공통성, 즉 이야기를 전달한다 는 점에 근거한다. 두 장르 모두 어떠한 이야기 를 담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수용자에게 전달 한다. 그러나 소설과 영화가 엄연한 별개의 예술장르로 나눠짐은 물론이다. 소설과 영화의 변별은 그것들이 담아내는 이야기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 각각의 매체, 즉 언어와 영상이라는 전달
평등한 언어사용을 위한 우리의 노력유럽어문학부20020103박예나내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 두 가지는 바로 '현모양처'와 '아줌마'이다. 우선 현모양처라는 말은 좋은 엄마, 좋은 아내라는 뜻으로서 가부장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인간 전체가 아닌 한편의 성에만 요구되어 온 것이다. 이 단어에는 그 남편과 아들의 이기심이 그대로 드러난다. 현모양처가 힘들거나 화가날 때, 그녀를 누가 받아줄 수 있을지...또한 '아줌마'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는 그 여성을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로 호명하는 것이다. 즉 성인 남성을 부르는 호칭은 여성에 비해 세분화되어 있어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보통 아저씨의 범주에 드는 사람에 대해 보다 공식적인 어투가 되고, '아저씨'라는 호칭은 버스 기사 등이나 옷차림이 좀 허름한, 즉 자신보다 낮추어 부를 경우에 사용한다. 이와 비교해 볼 때 아줌마는 아저씨에 상응하는 말로서 여성에게는 성인 남성을 호명하는 '선생님'에 상응하는 호칭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성별화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실제적 언어사용에서는 이미 성별화되어 있는 것이다.독서와 토론 수업시간에 '언어와 여성'에 관한 강의를 듣고 또 책을 접하면서 일상 생활의 언어 사용에 있어 성차별이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고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의 개혁이다. 남녀가 평등하다는 의식과 또 그런 언어를 사용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심어주기 위해서 가장 직접적이고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대중매체이다. 즉 대중매체에서는 중성적인 언어사용과 여의사 등과 같이 불필요한 경우에 성에 대한 명시를 배제함으로써 대중들의 의식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또한 이러한 언어사용에서의 여성차별은 남성 우월 주의나 가부장적 사회제도가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므로 그 근본인 '여성 차별'에 대한 심각성을 일깨워주기 위해 대중 매체에서 여성을 사소하게 멸시하지는 않는지, 남녀에 대한 고정관념을 불식시키도록 가정, 직장, 학교에서의 양성의 다양한 역할을 보여주어야 한다.
현대인에게 기독교가 필요한 이유현대는 비과학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정신적인 기류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증명은 효과가 별로 없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 의해 이해되고 납득되는 신은 참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두려움과 경배의 대상이지 증명과 이해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성경 어느 곳에도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존재는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하시는 모든 것에 나타나시기 때문에 정직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을 칼빈은 신에 대한 느낌, 종교의 씨앗이라 불렀다. 사람들은 이러한 느낌을 제거하기 위하여 인조의 하나님을 만드는데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이다.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인조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증명이 있는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 증명의 문제는 아니며, 믿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보강해 줄 증명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기대를 초월하시고 사람을 놀라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느낌을 정직히 받아들여 그 근원을 찾도록 해야 한다.손봉호 교수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책에서 "막연하게 느껴지는 불확실한 존재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먼저 확실히 안 다음에 순종하고 경배하는 것이 훨씬 더 논리적일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우에는 그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순종하지 않고 믿지 않으면서 알아보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식 대상으로 찾으려면 참 하나님은 나타나시지 않기 때문이다. 참 하나님은 다만 그를 믿고 의지하며 그에게 무릎을 꿇는 자들의 마음에만 그 참 모습을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오늘날의 현대인들은 전 세계적으로 비슷하게 되어가고 사상적으로도 동, 서가 비슷하게 되어 간다. 그리고 그것은 과학 기술을 주축으로 하는 서양 문화의 힘이다. 꽁트가 인간의 사고 방식이 신학적 단계, 형이상학적 단계, 실증주의적 단계로 발달했다고 주장한 것과 같이, 과학적이면 합리적이고 합리적이면 옳은 것이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 이런 현대인들은 과학에 대한 오해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로 믿을 수도 없다고 느낀다.성경의 목적은 과학과 달리 사실에 대할 정보 제공이 아니라 구원의 길과 올바른 삶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반드시 비과학적인 것은 아니다. 성경의 내용의 일관성, 예언의 성취, 인간의 사고방식 초월, 전통을 통해 획득한 권위 등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하고 있다.이러한 증거들이 완벽한 것이 못된다 하더라도 성경은 그 자체에 의하여 증명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큰 권위를 찾을 수 없으므로 그 자체의 권위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가 진리를 획득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다. 따라서 현대인에게도 성경은 필요하다.손봉호 교수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죄에 대하여, 영혼에 대하여, 고통과 죽음에 대하여, 사랑에 대하여, 그리고 구원에 대하여 성경은 말해 줄 수 있고, 우리의 반성을 자극하고, 우리의 반응을 촉구한다. 우리의 삶을 우리의 세계 바깥에서 조명할 수 있게 해 주고, 우리의 미래와 소망에 대하여 말해 줄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을 아름답고 감격스럽게 해 줄 수 있는 사랑을 가르쳐준다. 그래서 현대인이 과학적이므로 성경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적이므로 비과학적인 옛날 사람들보다 성경이 더 필요하다고 하겠다. 성경은 과학적 지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지식과 과학적 사고방식의 위치와 한계를 알게 함으로 오히려 그것을 보충해 줄 수 있다. 마치 숲 속에만 있으면 나무는 알아도 숲은 모르는 것처럼, 과학의 세계 속에만 머물면 과학 그 자체도 올바로 모를 수 있다. 우리 인간의 삶 전체를 알기 위해서는 인간 세계를 초월하는 어떤 관점이 필요하며,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다"현대인들은 하나님이 없이도 모든 것이 이해되고 설명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자신은 단순히 성숙해 졌을 뿐 아니라 우주의 주인임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현대의 인본주의는 과거와는 달리 자연을 정복하고 신을 무시하는 배타적 인본주의이며 현대인의 엄청난 성취로 인해 낙관주의적이다.그러나 현대 과학 문명의 부작용, 환경오염, 자원의 고갈, 인간소외, 대중화 현상으로 인해 비관주의 시대로 접어들어 가고 있다. 이러한 사회의 악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들이다. 그리고 성경은 인간의 이기욕과 사회의 악이 인간의 죄에서 나온다고 가르치고 있다.이러한 죄용서의 길은 믿음, 즉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신뢰와 의존을 통해서야만 가능해 진다. 인간이 죄인이 아닌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교제를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현대인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사랑의 실천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현대인에게 새로운 소망을 줄 수 있다. 따라서 현대인에게도 예수가 필요하다.손봉호 교수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인간의 겸손은 그 자체가 비겁은 아니다. 오히려 마땅히 모셔야 할 부모를 모시듯 우리의 창조주시요 보호자이신 하나님 품으로 겸손히 돌아가는 것이요 마땅히 찾아야 할 고향을 찾는 길이다. 이 길을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가르침과 행위를 통하여 우리에게 제시하였고, 이 길은 과거 어느 시대 누구보다 인간의 교만이 초래할 인류 전체의 파멸을 눈앞에 둔 현대인에게 더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이요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의미를 확인하는 길이다. 잃음으로 얻는 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가르침이요, 예수께서 제시하신 지혜다"오늘날에 와서 사회라는 말이 중요해 지고 있다. 그리고 개인의 사고 방식과 가치관이 사회에 의해 크게 좌우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이 극단적으로 흘러 인간이 사회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다고 믿는 것은 오히려 반 인간주의적인 이론이다.현대인들은 규칙적이고 평준화된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정신 공동체는 약해지고 이익 공동체는 강해짐으로써 현대인들은 점점 외톨이가 되어가고 있다.교회는 가정과 함께 오늘날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정신 공동체이면서 가정과 달리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전형적인 정신 공동체이다.그리고 교회는 세속 문화 가운데 하나님이 따로 세운 거룩한 모임이다. 속세와 달리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게 하고 체험케 하며, 사회 도덕 질서를 유지시키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교회의 역할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며 영광 돌리게 하고, 나아가서 이 세상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을 배우고 훈련하게 하며,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손봉호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세속적인 것은 죄의 결과요, 세속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죄의 겨로가 밑에 신음하는 것이다, 그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 곧 구원이요, 교회는 그 구원의 도구인 것이다. 그 구원이 완성되고 세속이 거룩하게 되면 교회는 필요 없게 된다. 마치 모든 사람이 건강하면 병원이 필요 없게 되는 것과 같다. 그때까지는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승리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이다. 인간은 원칙적으로 의심하고 질문하는 존재이고 창조적인 질문은 창조적 해답의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질문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적인 질문들은 하지 않는다. 그 이우는 답을 아무래도 알 수 없고, 삶의 의미가 폭로될까 해서, 다른 사람들을 따라 하면 되니까, 그리고 모든 것이 숙명적으로 결정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러한 이유들은 타당하지 않다. 이러한 질문을 회피하는 것은 삶을 무의미하게 보낼 수 있고 영원한 비참에 빠질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해야 한다.인류는 지금까지 가장 먼 것으로부터 따져 왔으나 나를 아는 것이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나를 아는 것은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으로는 불가능하고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가능하다. 그 관계는 나와 그것이 아닌 동등한 인격적인 관계이다.따라서 내가 진정한 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은혜이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것들을 초월한 다른 이의 사랑 때문에 나가 이루어 질 수 있고 성경에서 소개하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너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사랑으로 더 귀한 존재로 격상된 것에 대한 감사와 함께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할 자격이 없음을 깨달음으로 오는 부끄러움의 교차, 이것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 들어갔을 때 나타나는 나의 모습이다.인간 사회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가치 기준이 있어야 하고 따라서 모든 사람의 삶이 동일한 가치와 의의를 가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은 인격체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결정해야 하고 거기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가능한 빨리 삶의 목적과 방향을 물어 보아야 우리의 삶을 뜻 있게 보낼 수 있다.
세계의 신문과 방송의 발달 과정★세계 신문의 역사신문의 원시적 형태는 로마시대의 《악타 디우르나:Acta Diurna》라 할 수 있다.이는 당시 원로원의 의사록인 《악타 세나투스:Acta Senatus》와 평 민원의 의회상황 등의 발표 물을 총칭하는 것이다.중국에서도 8세기경에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에서 《저보(邸報)》라 부른 정부 발표물의 보도기관이 있었고, 송(宋)나라 후기에는 《조보(朝報)》라 부른 관보를 발행하였으며, 청대(淸代)에 발간된 《경보(京報)》는 그 후신이라 할 수 있다.로마시대 이후 귀족들 사이에는 뉴스의 교환이 성행하여 서한신문이 나오게 되었고, 독일에서도 같은 현상이 있었다.13, 14세기부터 15, 16세기에 걸쳐서 르네상스 ·종교개혁 ·터키군(軍)의 유럽 침입, 신대륙 발견 등의 여러 사건이 일어나 뉴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제후와 도시, 대학 등에서도 뉴스를 모으는 일이 성행하였다. 또한, 상인들도 상업상의 필요에 따라 각지의 뉴스를 수집하였다.유명한 것으로는 독일 푸거가(Fugger 家)의 이 있다. 서한신문이 발전하여 규칙적인 필사신문(筆寫新聞)도 발생하였는데, 인쇄술이 발달하자 서한신문이나 필사신문 중에서 흥미를 끄는 내용이나 또는 행상인 ·학자 ·학생 ·급사 ·농노 ·여행자 등으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를 모아 인쇄수단을 통해서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부정기 인쇄신문을 신문사상 ‘플루크블라트(Flug-blatt)’라고 부른다.그 후 17세기로 들어서면서 근대신문으로서의 새로운 형태가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1609년 독일에서 세계 최초의 주간신문인 《렐라치온:Relation》과 《아비소:Aviso》가 나오고, 이어서 네덜란드(1618년경) ·영국(22) ·프랑스(31) 등에서도 주간신문이 발행되었다. 그러나 초기 신문의 내용은 외국 뉴스를 주로 다루어 국왕의 허가를 받아야 발행할 수 있었다.17세기의 신문에서 주목되는 나라는 영국이었다. 당시 영국의 신문은 왕당파와 의회 파로 나뉘어져 싸우고 있었는데, 이 분쟁의 와중에명예혁명을 거쳐 95년에는 특허 검열 법이 폐지됨으로써 영국에서 처음으로 언론의 자유가 확립되었다.세계 최초의 일간신문인 《라이프치거 차이퉁겐:Leipziger Zeitungen》이 독일에서 나온 것은 60년의 일이었다. 18세기로 넘어오면서 각 국에서 일간지가 발행되는 동시에 근대신문의 기초가 구축되었다.영국 최초의 일간지 《데일리 쿠란트:Daily Courant》가 창간된 것은 1702년이었고, 《더 타임스:The Times》의 전신인 《데일리 유니버설 레지스터:Daily Universal Register》의 창간은 85년이었다. 미국에서는 1690년 보스턴에서 발행된 《퍼블릭 오커런시스:The Public Occurrences》가 최초의 것이었으나 이는 한 호만 내고 발행이 금지되었으므로, 1704년에 창간된 주간지 《보스턴 뉴스레터:Boston News Letter》를 최초의 발행지로 볼 수 있다.미국 최초의 일간신문으로는 《펜실베이니아 이브닝 포스트》지로 83년에 창간되었고, 프랑스에서는 77년에 일간지 《주르날 드 파리:Le Journal de Paris》가 처음으로 창간되었다.19세기에 접어들면서 신문의 대중화가 시작되었다. 이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에서 동시에 일어난 현상으로서 그 원인은 나라에 따라 각각 다르나 교육의 보급과 문자 해독력의 향상 등이 배경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대중화의 선구가 된 신문들은 프랑스 지라르딘(Girardin)의 《라 프레스:La Presse》(1836), 미국은 벤자민 데이의 《뉴욕 선》(33), 영국은 인지세(印紙稅)가 폐지(60)된 후에 나온 《데일리 텔레그래프》 등으로 볼 수 있다. 이들 대중신문은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성립된 것으로, 한편으로는 신문의 기업화를 가져온 원인이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수의 서민계층을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지면의 통속화를 초래하였다.특히, 미국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심해서 J.퓰리처의 《뉴욕 월드:New York World》, W.R.허스트의 《저널:Journal》이 발행되 언론자유의 보장이 늦어서 신문의 대중화도 1880년대에 이르러서야 처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독일 ·프랑스의 신문은 제2차 세계대전까지는 정당 적 색채를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하다가 당파신문의 형태를 벗어나 보도신문이 주류를 차지하게 된 것은 전후부터였다.일본의 초기신문은 62년 막부(幕府)의 양서조소(洋書調所)가 발행한 관판(官板) 《바다비아 신문》이다. 그밖에도 막부 말기에 발행된 신문들은 외국신문 번역 중심의 해외뉴스가 대부분이었다. 68년에는 본격적인 신문이 각지에서 나오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추가이신문[中外新聞]》이 있다. 71년에는 일본 최초의 일간지인 《요코하마 마이니치신문[橫濱每日新聞]》이 창간된 데 이어, 72년 대표적 신문 《도쿄 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 (현 每日新聞)이 창간되었고, 이어 부녀자와 하층민을 대상으로 한 ‘소신문(小新聞)’이 나오기 시작했다.대표적인 소 신문으로는 74년에 창간된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 79년 오사카에서 창간된 《아사히신문[朝日新聞]》 등이 이러한 계통의 것이다. 세계적으로는 20세기 초부터 신문의 기업화와 경영의 합리화가 시작되어 이 때부터 신문의 체인(chain)화, 그룹화 현상이 나타났다. 또한, 통신망의 발달과 함께 뉴스도 세계적으로 확대되어 세계적인 통신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제1 ·2차 세계대전은 각 국 신문의 세력판도와 성격을 크게 변화시켰는데,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 신문의 보도기능을 크게 향상시켰다. 한편, 20세기에 들어서서는 자본주의 사회와는 전연 다른 성격을 가진 신문들이 사회주의 여러 나라들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1917년의 러시아혁명으로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한 소련에서는 국민에 대한 사상선전의 무기로서 신문을 중시하여 모든 신문을 당과 정부의 기관지로 만들었고, 그 이후에 출현한 사회주의 여러 나라들도 모두 신문을 당과 정부에서 주도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신문이 정부권력을 비롯해서 모든 세력으로부터의 자유를 표방하는데 반해, 사회주의 국가의 신문은 이와내시장을 뛰어넘는 국제경쟁이 치열해졌다. 70년에는 세계의 중요한 언론 소유주가 125개였는데, 현재는 30개도 안 되는 소수의 언론기업에 매수 ·합병되어 전 세계 신문의 절반인 2억 부가 이들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는 통계도 있다. 언론재벌의 영역확장과 영향력 증대를 일컬어 ‘탐욕에 찬 종이 호랑이들의 게걸스러운 먹이 사냥’이라는 비판이 일기도 한다.미국의 경우 81년까지는 20개의 주요 출판 ·잡지 그룹이 있었으나 88년 3개의 대 언론 기업에 집중되었다. 《타임》잡지가 영화사인 워너(Warner)를 합병하여 세계 최대의 타임-워너미디어사로 확장된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세계 방송의 역사·방송 기술의 변천(1) 무선 통신의 발달무선의 발달사를 보면 1887년 독일인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Hertz)가 처음으로 실험하여 전자파의 존재를 입증했지만 사실은 헤르츠가 발견하기 약 20년 전인 1865년 영국 인 [제임스 맥스웰](James Maxwell)이 수학적으로 이미 전자파의 존재를 예언했다. 그가 산출해낸 전자파의 속도는 당시 실험으로 이에 얻어진 빛의 속도와 비슷한 것을 인정하여 빛도 전자파의 일종이라고 하는 유명한 [빛의 전자 파설]을 발표했다.전파(이하 전자파를 간단히 전파라 한다)라고 하는 천혜의 혜택을 통신에 처음으로 시작하여 성공한 것이 당시 있은 청년인 이탈리아인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로, 헤르츠가 전파를 발견한 후로부터 8년이 지난 1985년의 일이다.헤르츠는 양단에 아연판을 놓고 중앙에 불 꽂 간격을 두어 설치된 금속 봉에 감응 코일을 접속하여 불꽃 방전을 시켜 전기 진동을 일으켰다. 이 봉의 고, 유 파장은 짧기 때문에 발생하는 전파의 파장도 짧아 오늘날 말하는 초단파였다.마르코니는 이것을 개량하여 헤르츠의 발진기의 한쪽 금속판 대신 수 십 내지 수 백 미터의 동선을 공중에 높게 치고 다른 한쪽의 금속판을 땅 속에 묻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공중선, 즉 안테나의 시작이었다.그가 영불해협 340마일의 통신을 A.Fleming)이 검파 용 2극 관을 발명하였고 1914년 [프레스트](DeFoe- est)는 2극 관에 1국을 더한 즉 격자(grid)를 넣어 전자 류를 제어하도록 하는 소위 3극 관을 발명했다.실로 이 3극 진공관의 출현으로 통신 계에 획기적인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오늘날의 무선 전화나 방송, 즉 텔레비전이 비로소 가능케 된 것이다. 그 후 특수 진공관을 사용하여 초단파, 극초단파로의 발진이 용이하게 되었다.이와 같이 무선 통신은 장파, 중파, 초단파로 발전하여 오늘날 마이크로파 시대로 돌입하게 된 것이다.(2) 라디오 방송라디오가 마르코니의 무선 전신에서 오늘의 라디오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페센덴] (A.Fessenden)과 「알렉산더슨」(CAlexandeson)의 고주파 변조기와 [드. 포레스트] 등이 만든 진공관이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들에 의해 말과 음악을 고주파 라디오 전파로 생산하고 송신하여 수신할 수 있게 된 것이다.드. 포레스트는 1908년 파리의 에펠탑에서 전파를 발사하여 인근에서 수신할 수 있었다. 또 미국에서 는 1909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카루소]의 노래를 방송하였고, 이러한 실험 국 형태의 라디오 방송은 그 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실험되었으며 1920년 11월 2일 미국 피츠버그에서 웨스팅하우스가 [프랭크 코나드](Frank Conard)의 지휘아래 KDKA방송국을 설립하고 정규 방송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라디오 방송의 효시라 하겠다.포스터는 라디오 방송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시기별로 구분하고 있다. 1890-1920: point-to-point 라디오 1920-1927: 라디오 방송의 시작 기 1927-1937: 라디오 방송의 청춘기 1937-1945: 라디오 방송의 성숙기 1945-1960: 라디오 패턴의 변환기 1960-1970: 지속적 성장과 FM출현 1970- : 전문 프로그램 지배 기 (전문화,세분화)(3) 텔레비젼 매체의 발달 과정1817년 스웨덴의 화학자 [레르셀리우스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