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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하대학교 문화탐방 합격본1
    Ⅰ. 여는 글 지금 현재 서울 시민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시설은 무엇일까? 바로 시민의 발 ‘지하철’이다. 하지만 지금 서울지하철은 만년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서울지하철공사(5~8호선)에 따르면, 2004년 결산 결과 총 비용 9893억 원, 총수익 8241억 원을 기록해 1652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고 한다. 현재 서울 지하철의 규모는 세계4위이며, 연 수송인원은 세계3위라고 한다. 하지만 외적으로 방대한 규모와는 달리 전체 서울지하철의 적자액은 무려 1조원에 달한다고 하니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런 만년 적자에 대한 대책은 없는 것인가? 조사를 하던 중 3년 연속 흑자를 내며 기본운임 또한 3년 연속 동일한 지하철의 가진 국가를 알게 되었다. 바로 아시아의 4대 소룡에 속하는 대만의 지하철 MRT이다. MRT는 Mass Rapid Transit의 약자로서 ‘대중들의 신속한 교통수단’이라는 뜻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전철방식인 ‘중전철’과는 조금 다른 개념인 ‘경전철’이다. 지하철과 버스의 단점을 보완한 대중교통수단이며, 건설비, 인건비용이 저렴하므로 최근의 선진국에서는 지하철의 대체수단, 위성도시 연결, 관광지 루트로서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다. (싱가폴에서도 이 방식의 지하철이 운행되고 있다.) 대만을 여행해본 여행객, 유학생들의 경험에서 우러난 증언에 따르면, 중국어와 한문을 잘 알고 있다면, 쉽게 대만 곳곳의 명승고적지를 여행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지하철의 계속되는 적자운영을 대만 지하철의 성공적 운영 비결을 통하여 구체적인 개선책을 제시해보는 것이 이번 탐방의 목적이다. 또한 대만에 가서 설문조사를 통해 대만 사람들의 대만 지하철에 대한 생각을 알아보고, 직접 대만지하철을 견학하고 이용해 봄으로써 우리나라 지하철과 대만지하철이 어떤 점이 다른지 직접 느껴보려 한다. Ⅱ. 본론 1. 우리나라 지하철의 개황 - 조사범위가 매우 넓으므로 서울지하철로 국한하였다. 1) 운행시간 주말, 공휴일- 종착역기준으로24시(00시) 평일(월~금)- 1호선(서울역~청량리), 2호선, 3호선(구파발~수서), 4호선(사당~당고개), 5호선, 6호선, 7호선, 8호선은 (25시)-01시까지 심야운행
    인문/어학| 2006.11.14| 17페이지| 3,000원| 조회(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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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일본사]근대일본의 천황제
    근대 일본의 천황제발표자 12023633 이원구목 차1. 근대의 천황상 2. 황실의 성립 3. 황실제도의 정비 4. 새로운 황실상 5. 천황의 신격화 6. 전후 황실제도의 출발1. 근대의 천황상페리의 내항(1853)페리의 내항!다이묘들이 정치 결정 참가하는 단서막부가 다이묘들에게 외교방침 자문다이묘들과 조정이 직접 관계할수 있는 기회존 왕 양 이주축(메이지 유신 3걸)사이고 다카모리오쿠보 토시미치기도 다카요시존왕양이파의 천황관 천황은 자기 쪽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임과 동시에 국권 확립의 수단기도 다카요시 “먼저 어떻게 해서든 구슬(천황)을 우리쪽으로 끌어들여 받들어야”토막파와 조정의 갈등토막파막부천황Win!갈등But, 유신정부의 중대한 약점정부내에서 결정적인 대립이 생겨났을때 수습 불가능한 혼란이 생길 수 있음정한론 정변을 둘러싸고 이러한 모순이 표면화정부분열은 천황친정이 명분에 지나지 않음을 천하에 폭로한 것이며, 정부는 정당성을 잃고 위기에 직면!현실로 다가오는 정부분열* 민간의 움직임 자유민권운동 - 군민공치 - 인민정부론정부 : 위기의식!천황친정을 외견적인 원칙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체제천황 친정의 필요성이토 히로부미이노우에 고와시내각의 천황천황의 내각타협메이지 헌법논쟁2. 황실의 성립(황실전범과 이에사회)메이지 14년 정변 후부터 본격적인 정비시작황실제규황실법전 초고황실전범반대찬성여제반대찬성양위황실전범황실제규분류잠시만…여기서 일본사회에도 최근 논란이 됐던 당시의 여제 논쟁에 대해 알아보자당시 여제 논쟁의 주된 쟁점여제 찬성론자 여제의 남편이 정치에 개입하는 폐해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남편을 맞이하는 문제라면 외국의 왕실과 결혼하는 방법도 있지 않느냐.여제 반대론자 고대와 근세의 여제들은 모두 황자가 제위에 앉기까지의 중계역할 일본은 남존여비의 국가이므로 황제의 존엄성을 해칠 수 없다. 여제의 남편이 몰래 여제를 움직여 정치에 간섭하는 폐해도 생길 수 있다.논쟁여제 논쟁여제 찬성론자 8 Lose여제 반대론자 8 + 의장 = 9 Win당시에도 이런 여제 논쟁이 존재했음을 통해 메이지 국가 초창기의 다양한 질서관의 존재 를 확인할 수 있다.여제 찬성론자 8 Lose전후 황실전범 개정 과정에서 다시 한번 이 여제에 대한 문제가 논의 되나 결국 인정되지 못함황실전범에 대한 추밀원의 논의1. 여자섭정을 둘러싼 논의2. 황족의 혼인범위3. 영세 황족제4. 즉위장소를 둘러싼 논쟁인정안됨화족청일 전쟁 후에 다시 문제교토황실제도의 사상  '이에'사회의 체현자'이에'  집  가문'이에'라고 하는 것은 원칙상 혈족으로 구성되는 가족이 그 가산, 가업, 가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가장의 지휘와 감독에 따라 생활하는 조직일본  전형적인 '이에'사회근대 일본과 같은 이에 사회에서 천황과 황실은 이에 질서의 모범적 체현자가 아니면 안되었던 것이다그래서그렇다면황실이 체현해야 하는 이에와 이에 질서의 이상적인 형태란?가장의 지위를 남계의 장남이 계승하는 것2.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순종이 충분히 행해 지는 것3. 가장이 가족을 강력히 통제, 감독할 수 있어 야 하는 것이처럼 황실은 이상적인 이에로써 부각되었으며, 천황은 이상적인 가장으로서 부각되었다. 말하자면 천황과 왕실은 일본의 사회질서인 이에 질서를 이상적으로 체현함으로써 이에 질서 사회에 군림했던 것이다.3. 황실제도의 정비사회문제가 된 황실재산천황과 황실의 국가와 사회에 대한 군림은 이데올로기 만으로 성취될 수 없음황실제도의 정비그 와중에 황실재산 문재가 사회적 쟁점이 됨민간의 황실제도 비판“황실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3세 이하의 황족을 화족 대열에 넣는 신적 강하를 실행하여야 한다”후쿠모토 니치난정부의 황실개혁 의견이토 히로부미의 의견서와타나베 치아키의 의견서공평, 중립적 입장 강조황실의 현상과 제도의 불합리함에 대한 위기감황실의 국가화1903년 이토 미요지가 조사국 부총재로 취임하면서 황실의 국 가화 정책 정력적으로 추진그러나 그러려면 황실에 대한 예규가 국가법으로서 자리매김 되어 그 효력이 명확해져야 한다이토 미요지황실전범증보와 황실령이 공식령으로 공포됨으로써 법형식상으로 관철4. 새로운 황실상유동하는 국가관1905년 러일전쟁의 종료포츠머스 조약 체결 중 강화내용에 불만을 품은 민중들의 히비야 공원 집회를 금지하는 경찰과 충돌민중발언의 시작러일전쟁을 통해 국가에 대한 막대한 공헌을 했던 국민들이 드디어 목소리를 내기 시작군주제의 세계적 위기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 독일의 호엘촐레른 왕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 붕괴영국과 일본을 제외한 강대국의 왕조가 잇달아 무너짐 으로써 군주제의 세계적 위기라는 상황이 전개위기감!대책필요!황실 개혁1. 황실재산의 처분공공사업이나 자선사업에 활발히 사용2. 황태자의 해외여행전후 개혁의 와중에 있는 유럽 제실과 국민이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체득하는 것이 꼭 필요한 상황이었음황실 개방정책의 성공5. 천황의 신격화천황기관설 사건의 발발1935년 2월, 육군 중장 키쿠치 타케오 남작이 미노베 다쓰키치의 천황기관설을 공격군부의 국정 장악에 대한 야망을 보여줌군부천황정부대립중재자의 역할친재를 행하는 천황!6. 전후 황실제도의 출발일본 패전 속의 천황일본을 서방 진영의 일원으로 종속시킨다 정교분리를 위한 천황의 인간격하 황제의 인간선언 황실전범의 개정미국의 의도 –상징천황제昭和天皇의 죽음과 平成시대의 개막쇼와의 종언 1989년 1월 7일 재위 62년으로 쇼와천황이 세상을 떠났다 「격동의쇼와」 平成시대의 개막 平成 : 나라의 안팎으로도 하늘과 땅에도 평화가 달성된다고 하는 의미가 내포현대의 상징천황- 지금도 일본인들은 천황을 숭배한다天皇と皇太子への 感情と意識(単位:%)29知らない7知らない5無關心6無關心35ない22言えない31幾分ある7なくなる0ある60變化なし89'戰爭責任88'天皇劑度變化224知らない342524無關心112無感情606853親近3518尊敬皇太子平成天皇昭和天皇天皇劑度變化と戰爭責任についての見解자료출처 : 天皇劑と21世紀の日本-朝日新聞,每日新聞,자료출처 : http://www.kunaicho.go.jp/지루한데 보느라 수고하셨습니다The End{nameOfApplication=Show}
    인문/어학| 2006.11.05| 38페이지| 1,500원| 조회(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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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근대사 ]일본 천황제의 현대적 의미 평가A좋아요
    -목차-1. 들어가며 : 태평양전쟁 이전까지의 천황의 지위2. 본론 : 전후 일본사회에서 천황이 가지는 의미를 다각도로 접근가. 법적 측면에서의 천황나.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의 천황다. 정치 외교적 측면에서의 천황3. 나오며 : 대중 천황의 출현과 천황제의 내일4. 참고문헌1. 들어가며...일본에서 처음 천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7세기경 야마토 정권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태양신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의 후손인 진무 천황이 구주로부터 정복을 시작하여 기원전 660년 야마토 지방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처음 천황으로 즉위하였다고 한다. 천황이란 칭호는 중국의 도교와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도교에서의 천황은 우주의 최고신 또는 북극성의 칭호였다. 야마토 정권이 이러한 칭호를 채택한 것은 군주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이렇듯 일본사 초기의 천황은 재판권과 징세권을 소유하는 중앙집권체제의 정점에 선 군주이면서 종교적으로도 최고의 자리에 있는 국가의 중심적 인물이었다. 하지만 고대 국가 후반기인 9-13 세기에 무사가 출현하면서 천황은 상대적으로 실제적인 정치적 권력을 잃고 다만 종교적 대표자로서의 기능만을 행했다.중세 막부시대에는 장원이 생기면서 무사 계급, 무사 단위가 나타났고, 그 들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천황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다이라 정권은 1156년, 헤이안 천궁을 야습하여 무사 시대를 열었고 12세기말 미나모토 세력이 다이라 정권을 밀어내면서 무사단위로는 새로운 사무라이 정권을 성립한다. 미나모토는 천황으로부터 장군의 직책을 임명받음으로써 막부시대를 열었다. 이렇게 자리잡은 막부는 몽고의 침입에 따른 막대한 군사비 지출을 위해 백성들을 수탈함으로써 민심의 반발을 사게 되고, 후반부의 가마쿠라 막부가 이로 인해 흔들리자 다시 천황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권력을 쟁취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얼마가지 못하고 무로마치 막부에 의해 다시 흡수된다.또한 14세기에는 천황가가 남북으로 갈라져 약 60년간 항쟁했던 내분이 있었는데 이것은 천황의 권위에 치명적인서 천황제와의 문제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새 헌법은 GHQ(General Headquarters of the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가 작성한 이른바 맥아더 초안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이 문서는 1946년 2월 13일에 일본측에 넘겨졌는데 이 문서가 만들어지기 전에 일본측이 먼저 ‘헌법문제조사회’에서 만든 ‘정부에 기초한 헌법개정안에 대한 일반적 설명’을 GHQ에 제출했다. 그 것은 천황의 위치를 메이지 헌법의 규정과 기본적으로 바꾸지 않는다는 방침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그 것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일본국이 천황에 의해 통치된다는 사실은 일본국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이어져 온 것으로, 이 제도를 유지하려 하는 것은 우리 국민 대다수가 가지는 확고부동한 신념이라 믿는다. 따라서 개정안은 …… 천황이 통치권을 총괄하여 행사할 수 있는 제도를 보유하는 것으로 안다.이 ‘정부에 기초한 헌법개정안에 대한 일반적 설명’에 대해 GHQ의 민정국장(Government Section) 휘트니 (C.Whitney)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일전에 여러분께서 제출하신 헌법개정안은 최고사령관이 자유와 민주주의의 문서로서 받아들이기가 전혀 불가능한 것입니다. ……최고사령관은 천황을 전범으로서 조사해야만 한다는 타국의 압력으로부터 ……천황을 지키려는 결의를 굳게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최고사령관이라고 해도 만능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최고사령관은, 이 새로운 헌법의 여러 규정이 수용될 수만 있다면 실제로 천황은 무사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그리하여 결국 ‘정부에 기초한 헌법개정안에 대한 일반적 설명’은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새 헌법은 맥아더 초안에 의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맥아더 초안은 「전문」에서 “이제 인민의 의사인 주권을 선언하니, 국정의 권능은 인민으로부터 나오고 국정의 권력은 인민의 대표자에 의해 행사된다.” 라고 언급하였다. 또한 제 1조에선 “을 바탕으로 황실제도를 논하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먼저 일반 국민과는 다른 예외 규정이 있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곧 국민을 상대로 한 일반법과 동일한 원리를 황실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었다. 예를 들면 민법 제 968조에 태아의 상속권을 인정하고 있으므로 태아 상태인 황자에게도 황위계승권을 인정하라는 주장, 황족남자의 혼인이 황실회의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 헌법 제 24조 “혼인은 양성의 합의에 의하여만 성립”된다는 규정에 위배된다는 비판, 그리고 황족의 황적이탈이 황실회의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자유의 원리에 위배된다는 비판 등인데, 이들은 모두가 신 헌법적인 감각에 바탕을 둔 것이다. 또한 신 헌법이 “국회는 국권의 최고 기관”이라고 규정한 이상, 황위 계승 순위의 변경이나 섭정의 존폐 등도 황실회의에서 정할 것이 아니라 국회의 승인 또는 의결을 거쳐야 한다는 주장과 황실회의의 의장도 국회의장이 맡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정부는 천황은 국가의 상징이기 때문에 황족은 예외적일 수 있다는 등의 답변을 했지만 석연치 못한 것이었다.황실 전범에 대한 논의 중에서도 신 헌법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여성 황족에게도 황위계승권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의견과 천황의 퇴위?양위 규정을 둘러싼 논의였다. 먼저 여성 황족의 황위계승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황실 전범의 규정이 신 헌법의 남녀 평등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하였다. 한 예로 전후에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되고 나서 최초로 실시된 1946년 4월의 총선거에서 39명의 여성의원이 탄생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인 일본사회당의 니즈마 이토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이 황실전범에 의한 황위 계승만이 남계남자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크게 모순된 것이 아닌가? …… 이번 신 헌법으로 이제 여자도 겨우 사람 대접을 받게 되었으니, 이 남계남자라고 하는 문구를 삭제해 줄 수는 없겠는가?이에 대해 가나모리 국무대신은 역사상 황통이 남계에 의해 계승되어는 '빚을 지고 있다'는 개념도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빚은 서양적인 의미에서의 'obligation'이 아니라 의 즉, '같은 시대에 포함되는 공동채무의 거대한 망상조직에서 그 자신의 위치를 인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은혜이다. 은혜란 윗사람으로부터 받게 되는데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나는 누구에게 의무의 부담을 지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자신과 동등한 사람에게 은혜를 입을 경우 일본인들은 불유쾌함과 열등감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데 이때 일본인이 표현하는 용어는 '나는 모욕을 받았다','나는 감사한다.'라는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최대의 은혜란 천황으로부터 입은 것이며, 그 아래에 아이들이 부모에게 지는 은혜가 있다. 모든 사람은 이것을 갚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은혜를 입는 것은 행복한 일이기도 하나 그것은 곧 부채이기 때문에 반드시 갚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보답은 천황에 대해서는 충으로, 부모에 대해서는 효로 표현된다. 이러한 의무는 강제력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그것은 제한된 관계에서만 적용된다. 일본 군인의 용감성은 바로 천황에 대한 충성심의 표현인 것이다.그런데 은혜에 대한 의무는 의리와 같지는 않다. 의무는 가까운 육친의 세계에서 조국과 천황에 대해 지는 것이며, 태어나자마자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의리는 '본의 아니게 되는 것',달리 말하면 계약관계의 이행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일본에서 '의리를 갚는다'는 것은 온갖 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온갖 종류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말한다. 일본에서 '의리를 지키지 않는 인간'이라는 지칭은 그 사람에 대한 가장 큰 모욕이다. 의리를 지키는 것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다. 이름에 대한 의리는 자기 위치에 맞는 예절을 다하는 것에서 직업적 명성을 드높이는 것,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 복수를 행하는 것 등 다양한 형태로 표현된다. 일본인들이 모욕당하는 것을 그토록 싫어하고 패배를 그토록 두려워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자 천황에 대한 열렬한 지지 기반이 조금씩 풍화되어 가고 있는 징후가 보이지만,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제도를 없애도 좋다는 데까지 지지 기반이 가라앉을 조짐은 없다. 패전의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일본인들은 천황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오늘의 경제 대국을 이루었다고 믿고 싶어한다.19세기 말 일본 근대화를 단기간 내에 실현시킬 수 있었던 기적도 천황을 구심점으로 한 노력의 결과라고 평가한다. 일본인들은 천황의 전쟁책임 여부에 대한 관심보다는 항전파들이 일억옥쇄를 무모하게 주장하고 나섰을 때, 이른바 성단으로 무고한 희생을 막아준 역할을 더 평가하고 있다. 성단의 신화는 미화되어 전승되고 있다. 맥아더 사령관과의 첫 회견에서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국민을 도와달라" 고 했다는 이 신화는 증폭되어 왔다.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은 장차 유사한 경우가 다시 재현될 경우, 정치가들의 폭주를 견제해 줄 수 있는 마지막 권위는 역시 천황일 수밖에 없다는 공통된 인식을 갖고 있다.다. 정치 외교적 측면에서의 천황*전후 초기의 국내외 정치?외교적 상황과 천황과의 관계1945년 8월 10일 일본 스즈끼 내각은, 7월 26일의 포츠담 선언에 대해 천황의 국가 통치 대권에 대한 변경 요구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양해하에 선언을 수락한다 는 의사를 전달하였다. 연합군 측은 11일 천황 및 일본국 정부의 국가 통치의 권한은…연합국 최고사령관의 제한 하에 두기로 한다 고 회답을 보내왔다. 이 회답을 둘러싸고 내부에서 격론이 벌어진 끝에 14일 어전 회의에서 천황의 결정으로 무조건 항복이 정해졌다. 이미 전쟁의 장래는 일말의 희망도 없는 단계였으나 국체 유지 를 둘러싸고 이렇게 분규한 것은 천황 지위의 보존이 지배 계급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의미함과 동시에 그들이 천황제의 지배체계를 계속 유지하려고 하고 있었음을 가장 명백하게 말해주고 있다. 항복의 경위는 국민에게는 철저히 숨겨져 있었다. 그래서 일본 국민들은 8월 15일 정오, 천황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돌연 항복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어졌다.
    인문/어학| 2006.11.05| 20페이지| 1,000원| 조회(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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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보기술] 웹에 의한 유통구조의 변화
    1. 소비자 변화소비자의 변화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들에서는 정보기술을 전자통신을 통한 웹(web)이나 전자우편, Gopher, FTP등과 관련된 기술로 정의하고, 이러한 것들에 대한 소비자들의 태도, 사용형태, 구매관련 행동들을 연구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분야에서 가장 대표적인 연구는 인터넷 사용자들에 대한 서베이를 이용한 실태조사라고 할 수 있다. 근간에 여러 기관들에서 많은 조사들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비교적 체계적인 연구는 Hoffman 에 의하여 행하여졌다 (Hoffman, Kalsbeek, and Novak 1996). 이들의 연구에서는 인터넷의 사용형태에 관한 조사를 비롯하여, 시장세분화를 시도하였으며, 인터넷사용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발생할 수 있는 방법론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이 제안하는 세분화집단은 인터넷사용 정오로 3집단(high, low, never)으로 구분하여 이중에서 인터넷을 조금이라도 사용하는 6 개의 이중에서 인터넷을 조금이라도 사용하는 6개의 집단에 대하여 크기와 인구통계적 특성, 사용 하는 방식, 컴퓨터 경력 등을 조사하였다. 국내에도 신문사와 전문잡지사를 중심으로 인터넷 사용 자의 서베이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외국의 경우에는 인터넷 사용자에 관한 전문 통계 관련 사이트 가 나타나고 있다.(http://www.netree.com/netbin/ intemetstats; http://www. cc.gatech. edu/gvu/user ~surveys/). 한편 인터넷이나 웹에 대한 일반적인 사용상황뿐 아니라 특정 정보기술을 얼마나 수용하고 언제 수용할 것인가와 관련된 연구도 소비자들의 변화속도에 따라 마케팅활동의 변화속도 및 단계를 결 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조직수준에서의 연구들은 비교적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개인수준에서 소비자들의 태도와 향후수용에 관한 연구는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적절한 연구방법이나 조사론의 개발도 필요하다 (Davis 198다. 예를 들어 ERP (enterprise resource planning)와 같은 정보시스템이 지향하는 업무 프로세스들의 변화이다. 첫째는 연구들은 서베이를 통하여 기업이나 조직에서 정보기술을 이용하는 분야와 이들에 대한 자체 평가, 만족도에 대한 연구이다(Rangaswamy 1997; Davis 1989), 또한 인트라넷과 같이 특수한 정 보시스템의 활용에 관한 연구들도 있다 (Lemeret.al 1996). 인터넷이 사용되고 있는 사업들에 대한 서 베이 보고서도 여러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http://www.activmedia.com/Trends.html). 정보기술의 역할이 단순히 경영의 한 분야의 활동을 원활히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변화의 측면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연구들도 있다. Mata 와 Fuerest (1995)는 경쟁적 우위를 유지하는 관점에서 정보기술을 연구하였다.이 연구에서 단순한 기술우위성은 쉽게 다른 경쟁자들에 의해서 모방되거나 추월당할 수 있으므로 중요한 것은 정보기술의 조직화된 관리에 의해서 우위를 지키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Earl(1989)도 정보기술은 어느 한 분야에서 기술적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 니라 전사적인 전략을 구축하고 이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자산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두번째 분야의 연구주제들은 전자우편이나 정보기술등을 통하였을 경우에 의사소통 당사자들간에 영향력이 변화되는 것에 관한 연구들과 구체적으로 전자통신등을 사용할 때 의사소통방법에 관한 연구들이다. 의사소통 당사자들의 영향력에 관한 연구들에서는 컴퓨터 통신의 비인적요소에 대한 검증을 하고 자 하였다. 기존의 의사소통에서는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전문가등, 의견선도자가 의사소통을 선도 하여 설득에 더 영향력을 미친다고 말려져 있었다 . 그러나 컴퓨터 등을 이용한 의사소통에 있어서는 사용자들의 사회적인 지위나 능력의 영향력이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의사소통자들의 영향력이 모두 동일하게 된다고도 하고 ,또 다른 연구에서는 정보나 화상까도 한다. Malone등(1987, 1989)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개효과가 더 커지게 되고, 시장에 새로운 진입자등 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게 됨에 따라 중개효과가 더 커지게 되고, 시장에 새로운 진입자등이 들어 오는 것을 허용하게 됨에 따라 시장에 의해 거래사 이루어 질 것으로 보았다. Steinfield(1995)는 정 보발달로 인하여 기업의 기능들을 자유경쟁처럼 완전 독립적인 외부기관에서 구매하는 것이 아니 라 오히려 기존에 관계를 맺고 있던 외부기관들이 서로 더욱 상한 의존적인 관계로 발달할 것이라 고 예측하고 있다. 비슷한 개념중의 하나가 가치증가형 제휴이다. 물론 가 치증가형 제휴는 반드시 정보기술의 발전에 의해서 출현된 형태는 아니지만 기업이 필요한 기능들 을 시장에서 독립적인 기관에서 전적으로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구하기는 하지만 이들 기관들과 긴밀한 유대를 이룬다는 것이다.또한 Nouwens 와 Bouwman (1996)은 정보기술이 산업내의 가치사슬개념에 입각하여 정보기술이 관 련회사간의 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조사하였다. 그들은 산업의 구조가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기업들간의 관계로 형성된다고 하며 정보기술에 따른 넷웍 형태의 시장구조의 등장을 예 견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 중소기업의 넷워킹 전략을 비교한 박효식, 김기찬(19940의 연구에서도 넷워킹을 우리 나라 기업의 새로운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정보기술과 직접연관을 지워지지 않았 지만 oliver(1990)는 여러가지 형태의 관련조직들을 결정하는 요소들을 제시하고 있다. 마케팅에 있어서 이러한 새로운 경쟁의 상황을 예측하고 이에 따라 경쟁에서 우위만을 위한 마케 팅 이론들은 수정이 필요하다. 즉 앞에서 언급한 기업업무의 재편에 따라 기존의 마케팅관리의 흐 름이 각 관련 분야로 나누어지며, 이러한 마케팅의 부분들이 반독립적인 형태로 존재하고 기존의 개념으로는 경쟁 업체였던 조직들과 업무를 통합관리하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들이 필요하 게 될 것이다. 즉 마케의 웹사이트를 조사하여 이들이 제공하는 업무를 촉진, 정보제공, 업무촉진(promotion, providing, processing)으로 나누고 이들이 웹을 이용하지 않을 때보다 소비자가 가치를 어떻게 높혀 주었는가- 예를 들어 시간적정성, 고객특화, 물적접근용이, 감각적 기쁨(timely, custom, logistic, sensational) 로 구분하였다. 기존의 마케팅의 4P개념으로 보면, 판촉, 제품, 유통 및 수주 등에 모두 웹의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마케팅 패러다임 혹은 개념적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hoffman and Novak 1996; Strangelove 1994). 본고에서는 웹등으로 대표되는 사회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정보기술과 기업내부의 효율성제고를 위한 정보기술을 모두 고려하여 마케팅활동을 [표 3]에 나타나 있듯이 크게 5가지로 나누어서 설명 하고자 한다. 물론 새로운 마케팅영역 틀을 찾아내어 주제별로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새 로운 마케팅개념의 재정립이 아직 덜되어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마케팅영역의 틀을 마련하는 것은 시대조류에 따라 나타나는 정보기술의 특성에 의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기존의 마케팅활동을 중심으로 변화하는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영역의 구분은 추후 연구에 맡기고자 한다. [표 3] 마케팅활동 변화에 대한 연구들 조사/정보시스템 제품 가격1. 조사 / 정보시스템 정보기술의 영향을 직접적인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분야는 시장조사와 마케팅정보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Blattberg et.al 1994; 박찬욱 1996a). 구조적인 측면으로는 시장조사라는 개념이 마케팅정 보시스템의 한 구성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과거 시장조사 분야 중에서 크게 바뀌게 될 부분으로 는 자료수집방법과 자료 분석방법의 변화이다. 자료수집방법 분야에서는 소비자대상의 조사가 기존 의 서베이방식에서 스캐너패널, POS, 또는 카드방식으로 바뀌고 있으며, 매체조사도 온라인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더 나아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판단하기가 힘들어진다고 한다 (Malone et.al 1989). 또한 소비자 가 비인적 의사소통을 통하여 자신에게 맞는 제품인지를 알기 힘들기 때문에 정보화가 추진될수록 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은 규격화되고 표준화된다는 것이다. 소비자의 정보탐색이 제품 성공여부에 중요하면 할수록 정보검색 및 제품의 표준화의 타당성을 찾을 수 있다. 위와 상반되는 주장은 상품의 속성이 소비자 개개인의 선호에 맞추어져서 개별적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정보화를 통하여 일대다(一對多)의 대중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각 개인들의 요구에 맞는 촉진활동을 벌일 수 있게 된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소비자는 자신의 개성에 맞는 표준화되지 않은 자신만이 선호하는 제품을 정보기술의 발달의 도움을 받아서 쉽게 찾게 된 다. 더 나아가서, 산업재 마케팅 등에서 현재 적용되고 있는 것이지만, 구매자가 제품의 개발에 직 접 참여하여 디자인과 특성을 정해주는 기법들이 소비재 시장에도 적용될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을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발달과정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정보 기술의 초기단계에서는 정보검색도구가 아직 발달이 잘 되어 있지 않고, 제공할 수 있는 제품에 대 한 정보의 양이 한정되므로, 상품의 표준화가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그래픽정보가 보편화되어 정 보가 상대적으로 풍부해지고, 정보검색도구가 발달하고, 정보중개상등이 자신들의 소비자를 위하여 일정수준이상의 제품을 먼저 선별하여 제공한다든가, 자신만의 고유한 선호를 고집 하는 소비자집 단이 커지게 됨에 따라 비표준화된 제품이 더 많이 늘게 될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주장들이나 관련 주장들에 대한 이론적인 검토나 실증적인 연구들이 필요할 것으로 보여진다. 기업의 입장에서 필요한 연구들로는 생산계획이나 제품디자인을 하는 시스템과 마케팅시스템을 연결시켜주는 CIMS (Computer Integrated Marketing System)등의 개발이다 (Blois 1985). 제품력의 평가요인에 다.
    경영/경제| 2002.06.08| 12페이지| 1,000원| 조회(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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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의 불교 수용
    삼국의 불교 수용에 대하여고구려에는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에서 승 순도가 불상과 불경을 전하였고,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에 동진으로부터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하였으며, 신라는 이보다 늦은 눌지왕(417-458) 때 고구려로부터 승 묵호자가 일선(지금 선산) 지방 모례의 집에 들어와 전도한 뒤 소지왕(479-500) 때 다시 고구려에서 승 하도가 와서 전도하였으나, 법흥왕 14년(572)에 이차돈의 순교가 있은 후 비로소 공인되었다.1.고구려의 불교 수용가장 먼저 불교을 받아들인 고구려의 불교수용이다.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에 전진에 불교가 들어왔다고 했으나, 사실 이보다 이른 시기에 들어온 것이다. 동진의 승려 지도림이 고구려 고승에게 글을 보냈다는 내용이 양고승전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단지 부처의 가르침을 그냥 중생들에게 전하기 위해 불교를 수용하지는 않았다. 그 당시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 알 수 있다. 소수림왕 당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종래의 민간 신앙을 대체하고 백성들을 한데 묶을 사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불교가 비교적 쉽게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고구려에는 민간차원에서 동진으로 부터 들어온 불교(격의불교)와, 국가적인 차원에서 전진으로부터 들어온 불교가 있었는데, 고구려 불교를 대표하는 것은 아무래도 국가적인 차원에 지원을 받는 불교일 것이다. 도안과 승랑 같은 학자들을 통해 수준 높은 삼론학이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불교는 대중과 함께 할 수 없었기에 쇠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구려 말에 연개소문의 도교 숭상 정책이 고구려의 불교를 쇠퇴의 길로 이끈 이유가 될 것이다.2.백제의 불교 수용다음으로 백제의 불교수용이다.백제의 불교 수용은 침류왕 원년(384)에 동진에서 온 인도 승 마라난타가 전했다고 한다.백제는 육상으로는 고구려 때문에 해상으로 동진으로 부터 들어 왔다.백제도 고구려와 마찬가지의 배경으로 불교 수용을 이해하면 된다. 당시 왕권 강화의 목적으로 수용했던 것이다. 백제에는 "소도"라는 지역이 있다. 백제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세워진 국가이다. 소도는 철기 문화에 대해 청동기 문화를 지키려는 일종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것을 누르는 새로운 사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불교를 수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백제의 불교는 동진을 통해 들어왔기에 전진의 불교와 성격이 조금 달랐다. 이로 인해 고구려와 불법을 놓고 전쟁을 벌인 일도 있다.그리고 백제의 불교는 해상을 통해 일본으로 전파되었다.성왕(552년)은 일본에 석가상, 관음상, 미륵상 그리고 많은 불경을 보내면서 “이 법은 여러 법들 속에서 가장 뛰어나 주공 공자도 오히려 알지 못하며 한없는 복덕이 생겨나고 위없는 보리를 성취할 수 있다”고 전하였다. 일본의 지배세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일부 인사들이 불상을 안치하고 받들었다. 이것이 일본 불교의 시작이었다.일본의 선광사연기에는 “인도에서 도닦기를 마친 미타여래는 백제국으로 날아와 왕궁의 내전 위에 몸을 낮추고 밝은 광명으로 대궐 안을 비추었다. 임금이 놀랐고 신하들은 얼이 빠졌다. 이 때 여래는‘그대들은 놀라지 말라. 그대들을 제도하고자 이 나라에 현신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백제왕은 밤낮으로 분발하여 신심을 냈다. 임금과 왕비와 신하들은 온갖 정성을 다해 별도로 대가람 만들어 미타불을 모셨다. 비구들은 주야로 독경하였으며 임금과 신하들은 바깥에서 구름처럼 모여 아침저녁으로 염불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 기록은 성왕이 사비로 도읍을 옮긴 뒤의 사정을 전해준다고 추정된다고 한다.그리고 성왕이 신라와의 전투를 벌이다가 죽자, 그의 아들 위덕왕은 “아버지를 받들기 위해 출가 수도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신하들은 “그렇다면 백성을 대신 출가시키십시오”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백명의 백성을 출가시켰다. 위덕왕은 부왕의 뜻에 따라 일본에 많은 승려와 불상과 가람건축과 기와굽는 기술자를 보냈다고 한다.또, 성덕태자는 불교를 반대하는 세력을 죽이면서까지 대왕사를 창건하고 곳곳에 가람을 세웠다. 위의 많은 일화를 통해 백제의 불교 얼마는 융성했는지는 알 수 있다.3.신라의 불교 수용마지막으로 신라의 불교 수용이다.신라는 지리적으로 불리한 곳에 위치했기 때문에 고구려나 백제 보다 불교 수용이 약 50에서 100년 정도가 늦다. 그러나 '묵호자'와 '아도'의 일화를 보면 오히려 고구려나 백제 보다 일찍 들어 왔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이는 신라가 문화적 열등감을 극복하려고 조작한 것일 수 도 있다. 그러나 불교 수용 단계에서 고구려보다 그리 늦지 않은 시기에 많은 갈등을 겪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신라는 법흥왕 때 와서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불교를 수용하였다. 법흥왕은 무속 신앙과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이차돈의 순교을 통해 불교를 국가이념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그는 불교 이념으로 신라 사상계를 통일하였다. 이차돈은 최초의 순교자였으며 법흥왕은 불교를 이용해 새로운 통치이념을 만들어냈다. 이와 함께 왕권을 강화하여 무속신앙을 숭배하는 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4.삼국의 불교 수용의 특징삼국의 불교 수용이 공통점은 왕실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이고, 신라의 경우도 귀족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강력한 의지에 의하여 공인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삼국의 왕실이 불교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종래의 원시 종교를 대신하여 불교가 고대 국가 새로운 통치이념이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기존의 시대를 지배하는 이념이나 사상 등에 대립될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불교를 수용한 왕실이 다시 이를 진흥시키는 데 힘써서 많은 사찰을 건립하고, 토지를 기증하는 등 불교 진흥에 힘썼다. 그리하여 삼국의 불교는 종교로서의 구실뿐 아니라 외국과의 문화 교류 및 정치, 외교, 철학, 예술 등 고대 문화 발전에 공헌하였고, 호국 사상과 왕권 강화에 기여하였다.
    인문/어학| 2002.05.13| 3페이지| 1,000원| 조회(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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